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8강) 가이사에게 보내다오! (행25:1-12)
며칠 전에 대통령이 미국 소고기 문제로 국민들에게 직접 사과하고 용서를 빌었습니다. 대통령의 인기도가 많이 내려갔다고 합니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가 그분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왜 위정자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까? 바울은 그 이유를 이렇게 말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딤전2:1-2절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한 중에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니라"
우리가 위정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은 결국은 내가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게 되는 비결이라는 것입니다. 남이 잘 되면 내가 고요하고 평안하여 집니다. 대통령이 잘 되고, 윗사람이 잘 되면 내가 고요하고 평안하여 집니다.
어떻게 기도하라고 합니까?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이 세 가지는 같은 것 같지만 조금은 다른 언어입니다.
'간구'는 헬라어로 '데에세이스'라고 기록되어 있는 데 '긴박한 상황에 하나님께 해결을 요구하는 것을 간구'라고 합니다. 비상기도제목으로 구하는 것을 '간구'라고 합니다. 지금 정부나 여당이나 청와대에서 이런 비상기도를 드려야 할 때입니다.
여기 또 '기도'는 '프로슈케'라고 기록되어 있는 데 이는 '하나님과 대화를 의미'합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대화입니다. 그래서 간구는 기도일 수 있지만 기도는 간구일 수 없습니다. 간구는 달라고 하는 것이지만 기도는 꼭 달라고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무엇을 드릴가요'라고 물어 보는 것도 기도입니다.
그 다음 '도고'는 '엔륙세이스'라고 기록되어 있는 데, 이는 '중보기도'입니다. 남을 위하여 드리는 간구와 기도를 '도고'라고 합니다. 우리가 이런 기도를 해야 합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밀라노의 어떤 통치자가 너무 잔인한 정치를 했습니다. 그래서 모든 국민들은 그를 미워하고 욕하고 싫어하고 하루 빨리 죽거나 물러나기를 원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할머니 한 분은 늘 그 통치자를 위하여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조금도 쉬지 않고 기도했습니다. 이런 소문이 그 통치자의 귀에 들어갔습니다.
그 통치자는 자기가 그렇게 기도를 받을 만큼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스스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신하 한 명을 보내어 왜 자기를 위하여 그렇게 기도하는지 알아보았습니다. 그 때 할머니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밀라노 이곳에 매우 잔인한 성주가 부임하였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빨리 죽기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바라는 대로 그가 죽었습니다. 그런데 후임으로 온 성주는 더 나쁜 사람이었습니다. 더 포악했습니다. 전 성주가 죽으면 나라가 편안할 것이라고 기대하였던 국민들은 더 실망한 적이 있습니다. 지금 성주는 세 번째 성주입니다. 세 명중에 가장 악한 성주입니다. 그러나 그가 죽고 나면 더 악한 성주가 올까 봐 나는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지금 성주가 오래 살기 위하여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 폭군이 이 보고를 들고 크게 회개하고 바른 통치자가 되었답니다. /할/ 한 할머니의 기도가 나라를 변화시켰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이런 의미에서 대통령을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누가 뭐라고 해도 믿음의 대통령이었습니다. 1948년 초대 국회의장이었던 이승만은 우리나라 첫 국회를 시작하기 전에 이윤영 위원에게 기도를 시켰습니다.
하나님이 이 나라를 지켜야 한다고 말하면서 하나님께 나라를 맡기는 기도부터 하게 한 이야기는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초대 국회가 개원하자 말자 국회에 기도 실부터 만들어 놓고 나라와 대통령과 국회위원들과 공직자들을 위하여 기도가 끊어지지 않게 했던 대통령이 이승만 장로입니다.
1985년 레이건 대통령이 우리나라에 와서 국회의사당내에 기도 실이 있는 것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우리 미군 4만 명이 이 땅에서 죽으면서 공산주의를 막아 주어서 한국이 평화스러운 나라가 된 줄 알았는데 국회의사당 안에 있는 기도가 공산당을 막았다는 것을 미처 몰랐습니다.'
