(제72강) 유라굴로 풍랑을 피하는 비결! (행 27:1-26)
오늘 본문은 바다에서 일어난 풍랑의 이야기입니다. 성경에는 바다의 폭풍이 일어난 기사들이 몇 군데가 나옵니다. 성경이 바다의 폭풍이 일어난 기사를 기록한 것은 폭풍이라는 자연현상을 보도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이 사건을 통해 중요한 하나님의 손길을 우리들에게 나타내고자 하심입니다.
하나는 요나가 탄 배가 만났던 풍랑입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예언가요, 당시 죄악의 도성 니느웨에 가서 하나님의 심판과 회개를 외치도록 사명을 받은 하나님의 종이었습니다. 니느웨 성은 앗수르 제국의 마지막 서울로 티그리스 강 동편 언덕에 있는 성입니다. 그 성에 죄악이 관영하여 하나님의 심판이 불가피하게 되자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기회로 멸망의 경고와 구원의 소식을 백성에게 전한 대변자로 요나를 택하여 보낸 것입니다.
그런데 요나가 생각해보니 니느웨는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이교도들이 살고 있을 뿐 아니라 그들의 악행으로 보아 요나의 전도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특히 원수의 나라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폭삭 망해 버렸으면 좋겠다'고 오히려 속으로 바랬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그 반대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고 도망을 갔습니다. 그 도망자가 탄 배가 풍랑을 만난 것입니다. 요나서에 보면 '하나님께서 친히 바람을 보내사 풍랑을 대작하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인하여 요나가 탄 배는 큰 손해를 보았습니다. 그 배는 무역선인데 많은 상품들을 다 바다에 던져 버리고 그곳에 탄 사람들이 초죽음이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아니하고 순종하지 않는 요나와 같은 성도와 가깝게 하면 덩달아 손해를 보고 고통을 받았습니다.
성경에 영적인 원리는 요나와 같은 사람과 같이 있으면 손해를 보고 고통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요셉과 함께하는 자는 다 복을 받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신앙이 좋은 이웃과 교제해야 영적으로 살고 축복을 받게 됩니다. /믿/
또 하나의 풍랑의 사건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탄 배가 갈릴리 바다에서 풍랑을 만났습니다. 이 폭풍을 '광풍' 즉 '미친 바람'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바람이 갑자기 미친 것처럼 예측할 수 없게 돌풍이 불어가지고 미친 듯이 나부낍니다. 그래서 배가 기우뚱거릴 뿐만 아니라 그 작은 배에 물이 가득 차게 되어버렸습니다. 이때 제자들은 너무 피곤하셨기 때문에 그 배의 고물에 잠들어 있는 예수님을 깨우면서 '주여, 주여 우리가 다 죽게 되었나이다' 당황해서 어찌할 바를 모릅니다.
이때 눈을 뜨신 예수님께서 그 광풍과 성난 물결을 '잔잔하라!'고 꾸짖자 잔잔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바다를 꾸짖으신 주님께서 이번에는 제자들을 꾸짖으셨습니다. 왜 꾸짖었습니까? '너희의 믿음이 어디 있느냐?' 믿음이 없다고 꾸짖었습니다. 제자들이 풍랑이 일어나니까 그 있었던 믿음이 다 풍랑과 함께 날아가 버렸습니다. 여러분, 믿음이 중요합니다. 믿음을 굳게 지키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아멘!/ 그리고 본문에 나오는 유라굴로라는 광풍입니다. ◀제목 소개!▶
오늘 본문은 사도바울이 복음을 전했다는 죄로 당시 로마의 총독에게 재판을 받기 위해 죄수의 몸으로 배를 타고 가고 있습니다. 그 배의 이름은 알렉산드리아 호였으며 그 배 안에는 선주와 선장 그리고 바울을 수감해 가지고 데리고 가는 백부장과 군인들이 타고 있었고 그 다음에는 여러 여행객이 타고 있었으며, 선원들도 타고 있었습니다.
