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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한 갈대도 꺾지 아니하시는 하나님! (마12:9-21/사42:1-4)

by 【고동엽】 2022. 2. 9.

상한 갈대도 꺾지 아니하시는 하나님! (마12:9-21/사42:1-4)

 

우리가 산다고 하는 것은 곧 배우는 것입니다. 배움이 없는 삶은 참된 삶이 아닙니다. 행여나 잘못된 길로 갈까봐 공부를 시킵니다. 그러므로 학교 공부가 끝났다고 해서 인생교육이 끝난 것은 결코 아닙니다. 한문의 졸업은 학문을 마친다는 뜻이지만, 영어의 졸업은 시작한다는 말이랍니다. 그러니까 학교공부는 끝났지만 사회공부는 다시 시작이 됩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은 책을 통해서 배우고, 생활에서 배우고, 경험에서 배우고, 또는 인간관계에서 배우고, 실패에서도 배우고, 또 역사에서도 배우고, 자연을 통해서도 배우게 됩니다.
미국의 16대 대통령이었던 아브라함 링컨은 초등학교 밖에 다니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항상 독학과 자습을 했으며, 그는 자신이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배웠다고 합니다. 농부와 이야기하면 농부에게서 농사일도 배웠으며, 상인들과 이야기할 때 경영을 배웠으며, 그는 사람을 만날 때마다 자기 교육의 기회로 삼았기 때문에 훌륭한 인격의 소유자가 되어 계속 발전되어 갔고, 마침내 미국의 대통령이 된 것입니다.

그런 그가 고백하기를 '나는 모든 것에서 배웠지만 결국 성경 말씀이 나의 최고의 스승이었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인생의 최고의 안내서요 지침서입니다. 말씀이 사람을 변화시키고, 말씀이 상한 심령을 치유해 주십니다. 오늘 본문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제목 소개!▶

 

본문에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이 말씀은 사42:1-4절에서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으로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상처 난 인간들에게 향한 온유한 성품에 대한 예언입니다.
지금 우리는 주님의 오심을 대망하는 대강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성탄은 우리 주님이 이 땅에 복된 소식을 전한 굿 뉴스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기 6-7백 년 전에 이미 그 예수가 이런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실 것을 예언하고 계십니다.
이사야선지는 주님의 성품을 2절에서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로 거리에 들리게 아니하며'라고 예언했고, 마12:19절에서 '그가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고 하십니다. 여기 '들레지 아니하다'라는 표현은 '시끄럽게 소리치지 아니하다'라는 뜻입니다. 자기를 향하여 살기 등등하여 어찌하든지 꼬투리를 잡으려고 따라다니는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예수께서는 결코 흥분하시거나 맞 싸움을 걸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앞서 15절에 나왔던 대로, 바리새인들이 당신을 죽일 음모를 꾸밀 때에 예수께서는 그것을 '아시고' 그저 조용히 떠나가셨습니다. 예수님은 결코 '다투지도 들레지도' 아니하셨습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제자들에게도 '이 동네에서 핍박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라'고 가르치셨던 것과 일치됩니다.
이는 겸손과 온유의 화신인 주님의 모습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는 본체 하나님이시지만 겸손히 하나님의 종으로서 그에게 맡겨진 모든 사역을 조용히 순종함으로 감당하셨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주의 종이 갖추어야 할 겸손과 온유의 마음을 배워야 합니다. /아멘!/
▶이해를 돕기 위해 사42:1-4절을 한 번 상고해보고 넘어가야 합니다.
의역해 보면, '나의 종을 보아라. 그는 내가 붙들어 주는 사람이다. 내가 택한 사람, 내가 마음으로 기뻐하는 사람이다. 내가 그에게 나의 영을 주었으니, 그가 뭇 민족에게 공의를 베풀 것이다. 그는 소리치거나 목소리를 높이지 않으며, 거리에서는 그 소리가 들리지 않게 하실 것이다. 그는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며, 꺼져 가는 등불도 끄지 않으며, 진리로 공의를 베풀 것이다. 그는 쇠하지 않으며, 낙담하지 않으며, 끝내 세상에 공의를 세울 것이니, 먼 나라에서도 그의 가르침을 받기를 간절히 기다릴 것이다.'
▶이사야서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약속하나를 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은 지금 바빌론에 포로로 와 있습니다. 나라를 잃은 백성, 성전에 모여 제사를 드리고 싶지만 그럴 수도 없는 비참한 백성, 함께 모여 민족애나 신앙의 이야기를 나눌 수도 없는 민족. 식민지하의 이스라엘의 운명은 비참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런 처지의 이스라엘을 가리켜서 예언자 이사야는 '상한 갈대'라고 표현합니다. 표현을 바꾸어서 '꺼져 가는 등불'이라고도 말합니다. 이스라엘이 느끼는 자기의 실상입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들이 느껴야 할 실상이기도 합니다. '상한 갈대!' 안 그렇습니까?
그런 상한 갈대인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약속은 이렇습니다. '내가 메시아를 보낼 텐데, 그 메시아는 상한 갈대를 결코 꺾지 않을 것이다. 꺼져 가는 등불을 결코 꺼지게 놓아두지 않을 것이다. 염려하지 말고 메시아를 기다려라' /아멘!/
이스라엘이 출애굽시 홍해를 건넜는데, 그 홍해는 갈대 바다였습니다. 갈대 바다! 아마도 갈대를 생각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를 건널 때의 기억을 되살아났을 것입니다. 갈대는 꺾이면 끝입니다. 물결에 휩쓸리며 썩어갑니다. 꺾인 갈대는 '갈 데'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라는 갈대가 꺾여 버렸습니다. 식민지하에서 마음도 꺾이고, 몸도 꺾이고, 모든 것이 다 꺾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이 약속하십니다. '나는 상한 갈대도 꺾지 않는다.' 얼마나 소망 적인 메시지입니까? /할/
주님은 이 땅에 오셔서 인생 고에 허덕이는 인간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광야 같은 세상 길에 상한 갈대처럼 쓰러지고 버림받은 인간들의 모습을 보시고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라'고 하시면서 인생들을 부르고 계십니다(마11:28-29).


