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제67강) 벨릭스 총독의 재판!② (행 24:16-27)

by 【고동엽】 2022. 3. 11.

(제67강) 벨릭스 총독의 재판!② (행 24:16-27)

 

바울이 천부장의 작전 따라 가이샤라로 호송되어 온지 닷새가 지난 후, 대제사장 아나니아는 유대 장로들과 함께 변사 '더둘러'를 앞세우고 가아샤라에 내려왔습니다. 그리고 총독 앞에서 바울을 정직으로 고소를 했습니다.
대제사장 아나니아를 대신한 변사 '더둘러'는 양심에도 없는 아첨을 벨릭스 총독에게 떱니다. 당신이 정치를 잘해서 우리민족이 태평성대를 누리며 살고 있습니다. 또 당신의 개혁정치는 우리들의 삶의 질을 높여준 은혜입니다. 모든 것이 당신의 선견지명에서 온 지도력에 감개가 무량할 뿐이라고 아부했습니다.
그러나 사실 벨릭스 총독은 역대 총독 중에서도 손꼽히는 포악 자였습니다. ▶더둘러는 정식으로 바울을 고소했는데 그 죄목이 무엇입니까?
⑴바울을 염병이라고 인신공격을 했습니다. 염병은 당시 무서운 전염병으로 흑사병 또는 온역을 말하는데 옛 말에 이런 종류의 전염병이 일어나면 삽시간에 전염되어 많은 사람을 몰살시켰습니다. 사실 생명의 복음 전도자는 죽음의 염병에다가 비교한 것은 바울을 업신여기는 유대인의 완고한 교만에서 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총독 앞에서 이 사람은 정상적인 사람이 아니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해악을 끼치는 사람이라고 혹평한 것입니다. 결코 믿을 사람이 못되는 위험인물임을 부각시킨 말입니다. 사실 어떻게 보면 바울은 방방곡곡에 생명의 복음을 확실히 전염병보다 더 무섭게 빨리 퍼뜨린 사람임은 분명합니다.
⑵바울은 천하를 소요케 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즉 데모 주동자로 몰아세운 것입니다. 이 죄목은 로마관리들이 제일 민감하게 바라보는 사건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런 정치적인 선동 자는 아니었습니다. 롬13:1절 이하를 보면 그는 도리어 국가통치에 복종하는 모범적인 시민이 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복음이 들어가는 곳마다 소란이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어떤 소란입니까? 바로 새로운 생명 운동이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⑶이단의 괴수로 몰아붙였습니다. 괴수란 맨 앞장을 서는 자란 뜻입니다. 나사렛 예수의 똘마니들의 우두머리로 본 것입니다.

⑷성전을 더럽힌 자로 성전 모독 죄로 고소했습니다.
더둘러는 이렇게 고소장을 쓰고는 총독께서 친히 심문해 보시면 우리가 하는 고소내용이 다 사실임이 밝혀질 것이라고 말하자 그곳에 둘러있던 유대인들이 동조하면서 변사 더둘러의 말이 옳다고 지원해주었습니다.
▶이제 바울의 변론시간이 되자 그는 차분하고 또릿한 말로 고소의 죄목 하나 하나씩 정면으로 변론합니다. 가장 먼저 자기를 '소요케 하는 자'라는 죄목에 강하게 변론합니다. 전혀 사실 무근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 이유로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간 지 12일 밖에 안 되었고, 그 12일 동안에 성전에서나, 회당에서나 길거리에서 백성을 선동하거나 소요케 한 일을 본 유대인들이 아무도 없다고 했습니다.
재판은 물증입니다. 그 다음 '이단의 괴수'에 대해서도 바울은 ⑴유대인들이 믿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을 믿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같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했습니다.
⑵율법과 선지자들의 글을 믿는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그들의 믿는 구약성경을 똑같이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믿는 성경을 자기도 믿는다는 말입니다.
⑶하나님을 향한 소망,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을 믿는다고 했습니다. 즉 같은 내세관을 가지고 있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15절에서 '하나님을 향한 소망'을 가진 자 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대한 소망을 포기할 때, 인간은 모든 소망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인간 되기를 포기할 때, 하나님께 대한 소망을 포기해 버립니다. 하나님이 없으면 무슨 짓을 해도 관계가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 대한 소만만이 참된 소망입니다. 고후4:18절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보이는 것이 무너지고 믿었던 것이 사라지게 됩니다. 그래서 세상에 보이는 모든 소망은 우리를 실망시킵니다.
바울은 하나님께 향한 소망의 근거를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로 보고 있습니다. 부활신앙은 기독교 사상의 핵심입니다. 우리는 신앙을 고백할 때마다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니다.'라는 고백을 드립니다.
고전15:19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만일 부활이 없다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고생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친히 요5:28-29절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할/ 16절에서 바울의 변론이 이어집니다. ◀제목소개!▶

