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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6강) 벨릭스 총독의 재판!① (행 24:1-15)

by 【고동엽】 2022. 3. 11.

(제66강) 벨릭스 총독의 재판!① (행 24:1-15)

 

본문은 바울 사도가 총독 벨릭스 앞에서 재판 받는 내용인데 바울은 재판 받는 입장에 있으면서도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한마디로 주님이 말씀하신대로 '너희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파하라!'는 말씀대로 순종하면서 산 사람이 바로 바울입니다. 그는 붙잡혀 가는 계단 앞에서도 폭도들에게 복음을 전했고, 심지어는 유대의 산헤드린 최고의 법정에서도 복음을 전했습니다. 무슨 열매가 있어서 전한 것이 아닙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을 듣고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은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는 낙심하지 않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열심히 전도해서 열매가 빨리 보이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전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합니다.
본문의 배경을 잠깐 살펴보면 바울이 공회 앞에서 복음을 전파한 뒤 유대인들 중에서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마시지도 않겠다고 결심한 결사대를 조직한 사람이 무려 40명이나 되었습니다.
그 사실을 바울의 조카가 알고는 천부장 루시아에게 바울을 암살하려는 계획이 있다고 하니 그 밤중에 470명이나 되는 군사를 모아 바울을 지키며 가리샤라도 무사하게 호송하게 된 사건이 지난번에 배운 배경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당신의 종을 특별하게 보호하시고 인도하심을 바울이 체험하게 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바울이 가이샤라에 내려온 지 닷새가 지난 후에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변호사 더둘러와 함께 가이샤라에 내려와서 총독 앞에 바울을 정식으로 고소한 사건입니다. 그래서 제목이 ◀벨릭스 총독의 재판!▶입니다.

 

사도바울은 가이샤라의 감옥에서 약 2년 간 있었습니다. 그는 감옥에 있는 동안에 세 번 재판이 열렸는데 그 세 번 재판정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첫 번째가 오늘 본문에서 벨릭스 총독 앞에서 전한 복음이고, 두 번째가 25장의 베스도 총독 앞에서 전한 복음이고, 세 번째가 26장에 나오는 유명한 사도바울의 간증의 이야기로써 아그립바 왕 앞에서 전한 복음입니다.
주님께서 친히 마10:18절에서 '또 너희가 나를 인하여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리니 이는 저희와 이방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하신 예언대로 바울이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서 증거한 것입니다.

 

▶1절 "닷새 후에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어떤 장로들과 한 변사 더둘로와 함께 내려와서 총독 앞에서 바울을 고소하니라"
바울이 가이샤라에 도착한 지 닷새 후에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변사 더둘러와 함께 내려와서 벨릭스 총독에게 정식 재판을 요구했습니다.
사도행전에는 아나니아라는 사람이 셋이나 나옵니다. 첫째 사람은 삽비라의 남편 아나니아입니다(행5:1-11). 그는 온 교회가 바나바를 칭송하는 것을 보고 시기심을 가지고 베드로 사도 앞에서 성령을 속이다가 죽임을 당했습니다.
둘째 사람은 다메섹 아나니아입니다(행9:10-19). 사울에게 안수함으로 그의 눈에 비늘이 떨어짐으로 잃어버린 시력을 회복하게 한 주님의 제자입니다.
셋째 사람은 오늘 본문에 나오는 대제사장 아나니아입니다. 이 사람은 바울을 벨릭스 총독에게 고소한 산헤드린 회장입니다. 그는 변사 더둘로를 앞세워 바울을 중상모략하여 총독 벨릭스로부터 사울을 죽이려는 일에 앞장선 사람입니다.
여기 '변사 더둘러'는 유대교의 법과 로마의 법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두루 갖추시고, 또 뛰어난 언변을 구사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직업 변호사입니다. 그는 그 당시 로마 세계에서 널리 알려진 이름입니다. 왜 아나니아가 그를 대동하고 갔습니까? ⑴바울을 고소하여 재판을 받게 하려면 로마의 법과 절차를 잘 알아야 했기 때문이고, ⑵변사의 뛰어난 언변으로 재판을 유리하게 이끌어가기 위함입니다.
대제사장 아나니아는 잔인한 성격의 소유자로서 바울이 전통적인 유대교 신앙을 떠났다는 종교적 이유 이외도 바울에게 저주를 당한 것에 대한 개인적인 증오심 때문에 가이샤라까지 쫓아와 바울을 끝까지 헤치려고 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어떤 저주를 했는가? 행23:3절에 "바울이 가로되 회칠한 담이여 하나님이 너를 치시리로다 네가 나를 율법대로 판단한다고 앉아서 율법을 어기고 나를 치라 하느냐"고 힐난했습니다.