우리는 대통령을 위하여 고위 공직자를 위하여 중보 기도하여야 합니다. 왜 이렇게 기도하여야 할까요? 바울은 그 이유를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기 위해서'라고 했습니다. /할/아멘!/
이제 본문으로 들어갑니다. 24장에서는 바울이 벨릭스 총독에게 재판을 받은 내용입니다. 벨릭스가 바울을 심문해 봐도 어떤 혐의를 못 잡았습니다. 다만 그것이 유대 종교법에 해당되는 문제였기에 벨릭스 총독은 재판을 무기한 연기시키어 바울을 가이샤라 감옥에 넣었습니다.
벨릭스는 악한 사람이었지만 바울만은 선하게 대했습니다. 감옥에 넣었지만 어느 정도는 자유를 보장해 주었습니다. 친구들이 면회를 오면 충분한 시간을 주었고, 그도 수시로 바울에게 찾아갔습니다.
그가 찾아가서 복음을 들었지만 그는 구원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는 두려운 마음으로 복음을 받지 않고, 딴 생각이 있어서 바울을 찾은 것입니다. 행여나 돈을 주지 않을까 해서 바울을 찾았지만 그는 복음 듣는 것을 다음으로 미루고 말았습니다.
그는 유대인들이 헬라 사람들과의 가이샤라 상권 문제로 혈전이 벌어졌는데 벨릭스는 헬라 사람들의 편에 서서 유대인들을 죽이고 돈도 빼앗았습니다. 그는 너무도 편파적인 정치를 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데모가 일어났습니다.
로마 총독 가이샤에게 호소문을 보낸 것입니다. '악한 벨릭스 총독을 바꿔주시오! 우리는 그 밑에서 도저히 살수가 없습니다.' 호소문이 가이샤에게까지 도착했습니다. 그는 즉시 해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25장부터 베스도 총독이 유대를 다스리게 되었습니다. 이제 24장과 25장 사이에는 2년의 세월이 흘러갑니다. 바울은 2년 동안 감옥에 있었는데 재판의 결론이 나지 않습니다. 미결수로 2년 간을 썩고 있습니다.
생각하면 이처럼 헛되고 무모한 세월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바울은 신앙적인 인내로 조용히 주님의 뜻만을 기다렸습니다. 사실 바울은 아무 죄도 없이 2년 동안 콩밥을 먹고 있습니다. 그런 고난을 당하면서도 인내로 참습니다. 그가 후에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빌1:12절 "형제들아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여기 '나의 당한 일'은 사도 바울의 선교의 고난사를 말합니다. 바울이 얼마나 많은 생각을 하면서 이 말씀을 했겠습니까? 그리고 사도바울은 정정당당한 자유인의 몸이 아니고 쇠고랑을 찬 죄수의 몸으로 로마에 갑니다.
그가 체포되어 약 3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로마로 가게 되었는데 자유의 몸으로 간 것이 아니라 쇠사슬에 꽁꽁 묶인 죄수의 몸으로 간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로마 감옥에 가서야 비로소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았습니다.
사두개파의 40인의 결사대에게 바울이 언제 죽을지 모를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안전하게 감옥소에서 그를 보호해 주신 것입니다. 당시 유대에서 로마까지 가려면 배편도 마땅치 않았지만 경비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바울을 죄수의 몸으로 로마까지 완전하게 인도하십니다.
바울은 그때서야 하나님의 오묘하신 경륜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나서 고백하기를 '나의 당한 일이 복음의 진보가 되었다'고 깨달았습니다. 또 이 사실을 다른 사람에게까지 알립니다. '너희가 그것을 알기를 원하노라'고 했습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때때로 왜 이런 일이 있어야 하는지 모를 때가 많습니다. 억울하고, 분하고, 답답하고, 괴롭습니다. 물론 상당 부분 우리의 잘못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억울하고, 분하고, 답답하고, 괴로운 시간들이 흘러갑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자나놓고 조용히 생각해 봐야 깨달아집니다. '아하! 그때 하나님이 그렇게 나를 훈련시키시고 오늘 이곳까지 나를 인도하셨구나!'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모든 사건이 하나도 버릴 것이 없고 그 속에 하나님의 경륜이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할/
본문 1-12절까지는 바울이 베스도 총독에게 재판 받는 과정이 나오는데 이 자리에서 바울은 로마의 황제인 '가이사에게 직접 호소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10, 11, 12, 21, 25절에서 계속 바울이 가이사 앞에 가서 호소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제목이 ◀가이사에게 보내다오!▶입니다.