▶하루는 예수께서 회당에 들어가시니 한쪽 손이 오므라든 사람이 있었습니다. 참으로 불쌍한 불구자 인생입니다. 예수님은 이 사람을 불쌍히 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손을 내밀라'고 하시고 치료해 주심으로 다른 손과 같이 회복되어 성하게 되었다고 본문은 밝히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처럼 상한 갈대를 회복시켜주십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이 이것을 보고 안식일에 병을 고쳤다 하여 율법을 파괴하는 이단자라고 죽이려고 했습니다. 10절에 바리새인들이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으냐?'고 도전해 왔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오히려 단호하게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고 하셨습니다.
병 고치는 것은 선행이며, 안식일이라도 사람이 필요 이상으로 한순간이라도 더 고통 당하는 것이 안식일 율법의 의도가 아니라 적극적인 선행을 통하여 사람을 도울 수만 있다면 돕는 것이 오히려 근본정신임을 밝히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 주님은 '안식일'이 문제가 아니라 손 마른 사람의 '아픔이 문제'였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께서는 우리의 아픔을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부르짖음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를 치료하여 주십니다. 주님의 치료는 완전한 치료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치료함을 받은 손 마른 사람은 그의 삶 전체가 회복되었습니다.
⑴그의 건강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사람이 건강을 잃는다는 것은 모든 것을 잃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병든 자처럼 불쌍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특별히 병든 자에게 관심이 많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치료하여 주셨습니다. 주님은 인간의 건강을 회복시켜 주시는 위대한 대 의사이십니다. /믿/
⑵그가 할 일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질병으로부터 고침을 받은 그에게는 이제 해야 할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손은 봉사를 나타냅니다. 그리고 일을 의미합니다. 손이 회복된 그는 열심히 일하며 봉사하면서 그를 치료하여 주신 주님의 은혜를 보답할 것입니다.
⑶그는 이제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게 되었습니다. 건강을 잃고 일자리를 잃은 그는 인간적인 삶을 살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치유는 이 상처 입은 사람의 삶 전체를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치유 자이십니다. 잘못되고 병든 모든 것을 바르게 회복시켜 주시고, 우리의 삶 전체를 치료하고 회복시켜 주시는 위대한 의사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막2:27-28절 '또 가라사대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할/
▶성경은 우리 인간들의 존재를 갈대에 비교하여 설명합니다. 요단강 강변에는 지금도 넓은 지역에 걸쳐 갈대밭이 있습니다. 팔레스틴 지역 목동들이 부는 피리가 이 갈대로 만들어졌습니다.
이 갈대는 바람이 불거나 물결이 치면 꺾어지고 상합니다. 이처럼 연약하고 상한 갈대 같은 존재가 바로 인간이요 우리들의 자화상입니다. /믿/ 그런데 오늘날 지식인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기독교를 싫어하는 한 가지 이유로 '기독교는 인간의 값을 너무 낮춘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죄인이라고 규정짓고, 뚝하면 회개하라고 외치고, 사람의 지혜와 힘은 제한된 존재라고 말하고, 또한 사람은 만물의 찌끼와 같은 존재'라고 말하니 '어찌 인간 스스로 자기의 값을 그리 깎을 수 있느냐?'고 지식인들이 항의를 합니다. 그러나 성경의 정의는 '인간은 죄인이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했습니다.
프랑스의 사상가 파스칼은 그의 저서 '팡세'에서 '사람은 한 개의 갈대에 지나지 않은 만물 중에서 가장 약한 존재다. 그러나 그는 생각하는 갈대'라고 했습니다.
세례요한이 요단강변에서 많은 무리에게 세례를 주는 모습을 보시고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고 말씀하셨습니다(마11:7). 갈대는 몸집이 가늘고 키가 커서 약간의 바람이 와도 잘 흔들립니다. 좀 심한 바람이 불면 완전히 다 쓰러지듯이 넘어가곤 합니다. 속이 비어 있고 재질이 약하기 때문에 조그마한 충격에도 꺾이거나 상하게 됩니다.
이것은 연약하기 이를 데 없는 우리의 인간성을 비유합니다.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입니다. 겉으로는 훤칠하고 건강하게 보여도 실상은 매우 약하고 무능하기 짝이 없는 인간입니다. 인간의 지식도 믿을 것이 못됩니다. 인간의 감정은 시간과 환경에 따라 쉽게 변합니다. 의지나 결심도 오래 가지 못합니다.
그렇습니다. 인생은 상한 갈대입니다. 여기 상한 갈대는 힘이 없고 나약하고 무력한 인간성을 가리킵니다. 인간은 약한 존재입니다. 조금만 과로하면 피곤합니다. 감기 걸리고 고통을 받습니다. 또 늙고 병들어갑니다.
약4:14절을 보세요,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또 사40:6절에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 같으니' 무슨 소리입니까? 모든 육체는 풀과 같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시90:6절에 보면 '풀은 아침에 꽃이 피어 자라다가 저녁에는 벤바 되어 마르나이다.'라고 했습니다.
갈대는 바람에 꺾어지기 쉽습니다. 마찬가지로 인간 역시 연약합니다. 역대 올림픽에서 마라톤의 신기록을 깬 인간기관차 아베베는 새로운 신기록을 세운 후 얼마 안 되어 황금같이 귀한 그 다리가 마비가 되어 휠체어를 타고 다니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로마의 폭군 네로도 의지가 강한 것 같으나 실상은 의지가 약해 우울증에 시달렸다고 합니다.
'소크라테스, 케일 케고르' 등 많은 철학자들이 한결같이 말하기를 '모든 인간은 약한 것'이라고 탄식했습니다. 사람의 마음도 매우 약해 죄를 범하기 쉽습니다. 다윗과 같은 성군도 죄를 범했고, 베드로와 같은 수제자도 주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칼뱅, 어거스틴'도 말하기를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한 존재'라고 말했습니다. 인간은 몸도 약하고 마음도 약하고 믿음도 약하여 열 번 스무 번 꺾어져 죄악의 상처를 입습니다. 사람은 모두가 마음의 뚜껑을 열고 보면, 그 마음에 슬픔의 탄식이 있고, 절망의 몸부림이 있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있는 저와 여러분도 예외는 아닙니다. 우리 모두는 상한 갈대입니다. 그런데 본문은 우리 하나님은 '상하고 약한 갈대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꺾지도 아니하신다.'고 했습니다. ▶몇 가지 생각해 보겠습니다.

