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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0강) 아그립바 왕 앞에 선 바울! (행 26:1-18)

by 【고동엽】 2022. 3. 11.

(제70강) 아그립바 왕 앞에 선 바울! (행 26:1-18)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에 의하여 감금된 이후로 다섯 번의 자기변호를 하게 됩니다. 바울은 지금 다섯 번째 법정에 섰습니다. 처음에는 안토니아 부대 층계에서 했습니다. 그때 군중들이 폭동을 일으키므로 글라우디오 루시아 천부장이 바울의 신변을 보호하기 위해서 영내로 피신을 시켰습니다(21:32-36).
그 다음에는 산헤드린 공회에서 입니다(23:1-6). 천부장 루시아가 히브리 방언을 몰라서 그 진의를 밝히기 위하여 산헤드린 공회를 소집하여 유대인들이 고소한 내용의 시비를 가리기 위해서입니다.
세 번째, 벨릭스 총독 앞에서입니다(24:10-21). 이때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변사 더둘로를 데리고 와서 바울을 죽이기 위하여 베스도 총독에게는 아부하고, 바울에게 대하여는 중상모략을 했습니다.
네 번째, 베스도 총독 앞에서입니다(25:6-12). 베스도가 부임한지 3일 만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때 예루살렘에 있는 자들이 바울을 고소하기 위해서 베스도와 함께 가이사랴로 올라갔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바울에게서 아무런 허물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다섯 번째, 오늘 본문의 아그립바왕 앞에서입니다(26:1-23). 이것이 바울의 최후법정입니다. 사실 그 당시 바울에 대하여 처음부터 무죄라는 것을 로마의 관리들은 알았습니다마는 2년이 넘기까지 이리저리 끌려 다니다가 결국은 이 마지막 호소를 듣게 되었습니다.
바울이 다른 것에는 더 의지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마지막으로 가이사 황제에게 상소하게 되었을 때 이제 이 상소한 죄인을 황제 앞에 세우려고 하면 합당 상소문이 필요한데 죄목이 없습니다.
사실 죄목 없는 죄인을 황제 앞에 세우다가는 총독이 무능함이 드러나게 되고 그렇게 되면 그의 정치 생명은 끝이 나고 맙니다. 그래서 이 죄 없는 사람의 죄를 만들기 위하여 심문하는 희한한 장면이 오늘 본문에 내용입니다.
지금 바울 앞에 있는 장면을 여러분 한번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맨 앞에는 베스도 총독이 권위를 갖추고 앉아 있습니다. 이 베스도 총독은 로마의 정의를 대표하는 최고 관리입니다. 세상에서는 지혜롭다고 또 원만하다고 하는 좋은 평판을 받고 있습니다마는 그러나 이 사람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바울의 무죄함을 알면서도 '너는 무죄다 가라' 그러면 끝나는 것인데, 지기 인기와 평판을 생각해서 무죄한 사람을 풀어 주지 않고, 생사람을 죄인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그 옆에는 아그립바 왕과 왕후 버니게가 앞에 서 있습니다. 이 사람은 이스라엘의 형식적인 왕이요. 사실은 애국자가 아니라 매국노요. 로마의 정권에 빌붙어서 아부하며 자기 권세를 누리는 그러한 인간입니다.
그리고 그 왕후로 등장하는 버니게라는 여자는 아그립바 왕의 누나입니다. 친누나인데 다른 남자에게 시집갔다가 실패하고 돌아와서 자기 남동생과 함께 사는 근친상간을 하고 있는 패륜적인 요부인데 이 두 자격 없는 죄인들이 구역질나는 부부 짓을 하면서 왕관을 쓰고 앞에 앉아 있습니다.
또한 고소했던 유대 지도자들이 앞에 있습니다. 죄목도 대지 못하면서 무조건 죽이라고 소리를 지르는 이 무지한 율법주의자들이 스스로 선민의식에 사로잡힌 채 어처구니도 없이 하나님의 경륜을 인정하지 않은 자기 교만에 빠져있는 사람들이 화려한 모습으로 바울 앞에서 어깨에 힘을 주고 앉아 있습니다.
이 앞에서 바울은 또 한 번의 증언을 해야 됩니다. 아마도 보통 사람들이라면 속으로 분노와 구역질이 났을 것입니다. '같은 얘기를 몇 번이나 또 해야 되는가?' 짜증이 날 그런 상황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런 상황을 기회로 삼고 있습니다. 사실 바울에게 다시 기회가 온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기회입니까? 자신의 무죄를 주장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기를 변명하는 그런 기회로 삼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로 삼았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를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로 활용할 수 있는 사람은 복 있는 사람입니다. /할/
그러니까 오늘 바울의 청문회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다가 3일만에 부활하셨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부활의 주님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한 절씩 상고해 보겠습니다.

