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그리스도인의 헌신! (롬 12:1-2)
사람은 모든 것을 다 잘할 수는 없습니다. 한 가지만 잘해도 축복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주먹 하나만 잘 돌려도 엄청난 돈을 벌 수 있습니다. 오래 전에 전설에 복서인 '무하마드 알리'는 '조 프레이저'와의 경기에서 1분에 2억을 벌어들였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1초에 300만원씩 번 것입니다.
아나운서나 가수는 좋은 목소리 하나 가지고 출세하고 돈을 법니다. 오래 전에 차두리의 아버지 차범근은 발 하나 가지고 세계에 이름을 날렸습니다. 한 가지만 잘 하면 축복을 받습니다.
프랑스 코냑 지방은 포도주 하나 잘 만들어 세계적인 지방이 되었습니다. 할아버지가 만든 것을 아버지가 팔고 아버지는 자녀를 위하여 만들어 땅에 파묻는다고 합니다. 그 술은 세계 시장에서 가장 인기 리에 팔리고 있는 상품입니다.
한 가지만 잘 하면 축복을 받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사람들을 축복하실 때에 한 가지만이라도 잘하면 축복을 주십니다. 모든 것을 잘하면 두말할 것도 없이 복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인간을 연약하여 모든 것을 다 잘할 수 없습니다.
①거룩한 결단 하나만 잘해도 하나님은 복을 주십니다. 눅15장을 보면 못된 둘째 아들 탕자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는 단점 투성입니다. ㉠성질이 급했습니다. 아버지가 늙어서 죽을 때쯤이면 자동적으로 유산이 돌아올 텐데 미리 자기에게 주어진 유산을 달라고 하며 자기 몫을 챙깁니다.
㉡탕자는 그 돈 가지고 창기들과 함께 허랑 방탕한 생활을 합니다. 차라리 열심히 사업하다가 실패했으면 동정이라도 갑니다. 탕자는 처음부터 허랑 방탕한 자였습니다. ㉢허비하는 인생, 무절제한 인생으로 살았습니다. 한 푼도 남김없이 써 버렸습니다. 생각 없이 허비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마지막은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조차 먹지 못하고 처량한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런 그가 거룩한 결단을 합니다. '나는 죄를 졌지만 아버지께로 돌아가자, 아들이라고 인정하지 말고 나를 품꾼으로 써 달라고 하자' 자존심을 버리고 결단하고 돌아왔는데 그의 아버지는 상상을 초월한 대접을 했습니다. '너는 죽었다가 살아난 내 아들이다'하고 목욕을 시키고 새 옷을 입히고 금가락지를 끼워주시고 살찐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②거룩한 생각 하나만 잘해도 복을 받습니다. 난쟁이 삭개오는 어떻게 하면 예수님을 볼 것인가? 고민하다가 '그래 뽕나무에 올라가자' 이 생각 하나 잘해 가지고 구원을 얻었습니다.
③거룩한 헌신 하나만 잘해도 복을 받습니다. 강문호 목사님은 <한 가지만 잘하면 하나님을 움직인다>는 책에서 ㉠봉사 한 가지만 잘해도, ㉡전도 한 가지만 잘해도, ㉢꽃꽂이 한 가지만 잘해도, ㉣헌금 하나만 잘해도, ㉤구역장 사역 한 가지만 잘해도, ㉥심방 하나만 잘해도, ㉦주일학교 교사 한 가지만 잘해도 ㉧찬양 하나만 잘해도, ㉨기도 한 가지만 잘해도, ㉩청소 하나만 잘해도, ㉪사랑 한 가지만 잘해도 복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할/
오늘 본문은 바른 예배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헌신 중에 가장 귀한 헌신은 예배인데 우리가 바른 예배 하나만 잘 드려도 복을 받습니다. /할/ ◀제목소개!▶
바울은 1절에서 구원받은 성도들은 일차적 삶의 목표를 하나님 앞에서 온전하게 헌신하는 삶을 강조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가장 큰 헌신은 예배입니다. 왜 헌신하는 삶을 강조했는가? 그 헌신으로 비로소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게 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이 헌신의 삶은 하나님을 가까이 하게 하는 삶입니다. 그래서 시73:28절을 보면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고 노래했습니다. 여기서 온전한 헌신을 말하면서 '몸을 제물로 드리라'고 했습니다. 여기 몸은 단순한 육체를 말함이 아니고 헌신하는 사람의 인격과 지식과 정성과 정신까지 포함한 몸을 말합니다. 헬라어적 사상으로는 몸은 영혼을 담는 그릇입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더 나아가 '온전한 몸의 헌신'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몸은 그리스도의 지체(고전12:27)이고 성령의 전(고전6:19)이기에 몸으로 헌신할 때 하나님과 이웃을 향한 섬김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롬6:13절에서 '너희 자신을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고 했습니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의 삶 중 하나는 '온전한 헌신'입니다. /믿/
헌신은 '기독교인으로서 구원받은 사람의 삶의 기초요 출발점'입니다. 헌신의 삶은 일회적이 아니고 일생동안 끊임없이 나타내야 할 의무입니다.