 

▶16절 "이것을 인하여 나도 하나님과 사람을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노라"
'이것을 인하여'란 바울이 변론한 세 가지 즉, '신관, 성경 관, 내세관'에 대하여 양심이 거리낌이 없다고 한 것입니다.
저들이 말하는 나사렛이단 곧 예수님은 바로 유대인들이 믿는 그 하나님이 그 성경대로 오사 우리에게 산 소망을 주신 메시아임을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그런데 유대인들 중에는 그 조상의 하나님이 성경 예언대로 보내주신 부활의 메시아를 믿지 않고 있음을 지적한 말'입니다.
본문에서 우리는 사도바울의 위대한 신앙양심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사람에 대하여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썼다'고 고백합니다. 사실 이 말은 상황적으로 볼 때, 벨릭스 재판장 앞에서 양심에 거리낌이 없이 거짓말을 하거나 성황을 바꾸지 않겠다는 고백이지만 그의 신앙의 인격에서 베어 나오는 고백입니다.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은 상황을 따라서 적당히 말을 바꿉니다. 지금 정치판에도 말은 자주 바뀝니다. 없는 것을 있다고도 말하고 아닌 것을 그렇다고 말하며 그런 것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거짓말을 하면 그 순간은 피할 수 있지만 다음 순간은 그것이 올무가 될 때가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지금 자기가 주장하는 것에 대한 최후에 보루 증거는 양심이라고 했습니다. 사도바울은 신앙을 말할 때, 믿음과 더불어 항상 선하고 청결한 양심을 강조했습니다.
딤전1:19절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이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양심은 우리의 신앙의 길에 원동력이 됩니다. 또한 진실한 양심은 배의 키와 같습니다. 이 키가 고장나면 우리의 신앙생활은 파선되고 맙니다. 그렇게 되면 딤전4:2절에서 말하는 '화인 맞은 양심'이 됩니다.
사실 현대인들은 이 양심을 제대로 갖추고 있지 못한 게 사실입니다. 큰 거짓말은 하지 않지만 작은 거짓말은 수도 없이 합니다. 큰 강도 짓은 아니하지만 약간 사기성 있게 사는 사람도 많습니다.
죄는 들킨 죄가 있고 안 들킨 죄가 있습니다. 형무소에는 다 들킨 사람들이 들어가 있고, 바깥에는 안 들킨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실 하나님 앞에서 죄인 아닌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오늘 바울의 신앙의 고백을 보면서 다시 한 번 사도바울의 고귀한 신앙의 인격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들도 이런 양심적인 신앙 고백을 하며 살아야 합니다.