 

▶1절 "아그립바가 바울더러 이르되 너를 위하여 말하기를 네게 허락하노라 하니 이에 바울이 손을 들어 변명하되"
지금 죄인으로 법정에 선 바울에게 분봉왕인 아그립바가 변명의 기회를 주고 잇습니다. '너를 위하여 말하기를 네게 허락하노라' 정식으로 발언권을 준 것입니다. 즉 '네가 로마의 황제에게 상소를 했다는데 왜 상소를 했는지 그 이유를 말해 보라'는 것입니다.
이 때 바울이 '손을 들어 변명하되' 그랬는데 이 행동은 그곳에 있는 여러 사람들에게 함께 인사를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비굴하게 행동을 한 것이 아니라 아주 당당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가진 진리(복음)는 완벽한 것이기에 어떤 사람들 앞에서도 당당해야 합니다.
바울은 당당하면서도 예절을 잘 지켰습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담대함이란 큰 소리를 쳤다는 말이 아니라 항상 용기와 예절이 겸비되어짐을 말합니다.

 

▶2절 "아그립바왕이여 유대인이 모든 송사하는 일을 오늘 당신 앞에서 변명하게 된 것을 다행히 여기옵나이다."
바울의 변호가 지금 시작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여기에서 아그립바 왕을 잔득 치켜세우는 것 같은 말을 합니다.
그러나 이 말은 아그립바가 자기 아버지 때부터 분봉 왕으로 있었기에 여러 면으로 보아 유대 민족에 대해 잘 알고 당신 앞에 말하게 된 것을 참 다행하게 생각한다는 의미입니다.

 

▶3절 "특히 당신이 유대인의 모든 풍속과 및 문제를 아심이니이다 그러므로 내 말을 너그러이 들으시기를 바라옵나이다"
당신은 유대인의 왕으로서 유대인의 문제를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당신은 우리 민족에 대해, 종교에 대해, 도덕에 대해, 율법에 대해 잘 알고 있으니 마음이 편하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잘 한번 들어주세요. 귀를 기울여서 나의 간증에 한번 마음을 열고 들어봐 주시기를 바랍니다. 영원에 대한 사랑을 가지고 뜨거움을 가지고 당신과 나의 일치점을 말하면서 이 얘기를 풀어가고 있습니다.

 

▶4절 "내가 처음부터 내 민족 중에와 예루살렘에서 젊었을 때 생활한 상태를 유대인이 다 아는 바라"
먼저 바울은 자신이 삶이 다른 사람들이 기억해 줄만큼 착실하게 열심히 살았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신앙적인 열심이나 도덕적인 면에서도 모든 사람이 주목할 만큼 상당한 위치에 있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갈1:13-14절에서 그가 밝힌 고백을 보세요!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핍박하여 잔해하고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 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유전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으나" 또 빌3:6절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5절 "일찍부터 나를 알았으니 저희가 증거하려 하면 내가 우리 종교의 가장 엄한 파를 좇아 바리새인의 생활을 하였다고 할 것이라"
누구한테 '바울이 젊었을 때 어떻게 살았느냐'고 물어보면 '철저한 바라세인이었다'고 말해줄 것이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철저하게 살았던지 나실 인처럼 살았다는 것입니다.
일주일에 금식을 두 번씩이나 하고 십일조를 철저하게 바치고 율법으로 흠이 없는 자로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바울은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었습니다. 유대교적인 정통성에 누구 못지 않게 철저했습니다.
바울은 힐렐(Hillel) 학파의 가말리엘로부터 율법의 엄한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는 부활하신 예수를 전파하는 기독교인을 사형시키는데 가표를 던졌던 사람입니다. 당시에는 재판할 때 배심원들이 피고가 무죄라고 판단될 때는 흰 자갈을, 유죄라고 판단될 경우에는 검은 자갈을 던졌던 판결 방식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을 재판할 때 그리고 스데반을 재판할 때 사형에 처하는 판결에 투표를 한 그런 사람입니다.