초대교회 때 교부였던 '크리소스톰'은 '주님을 위하여 한번 죽는 것도 어려운 일이지만 주님을 위해서 일생을 헌신하며 살아가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헌신을 이루기 위해서 본문은 한 가지 주의를 주고 있습니다. 2절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세대는 자기위주의 삶을 중시하는 세상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자기 자신이 곧 신입니다. 모두 자기를 가꾸고 섬깁니다. 오늘은 모두 자기 자신을 우상처럼 믿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본문은 오늘의 세대를 따르지 말라고 강조합니다.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하라' 우리가 헌신의 삶을 살기 위해서 두 가지기 필요합니다.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 동시에 '변화를 받으라'고 했습니다. 여기 변화는 '새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땅의 것만 생각하며 살아가던 삶의 기준이나 무신론자의 시각을 버리고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그분 중심으로 살아가려는 기독교적 인생관을 확립하는 삶입니다. 그때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는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몇 가지 각오가 필수입니다.
⑴자기 부정이 있어야 합니다. 막8:34절에서 주님은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에서 '자기부정'처럼 중요한 신앙의 덕목이 없습니다.
⑵결심과 결단이 필요합니다.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의 도덕적 의무를 강조한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의 선한 이웃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이웃은 우리 신앙 인들에게 중요한 대상입니다. 왜냐하면 이웃은 모두 나와 가장 가깝게 깊이 연관되어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다 전도의 대상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신앙의 경건의 훈련이 절대 필요합니다. 결심하고 결단하고 기도로 무장해야 신앙을 단정히 행할 수 있습니다.
▶헌신 자들에게 꼭 필요한 세 가지가 있습니다.
⑴소망의 끈을 놓지 말아야 합니다. 소망은 삶의 원동력이고 능력이고 에너지이고 목적이고 뜻이고 힘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소망을 주시는 분입니다. 이 땅에서도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시는 하나님은 우리들의 영원한 천국을 예비하시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는 그런 소망의 하나님, 희망의 하나님을 믿기에 이 세상의 미래도 믿고 살아갑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미래도 소망의 하나님이 책임지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한마디로 '소망이 있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늘 소망을 말해야 하고 선포해야 합니다. 다 절망하고 비관하고 멸망을 말해도 그리스도인은 희망을 말하고 천국을 말하고 부활을 말해야 합니다.
⑵사랑의 덕을 세워야 합니다. 사랑은 성령이 나와 함께 하실 때 나타나는 모든 삶의 자질이 사랑입니다. 사랑은 끌어안고 하나 되고 헌신하고 중보하고 연합하게 하는 정신입니다. 그래서 사랑이 있는 곳에 변화가 일어나고 일치가 일어나고 하나가 이루어지고 연합이 이루어집니다.
⑶믿음을 굳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히11:6). 믿음은 세상을 이기는 능력입니다. 요일5:4-5절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 /할/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 대한 바른 예배론 입니다.
▶1절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여기서 '그러므로' 이 접속사는 로마서 전체에서 세 번 나옵니다. 사도 바울은 아주 중요한 전환점을 말할 때 이 접속사를 섰습니다.