이제 벨릭스 총독 후임으로 베스도 총독이 부임했습니다. 부임한 지 3일 후 그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갑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간 총독은 당시에 같은 대제사장들과 유대인 지도자들을 만나게 됩니다.
▶1-2절 "베스도가 도임한지 삼일 후에 가이사랴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니 대제사장들과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이 바울을 고소할새"
베스도는 부임하자마자 예루살렘을 순방했습니다. 아마도 그 순방 길에 많은 경호원들이 그를 호위했을 것입니다. 왜 그가 부임하자마자 예루살렘을 순방했습니까? 그만큼 예루살렘은 유대인들의 정신적인 지주입니다. 정치의 일 번지입니다. 종교의 일 번지입니다.
당시 총독은 가이샤라에 군대와 함께 거주하고 있었으나 산헤드린과 대제사장이 있고 예루살렘에 자주 방문하면서 치안을 유지했습니다.
이번 베스도의 방문은 유대인들의 인심이 베스도 총독 때문에 로마와의 사이가 서먹서먹하였고, 인심이 그리 좋지 않았습니다. 베스도는 정치인으로서 그곳 민심을 사로잡고 여러 사람들을 만나서 대화도 할 겸, 민심 수습으로 그 곳에 올라간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루살렘 사람들이 로마에 대한 원망과 반발심을 무마시키기 위한 정치적 행보를 한 것입니다. 부임하자 말자 맨 먼저 예루살렘에 갔다고 하는 것은 예루살렘을 그만큼 신경 쓰고 있다는 것이고 예루살렘 사람들의 반발을 무마해서 로마와의 관계를 다시 원활하게 하려고 하는 온건 정치의 표현으로 보여집니다.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베스도는 '정직하고 의롭고 아주 곧은 사람이고, 훌륭한 행정관'이라고 평가했습니다. 그러나 그도 빌라도나 벨릭스 총독처럼 유대인들의 눈치를 보는 데만 민감하여 바울에게 불리하게 대했습니다.
그는 주후 60-62년까지 2년 동안 유대 총독으로 있었는데 건강이 좋지 않아서 물러났다고 합니다.
그가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누구를 먼저 만났습니까? 대제사장들과 유대인 중 높은 사람이라고 했으므로 산헤드린 공회의 지도자들과 장로들을 만났던 것입니다. 그들을 만나서 민심을 사로잡고 다시 정치적인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나라 정치 지도자들이 지방 나들이를 가면 그곳 유지들을 모아 놓고 연설하고 파티 하는 모습을 우리는 종종 봅니다. 지금 베스도는 그런 행정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당시 로마와 유대인들 사이가 아주 악화되었기 때문에 무엇인가 유대 지도자들의 소원을 들어주어야 할 그런 정치적 복선이 깔려 있는 시기입니다.
우리나라도 정치적으로 어려움이 있으면 여, 야 총재들이 회담하면서 대통령이 야당 총재의 소원을 들어주듯이 지금 베스도도 유대인의 지도자로의 어떤 소원을 들어줘야 할 형편입니다.
'지금 여러분들에게 있어서 가장 골치 아픈 문제가 무엇입니까? 내가 여러분들에게 해 줄 수 있는 최우선적인 것이 무엇입니까?' 아마 그렇게 묻은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바로 바울의 문제를 들고나옵니다. 지금 가이사랴에 총독부에 바울이라고 하는 사람이 갇혀 있는데 그는 이스라엘사람이요. 예루살렘에 보내서 예루살렘에서 재판을 받도록 조치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들이 첫 번째로 내 놓은 것은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데려가서 재판을 해 달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식으로 '바울을 고소'한 것입니다.
요세푸스에 의하면 당시 대제사장은 파비의 아들 이스마엘이라고 했습니다. 헤롯 아그립바 2세가 벨릭스 통치 말기에 아나니아의 대를 이어 이스마엘을 세웠다고 합니다.
본문에 '대제사장들'이라고 복수로 썼는데 본래 대제사장은 한 명이고, 종신 제이며 자손에게 계승되었으나 로마의 지배를 받게 되면서부터 권력자들에 의해 자주 바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전직 대제사장들도 동일한 명칭으로 불리었기 때문에 여기서도 '대제사장들'이라고 복수로 말했습니다.