▶양심적인 신앙은 크게 세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로는 하나님께 대한 양심입니다. 예를 들어 십일조라든지 주일 성수라든지 마땅히 지켜야 하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양심적인 거리낌이 없어야 합니다.
두 번째로는 사람과의 관계입니다. 나 자신과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 아무런 거리낌이 없어야 합니다.
헌금도 잘하고 금식기도, 철야기도, 봉사도 많이 하면서 실제 생활에서는 사람들과 원만치 못하며, 남을 헐뜯고 중상모략하고 미워하고, 시기하고, 질투한다면 덕이 되지 않습니다. 믿는 자로서 본을 보이고 사랑을 나누고 양심에 거리낌이 없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세 번째로는 항상 자신의 양심에 거리낌이 없어야 됩니다. '항상'이라는 말은 어제도 거리낌이 없어야 되고, 오늘도 거리낌이 없어야 된다는 말입니다. 김씨에게도 거리낌이 없어야 되고, 박씨에게도 거리낌이 없어야 되고, 항상 언제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양심에 거리낌이 없는 신앙 이것이 산 신앙입니다. /할/
이제 17-20까지는 바울의 세 번째 고소 제목인 '성전 모독'에 대한 변론입니다. 여기에서 바울은 자신이 예루살렘에서 행한 일들을 낱낱이 보고하고 있습니다.

 

▶17-18절 "여러 해 만에 내가 내 민족을 구제할 것과 제물을 가지고 와서 드리는 중에 내가 결례를 행하였고 모임도 없고 소동도 없이 성전에 있는 것을 저희가 보았나이다 그러나 아시아로부터 온 어떤 유대인들이 있었으니"
비울의 '여러 해 만에' 예루살렘에 올라왔다고 했습니다. 그는 2차 전도 여행 끝에 예루살렘을 잠시 방문한 것(18:22)을 기점으로 계산하면 약 4-5년 만에 예루살렘에 올라온 것입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에 올 때, 그냥 오지 아니하고 구제헌금과 하나님께 봉헌할 재물을 가지고 왔다고 했습니다. 당시 유대 땅에는 흉년이 너무 심하였기 때문에 살기가 힘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기가 개척한 교회들에게 구제헌금을 당부해서 모아 가지고 올라온 것입니다. 그리고 성전에서 하나님 앞에 드릴 예물도 준비해 가지고 왔다고 했습니다.
당시 초대교회는 어려운 자를 돕는 구제 사업이 많이 이루어졌습니다. 남을 도와준다는 것은 기분 좋은 일입니다. 우리교회가 이런 일을 해야 하는데 지금은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초대교회, 빌립보교회, 고린도교회는 구제헌금을 많이 한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구제헌금을 이 집 저 집 찾아다니며 직접 전달해 준 것이 아니라 주의 성전에서 교회를 통해서 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상당히 중요한 일입니다.
왜냐 하면 어려운 일 당했을 때 내가 쌀가마니 들고 와서 척척 나누어준다면 도움을 받는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감사하고 영광 돌리기 전에 준 사람에게 감사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받을 영광을 사람이 다 받아 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 방법이 교회를 통해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제 헌금을 갖다가 교회에 내면 교회 이름으로 구제를 하니 하나님 앞에만 감사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구제할 일은 성전을 통해서 해야지 개인적으로 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아멘!/
그리고 지금 바울이 벨릭스 총독 앞에서 구제헌금을 이야기하는 것은 '기독교가 사랑의 종교'임을 가르치기 위함입니다. 맞습니다. 기독교는 사랑을 기초로 한 종교입니다. 또한 성전에 들어간 것도 부족한 재물을 넣기 위한 것이지 결코 성전을 더럽게 하여 유대민족을 선동하려 한 것이 아님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실 그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유대인의 결례 식을 행하는데 7일간의 모든 비용을 바울이 다 책임졌습니다. 지금 바울은 성전에서 예배 의식만 치렀지 군중들을 선동한 일도 없고, 그들에게 어떤 것을 지시한 일도 없다고 했습니다.
지금 나를 고소한 대제사장들과 유대인들이 내가 성전에서 결례 식을 행하는 것을 저희들이 보아서 잘 알고 있을 것이라고 그러면서 19절에서 말합니다.