 

▶2절 "바울을 부르매 더둘로가 송사하여 가로되"
아나니아의 고소가 접수되었고, 바울이 법정에 불려 나옴으로서 원고와 피고가 한 자리에 모였고, 재판장 벨릭스가 재판장 석에 앉아 있으므로 재판이 시작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대제사장 아나니아를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여러분 그 당시에 대제사장이란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지도자요, 그리고 나이가 많은 할아버지입니다. 늙은 몸을 이끌고 삼백 리가 넘는 먼 길을 바쁘게 달려왔습니다. 더군다나 정통 유대인들은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는 것을 거부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세상의 법정에 들어가는 것을 금기시 합니다.
그런데 그런 대제사장이 손수 자기가 직접 와서 이방인 법정에 들어갑니다. 이걸 보면서 얼마나 유대인들이 바울을 죽이려고 '일치단결 했는가?' 그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이 전하는 복음이 유대인에게는 얼마나 '싫은 것이었는가?' 그것을 깨달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냥 혼자 와서 한 것이 아니고 변사를 하나 데리고 왔습니다. 더둘로라고 하는 변사를 데리고 왔는데, 이 변사가 쉽게 말하면 변호사고 법정대리인입니다. 그가 어떤 일을 하는가 하면 유대인이 로마 총독 앞에서 재판을 받기 때문에 언어가 안 통하니 로마의 언어로 로마의 법 절차를 따라서 원고의 기소내용을 자세하게 설명하는 사람 그게 바로 변사입니다. 먼저 더둘러가 바울에 대한 논고가 시작됩니다.

 