유대 지도자들은 신임 총독이 환심을 사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 기회를 이용해서 다시금 바울을 죽이려고 공격해 나섰습니다.
산헤드린이 바울을 죽이려는 의도가 얼마나 집요합니까? 그들도 무려 2년이 지나도록 칼을 갈고 기회를 엿보고 있었습니다.
베스도의 입장에서는 적어도 첫 번째 요구 사항만을 무조건 들어주는 것이 상례였기에 그런 기회를 잡은 것입니다.
▶3절 "베스도의 호의로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옮겨 보내기를 청하니 이는 길에 매복하였다가 그를 죽이고자 함이러라"
여기서 유대인들의 진실이 드러났습니다. 유대인들은 적당한 방법으로는 바울을 죽일 수 없다고 판단하고는 베스도의 호의를 이용하여 불의한 방법으로 죽이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요청은 가이샤라에 잡혀 있는 바울을 예루살렘에 대려다가 재판하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이 정식재판에 맘이 있는 것이 아니라 신임 총독 베스도는 그동안 유대인들이 바울을 죽이려고 계획했던 음모에 관해서 모르고 있었으므로 바울을 데리고 올 때, 먼저 번의 천부장처럼 많은 군대를 동원해서 그를 데리고 올 것이 아니고 그것은 소수의 병력으로 그를 데리고 올 것에 대비하여 길에 매복해 있다가 호송되는 바울을 죽이려고 계획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이 가이사랴에서 예루살렘에 오는 과정 속에 도중에 자객을 매복 시켜 놓았다가 쥐도 새도 모르게 암살을 하려는 음모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유대인들의 바울을 죽이려는 열심히 얼마나 큰 것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맨 처음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바울을 대적하기 시작하여, 이고니온에서는 그를 돌로 쳐죽이려고 따라 다녔습니다.
바울이 이를 피해서 루스드라까지 도망갔지만 유대인들이 여기까지 따라와서 기어이 바울을 잡아 돌로 쳐죽였습니다. 그들은 바울이 죽은 줄 알고 돌아갔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났습니다.
다시 데살로니가를 거쳐 베뢰아, 아덴을 지나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는데 거기서 결국 체포되고 말았습니다. 유대인들은 정식으로 바울을 죽일 수 없었으므로 암살단까지 편성하였고 2년이 지나도록 그 열심은 식어지지 않았습니다.
나라의 지도자, 국민의 영적 지도자들까지 바울을 죽이겠다는 마음이 가득하여 로마 총독에게 그를 보내달라는 부탁까지 합니다. 악의 이러한 본성을 알아야만 당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만약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호송되었다면 바울은 암살되었을지도 모르고 그렇다면 기독교의 역사는 바뀌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는 인간들의 계획과는 달랐습니다. 하나님은 바울에게 로마에 가서도 복음을 증거 하게 될 것을 약속하셨습니다(23:11). 베스도는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그들의 요구를 완전히 거절한 것입니다.
▶4절 "베스도가 대답하여 바울이 가이사랴에 구류된 것과 자기도 미구에 떠나갈 것을 말하고"
무슨 말씀인가? '바울이 가이사랴에 있다는 말 그거 맞는 말이다. 나도 들었다. 그리고 자기도 미구에(미구라는 말은 머지 않아서 내가 며칠 있으면) 가이사랴로 갈 것인데 그를 이리로 데려올 것이 아니라 그 때 바울을 고소할 사람이 있다면 나와 함께 거기로 가서 거기서 재판을 받으면 될 것이 아니냐?' 다시 말하면 죄수를 함부로 이송할 수 없다고 하는 논리를 펴게 된 것입니다.
베스도 총독은 소신이 뚜렷했습니다. 정치하는 사람들이 이래야 합니다. 그는 이성적으로는 철저했습니다. 어떤 인간적인 관계 때문에 원칙이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우리들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학연, 지연, 혈연 때문에 원칙이 치우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베스도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거절은 단호했습니다.
⑴지금까지 가이샤라에 있었던 사람을 여기까지 와서 데려온단 말입니까? 당시 로마법에 의하면 피고의 변론을 듣기 전에는 내어 줄 수가 없습니다.