▶6-7절 "이제도 여기 서서 심문 받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 조상에게 약속하신 것을 바라는 까닭이니 이 약속은 우리 열 두 지파가 밤낮으로 간절히 하나님을 받들어 섬김으로 얻기를 바라는 바인데 아그립바왕이여 이 소망을 인하여 내가 유대인들에게 송사를 받는 것이니이다."
지금 바울이 이 자리에 서서 심문을 받는 것은 '우리 조상에게 약속하신 것을 바라는 까닭'이라고 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후손을 통해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고 하셨는데 그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면 유대인들의 뿌리는 누구인가? 그들의 조상은 아브라함부터 시작합니다(창14:13).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을 가장 존경합니다. 그래서 천국을 말할 때 우회적으로 표현하기를 아브라함 품이라(눅16:22)고 했습니다.
히브리란 말은 '건너오다'란 말로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 지역에서 가나안으로 올 때 유브라데 강을 건너서 왔습니다. 그래서 가나안 인들이 아브라함에게 '강을 건너온 사람, 곧 히브리인'이라고 불렀습니다.
그 후 야곱의 새 이름이 이스라엘이었는데 가나안 땅의 이름을 그렇게 불렀습니다(출3:15-16). 그 다음으로 분열왕국 시대에 두 지파 반에 의하여 유대라고 제한적으로 사용되어 오다가 바벨론에서 귀환한 후부터 유대인이라는 이름이 불러지게 되었습니다(스4:12, 느4:1-2).
그래서 여기서 우리 조상이라고 할 때 아브라함을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시기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창12:2)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씨를 통하여 복의 근원자 메시아가 올 것을 약속했습니다.
지금 바울이 이 약속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 약속대로 이 땅에 예수가 오시고 인류의 죄를 속량하시기 위해 갈보리 십자가위에서 죽으셨다가 제 3일에 부활하신 그 분이 우리의 조상에게 약속하신 메시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할/
이 소망을 인하여 내가 핍박하던 위치에서 재판 받는 위치까지 변화가 되었습니다. '아그립바 왕이여 이 소망을 인하여 내가 유대인들에게 송사를 받는 것이니이다.' 여기서 말하는 이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입니다.
행24:15절 "저희의 기다리는 바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나도 가졌으니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 함이라"
다윗에게 주셨던 메시야의 언약이 궁극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음을 깨달은 바울은 '소망'이 넘칩니다.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실 수 있는 하나님의 초자연적 권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신 것과 같이 장차 우리에게 또한 부활로 나타날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이 부활할 소망이 어디 있습니까? 바로 예수를 다시 살리신 하나님께 소망이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입니다. 이것이 우리 성도들의 소망입니다.
롬8:11절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8절 "당신들은 하나님이 죽은 사람 다시 살리심을 어찌하여 못 믿을 것으로 여기나이까?"
이 세상 어느 누구도 죄의 권세를 이길 수 없었습니다. 이 세상 어느 누구도 사망의 권세를 이길 수 없었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길 수 있습니다. 이 능력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은 자를 살리기도 하셨지만 자신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습니다. 죽어서 사흘이 지난 나사로를 살리셨고,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셨고 나인성의 과부의 아들을 살리셨습니다.
구약에서도 죽은 자를 살리신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왕상17장에서 엘리야가 사르밧 과부의 아들을 살리셨고, 왕하 4장에서 엘리사가 스넴여인의 아들을 살리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부활시키심으로 부활하신 예수께서 그를 찾아오심으로 인하여 복음의 탄압자에서 선포자로 바뀌는 극적인 반전을 하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바울이 메시아 신앙과 부활의 주님을 믿은 근거는 무엇인가?
⑴체험을 통해서 바울은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다메섹의 부활의 체험을 세 번씩이나(9장, 22장, 26장) 반복했습니다.
⑵성경을 통해서 바울은 예수님의 메시아 되심과 그의 부활을 깨달았습니다.
체험이란 아무리 많이 해도 다 주관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것만으로는 믿음의 근거가 될 수 없습니다. 물론 체험은 확신을 준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영원불변한 하나님의 말씀의 근거가 있어야 합니다.
바울은 고전15:3-4절에 두 번이나 '성경대로'란 말을 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바울은 주님의 메시아 되심과 부활을 성경의 근거를 통해서 확신했던 것입니다.

