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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족함이 없는 삶의 비결은? (시 23:1-6)

by 【고동엽】 2022. 2. 9.

부족함이 없는 삶의 비결은? (시 23:1-6)

 

우리가 믿는 기독교는 '네가 누구냐? 네가 무엇을 할 수 있느냐?'를 중요시하지 않고 '너와 함께 하시는 분이 누구냐? 어떤 능력을 가지신 분이 너와 함께 하느냐?'를 중요시하는 종교입니다. 여호와를 목자로 삼는 자는 능력자입니다.
시23편은 주기도문 다음으로 많이 읽혀지는 소망과 용기와 위안을 주는 위대한 신앙의 고백입니다. 그 시편은 다윗이 임금으로 있을 때에 쓴 글이 아니라 음침한 골짜기, 사망의 골짜기로 헤매고 다닐 때의 경험을 노래한 것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네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우리는 본문의 이 한 절만 가지고도 큰 위로가 됩니다. 이 시편은 우리 글자로 213자로 되어 있습니다.
본문을 가만히 음미해보면 반짝이는 눈물처럼 청조하고 진주를 먹음은 이슬처럼 영롱한 영감적인 시성을 지나고 있습니다. 또 우는 자에게는 위로를 연약한 자에게는 능력을, 아픔을 당하는 자에게는 치료를, 불안해하는 사람들에게는 평안함을, 절망한 사람에게는 소망을 던지는 축복의 찬가입니다.
유명한 설교자 '헨리비취'는 '사람이 지을 수 있는 시 가운데서 이 시보다 더 아름답고 위대한 시는 없다.'고 했습니다. 스펄전은 '신음하고 고통 당하는 자들에게 부드럽고 감미로운 사랑의 음성으로 소망과 기쁨을 싣고 오는 종달새의 합창과 같은 시'라고 극찬을 했습니다.
본문은 일찍이 유대인들이 어머니의 무릎 위에서 암송되었던 시요, 카톨릭에서는 수도원에서 암송되어 졌고, 오늘날 한국의 1천 5백만 성도들이 가장 애송하는 시가 바로 본문입니다.

 

▶본문의 특징이 있습니다.
⑴단순성입니다. 본 시편은 매우 짧습니다. 모두 6절에 불과합니다. 어려운 말들이 없습니다. 당시의 중동 사회에서는 누구나 흔히 목격하는 목양의 이미지를 사용했기에 어린아이라도 쉽게 읽고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⑵현실성입니다.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가 있는 안식의 초원이 있고, 두려움과 긴장과 슬픔이 들어찬 어두운 골짜기가 있으며, 넘치는 잔과 기쁨의 노래가 흘러나오는 승리의 정상이 있습니다.
인생을 온통 꽃밭으로 그린 것도 아니고 또는 고난의 가시밭길로 묘사하지도 않았습니다. 이것은 성도의 삶에 대한 사실적인 서술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다 좋은 것도 아니고 다 나쁜 것도 아닙니다.
⑶개인성입니다. 본 시편에서는 하나님께 속한 한 마리의 양이 지나온 자신의 생애를 뒤돌아보며 구원의 하나님을 '나의 목자'라고 부릅니다. 그러니까 본시는 이스라엘 공동체의 입장을 대변하지 않습니다. 양 무리가 아닌 한 마리의 양이 자기 목자에 대한 사랑과 신뢰를 읊고 있다는 점에서 공동체의 관계가 아니고 그분과 나의 관계입니다. '나의 목자'라는 말은 개인적인 표현입니다. 신앙은 하나님과 나 자신과의 일대일입니다.

