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
I. 평신도들이 개척한 교회
II. 성경적 교회관
예배당은 교회가 아니다.
예배당은 성전이 아니다.
교회란 무엇인가?
평신도와 성직자의 구분은 성경적이 아니다.
목사는 학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사다.
교회의 감독은 평신도에 의해서 뽑혀야 한다.
III. 평신도 교회
IV. 평신도 교회의 특징
평신도와 성직자의 구분이 근본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주 예수님의 종이 되어 자신의 은사를 따라 봉사한다.
교회 개척을 보다 쉽고 적극적으로 할 수 있다.
제자 양육이 실제적이고 그대로 사역에 적용된다.
V. 평신도 교회의 기본 원칙들
교파화 되지 않는다.
사역자들은 봉급을 받지 않는다.
예배당 전용 건물을 건축하지 않는다.
형제와 자매로 호칭한다.
VI. 평신도 교회의 문제점과 해결책
영적 지도자의 양성과 전문성 문제
교회 운영의 부진
VII. 평신도 교회의 부르심
VIII.21세기 한국교회 발전을 위한 제언
다른 교회를 경쟁상대로 보는 태도를 버려야 한다
배도의 신학을 경계해야 한다
잘못된 목회관이 고쳐져야 한다
올바른 부흥관을 가져야 한다
사회에 구체적으로 기여해야 한다
IX 글을 마치면서
..■ 서 문
할렐루야! 주 예수님을 찬양하라!
제가 이제부터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을 비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며 또 21세기를 맞이해서 갑자기 새로운 무엇을 주장하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오래된 개념입니다. 그러나 새삼스럽게 이 글을 쓰게 된 것은 오래된 개념이 잊혀졌기 때문입니다.
한국 교회의 기도교인의 수가 전체적으로 조금씩 줄어들고 있다는 안타까운 소식이 들리고 있는 이 때에 '나라가 임하옵시고'를 끊임없이 기도하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를 생각하며 이 글을 썼습니다.
글 속에는 한국의 기성 교회를 비판하는 듯한 대목이 일부 있지만 그것은 결코 이 글의 목적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습니다. 제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한국 교회의 부흥이며 나의 전 삶을 바쳐서라도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자 합니다. 이 글은 어떤 특정한 교파나 교회를 위해 쓴 것이 아니며 오직 하나님 나라가 더욱 확장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쓴 것입니다.
이것은 정교한 논문도 아니고 그렇다고 자기 생각대로, 붓 가는 대로 써 내려간 수필도 아닙니다. 오직 성경과 신앙선배들의 글과 지금까지의 체험을 통해서 깨달은 것들을 정리한 글들입니다. 글이 다소 딱딱해 보이고 의견이 혹 다르더라도 부디 인내를 가지고 읽어 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성경적으로 보았을 때 혹 편향되어 보이는 주장이 있거나 잘못된 자료 인용이 있으면 바로 잡을 수 있도록 조언을 부탁드립니다. 언제라도 틀린 것이 확인될 때 저는 교정할 의향이 있으며 틀린 것을 자기 체면이나 이익 때문에 계속 궤변을 늘어놓아 변명하는 것은 지극히 어리석은 일이며 또 위험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 우리는 진리를 거스려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진리를 위할 뿐이니 (고후 13:8)"라는 말씀처럼 우리는 오직 진리에 순종할 따름입니다.
저에게 주실 조언이 있으면 아래의 주소로 연락해 주시거나 전자 메일을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138-040 서울시 송파구 풍납동 86-5
인터넷 ID : acts108@hitel.net
오직 주님께 영광을!
2000년 9월 9일
그리스도 예수님의 종된 최승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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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신도들이 개척한 교회
1997년 3월 2일 주일 아침에 십 여명의 형제,자매들과 함께 첫 예배를 드렸다. 모인 형제들은 장로교, 순복음, 침례교, 한사랑 등의 교회를 다녔던 평신도들이었다. 그리고 모인 장소는 우리 모임에 함께 하는 형제가 관장으로 있는 태권도장이었다.
그 다음 주인 3월 9일에는 정식으로 창립예배를 드렸고 여러 교회로부터 온 150여명의 형제들이 와서 함께 예배드리고 축복해주었다.
창립예배 중에 전직 의사이며 지금은 오직 기도와 봉사에 전념하시는 칠십 여세된 어떤 노 자매님이 일어나시더니 우리를 향해 이렇게 말하셨다.
"주님께서 내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세웠다'고 하십니다."
나는 이 말씀을 우리 평신도 교회 멤버들 전체에게 주신 것이라고 확신한다.
우리 동네에는 많은 교회가 있다. 우리 집 근처에도 교회가 3개나 된다. 그런데도 왜 또 교회를 세워야만 하는가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의아해 할 것이다.
실제로 나는 그러한 질문들을 여러 번 받았다.
그러므로 이것에 대해 일목요연하게 대답해 줄 수 있는 책이 필요했고 이것이 바로 그 책이다.
이 글을 읽는 동안 어떤 분은 그 동안에 알고 있었던 것을 다시 한번 정리하는 것같은 생각이 들 수도 있고 어떤 분은 새로운 개념으로 느껴져 충격이나 거부감을 가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부디 중간에 멈추지 말고 끝까지 인내하면서 읽어주었으면 한다.
이 책은 다음과 같은 여러 질문에 대답하면서 전개될 것이다.
성직자와 평신도의 구분은 성경적인가?
평신도를 '주의 종'이라고 불러도 되는가?
목회를 하려면 반드시 신학교를 나와야 하는가?
신학교를 나오지 않은 사람이 목사가 되는 것이 불법인가?
다른 직업을 가진 사람이 과연 교회 목회를 할 수 있을까?
목사가 다른 직업을 가지는 것은 세상과 타협하는 타락된 행위인가?
평신도들끼리 모여서 교회를 이루어도 아무런 문제가 없을까?
한국교회 기독교 인구가 줄어들고 있다고 하는데 대책은 없을까?
이 책에서는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해서 일부 독자들이 생각하기에 비성경적이라고 여겨지는 단어들도 사용했다. 예를 들면 평신도라는 단어다. 이 말은 비성경적인 말임에도 불구하고 평신도라는 말이 이미 지극히 일반화되어 있기에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해 사용한 것이니 만큼 독자들은 양해해주기 바란다. 여기에서 언급하는 평신도란 신학교를 나오지 않은 사람들을 의미하며, 신학교를 나왔더라도 목회직을 갖지 않고 일반 직장을 다니는 사람을 의미한다.
그리고 평신도 교회란 평신도와 성직자의 구분이 없는 교회를 말하며, 신학교를 나오지 않은 사람들 또는 일반 직장을 다니는 사람들이 사역자가 되어서 사역을 하는 교회를 의미한다. 그에 반해 여기서 언급하는 기성교회는 신학교를 나온 사람이 전임으로 사역하는 교회를 말한다. 이러한 정의를 분명히 해두어야 글을 읽는 데 혼동이 없을 듯하다.
그리고 용어 선택에 있어서 개념과 다소 모순되어 보이는 용어를 쓰는 것에 대해서도 독자들이 양해해 주기 바란다. 예를 들면, '교회에 다닌다'는 말은 성경적으로 정확한 용어는 아니지만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고 있기에 그대로 사용하게 된 것 등이다.
그러나 이 책을 끝낼 무렵 독자들은 용어 선택에 더욱 신중을 기하게 되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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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셩경적 교회관
[예배당은 교회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하면 십자가 달린 종탑이 있는 건물을 연상한다.
그러나 그것은 예배드리는 장소인 예배당에 불과한 것이지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교회는 아니다.
신약성경에서 '교회'라고 할 때는 '에클레시아'라는 단어를 사용했는데 그것의 문자적인 뜻은 '집으로부터 어떤 공공의 장소로 불러낸 시민들의 모임'이다. 다시 말하면 초대교회에서 신약성경을 읽는 그리스도인들은 적어도 헬라어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교회'라는 단어를 읽을 때 '건물'이 떠오르지 않고 '회중'이 떠올랐다는 말이다. 그들이 '회중'을 의미하는 '교회'라는 단어를 쓸 때 당신이 '건물'을 떠올린다면 당신이 그들의 편지를 이해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기대하기 어렵다.
우리는 성경 전체를 통해서도 그러한 사실을 확인할 수가 있다.
고전 1:2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저희와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위의 구절에 의하면 교회란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 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라고 정의되어질 수 있다. 이와 비슷한 내용의 성구를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고전 16:19
아시아의 교회들이 너희에게 문안하고 아굴라와 브리스가와 및 그 집에 있는 교회가 주 안에서 너희에게 간절히 문안하고
위의 구절을 보라! '그 집에 있는 교회'라는 말이 얼마나 교회가 무엇을 의미하는 지를 잘 말해주는가? 만일 교회가 단순히 건물이라고 한다면 '그 집에 있는 교회'라는 말을 해석하기가 얼마나 어려운가? 당신은 신약에 있는 성도들은 교회를 '건물'이 아닌 '회중'으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이의를 달지 못할 것이다.
동남아 등지에서 활동하다가 돌아온 사역자들에 의하면, 요즈음 동남아 국가에 가면 우리나라 선교사들이 세운 예배당을 종종 발견할 수 있는데 그 중에는 교인이 하나도 없는 예배당이 여럿이 있다고 한다. 교인이 없는 예배당은 결코 교회일 수가 없다. 그런데도 사역보고를 할 때는 '교회를 개척했다'고 한다. 잘못된 지식이 낳은 결과다.
이제 우리는 교회에 대한 잘못된 지식을 버리고 성경적인 교회관을 가져야 한다. 더 이상 예배당을 교회라고 부르는 무식을 범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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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당은 성전이 아니다]
예배당을 '성전'으로 표현하는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는 많다. 만일 단순히 예배드리는 장소로서의 의미로 성전이라 부른다면 별 문제 없지만, 예루살렘 성전과 같이 특별히 구별된 거룩한 곳이라는 의미로 '성전'이라고 부른다면 심각한 오류를 범한 것이 된다. 내가 왜 심각한 오류라고 하는가하면 그것은 성경의 근본적 사상에 배치되기 때문이다.