▶3-4절 "벨릭스 각하여 우리가 당신을 힘입어 태평을 누리고 또 이 민족이 당신의 선견을 인하여 여러 가지로 개량된 것을 우리가 어느 모양으로나 어느 곳에서나 감사 무지하옵나이다 당신을 더 괴롭게 아니하려 하여 우리가 대강 여짜옵나니 관용하여 들으시기를 원하나이다"
변사 더둘러가 총독에 대한 아부가 시작됩니다. 여러분, 이 말은 굉장히 과장된 말입니다. 왜냐하면 로마의 총독 벨릭스는 지금 유다 민족을 압제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로 말하면 '이또오 히로부미'같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유대의 가장 큰 지도자가 총독에게 하는 말을 잘 보세요. '우리가 당신을 힘입어 태평을 누리고' 원수에게 하는 말입니다. 바울을 죽이기 위해 이완용이 보다 훨씬 뛰어난 역적의 말을 하고 있습니다.
⑴평화의 수호자로 미화시켰습니다. 3절을 보세요! '벨릭스 각하여 우리가 당신을 힘입어 태평을 누리고 또 이 민족이 당신의 선견을 인하여 여러 가지로 개량된 것을 우리가 어느 모양으로나 어느 곳에서나 감사 무지하옵나이다'
그런데 벨릭스 총독은 역대의 어느 총독보다도 잔인하고 포악했으며 또 음탕한 총독이었다고 역사가 '요세푸스'가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토끼들의 반항에 대포로 맞선' 정치를 유대민족에게 시험했습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폭동이 이어졌으며 주후 70년에는 유대민족이 반로마 유혈폭동을 불러일으킨 장본인이 되어 정치적인 생명을 잃어버리고 그 후임에 베스도가 오게 된 것입니다. 그는 변사 더둘러가 말한 '평화의 수호자'가 아니라 '불화의 조장 자'였습니다.
⑵그의 정치력을 크게 추켜세웠습니다. 3절입니다. '벨릭스 각하여 우리가 당신을 힘입어 태평을 누리고 또 이 민족이 당신의 선견을 인하여 여러 가지로 개량된 것을 우리가 어느 모양으로나 어느 곳에서나 감사 무지하옵나이다'
선한 정치를 했다고 아부를 했습니다. 그러나 벨릭스는 정적들이 나타나면 무자비하게 암살시켰습니다. 당시 대제사장인 '요나단'이 그에게 '자신의 직책에 합당하게 행동하라!'고 권고하자, 서슴없이 자객을 고용하여 그를 죽였습니다.
대제사장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종입니다. 그는 세 번이나 결혼을 했는데 세 번째 여자는 남의 부인인 유부녀를 반 강제로 빼앗다시피 결혼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본문 26장을 보면 '바울이 돈을 줄까 바랬다.'고 했는데 그는 돈을 사랑한 탐관오리였습니다. 부정축제 자였습니다.
그런 사람 주변에는 아첨꾼들로 가득 찹니다. 그런 못된 총독에게 더둘러는 아첨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이와 같은 아첨은 '신께 올리는 제사의 축문에 가까운 성격'입니다.
그런데 유대교의 제사장들은 하나님께 올려야 할 감사의 기도를 이방 폭군 총독에게 올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선정을 베푼 위대한 정치가들을 존경해야 마땅합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정치인을 세워 주신 하나님께도 감사해야만 합니다.
왜 그런지 아세요? 롬13:7절에서 바울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 공세를 받을 자에게 공세를 바치고 국세 받을 자에게 국세를 바치고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
여기 '공세'는 모든 세금 및 공과금을 의미하고,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 이 말씀 속에 기독교인의 윤리적 자세가 들어 있습니다. 성도들끼리 물질 관계도 주고받는 것이 정확해야 합니다. 이 물질 문제 때문에 성도들이 제일 많이 시험에 듭니다.