 

▶본문에서 목자 되신 하나님의 모습이 '동사 세 가지'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⑴인도하시는 하나님! 2절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 도다.' 그렇습니다. 정말 우리에게 필요한 길, 정말 우리가 가야할 길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아멘!/
⑵함께 하시는 하나님! 4절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다윗은 자기가 정말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특히 사울에게 쫓겨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었고, 아들 압살롬에게 쫓겨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겼습니다. 그러나 그 때마다 그는 혼자라고 생각해 본 일이 없었습니다. 늘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깊이 체험했습니다. 이 신앙이 '임마누엘' 신앙입니다. 우리도 이런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⑶보호하시는 하나님! 4절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원수가 쳐들어왔을 때, 나를 보호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시121:8절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 우리를 지켜주시고 보호해 주시는 하나님을 잘 믿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할/
다윗은 먼저 '여호와 하나님이 나의 목자가 되신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목자란 '꼴을 먹이다.'에서 나온 말로 '꼴을 먹이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목자는 우리들의 주님이시오, 양은 모든 그리스도인, 곧 성도들을 의미합니다.
성경은 양과 목자에 대한 비유가 많이 나옵니다. 구약은 이스라엘을 양에 비유하고 야훼 하나님을 목자로 늘 비유합니다. 신약은 예수님을 목자로 비유하고 우리를 양으로 비유합니다. 마18:12절에 길 잃은 양 한 마리를 찾기 위해 수고하시는 목자의 희생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10:1절에서는 양과 목자의 관계를 말씀합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양을 위해 희생하는 나중에는 양을 위해 목숨까지 버리는 목자로 등장합니다. 양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버리셨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가리켜 '나는 선한 목자'라고 하셨습니다.
마25:32-33절에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는 구원받은 성도를 오른편에 있는 양으로 비유했고, 구원받지 못한 사람을 왼편에 염소로 비유합니다. 마10:16절에서 는 제자들을 양에 비유하기도 했고, 요21:17절에서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이고, 치라'고 했습니다.
성도를 양에 비유하고 있고, 주의 종을 목자로 비유하기를 했습니다. 양이 목자의 소유이듯, 우리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소유라는 것은 그의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만물의 창조주이시며 모든 인간의 아버지가 되십니다. 그 안에 바다와 같은 사랑이 있고, 모든 허물을 덮어주는 자비가 있으며 그 안에는 우리를 풍성한 삶으로 양육해 주시는 능력이 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목숨까지 바치는 희생이 그 안에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목자가 되시고 우리는 그의 양이 됩니다. /믿어지면 아멘!/

 

▶그렇다면 부족함이 없는 삶의 비결은 무엇인가?
결론적으로 '여호와를 나의 목자'로 삼아야 합니다. 쉽게 말하면 '하나님을 나의 생명의 주인'으로 모셔야 합니다. 호렙산에서 모세를 부르신 하나님께서 그에게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고 하십니다. 무슨 뜻인가? 모세를 하나님의 종으로 세우겠다는 뜻입니다.
당시에 종의 신분이 아니고서는 신을 벗고 다니는 사람이 없습니다. 다시 말해 모세의 신을 벗기신 것은 그를 하나님의 거룩한 종으로 부르신 사실입니다.
종을 다스리고 관리하는 분은 주인입니다. 그리고 주인은 종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습니다. 그 종을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있는 권한이 주인에게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세의 신을 벗기신 것은 그를 하나님의 종으로 부르신 것과 그의 생명과 모든 것을 하나님이 책임지시겠다는 의미입니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생명의 주인 되신 그분을 위해 목숨 걸고 충성하는 길입니다. 이 길이 잘 사는 길이요, 형통의 통로입니다. /믿/아멘!/

 