 

①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 하시는 하나님!
여러분, 이 세상의 인심은 한마디로 '달면 삼키고, 쓰면 뱉어 버리는 인심'입니다. 자기에게 유익이 있고, 도움이 될 때는 이용합니다만 조금만 흠이 있으면 버림을 받습니다. 그뿐인가? 우리의 마음이 얼마나 잘 변합니까? 조석변개의 인생입니다.
한 청년이 회사를 위해 열심히 일을 했습니다. 아침 일찍부터 산업현장에서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열심을 냅니다. 그 모습을 보고 사장은 그의 어깨를 쳐주면서 '내가 가장 아끼는 청년'이라고 추켜세웁니다. 그러던 그가 과로로 쓰러져 병원에 입원을 하자 해임조치를 받았답니다. 이 청년은 배신의 눈물을 흘리며 애통해 했습니다. 이것이 세상의 인정입니다.
눅10장에 보면 그 유명한 비유 하나가 나옵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 만난 사람이 있습니다. 강도는 그에게 상처를 입히고 다 빼앗아 버리고 도망갔습니다. 그 때 그곳에 제사장도, 레위인도 그냥 지나갔습니다. 그러나 선한 사마리아인은 상처 난 인간, 쓰러져 갈대처럼 되어버린 인간을 불쌍히 여기고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치료해 주었으며 그를 주막에 맡기고 떠나면서 그 주막집 주인에게 비용이 드는 데로 더 갚아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여기 사마리아 사람은 우리 주님의 모습이요, 강도 만난 사람은 우리 인간의 모습입니다. 우리 주님은 상한 인간, 버려진 인간에게 사랑을 베푸시고 돌봐주십니다. 그러나 이 세상은 상처 난 인간을 버립니다. 사용 가치가 있을 때만 값이 있고, 가치가 없으면 버리는 세상입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이와 정반대이십니다. 상한 갈대도 꺾지 아니하신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쓸모 없는 인생도 버리시지 않으신다는 뜻입니다. 상하고 약한 인생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찾아주시고 고쳐주시며 회복시켜 주십니다. /믿/
고전1:26절 이하에 보면, 예수님은 약한 자를 택하여 강한 자를 넘어뜨리고, 미련한 자를 택하여 귀하게 세우십니다. /할/ 시34:18절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신다' 또 시51:17절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라' 여기서 말하는 상한 갈대는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의 전적 무능을 아는 사람이며 주 앞에서 자기의 죄를 통회하고 용서를 비는 그런 심경입니다. /할/
요8장을 보면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힌 여자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바리새인들이 이 여인을 예수께 끌고 와서 말하기를 '모세의 율법에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힌 여자를 돌로 치라고 하였는데 선생은 어떻게 하시겠소?'하면서 성난 짐승처럼 돌을 들고 서 있습니다.
여기 간음하다 붙잡힌 여자, 문자 그대로 상한 갈대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아주 꺾어 버리기를 재촉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땅에 무엇인가를 쓰시고 일어나시더니 그들에게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 없는 자가 있거든 먼저 돌을 들어 저 여자를 치라'고 하실 때, 양심에 가책을 받아 다 사라지고 그 여자만 홀로 남았습니다.
예수님은 '너를 정죄하던 사람들이 다 어디로 갔느냐?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리니 돌아가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상한 갈대에서 새 움이 나고 자라기를 바라시고 쓸모 있는 갈대로 소생되기를 기원해 주십니다. /할/