▶성도들끼리 물질문제, 보증문제는 성경에서 금하고 있습니다.
잠6:1-2절 "내 아들아 네가 만일 이웃을 위하여 담보하며 타인을 위하여 보증하였으면 네 입의 말로 네가 얽혔으며 네 입의 말로 인하여 잡혔느니라."
잠11:15절 "타인을 위하여 보증이 되는 자는 손해를 당하여도 보증이 되기를 싫어하는 자는 평안하니라."
잠22:26절 "너는 사람으로 더불어 손을 잡지 말며 남의 빚에 보증이 되지 말라" 이런 문제로 시험에 들지 마시고 신앙은 하나님과의 관계이기 때문에 사람을 바라보지 마시기 바랍니다.
또 나라에는 세금이 있듯이 영적인 세금도 있습니다. 십일조, 감사헌금, 절기헌금 등등이 잇는데 이런 것들은 강제적인 입장에서 내는 것이 아니라 기쁜 마음으로 감사와 믿음의 씨앗으로 심어야 합니다. /할/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 나라를 다스리는 자들을 존경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우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만약 위정자들에게 존경심이 없다면 결국 그들이 집권하는 정권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것이 되며 그렇게 되면 위에서 권세를 주신 하나님을 대적하는 결과가 됩니다.
▶국가에 대한 성도의 태도는 무엇인가? 하나님이 국가제도를 세우셨고, 하나님의 영광과 백성들의 유익을 위하여 권위를 주셨다고 한다면 우리는 그러한 국가에 대하여 당연히 우리는 그 권위에 굴복해야 합니다.
만약에 거기에 대하여 불복한다면 하나님을 거슬리는 것이 되며 하나님의 심판을 초래하게 됩니다. 우리가 굴복한다는 것은 바울이 말씀한 것처럼 세금을 바쳐야 하고, 마땅히 그들을 존경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세우신 위정자들을 위해 깨어 기도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할/
⑶더둘러는 4절에서 '우리 민족의 일을 우리가 해결하지 못하고 당신에게 와서 번거롭게 해서 미안하다'고 하면서 대강 몇 마디를 하겠으니 관용의 마음으로 들어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5-6절에서 바울의 죄목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5-6절 "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염병이라 천하에 퍼진 유대인을 다 소요케 하는 자요 나사렛 이단의 괴수라 저가 또 성전을 더럽게 하려 하므로 우리가 잡았사오니"
더둘러가 여기서 세 가지로 바울을 고소하고 있습니다.
⑴유대인을 소요케 했다는 죄목입니다. 이것은 반국가적 단체로서 데모주동자로 고발한 것입니다. ⑵이단의 괴수로 정죄하고 있습니다. ⑶바울이 성전을 모독했다는 죄목입니다.
그런데 변사 더둘러가 바울을 가리켜 '이 사람은 염병이라 모든 전염병을 가진 사람처럼 그가 가는 곳마다 세상을 시끄럽게 한다.'고 표현했습니다.
염병을 영어로 말하면 '페스트'입니다. 다시 말하면 '바울은 염병환자와 같습니다. 저자를 벌하지 않으면 전부다 그 잘 못된 병에 옮아갑니다. 저 인간이 가는 곳마다 어디서든지 소동이 일어납니다. 예루살렘으로 가면 예루살렘이 소동이 일어나고, 안디옥 으로 가면 안디옥에서 소동이 일어나는데 어딜 가나 소요케 하는 자요. 조용한 곳을 소란케 하고 백성을 요동케 하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유대민족이 조용하기를 원하시면 소요를 그치길 원하신 다면 저 골치 덩어리 염병과 같은 존재요 질서와 평화를 깨치는 저자를 없애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사랑의 전염병을 옮기는 사람들입니다. 새 생명의 전염병을 옮기는 사람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영향력을 주는 사람들입니다. 사랑의 영향력을 주고 생명의 영향력을 주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입니다. /믿/
더둘러가 바울을 보고 염병이라고 말한 것은 '당시 형편없는 사람에 대한 욕'으로 사용하기도 했지만 바울이 전한 그리스도의 복음이 매우 빠른 속도로 전파되어 나갔음을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만이 세상을 바꿀 수 있습니다.
▶옛날 희랍 아테네의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아테네 시민의 모든 가면과 거짓을 벗기기 위하여 외치기를 '너 자신을 알라!'고 주장하다가 쫓겨나 결국 국가의 질서를 어긴 죄로 사약을 마시고 죽는 형벌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때 제자들이 '선생님 왜 그렇게 고집을 부리십니까? 지금 곧 아테네에 내려와서 '옳은 것은 옳습니다. 아닌 것도 옳습니다.' 하면 아테네의 부귀영화가 다 선생의 것이 아닙니까?' 그때 소크라테스는 '내가 세상에 온 것은 가면을 벗기기 위해서 왔다'고 하면서 독약을 마시고 죽었다고 합니다.
진실을 외치다 죽은 사람은 후세에도 그의 이름이 영원히 남게 됩니다. 바울은 죽음의 위기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염병이라는 소리를 들어가면서도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의 죄목 세 가지를 알아보겠습니다.
⑴천하에 퍼진 유대인들을 다 소요케 하는 자라는 죄목입니다.
로마의 관리로써 바울의 죄목 중에서 총독의 신경을 거스르게 한 것은 바로 소요케 하는 자였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정치하는 사람들은 소요사태를 제일 두렵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정치적으로 소요가 일어나면 불안하기 때문에 소요사태의 주동자들은 제일 먼저 잡아다 넣습니다.
당시 유대 민족 사이에는 '정치적 메시아 운동'이 성행되기 시작했습니다. 폭력주의자 바라바도 그 우두머리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로마 정부는 식민지에 문화적으로는 관용했으나 정치적 운동에는 예민했고, 관용을 베풀지 않았습니다. 바로 유대인의 대제사장 되는 아나니아는 교활하게도 바로 기독교가 그 정치적 반역 세력이라고 고소한 것입니다.
⑵나사렛 이단의 괴수라고 했습니다.