 

▶9-10절 "나도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대적하여 범사를 행하여야 될줄 스스로 생각하고 예루살렘에서 이런 일을 행하여 대제사장들에게서 권세를 얻어 가지고 많은 성도를 옥에 가두며 또 죽일 때에 내가 가편 투표를 하였고"
'스스로 생각하고' 사도 바울의 회심 전에 유대교에 열심 있던 그 때를 말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사울은 기독교의 박해자입니다. 7:58절을 보면 스데반집사를 죽이는데 적극적으로 가담했던 사람이고 8:3절을 보면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 새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고 했습니다.
행9:1절에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교회를 잔멸하기 위하여 미친개처럼 날뛰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 '등등하다'는 말은 '숨을 가쁘게 몰아쉰다'는 말인데 '아주 흥분했을 때의 표현'입니다.
행22:4-5절에서 바울이 스스로 고백에 의하면 '내가 이 도를 핍박하여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고 남녀를 결박하여 옥에 넘겼노니 이에 대제사장과 모든 장로들이 내 증인이라 또 내가 저희에게서 다메섹 형제들에게 가는 공문을 받아 가지고 거기 있는 자들도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끌어다가 형벌 받게 하려고 같다'고 했습니다.
'또 죽일 때에 내가 가편 투표를 하였고' 스데반 집시를 죽일 때 그가 가표를 던지며 선봉에 섰습니다. 지금 그 때를 회상하며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바울이 그 당시 산헤드린 공회원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72명으로 구성된 유대 최고의 의결기관입니다.
지금 그가 왜 이런 말을 하느냐 하면 자기가 전에 그렇게 예수쟁이들을 잡어다가 무참히 벌하고 죽이기까지 했다는 것을 알리고 있습니다. 그런 바울이 이제 부활의 주님을 만나 유대 법정에서 그 예수를 전하고 있습니다. /할/
그렇습니다. 바울은 행동하는 지성이었습니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행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에는 어떻게 달라졌습니까?
'무엇이든 내게 유익하던 것을 그리스도를 위하여 내가 다 해로 여겼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내가 그리스도를 위해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라고 빌3장에서 고백하고 있습니다.

 