롬5:1절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롬8:1절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그리고 본문에서 사용했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고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를 맺는 자들이기에 이제부터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접속사입니다.
본문의 '그러므로'는 죄 때문에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아 이제 우리가 '구원받은 성도가 되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이렇게, 이렇게 살아야 되겠다.'는 결단이 묻어 있는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이북에는 모든 인민을 가리켜서 형제라고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형제는 이북에서 말하는 형제와는 근본이 다릅니다. 여기서 형제란 '한 근원에서 나왔단 말로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을 가리켜서 하는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 믿음을 정말 가슴속에 간직한 사람은 다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들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자들을 형제라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한 형제 된 자들입니다. 형제는 핏줄의 관계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사랑을 품고 권면 한다는 뜻입니다. 지금 바울의 권면은 내던지듯이 강제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자비하심을 가지고 권면한다고 말합니다.
강한 명령보다는 자비로운 권면이 더 가슴을 찌릅니다. 예수님 당시에 주의 말씀은 갈릴리바다의 몇 명의 어부들 밖에 먹혀듣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대제사장의 명령은 모든 유대인들에게 강한 호소력을 발휘할 수 있었으나 로마 황제 시저의 명령은 대 로마제국을 흔들어 놓고 전 식민지 백성들을 복종시키는 위력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2천년이 지난 오늘에 와서 예수님의 말씀은 대 제사장의 명령보다 위력이 있었고, 로마 황제 시저의 우렁찬 명령보다도 몇 만 배 강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왜 예수님의 말씀이 그들보다 위대합니까? 바로 예수님의 말씀 속에는 자비하심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지금 자비한 마음으로 형제들에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에도 권면했고, 갈라디아교회에도, 골로새교회에도, 데살로니가교회에도 자비한 마음으로 권면을 했습니다.
①본문에서 우리는 누구인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누구인가?
⑴구원받은 형제들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⑵주의 자비를 힘입은 자들입니다.
⑶권면을 받은 자들입니다. 바른 권면을 잘 받아야 복을 받습니다. /할/
②바울이 본문에서 무엇을 권면하고 있습니까?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여기 몸이라는 헬라어는 '소마'인데 이는 '육체'를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이전에는 우리 몸은 자아가 지배하는 집이 있고, 죄가 지배하고, 사탄이 지배하고, 사망이 지배하는 집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영접한 이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성도의 몸은 하나님의 영인 성령이 거하시는 성령의 전(고전6:19)이 되었고 성령이 지배하고 보호하시는 몸이 되었습니다.
③성경은 몸에 대한 여러 가지 교훈이 많이 있습니다.
롬6:13절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너의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고전6:19-20절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몇 가지 교훈이 있습니다.
⑴내 몸은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입니다. 참 이상합니다. 분명히 내 몸인데 내 몸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사실 내 몸은 내 몸입니다. 그러나 내 몸을 마음대로 할 수 없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내 몸인 때에는 내 마음대로 먹고, 마시고, 듣고, 자고, 자유자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그 생활은 자기중심이 되고 맙니다. 이기적이 되고 극단의 개인주의가 되고 맙니다. 향락에 빠지고 죄에 빠지고 방종하게 됩니다. 성경은 '너희 몸은 값을 주고 산몸이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내 몸은 내 것이지만 사실은 내 것이 아닌 하나님의 것입니다. 우리는 이 개념부터 바로 이해해야 합니다. 내 몸의 실질 소유자는 하나님이십니다. /믿/
한국의 젊은이라면 누구나 다녀오는 곳이 있습니다. 어디입니까? 바로 군대입니다. 이것이 내 몸이지만 국가에서 한번 영장을 발부하면 어쩔 수 없이 3년 동안 가정도, 직장도, 사업장도 제쳐놓고 정든 고향을 떠나 군대에 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때 비로소 느끼게 된 것은 '이것이 내 몸이지만 내 몸이 아니구나' 내 몸이지만 국가에 속한 몸입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에서는 우리의 몸을 값으로 샀다고 말합니다. 지불된 만큼의 구실을 해야 된다는 뜻입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몸이 아닙니다. 이제는 하나님 앞에 붙들린 몸, 즉 속된 표현으로 '하나님께 코가 낀 상태'입니다. 이제 그분의 이끄는 데로 가야합니다. /믿/ 그리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내 몸이 병들지 않도록 잘 관리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리고 내 몸을 더럽히지 않도록 잘 관리할 책임도 있습니다. 내 몸이 병들면 우선 하나님이 손해를 보십니다. 그리고 국가가 손해를 보고, 가정이 손해를 보고, 사회가 손해를 보게 됩니다. 또 그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 아닙니다.