나사렛 예수를 추종하는 무리들입니다. 로마에 의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예수를 신으로 떠받들면서 그를 해방자라고 추종하는 집단입니다. 로마에 의하여 정상적으로 인정받지 않은 집단이요. 그러므로 정치적으로 위험한 혁명분자들입니다. 그런 얘깁니다.
'로마에서 볼 때 혹시라도 이 바울과 우리와의 관계가 내부 종교 문제인 줄로 오해하시면 안 됩니다. 저들은 절대로 우리와는 같지 않은 불법종파'입니다. '이단 괴수다' 그렇게 고발을 하고 있습니다
사실 바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만을 전했습니다. '너희가 십자가에 죽인 예수가 바로 메시아이다. 그는 십자가에 죽었다가 3일 만에 부활하신 분이고, 승천하시어 머지않아 심판 주로 이 땅에 재림하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유대인들이 많이 모인 회당에서도 '예수가 그리스도시다. 예수가 메시아다, 너희들이 기다리는 메시아가 바로 예수시다. 구약의 예언인 여자의 후손이 바로 예수시다'고 만나는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그는 '나사렛 이단의 괴수'라고 했습니다. '나사렛 이단'이라는 말은 예수님의 고향이 나사렛이므로 예수와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을 그렇게 불렀습니다. 괴수는 '무리 중에 첫 번째 서 있는 자' 즉 '지도자나 주모자'를 가리킵니다. 여기서 우리는 더둘러가 바울을 종교 범으로 몰고 가는 것이 아니고 정치범으로 몰고 가고 있습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로마에서는 유대교의 종교 범을 다루지 않기 때문입니다.
⑶'성전을 더럽게' 했다는 말은 '성전 모독 죄'를 적용한 것입니다.
로마 관리가 제일 크게 보는 것은 '소요케 하는 자'이지만 유대교에서 제일 큰 죄목은 '성전을 모독한 죄, 신성 모독 죄'를 제일 크게 다룹니다.
행21:28절 '이스라엘 사람들아 도우라 이 사람은 각처에서 우리 백성과 율법과 이곳을 훼방하여 모든 사람을 가르치는 그 자인데 또 헬라인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가서 이 거룩한 곳을 더럽게 하였다 하니'
에베소 사람 드로비모를 바울이 데리고 성전에 들렸다는 죄목입니다. 사실 그는 이방인의 뜰에 갔었는데 유대교에서 그것을 문제삼아 고발한 것입니다.
지금 더둘러가 이렇게 위증한 것은 유대인들로 하여금 그를 처단할 수 있는 기회를 얻으려는 술수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여기 그들의 잘못된 기소 속에 기독교에 특징이 있음을 우리가 깨달을 수 있습니다. 먼저 염병이라고 하는 것은 다른 말로는 '기독교의 생명력, 복음의 전파력'을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염병이 무서운 이유는 그 전파력입니다. 옮겨 붙는 힘! 막 퍼져 가는 이 전염병은 아무도 막을 수 없는 것처럼 기독교의 복음이란 그러한 파워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도 이것은 인정 하셨습니다. 좋은 의미로 누룩과 같습니다.
작은 누룩하나가 온 나라안에 있는 큰그릇에 있는 밀가루를 다 부풀게 하는 것처럼 복음이란 그렇게 생명력이 있습니다.
금세기의 복음의 능력을 가장 잘 확증해 주는 사건은 중국에서 일어났습니다. 1950년에 중국에 기독교가 말살될 때에 기독교인의 수가 300만 명입니다. 그리고 교회 문을 폐쇄하고 기독교 지도자들을 처형했습니다. 그리고 공산주의 사상으로 한 세대 40년을 안전히 무장시킵니다.
그런데 지금 중국의 기독교인은 수억 명을 향해 나가고 있습니다. 무지무지한 숫자입니다. 과연 염병입니다. 생각할 수 없을 만큼 폭발적인 확장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할/
또 여기서 나사렛 이단이라는 말에서 배울 수 있는 건 유대교와 기독교의 관계입니다. 이단이란 말 자체는 '다를 이(異) 끝 단(端)' '끝이 다르다'는 말입니다. 처음엔 비슷하게 나갑니다. 뿌리가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중간부터 약간 새까맣게 되더니만 끝에 가서 확 달라지는 것이 이단이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기독교는 유대교와 이단이다.' 그런 얘기는 뭡니까? 유대교와 끝이 다르다는 이야기인데 그들이 다르다고 하는 것은 뿌리는 같다는 것입니다. 구약을 근거로 해서 유대교를 기초로 해서 유대교를 뿌리로 해서 그렇게 나갔는데 결국은 다르다는 그런 얘깁니다. 그런데 성경의 분명한 것은 '나사렛 예수를 통하여 나타난 하나님의 복음' 이것이 율법의 완성이라고 믿는 종교 체계가 기독교입니다. 성경은 온통 그런 이야기입니다. /믿/