우리는 베드로를 잘 알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연약한 갈대임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갈릴리 바다에서 잔뼈가 굵은 건장한 사나이였기에 용기도 있었습니다. 그는 장담하기를 '다 주님을 버릴지언정 나는 주님을 버리지 않겠다.'고 큰소리를 쳤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주님이 잡혔을 때 세 번씩이나 예수님을 부인했고 심지어 주님을 저주까지 했습니다. 완전히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닭울음소리가 들릴 때 주님과 눈이 마주쳤습니다. 그의 가슴이 얼마나 찢어지고 상했겠습니까? 그의 심령은 상한 갈대처럼 꺼져가는 심지처럼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주님의 부활의 소식을 들었지만 실망하고 낙담하여 옛 직업으로 돌아가 고기잡이를 시작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이 베드로를 어떻게 했습니까? 그 상한 심령 그냥 버렸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다시 찾아가셨습니다. 조용히 베드로에게 물었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주님은 '네가 왜 나를 버렸느냐?'고도 '나를 왜 부인했느냐?'고 묻지 않았습니다. '여기는 뭐 하러 왔느냐?'고도 묻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물었다면 베드로의 그 상한 심령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또한 베드로에게 '너 나를 정말 믿느냐?' 그렇게 묻지도 않았습니다. 그런 식으로 물었더라면 베드로의 심령은 꺾여버렸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오직 사랑을 물었습니다. 그것도 세 번이나 물었습니다. 다른 것은 비록 부족해도 그래도 누구보다 주님을 사랑하는 베드로였습니다. 자신을 의지하다가 넘어지기는 했지만 사실 베드로의 마음속에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연약한 존재이기에 넘어진 것뿐입니다. 베드로의 변함 없는 사랑을 확인하신 주님은 베드로에게 다시 큰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는 목양 명령을 내리십니다. /할/
예수님은 이토록 조심스럽게 정성스럽게 베드로의 상한 심령을 치료하고 회복시키셨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주님은 상한 갈대와 같았던 베드로를 오순절 날 하루에 3,000명을 불러 회개시키는 위대한 사도로 만드신 것입니다. /아멘!/
여러분, 이러한 주님의 손길은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빈궁과 실패와 질병과 이별, 슬픔과 죄 때문에 상한 사람들을 불러서 위로하시고 은혜 베푸셔서 마침내 하나님의 나라의 귀한 일군을 삼으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고 회복시켜 주시고 다시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할/
삭개오를 보세요! 그도 동족에게 버림받은 상한 갈대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의 집에 가셔서 구원을 선물하시고 그를 회개시켜 새로운 갈대로 바꿔주셨습니다. 12년 동안 혈루증으로 고통 받은 상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도 38년 간이나 버려진 갈대였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그들을 일으켜 보살피시고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믿/
여러분! 어쩌면 우리 모두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한 베드로보다 더 주님을 부인하고 배신했는지 모릅니다. 현장에서 잡힌 간음한 여인보다 우리 마음속에 더 많은 죄가 있는지도 모릅니다. 삭개오 보다도 더 동족들을 배반하고 사리사욕과 이기주의에 빠져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38년 된 병자처럼 우리의 정신이 썩어져 버린 지도 모릅니다.
지금 우리나라의 거세게 불어오는 바람이 있습니다. 과시 병이 있습니다. 그 비싼 외국산 양주가 없어서 못 판다고 합니다. 어떤 양심 있는 미국 사람이 우리 한국 사람들을 가리켜서 '못된 송아지 엉덩이에 뿔이 난 격'이라고 꼬집었답니다. 우리 모두가 낮아져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상한 갈대, 상한 심령이 되어야 합니다. 다시 시인의 충고를 들어 보십시다.
시147:3절에 '하나님은 상한 심령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 하시도다.' /아멘!/