성전의 성경적 의미는 '하나님께서 특별히 구별하신 거룩한 곳이며 하나님께서 거하시며 사람들과 만나시는 곳'이다. 하나님께서는 무소부재하셔서 어느 곳에나 계시지만 특별히 언약궤가 있는 성소를 구별하시고 그 곳에서 백성들을 만나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출 25:22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
그러기 때문에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 성전은 '하나님의 집'이었고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곳이었다. 그런데 성전은 전 세대에 걸쳐서 언제나 하나만 존재하였다. 우상의 전들은 복수로 나타나지만 하나님의 성전을 복수로 쓴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하나님의 성전이 복수가 될 수 없는 것은 성전 성립에 필수적인 지성소와 언약궤와 번제단 등이 유일 무이한 것들이기 때문이었다. 북쪽 이스라엘이 남쪽 유다의 예루살렘 성전을 대신하기 위해 산당들을 크게 세웠지만 어느 이스라엘 사람들도 그것을 '성전'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유대인들이 나중에 각국에 흩어져서 자기 동네에 '회당(synagogue)'을 세웠을 때도 그들은 그것을 '성전'이라 부르지 않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유의할 필요가 있다. 그들에게 있어서 성전이란 오직 예루살렘 성전 외에 다른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타국에 거하면서도 언약궤가 있는 예루살렘을 향해 기도하곤 했다.
요세푸스의 유대 전쟁기를 보면 성전에 대해 미신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었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전쟁에서 위기에 처했을 때 성전에 피하기도 했었다. 하나님이 계신 성전은 결코 무너지지 않는다는 신념 때문이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24장에서 이미 예언하셨듯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겨지지 않게' 성전이 다 파괴되도록 하나님께서는 허락하셨다. 영적인 것을 좇지 않고 외형적이고 종교적인 형식만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큰 경고를 주신 셈이다.
그렇다면 신약에 와서 신약의 그리스도인들은 무엇을 성전이라고 생각했는가? 신약에 와서는 구약의 그림자이며 상징적이고 형식적인 것들을 폐하고 참 형상이며, 영적인 것을 말하고 있다.
신약에 와서는 다음과 같은 성전 개념을 가진다.
첫째로, 우리들의 성전은 더 이상 땅에 있는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하늘에 있는 영적인 것이다.
다음의 성구를 살펴보라!
히 8:1-2
이제 하는 말의 중요한 것은 이러한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라 그가 하늘에서 위엄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으니 성소와 참장막에 부리는 자라 이 장막은 주께서 베푸신 것이요 사람이 한 것이 아니니라
히 8:5
저희가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모세가 장막을 지으려 할 때에 지시하심을 얻음과 같으니 가라사대 삼가 모든 것을 산에서 네게 보이던 본을 좇아 지으라 하셨느니라
히 9:23-26
그러므로 하늘에 있는 것들의 모형은 이런 것들로써 정결케 할 필요가 있었으나 하늘에 있는 그것들은 이런 것들보다 더 좋은 제물로 할지니라. 그리스도께서는 참 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오직 참 하늘에 들어가사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고 대제사장이 해마다 다른 것의 피로써 성소에 들어가는 것 같이 자주 자기를 드리려고 아니하실찌니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
위의 말씀을 보면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이 되어서 들어가신 성소는 땅에 있는 성소가 아니라 하늘에 있는 성소임을 말씀하고 있다.
위의 성경에 의하면 모세의 성막은 하늘에 있는 성막의 모형에 불과하다고 했다. 만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제사드리는 곳이 예루살렘 성전이었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성전은 하늘에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대제사장이 되셨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성전은 더 이상 가시적이고 외형적인 건축물이 아니라 하늘에 있는 영적인 것이며 하나님께서 지으신 것이다. 예루살렘 성전은 이 성전의 모형이었고 상징에 불과했다. 그러므로 참형상이 올 때 상징의 역할은 끝난다.
둘째로, 하나님께서 그 안에 거하시는 그리스도인들이 곧 하나님의 성전이다.
다음의 성구들을 살펴보자.
고전 3:16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고전 6:19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고후 6:16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가라사대 내가 저희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저희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 하셨느니라
위의 말씀들을 보라! 성전의 성경적 의미인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곳'이 진정으로 어디인지를 잘 말해주고 있다. 그리스도인들 안에 성령님께서 거하신다. 그리스도인의 몸이 바로 하나님의 전인 것이다. 천지를 창조하신 위대하신 하나님께서 우리같이 비천한 인간에게 오셔서 함께 하심으로 우리를 하나님의 전이라고 부를 수 있도록 하셨다는 사실이 얼마나 황송하고 감사한 일인지!
셋째로, 교회(예배당이 아닌)가 바로 성전이다.
거듭 말하거니와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이다.
주님께서는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18:20)고 하셨다. 교회 안에 그리스도께서 거하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엡 2:20-22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라는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는 예배당이 아닌 그리스도인들임을 명백히 말씀하고 있다.
이상과 같은 이유로 나는 예배당이 더 이상 성전이 아님을 확신한다.
신약성경 어디에도 인간의 건축물을 특별히 구별하시고 거룩하게 하신 일이 없다. 그리고 인간의 건축물에 하나님이 특별히 거하신다고 암시를 주는 구절은 없다.
예루살렘 성전을 지은 솔로몬조차도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께서 인간의 손으로 지은 집에 계실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왕상 8:27
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치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전이오리이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전이라고 불렀던 것은 오직 언약궤가 있는 그곳에서 하나님께서 만나주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초대교회의 스데반 집사도 순교하기 전에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서도 그러한 사실을 다시 한번 언급했다.
행 7:48-50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 선지자의 말한바 주께서 가라사대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뇨 이 모든 것이 다 내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냐 함과 같으니라
신약에 와서 예배당은 단지 편리성 외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이 로마의 묘지인 지하 카타콤에서 예배드린 것을 기억해 보라! 그들은 어느 곳에서도 예배드릴 수 있었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성전은 더 이상 땅위의 건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령의 역사가 사라진 중세 때를 보라. 치솟은 뾰족탑과 화려한 성화로 예배당을 얼마나 자랑했는가! 영적인 것이 사라질 때 외형적이고 형식적인 것에 치중하게 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인 것 같다. 지금 유럽을 여행하고 온 형제들의 말을 들어보면 그 크고 아름다운 예배당에 정작 예배드리는 사람은 손가락으로 셀 정도라고 한다. 도대체 그 큰 예배당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이제 참의미로서의 성전 개념을 알았다면 더 이상 동네에 있는 예배당을 성전이라고 부르는 무식을 범하지 말자. 그것은 저 형식적이고 율법적인 유대인들조차도 용납하지 않는 일이다.
그런데 내가 왜 예배당이 성전이 아님을 이렇게 장황하게 설명하는지 의아해할 독자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이유는 오늘날 예배당을 성전으로 묘사함으로서 많은 신자들이 거의 미신적으로 건물에 지나친 치장과 투자를 하기 때문이다.
솔로몬이 예루살렘 성전에 정성을 쏟았듯이 그러한 사상으로 예배당을 치장한다. 수백 만원을 들여서 중동에서 수입해온 백향목으로 강대상을 만들거나, 유럽에서 수입한 대리석으로 예배당 벽을 만든다든가, 심지어 어떤 사람은 다윗처럼 자신은 집이 있는데 하나님은 집이 없다는 것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고 자기의 전셋돈을 뽑아서 성전건축에 사용한 사람도 있다는 소문도 들었다. 만일 그런 사람이 있다면 자기 집도 중요한 예배 장소라는 사실을 잊지말기 바란다.
둘째 이유는 예배당이 성전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러한 성전이 없는 곳에서는 정상적인 예배도 드릴 수 없을 것이라는 오해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긴 나도 초신자 시절에는 그러한 사고를 가지고 있어서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예배당에 달려가서 기도하곤 했다. 집에서 기도하는 것은 별 효과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강대상 놓는 곳은 지성소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그곳에는 감히 못 올라갔고, 예배당을 거룩한 성전이라고 생각하여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요 2:17)는 말씀을 보고 예배당을 꽤나 위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혹시 혈기왕성한 젊은이들이 좌가 틀렸다고 우로 가는 어리석음을 범치 않도록 하기 위해서 노파심으로 말하거니와 그렇다고 해서 예배당을 아무렇게나 짓고 아무렇게나 취급하지는 않기 바란다. 그곳은 우리 사랑하는 형제들이 편안하게 예배드리고 교제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통찰력이 있는 독자들이라면 적어도 예배당이 교회가 아니며, 예배당이 성전이 아니라는 사실에 동의할 것으로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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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란 무엇인가]
성경에서 말하는 교회란 무엇일까?
앞서 말했듯이 건물이 아니고 사람들이다. 교회란 헬라어로 '에클레시아'라고 하는데 그 말의 문자 적인 의미는 '~~으로부터 불러낸 무리'라고 한다. 그런데 문자 적인 의미에 집착하다보면 성경에서 말하는 교회라는 의미를 놓칠 수 있다. 성경에서 말하는 교회는 단순한 단어의 의미를 넘어서는 그 무엇이 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단순히 모여있다고 해서 '교회'라고 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교회는 동일한 목적과 기능들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교회는 예수님의 몸으로서 예수님의 명령에 절대 순종해야 한다.
엡 1:22-23
또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교회와 예수 그리스도는 몸과 머리의 관계로 설명되어질 수 있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몸이 머리의 통치를 받듯이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는 회중들임을 의미한다. 비록 이 세상 사람들은 다 하나님의 통치를 받고 있지만 교회만이 유일하게 자발적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곳이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부르며 그 분을 기쁨으로 섬기는 무리들이 바로 '교회'라는 것이다. 모든 만물을 통치하시는 만유의 주재가 되시고 지금도 강력한 힘으로 우주의 질서를 유지시키시는 하나님의 충만하심이 하나님을 순종하는 회중인 교회에 강력하게 임하실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마치 모세의 성막에 하나님의 영광의 구름이 가득차 있었듯이 교회에 그러한 하나님의 영광과 충만하심이 임재해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역사를 교회를 중심으로 이끌고 계시는 것이다. 교회가 깨어있으면 나라는 평안하고 교회가 잠들어있으면 나라는 환난과 풍랑에 휩싸이게 되는 것이다.
만일 한국의 온 교회가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했더라면 오늘날 우리나라의 상황은 훨씬 더 살만하고 복된 나라가 되었을 것이다. 뇌물을 거절하는 정직한 공무원과 성실한 기업인과 직장인, 아내를 사랑하고 남편을 존경하며 아이를 잘 양육하는 가정, 부모를 공경하며, 이웃을 사랑하는 .... 이 모든 것이 우리 주님이 명령하신 것이 아니던가? 그리고 그런 것이 이 나라의 사분의 일이나 되는 그리스도인들이 솔선 수범했다면 우리나라에 어찌 변화가 없었으랴!