 

▶7-8절 "당신이 친히 그를 심문하시면 우리의 송사하는 이 모든 일을 아실 수 있나이다 하니"
더둘러는 벨릭스 총독이 바울을 친히 심문하면 지금 자기가 하는 말이 사실임이 명백히 드러날 것이라고 자신했습니다.
더둘러는 마땅히 예루살렘에서 죽어야 할 바울이 가이샤라까지 오게 되었지만 이제야 말로 자신의 변호를 통해 죄가 백일하에 드러남으로 바울에게 죄목을 덮어씌울 수 있다고 자신 만만해 하고 있습니다.

 

▶9절 "유대인들도 이에 참가하여 이 말이 옳다 주장하니라"
변호사 더둘러의 천부적인 언변과 대중을 움직이는 기술로 인하여 아나니아와 같이 온 장로들과 또 방청석에 앉아 있는 많은 유대인들이 변호사의 말이 맞는다고 주장하면서 그는 유대인을 소요케 한 자요, 나사렛 이단이고, 성전을 더럽힌 장본인이니 그에게 물어보고 판결을 내려달라고 소리를 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많은 군중들이 동조한다고 해서 그 일이 다 진리일 수는 없습니다. 군중심리란 어떤 진리를 떠나서 인간의 이성과 감정을 움직여 상황 따라 언제든지 변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을 입성하실 때,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하면서 종려나무가지를 꺾어 흔들고 그들의 윗옷을 벗어 나귀 안장에 덮고 심지어 길가에 깔면서까지 예수님을 열렬하게 찬양했습니다.
그런데 며칠 뒤, 똑같은 유대인들이 이번에는 빌라도의 법정 앞에서 아우성치기를 '바라바를 내어주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습니다. 궁중심리는 언제 어떻게 바뀌고 변할지 모릅니다.
이제 10-21까지가 벨릭스 앞에서 자신을 변호하는 바울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10절 "총독이 바울에게 머리로 표시하여 말하라 하니 그가 대답하되 당신이 여러 해 전부터 이 민족의 재판장 된 것을 내가 알고 내 사건에 대하여 기쁘게 변명하나이다"
더둘러의 날조된 발언이 있은 후 바울은 총독으로부터 변호를 시작하라는 신호를 받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총독이 말로서 바울에게 말하라고 한 것이 아니라 고개를 까닥하면서 말하기로 표시를 합니다.
이것은 아주 교만한 태도입니다. 사실 인간적으로 보면 사도바울이 인격과 학식이 한층 위입니다. 사실 사도바울은 명문가의 출신으로 당시 가말리엘 선생 밑에서 최고의 석학으로서 대단한 사람인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인해 그런 대접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산상설교에서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중에 예수 때문에 핍박을 받고 욕을 먹는다면 복 받은 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늘에 상이 크기 때문입니다.
총독의 무례한 표현으로 바울은 무시를 당했지만 바울은 그런 것에 신경을 쓰지 않고 드디어 변호의 기회로 주신 것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더둘러와 바울의 변론이 대조적입니다. 더둘러는 벨릭스 총독에게 아첨하는 말을 많이 썼지만 바울은 그에게 아첨하지 않고 진실만을 말하고 있습니다.