▶19절 "저희가 만일 나를 반대할 사건이 있으면 마땅히 당신 앞에 와서 송사하였을 것이요"
아시아에서 온 유대인들이 소요를 일으킨 것이지 내가 일으킨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아시아에서 온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바울을 죽이려고 선동했습니다. 그런데 그 아시아에서 온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벨릭스 법정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여기에서 바울은 '그들이 직접 송사할 일이지 왜 간접적으로 당신들이 송사를 하느냐? 그들이 이 재판에 나와서 떳떳하게 이야기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20절 "그렇지 않으면 이 사람들이 내가 공회 앞에 섰을 때에 무슨 옳지 않은 것을 보았는가 말하라 하소서"
바울은 다시 22:30절에서 나온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 자신이 심문을 받을 때에 있었던 사람들에게 범죄의 증거를 제시하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때 바울이 공회 앞에서 한 말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하여 말했을 때,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 사이에서 논쟁이 일어나 저희들끼리 반목이 생겼고 심지어 어떤 바리새인들은 바울의 부활 신앙을 듣고는 오히려 바울을 두둔하기까지 했었습니다.
그러니 공회에서도 바울의 죄에 대해서 찾지 못했습니다. 그때 공회에서도 아나니아도 바울에게 어떤 죄도 정할 수가 없었습니다.
지금 바울은 재판장에게 아주 당당하게 그들의 위선과 거짓에 대하여 변론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그들의 고소 사건은 허무맹랑한 날조임을 강조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준법의 본분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이 세상 법정 앞에서 재판을 받을 만한 세상 법에 저촉이 되는 일이 있으면 총독 앞에 와서 당당히 고소할 일이요. 내가 만약에 신앙적으로 종교적으로 어떤 잘못을 저질렀으면 공회 앞에서 종교적인 재판을 받게 할 일이지 어떻게 재판도 없이 나를 그냥 길거리에서 때려죽이려고 했느냐' 라는 말입니다. 사실 그 당시 천부장이 아니었다면 길거리에서 맞아 죽을 뻔했다는 말입니다.

 