교회의 목적은 단순히 사람들을 많이 끌어 모으는 것이 아니다. 나는 교회가 성립하려면 주님의 명령을 받들어 다음의 것들이 기본적으로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첫째로, 하나님의 말씀이 전파되고, 가르쳐지고, 지키도록 해야 하며(마 28:20)
둘째로, 세례(침례)를 베풀고, 성찬을 거행하며 (마 28:19, 눅 22:19)
셋째로, 참된 예배가 있고 (요 4:23,24)
넷째로, 성도 간에 참된 교제와 봉사가 있어야 하며(요 13:34,35, 롬 12:4-13)
다섯째로, 범죄하고 타락한 사람을 치리(징계)할 수 있어야 한다. (마 15: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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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신도와 성직자의 구분은 성경적이 아니다]
오늘날 교회 내에는 평신도와 성직자 두 계급이 있다. 이 두 계급은 결코 좁혀지려야 좁혀질 수 없는 간격으로 벌어져 있어 평신도들이 성직자의 사역들을 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 성직자들은 특별한 위치의 상징으로 '하나님의 대리인' 또는 '하나님의 종'으로 불리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이 성경적이 아니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리고 종교개혁자들이 이것이 비성경적이기 때문에 그러한 구분을 철폐시켰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많은 사람들이 고등학교에서 세계사 시간에 루터의 종교개혁에 대한 공부를 하면서 배운 '만인사제론'과 같은 것 등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이러한 종류의 이야기를 새로운 것으로 느끼고 있다. 내가 지금 말하고 있는 것은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닌 아주 오래된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새삼스럽게 주장하는 것은 이러한 진리를 우리가 망각해버렸기 때문이다.
종교 개혁자 루터의 말을 들어보자.
로마교도(천주교도)들은 퍽 교묘하게 자기들 주위에 세 가지 담을 쌓아놓고 그 뒤에서 이제가지 자신들을 방어해 왔다. 그리하여 아무도 그들을 개혁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것이 전 기독교계를 통하여 번진 무서운 부패의 원인이 되어 왔다.
먼저, 첫째 담에 대하여 비판을 가하자.
교황, 주교들, 사제들 및 승려들을 '영적 계급'이라고 부르고 군주들, 영주들, 직공들 및 농부들을 '세속적 계급'이라고 부르는 것은 전혀 조작적인 것이다. 실로 이것은 순전한 거짓과 위선이다. 아무도 여기에 놀라서는 안 된다. 이것은 말하자면 모든 크리스천은 참으로 '영적 계급'에 속하며 그들 가운데는 직무상의 차별 이외에 아무 것도 없다. 이것은 바울이 고린도전서 12장에서 우리는 다 한 몸이나 모든 지체가 다른 지체를 섬기기 위하여 각기 자기대로의 임무를 가진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것은 우리가 다 한 세례와 복음과 신앙만이 우리를 '영적'으로 되게 하고 같은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교황이나 주교가, 기름을 붓고 체발하고 서품을 하고 봉헌례를 하거나 또는 평신도와는 다른 옷을 입는 일은 위선자와 조각물들을 만들 것이다. 이런 것은 그리스도인이나 '영적'인 인간을 만들지 못한다. 우리는 다 세례를 통하여 사제로서 성별을 받는다. 이것은 사도 베드로가 베드로전서 2장에서 '너희는 왕같은 제사장이며 제사장 같은 나라이다'(9절)라고 말하고 또 계시록에 '당신은 당신의 피로써 저희를 제사장과 왕들이 되게 하셨나이다.(계5:9-10)라고 기록되어 있는 바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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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크리스천들 가운데서 한 사제는 하나의 관리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그가 직무를 가지고 있는 동안에는 우위권을 가지나 파면되면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농부나 시민이 된다. 따라서 의심 할 여지없이 한 사제가 파면을 당하면 그는 더 이상 사제가 아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들이 '지울 수 없는 성질'을 조작해 놓고 파면된 사제도 단순한 평신도와는 좀 다르다고 지껄인다. 사제는 결코 평신도가 될 수 없다거나, 혹은 사제는 사제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라는 몽상까지 한다. 이런 모든 것은 단순히 공론이나 인간이 만든 규정에 지나지 않는다.
이 모든 것에서 그들이 말하는 바 평신도와 사제, 군주와 주교, '영적인 것'과 '세속적인 것' 사이에는 실제로 직무와 일에 관한 차이 이외에 아무 차이도 없다. 그들에게 '신분'에 관한 차이는 전혀 없다.
이것은 1520년도에 쓴 글임에도 불구하고 종교개혁자의 후예라고 자처하는 현대의 우리가 읽어도 충격이 된다. 위의 글에서 사제란 천주교의 신부를 가리키는 바 개신교에서는 성직자로 불리는 목사와 같은 사람들이다. 그런데 그가 무엇을 주장하는가? 사제와 평신도와의 근본적 신분의 차이는 없다는 것이다.
목회직은 교회 내에서 그가 맡게된 독특한 역할일 뿐이지 특별히 다른 직업과 구분된 거룩한 직업이라는 생각을 해서는 안된다. 칼빈은 노동은 신성한 것으로 모든 직업은 하나님께로 왔음을 주장하였다. 의사가 사람의 육체를 다루고 학교 교사가 사람의 정신을 다루고 있다면 목사는 영혼을 다루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다 이 사회에서 필요한 사람들이며 거룩한 직업들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목회직이 그들보다 영혼을 다룬다는 면에서 훨씬 더 보람될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리고 우리는 목사가 대제사장이고 평신도들은 백성에 불과하다는 사고방식이나 심지어 어떤 사람처럼 예배당이 성전이며 강대상이 지성소라는 엉터리 사고방식을 버려야 한다. 이제 우리는 교회 내에서 평신도와 성직자를 구별하는 것이 성경적이 아님을 잠깐 고찰해 볼 필요가 있다. 구약에서는 백성들과 제사장들 간의 정확한 구분이 존재했지만 신약에 와서는 그러한 구분은 폐지되었다.
사도 베드로는
벧전 2: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라고 선언하면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바로 왕같은 제사장들이라고 선언하고 있다. 이 성구는 루터가 '만인 사제론'을 주장하게된 근거 구절이기도 하다.
사도행전을 보면 오늘날 평신도라고 불릴 수 있는 집사 빌립이 세례를 주기도 하고(행 8:12) 집사 스데반이 전도사 역할을 하기도 했다(행 6:10-7:60).
사도행전에 의하면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제자로 불렸다(행 6:1). 이제 막 예수님을 믿게된 사울이나 (행 9:26), 오래된 신자들도 제자라고 불렸다(행 9:28). 그리스도인들 중에 특별한 사람만 '제자'라고 불리질 않았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제자이며 마땅히 주님을 따라야 한다. 오늘날 일부 목회자들이 자신을 '주의 제자'라는 용어보다는 '주의 종'이라는 용어를 즐겨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 목회자들이 스스로 '주의 종'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조금도 이상한 것이 아니며 비성경적인 것도 아니다. 매우 성경적이다. 바울도 많은 서신서에서 자신을 '예수그리스도의 종'이라고 소개하지 않았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회자들이 스스로를 '주의 종'이라고 표현하는데 우리가 거부감을 느끼는 것은 '주의 종'이라는 용어가 평신도와 구분되는 특별하고도 존귀한 신분임을 나타내는 용어가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성경에 의하면 '주의 종'이라는 용어를 스스로 자신이 사람에게 존경받을 만한 특별한 위치임을 표시하는데 사용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하나님의 종'이라는 용어는 단지 자기를 낮추고 스스로 주님께 복종의 삶을 살겠다고 결심한 사람들이 즐겨 사용했을 뿐이다. 그런데 오늘날 어떤 평신도가 자신을 가리켜 '주의 종'이라고 한다면 그는 매우 이상한 사람으로 여겨지고 교만한 자로 정죄될 것이다. '종'이라는 단어가 겸손의 표시가 아니라 특권의 표시가 된 것은 아이러니컬한 일이다. 그만큼 '종'이라는 단어의 의미가 왜곡되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을 '주님(Lord)'이라고 부른다는 사실 자체가 자신이 '종'임을 스스로 자인하는 것이 아닌가? 자신이 종임을 자인하지 않고야 어찌 예수님을 '주님(Lord)'이라고 부를 수 있겠는가? 만일 자신이 예수님의 종임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예수님을 주님으로 시인한다는 사람은 결코 구원받은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 종의 개념을 잘 설명하기 위해서 다음의 성구를 살펴보자.
롬 6:16-19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내가 누구에게 순종하기로 하느냐에 따라 누구의 종이 되는가가 결정되는 것이다. 내가 주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기로 결심하는 순간 나는 주님의 종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결심 없이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은 아무도 없다.
롬 10: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예수님을 주(主)라고 시인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주의 종'이라고 하는 것이 마땅치 않는가? 오히려 주의 종이라는 말을 특별한 사람에게만 사용함으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은 주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고 적당히 살아도 되는 사람으로 오해하지나 않는가? 더군다나 성경에 의하면
시 119:91
천지가 주의 규례대로 오늘까지 있음은 만물이 주의 종이 된 연고니이다
라고 했는데 여기에서는 심지어 모든 만물이 주의 종이라고 선언한다.
모든 만물이 주님의 규례를 지킴으로 주의 종이라고 불린다면 더더욱 주님 말씀에 순종해야 하는 그리스도인들을 '주님의 종'이라고 말하는 것이 어찌 이상한 일이란 말인가?
나는 그리스도인들이면 전부가 스스로를 '주님의 종'이라고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싶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은 참으로 헌신된 사람이라는 자랑의 의미로써가 아니라 자신은 하나님을 거스를 수 없고 순종해야만 한다는 겸손의 의미로써 사용되어야 한다.
자신을 주님의 종이라고 부르는 자세는 주님을 경외하며 순종하는 삶을 살도록 하는데 도움을 줄 것이다.
물론 우리는 전적으로 주님께 헌신된 사람을 가리켜 참된 의미로서의 종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곧 성직자들은 주님의 종이며 평신도들은 주님의 종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주장을 지지하는 것은 아니다. 평신도들도 헌신된 사람들이 많이 있다.
나는 이러한 혼동이 다 평신도와 목회자의 구분이 처음부터 존재한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생겼다고 믿는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 성직자와 평신도의 구분은 교회 내에서 없어져야 한다.
다음의 글은 많은 참고가 될 것이다.
오늘날 평신도를 가리키는 lay(레이)라는 말이 '무식하다','학문분야에서 비판할 자격이 없는 자'란 뜻으로 안수 받은 교직자를 제외한 일반 신자를 가리키는 말로 쓰이게 되었으나 이것은 본래 성경적인 의미와는 대단히 거리가 멀다.
본래 평신도라는 말 레이(lay)는 헬라어의 laikos(라이코스)에서 나와 라틴말의 라이쿠스(laikus)가 된 말인데 이것은 성경에 자주 사용되고 있는 라오스(laos)와 같은 뜻이다.