주님은 바울이 감옥에 갇혀 있을 때 홀로 오셔서 '네가 로마로 갈 것이다. 나를 위하여 가이사 앞에 서야 하리라' 그 주님의 약속은 마침내 이루어지게 됩니다.
▶1절 "우리의 배타고 이달리야로 갈 일이 작정되매 바울과 다른 죄수 몇 사람을 아구사도대의 백부장 율리오란 사람에게 맡기니"
죄수로서 바울은 이제 호송되어 가는 길입니다. 여기 다른 죄수들과 함께 간다고 했는데 '이 다른 죄수들은 어떤 사람들이냐' 하면 각 지방에서 흉악한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이요, 사형언도를 받은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왜 그들을 데리고 가느냐? 하면 로마인들이 원형 경기장에서 짐승과 싸우게 하고 검투사들의 희생물이 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니까 로마 사람들의 잔인한 향락의 대상물로서 죽어가야 할 사람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각 지방마다 죽음을 앞에 둔 죄인들을 로마로 호송해서 거기서 얼마동안 살게 하면서 검투사가 되게 하기도 하고, 짐승의 밥이 되게도 하면서 그렇게 로마 사람들은 즐겼습니다.
바울이 이런 흉악한 범죄자들과 함께 묶여서 배를 타고 갑니다. 겉으로 보기엔 좀 그렇습니다 만은 지금 바울이 바로 로마를 향한 하나님의 복음이 수출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위대합니다. 비록 파송하는 교회도 없고 전송해주는 교인들도 없고 지참금을 가진 것도 아니고 쇠사슬에 묶였지만,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는 쇠사슬에 묶인 바울과 함께 복음이 로마로 들어가는 순간임을 기억해야 됩니다.
▶2절 "아시아 해변 각처로 가려 하는 아드라뭇데노 배에 우리가 올라 행선할새 마게도냐의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도 함께 하니라"
여기서 '우리'는 바울과 사도행전을 기록한 사람 누가와 그리고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아리스다고입니다. 최소한 세 사람 이상이 바울과 함께 하고 있습니다.
감옥에서 바울은 혼자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로마로 갈 때에 감옥 밖에서 바울을 기다리던 사람들이 바울과 함께 로마까지 동행하게 됩니다. 왜 이 두 사람이 따라가는가 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선교에 생명을 건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사명은 로마에 복음을 전하는 것이 바울의 사명이요. 그러나 누가와 아리스다고의 사명은 바울을 돕는 것이 그들의 사명이었습니다. 그 사명 때문에 바울을 따라가고 있습니다.
아리스다고 그는 누구인가? 그는 마게도냐 지역의 데살로니가 사람입니다. 아마 그는 바울의 제2차 전도 여행 때에 복음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 중에 어떤 사람 곧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도 권함을 받고 바울과 실라를 좇으나"(17:4)고 했습니다. 제3차 전도 여행 시 바울이 에베소에서 목회할 때 그와 동행했으며 옥중에 투옥까지도 되었습니다(19:27).
그는 복음을 받은 이후 한 번도 바울 곁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최후의 로마까지도 동행했습니다. 전승에 의하면 '로마에서 네로에 의하여 순교 당했다'고 합니다. 사명자는 어려운 고난의 때 동참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사랑이요 우정이요 사명입니다.
▶3절 "이튿날 시돈에 대니 율리오가 바울을 친절히 하여 친구들에게 가서 대접 받음을 허락하더니"
로마 백부장이 바울을 잘 봤습니다. 저 사람은 정말 죄인 같지 않은데 끌려간다고 생각을 해서 바울을 잘 보살펴 준 것 같습니다.
▶4절 "또 거기서 우리가 떠나가다가 바람의 거스림을 피하여 구브로 해안을 의지하고 행선하여"
이때 계절적으로 가을이 되었기 때문에 풍랑이 자주 일어납니다. 그래서 연안이지만 상당한 폭풍이 있었으므로 조심해서 배를 몰고 가야 할 입장이 된 것입니다.