▶그런데 양은 몇 가지의 특징이 있습니다.
⑴짐승 중에서도 양은 아주 우둔한 동물입니다. 양하면 먼저 생각나는 것은 양순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좋게 말할 때 양순이지 이 말은 우둔하다는 말이고 미련하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양은 위험이 닥쳐와도 그 위험을 깨닫지 못한다고 합니다. 누가 와서 끌어가도 그냥 끄는 대로 끌려간다고 합니다. 마치 어린 아이들과 똑같습니다. 어린 아이들은 과자 사 준다고 하면 그 사람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좇아갑니다. 양순해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목자는 양들을 아무나 따라가지 못하도록 훈련하고 길들여서 내 양을 안전하게 지키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양은 대부분 자기 목자의 말 이외에는 따라가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요10:3-5절에서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자기 양을 다 내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 오되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고 했고, 14절에서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거기에도 예외가 있습니다. 양이 목자를 알고 잘 따라가다가도 그 양이 일단 병이 들면 목자의 음성을 듣지 않고 아무나 따라간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마침내는 위험을 당해서 죽는다고 합니다. 이것이 무지한 양의 말로입니다.
중동을 여행한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세 사람의 목동들이 양떼를 거느리고 시냇가에서 물을 먹이고 있었습니다. 물을 다 먹인 후에 한 목동이 큰 소리로 '멘아 멘아' 하고 부르니까 그의 양들이 목자의 음성을 알고는 모두 따라가더랍니다. 또 조금 있다가 두 번째 목동이 '멘아 멘아' 하니까 그의 양들이 또 따라가더랍니다. 자기의 양떼를 셀 필요도 없습니다. 자기의 양들만 따라갑니다. 여기서 '멘아 멘아'라는 말은 아랍말로 '나를 따라 오라'는 말이라고 합니다.
하도 신기해서 이 구경꾼이 나머지 한 사람에게 나도 좀 불러 보자고 부탁을 했습니다. 그래서 목자의 옷을 빌려 입고 지팡이를 들고 양들을 향해서 '멘아 멘아' 하고 큰 소리로 불렀더니 한 마리의 양도 들은 척을 하지 않더랍니다. 얼마나 신기한 일입니까? 그래서 이 사람이 목동에게 '당신의 양들은 언제나 타인을 따라가지 않습니까?' 그랬더니 이 목동이 대답하기를 '왼걸요, 더러 따라가는 놈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병들었을 때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신앙도 건강하면 예배가 즐겁고 순종도 잘하고 생각도 건전합니다. 그런데 사람이 일단 신앙에 병이 들게 되면 이정표를 바로 보지 않습니다. 보아도 분간을 못합니다. 그래서 자꾸만 이탈하려고 합니다. 방황하기 일쑤입니다. 그러다가 만신창이가 된 후에야 후회하기도 하고 타락하기도 하고 그러다가 마지막에는 '손들고 옵니다.' 하고 돌아오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것이 모두 병들어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 시인은 하나님을 표현하기를 푸른 초장과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⑵양은 약한 짐승입니다. 빨리 달리지도 못하고, 이빨도 세지 못해 남을 공격하지도 못합니다. 양은 멀리도 못 봅니다. 그래서 악한 짐승이 와도 도망갈 여유가 없습니다.
사실 인간이 강한 것 같습니다. 지식, 지혜, 기술도 많아서 첨단 산업을 이루고, 산을 뚫어 고속도로를 내고 그런데 인간처럼 약한 것도 없습니다. 죄를 못 이깁니다. 자신을 못 이깁니다. 추위도 더위도 못 이기고 심지어 감기 몸살만 들어도 끙끙 안고 누워있어야 합니다.
⑶양은 지혜롭지 못한 어리석은 동물입니다. 양은 길을 잃으면 찾지를 못하기 때문입니다. 개나 고양이는 멀리 갔다가도 자기 혼자서 집을 찾아오는 것을 보면 얼마나 용한지 모릅니다. 인생들도 대단한 것 같지만 어리석은 부분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사53:6절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러니까 길을 잃고 사는 인생들의 모습입니다. 죄악으로, 교만으로, 욕심으로 눈이 어두워 길을 잃었습니다. 진정 가야 할 길을 모른 체 살아가는 인생들입니다.
⑷양은 의존하는 동물입니다. 목자를 의존합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의존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권력을 의지하고, 재물을, 배경을, 기술을, 출신학교를, 가문을 의지합니다. 그러나 진정 우리의 의지할 자는 오직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면 그분이 우리의 삶을 인도하십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의 속성을 잠깐 알아보겠습니다.
⑴하나님은 항상 인도하십니다. 우리를 인도하다가 중간에서 포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시고 우리를 인도하시는데 이 땅에서뿐만 아니라 영원한 하늘나라까지입니다.
⑵하나님을 의지하는 모든 사람의 길을 지도하시고, 그 길을 가르쳐 주십니다. 잠3:6절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시37:23절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 길을 기뻐하시나니'
⑶어디로 인도하십니까? 밝은 곳으로, 승리의 길로 생명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요8:12절 예수께서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이 말씀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⑴여호와는 나를 먹이시는 자시니 ⑵나를 돌보시는 자시니 ⑶나를 다스리는 자시니 ⑷나를 양육하는 자시니 ⑸나를 사랑하는 자시니, 짧게 표현하면 '먹이시고 돌보시고 기르시는 분'입니다. /할/