유교의 정신에서 보면 육체는 부모로부터 주어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몸을 상하거나 병들거나 추하게 굴리면 불효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에서는 이것을 한 차원 더 높여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 몸은 하나님께로부터 왔기 때문에 내가 내 몸을 잘못 관리해서 병들거나 추하게 만들면 그것은 죄라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사람들이 내 몸을 내 것이라고 생각할 때 어떤 결과가 옵니까? 그때는 내 몸을 함부로 사용하게 됩니다. 범죄에 사용하기도 합니다. 악의 구렁텅이로 몰아넣기도 합니다. 내 몸을 방탕으로 병들게 하기도 합니다. 술로 망가트리고, 마약으로 병들게 하고, 음행으로 추하게 만들고 맙니다.
또 내 몸을 상품화해서 사고 파는 매춘 행위를 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때로는 자살을 해서 죽기도 합니다. 왜 이러한 결과들이 나옵니까? '내 몸을 내 것'이라고 생각해서 그렇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내 몸은 내 것이 아니다'라는 의식입니다. 내 몸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런 정신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이 시대에 몸을 잘 관리할 수 있습니다. /아멘!/
⑵내 몸이 어떤 몸입니까? '성령의 전'입니다. '너희 몸은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이 말씀은 내 몸 속에 성령께서 내주 해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몸의 주인은 내가 아니고 성령이십니다. 우리는 내 몸을 내 마음대로 더럽힐 수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내 속에 성령 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믿/
그렇습니다. 신앙 인들이 귀한 것은 그 속에 성령께서 내주 해 계셔서 그분이 주인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무엇보다도 마음을 중시해야 합니다. 그 마음속에 좋은 생각을 품고 살아야 합니다. 그 마음속에 좋은 이상을 품고, 좋은 뜻을 품고, 아주 좋은 정신을 품고 살아야 합니다.
⑶내 몸이 어떤 몸인가? '하나님께 드릴 몸'입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너희 몸을 거룩한 산 제사를 드리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산 제사라는 말은 '정신을, 뜻을 드리는 것'을 말합니다. 죽은 제물이 아니고 살아 있는 나의 삶을 모두 드리는 것입니다.
나의 몸을 드리고, 나의 영혼을 드리고, 나의 생각도, 뜻도, 이상도 드리고, 심지어는 나의 인격도 드리고, 지식도 드리고, 감정도 드리고, 의지도 드리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 전심으로 드려지는 예배가 산 제사요 진정한 제물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몸을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데 사용해야 합니다. 제물로 드려야 하기 때문에 이 몸을 잘 관리해야 합니다. 더럽히지 않도록 보호해야 합니다. 나태하지 않도록, 방탕하지 않도록, 술 취하지 않도록, 병들지 않도록 잘 관리해야 합니다.
사람이 몸이 더러워지면 우선 기도가 되지 않습니다. 정신과 마음이 더러워지면 하나님을 자꾸만 피하고 싶어지고 멀리하고 싶어집니다. 그리고 몸이 병들게 되면 영적 생활하는 데 힘을 잃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누리는 자꾸만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됩니다. 그러다가 아주 떨어져 나가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버려지기도 합니다.
그렇게 되면 성령께서도 그 몸에서 철수하게 됩니다. 그 사람은 신앙적으로 사생자가 되고 맙니다. 그래서 성경은 '네 몸은 네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것이다. 그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라'고 강조하교 계십니다. /아멘입니까?/
④다시 한 번 정리합시다. 그 몸으로 무엇을 하라고 합니까?