시12:3절 "여호와께서 모든 아첨하는 입술과 자랑하는 혀를 끊으시리니"
바울은 벨릭스 총독이 여러 해 전부터 이 민족의 재판장 된 것을 내가 알고 이 사건에 진실을 기쁘게 변호하겠다고 했습니다. 무슨 소리냐 하면 벨릭스가 유대 총독으로 있은 지 오래 되었기 때문에 유대인들의 풍속을 잘 알고 나라의 분위기도 잘 알 것 같으니 올바른 재판을 바란다는 그런 의미입니다.
사실 금방 부임한 총독 같으면 유대인의 풍속도 모르고 성전에 대한 법도 모르기 때문에 알아듣기가 어려울 텐데 벌써 여러 해가 되었으니 잘 알고 판결해 줄 것이기에 기쁘게 변론하겠다고 했습니다.
사실 벨릭스는 유대의 총독으로는 6년 밖에 하지 못했지만 정식 총독이 되기 전에 '쿠마루스' 총독과 합동 총독으로 있었습니다. 그때부터 유대민족은 재판하는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유대교의 모든 사정을 잘 알고 있는 관리입니다.

 

▶11절 "당신이 아실 수 있는 바와 같이 내가 예루살렘에 예배하러 올라간지 열 이틀 밖에 못되었고"
먼저 로마 관리가 제일 신경 쓰는 '소요케 하는 자'에 대해서 자세하게 변론하고 있습니다. 쉽게 본문을 풀어보면 저 사람들이 나를 데모주동자라고 말하는데 내가 예루살렘에 올라 간지가 겨우 12일 밖에 되지 않았는데 어떻게 사람들을 모아 소요를 일으키겠다는 것입니다.
만약 한 달이나 두 달이라도 되었다면 지하운동을 통해 데모를 주동했다고 볼 수도 있지만 열 이틀 동안에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사실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오순절 절기 예배를 드리고 또 성전에서 유대교의 전통을 따라 의식을 행하느라고 성전에서 거의 있었습니다. 바울은 오랫동안 예루살렘을 떠나있던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갑자기 어떻게 데모를 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여기서 바울이 예루살렘에 체류한 기간을 강조한 것은 그 짧은 기간에 로마 당국에 대한 반역을 도모하고 군중을 선동하는 일이 도저히 할 수 없음을 일깨워 주기 위한 것입니다.

 

▶12절 "저희는 내가 성전에서 아무와 변론하는 것이나 회당과 또는 성중에서 무리를 소동케 하는 것을 보지 못하였으니"
바울은 자신이 성전에서 누군가를 변론하는 것이나 또는 사람들을 모아서 선동시키는 현장을 고소 자들 중에 아무도 본 사람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선동하거나 소요를 일으킨 증거를 보여 달라는 것입니다.
당시 로마법은 증거재판을 했기 때문에 증거를 대라는 것입니다. 만일 바울이 로마를 정복하려는 소요사태가 있었다면 천부장 루시아가 그의 보고서에 기록하지 않을 리가 없습니다.
한때 소란 사태가 있긴 있었지만 그것은 바울에 의해서가 아니라 바울을 해치려는 유대인들에 의한 선동의 결과였고, 그나마 그것을 정치적인 문제가 아니라 종교적인 문제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바울에게는 아무런 흠 잡을 일이 없었습니다.