 

▶여호와를 나의 목자로 삼으면 어떻게 됩니까?
①부족함이 없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다윗은 인간이 누릴 수 있는 모든 조건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는 최고 권력을 장악한 왕입니다. 그 당시 최고의 저택인 왕궁에서 최상의 문화생활을 누리며 살았습니다.
그는 없는 것이 없었습니다. 돈도 많았고, 보석도, 많았고, 후궁도 많이 거느리고 뭇 사람들의 조경을 받아가며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자신의 만족의 원인을 그런 환경 속에서 찾지 않고 '나는 하나님 때문에 만족한다, 나는 하나님 때문에 부족을 모른다.'고 고백한 까닭이 무엇입니까?
이유는 간단합니다. 다윗은 수많은 고백과 찬송 시를 썼습니다만 단 한 번도 나는 왕이 된 것을 만족하게 생각한다든지 돈이 많은 것, 부동산이 많은 것을 만족하게 생각한다고 한 일이 없습니다. 대상29:11절 이하를 보면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입니다. 주권도 주께 있고, 부귀영화도 주님이 주셨습니다. 권세와 능력도 주께 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기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는 무슨 말씀인가? '내가 궁핍함이 없으리로다, 가난함이 없으리로다. 모자람이 없으리로다.' /할/
여러분,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모자라고 부족한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래서 결핍과 빈곤을 느낍니다. 우리는 옛날 지존파 일당의 범죄를 보면서 어떻게 인간이 사람을 그렇게 잔인하게 죽일 수 있는가 치를 떨었습니다. 그 범죄의 원인은 사랑의 결핍과 물질의 빈곤 때문에 저질러진 사건입니다.
주경 학자들이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의 말씀을 풀면서 영혼의 만족, 정신적인 만족, 신앙적인 만족, 현실을 초월하는 만족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을 목자로 삼는 자는 부족함이 없는 삶을 누리게 되어 있습니다. /할/

 

②왜 부족함이 없는가? 2절에 말씀대로 '푸른 초장으로,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팔레스틴 땅의 정오는 몹시 뜨거운 시간입니다. 일찍 목자가 양들을 푸른 풀밭으로 인도해 먹이고, 부랴부랴 그늘진 쉴만한 물가로 그들을 인도하십니다.
세계 어느 곳에 가든지 여행 안내자는 있습니다. 여행 안내자의 안내를 받으면 정확한 정보를 얻는 것은 물론이고, 쉽고 편하게 여행을 즐길 수 있습니다. 인생 길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다는 사건은 엄청난 사건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나를 인도하신다.'고 했습니다.
안내자가 든든하면 여행길도 편합니다. 우리를 인도하시고 안내하시는 하나님은 어떤 안내자입니까? 시121편에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고, 우리를 지키신다.'고 했습니다. 시139편을 보면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통촉하신다.'고 했습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푸른 초장은 어디인가?
⑴영적으로 풍성한 하나님의 말씀의 꼴을 해학적으로 표현했습니다.
⑵육신적인 풍성한 물질의 풍요로움을 의미합니다. 쉴만한 물가란 영적으로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이요, 주님의 품안을 의미합니다. 주님의 품안은 평안함을 의미하는 것이요, 모든 짐을 맡아 주심을 의미합니다. 마11:28절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그리고 요14:27절에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아멘!/
푸른 초장은 실패가 없는 삶을 의미합니다. 쉴만한 물가는 언제나 조용히 쉴 수 있는 잘 준비되어져 있는 평화스러운 인식 처입니다. 여기서 물은 생명의 근원이기도 합니다.
여기 '누이시며'는 가장 편안한 자세는 쉬게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분, 만사가 잘 될 때, 우리는 평안한 자리에 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뭔가 안 되고, 터지고, 무너지면 쉬기는커녕, 한숨만 쉬고 뜬눈으로 하얀 밤을 새워야 합니다. 그래서 시127편에서 '여호와는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 잠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여기 '인도하시는도다.'는 '나를 지키시고, 보호하시고, 이끄시는 주님의 동행'을 의미합니다. 요셉은 하나님과 동행한 자입니다. 그래서 가는 곳마다 하나님이 보호와 축복을 받아 형통한 자가 되었습니다. 우리 모두 주님과 동행하는 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필립 켈러'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원래 호주에서 양을 치는 목자였는데 목사가 된 이후 '목자가 바라본 시편 23편'이라는 책을 써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됐습니다. 그 책에서 보면 양이 풀밭에 드러누울 때는 네 가지 조건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첫째로 양을 잡아먹으려는 원수가 없어야 풀밭에 눕고 이리나 사자나 여우가 주위에 있으면 절대로 풀밭에 눕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양들이 서로 싸우지 않고 화목해야 풀밭에 눕고 뿔로 싸우고 머리로 밀치고 하는 싸움이 있을 때에는 절대로 풀밭에 눕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셋째로 몸에 빈대나 벼룩이 있을 때는 절대로 풀밭에 눕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넷째로 충분히 꼴을 먹고 배가 불러야 푸른 풀밭에 드러눕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푸른 풀밭에 눕힌다는 것은 우리에게 원수가 없게 만들어 주시고, 우리 가운데 화목함이 있게 만들어 주시고, 우리에게 염려, 근심, 불안, 초조, 절망의 빈대와 벼룩을 없애 주시고, 우리에게 영혼이 잘됨 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풍성히 얻도록 해주신다는 것입니다.