⑵자신도 예루살렘에 잠시 머물고 자기 임지인 가이샤라로 내려간 공직자로서 그 고소건 처리를 예루살렘에서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베스도는 부지중에 오히려 바울을 보호하는 방법으로 일을 처리한 것입니다.
이것은 우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한 섭리 가운데 이루어진 것입니다. /믿습니까?/ 잠16:9절을 보세요!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 /할/
▶5절 "또 가로되 너희 중 유력한 자들은 나아 함께 내려가서 그 사람에게 만일 옳지 아니한 일이 있거든 송사하라 하니라"
베스도는 역으로 제의를 했습니다. 그는 유대인들에게 자기가 가이샤라로 갈 때에 함께 가지고 제의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 중에 유력한 자들, 즉 산헤드린 공회를 대표할 수 있는 자들과 함께 가이샤라에 내려가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만일 바울에게 어떤 잘못이 있다면 그는 송사하라고 했습니다. 재판관은 송사를 들을 때, 한쪽으로 치우쳐서는 안 됩니다. 양쪽 말을 다 들어보아야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습니다.
결국 베스도의 신중한 판단은 바울을 다시 한 번 죽음의 위기를 넘기게 했습니다. /할/
▶6절 "베스도가 그들 가운데서 팔일 혹 십일을 지낸 후 가이사랴로 내려가서 이튿날 재판 자리에 앉고 바울을 데려오라 명하니"
베스도는 예루살렘에서 약 열흘 정도 지낸 후에 다시 가이샤라로 왔습니다. 그는 가이샤라에 도착한 후 지체하지 아니하고 그 이튿날 바울에 대한 재판을 속게 했습니다.
그것을 보면 베스도도 자기 직무에 대한 열심이 있었습니다. '이튿날 재판 자리에 앉고' 베스도가 재판장의 자리에 앉음으로써 공식적인 재판이 시작된 것입니다. 이로써 바울은 이번 사건으로 인하여 공식적인 재판만 세 번(22:30, 24:1-22) 받게 된 것입니다.
▶7절 "그가 나오매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유대인들이 둘러서서 여러 가지 중대한 사건으로 송사하되 능히 증명하지 못한지라"
원고와 피고가 다 재판 석에 모였습니다. 바울도 섰고, 예루살렘에서 온 유대인들의 지도자들도 섰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이번에는 변사를 동원하지 않고 많은 사람들을 동원하여 바울에게 위압감을 주며 분위기를 이끌고 있습니다.
'둘러서서' 지금 법정처럼 원고석, 피고석이 따로 있지 않았을 때입니다. 바울 한 사람을 에워싸고 유대인들이 험악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번에도 여러 가지 죄목을 걸었습니다.
아마도 그들의 18번인 ⑴소요케 하는 자, ⑵이단의 괴수, ⑶성전을 더럽힌 자입니다, 그럼에도 저들이 중대하다고 주장하는 그 송사 내용들이 아무런 증명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자체가 거짓 송사로 끝나버리고 맙니다.
'능히 증명하지 못한지라' 베스도가 생각할 때 많이 고소하고 큰 문제라고 해서 대단한 것인 줄 알았는데 실제로 중대한 사건이라고는 했지만 원고들이 그를 고소하는 내용을 보니까 별로 죄목이 되지 않더라는 그런 얘깁니다.
실제로 범죄를 증명할 수 있는 로마법에 의하여 처벌할 수 있는 구속요건 해당 사항이 하나도 없더라는 그런 얘깁니다. 더군다나 바울이 말하기를 '나는 아무 죄가 없다' 그렇게 우기고 있는 겁니다.
▶8절 "바울이 변명하여 가로되 유대인의 율법이나 성전이나 가이사에게나 내가 도무지 죄를 범하지 아니하였노라 하니"
지금 조목, 조목 변론하고 있습니다.
⑴유대인의 율법을 범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바울을 이단의 괴수로 보는 것에 대한 대답입니다. 모세오경에 하나님을 자기가 믿는다는 것이고, 여자의 후손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인 것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⑵성전 모독죄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자신은 절대로 성전 모독한 일이 없다고 했습니다. 예루살렘교회를 도왔으면 도왔지 절대로 성전을 업신여기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⑶가이사에게도 죄를 범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절대로 나라를 정복하려고 주동하거나 어떤 소요사태를 일으킨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바울은 성경대로 믿고 성경대로 살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고, 예배 중심으로 살았고, 국가의 법에도 깨끗하게 살았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재판의 결론은 나왔습니다. 결국 이 재판의 결론은 바울이 말한 대로 '내가 도무지 죄를 범하지 아니하였노라'가 맞는 말이 되고 말았습니다.