⑴기뻐하시는 제사를 드려라! 기뻐하시는 제사는 믿음으로 드리는 제사입니다. 형식과 의식이 아닌 몸과 마음과 정성과 뜻을 다하여 드리는 예배가 바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입니다.
⑵거룩한 산 제사를 드려라! 거룩하다는 뜻은 '성결되다, 구분되다, 깨끗하다'입니다. 이스라엘의 구약의 제사는 흠 없는 짐승을 드렸습니다. 그러나 신약에 와서는 흠 없는 짐승 대신 성도의 자신의 심령을 주님께 드리는 예배로 바꿔졌습니다.
깨끗한 심령으로 드리는 예배가 되기 위해 우리의 죄와 허물을 주님께 회개하고 주님의 보혈로 용서를 받아야 합니다. 시51:17절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⑶몸을 산 제사로 드려라! 여기서 몸은 단순히 육체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전부를 가리킵니다. 여기에 두 가지의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 전에 나와 자신을 드리는 예배요, 둘째는 살아 움직이는 내 자신의 삶 그 자체가 하나님께 바쳐지는 예배가 되라는 것입니다. 예배시간에만 하나님께 나 자신을 바치는 거룩한 시간을 가질 것이 아니라 생활 전부를 하나님의 것이 되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⑷산 제사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산 제사란 우리의 삶을 통해서, 생활을 통해서 드리는 제사를 가리킵니다.
▶어떤 집사님 가정에 연로하신 부모님을 모시고 살고 있는데 하루는 부모님이 아들 내외를 불러 놓고 말하기를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조상에게 제사를 드리지 않는다고 하니 너희들도 우리가 죽더라도 제사를 드리지 않겠구나? 우리는 죽어서 굶기 싫다.'고 말합니다. 부부집사는 깜짝 놀랐지만, 그 순간에 성령께서 주시는 지혜로 '아버님이 말씀하시는 제사는 죽은 제사입니다. 저희들이 그것보다도 훨씬 더 좋은 산 제사를 보여드리겠습니다.'
그 후로부터 아들 내외는 더욱 정성을 다해서 부모님을 잘 모셨습니다. 끼니때마다 늘 부모님이 좋아하시는 음식을 차려 드렸습니다. 철마다 보약도 지어서 드렸습니다. 용돈도 넉넉하게 드렸습니다. 얼마가지 않아서 부모님은 아들 내외를 다시 불러놓고는 '그래, 너의 말이 맞다. 산 제사가 죽은 제사보다 훨씬 더 낫구나. 걱정하지 말고 이제는 마음껏 교회에 다녀라. 이제 우리도 너희들을 따라서 교회 다녀야겠다.' /할/
그렇습니다. 산 제사는 우리의 생활로서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의미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몸을 산 제사로 하나님께 드리되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께 드려지는 제물은 흠이 없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산 제사란 하나님께 최고의 것을 드리는 제사를 의미합니다. 아브라함은 최고의 것을 드렸습니다. 100세에 얻은 이삭까지도 드렸습니다. 마리아는 옥합을 깨뜨렸습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최고의 재능, 시간, 물질 아낌없이 드리는 제사를 말합니다.
▶영국에 내려오는 말에 의하면 아들 4형제가 있으면 첫째는 정치가, 둘째는 군인, 셋째는 학자, 넷째는 목사를 시키라는 말이 있습니다. 맨 못난 것 이것저것 할 수 없으니 목사나 시키자 그런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영국이 쇠퇴해 가는 원인이 된 것입니다.
옛날에 미국인들은 하나님 제일주의로 살았고, 영국 사람들은 자기 자신 제일주의로 살았습니다. 그래서 미국은 부강해 졌지만, 영국은 해뜨는 나라에서 해가 지는 나라로 쇠퇴해진 것입니다. 하늘나라의 법칙은 30, 60, 100배의 축복입니다.