②꺼져 가는 심지도 끄지 않으시는 하나님!
20절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여기 '꺼져 가는 심지'라고 했습니다. 희미한 불씨가 조금 남아있을 뿐입니다. 금방이라도 꺼질 것만 같아 보입니다. 아니 꺼져가고 있기 때문에 그대로 두면 이제 곧 불은 꺼져버리고 맙니다. 심지에 불이 꺼질 때 거기에는 암흑과 절망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꺼져 가는 심지는 '믿음이 연약한 사람'을 가리킵니다. 또한 '죄로 인해 마음이 상한 심령'을 뜻합니다. 우리는 아무도 죄짓기를 원치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범죄 합니다. 그리고는 그 죄로 인해 마음이 상합니다. 괴로워하며 슬퍼합니다. 그러면서도 또 다시 죄를 짓습니다. 마침내 우리의 심령은 죄로 인해 상해지고 상한 갈대, 꺼져 가는 심지와 같이 됩니다.
또 나아가 꺼져 가는 심지는 '이 세상에서 여러 가지 괴로운 일들로 찢기고 상처 난 심령'들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양심의 불이 꺼져 가고, 신앙의 열정의 불이 꺼져 가고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엡5:8-9절을 보세요!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할/ 오늘 이 말씀이 우리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이것이 우리를 향하신 주님의 뜻입니다.
▶두 종류의 교인이 있습니다. 하나는 '연기 같은 교인'이 있습니다. 연기에는 빛이 없습니다. 불도 없습니다. 타던 불이 꺼지면 연기만 내게 되었습니다. 연기만 있는 곳에는 어둠과 눈물과 염려와 근심이 있을 뿐입니다.
또 하나는 '불꽃같은 교인'이 있습니다. 불에는 빛이 있고 뜨거운 열이 있습니다. 들어내지만 치유가 있습니다. 길이 있습니다. 방향이 있습니다. 화해가 있습니다. 사랑이 있습니다. 뜨거운 가슴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의 충만함이 있어야 합니다. /할/
불이 타오르려면, 좋은 심지가 있어야 합니다. 좋은 심지도 오래 사용하면 불통이 생겨서 딱딱하게 굳어집니다. 심지가 굳어지면 잘라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옥토가 되어야 합니다. 굳어지면 심령을 깊이 기경해야 합니다. 말씀으로 기경하고, 기도로 기경해야 합니다.