원래 배는 육지를 뚝 떨어져 가야 되는데 풍랑이 심함으로 해안선을 따라 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상당히 위험한 시기에 떠난 것입니다.
▶5-6절 "길리기아와 밤빌리아 바다를 건너 루기아의 무라성에 이르러 거기서 백부장이 이달리야로 가려하는 알렉산드리아 배를 만나 우리를 오르게 하니"
알렉산드리아에서 오는 배를 만나서 로마로 가려고 했다는 얘깁니다. 알렉산리아는 아프리카 북쪽에 있는 애굽에 두 세 번째 큰 도시가 알렉산드리아인데 전체 로마 정부로서 보면 애굽은 곡창지대이고 특별히 알렉산드리아 부근 평야에서는 밀이 많이 생산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알렉산드리아에서 오는 배라는 것은 로마로 밀을 싣고 가는 화물선입니다. 곡식을 실은 화물선이요 그래서 아주 큰배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7-8절 "배가 더디 가 여러 날 만에 간신히 니도 맞은편에 이르러 풍세가 더 허락지 아니하므로 살모네 앞을 지나 그레데 해안을 의지하고 행선하여 간신히 그 연안을 지나 미항이라는 곳에 이르니 라새아성에서 가깝더라"
배가 '더디 갔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역풍이 부니까 아무리 노력을 해도 바람 때문에 더디 갈 수밖에 없어서 날짜를 훨씬 어기고 여러 날 만에 아주 간신히 미도 맞은편에 이르렀는데, 풍세가 더 허락지 아니하므로, 8절에 또 간신히 죽을 고생을 해서 미항이라고 하는 곳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미항 이란 아름다울 미(美), 항구 항(港)자 해서 아름다운 항구라 그런 얘깁니다. 산으로 둘러싸여서 아주 안전하고 경치가 아름답고 자연조건이 너무너무 좋은 곳이라고 그럽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곳의 약점은 도시가 없고 산으로 둘러싸인 그러한 항구요 사람도 많이 살지 않은 쓸쓸한 항구다 그런 얘깁니다.
그런데 문제는 미항에서 겨울을 보내고 내년 봄에나 로마에 가야 되는데 배에 탄 백부장과 선주와 많은 사람들은 이 미항에서 겨울을 지나고 싶지가 않았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미항에서 겨울을 난 후에 떠나자고 했습니다. 그러자 선주와 선장은 아니라고 하면서 바로 떠나자는 것입니다.
사실 미항이란 항구는 적은 항구로 시설 자체가 엉성했습니다. 그래서 그곳에서 겨울을 보낸다는 것은 선장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바라는 마음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쉬기를 바랐던 곳은 뵈릭스 항구였는데 그곳은 유흥장소, 놀이시설로 고급호텔이 즐비하게 들어선 곳입니다.
▶9-11절 "여러 날이 걸려 금식하는 절기가 이미 지났으므로 행선하기가 위태한지라 바울이 저희를 권하여 말하되 여러분이여 내가 보니 이번 행선이 하물과 배만 아니라 우리 생명에도 타격과 많은 손해가 있으리라 하되 백부장이 선장과 선주의 말을 바울의 말보다 더 믿더라"
여기 '금식하는 절기'는 대 속죄일입니다. 대 속죄일은 유대의 달력으로 따져서 7월 10일입니다. 이로부터 한 주일간이 대 속죄일의 절기가 됩니다. 이 7월 달은 우리들의 달력으로 하면 거의 겨울철인데 이때에는 지중해에 예외 없이 광풍이 자주 불어오곤 하였습니다.
그래서 배가 움직이기에는 아주 위태한 때였습니다. 바울이 탄 이 배는 276명을 태우고 화물도 많이 실은 큰배입니다. 여기에는 선장도 있고 선주도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백부장 율리오가 그 배를 책임지고 로마까지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책임자인 율리오 백부장은 전혀 믿음 없는 사람입니다.