 

③왜 부족함이 없습니까? 3절에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할/ 소생이란 낱말은 사역동사로써 '살게 하다, 생명을 주다, 회복시키다, 구원하다.'는 뜻입니다. 또 소생이란 '회복한다'는 의미입니다. 다윗의 이 고백은 '하나님께서 내 영혼을 살려주시고 생명을 주시고 구원해 주심'을 의미합니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극심한 생존경쟁 속에서 심신이 지쳐있고, 염려와 근심에 억눌려 생활이 파괴당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러한 억압을 극복하기 위하여 술을 마시기도 하고, 쾌락을 추구해 보기도 하지만 그곳에서는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더 깊은 수렁에 빠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여러분 지친 영혼은 하나님께 맡기고 눈물로 찬양하고 기도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새롭게 우리를 소생시켜주실 것입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실패에서 성공으로, 약함에서 강함으로, 질병에서 건강으로' /할/
우리가 우리의 모든 범사를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하면 주님은 '자기의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해 주십니다. /아멘!/
▶자기의 이름이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신 분이십니다. 여기서 '의의 길'은 '용서의 길이요, 관용의 길이요, 구원의 길'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약해서 늘 넘어지고 무너지고 배신도 하고 살아가지만 우리가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만 하면 너그럽게 관용을 베푸시고 용서해 주시고 우리의 모든 조건을 구원의 길로 회복시켜 주십니다. /할/얼마나 큰 은혜인가?/
인간은 영과 육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육체는 유한하고 썩지만 영혼은 불멸하며 무한한 존재입니다. 성경은 가장 중요한 것은 영혼이라고 가르쳐 줍니다. 영혼이 건강해야 육체도 건강하게 된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칩니다.
▶1920년 후반 영국이 낳은 유명한 의사 가운데 '에드워드 바크'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크는 주장하기를 '의사는 환자를 치료하는 것이지 질병을 치료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고, '그 사람의 병이 완전히 고쳐지려면 그 영혼이 먼저 고침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바크는 영혼을 병들게 하는 원인을 몇 가지로 말했습니다.
⑴공포심을 버리라!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무서워하는 것은 불신의 증거입니다. 성경은 '무서워 말라, 놀라지 말라, 두려워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풍랑 때문에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어찌하여 두려워하느냐? 왜 믿음이 없느냐?'고 책망했습니다. 믿음이 있는 자는 강합니다. 담대합니다. 공포심이 영혼을 병들게 합니다.
⑵불확실성(불 신앙) 역시 영혼의 적입니다. 여러분, 도대체 뭐가 불확실합니까? 우리 신앙인은 사는 것이 확실하고 사는 목적이 확실합니다. 죽을 것이 확실하고 죽은 후에 갈 곳도 확실합니다. 세상의 종말이 하나님의 심판으로 끝날 것은 확실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면 축복 받고 성공할 것이 확실하고 거역하면 하나님의 징계가 확실합니다. 여러분 확신을 가지십시오, 의심을 영혼을 병들게 합니다.
⑶무관심도 영혼을 병들게 합니다. 신앙은 관심입니다. 무관심은 사랑의 반대랍니다.
⑷세상에 대한 지나친 집착도 영혼도 병들게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권력과 재물과 명예를 붙잡으려고 합니다.
여러분, 예수 믿는 것말고는 지나치면 해롭습니다. 음식도, 운동도, 여가도, 오락도, 지나치게 집착하고 정신을 빼앗기면 안 됩니다.
월요병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주말만 되면 모조리 걷어치우고 여행을 떠나거나 자기를 좋아하는 일을 즐기기 위해 안절부절못하는 것이 주말 병입니다. 월요병이란 주말을 실컷 즐기고 난 후에 피로에 지쳐 하품하고 앉아 있습니다. 그래서 주말과 월요일에 만든 제품은 불량품이 많다고 합니다. 세상에 대한 지나친 집념과 몰입은 신앙생활을 방해하는 요소가 있습니다.
⑸외로움도 영혼의 병입니다. 실존주의자들은 인간을 본질적으로 고독한 존재라고 봅니다. 그리고 인간은 그가 지은 죄 때문에 고독하기 마련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후 에덴동산에서 쫓겨났던 아담과 하와의 고독과 외로움은 절정에 달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 고독을 해결해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 있습니다. 그리고 신앙의 세계는 외로움이 있을 수 없습니다. 왜?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너희와 함께 하리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하리라' /할/
⑹다른 사람의 행복에 대한 과도한 관심도 신앙성장의 방해 요인이 됩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것은 부정적인 관심을 말합니다. 지존파 한 사람이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압구정동에 오렌지족들과 야타 족들을 죽이지 못하고 가는 것이 분하다.'고 한 것입니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갈등입니다. 우리 모두는 주어진 조건에서 자족함을 찾으십시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행복에 박수를 보내고 꽃다발을 보내는 마음, 사촌이 땅을 사면 축전을 보내는 마음, 그것이 귀한 마음입니다. /아멘!/