 

③우리 주님은 상한 갈대를 향한 긍정적인 기대가 크십니다.
공부를 못하는 자녀를 보고도 부모는 기대를 하게 됩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상한 갈대인 우리지만, 그런 우리에게 어떤 기대를 갖고 계십니다.
갈대는 약한 식물이지만 자랑스러운 특징이 있습니다. 가늘어도 곧게 자랍니다. 옆으로 뻗어나가지 않고 하늘을 향하여 수직으로만 올라갑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사방으로 흔들리고 쓰러지기도 하지만 결국 제 자리에 바로서 있습니다. 이런 것은 하나님의 종 된 그리스도인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주님은 상한 잡초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요 상한 갈대라고 했습니다. 갈대는 크게 자랍니다. 꺾이면서도 없어지지 않습니다. 비록 상한 갈대라도 잡초와는 다릅니다. 갈대는 약하지만 무엇인가 쓸모 있는 존재입니다. 사도바울은 고후4:8-10절에서 갈대와 같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가리켜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또한 고후6:8-10절에서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는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자로다' /할/
상한 갈대는 성도요 또한 교회로 비유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주님의 보혈의 기둥 위에 세워졌습니다. 기독교 역사는 피의 역사요, 고난의 역사요, 수난의 발자취입니다. 우리 교회사는 상한 갈대처럼 엄청나게 핍박을 받고 고난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렇습니다. 갈대는 무엇인가 저력이 있습니다. 짓밟히다가 또 일어서는 저력이 있습니다. /할/아멘!/
▶아인슈타인이 상대성의 원리를 발견하고 수많은 석학들이 모인 곳에서 행한 유명한 연설이 있습니다. 나치스의 독재에 대한 연설입니다. 그가 말했습니다.
'나치스의 독재에서 독일인을 구원한 기관이 어디인가? 먼저 대학 교수에게 기대를 걸어 보았습니다. 그러나 독일의 지성인들은 쉽게 나치스에게 굴복하고 말았습니다. 다음에 신문기자들에게 기대를 걸어 보았습니다. 그러나 얼마 못 가 독일 신문은 붓을 들어 나치스 만세를 불렀습니다. 그러나 뜻하지 않은 항거가 뜻하지 않은 곳에서 일어났습니다. 그곳은 평소에 무시당했던 교회였습니다. 교회만은 항거하며 수백 명의 목사가 감옥으로 가면서도 교회만은 진리와 자유를 사수했습니다. 나는 처음에 교회를 경멸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한없는 존경으로 교회를 바라봅니다.'라고 외쳤습니다.
아인슈타인이 교회에 대한 마지막 결론은 한마디로 '멋진 갈대'라고 극찬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들을 향하여 흔한 것 속에서 그 가치의 존귀함을 깨우쳐 주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고 하실 때 소금은 흔히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속에 참으로 존귀한 가치가 있음을 가르쳤습니다. 갈릴리 바닷가에서 나부끼는 갈대, 요단강가에 강한 바람에 쓰려진 상한 갈대, 그러나 그 갈대는 참으로 감추어진 쓸모가 많았답니다.
⑴갈대는 성서를 기록한 재료였습니다.
성경을 기록한 종이가 '파피루스'라고 하는 갈대입니다. 이 갈대에 성경에 기록되어 전승되었다는 것은 신기한 일입니다. 비록 우리가 상한 갈대일지라도 하나님 말씀을 가슴 깊이 새겨 기록할 갈대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죄로 말미암아 상할 대로 상한 어거스틴 같은 청년을 불러서 회개시킨 뒤 천 년간의 기독교 사상을 지배할 수 있는 위대한 신학자로 만들었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빈곤과 실패, 고난과 질병, 슬픔과 죄에 상한 인간들을 불러서 죄를 사해주시고 회개시켜 하나님나라의 귀한 일꾼으로 삼고, 하나님의 자녀 되는 권세를 주셨으며 복음의 산 증인들도 우리를 세우셨습니다. /믿/
⑵갈대는 피리를 만들어 하늘나라 노래를 부르는 기구로 쓰였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상한 갈대 같은 인간들을 다시 회복시켜 하늘나라를 노래하게 하십니다. 여러분 신앙인의 아름다운 삶은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하는 악기와 같아야 합니다.