▶11-12절 "또 모든 회당에서 여러 번 형벌하여 강제로 모독하는 말을 하게하고 저희를 대하여 심히 격분하여 외국 성까지도 가서 핍박하였고 그 일로 대제사장들의 권세와 위임을 받고 다메섹으로 갔나이다"
'외국 성까지도 가서 핍박하였고' 바울이 지금 대제사장의 공문을 가지고 다메섹성에 들어갔던 때를 말하고 있습니다,
'다메섹'은 예루살렘 동북쪽 약230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고대도시로서 삼면이 산악으로 둘러싸인 해발 671m의 고원지대입니다. 이 거리는 안식일과 안식일 사이의 6일을 꼬박 걸어가야 하는 먼 길이었습니다.
이 다메섹에는 예루살렘 박해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피신해서 복음의 사역을 감당하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다메섹은 지금도 현존하는 세계의 최고의 도시 중 하나입니다.
요세푸스는 A.D 66년에 네로 박해 때, 약 일만 오백 명의 유대인이 학살당했다고 밝히고 있는 점으로 보아 당시 유대인들이 꽤 많이 살고(5만) 있었음을 뒷받침합니다.
이 사건은 벌써 3번째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는 처음으로 다메섹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눈 뜬 소경이 되었습니다(9장). 그래서 아나니아에게 가서 안수를 받으므로 눈에 비늘 같은 것이 떨어져 즉시로 회당으로 달려가 복음을 전했습니다.
다음으로 천부장 글라우디아 루시아가 소집한 산헤드린 공회 때입니다. 바울은 여기에서도 다메섹에서 주님을 만났던 사건을 간증하고 있습니다(22장).
마지막으로 오늘 본문인 베스도 법정에 선 바울은 피고인 자격으로 나갔는데 오히려 총독 베스도와 아그립바 왕에게 예수 부활을 전하고 전도했습니다.
후에 사도 바울이 된 바울이 자기를 소개한 딤전1:12절에 보면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라고 밝히면서 '죄인 중에 내가 괴수'라고 고백합니다.
바울은 자기가 죄인 중에 괴수였음을 알고 있었기에 다른 어떤 사람도 다 구원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열심히 복음을 전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기념비적인 존재입니다.
죄인 중 괴수가 사도가 될 수 있었다면 다른 사람 누구도 못되겠냐는 말입니다. 훼방자요, 핍박자요, 폭행자가 변하여 하나님의 대 사도가 될 수 있었다면 누가 못되겠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얼마든지 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13절 "왕이여 때가 정오나 되어 길에서 보니 하늘로서 해보다 더 밝은 빛이 나와 내 동행들을 둘러 비추는지라"
여기서 다메섹 도상의 사건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9:3절 "사울이 행하여 다메섹에 가까이 가더니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저를 둘러 비추는지라"
사울은 당당하게 다메섹 도성 가까이 갔습니다. 이때 사울이 말을 타고 갔느냐? 걸어서 갔느냐? 분분합니다. 그런데 당시 엄격한 유대인들은 로마 이방인들이 흔히 즐기는 말타기 여행을 아주 싫어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사울 일행도 도보로 여행했음이 분명하다고 많은 학자들이 말하고 있습니다.
'하늘로서 해보다 더 밝은 빛이 나와 내 동행들을 둘러 비추는지라' 9:3절에서는 '홀연히 하늘로써 빛이 저를 둘러 비추는지라' 이 빛이 무슨 빛입니까? 하나님의 빛이요, 생명의 빛입니다. 홀연히 나타난 이 빛은 계시 성을 띤 빛을 의미합니다. 이 빛은 사울을 포로 했던 빛입니다.
이 빛이 '저를 둘러 비추는지라'는 말은 '번쩍이는 섬광 속에 그가 완전히 포위된 상태'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 빛은 22:6절에서 '큰 빛'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태양이나 다른 피조물의 빛이 아님을 나타낸 말입니다. 22:6절에 보면 그때가 정오였다고 합니다.
이 빛은 다메섹 도성에 가까이 갔을 때 생긴 일입니다. 그 성에만 들어가기만 하면 예수 믿는 사람은 몽땅 체포하였는데 그때 하나님께서 그 빛으로 그를 포위해 버린 것입니다.
이것은 완전한 주님의 은혜임을 알 수 있습니다. 후에 바울은 고전15:8절에서 고백하기를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분명히 예수님을 보았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14절 "우리가 다 땅에 엎드러지매 내가 소리를 들으니 히브리 방언으로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9:4절에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 있어 가라사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3절에 나오는 이 빛은 사울을 굴복시킨 빛입니다. 이 빛은 사울의 반 예수 운동을 정지시키고 말았습니다. 더 이상 다메섹 도상을 향하여 나아가지 못하게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그 빛 앞에 사도 요한도, 다니엘도, 에스겔도 엎드러지고 말았습니다(계1:17, 단8:17, 겔1:28).