바울이 말합니다. '여러분 지금 벌써 파도가 치고 바람이 많이 불어서 지금까지 미항에 온 것도 기적같이 왔습니다. 그러니 이제 한 겨울 여기에 남아 있다가 봄에 가는 것이 생명도 보존하고 물건도 버리지 않을 수 있는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왜 바울이 미항에서 겨울을 보내고 떠나자고 했습니까? 그의 영적 통찰력 때문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영의 분별력이 있습니다. 특히 바울은 능력의 종입니다. 그는 영적으로 보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선주와 선장이 바로 떠나자고 한 것은 그들의 육적 경험에 의한 판단이었습니다.
바울의 영적 통찰에 의하면 겨울철임에도 불구하고 항해를 감행할 경우 큰 풍랑을 만나 배와 그 안에 실은 하물, 그리고 선객들의 생명에 막대한 타격이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큰 소리로 '여러분이여! 내가 보니 이번 행선에 화물과 배만 아니라 우리의 생명에도 타격과 손해가 있으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선장이나 선주는 자신들의 경험과 노련한 기술이라면 겨울항해로 어떤 풍랑을 별문제가 없는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우린 여기서 영적인 분별력과 육적 판단력을 잘 구별해야 합니다. 솔직하게 말하면 목사는 세상에 어떤 사업 경영에 있어서 별로 아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기도하고 영적통찰력으로 관철하면 '저것은 안 하는 게 좋겠다'는 결론이 나올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저럴 때는 저렇게 하면 안 되는데' 라는 판단이 설 때가 있습니다. 놀라운 것은 저 개인의 경험에 의하면 그런 경우 그 사업이나 그 일이 잘 안 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세상일이 자기 경험이나 확신만으로 성취되고 성공하는 것은 아닙니다. 제 아무리 세상 경험이나 지식이 풍부하고 경륜이 하늘보다 높다 할지라도 영적인 통찰력 앞에 머리 숙일 줄 아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인도와 축복을 받게 됩니다. /아멘!/
사실 미항에서 떠나면 손해 본다고 말했던 바울은 보잘 것 없는 전도자였고 로마 황제 앞에 재판을 받기 위해 호송되어 가고 있던 죄수였습니다. 그가 만약 지위가 높은 사람이었더라면 이야기는 달라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죄수였고 초라한 예수쟁이 전도자였기에 그의 말은 묵살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소리가 바울의 가슴속에 가득히 들어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서 바울의 통찰력과 예언은 한날 죄수의 실없는 넋두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소리였고, 하나님의 예언이었습니다.
▶12절 "그 항구가 과동하기에 불편하므로 거기서 떠나 아무쪼록 뵈닉스에 가서 과동하자 하는 자가 더 많으니 뵈닉스는 그레데 항구라 한편은 동북을, 한편은 동남을 향하였더라."
미항이란 항구에서 겨울을 나기가 불편하기 때문에 네온이 반짝거리고 짧은 치마를 입고 눈웃음을 살살치는 여진들이 많이 있는 뵈닉스에 가서 나자는 것입니다.
거리로는 얼마 되지 않을 뿐 아니라 미항보다는 상당히 더 발달된 좋은 항구이고 물가도 싸고 하니까 겨울나기가 좋다하여 그곳으로 가자고 한 것입니다.
▶13-19절 "남풍이 순하게 불매 저희가 득의한줄 알고 닻을 감아 그레데 해변을 가까이 하고 행선하더니 얼마 못되어 섬 가운데로서 유라굴로라는 광풍이 대작하니 배가 밀려 바람을 맞추어 갈 수 없어 가는 대로 두고 쫓겨 가다가 가우다라는 작은 섬 아래로 지나 간신히 거루를 잡아끌어 올리고 줄을 가지고 선체를 둘러 감고 스르디스에 걸릴까 두려워 연장을 내리고 그냥 쫓겨가더니 우리가 풍랑으로 심히 애쓰다가 이튿날 사공들이 짐을 바다에 풀어 버리고 사흘째 되는 날에 배의 기구를 저희 손으로 내어 버리니라."