즉 선택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뜻이다(벧전 2:9,10). 이것은 어떤 백성 안에 선택된 특권층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모든 성도 즉 하나님 백성의 총체인 믿는 자의 공동체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성경적인 의도와는 다르게 교회가 조직화되고 체계화되면서 성직자와 일반신자를 구분하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로마의 클레멘트는 벌써 A.D. 95년에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 속에서 그런 뜻으로 사용하기 시작하였고 제 3세기 중엽으로 접어들면서부터는 구약적 제사장과 백성을 구분하는 계급적인 용어로 전락하게 되었다. 특히 로마교회의 지도 밑에서 성례전과 수도원 제도의 잘못된 발전에 따라 '그리스도인의 계급에는 둘이 있다'고 잘못 생각하게 되고 결국 더 나아가 저 유명한 익나티우스의 '교회는 감독과 그 성직자들로 구성되어 있다'라고 하는 사상을 합법화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본래 '선택된 하나님의 백성 전체'를 뜻하던 교회의 주체인 이 라이코스(laikos)들이 성직자들에 의해서 완전히 교회의 객체가 되어 교회 밖으로 쫓겨나서 '세속에 속한 무식한 무리'로 변질되어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었고 성직자들만이 교회요, 교회의 주체로서 거룩한 그룹을 형성하게 된 것이다.
우리는 루터의 저 유명한 만인 사제론을 익히 알고 있다. 이를 통해 원리적으로는 성직자와 평신도의 구별이 폐지된 것이다. 루터는 이를 그의 유명한 크리스챤 귀족에게라는 성명서 가운데서 '모든 그리스도인은 참으로 제사장들이며, 사무에 관한 일을 제외하고는 그들 사이에 하등의 구별이 없다'라고 선언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솔직히 우리가 시인할 수밖에 없는 것은 이러한 위대한 만인 사제론이 종교개혁 이후에도 교회 안에서 실제적, 구체적으로는 별 큰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개혁자들의 원리는 신학적인 강연의 주제로서는 대단한 힘을 발휘했었지만 여전히 교직자는 전체로서의 회중이 되기보다는 지배적인 통치적 위치를 차지했어야 했고 어쩔 수 없이 새로운 - 중세적은 아니나 원리대로 완전히 개혁되지 못한- 형태의 성직자 계급이 형성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었다.
헨트릭 크레머는 A Theology of the Laity라는 책에서 개혁자들의 원리가 개신교에서도 완전한 형태로 적용될 수 없었던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첫째, 이미 교회안에 중생하지 않은 많은 사람들이 세례를 받음으로 성도들 속에 참된 하나님의 제사장들(거듭난 자)과 아닌 자들을 구별한 수가 없었다는 점
둘째, 교인들의 영적인 미숙 때문에 평신도들이 그들이 되찾은 원리에 따라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없었다는 점
셋째, 순수한 말씀을 전파하는 설교자를 길러야하고 현실적인 필요성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또 다른 계급인 설교자격자라는 특수 그룹을 만들지 않을 수 없었다는 점.
그리하여 그 후 발전한 교회 조직은 일반 성도들에게 적극적인 책임을 갖도록하는 위치를 여전히 줄 수가 없었고 평신도들은 비록 종교개혁 이전과는 다른 정황 속에 있다 할지라도 여전히 교회의 새로운 객체로서 목회와 통치(정치적인)의 대상으로 머물 수밖에 없었다고 지적한다.
이 긴 인용문을 반드시 꼼꼼히 읽어보기 바란다. 어느 정도 신앙생활을 하고 성경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즉시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를 알 것이다.
▲ LIST
[목사는 학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사다]
오늘날 교회의 목사 자격은 어떻게 획득하는가?
중세 때 수도원 출신에 교황의 서품 여부였다면 오늘날에는 일반적으로 신학교의 졸업과 안수 여부로 가름한다. 다시 말해서 신학교를 졸업해서 일정기간이 지나면 목사안수 받을 자격을 받게 되고 안수 후 그는 정식으로 목사가 된다. 그때부터 그는 소위 성직자가 된 것이다.
그런데 성경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엡 4:11-12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위의 성경에 의하면 사도,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 목사, 교사는 사람들에 의해서 뽑히고 임명되는 직분이라기 보다는 하나님께서 그 원하시는 사람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사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러한 은사를 신자들에게 주심은 신자들로 하여금 성도를 완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우려 하심이다.
사도,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 목사, 교사가 하나님의 은사라는 사실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케 한다. 하나님의 은사란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라는 뜻인데 이것을 인간의 제도로 양산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예를 들어 어떤 기관에서 자기들이 만든 어떤 교육과정을 마쳤다고 해서 분별없이 사람들에게 '사도'자격을 수여한다면 나는 주저할 것도 없이 그 기관을 '사이비'이라고 부르겠다. 그것은 분명히 비성경적이다. 사도 바울도 항상 이 사실을 염두에 두고 이렇게 말했다.
갈 1:1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및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된 바울은
바울은 자기가 사도가 된 것이 사람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라고 분명히 말한다. 그렇다! 하나님의 은사는 사람에게서 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마찬가지 원리를 목사나 교사나 복음전하는 자에게 다 적용할 수 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목사나 교사로 세울 때는 그가 어떤 과정을 마쳤는가보다는 그에게 그러한 은사가 있는가를 먼저 확인해야 할 것이다. 신학교의 교육과정은 더 나은 질적 향상을 위해서 필요할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나는 오늘날의 신학대학이 목회자들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한 교육기관으로 존재하는 것에 대해서는 이의가 없다. 그것은 많은 유익을 줄 수 있다. 그러나 신학대학이 자격을 수여하는 기관이 되는 것에는 절대적으로 반대한다. 신학대학은 교육기관이지 자격을 주는 기관이 아니다. 결코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된다. 세상사람들은 그러한 가시적인 제도가 필요하고 졸업장과 면허증들이 중요한 기준이 되나 교회마저 그러면 안 된다. 적어도 교회는 세상에서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유일한 무리들이 아닌가? 그런데 어찌 귀머거리, 장님처럼 인간적인 제도를 만들어 놓고 졸업장과 시험점수를 기준으로 자격증을 준 단 말인가? 자격은 스스로 갖추게 하라. 다시 말하면 그가 자신의 은사대로 봉사하다 보면 그의 봉사의 열매와 사역의 결과들이 그의 자격을 말해줄 것이다.
은사는 봉사의 일을 하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후부터 그의 사역은 시작된다. 안수 받음으로 시작되는 것은 아니다. 안수의 의미는 그러한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한번 확인하고 인준하는 것일 뿐이다. 다음 성경을 살펴보자.
행 13:1-3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가라사대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안디옥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다고 했다. 안디옥 교회에서 바울은 선지자나 교사로 인정되었다. 그것은 자연스럽게 교회에서 드러난 것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성령께서 말씀하신 대로 따로 세우라는 것을 순종하기 위해서 안디옥교회의 형제들은 바울과 바나바를 안수했다. 바울은 그때 사도직을 임직받았는가? 그렇지 않다. 안디옥 교회의 안수는 단지 따로 세우심에 대한 주님의 명령을 교회가 순종하고 파송하기 위한 절차인 것이다. 바울은 종종 사도직에 대한 도전을 받았는데 자신의 사도됨을 증명할 때 위의 안수 사건에서 근거를 찾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바울이 자신이 사도임을 어떻게 강변했는가를 살펴보자.
고전 9:1-2
내가 자유자가 아니냐 사도가 아니냐 예수 우리 주를 보지 못하였느냐 주 안에서 행한 나의 일이 너희가 아니냐 다른 사람들에게는 내가 사도가 아닐지라도 너희에게는 사도니 나의 사도 됨을 주 안에서 인친 것이 너희라
이 말씀을 보면,
사도의 표로 그는 두 가지를 제시한다고 말할 수 있는데 그것은 자신이 예수님을 보았다는 것과 그리고 자신의 사역의 열매들이다.
그런데 이 주장에서 예수님을 보았다는 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것으로서 사람들에게 증명할 길이 없는 부분이다. 그러나 그의 사역의 열매는 확실한 객관적 증거다. 다시 말해서 바울은 주님께서 자신을 사도로 임명하셨음을 확신하고 있다. 어떤 조건을 갖추었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의 명령 때문에 사도가 된 것이다. 사도의 자격의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주님으로부터 나왔느냐 아니냐이다. 그런데 그러한 사도 바울의 간증은 너무도 개인적인 것이라 다른 사람이 확인할 길이 없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의 사도의 표 된 것으로 그의 사역의 열매와 결과들을 제시하는 것이다. 이것은 다른 바울의 편지에서도 발견된다.
고후 12:11,12
내가 어리석은 자가 되었으나 너희가 억지로 시킨 것이니 내가 너희에게 칭찬을 받아야 마땅하도다 내가 아무 것도 아니나 지극히 큰 사도들보다 조금도 부족하지 아니하니라 사도의 표된 것은 내가 너희 가운데서 모든 참음과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행한 것이라
모든 참음과 표적과 기사와 능력 - 다시 말하면 그의 사역의 결과와 열매를 사도의 표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실로 고린도 교회 형제들에게 있어서 바울의 사역은 바로 사도의 사역이었다. 고린도교회를 개척하고 그들을 양육하고 감독을 세우는 일을 누가 했던가? 바울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사도가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두말할 것도 없이 고린도 교회 형제들에게 있어서 바울은 분명히 사도였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내가 사도가 아닐지라도 너희에게는 사도니...'(고전 9:2)의 말씀이 우리에게 은사가 무엇인지를 잘 말해주고 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사람이 사도가 되려면 첫째 분명히 주님으로부터 위임받아야 하며 그것이 증명되기 위해서 그의 사역의 열매들을 보면 된다. 만일 사도가 되기 위해 당시 예루살렘교회에서 교육받은 증거나 베드로의 인증 같은 것을 요구하였다면 얼마나 우스웠을까? 그리고 베드로가 예루살렘에서 4년간 교육받으면 자동으로 사도로 임명되는 제도를 만들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렇다면 교회는 급속히 성령의 역사가 멈추었을 것이다.
자, 이제 우리는 처음의 주제로 돌아가자. 사도가 주님으로부터 나온 것처럼 선지자도, 목사도 동일한 원리가 적용된다. 절대적으로 그렇다! 주님께서 어떤 사람에게 목사의 은사를 주시는 것이고 그러한 은사를 받은 사람이 목사 노릇을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가 진실로 하나님께로부터 목사의 은사를 받았는지 아닌지는 그의 사역의 열매가 나타내 줄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은사를 받았는지에 대해 생각도 안 해보고 단지 등록금을 착실히 내고 학교에 꾸준히 출석하고 신학시험에 낙제하지 않고 무사히 통과했다는 이유만으로 목사 자격을 주는 것이 과연 성서적이라고 생각하는가?