존번연 목사는 '우리가 덧셈을 하면 하나님은 뺄셈을 하시고 우리가 뺄셈을 하면 하나님께서는 덧셈으로 채워 주신다'고 했습니다. /믿/
㈁산 제사는 온전히 주님께 헌신하는 제사입니다. 헌신이란 말은 일반 세상에서는 별로 사용하지 않는 기독교 전문 용어가 되었습니다. 사람이 날 때부터 헌신의 요소를 가지고 나왔습니다. 그런데 드리는 대상에 따라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가령 물질 앞에 자신의 전체를 드리면 그 사람은 물질의 노예가 되는 것이고, 명예 앞에 자신의 전부를 드리면 명예의 노예가 되고, 권력 앞에 전부를 매달리면 그 권력의 노예가 되고 맙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도에 지나친 경우가 있습니다. 너무 자식에게 빠지면 그 부모는 자식의 종이 되고 맙니다.
우리는 우리의 귀한 몸을 하나님께 헌신해야 합니다. '크리소스톰' 교부는 산 제사는 '눈은 악을 보지 않고, 혀는 비방의 말을 하지 않고, 손은 죄를 짓지 아니하면 그것 자체가 제사가 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면 하나님이 더더욱 기뻐하신다고 했습니다. 손은 구제하고, 봉사하고, 기도하고, 입은 저주하는 자를 축복하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귀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 그 자체가 바로 산 제사가 된다고 했습니다.
㈂우리 하나님께 나와 예배드릴 때 기쁜 마음으로 헌신하시기 바랍니다. 축복은 예배를 통해서 옵니다. 모든 주님의 역사는 이 예배를 통해서 일어납니다. /믿/
아벨은 기쁜 마음으로 하나님께 제물을 드렸더니 하나님께서 기쁘게 그의 제사를 받으셨습니다. 행7장에 스데반은 자기의 몸을 기쁘신 재물로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주님께서 하나님 우편에 계셔서 그의 영혼을 반가이 맞아 주셨다고 했습니다. 창8장에서는 하나님은 노아의 제사를 흠향하시고 기뻐 받으셨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적은 것으로 바치면 하나님께서는 큰 것으로 축복해 주십니다. 뱃세다 광야의 해 저무는 저녁, 남자 장정만 5천명이 넘는 큰 무리에게 어느 소년이 내어놓은 보리떡 5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주님이 축사하시니 그 많은 군중들이 배불리 먹고 나머지가 열두 광주리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남은 열두 광주리는 누구의 것이 되었습니까? 바로 헌신했던 그 어린아이의 것이 된 줄 믿습니다.
⑤이제 우리가 무엇을 헌신해야 할 것인가?
⑴먼저 우리 머리를 하나님께 바쳐야 합니다. 머리는 인간생명의 가장 핵심적인 요소입니다. 플라톤은 머리는 인간이성의 자리요, 생각하는 자리라고 했습니다. 머리는 인격을 대표합니다. 바른 생각을 하나님께 드리는 헌신자가 되어야 합니다.
⑵손으로 헌신해야 합니다. 막3장은 예수님께서 손 마른 자를 고쳐주셨습니다. 손은 보배입니다. 그런데 손이 신경이 마비되면 아무 일도 못합니다. 작가는 손으로 글을 쓰고 농부는 손으로 농사를 짓고, 예술가는 손으로 작품을 만들고 주부들은 그 속으로 맛있는 음식을 만듭니다.
예수님은 무용지물의 손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무용지물의 손이 있으면 문명은 파괴됩니다. 악한 일을 합니다. 하와처럼 선악과를 따먹는 반역의 손이 됩니다. 가인의 손이 되고 가롯 유다의 손이 되기 쉽습니다. 그러나 생명의 손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못 박히신 손이 그러합니다. 우리 모두 겸손의 손, 사랑의 손, 능력의 손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⑶가슴을 헌신하십시오, 인생의 깊은 것은 마음의 산물입니다.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것은 가슴에서 나옵니다. 칸트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 둘 있는데 하나는 밤하늘에 별빛이요 또 하나는 가슴속에 있는 양심'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들의 마음은 예수님이 주시는 생명수로 넘쳐 나시기를 바랍니다.
⑷눈으로 헌신하십시오. 눈은 만물을 보고 깨달음을 얻습니다. 바디매오는 주님 앞에 나의 '내가 보기를 원하나니이다.'라고 했습니다. 육신의 눈도 중요하지만 영의 눈이 더욱 중요합니다. 영의 눈이 밝아지기 위해서는 우리의 마음의 눈을 깨끗이 닦아야 합니다.