④왜 부족함이 없습니까? 4절에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다윗은 수차래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건짐을 받았습니다. 소년시절에 양은 공격하려는 사자와 싸워 이겼습니다.
골리앗과 맞서 그는 쓸어 드렸습니다. 여러 차례 블레셋과 싸워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사울 왕이 죽이려고 몰고 다닐 때도 자기 아들 압살롬이 모반하여 공격해 올 때도 위기를 피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때마다 얻은 결론은 '아! 주님이 나와 함께 해 주셨구나!' 여러분, 이 신앙이 금 같은 신앙입니다. 본문 4절은 2절과 대조적입니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으로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신다.'는 말과 대조적이 아닙니까?
여기서 말하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병들 때, 사업에 무너질 때, 가정에 위기가 올 때, 시련과 연단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에게 푸른 초장으로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기 전에 틀림없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게 하십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시험해 보는 과정으로 이 골짜기를 지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시험해 보셨습니다. 어떠한 시련도 고난도 참고 견디시기 바랍니다. 지금 우리의 신앙은 금으로 연단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고난 위에 새로운 축복의 새 아침이 분명히 오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왜 나에게 이런 시험이 왔는가?'입니다. 단12:10절 '많은 사람이 연단을 받아 스스로 정결케 하며 희게 할 것이나 악한 사람은 악을 행하리니 악한 자는 아무도 깨닫지 못하되 오직 지혜 있는 자는 깨달으리라' 주님은 깨닫고 바로 돌아서기만 하면 다시 회복 시켜주실 뿐만 아니라 더 큰 축복을 허락해 주십니다.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목동이 가진 지팡이는 '양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기 위한 것이고, 막대기는 '양을 공격하려는 악한 짐승들(강도, 도적, 사자, 곰, 늑대)들과 싸우기 위해 사용'됩니다.
지팡이가 양에게 사용하는 훈련(인도)용 도구라면, 막대기는 양의 대적들에게 사용하는 방어와 공격용 무기입니다(삼상17:40,43). 교육과 훈련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라마드(lamad)는 '뾰족한 막대기로 쿡쿡 찌른다.'는 뜻에서 파생했습니다.
다윗은 지팡이와 막대기를 가지고 자신에게 맡겨진 양들을 보호하고 온전케 하며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인도했던 것처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목동 다윗을 인도, 보호, 훈련, 연단 시켜 민족과 열 방을 다스리고 만민을 하나님께 복종케 하는 위대한 지도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여기서 '안위'는 '위로, 보호, 싸매 주는 것, 용기를 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회복 시켜 주시는 진행형으로 묘사합니다.
카우보이는 말을 타고 장총이나 권총을 휴대하지만 목자는 지팡이나 막대기를 휴대합니다. 다윗은 소년 시절 아버지의 양을 지키면서 막대기 하나로 사자와 싸워 이긴 경험을 했습니다.
그가 철이 들고 신앙이 성숙해 지면서 깨닫게 된 것은 목자의 지팡이나 막대기보다는 하나님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얼마나 크고 강한가를 알았습니다. 목자의 지팡이는 양을 안위하지만 주님의 지팡이는 나를 안위한다는 것이 다윗의 고백입니다.
출4장에 보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모세가 바로와 대결하기 위해 애굽으로 갔습니다. 출4:20절 '모세가 그 아내와 아들들을 나귀에 태우고 애굽으로 돌아가는데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았더라' 바로가 누굽니까? 당시 그는 대 제국 애굽의 황제입니다. 그는 막강한 군대를 가지고 있습니다.
400년 동안 이스라엘 민족을 학대한 애굽 왕가의 왕이라 그는 모세가 돌아오면 처형하기 위해 벼르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모세는 그를 찾아가 히브리 백성을 해방하라는 도전장을 낼 판입니다.
그렇다면 모세도 중무장을 하고 들어가야 합니다. 007 주인공 제임스 본드처럼 기상천외한 최신예 무기나 소도구들도 무장하고 들어가야 합니다. 그런데 그는 지팡이 하나만 들었습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그 지팡이 하나로 바로를 이겼습니다. 그 지팡이가 바로를 이겼고, 애굽을 이겼고, 원수마귀도 이겼습니다. 이 지팡이가 어떤 지팡이입니까? 핵폭발을 장진한 지팡이입니까? 아니면 미사일을 탑재한 지팡이입니까?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지팡이입니다. 지금 다윗이 노래한 지팡이가 바로 그 지팡이입니다.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십니다.'는 고백은 하나님의 지팡이를 당할 자가 없다는 고백입니다.