하나님은 주의 종들에게 영적인 통찰력을 주십니다. /믿/ 아니나 다를까 그들이 미항을 떠나 행선하다가 그레데항 부근에서 유라굴로라는 광풍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처음에는 선주와 선장의 말대로 남풍에 돛단배를 단것처럼 잘 진행했습니다. 13절에 '저들이 득의한 줄 알고' 신나게 항해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득의한 줄 알고'는 '만사가 잘 되는 줄 알고'입니다.
아마 선주와 선장은 바울을 비웃고 있었을지 모릅니다. '보아라 이렇게 날씨가 순항 바람까지 불어주는데 미항에 있었더라면 어쩔 뻔 했느냐?' 분명히 그들은 뵈릭스 항구가 줄 달콤한 즐거움과 쾌락에 들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인간은 한 치의 앞길도 측량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저들은 죽음의 광풍이 그들은 가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바로 여기에 알렉산드리라호의 비극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떠나지 않은 것이 좋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말을 묵살했기에 파선의 위기에 놓인 것입니다. 바울의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알렉산드리아호는 결국 유라굴로의 큰 광풍을 만나 배는 파선 지경이요, 살 소망을 잃어버린 채 아비규환을 이루고 있습니다.
유라(eurus)는 남동풍인데 순한 바람이고, 아굴라(aguilo)는 북동풍으로 찬바람입니다. 순한 온풍과 찬 냉풍이 연합하여 순식간에 돌풍으로 변해버린 것입니다.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얼마나 큰 재산 적인 손실이 있었겠습니까? 19절을 보면 그 풍랑 속에 고통이 사흘이나 계속되었습니다.
27절을 보면 그들이 바다 가운데 표류한 날이 무려 14일이나 됩니다. 그들은 배안에 양곡도 장비도 다 물 속에 던져 버렸고, 먹지도 못한 채 죽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왜 바울의 말은 맞았고 전문가인 선장과 선주들의 말은 틀렸을까요? 선장과 선주들의 말은 이성적이고 개관적이며 경험적이지만 그 말씀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의 말은 틀렸고, 바울은 비록 비전문가이지만 하나님께서 그 말을 주셨기 때문에 그의 말이 맞았습니다.
엘리사 시대에 아람과의 전쟁으로 이스라엘의 수도인 사마리아가 포위를 당하여 백성들이 극한 굶주림에 시달렸을 때 하나님의 종 엘리사가 내일 이맘때면 얼마든지 음식을 구할 수 있으니 안심하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말을 들은 장관 한 사람이 하늘에 구멍을 뚫고 하늘에 창을 내신들 어찌 그런 일이 있으리요 하고 비웃었습니다. 그러자 엘리사는 그 장관에게 그것을 볼 수는 있지만 먹지는 못하리라고 선포하였습니다.
그 날 저녁 하나님께서 아람 군대로 하여금 대단한 병거 소리와 말소리를 듣게 하셨으므로 아람 군대는 혼비백산하여 아무 것도 챙기지 못하고 도망갔습니다. 엘리사의 말대로 그 장관은 이 소식을 듣고 아람 진영을 향하여 달려가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짓밟혀서 죽고 말았습니다(왕상7장).
▶20절 "여러 날 동안 해와 별이 보이지 아니하고 큰 풍랑이 그대로 있으매 구원의 여망이 다 없어졌더라."
'해와 별이 보이지 아니하고'라고 했고 '구원의 여망이 다 없어졌더라'고 했습니다. 절대절망입니다. 한마디로 그 거센 풍랑 앞에서는 백부장이 차고 있던 칼도, 선장이 가지고 있던 기술도, 선주가 가지고 있던 돈도, 아무런 힘도 발휘할 수가 없었습니다.