우리는 세 가지의 눈을 가져야 합니다. ㈀올바로 보는 눈을 갖자! 이 눈은 공정한 눈이요, 하나님의 척도를 지닌 눈입니다. ㈁넓게 보는 눈이 귀한 눈입니다. 그리고 ㈂멀리 보는 눈을 가져야 합니다. 이 눈은 소망의 눈이요, 미래의 눈입니다.
⑥우리가 늘 드리는 예배순서에 대하여 상고해 보자!
⑴예배 순서 중에 인간이 하나님께 올리는 것은 찬송과 기도와 헌금입니다. 그리고 위에서 내려오는 것이 있는데 바로 말씀이요, 축복(도)입니다. 찬송과 기도는 서로 다른 것 같으나 사실은 같은 것입니다. 찬송은 공동으로 드리는 기도요, 공적 기도는 회중을 대표해서 드리는 기도입니다.
대표기도시 알아야 할 것은 자기의 사적인 기도를 해서는 아니 되고 하나님을 위하여 교회를 위하여 주의 종을 위하여 회중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입니다. 너무 길게 해도 안 되며 장로교회에서는 대표기도를 3분을 넘기지 않은 것이 예의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찬송을 통해서 표현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우리의 소원입니다. 찬송은 하나님을 반역하고 죄를 범한 자가 통회 자복하는 시간이 되고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인간이 흠모하는 시간입니다. 찬송은 종교적인 요구와 만족을 가지게 하며 신령한 은혜의 분위기를 만들어 줍니다. 그러므로 찬송할 때도 기도하는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⑵성경 봉독은 하나님께서 우리 예배하는 자에게 직접 말씀해 주시는 일이기에 그 중대성을 깊이 마음에 새겨서 성경을 읽고 그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⑶가장 중요한 예배의 요소 중에 하나가 설교시간입니다. 설교는 예배의 중심입니다. 설교는 주의 종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을 대신하여 예배 자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설교는 웅변이 아니요, 강연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⑷헌금시간입니다. 우리는 헌금하면 우선 돈이라는 관념이 먼저 옵니다. 그런데 헌금은 돈이라기보다 신앙입니다. 헌금은 교회 재정 때문에, 또는 예배 부속적인 것으로 드리는 것이 아니라 예배를 통해 받은 성경 말씀과 설교와 은혜에 감격하여 자기의 전심전력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감사함의 표현이며 아멘의 구체적인 고백입니다.
⑸축도시간은 복이 내려오는 시간입니다. 민6:22-27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이렇게 축복하여 이르되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그들은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지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 구약의 축도입니다./할/
▶2절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우리의 몸을 하나님께 바치기 위해서 먼저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몸은 언제나 마음이 지시하는 대로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1절에서는 예배생활에 정성을 다하라는 교훈이며, 2절에서는 예배드리는 자의 생활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가르쳐 줍니다.
①'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세상 사람들은 땅엣 것만 생각합니다. 그들은 썩어질 것, 덧없는 것, 일시적인 것만 추구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새로운 마음, 변화를 받은 마음은 다릅니다. 우리는 위엣 것을 생각하면서 살아갑니다. 영원한 것을 바라보면서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소망을 두면서 살아갑니다.
▶여기서 말하는 이 세대란 어떤 세대인가? 몇 가지 뜻이 있습니다.
⑴변화무쌍한 세상을 말합니다. 이 세상에 사람들이 걸어가는 유행을 가리켜서 한 말입니다. '본받지 말라'는 말은 '유행을 따르지 말라'는 것입니다. 또 원어의 더 깊은 뜻은 '형식을 따르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유행에 민감합니다. 옷, 머리, 인테리어, 심지어 자동차까지도 그 시대에 유행에 민감합니다. 그러나 유행은 흘러가는 것입니다. 대단한 것이 못됩니다. 어떤 유명인사는 '이 세상 유행을 따라 사는 사람은 흐르는 물에 떠내려가는 물고기와 같다.'고 했습니다.