▶21절 "오직 내가 저희 가운데 서서 외치기를 내가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하여 오늘 너희 앞에 심문을 받는다고 한 이 한 소리가 있을 따름이니이다 하니"
바울은 여기에서 공회 앞에서 저들이 주장한 것처럼 '내게 문제가 있다고 한다면 내가 부활을 믿고 그 부활을 전한 것'뿐이라고 했습니다. 사실 부활신앙을 말했을 때, 바리새인들과 사두개파 사이에 교리싸움이 벌어졌습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바리새파는 영도, 천사도, 내세도 부활도 다 믿지만, 사두개파는 그런 것들을 전혀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죽은 자의 부활에 관한 바울의 주장은 로마법정에서도, 산헤드린 법정에서도 문제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로마 법정에서는 그것이 유대인들의 종교적인 신앙의 문제이기 때문에 소송의 건이 될 수 없었으며, 산헤드린에서는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한 신앙이 유대교의 전통적인 신앙과 일치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어디를 가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만을 자랑삼아 전했습니다. 그가 외국에 나갔을 때에도 '예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다', 유대인 회당 가운데 가서도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다' 이것을 증거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나 예수님은 죽은 것이 아니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을 감격스럽게 증거 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체험적인 신앙이 아니면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어머니의 사랑을 받아 보지 못한 사람은 그 사랑을 표현하거나 증거하지 못합니다. 책을 통해서, 또는 다른 사람으로부터 설명을 들으면 긍정하며 짐작을 합니다. 그러나 체험이 없기 때문에 감격이 없습니다.
어머니 사랑을 뼈 속 깊이 체험한 사람은 '어머니'라는 말만 들어도 벌써 가슴이 찡하고 아련해집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체험한 바울 사도의 경우가 바로 그것입니다. 예수님의 능력을 배운 것이 아닙니다. 그는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예수님의 능력을 만났고 체험했습니다. 그렇게 때문에 그는 언제 어디서나 주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증거 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부활을 당당하게 전해야 합니다. 기독교는 예수님의 빈 무덤을 자랑하는 종교입니다. /할/
▶어느 날 3대 독자를 잃은 한 어머니가 석가모니에게 찾아와서 죽은 자기 아들을 살려달라고 애원을 했습니다. 석가모니는 하도 기가 차서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이런 조건을 걸었습니다. '부인 내가 당신의 아들을 살려드리겠소. 그런데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부인이 저 동네에 들어가서 아무도 죽음의 고통을 당해 보지 아니한 집에서 겨자씨 하나를 구해 오시오' 그 부인은 한 가닥의 희망을 품고 이 집 저 집 모든 집을 다 찾아다니면서 죽음을 맞보지 않은 집에서 겨자씨 하나를 구해 오려 했으나 모든 노력이 헛수고였습니다.
다시 돌아온 그 여인은 '그런 겨자씨는 구할 수 없습니다'라고 고백하자 그 때 석가모니가 '그렇지요! 죽음의 비애란 모든 집, 모든 인생에게 다 임하는 것인데 그대의 아들이라고 왜 당하지 않겠습니까?' 결국 석가모니는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그도 무덤에 묻혀 있습니다.