엡5:18-21절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우리 신앙의 사람들은 매일의 생활에서 아름다운 찬송이 흘러나와야 합니다.
행16:24절에 바울과 실라는 빌립보 감옥에서 손과 발에 작고가 채워진 채 기도하고 하나님께 찬송했습니다. 이 찬송소리에 모든 죄수를 불안과 공포 속에서 위로를 받을 수 있었고, 홀연히 큰 지진이 나고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지고 옥문이 열리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아멘!/
오늘도 하나님을 향하는 찬양은 역사가 나타납니다. 원수마귀가 한 길로 왔으나 하나님의 찬양소리에 일곱 길로 도망가는 줄 믿습니다. /할/
▶찬송작고가 '헨리 크로스비'는 출생한지 6주만에 소경이 되어 상한 갈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상한 갈대를 들어 피리를 만들어 하늘나라 노래를 부르게 하셨습니다. 크로스비는 늘 이런 기도를 했답니다. '하나님! 내 육신의 눈은 보이지 않아도 좋습니다. 오직 주님만 볼 수 있는 속 영안을 열어주소서!'
그의 작곡은 무려 6천 여곡이 되는데 우리가 부르는 찬송도 많이 있습니다. '인해하신 구세주요, 주의 음성을 내가 들으니, 슬픈 마음 있는 사람' 외에도 참으로 많이 있습니다. '헨리 크로스비'는 육신의 눈은 소경이 되었지만 마음의 눈으로 하나님을 봄으로 주의 음성을 듣고 아름다운 노래를 작곡할 수 있었습니다. /할/
한국에도 크로스비와 같은 자매님이 있습니다. 서초동에 사는 송명희 시인입니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뇌성마비에 걸려 초등학교도 한번 가보지 못했습니다. 그런 그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시집을 5권이나 냈습니다. 그는 매일 시간을 정해놓고 기도생활을 한다고 합니다. 추울 때나 더울 때나 하루도 빠짐없이 정한 그 시간에 골방에 무릎 꿇고 주님과의 깊은 대화를 갖는답니다.
그때마다 하나님은 그에게 영감을 주시고, 시성을 주셔서 많은 글을 남겼습니다. 그의 시집 2권 1장에 <너는 자랑하지 말라>는 제목의 시를 소개합니다. <건강이 있다고/너는 자랑하지 말라/너는 기도할 수 있느냐?/만일 네가 기도할 수 없다면/너는 말 못하는 벙어리며/만일 네가 주를 보지 못하면/ 너는 눈먼 소경이다./내가 다리가 있다하나/만일 네가 주께 가지 못하고 있다면/너는 다리 있는 병신이다./너는 주께 회개하라/너는 주께 호소하라/입을 열어 주시며/눈에 안약을 바르시며/네 다리를 고치시는/주께 기도하라/그리하면 네게 아름다운 흰옷을 덧입히시라!>
하나님은 뇌성마비의 상한 갈대를 들어서 당신을 찬양하는 영감을 주시고 주옥같은 글을 쓰게 하셨습니다. /할/
⑶갈대를 자로 사용했답니다. 가만히 갈대를 보면 매듭이 있습니다. 이 매듭이 있음으로 해서 옛날부터 길이를 재는 자로써 사용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캐논'이라고 부릅니다. 정경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으로 바로 잣대를 의미합니다.
마찬가지로 상한 갈대를 꺾지 않은 주님의 심정은 이 연약한 갈대를 통하여 이 세상을 재는 자의 역할을 하라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들을 바라볼 때 자신의 양심과 생활을 판단해 주는 측정기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오늘의 사회를 저울질하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가정에 돌아가면 남편이나 자녀들이 어머니의 정결한 마음과 신앙 때문에 찔림을 주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직장에 가면 선한 양심과 진실 때문에 모든 동료들이 양심에 찔림을 주어야 합니다.
요3:20절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 모든 사람의 양심을 재는 자와 같습니다.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 앞에 설 때 자신의 행위를 보게 됩니다.
사랑하는 상한 갈대들이여, 우리 모두 불의한 곳에 정의의 자가 되십시다. 어두운 곳에 빛의 자가 되어야 하고,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람의 자가 되어야 합니다. 또 갈등이 있는 곳에 평화의 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 자는 하나님 말씀대로 정확한 치수를 가진 자라야 합니다. /아멘!/

 