 

▶13절 "이제 나를 송사하는 모든 일에 대하여 저희가 능히 당신 앞에 내세울 것이 없나이다"
대제사장 아나니아의 일행이 많은 죄목을 들어 바울을 고소했지만 그것을 뒷받침한 증인이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바울의 논리 정연한 반론은 이제껏 그를 고소하였던 더둘러의 고소내용 전부가 거짓이었음을 밝혀주는 것입니다.

 

▶14절 "그러나 이것을 당신께 고백하리이다 나는 저희가 이단이라 하는 도를 좇아 조상의 하나님을 섬기고 율법과 및 선지자들의 글에 기록된 것을 다 믿으며"
여기서부터는 그들이 말하는 '나사렛 이단의 괴수'에 대하여 변론하고 있습니다. 이제 바울은 '소요케 한 일도 없고, 국법을 어긴 일도 없고, 규탄 받을 죄 지은 일도 없고, 교회 법을 어긴 일도 없습니다. 그러니 내가 하는 이 말을 잘 들어주십시오!' 그러면서 '당신께 고백 하리이다.' 그러면서 본격적으로 복음에 대하여 말하기 시작합니다.
바울 사도의 고백은 한마디로 정리하면 구약성경을 다 믿는다는 것입니다. '율법과 및 선지자들의 글에 기록된 것을 다 믿으며' 그때까지만 해도 구약 성경 밖에 없기 때문에 그들 조상의 하나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을 자기도 섬기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율법과 선지자' 그러니까 모세 오경을 비롯하여 선지자들의 글을 다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구약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창3:15절의 '여자의 후손', 그리고 '피의 제사', 모두다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한 사건입니다.
바울의 복음 관은 확실합니다. 나는 하나님(신관)을 믿습니다. 당신들이 믿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을 나도 믿습니다. 나는 율법과 선지자의 글(성경 관)을 믿습니다. 당신들이 율법과 선지자들의 글을 믿는 다고 하지만 율법 아래 선지자들의 예언대로 오신 구주로 영접하지 않았으나 나는 믿습니다. 나의 내세관은 이러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소망과 의인과 악인을 심판하려 오실 것을 믿습니다. 나는 성경에 기록된 약속을 믿었지 이단을 주장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고소 자들이 말한 것과 같이 백성들을 미혹하는 황당 무례한 이론이 아니라 이제껏 유대인들이 믿어왔던 조상의 하나님을 섬기며 율법과 선지자들의 글에 기록된 예언의 말씀을 메시아가 이 땅에 오신 것을 기록한 것인데 그 말씀을 믿는 것이 어찌 이단이 될 수 있겠느냐고 반문한 것입니다.

 

▶15절 "저희의 기다리는바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나도 가졌으니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 함이라"
바울은 성경이 말하는 모든 것을 진심으로 믿으며 부활의 소망도 갖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메시아로 보내져서 이 민족을 건지는 그것을 기다렸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영생입니다. 구약의 예언의 성취를 메시아 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심으로 성취되었고,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의인과 악인이 부활이 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의인은 영원한 영생이요, 악인의 부활은 심판의 부활'입니다.
부활의 신앙은 바리새인들에게도 있었습니다. 사두개파는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지금 바울은 더둘러의 이단의 괴수에 대한 반론으로 그들이 믿는 조상의 하나님은 내가 믿고 구약성경을 믿으며 부활의 소망을 가진 것인데 왜 내가 왜 이단의 괴수가 되느냐고 반론을 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바울은 삶의 목적을 배워야 합니다. 빌1:20-21절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제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이것이 바울의 인생관입니다.

⑴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았습니다. ⑵담대하게 당당하게 살았습니다. ⑶오직 주님을 존귀케 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는 하나님 영광을 위해서 사는 삶입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할/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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