 

⑤왜 부족함이 없습니까? 5절을 보면 하나님은 우리를 부족함이 없게 인도만 해 주시는 것만 아니라 '원수들의 목전에서'도 건져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그러니까 5절은 23편의 절정기를 이르는 대목입니다.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다'는 선언으로 시작하여 만족과 즐거움의 상태를 유지하다가 이제 하나님은 원수의 목전에서조차 축복해 주시고 '잔이 넘치게 채워주시겠다'는 축복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다'는 의미는 주께서 우리를 가장 귀한 자로 인정해 주심을 뜻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주님의 축복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크고 무궁합니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 /할/
하나님의 백성은 절대로 망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눈으로 볼 때는 저 사람이 분명히 망할 수밖에 없는데 세월이 지나도 끄덕이 없습니다. 아니 끄덕이 없는 것이 아니라 차츰차츰 그 환경이 열립니다. 사업이 일어납니다. 깨어져 버릴 것 같은 가정이 다시 사랑으로 회복됩니다. 또 매장되어 버릴 수밖에 없는 사람이 오히려 놓임을 받도록 만드십니다.
주님께서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푸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성령의 역사로 '내 잔이 넘치게 축복'하기 때문입니다. /할/
▶여기 '내 잔이 넘치나이다.'에서 몇 가지 진리를 알아보겠습니다.
⑴내 그릇에 비해 부어 주신 은혜가 과분하다는 것입니다.
⑵내 노력에 비해 성과가 크다는 감격의 표현입니다.
⑶'내 잔이 넘치나이다.' 이 말은 지금도 계속되어지는 진행형입니다. 어제까지만 넘치게 부어주신 하나님이 아니라 오늘 지금 현재 이 시간에도 넘치게 부어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분이 채워주셔야 우리의 삶이 풍부해지고 신용의 잔도, 기쁨의 잔도 행복의 잔도 평화의 잔도 풍부해 집니다. 이 땅에 살면서 잔이 넘치는 축복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은 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로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⑷'내 잔이 넘친다.'에서 '잔'은 기업 즉 재산을 비유한 말입니다. 그 분이 채워 주셔야 '우리의 일생이 풍부합니다. 삶이 풍성해 집니다. 신용의 잔도 넘쳐 납니다. 기쁨의 잔이 넘칩니다. 행복의 잔이 넘칩니다.' /할/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나의 목자로 모시고 살면 내 잔이 넘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미국의 '스텐레이 탐' 장로님 이야기입니다. 그는 다른 사람이 7번 실패한 사업을 인수받았습니다. 그리고 경영을 시작할 때 주님께 기도부터 드렸습니다. 주님이 기도 중에 말씀하셨습니다.
'네 사업을 내 이름으로 등기하고 내 이름으로 사업을 해라.' 그는 어떻게 등기할 지 고민하다가 등기소에 가서 말했습니다. '내 사업체를 예수님 이름으로 등기하여 주십시오.' 그러자 관리가 웃었습니다. 그러나 탐 장로님의 이야기를 들은 기독교인 관리는 기꺼이 승낙하였습니다.