사람은 죽어서 땅에 묻힙니다. 석가모니는 인도 능수 해안에 묻혀 있습니다. 마호메트는 사우디 아라비아의 메카에 묻혀 있습니다. 공자는 중국의 장평양에 묻혀 있습니다. 그들은 무덤에서 나오지 못했습니다. 거기에서 썩었고 흙이 되었습니다. 중국은 천안문 광장 한 쪽에 모택동 미이라를 안치하고 자랑하고 있습니다. 구 소련은 붉은 광장 한 쪽에서 레닌의 미이라 시신을 보여주면서 국부라고 자랑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는 예수님의 빈 무덤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아멘!/
▶부활하신 주님이 40일 동안 이 땅에 계시면서 11번 제자들에게 오셨고 후에 스데반 집사와 핍박자 사울에게도 보이셨습니다.
①무덤 가에서 막달라 마리아에게 오셨습니다(막16:9/요20:14-18).
②무덤에 갔던 여인들에게 오셨습니다(마28:8-10).
③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오셨습니다(눅24:13-35/막16:12-13).
④베드로에게 오셨습니다(눅24:34/고전15:5).
⑤도마를 제외한 열 제자에게 오셨습니다(막16:14/눅14:36-37).
⑥도마를 포함한 열 한 제자에게 오셨습니다(요20:26-29).
⑦갈릴리 호수에서 고기를 잡던 일곱 제자에게도 오셨습니다(요21:1-14).
⑧갈릴리 산에서 열 한 제자에게 오셨습니다(마28:16-20/막16:15-18).
⑨500명의 성도들 알에 오셨습니다(고전15:6).
⑩야고보(알패오의 아들)에게도 오셨습니다(고전15:7).
⑪부활 후 40일 째 되는 날 감람산에서 승천하시면서 마지막 모습을 보이셨습니다(막16:19-20/눅24:44-53/행1:1-11).
⑫스데반이 순교할 때(행7:55-56), 하나님 우편에 주님이 앉아 계신 것을 보았습니다.
⑬교회를 열렬히 대적하던 사울에게도 다메섹 도상에서 나타났습니다(행9).
사울은 열렬한 바리새인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해서 원한을 품고 열렬히 핍박을 했습니다. 스데반을 죽일 때 증인으로 지휘를 했습니다. 그가 대제사장의 허락을 받아서 이웃나라 수리아의 다메섹에 있는 기독교인들을 잡아 와서 투옥하고 죽이려고 살기 등등하여 가는데 다메섹이 눈앞에 보이는 그 근처에 왔을 때 대낮에 갑자기 하늘에서 태양보다 더 밝은 빛이 비취면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사울아 사울아 어찌 네가 나를 핍박하느냐?' 사울은 거꾸러졌습니다.
'주여 뉘시니이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놀라운 체험을 하고 그는 예수를 핍박하고 대적하는 자리에서 예수를 증거하는 사명자로 변화되었습니다. /할/
▶그렇다면 주님 부활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인가? ①우리도 부활하게 됩니다. /할/ 이 사실 역시 구약에 예언된 사건입니다. 사26:19절 "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 시체들은 일어나리이다"라고 했고, 단12:2절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은 자도 있겠고 수욕을 받아서 무궁히 부끄러움을 입은 자도 있을 것이며" 이 사실을 주님은 요5:28-29에서 자세히 밝히셨습니다.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②예수 부활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확인한 사건입니다. 롬1:4절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③예수 부활은 하나님의 최후 승리를 의미합니다. 사단의 권세 중 가장 큰 권세는 사망의 권세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어떤 인간도 사단의 이 권세를 깨뜨릴 수 없습니다. 모든 인간은 죽음의 길로, 죽음의 권세 앞에서 다 무릎꿇고 죽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같은 사망의 권세를 예수님은 부활하심으로 깨뜨리시고 승리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승리는 이미 창3:15에서 예언되어졌습니다. /믿/
다시 본문에서 우리는 사도바울의 당당함을 볼 수 있습니다. 양심에 부끄러움이 있는 사람들은 당당할 수가 없습니다. 떳떳한 사람의 말에는 힘이 있습니다.
벨릭스는 그 재판을 맡은 총독이었지만 바울의 진실에 감동을 받은 것 같습니다. 벨릭스는 마지막에 이런 판결을 내립니다.