삼상16:7절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나님께서 다윗을 왕으로 뽑을 때 사무엘 선지자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⑵이 세대란 세상의 권위, 권력, 돈 등등 세상의 힘을 말합니다.
권력을 섬김보다는 지배욕입니다. 세상은 돈 있고, 권력 있고, 높은 지위를 가지고 있으면 소위 출세했다고 합니다. 사람의 눈에는 이런 것들이 대단한 것으로 보여도 하나님의 눈에는 별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가장 값있는 생활은 '얼마나 올바르게 살고 남을 섬기며 사느냐?'입니다.
⑶이 세대란 죄악된 세상을 말합니다. 이 세대를 가리켜 악한세대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보지말고 하나님을 보고 살아야 합니다. 사람은 '안드로포스'란 말에서 유래되었는데 '위를 보고 사는 자'란 뜻입니다. 히12:2절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할/
⑷이 세대는 무엇보다도 자기 훈련이 너무나 부족한 세대입니다. 그래서 모두들 자기 통제가 안 되고 있습니다. 이 시대는 자기를 효과적으로 다스리기가 아주 어려운 시대입니다. 그래서 보면 가정들이 너무 쉽게 파괴되고 있고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가 너무 쉽게 갈라지고 있고 형제간의 관계도 너무 쉽게 벌어지고 있고 부부간의 관계도 너무 쉽게 갈라서고 청산되고 맙니다.
좀 생각하고, 손해도 좀 보고, 때로 후퇴도 해 보는 자기 훈련의 모습은 보이질 않습니다. 모두들 기준이 없이 자기 편리한 대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지금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는 풍조이고 모습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고 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냥 편승해서 이 시대를 살면 안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모두 자기 훈련을 위해서 힘써야 합니다. 자기 자신을 부단히 훈련시키고, 채찍질하고, 갱신시켜 나가야 합니다. 자꾸만 게을러지려고 하는 자신을 훈련시켜야 합니다. 속에서 타오르는 욕망을 통제하고 절제시키기 위해서 훈련시켜 나가야 합니다. 자꾸만 주장하고 싶은 마음도 효과적으로 통제하기 위해서는 훈련해야 합니다.
또한 방종하고 싶은 나 자신의 마음을 자꾸만 훈련시켜 억제해 나가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나는 조금도 손해를 보지 않고 이익만 보겠다는 이기적인 자신을 훈련시켜서 남의 처지도 이해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나 자신을 그냥 놔두고 내 생각대로 살아가다 보면 나도 별수 없이 이 세상의 풍조에 그냥 휘말려 살아가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라인홀드 니버'라는 윤리신학자는 '인간의 본성속에는 죄 성이 잠재되어 있고, 죄의 근원도 잠재되어 있다. 그런데 이것들이 어떤 계기가 되면 분출해서 사람으로 하여금 방종하게 한다'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도 그런 고민을 했기에 고전9:27절에서 '내가 내 몸을 쳐 복종케 하노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자기 훈련입니다.
②변화를 받자!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여기 변화란 인격과 성격의 변화를 먼저 의미하지 않습니다. 성경의 변화란 '거듭남'을 의미합니다.
요3:5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변화를 어떻게 받아야 합니까? 고후5:17절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성령의 역사로 거듭남이 되고 그때부터 성령의 열매가 맺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성격, 인격, 습관, 버릇 등이 고쳐집니다.
본문이 말하는 변화란 외향적인 외모를 말하지 않소, 심령의 변화입니다. '마음을 새롭게 하라' 또 '변화를 받아라'라는 말은 다른 방향으로 가라는 말입니다. 지금까지는 나 자신을 위해 살아왔지만 이제는 하나님을 위해 살아가라는 말입니다. /믿/
③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라!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라'
⑴하나님의 뜻을 찾는 비결은 무엇인가?
㈀성경에서 찾아야 합니다.
㈁신앙 양심에서 찾아야 합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섭리에서 찾아야 합니다. /할/
⑵성경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예수를 잘 믿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요6:40절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전도해서 생명을 살리는 것입니다. 딤전2:4절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순종하는 삶입니다. 삼상15:22절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할/
㈃기뻐하고, 기도하고, 감사하는 삶입니다. 살전5:16-18절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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