엎드려 있는 사울에게 주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사울아 사울아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여기 '사울아, 사울아' 하나님께서 이름을 부를 때 두 번씩 거듭 부르신 일이 많습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모세야, 모세야'
아브라함이 이삭을 칼을 들어 찌를 때, 두 번 거듭 부르셨고, 모세는 호렙산에서 사명을 주실 때, 두 번 부르셨습니다. 지금 사울은 예수 믿는 사람들 잡아죽이겠다고 서슬이 퍼래 가지고 가는 그를 두 번 부르신 것입니다.
두 번 부르신 것은 사명 자를 부르신 것이요, 주께서 그를 알고 계신다는 증거요, 또 하나는 그를 사랑한다는 애정의 표시요, 더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그에게 하신 말씀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 음성은 사울의 죄를 찔러주는 음성입니다.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무슨 말씀입니까? '어찌하여 나를 죽이려고 추격하여 왔느냐? 나는 너에게 죽을 수 없는 존재란 말이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란 말이다' 이런 의미입니다.
'가시 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여기 가시 체란 가시가 달린 채찍을 말합니다. 이것은 쓸모 없는 저항을 풍자한 당시 헬라의 속담입니다. 소가 밭을 갈다가 뒷발질하면 내리치는 가시 채에 맞아 더욱 괴로울 뿐임을 뜻하는 말씀입니다.
'가시채'는 끝에 뾰족한 추가 달린 채찍으로 짐승이 내리치는 채에 뒷발질을 하면 오히려 고통만 더 커지는 경우를 비유한 말로 이 비유는 즉 예수 믿는 사람을 괴롭히는 일은 자신을 그만큼 스스로 죽이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성도를 괴롭히는 일은 자신이 망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사울아 너는 정의감에 입각해서 행동하고 있지만 사실은 너 자신을 죽이고 있는 것이다. 너는 이 사실이 옳다고 생각하여 지금까지 이 길을 걸어 왔지만 사실은 네 정의감이 너를 파괴하고 네 주장이 너를 망치고 네 고집과 네 철학이 너를 상처 내고 있는 것이란다.'
지금 우리 주님이 사울의 잘못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네가 예수를 핍박하는 일이 너의 정의감에서 너의 철학에서 하는 일이지만 그 일이 결국 가시 채로 맨발로 차는 격이 되어 네가 사망에 떨어지는 일을 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지식으로 자신의 신념으로 자신의 철학으로 인생을 살고 있지만 내가 타고 있는 배는 머지않아서 구멍이 나 갈아 앉아 버린 난파선에 불과할 것이라고 가르치고 계십니다.
여러분, 사울에게만 이 음성을 들려준 것입니까?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이 음성은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들려주시는 말씀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울은 예수를 핍박하는 것이 하나님께 충성하는 줄 잘못 알고 그랬지만 우리는 알면서도 예수를 얼마나 핍박했고, 십자가에 다시 못 박았는지 모릅니다. 내 고집 때문에, 욕심 때문에, 편견, 불신, 불순종 때문에 또 게으름과 나태함 때문에 얼마나 많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예수를 핍박했는지 모릅니다.
본문의 사울은 그렇게도 사납고 자신 있게 당당하게 걸어갔지만 주님의 부활의 빛에 주의 음성에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그가 땅에 엎드려졌다'는 말은 그가 깨어지는 순간입니다. 이 순간이 우리에게도 있어야 합니다. 고집이, 아집이, 자존심이, 불 신앙과 불순종이 깨어지는 순간 우리는 새로운 인격을 만나게 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만나게 됩니다.
주경학자 '글로악'은 '이렇게 해서 바울은 그가 계획했던 것과는 아주 다른 방법으로 다메섹에 들어갔습니다. 즉 남녀신자들을 끌어다가 감옥에 집어 넣는 대신 그 자신이 초라하게 되어 고통을 당하고 눈까지 먼 채 예수 그리스도에게 붙잡힌 자가 되어 이끌러 가게 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후에 바울이 빌3:12절에서 회상하기를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사울을 잡은 주님의 손은 지금 여러분과 나를 붙잡고 계시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할/