▶21-25절 "여러 사람이 오래 먹지 못하였으매 바울이 가운데 서서 말하되 여러분이여 내 말을 듣고 그레데에서 떠나지 아니하여 이 타격과 손상을 면하였더면 좋을뻔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생명에는 아무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 뿐이리라 나의 속한바 곧 나의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우린 여기서 귀한 진리 하나를 발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종 바울의 외침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21절에서 바울은 '여러분이여! 내 말을 듣고 그레데에서 떠나지 아니하여 이 타격과 손상을 면하였더라면 좋을 뻔 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내 말을 듣고' 이 말을 주목해야 합니다. 미항을 떠나지 말고 거기서 겨울을 보내자는 바울의 말을 들었더라면 알렉산드리아의 호의 꼴이 그토록 처참해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다가 뜻하지 않는 풍랑을 만날 수도 있고, 본문의 유라굴로와 같은 광풍을 만날 수가 있습니다. 한마디로 예기치 않던 사건들이 생기기도 합니다. 건강이 잘못될 때도 있고, 사업이 무너질 때도 있고, 자녀들이, 가정이 광풍이 몰아 칠 때도 있습니다.
지난 한 주간에 하나님이 사랑하는 한 집사님의 가정이 유라굴로와 같은 광풍이 몰아쳤습니다. 가정이 깨어지는 위기 상태까지 돌아왔습니다. 성도가 그런 풍랑을 만나면 그 가정만 고통이 아닙니다. 그 교회도 그 풍랑을 만나고 주의 종이 그 풍랑 속에 함께 몸부림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풍랑 속에서 하나님께 금식하고 사모님과 의논하고 믿음의 방법으로 나왔습니다. 그랬더니 그 가정의 풍랑이 잔잔해진 것뿐만 아니라 비 온 뒤에 땅이 더 다져지거든 두 부부가 다시 한 번 사랑으로 똘똘 뭉쳐지는 사건이 있습니다. 다시는 그 가정이 그런 풍랑이 오지 않을 것을 저는 믿습니다. /아멘!/
쉽게 이해해 보면 '안심하라 내가 섬기고 있는 나의 하나님이 나를 로마에 보내야 하는데 하나님이 우리의 생명을 보호해 주시겠다고 그의 천사를 통하여 나에게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을 우리는 '절대 절망에서 절대 소망으로 가는 길'이라고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죽음의 길로 가던 사람들에게 생명의 구원의 소식이야말로 복된 소식이요 생명에 복음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쉬운 진리 하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떠난 불순종한 요나 하나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았는데 본문은 하나님께 속한 한 사람 때문에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은총을 받게 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할/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유라굴로와 같은 광풍을 피할 수 있는 비결이 무엇인가?
①세속의 소리보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이 세상을 다양한 소리가 들려오는 곳입니다. 종교인의 소리도 있고, 철학자의 소리도 있고, 경제인의 소리도 있습니다. 여당의 소리도 들리고, 야당의 소리도 들립니다. 소위 이것이 정치권의 소리입니다.
한 때 서울 광장의 촛불시위가 대단했습니다. 국민의 소리를 대변하다고 하지만 많은 국민들이 그 소리에 호응을 하지 않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은 이젠 제발 촛불을 꼈으면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성도가 듣고 따라가야 할 소리는 어떤 철학가의 소리도, 정치가들의 능변도, 운동권의 소리도, 서울 광장에 외침도 아닙니다. 오직 우리 주님의 음성을 듣고 따라가야 합니다. /믿/ 요10:3절에서 주님이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랬습니다.
우리가 기독교 방송을 듣기 위해 다이얼을 돌리다 보면 주파수가 맞을 때 까지 시끄러운 잡음이 들여옵니다. 그러나 일단 주파수가 맞으면 은혜로운 찬송도 들을 수 있고, 유명한 목사님들의 설교도 들을 수가 있습니다.