④우리는 상한 갈대라도 주님의 손에 붙잡힌 갈대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사42:1절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자 곧 내가 택한 사람을 보라' 하나님이 택하시고 기뻐하시는 자이기에 그의 손이 붙잡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연약한 갈대이나 주님의 강한 손이 붙들어 주시면 우리는 자동적으로 강한 자가 됩니다. /믿/ 상한 갈대는 자신의 전적 무능함을 알아야 하며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죄를 고백하고 통회하는 것이 상한 사람의 심령입니다. 우리는 모두가 다 상한 갈대입니다. 육신 적으로 병들고, 사업의 실패, 가정의 불화, 죄로 얼룩진 심령, 모두가 상처 난 갈대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전능하신 우리 주님의 손이 상한 갈대를 붙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내 생명을 붙드신 것을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생명뿐만이 아닙니다. 건강, 가정, 사업, 직장, 자녀 특별히 우리 참 행복한 교회, 인간의 모든 것을 붙들고 계심을 확실히 믿으시기 바랍니다.
위대한 사명 자는 주의 손에 붙들린 자입니다. 사41:10절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할/

 

⑤대강절에 본문을 통해 '하나님의 종'으로 오신 주님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⑴참된 용기를 가지셨습니다.
주님은 바리새인들과의 정면충돌을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은 용기의 부족이나 죽음에의 두려움 때문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지시기 전까지 그가 하셔야 할 사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주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종은 자신의 혈기나 자존심으로 인해서 무모한 일을 저지르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 된다는 진리를 가르쳐 주십니다. 하나님의 종은 참된 용기와 만용을 혼돈해서는 안 됩니다. /아멘!/
⑵오해의 여지를 만들지 말아야 합니다.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신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소문을 내지 말 것을 당부하십니다. 왜 주님은 침묵을 명하셨을까요? 그것은 흥분을 잘하는 군중, 그리고 세속적이며 정치적인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는 군중, 그래서 예수님의 능력을 체험하면 할수록 그들의 세속적인 욕구를 충족시켜줄 정치적인 메시아이기를 원하는 그들의 오해를 경계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세상권력의 왕이 되기 위해서 오신 메시아가 아니며, 그것을 위해 기적을 베푸신 것도 아닙니다. 주님은 죄악에 빠진 온 세상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오신 메시아이며, 그가 베푼 기적은 하나님만이 베풀 수 있는 기적으로서 그가 구세주이심을 믿게 하고자 하는 목적 하에 사용되어진 수단이었습니다.
예수께서 내리신 침묵의 명령은 하나님의 종은 하나님이 명하신 사역 과정에서 결코 오해를 남겨서는 아니 된다는 교훈을 주십니다.
⑶겸손하고 온유함을 배워야 합니다. 이사야선지는 주님의 성품을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로 거리에 들리게 아니하며'라고 예언했습니다. 이는 겸손과 온유의 화신인 주님의 모습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러한 주님의 겸손과 온유의 마음을 배워야 합니다. 그것은 곧 우리가 예수의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할/
⑷주님의 정의를 우리가 세워야 합니다. 사42:1절에 '그가 이방에 정의를 베풀리라'고 하셨고, 3절에 '진실로 정의를 시행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비록 상한 갈대처럼 연약한 자라도 붙잡아 주시고, 꺼져 가는 등불이라도 기름을 부어 성령으로 충만케 하셔서 그의 사명을 감당하게 하십니다.
여기 '진실과 정의'를 시행할 것이라고 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간 나라에 요구하시는 가장 기본적인 도리입니다(렘5:1). 진실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의 도리를 말하며, 정의는 그것이 실천되는 올바른 생활을 뜻합니다. 또 사42:4절에 '세상에 정의를 세우기에 이르리니 섬들이 그 교훈을 앙망하리라' 여기 '섬들'은 세상과 모든 나라들을 일컫는 말입니다. 이는 장차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펼쳐지게 될 신약 교회의 비전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사60:9). 이 사명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⑸모든 인류는 예수의 이름을 사모해야 합니다. 본문의 결론에 해당되는 마12:21절에 '또한 이방들이 그 이름을 바라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고 하십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결국 온 세상에 끼치게 될 결과를 예언한 말씀입니다.
여기서 '그 이름을 바라리라'는 말은 '그 이름에 모든 소망을 걸고 열렬히 사모하는 자가 되라' 왜 그렇습니까? 예수의 이름 속에 신비한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멘!/할/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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