언젠가 극동방송에서 어느 조그마한 섬에서 사역하는 분의 간증을 듣게 되었다. 그 분은 원래 교회 장로였는데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하나님께 헌신하게 되었다. 그래서 남들이 가기 꺼려하는 그 섬에 자원해서 가서 온갖 고생을 무릅쓰고 교회를 개척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 분은 안타깝게도 학력이 초등학교 중퇴였다. 그래서 그는 목사가 되지 못하고 항상 전도사로 불렸다. 그가 목사 자격을 따기가 얼마나 어려웠을는지는 짐작할 수 있다. 다행히도 우리나라에는 정규대학 코스가 아닌 무인가 군소 신학교가 많이 있어서 거기서 그것도 통신 강좌로 과정을 마쳐서 목사 안수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어려운 형편에 입학금, 등록금을 내면서 다녔을 것을 생각해보라. 나는 더 위험하다고 생각되는 것은 신학교를 졸업한 후에 자신이 비로소 목사 자격이 생겼다고 자만하는 것이다.
내가 확신하건대, 위의 섬에서 목회 하던 장로는 신학교 다니기 전에 이미 목사로 부르심을 받은 것이다. 그렇게 양들을 위해 헌신적인 사람이 어찌 목사라고 할 수 없겠는가?
만일 오늘날 신학대학이 순수한 교육기관으로 만족했더라면 교회는 훨씬 큰 유익을 얻었을 것이다. 그러나 신학대학이 자격을 수여하는 기관이 됨에 따라 신학대학을 못 간 사람은 사역할 길이 막혀버렸고 반대로 신학대학을 마친 사람은 은사에 관계없이 목사가 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았다. 이것은 아무리 능력이 있어도 학력이 낮은 사람은 목사가 될 수 없음을 의미하게 되었고, 반대로 형편없는 인간도 목사가 될 수 있음을 의미하게 되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한번 목사 안수를 받으면 그가 정치를 하든, 방송국 사장을 하든 계속 목사로 불리는 것이다. 그 이유는 오늘날 목사는 박사나 석사처럼 학위로 인식되어 왔기 때문이다.
종교 개혁자 루터의 말을 다시 인용해본다면,
그러므로 크리스천들 가운데서 한 사제는 하나의 관리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그가 직무를 가지고 있는 동안에는 우위권을 가지나 파면되면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농부나 시민이 된다. 따라서 의심 할 여지없이 한 사제가 파면을 당하면 그는 더 이상 사제가 아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들이 '지울 수 없는 성질'을 조작해 놓고 파면된 사제도 단순한 평신도와는 좀 다르다고 지껄인다. 사제는 결코 평신도가 될 수 없다거나, 혹은 사제는 사제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라는 몽상까지 한다. 이런 모든 것은 단순히 공론이나 인간이 만든 규정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 목회의 일을 멈추면 그는 더 이상 목사가 아니다. 양을 돌보는 일을 버리고 공장의 기계를 만지면 우리는 그를 더 이상 목동이라고 부르지 않고 엔지니어라고 부르는 것과 같다. 반면에 우리가 자식이 생기면 자연스럽게 아버지가 되듯이 돌보는 교회가 생기면 그는 목사가 되는 것이다. 목사는 하나님의 은사지만 그것에 걸맞는 사역이 이루어 질 때 그는 진정한 의미의 목사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둘 중에 하나만 미비해도 그는 문제가 될 것이다. 즉 목사의 은사 없이 목회를 하는 사람이나 목사의 은사는 있지만 목회를 하지 않는 사람이나 둘 다 진정한 의미에서 '목사'라고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신학대학이 진정한 기능을 발휘하려면, 먼저 세상 제도권 대학이기를 포기하고 학위도 주지 말고 참으로 제자양육 기능을 가진 순수 교육기관이 되어야 한다. 졸업해도 목사 자격은 주지 말아야 한다. 생각해보라! 그가 졸업한 것에 대해서는 확실한 증명을 서줄 수 있지만 그가 목사의 은사가 있고 자격이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증을 서줄 수 있단 말인가?
신학교는 더 이상 자격을 얻기 위해서나 직업을 갖기 위해서 들어가는 곳이 되어서는 안 된다.
목회 하다보면 자신이 지식이 없고 영적으로 빈약함을 느끼게 된다. 그런 사람들이 언제라도 들어가서 교육받을 수 있는 그런 곳이 되어야 한다.
만일 신학대학에서 목사 자격을 주지 않으면 어떤 일이 생길까? 아마 어떤 사람은 대 혼란이 생길 것을 상상한다. 아무 사람이나 목사가 될 것이고 교회는 어중이떠중이가 목사 입네 하고 설쳐 댈 것이라고 상상한다. 그러나 그 상상은 틀린다. 결코 그럴 수 없다. 오히려 신학대학이라는 제도가 없으면 사람들은 자격을 보지 않고 열매만을 보게 될 것이다. 그에게서 은사가 발견되지 않으면 그의 사역은 자연스럽게 소멸되고 그는 다른 일을 찾게 될 것이다. 그리고 '목사'가 되는 것이 돈이 생기는 것이 아니고 희생이 따르는 것임을 알게 될 때 거짓 목사는 더 이상 설 곳이 없어지는 것이다.
나는 직장에서 신우회 활동을 20년 가까이 하고 있다. 그런데 가끔 신학대학을 나온 사람들을 만난다. 그들이 신학대학을 나왔다는 사실 하나 때문에 신우회에서는 그를 성경공부 리더로 세운다. 그러나 그 결과는 참담할 적이 있다. 아마도 직장에서 그러한 경험을 한 사람은 여럿 있으리라 본다. 신학대학을 나왔다는 것이 그가 목사나 교사의 은사가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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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감독은 평신도에 의해 뽑여야 한다]
하나의 조직이 목적을 가지고 움직이려면 반드시 권위들이 있어야 한다. 권위자가 없는 집단은 취미활동 집단은 될 수 있을지언정 어떤 목적을 이루고 과업을 성취해내는 일은 할 수 없다. 교회는 취미활동 집단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에 권위들을 두셨다. 그 권위란 바로 장로들이다.
사도, 선지자, 목사, 교사, 전도자 등은 직분적인 의미가 강한 은사임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은 장로와 집사라는 직분과는 별개다. 그 차이를 구태여 들라면, 전자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이지만 후자는 사람들에 의해서 뽑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사도, 선지자, 전도자, 목사, 교사 등도 사람들이 뽑는 직분으로 알고 있지만 앞에서도 설명했듯이 그런 것들은 결코 사람에 의해서 임명될 수 없는 하나님의 은사다. 성경에서는 그런 은사를 사람이 임명해서 얻게 된 예가 없다. 오직 성경에는 예외처럼 보이는 사건이 한 번 나오는 데 그것은 사도행전 1장에서 오순절 성령이 임하시기 전에 제자들이 가룟유다 대신으로 맛디아를 사도로 뽑은 사건이다. 그것이 올바른 결정이었는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튼 그것마저도 결국은 투표가 아닌 제비뽑기로 하여 인간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선택될 수 있도록 여지를 남겨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사람들이 뽑을 수 있는 것은 단지 감독과 집사뿐이며 감독과 장로는 같은 의미로 쓰여졌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은사로서의 사도, 선지자, 목사, 교사 등은 역할 상 교회의 지도적 위치에 서게 되므로 자연스럽게 장로로 추대되는 경우가 많았고 그 과정에서 우리는 직분과 은사를 혼동하게 되었던 것이 아닌가하고 생각된다.
실제로 성경은 감독을 뽑을 때 여러 기준을 제시하는 데 그 중에 하나는 다음과 같다.
딤전 3:2
가르치기를 잘하며
이 말씀에 의하면 감독이 되면 가르치기를 잘하게 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가르치기를 잘하는 사람을 감독으로 뽑을 것을 말씀한다. 즉 사람들이 그 은사를 가진 사람을 발굴하여 세우는 것이다.
직분과 은사는 한사람이 함께 소유할 수 있지만 별개다. 예를 들어 예수님의 제자 요한은 사도이면서 그는 교회 직분이 장로였다. 요한이서에 보면
요이 1:1
장로는 택하심을 입은 부녀와...
라는 말로 서두를 시작한다.
사도 베드로도 자신이 장로임을 밝혔다.
벧전 5:1
너희 중 장로들에게 권하노니 나는 함께 장로된 자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나타날 영광에 참예할 자로라
그리고 장로는 감독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다음의 성경구절을 비교해 보면 그 사실을 알 수 있다.
행 14:23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금식 기도하며 저희를 그 믿은바 주께 부탁하고
빌 1:1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과 디모데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와 또는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편지하노니
바울은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였다고 하는데 그의 편지에는 장로는 언급하지 않고 감독을 언급했다. 만일 감독과 장로가 별개의 직분이었다면 장로를 누락시킬 일이 없을 것이다. 이로 미루어 보건대 감독은 바로 장로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칼빈은 감독을 장로 중의 특별히 대표되는 사람으로 간주하였다.
각 도시에서는 장로들이 자기들 가운데서 한 사람을 뽑아 '감독'이라고 불렀는데, 이것은 지위가 같은 사람들 사이에서 흔히 생기는 불화를 막으려는 뜻이었다. 그러나 감독에게 훨씬 더 많은 영예와 위엄이 있어서 동료들을 지배한다는 것은 아니었다. 감독은 원로원에서 집정관이 한 것과 같은 일을 했다. 즉 사무에 대한 보고를 하고 의견을 물으며 의견을 말하고 충고하며 권고함을써 모임의 의장이 되며, 모든 행사를 그의 권위로 주관하고 회의 결정 사항을 심사하는 등, 집정관이 한 일들을 감독이 장로회에서 수행하였다.
감독과 장로는 같은 의미인지 아니면 감독은 장로 중의 의장 격인지에 대해 신학자들 간에 약간의 의견차이가 있으나 여기서는 그것이 논쟁될 만한 중요한 주제는 아니다.
내가 지금 다루고자 하는 주제는 어떤 사람이 감독이 될 수 있는가이다.
오늘날 교회의 장로는 대체로 평신도들의 선거에 의해 뽑지만 장로들의 의장 격인 감독(목사)은 그의 영적 성숙도와는 무관하게 단순히 신학교를 졸업 유무와 목사 고시 합격 여부 정도를 기준으로 임명한다. (앞으로 약간의 용어의 혼동이 불가피함을 용납하라. 목사가 은사라고 해놓고 다시 직분으로 간주하고 설명해야 모순적인 태도는 현재 교회들이 목사를 감독과 동일하게 간주하기 때문에 그렇다. )
그런데 신학교 졸업한 사람을 무조건 안수하여 교회의 최고 지도자인 감독으로 세우는 것이 성경적인가?