만일 그 당시 선주나 선장이나 백부장들이 자신들의 경험이나 판단을 내려놓고 바울의 말에 주파수를 맞췄더라면 그런 엄청난 불행을 당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들의 경우도 예외는 아닙니다. 내가 나를 믿고, 내 경험과 내 판단만을 믿고 산다면 죽도록 고생만 하고 되는 일이 없습니다. 우리들은 하나님께 코가 캔 백성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소리에 다이얼을 맞추고 거기서 들려오는 소리대로 순종하면 우리의 범사가 형통해 지고 행복해 질 수 있습니다. /믿/
▶천로역경을 쓴 '존 번연' 목사님은 청교도적인 아름다운 신앙을 가졌습니다. 그가 국왕에게 박해를 받고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의 양심적인 옥중생활을 본 간수장이 존 번연 목사님에게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하루는 간수장이 목사님에게 하는 말이 '목사님이 죄 없는 몸으로 이렇게 오랜 세월을 옥중에 보내시니 사모님과 아이들이 얼마나 보고 싶겠습니까? 제가 비밀을 절대 지킬 것이니 집에 한 번 다녀오십시오.'
목사님은 간수장의 호의에 감사하면서 집으로 향하는데 도중에 갑자기 가슴이 두근거리고 마음속에서 돌아가라는 하나님의 음성이 계속 들려오는 것만 같았습니다. 목사님은 '내가 집에 가는 것을 하나님이 허락하시지 않는구나!' 깨닫고 다시 감옥으로 돌아왔습니다.
목사님은 간수장에게 '당신은 나의 가는 길을 허락하였으나 주님께서는 허락하지 않으셔서 그냥 돌아 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조금 있으니까 왕이 보낸 감찰사가 감옥 순찰차 나왔습니다.
여기서 놀란 사람은 누구겠는가? 바로 번연 목사님을 보낸 간수장입니다. 만일 번연 목사님이 없을 때 왕의 감찰사가 왔다면 간수장은 당장에 모가지가 달아났을 것입니다. 감찰사가 돌아간 후에 간수장이 '목사님이 내 말을 듣지 않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기 때문에 목사님도 살고 나도 살았습니다.'라고 하면서 가슴을 쓸어 내렸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사는 사람은 지금도 이런 역사가 일어납니다. /믿/ 사건을 피할 수가 있습니다. 문제도 피할 수가 있습니다. 불경기도 피하게 하실 줄 믿습니다. /아멘!/ 성경은 천국 방송국과 같아서 믿음의 스위치만 틀면 하나님의 음성이 들여옵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성경 말씀을 통해서, 설교자를 통해서 당신의 뜻을 전하고 있습니다. /믿/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일본 교포들이 처음으로 한국에 왔다가 여기저기를 돌아보고 말하기를 '한국은 곳곳마다 십자가가 높이 솟아있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신령한 안테나가 많이 있으니 이 나라는 분명히 소망이 있다.'고 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십시다. 하나님의 말씀은 지금도 역사가 일어납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습니다 만은 갈릴리 바다에 풍랑이 일어났을 때 제자들이 온갖 수단을 다 써 보았지만 파도가 너무 높고 풍랑이 너무 거세여서 어찌할 수 없이 주님을 불렸습니다. '주님 우리가 죽게 되었나이다.' 마침내 주님의 음성이 들여왔습니다. 그 소리는 짧고 간단했습니다. 그러나 크고 힘이 있었습니다.
'잠잠 하라! 고요 하라!' 그 한마디에 바다도 풍랑도 잔잔해졌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근심 걱정 불안 절망 슬픔 좌절 그 어떤 것이 에워싼다 할지라도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 앞엔 아무것도 아닌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할/
②사명감이 투철한 자는 유라굴로와 같은 어떤 태풍도 비켜갑니다. /아멘!/ 24절에 보면 사도 바울은 그 고난 중에서도 자기가 해야 할 사명을 굳게 붙잡은 것을 볼 수가 잇습니다.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그렇습니다. 바울은 가이사 앞에 가서 자기의 무죄를 증명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로마를 직접 방문해서 복음의 횃불을 붙이는 일입니다. 지금 바울은 로마 제국을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변화시키려는 이 위대한 작업을 위하여 그 광풍 속에서도 주님이 그를 지켜 주실 것을 확실히 알았습니다.