'주소는 무엇이라고 할까요?' 곰곰이 생각하던 장로님이 말했습니다. '천국 일 번지라고 하십시오.' '전화 번호는 요?' '66국에 3927로 하십시오.' '무슨 의미인가요?' '성경은 66권입니다. 구약은 39권이고 신약은 27권입니다. 성경을 들고 주님께 물어 보면 다 가르쳐 주십니다.' /할/
그래서 탐 장로님은 예수님 이름으로 등기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사업체이기에 사장님을 예수님으로 모시고 무엇이든지 주님께 물었습니다. 이익금은 모두 주님께 드리고 자기는 월급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18개국에 선교사를 파송하여 신나게 일하고 계십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을 목자로 모시면 항상 잔이 넘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잔까지 넘치게 만들어 줍니다. /할/

 

⑥우리는 영원한 천국을 소유하게 됩니다. 6절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주를 나의 목자로 삼는 자의 최고의 축복은 '천국'을 소유하게 됩니다. '나의 평생에' 즉 지금부터 죽는 순간까지, 아니 죽은 뒤 천국에서라도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계21-22:5절에 보면 우리가 소망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소개해 줍니다.
⑴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이 흐른답니다. 이 땅의 모든 물은 오염된 물입니다. ⑵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답니다. 그런데 그 생명나무에서는 달마다 열두 가지의 실과를 맺히게 한답니다.
⑶저주가 없는 곳입니다. 계21:4절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 이 다 지나갔음 이러라' 이 땅은 어떤 곳입니까? 울고 탄식할 만한 일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곳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원한 집은 저주도 사망도 애통도 이별할 것도 아픔도 없는 곳이랍니다. /믿/
⑷주님의 얼굴을 직접 볼 수 있습니다. 계22:4절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천국은 주님의 얼굴을 직접 대하는 곳이랍니다.
⑸그곳에서 저와 여러분은 세세 무궁토록 왕 노릇하게 된답니다. 얼마나 멋있습니까?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하늘나라의 왕자요 공주입니다. /믿/
텍사스에 유명한 '헷셀 포드' 목사는 '성경 말씀에는 천국과 지옥에 대한 이야기보다 이 세상에서 어떻게 물질적인 복을 받으며 살 수 있는가? 그 비결을 더 많이 제시해 주신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제 신년 새해에 우리가 결단해야 합니다. '여호와를 나의 목자'로 삼고 그 안에서 충성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면 부족함이 없는 삶이 아니라 내 잔이 넘치도록 축복을 받게 됩니다. /아멘!/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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