한번 성경이 제시하는 감독의 기준을 살펴보자.
딤전 3 :1-7
미쁘다 이 말이여, 사람이 감독의 직분을 얻으려하면 선한 일을 사모한다 함이로다. 그러므로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 절제하며 근신하며 아담하며 나그네를 대접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오직 관용하며 다투지 아니하며 돈을 사랑치 아니하며 자기 집을 잘 다스려 자녀들로 모든 단정함으로 복종케 하는 자라야 할찌며 (사람이 자기 집을 다스릴줄 알지 못하면 어찌 하나님의 교회를 돌아 보리요) 새로 입교한 자도 말찌니 교만하여져서 마귀를 정죄하는 그 정죄에 빠질까 함이요 또한 외인에게서도 선한 증거를 얻은 자라야 할찌니 비방과 마귀의 올무에 빠질까 염려하라
위의 말씀에 의하면 감독의 직분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은 참으로 인격적으로나 영적으로나 골고루 잘 갖추어진 사람이어야 하며 심지어 외인(교회 밖의 사람)들에게 조차 선한 증거를 얻은 자라야 한다.
그런데 오늘날 감독에 해당하는 목사 안수를 줄 때의 기준을 위의 성경과 비슷하게 쓴다면,
그러므로 감독은 학점을 확실하게 채워서 신학교를 졸업한 자라야 하며, 목사 고시에 합격하여 노회에서 인정한 자라야 ...
어떻게 생각하는가? 과연 그것이 성경적인가? 오늘날 목사가 되기 위한 조건은 성경에서 하나도 제시하지 않은 조건이다. 그것은 철저히 편의주의를 따라 만들어 놓은 사람의 계명인데도 오늘날 사람이 정해놓은 조건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사이비니 이단이니 하고 비난한다면 그는 정직한 사람도 정의로운 사람도 아닌 단순히 무식한 사람일 뿐이다.
주님의 말씀을 들어보자.
마 15장 8절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하시고
그렇다. 오늘날의 감독(목사) 임명제도는 편의주의와 능률주의에서 나온 사람의 계명일 뿐이다. 그런데도 그러한 전통을 따르지 않는다고 해서 함부로 비난한다면, 그들이야말로 주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을 헛되이 경배하는 사람들이다.
이러한 주장은 나만 하는 것이 아니다.
루터는 사람의 안수로 목사가 될 수 있다는 개념을 일찍부터 반대했다. 다음의 루터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교황이나 주교가 주는 성별은 결코 사제가 되게 하지 못할 것이며, 만일 교황이나 주교가 주는 것보다 더 높은 성별이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는다면, 아무도 미사를 드리거나 설교를 하거나 사죄선언을 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주교가 성별할 때에 그것은 모두가 동등한 권능을 가진 모든 회중을 대신하여 그들 가운데서 하나를 택하여 그에게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이 권능을 행사하도록 맡겨 주는 것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이것은 마치 다같이 왕의 아들이고 동등한 상속자들인 열 형제가 그들 가운데서 하나를 택하여 자기들 전체를 대신하여 유산을 관리하게 하는 것과 같다. 그들 중의 하나가 다스리는 직무를 맡고 있기는 하나 그들은 다 왕들이며, 동등한 권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 중략 .....
옛날에는 이러한 방법으로 크리스챤들이 자기들 중에서 주교와 사제들을 먼저 택하였으며 그런 다음, 오늘날과 같은 허식 없이 주교들의 인준을 받았다. 성 어거스틴, 성 암브로시우스 및 성 키프리아누스가 이렇게 하여 주교들이 되었다.
여기에서 루터는 안수를 줌으로써 다른 평신도와 구분되는 특별한 성직자가 된다는 사고방식을 거절하고 오히려 어떤 그리스도인들의 무리가 자기들 중에 어떤 사람을 추대하여 사제로 삼는 것이 더 올바른 것임을 말해주고 있다.
그리고 우리의 신앙 선배인 종교 개혁자 칼빈은 감독을 임명하는 제도를 루터보다도 더 격렬하게 비난했다.
칼빈의 주장을 살펴보자.
지금은 주교를 선거하는 권리를 평신도로부터 완전히 빼앗았다. 투표, 찬성, 서명 승낙, 기타 유사한 일이 모두 없어지고 전권이 참사회 의원들에게 이전되었다. 참사회 의원들은 마음대로 주교직을 수여하고 직접 신도들에게 소개한다. 신도들에게 그를 검토하라는 것이 아니고 숭배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레오는 이것은 이성이 허락하지 않으며 극악한 사기라고 규탄한다. 키프리아누스는 평신도의 찬성에 의한 선거만이 하나님이 주신 권리에서 유래하는 것이라고 증거하면서, 이와 반대되는 관습은 하나님 말씀에 배치된다는 것을 밝힌다.
.....중략....
그들은 주교 선거에서, 평신도와 관리들은 바르고 건전한 판단력보다도 증오심과 당파심으로 움직이므로 이렇게 부패한 시대에는 문제의 해결을 소수에게 위임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분명히 이것은 개탄해야 할 상황에 있어서의 악에 대한 비상 치료책이었다. 그러나 병 자체보다 치료약이 더욱 치명적인 듯한 이 때에 왜 이 새로운 폐단을 고치지 않는가? 그들은 교회법에는 선거 절차가 정확하게 규정되어 있지 않다고 말한다. 그러나 옛날 사람들이 감독을 선거하기 위해 모였을 때, 그들은 하나님 말씀이 정해 놓은 법칙이 있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자기들이 가장 거룩한 법에 의해서 제한을 받는 것으로 믿었다는 것을 우리는 의심하는가?
...중략.....
술고래나 음행자나 지독하게 상습적인 노름꾼들이 주교로 추천되어도 대개는 침묵하거나 심지어 승인한다. 나는 과장하지 않는다. 주교직은 간음하는 자들과 뚜장이들에게 대한 보수가 된다. 총사냥꾼과 매사냥꾼들이 주교가 되는 때에는 아주 잘 된 것으로 생각해야 한다. 이런 추행을 조금이라도 용서한다는 것은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 잘 가르치며, 다투지 않으며 운운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옛날 신자들에게는 훌륭한 법이 있었다.
그러면 왜 선거하는 책임을 신자들에게서 빼앗아 이런 자들에게 옮겼는가?
당시 카톨릭의 사제 임명이 얼마나 잘못되어 있는가를 통렬하게 비판하는 칼빈의 목소리가 귀에 들리는 듯하다. 오히려 총사냥꾼이나 매사냥꾼이 주교가 되는 것이 그 중 잘된 것이라는 칼빈의 한탄이 오늘날에는 아무런 상관이 없을까?
오늘날과 같은 제도대로 신학교 졸업하면 자동적으로 성직자가 될 수 있는 상황이 되면 종교 개혁 당시의 간음하는자, 뚜장이들이 사제가 될 수 있었던 것과 똑같은 상황이 벌어지지 않을 수 없다.
종교개혁자들의 후예라고 자처하는 우리는 종교개혁자들의 충고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오늘날은 개혁상황이 아니라고 귀를 막는다면 그는 귀머거리로 살도록 내버려두자. 오직 "우리는 진리를 거스려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진리를 위할 뿐이니 (고후 13:8)"라는 사도 바울과 같은 심정을 갖는 사람은 비록 그것이 기득권을 축소시키고 권위의 약화와 약간의 물질적인 손해가 오더라도 기쁘게 감수할 것이다.
교회의 감독은 평신도에 의해 선거로 뽑아야 하며 그 기준은 성경에 나온 대로 적용해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검증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은 교회에서 함께 생활해본 사람들뿐이다.
사도행전에서는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해서 세운 것을 볼 수 있다.
행 14:23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금식 기도하며 저희를 그 믿은바 주께 부탁하고
사도들이 개척자로서 자연스럽게 장로가 된 반면 그들에 의해 세워진 교회에서는 사도들이 장로를 뽑아서 세워야 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도 사도들이 단독으로 사람을 지명하여 뽑은 것이 아니라 신자들의 의견을 물어서 뽑았을 것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여기서 '택하여'에 해당하는 헬라어 '키로토네오'라는 단어는 '손을 들어 투표하여 선택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칼빈의 말을 들어보자.
누가는 바울과 바나바가 각 교회에 장로를 임명했다고 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 방법에 대해서는 투표를 했다고 즉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라고 기록했다(행 14:23). 그러므로 이 두 사도는 장로들을 '택했다'고 하지만 당시의 헬라 사람들의 선거 풍속에 따라 교회 전체가 거수로 그 소원을 표명한 것이다. 로마의 역사가들도 어떤 집정관이 민회를 열고 새로 치안관들을 '택했다'고 기록한 것이 많은데, 이것은 투표를 받으며 선거를 주관했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나는 오늘날의 목사들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이미 목사가 된 사람더러 물러나라고 하는 것도 아니다. 참으로 그들 중에는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모든 것을 버리고 헌신한 사람도 있고 나는 그런 분들을 볼 때마다 참으로 존경하는 마음이 생긴다. 내가 주장하는 것은 오늘날의 목사가 되는 제도가 많은 사람이 생각하듯 그렇게 성경적은 아니라는 것이다.
오늘날과 같은 제도에서는 도저히 목사라고 할 수 없는 사람들조차도 목사랍시고 사람들 앞에서 영적 지도자임을 자처할 수 있으며 , 그리고 한번 목사 안수를 받은 사람은 자신이 목사의 은사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어도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길에 들어섰다고 생각하고 힘든 그 길을 그대로 걸을 수밖에 없다. 이것은 비극이다.
거듭 말하거니와 신학교는 목사가 되는 필수 과정이 아니다. 신학교가 없어도 교회는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으며 영적 지도자도 얼마든지 배출될 수 있다. 교회 역사 2000년동안 신학교가 존재한 기간은 200년도 안된다는 사실이 그것을 말해준다. 다만 신학교는 불필요하다기 보다는 영적 지도자를 훈련시킬 수 있는 유익한 과정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평신도들에 의해서 자연스럽게 영적 지도자가 선출되는 사례를 우리는 세계 도처에서 볼 수 있다.
미국, 남미, 호주 등지에서 그러한 교회들이 점점 많이 나타나고 있다.
우리는 중국에서도 그러한 예를 찾아 볼 수 있다.
중국에는 정부에서 인정하는 삼자교회와 소그룹으로 몰래 모이는 처소(가정)교회가 있다. 그런데 처소교회의 지도자들이 거의 대부분 신학교를 나오지 않은 평신도들이다. 지도자를 어떻게 뽑는가? 그것은 자연스럽게 형성된다. 영적 통찰력과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자연스럽게 무리 중에서 지도자로 뽑히는 것이다. 그것은 명예도, 돈을 버는 직업도 아니기에 경쟁이 치열하지 않다! 그것은 오직 희생이며 헌신일 뿐이다.