'나는 가이사 앞에서야 한다. 그리고 마침내 가이사 앞에서 에수 그리스도의 피 묻은 생명의 복음을 전할 것이다. 그리하여 전 세계를 복음화해야 한다.'는 이 사명을 안고 있는 한 바울에게 있어서 어떤 고난도 오히려 도전이 되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할/
③하나님을 절대로 믿고 신뢰하는 사람만이 승리할 수 있습니다. 25절에 거세게 몰아치는 풍랑 속에서 바울의 외침을 보십시오!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이 고백이 여러분 들리십니까? 여기 풍랑 속에서도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오직 그분만을 신뢰했던 위대한 신앙의 사도 바울의 모습을 보셨습니까? 우리는 예배 때마다 사도신경을 우리의 신앙으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이 고백이 '우리의 삶 속에 적용되고 있는가?' 이것이 중요합니다. 내 삶 속에서 환란의 폭풍우를 만날 때 그리고 내 삶이 절망의 벼랑 끝에 서게 될 때 이 고백이 우리의 진실한 고백인가를 다시 한 번 믿음으로 정검해 보아야 합니다. /아멘입니까?/
우리 하나님은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인들의 삶 속에 풍랑이 없을 것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풍랑에도 불구하고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너희가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겼느니라' '내가 땅 끝까지 너희와 함께 하리라' /할/
그렇습니다. 유라굴로 태풍은 누구에게나 옵니다. 그런데 우리 믿음의 사람들에게 이길 수 있는 비결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믿음으로 일어나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명을 절대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전능하신 그 하나님을 절대로 믿고 신뢰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살 수 있는 비결이고 승리 할 수 있는 비결입니다. /믿/
이런 어려운 상황에서 누가 큰 소리 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사람은 그 속에서도 큰 소리 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이런 계시와 통찰력을 주셔서 그로 하여금 대단한 권세와 권위를 가지도록 허락하신 이유를 볼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을 높여주시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누구를 높이기 위해서 역사하시지 않습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일하셨고 인생과 역사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해서 이 일을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25) 하나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에 그대로 된다고 믿는다는 것입니다.
갈멜산에서 엘리야가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와의 대결에서 통쾌하게 승리하게 해 주신 것도 당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너무나 잘 알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왕상18:21). 엘리야가 승리하고 난 것을 보고 나서야 모든 백성이 보고 엎드려 말하되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왕상18:39) 하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높이기 위해서 이 일을 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시고 인생과 역사의 주인이시라는 것과 아울러 다른 모든 신들은 헛된 신이라는 것을 보여 주시기 위해서 이 일을 하신 것입니다.
맨 처음 크레테 섬의 미항에서 머물 것을 주장한 바울의 말을 듣지 않고 출발했던 것도 어쩌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일을 더 잘 나타내기 위한 일인지 모릅니다. 그때 하나님의 말을 듣지 않다가 얼마나 고생하였습니까? 그러므로 여러분의 신앙생활 중에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함은 물론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여러분의 말을 따라주지 않을 때 너무 속상해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그 일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십니다.
▶26절 "그러나 우리가 한 섬에 걸리리라 하더라"
한 섬에 걸리는 그 방향 누가 정하는 고 하니, 하나님이 정하십니다. 하나님의 손에 의하여 역사는 흘러가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 배의 항해 목적은 객관적으로 볼 때에는 곡식을 운반하는 것입니다. 또 죄수를 로마까지 호송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보시는 그 배의 항해 목적은 바울을 로마까지 실어다 주는 것. 로마의 가이사 앞에 바울을 세우고자 하나님은 이 배를 운영하고 계십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로마에 복음을 전하는 귀한 이 목적을 위하여 이 배는 항해를 하는 것입니다. /믿/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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