 

▶15절 "내가 대답하되 주여 뉘시니이까 주께서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행9;5절의 말씀입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주여! 뉘시나이까?' 예수님이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사울은 예수님이 죽었는지 알았으나 예수님은 하늘에서 나타나 빛을 비추면서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고 할 때, 심히 놀랐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부활하여 살아 계시고 또 자기의 이름을 기억해 주시고 불러 주신 분인 것을 깨달았습니다. 사울이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였으나 예수님은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고 하셨습니다.
성도가 복음을 위하여 고난을 당하면 예수님은 자신이 고통을 당하는 것으로 인정하시고 그 고난을 대신 감당해 주신다고 했습니다(마25:35-40참조).
성도가 자기의 죄 값으로 고난 당할 때에는 예수님이 도와주시지 않기 때문에 대단히 힘이 듭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복음을 위하여 고난 당할 때에는 주님의 위로가 와서 마음이 시원하고 매는 맞아도 감당할 수 있도록 해 주시고, 굶어도 기쁘게 해 주십니다.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이 표현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선언하신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원문과 같은 말로써 예수님은 구약에 모세가 만난 그 하나님과 동일하게 말씀하심으로 자기 선언을 하신 것입니다.

 

▶16절 "일어나 네 발로 서라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곧 네가 나를 본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에 너로 사환과 증인을 삼으려 함이니"
본문은 바울에게 찾아오신 예수님이 이제 바울을 향하여 사명을 주시는 내용입니다. 너는 이제 사환과 증인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 '사환'은 '종'을 나타내고, '증인'은 '순교자'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종은 주인의 말에 복종밖에 없습니다. 증인은 자기가 보고들은 것을 죽음을 아끼지 않고 증거하는 사람입니다. 이것은 곧 주님을 위해 죽을 각오를 하고 사명자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17절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저희에게 보내어"
이제 이 복음의 전달과정이 나옵니다. 이 소망을 가지게 하고,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신 답니까? '내가 너를 구원하여 저희에게 보내어' 저희는 이방인이요. 온 세상 사람들입니다.

 

▶18절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케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
'그 눈을 뜨게 하여' 이방인들의 눈을 열어주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4가지의 소경이 있습니다. 첫째로 육적 소경이 있습니다. 둘째는 문맹이 있습니다. 셋째로 최근에는 컴맹이 생겼습니다. 넷째로 가장 중요한 것은 영의 세계를 전혀 모르는 영맹이란 것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영적 세계를 보지 못하는 사람들의 눈을 뜨게 해주어야 합니다. 다른 소경들은 다 전문가들이 있어서 그 사람들이 뜨게 해주지만 그러나 영맹은 우리가 그 영적 안약을 주어야 합니다.
두 가지의 약이 있는데 하나는 구약이고, 다른 하나는 신약입니다. 그 약을 먹으면 눈이 떠지고, 밝아집니다.
'어두움에서 빛으로' 이방인들을 어두움에서 빛으로 돌이키게 하라는 것입니다.
지금 많은 사람들이 어두움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빛의 세계를 보여주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빛이 없이는 볼 수도 없고, 빛이 없이는 생명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빛이 있을 때 색깔도 구별할 수 있습니다. 아름다움도 볼 수 있습니다.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고' 이방인들을 사탄의 세력에서 하나님께로 돌이키게 하라는 것입니다.
지금 많은 사람들이 공중에 권세 잡은 사탄의 지배를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쾌락과 향락과 부정과 부패 속에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을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해주어야 합니다. 사탄의 통치에서 하나님의 통치로 바꾸어 주어야 합니다.
'죄 사함과 나를 믿어' 이방인들의 죄 사함을 받게 하고 주님을 믿게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가장 중요한 문제는 죄의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죄 아래 있는 자들을 죄에서 해방시켜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을 믿게 해야 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참 해방과 자유를 누릴 수가 없습니다.
'거룩케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이방인들에게 영적 기업을 얻게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도 기업이 있어야 합니다. 기업이 없으면 삶의 의미가 없고, 기업이 없으면 가난하게 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기업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천국의 기업' '새 하늘과 새 땅'을 가지는 것입니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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