베스도가 볼 때는 뭔가 큰 문제가 있는 줄 알았는데 보아하니 자기들 민족끼리 종교적인 문제로 싸우는 것을 보고 자기가 판단하기가 심히 어렵게 되었음을 알고 그는 이제 자기 이기적인 생각을 하게 됩니다.
어차피 골치 아픈 문제를 해결하기도 어려운데 이런 기회를 통하여 유대인에게 인심을 써야 되겠다 생각을 합니다.
로마는 철저한 증거 재판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증거가 없이 말로만 아무리 떠들어도 통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해대는 말을 듣고 대답을 합니다.
▶9절 "베스도가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하여 바울더러 묻되 네가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이 사건에 대하여 내 앞에서 심문을 받으려느냐"
삼천포로 빠지고 있습니다. 그가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하여' 이것이 문제입니다. 역대 유대의 통치 가였던 아켈라오나 본디오 빌라도와 벨릭스가 다 유대인의 눈치를 본 사람들입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본디오 빌라도입니다. 그는 유대 군중들이 행여나 폭도를 일으킬 것이 두려워 죄도 없는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오판을 한 사람입니다.
지금 베스도가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하여' 흔들리고 있습니다. 재판하는 사람은 오직 이 사람이 죄인인지 아닌지 그것만 생각하면 됩니다. 그런데 베스도는 유대인들에게 환심을 사려고 그 마음을 얻으려고 신경을 쓰고 있습니다. 재판관의 순수한 마음이 흔들리면 큰일입니다.
▶어떤 목사님이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어떤 의사가 아내와 더불어 얘기를 하는데 그 아내가 자꾸 남편보고 쓸데가 있으니 돈을 달라고 조릅니다. 남편이 돈이 없다고 하니까 부인이 '또 한사람 째면 되잖아?' 그르더랍니다. 그 소리를 들은 목사님이 이상하다 싶어서 무슨 말이냐고 의사에게 물었습니다.
'정말 돈 벌려고 수술을 하는 거요?' 그 의사는 솔직하게 고백하기를 가끔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참 어려운 때가 있다고 했습니다.
예컨대 맹장수술의 경우 우선은 약물로 치료할 때가 있답니다. 그러니까 쨀 수도 있고, 안 쨀 수도 있다고 합니다. 자 이럴 때에 자신이 고치려고 째는지 돈을 벌려고 째는지 아리송하다는 것입니다.
정말 그렇지 않겠습니까? 의사가 남의 배를 째는 것은 어디까지나 병을 고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째면 내가 얼마를 받는다는 쪽으로 생각이 들어가면 큰일이지요? 모든 일이 그렇습니다. 순수한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어떤 이익을 생각한다면 진리도 무너지고, 사랑도 무너지고 의도 무너지는 것입니다.
재판하는 사람은 오로지 이 사람이 의인이냐? 아니냐? 죄가 있느냐? 없느냐? 그것만 생각하면 됩니다.
그런데 베스도 총독은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했습니다. 그 마음을 얻어서 무엇을 하자는 것입니까? 자신의 위치를 확고히 지키자는 것입니다. 자신의 정치적인 욕망을 채우려는 것입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여러분, 냉정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모든 일에 '이 일이 정말로 하나님을 위한 것이냐? 진리를 위한 것이냐? 이 일이 원칙인가?' 이것만이 우리의 문제가 되어야 합니다.
본문 9절에 베스도가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하여 '네가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이 사건에 대하여 내 앞에서 재판을 받겠느냐?'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바울이 단호하게 거절합니다.
▶10절 "바울이 가로되 내가 가이사의 재판 자리 앞에 섰으니 마땅히 거기서 심문을 받을 것이라 당신도 잘 아시는 바에 내가 유대인들에게 불의를 행한 일이 없나이다"
무슨 말입니까? 내가 예루살렘에서 내려왔는데 왜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재판을 받습니까? 쉽게 표현하면 일심에서, 이심으로 올라왔는데 왜 다시 일심으로 돌아가야 합니까?