 

▶22-23절 "벨릭스가 이 도에 관한 것을 더 자세히 아는고로 연기하여 가로되 천부장 루시아가 내려 오거든 너희 일을 처결하리라 하고 백부장을 명하여 바울을 지키되 자유를 주며 친구 중 아무나 수종하는 것을 금치 말라 하니라"
이제 바울의 변호가 끝이 났습니다. 이제 총독 벨릭스의 판결 차례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1심에서 유예선언을 합니다. 즉 재판을 연기한 것입니다. 그는 두 가지 이유를 내세워 연기를 했습니다.
①그가 이 도에 대하여 자세히 안다고 한 이유입니다. 총독은 수년 동안 유대를 통치했기 때문에 유대교에 대하여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산헤드린 공회의 구성원인 바리새인과 사두개파간의 갈등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 각자가 주장하는 교리는 절대로 합쳐질 수 없는 영원한 평행선과 같은 것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벨릭스는 양측의 말을 다 듣자, 이 송사의 전말을 알 수가 있었습니다. 그는 정치적인 소요자라는 더둘러의 주장이 거짓이요, 바울의 변론으로 볼 때, 이것이 유대교의 종교적인 문제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벨릭스 총독은 유대교의 종교적인 갈등 속에 자신이 개입하기를 싫어했습니다.
②예루살렘에 있는 천부장 루시아가 내려오면 처벌한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애매한 연기임은 사실입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바울에게 친절한 관심을 보였습니다.
백부장에게 명하여 바울을 지키되 자유를 주며 친구 중 아무나 면회하고 수중 드는 것을 금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어떤 학자들은 벨릭스가 돈을 좋아하기 때문에 바울이 많은 친구들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바울을 석방하기 위하여 뇌물이라도 쓸 것이라고 착각하여 더욱 재판을 끌었을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어째든 재미있는 것은 이 재판이 바울에게는 두 가지 축복을 안겨 주었습니다. 하나는 이 재판에서 바울이 무죄일 경우 그가 나오면 살해의 위험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40명의 결사대가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고 사생결단하여 바울을 죽이겠다고 기다리고 있는데 만약, 그가 감옥 밖으로 나오면 언제, 어느 때, 어디서, 살해당할 지도 모릅니다.
따라서 형이 결정되지 않고 감옥에 있는 것은 살해 위험으로부터 보호를 받는 것입니다. 군대가 지켜주고, 감옥이 지켜주고 먹을 것 갖다 주니까 안심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무죄라고 판결되어도 곤란합니다. 그래서 유죄도 아니고 무죄도 아니고 보류입니다.
이것을 우연으로 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이 그를 지키고 계시는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아멘!/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을 합력하여 선으로 인도하시는 참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믿/
또 하나의 축복은 벨릭스가 '바울의 재판은 보류'라고 하면서 그가 밖에 나가지 못하게 잘 지키되 자유를 주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보호를 받으면서 찾아오는 친구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어떤 장로님이 사업에 부도가 나서 감옥소에 들어갔습니다. 면회 간 목사님에게 하는 말이 '목사님! 이 사건이 안 났다면 제가 아마 고혈압으로 죽었을 것입니다. 너무 일이 복잡하고 많아서 혈압이 올라가서 안 내려 왔거든요! 또 잠을 못 자고 너무 고통스러웠는데 감옥에 들어와 보니까 전화도 없고, 찾아오는 사람, 보채는 사람이 없으니 살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유신 체제 때, 유신을 반대해서 감옥에 갔다 온 김진홍 목사님이 '2년 동안 감옥에 있으면서 건강도 회복되고, 성경도 읽을 수 있었고, 성경 체험도 할 수 있어서 너무 좋았다'고 술회한 것을 읽었습니다.
본문의 바울도 감옥에 들어감으로서 모든 죽음의 위협에서 피신해 쉬면서 안식했습니다. 그러니까 회사가 부도가 나고 실직한 것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쉬게 하시고 더 같은 계기를 허락하는 시간으로 아십시오!

 

▶24절 "수일 후에 벨릭스가 그 아내 유대 여자 드루실라와 함께 와서 바울을 불러 그리스도 예수 믿는 도를 듣거늘"
'수일 후에' 벨릭스가 재판을 연기한 후 며칠이 지나서 벨릭스가 그의 아내를 데리고 바울을 면회 왔습니다. 이유는 복음을 듣기 위해서입니다.
먼저 그의 아내 '두루실라'에 대하여 알아보겠습니다. 총독의 아내 두루실라는 유대 헤롯 왕가의 딸입니다. 그녀의 할아버지는 베들레헴의 어린 아이를 살해한 헤롯 대왕이고, 그의 아버지 헤롯 아그립바 1세는 야고보를 살해한 폭군이기도 합니다.
그녀는 아그립바 1세의 막내딸로서 15세 때에 수리아의 작은 국가인 '에메싱'의 왕인 '아지즈'에게 출가를 했으나 그녀가 18세 되던 해에 그의 미색에 반한 벨릭스가 그녀를 빼앗아 세 번째 아내로 삼았습니다.
벨릭스와 두루실라 사이에 '아그립바'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주후 79년 베스비오 화산 폭발 때, 온 집안 식구가 함께 죽었다고 역사가들이 말했습니다.
'바울을 불러' 벨릭스에 의하여 바울을 부른 것이 아니라 그의 아내 두루실라가 유대인으로써 당시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하여 관심이 많았는데 그가 더욱 바울을 만나기를 소원했다는 것입니다.
어째든 벨릭스가 바울을 불러 복음을 듣게 된 것은 온갖 비리와 음모에 가득한 헤롯 궁 깊은 곳에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해지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25절 "바울이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을 강론하니 벨릭스가 두려워하여 대답하되 시방은 가라 내가 틈이 있으면 너를 부르리라 하고"
바울이 벨릭스에게 전한 복음이 무엇입니까?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을 강론했다고 했습니다.
①의롭게 살자고 가르쳤습니다. 여기서 의롭게 산다는 말은 먼저 하나님을 믿으라는 말이고 또 하나는 바르게 살라는 것입니다.
그는 바르게 살지 못한 사람입니다. 부정 축제에다 축첩에다 모든 악행을 다 행한 자가 바로 벨릭스입니다. 그런 그에게 하나님을 믿고 의롭게 살라고 일성을 들려주었습니다. 얼마나 뜨끔했겠습니까?
②절제에 대해서 했습니다. 절제는 인간의 본능과 욕망을, 인간의 이성과 양심 사이에서 규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간은 본능과 욕망대로 살아서는 아니 됩니다. 욕망대로 사는 생활은 짐승의 생활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제어하기 위해 이성과 양심을 주었습니다. 절제란 극기이며 자신의 부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했습니다.
▶알렉산더 대제가 33세에 온 세계를 다 정복하고 그 다음엔 정복할 나라가 없어서 통곡을 했습니다. 그런 그가 하루는 친구들을 모아 놓고 파티를 열었습니다.
그 밤에 그는 밤새도록 폭음을 했습니다. 결국 그는 술로 죽고 맙니다. 알렉산더는 천하를 정복했지만 자기 자신을 이기지 못해 끝내 죽고 만 것입니다. 절제가 정말 중요합니다. 돈도 절제해야 되고, 말도 절제해야 되고, 우리의 행동도 절제해야 합니다.