한국에서 중국에 신학교를 세우려는 노력을 종종 하지만 그것은 오히려 성령의 사역을 역행시킬 수 있다. 차라리 신학교이라는 학사과정이 아니라 성경을 더 깊이 공부할 수 있게 하는 성경학교를 세우라. 그리고 철저하게 교육기관으로 남아야 한다. 자격은 절대로 수여하면 안된다. 다만 진리를 더욱 연구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위해 존재하는 기관이 되어야 한다.
나는 신학교의 무용론을 부르짖는 것이 아니다. 신학교는 순수한 연구기관으로 필요할 수도 있다. 성경번역이나 각종 전문지식은 그 분야를 평생을 연구한 사람들의 몫이다. 그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오늘날 평신도들은 성경을 읽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또한 기존의 교회 제도가 다 쓸모 없고 잘못되었다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기존의 교회 모델도 축복하셔서 지금까지 한국교회를 이렇게 부흥케 하셨다. 다만 그러한 제도가 성경적인 유일한 것이며 그 외는 다 잘못되었다는 기성교회의 사고방식이 옳지 않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연구해서 살펴보아야 할 것은 교회에는 장로가 하나가 아니라 여러 명이라는 사실이다. 성경에 의하면 '장로들...'이라는 표현이 많이 나온다.
행 20 17
바울이 밀레도에서 사람을 에베소로 보내어 교회 장로들을 청하니
교회의 장로가 한 명이 아니라 여러 명이라는 사실은 몇 가지 점에서 중요하다.
교회가 오류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혼자보다는 여러 명이 안전하다. 서로가 서로를 격려하고 하나님 말씀에서 이탈되지 않도록 경계하는데 여러 명의 장로가 필수적이라고 생각된다. 사람이 비록 거듭나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그리스도인임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시행착오와 오류에 빠질 가능성이 있으며 탐심에 눈이 어두워서 하나님 나라 사업을 망칠 위험도 있다. 그런데 여러 명이 있을 때는 그런 위험이 많이 방지된다. 우리 주위의 교회들을 보아도 한사람에 의해서 독단적으로 운영되는 교회들은 상당수가 성경에서 벗어나 있음을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개인의 탐심에 교회 재정이 남용되거나 교회 직원들 인사에 대해 거의 독재적인 횡포를 부리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러면 교회는 영적 건강을 잃는다.
그리고 장로는 여러 명이었고 그 중에 의장 격이 되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계시록 2,3장에 보면 주님께서 일곱 교회 사자에게 보내는 메시지가 있다. 그때 일곱 교회 사자들이 단수로 되어 있다는 것은 각 교회를 책임지는 지도자가 있음을 시사해준다.
오늘날 교회들은 대부분 장로들이 여러 명이다. 그러나 장로가 여러 명이라도 그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교회가 많다는 사실은 개탄할 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장로들이 단지 목사를 받들기 위해서 존재한다고 믿는 한, 장로는 더 이상 장로의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명확히 알아야 할 것은 목사도 장로 중의 하나라는 사실이다. 평신도와 성직자의 구분이 있다고 믿는 사람은 목사와 장로는 엄연히 구분된다고 믿고 있다. 그들 생각에는 장로는 평신도이며 목사는 그들을 다스리는 성직자라고 생각한다. 심지어 성경을 잘 알고 있어야 하는 목회자 중에서도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목회자들은 장로를 뽑을 때도 교회의 영적 지도자라기 보다는 단지 재정적인 부족이나 채워줄 수 있는 부자나 목사를 잘 떠받들어 줄 수 있는 사람을 뽑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그렇게 뽑은 장로들이 결국은 교회에 가장 큰 암적 존재로 남아서 사사건건 하나님의 사업을 방해하고 참다운 부흥을 막고 있는 장애물이 되기도 한다.
나는 어떤 교회든 지도자가 있어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찬성한다. 그것이 정상이다. 그러나 그 지도자는 장로 중의 하나이며 그는 장로를 지배하는 사람이기보다는 장로들의 의견을 조정하며 회의를 진행시키는 사람에 불과하다. 다수의 장로들은 서로 대립의 관계로서가 아니라 서로 격려하며 권고하며 올바른 길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경계하기 위한 것이다.
오늘날 일부 교회에서는 지나치게 목사의 권위를 강조하여 스스로 평신도와 하나님 사이의 대제사장으로 자처하며 중세기의 카톨릭 사제에 버금가는 신분을 누리려고 한다. 그 결과 교회가 종종 개인의 탐욕에 의해 좌우되는 처지로 전락하기도 한다.
전에 어떤 형제가 나에게 와서 자기 교회 목사는 예언의 말씀을 빙자하여 전 교인을 자기 수하에 묶어두고 있고 심지어 헌금 강요까지 하고 있는데 누구도 무서워서 거역하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순진하고 약한 형제들이 그러한 두려움에서 해방될 수 있으려면 올바른 지식이 필요하며 장로들은 적어도 그 정도의 지식은 가져서 그러한 독선을 견제할 수 있는 사람들이어야 한다.
또 어떤 교회 목사는 교회가 부흥되려면 목사의 권위가 강력하게 세워져야 한다고 설교하고 있다. 물론 목회자의 권위는 존중되어야 한다. 그럴 때 각 개인에게 유익이 있고 교회도 유익이 있다. 그러나 절대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절대적인 권위가 되려면 오류가 없어야 하는데 그가 과연 오류가 없는 존재인가? 천주교는 세계에서 오직 한 명인 교황에게 그런 권위를 부여하는데 이것은 전 종교개혁자들이 한 입으로 반대한 교리다.
나는 자신의 권위를 절대화하려는 목자가 있다면 그의 곁을 속히 떠나라고 독자들에게 권하고 싶다. 그는 십중팔구 거짓 선지자다. 그 밑에 있으면 결국 망한다. 예레미야 시대에 예레미야의 말을 듣지 않고 거짓 선지자의 말을 들은 사람들은 결국 다 망했다. 어떤 사람은 아무 것도 모르는 백성들이 그가 거짓선지자인줄 모르고 믿었을 뿐인데 거짓 선지자와 함께 망하게 한 것은 너무 하지 않느냐고 항변할 지 모르나 성경에 의하면 거짓 선지자만 망한 것이 아니라 그의 말을 믿고 따른 사람도 똑같이 망했음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영적 권위는 하나님께서 세워주신다. 스스로 절대권력화 하려는 자는 주님의 이 말씀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마 23장 11절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우리는 좀 더 겸손해야 한다. 그리고 보다 더 양심적이 될 필요가 있다. 목사인 그가 양심적인 사람이라면, 목사인 자신도 탐욕과 음란함과 명예욕에 항상 유혹을 받을 수 있는 연약한 자임을 인정하고 겸손해져야 할 것이다. 목사는 결코 슈퍼맨이 아니다. 초인간적인 존재가 아니다. 그도 스스로 그것을 알고 있다. 그런데 사람들 앞에서 초인간적인 존재로 여김을 받고 싶어하는 것 자체가 얼마나 위험스러운 일인가?
내가 알고 있는 형제 중에서 침례교회 목사로 꽤 유능하다고 인정받는 사람이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형제가 수년간 뉴질랜드에 갔다오고 난 뒤 침례교회가 아닌 평신도 교회에서 목회하고 있었다. 나는 의아해서 왜 교회를 옮겼는지에 대해 물었다. 그랬더니 그는 놀라운 대답을 했다. 기성교회에서 목회하면 사람들이 자신을 특별한 사람이기를 바라는 경향이 있는데 그것이 싫었다는 것이다. 자기도 똑같은 그리스도인이고 오류를 범할 수 있는 연약한 사람인데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이 자기의 영적 성장에 치명적일 수 있고, 자기 양심도 허락하질 않았기 때문에 결국 그는 교회를 옮길 생각을 가졌다는 것이다. 그는 뉴질랜드에 있는 평신도 교회들을 직접 경험하고 나서 더욱 확실하게 결단을 내릴 수가 있었던 것 같다.
사람이 주어진 특권을 포기하기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그 형제가 그러한 결단을 내린 것이 대단히 존경스러울 뿐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교회가 건전하게 발전하기 위해서는 여러 명의 장로들이 필요하며 이 장로들이 교회를 성경의 올바른 교훈에서 이탈되지 않도록 서로 격려하며 경계해야 하며, 목사는 장로 중에 한 명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장로는 철저히 성경의 기준을 적용하여 뽑되, 한 개인에 의해서 임명되는 것이 아니라 교인 전체의 투표로 선택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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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신도 교회
오늘날의 교회형태는 초대교회의 형태와는 많이 다르다. 초대교회에는 신학교도 없었고 예배당도 없었고 수만 명씩 되는 교회도 없었다. 그리고 파도 없었고 노회도 없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그런 것이 다 있다. 이것은 발전한 것인가 아니면 퇴보한 것인가?
수없이 많은 교회들 속에서 무언가 구별이 필요하기에 교파가 생기게 되고 보다 질 좋은 교육을 하기 위해 신학교이라는 과정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리고 한사람의 목사에 의해서 제자양육되는 것보다는 여러 전문가들로 이루어진 대학에서 교육받는 것이 훨씬 더 효과적이고 밀도 있는 양질의 교육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것은 누구나 쉽게 상상할 수 있다.
사람은 어떤 사회에서든 조직을 더 쉽고 강력하고 효과적으로 개편 발전시키려는 경향을 가진다. 교회 내에서도 그것은 마찬가지로 적용된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의 교회형태도 나름대로 발전되어 온 것이라는 것을 나는 인정한다. 그러나 형태와 조직은 아주 효과적으로 발달했지만 내용은 초대교회보다 특별히 나아진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역사적으로 볼 때 교회들이 언제나 초대교회로 돌아가려고 애썼다는 것이 그것을 말해준다.
초대교회에서 조그만 가정집에서 예배드렸다면 지금은 화려하고 큰 예배당에서 예배를 드릴 수 있다. 그것은 나름대로의 발전이다. 당시에 카타콤에서 횃불 켜놓고 아무런 악기의 도움도 없이 찬양했다면 지금은 전자올갠과 화려한 샹들리에 밑에서 정신이 현란할 정도의 강력한 사운드와 함께 찬양을 드릴 수 있다. 그것도 나름대로의 발전이다. 그러나 초대교회 가정집에서 있었던 그 충만한 예배와 비교해볼 때 오늘날의 예배가 특별히 하나님을 더 기쁘시게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가 여유가 있다면 안락한 예배시설, 감동적인 음악, 여러 위락 시설 등을 갖출 수 있고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축복 중에 하나로 감사할 수 있다. 그러나 영적인 비참함을 혼(魂)적이고 세상적인 감동으로 감추려는 위험이 존재함을 부인할 수 없다.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스스로 부자라고 생각한 나머지 영적으로 비참할 정도의 가난한 처지를 깨닫지 못할 수 있다. 아니 더 나아가서 자기와 같이 내부적으로 치장되지 않은 예배당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해서 무교회주의자라고 비난하는 무식을 범할 수도 있다.