더 쉽게 말하면 로마 시민권을 가진 자로서 가이사의 재판대 앞에 선 이상 끝까지 가이사의 재판을 받아야지 로마의 시민에 대한 재판권이 없는 유대의 법정에 서야 할 이유가 없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이것은 '로마법의 절차에 어긋나는 것임을 간접적으로 지적한 것'입니다.
바울은 베스도의 양심에 향하여 '당신도 잘 알다시피 내가 유대인들에게 불의를 행하지 아니했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11절 "만일 내가 불의를 행하여 무슨 사죄를 범하였으면 죽기를 사양치아니할 것이나 만일 이 사람들의 나를 송사하는 것이 다 사실이 아니면 누구든지 나를 그들에게 내어 줄 수 없삽나이다 내가 가이사께 호소하노라 한대"
아주 담대하고 심각한 말을 지금 바울이 하고 있습니다. '내가 옳으냐? 그르냐? 내가 죄인이냐? 아니냐? 이것만 판단하시오, 만일 내가 죄가 없다면 나를 저들에게 내 줄 수는 없소,' 이것은 법 위에 양심이 있고, 양심 위에 하나님의 뜻이 계심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죄인이면 죽어야 하겠으나 만약 죄가 없다면 누구도 나를 저들에게 내 줄 수 없다'고 담대하게 말한 것입니다.
▶헨리 피처라고 하는 목사님이 인디애나폴리스의 어느 교회에 새로 부임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아하니 그 마을 사람들의 윤리 의식과 생활이 아주 엉망인 것입니다.
심지어는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까지도 그저 시간만 있으면 술과 도박을 즐깁니다. 마을 사람 전부가 아예 술과 도박에 찌들었습니다. 목사님은 곧 바로 엄한 설교를 시작했습니다.
'술도 안 되고, 담배도, 도박도 안 됩니다. 이것들은 다 죄악입니다.'라며 도박과 술의 죄악성을 시간시간 설교했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차츰 달라졌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목사님이 설교하고 있는데 술집 주인이 들어와 총을 들이대는 것이었습니다. 목사님의 설교로 마을 사람들이 달라지고 자연히 술을 못 팔아먹으니까 교인들 앞에서 목사님을 협박했습니다.
'설교를 고쳐라, 술이 왜 나쁘고, 도박이 왜 나쁘냐? 계속 이렇게 설교하면 죽여 버리겠다.'는 것입니다. 그때 피처 목사는 서슴지 않고 '나를 쏘시오'하고 태연하고 나섰습니다.
결국 술집 주인은 총을 쏘지도 못했을 뿐더러 이 일로 인해서 그 교회와 그 마을이 완전히 새로워 졌다고 합니다. 참으로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을 맡긴 용기라 하겠습니다.
오늘의 본문에서도 사도바울은 당당하게 말씀합니다. 누구든지 나를 저들에게 내어줄 수 없다, '나는 로마에 상소하리라'는 것입니다.
'내가 가이사께 호소하노라' 로마의 최고 법정에 서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나를 가이사에게 보내달라는 것입니다. 나를 로마에 보내달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가이사에게 항소한 것은 단지 공정한 재판만을 생각한 것이 아니라 로마 선교의 꿈을 가지고 있던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고(23:11) 더더욱 로마에 가고자 한 것입니다.
▶12절 "베스도가 배석자들과 상의하고 가로되 네가 가이사에게 호소하였으니 가이사에게 갈 것이라 하니라"
최종적인 결정은 총독이 내리지만 배심원들과 얼마든지 상의할 수 있습니다. 배심원들과 상의한 결과 바울을 로마 가이사에게 보내는 것이 옳다는 결론이 내려졌습니다.
여기 가이사는 당시 로마 네로 황제입니다. 네로 황제는 폭군이었으나 그의 통치 초기에는 스토아 철학자 세네카의 보필로 선정을 베풀어 황금치세를 이룩하였으나 바울이 자기 재판을 호소한 시기는 그가 바로 폭군 시대를 연출한 폭정시기였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생명을 걸고 복음을 들고 로마에 가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사명은 생명을 걸고 가는 길입니다. /아멘!/ 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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