③심판에 대하여 선포했습니다. 고전4:3절을 보면 세 가지 심판이 나옵니다. 그것은 '인간의 법정 심판, 양심의 심판,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여기서 제일 정확하고 무서운 심판은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바울은 의와 절제를 강론하고 다음 심판을 말한 것은 그렇게 살지 못하면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고 한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들에게도 해당하는 말입니다.
본문에 벨릭스가 심판 이야기가 나오자 두려워서 '내가 틈이 있으면 너를 또 부르겠다.'고 바울의 설교를 중단시키고 말았습니다.
그가 더 듣고 회개했으면 훗날 화산 폭발 때, 죽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한 마디로 구원의 기회를 놓치고, 회개의 기회를 놓치고 만 것입니다.
우리가 재판을 연기하고 무엇을 연기할 수 있으나 구원과 회개를 연기하면 안 됩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네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질 안개니라' 이것이 인생입니다. /할/

 

▶26절 "동시에 또 바울에게서 돈을 받을까 바라는고로 더 자주 불러 같이 이야기하더라"
확실히 벨릭스는 구제불능의 탐관오리였습니다. 바울을 자주 부른 것은 복음을 듣기 원해서가 아니라 행여나 봉투를 주지 않나 바라는 마음에서 그랬을 것이라고 학자들이 말하고 있습니다.

 

▶27절 "이태를 지내서 보르기오 베스도가 벨릭스의 소임을 대신하니 벨릭스가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하여 바울을 구류하여 두니라"
바울이 그 감옥에서 2년 동안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바울이 죄가 없음을 분명히 알면서도 유대인의 감정을 알고 바울을 가두어 둠으로서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려는데 있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바울에게서 뭉치 돈이 나오지 않을까 흑심이 있었습니다. 그런 2년 사이에 벨릭스에게 뜻하지 않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가아샤라에서 유대인들과 헬라인들 사이에 가이샤라에 대한 상권 주도권 전쟁이 일어났는데 벨릭스가 그 분쟁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유대인들을 많이 죽었고, 감옥에 넣었고, 그들의 재산을 약탈했습니다.
이를 보다 못한 유대 장로들이 로마의 항의 사절단을 보내어 그의 악행이 다 드러남으로 드디어 총독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후임으로 베스도가 온 것입니다. 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할/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