거듭 말해서 역사적으로 교회는 항상 초대교회로 돌아가려고 애써왔다. 초대교회의 그 성령충만함과 기적과 말씀과 수많은 사람들의 회심... 그것은 전 세대에 걸친 교회들의 모본이었다. 그런데 오늘날 초대교회보다 발전했다고 하는 교회 형태 속에서 왜 그러한 초대교회의 모습을 보기가 어려울까? 왜 발전된 형태가 오히려 발전하기 전의 미숙한 초대교회만 못하느냐는 것이다. 서로 자기 교파의 교리가 옳다고 주장하면서 그렇게 옳은 교리를 확증시키시는 성령의 사도행전 적인 역사는 왜 일어나지 않는 것일까?
오늘날 우리가 초대교회처럼 되지 못하는 것은 초대교회보다 못한 시설이나 조직이나 교회 형태 때문이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외형적 형태는 많이 발전했다. 그리고 '보다 나은 발전을 위해서' 라고 하면서 엄청나게 많은 교파가 생겨났다. 장로교,감리교,성결교,침례교,순복음,형제교회 등이 있고 장로교 안에도 예수교 장로회와 기독교 장로회로 나누며 예수교 장로회는 또 다시 합동, 통합, 고신 등 수 십 개 파로 나뉘어져 있다. 그리고 각 파마다 조직과 교리가 조금씩 다르다. 세례도 장로교는 물을 적시는 정도지만 침례교는 물에 담근다. 유아세례를 인정하는 교파가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교파가 있다. 어떤 교파는 교육부 인가의 신학교를 가지고 있는가 하면 어떤 교파는 무인가 군소 신학교를 운영하고 있고 형제교회와 같은 교파는 신학교 자체가 없다. 어떤 교파는 보수적인가 하면 어떤 교파는 진보적이다. 교파간 약간씩 다른 교리를 가지고 있고 그리고 자신의 교리만이 가장 성경적이라고 믿고 있다. 다양한 형태와 다양한 교리... 그리고 어떤 파에서는 다른 파의 교리를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것이라고까지 주장한다. 그러면서도 복음과 같은 근본 교리는 공통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비하셔서 각 교파를 초월해서 같은 은혜를 베푸시고 계신다. 하나님께서는 교파를 보지 않으시고 '예수님을 믿는 믿음'만을 보아주시는 것이다. 주님을 찬양하라!
이제 내가 궁금하게 여기는 것은 만일 이 세대에 새로운 형태의 교회를 개척하면 기성교회가 어떤 반응을 보일까하는 것이다. 아니 결코 새로운 것은 아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 세대에 초대교회와 같은 형태의 교회를 재현해보면 어떨까하는 것이다. 신학교도 없고 예배당도 없이 삼 사십 명이 모여서 예배드리는 그런 교회 말이다. 오늘날 초대교회의 형태를 다시 재현했을 때 과연 현대의 교회가 그 형태를 받아드리겠느냐는 것이다. 신학교가 없는 교회, 학위가 없는 사람이 목회를 하는 교회, 예배당이 없는 교회, 모두가 평신도인 교회, 교파에 신경 쓰지 않는 교회...그와 같은 것들이다. 만일 그런 교회가 주위에 생겼을 때 사람들은 그런 교회를 무엇이라고 부를까?
내가 몇몇 형제와 이러한 교회 개념으로 교회를 개척하면서 우리는 우리가 어떤 교회로 불리워질까에 대해 별 관심이 없었다.
어느 날 고속터미널 앞에 기독교 물품 판매장에서 조그마한 강대상을 하나 살 기회가 있었다. 그 때 그 가게의 주인 아줌마가 어느 교회냐고 물었다. '강동 교회'라고 대답하자 교파가 무어냐고 물었다. 교파가 없다고 하자 목사님이 누구냐고 물었다. 우리는 목사님이 없다고 했다. 그 사람은 꽤 이상한 눈초리로 우리를 쳐다보았다. 그 사람이 우리를 이단의 한 부류정도로 생각하는 것 같아 괴로웠다. 나는 그냥 평신도들이 모여서 예배를 드린다고 했다.
우리가 교회를 시작하자 이런 상황이 자주 닥쳤다. 여러 사람들에게 우리는 우리 교회에 대해 설명해야만 했다. 그런 가운데 누군가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이런 말이 나왔다. '우리 교회는 평신도 교회예요.'
평신도라는 말이 성경적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너무 상용화되어 있는 말이기에 일반인을 독자로 하는 나의 입장으로서는 이러한 말을 사용치 않을 수가 없다. 개인적으로 나는 평신도 교회보다는 성직자 교회라고 하는 것이 더 성경적일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성직이라는 말이 하나님께서 맡기신 직업이라고 정의한다면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성직자라는 것이다. 어디에서 누군가 이렇게 말했다. '교회 내에는 귀족과 노예의 차별이 없습니다!'라고 하자 누군가 이렇게 대답했다. '교회 내에서는 귀족만 존재하지요!' 그렇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존귀한 하나님의 자녀들이며 주님의 종들이다.
내 주위에서 이러한 형태를 가지고 교회로 모이는 형제들은 '평신도 교회'라는 이름보다 신약 성경을 그대로 따른다는 의미로 '신약교회'라고 말하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그것이 기성교회는 신약적이 아니라는 의미가 담겨진 듯한 배타적인 용어로 보이기 때문에 나는 그런 이름을 쓰고 싶은 마음을 접어둔다.
평신도 교회 지도자들은 '평신도'라는 말의 듣기 싫어한다. 그것은 성경적인 용어도 아닐뿐더러 종종 성직자와 대비되어 무식하고 연약한 존재임을 의미하는 단어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평신도 교회라는 명칭은 기성교회에서 다소 무시하는 의미로 사용될 수도 있는 용어다. 그러나 나는 오늘날 나는 몇 가지 이유에서 평신도교회라는 단어를 기꺼이 쓰겠다.
첫째는 그러한 명칭이 기성교인들에게 이러한 교회 형태를 쉽게 이해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는 그러한 명칭이 우리로 겸손하게 하며 모든 권위주의를 사라지게 하고 기성교회를 배타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평신도 교회가 일반화되고 성도들이 교회 개념이 정확해진다면 '평신도'라는 말은 자연스럽게 사라지며 그 결과 '평신도 교회'라는 용어도 사라질 것이다. 결국 '평신도 교회'라는 용어는 임시적인 것이 될 것이다.
혹시 독자 중에는 내가 기성교회에 대해 매우 배타적인 자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나 자신도 기성교회에서 자라왔고 나의 가까운 친척 중에 목사가 있으며 내 동생은 선교사며 어머니는 교회 권사고 형제들은 집사들이다. 그리고 내가 존경하는 목사님들도 여러 분 계시다. 어찌 내가 기존의 교회 모델을 부정하겠는가? 그것은 내가 자라온 터를 무너뜨리는 어리석은 일이다.
다만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기성교회의 모델(여기서 말하는 기성교회 모델이란 신학교를 나와서 목사가 되고 그들이 평신도와 구별된다고 주장하는 그러한 교회 모델을 말한다.)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이다. 오늘날 기성 교회 모델이 전부라고 주장하며 그 외의 것은 다 이단시하는 것은 단지 무식의 산물일 뿐이지 그 외의 어떤 것도 아니다. 그리고 일부 목회자들은 평신도들이 그들의 역할을 해 낼 수 있다는 말에 마치 권리를 침해받은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불쾌해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부디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하여 여유와 아량을 베풀었으면 한다. 우리가 우리의 이익을 위해서 이러한 사역을 하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만일 순수하게 하나님을 위해서라면 보다 넓은 안목으로 이것을 대해주기 바란다. 내가 이 책을 정식으로 출판하기 전에 400부를 복사하여 사람들에게 배포했다. 그 중에는 여러 명의 목회자들이 있었는데 대부분이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이러한 모델을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은 기존의 교회의 모델이 하나님 나라의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잊지 말자는 것이다. 다른 모델도 얼마든지 성경적으로 가능하다는 것을 스스로도 알고 있지 않은가?
미국 역사상 아주 빠르게 성장한 침례교회인 새들백 교회는 처음에 한 가정에서 시작해서 15년만에 출석교인 일만 명을 헤아리는 대 교회가 되었다. 그 성장과정에서 그들은 26개의 교회를 세웠고 15년 동안 전용예배당도 없이 지냈다. 그 새들백 교회의 담임목사인 릭 워렌은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은 서로 다르기 때문에 어느 교회도 혼자서 모든 사람을 전도할 수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많은 종류의 교회가 필요하다.'
나는 그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우리는 교회의 다양한 모델이 필요하다. 자기 것만이 성경적이라고 고집하지 말자. 장로교, 감리교, 순복음, 침례교 등 모두 약간씩 교회 형태와 예배 분위기가 다르다. 조용히 예배드리는 교회가 있는가하면 춤추며 손뼉치는 교회도 있다. 만일 두 경우에 모두 성령의 임재가 있다면 그것은 다 용납되어야 한다. 조용히 예배드리는 중에도 성령의 강력한 임재를 체험할 수 있고, 춤추며 찬양하는 가운데서도 성령님의 임재를 체험할 수 있다. 그렇다면 서로가 남을 비방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러나 어느 교회도 두 가지를 한꺼번에 소화시킬 방법은 없을 것이다. 병자를 주로 고치는 교회에 다니는 사람은 비록 매주 기적을 체험하지만 말씀에 대한 체계적인 공급을 못 받아 사상적으로 기형인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 그런 사람은 결국 말씀을 체계적으로 가르치는 교회로 옮기게 되어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본능이다. 냉랭한 분위기의 교회를 다닌 사람들은 뜨거운 교회를 다니고 싶어할 수도 있고 처음 교회에 나온 사람들은 펄쩍 펄쩍 뛰며 찬양하는 교회보다는 엄숙한 교회를 더 원할 수도 있다. 오늘날 철새처럼 교회를 옮겨 다니는 사람들을 우리는 비난하기 쉬운데 그들이 우리 교회를 떠났어도 하나님 나라를 떠난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용납할 수 있어야 한다. 왜냐 하면 그들은 '영적 성숙'이라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인생 목표를 보다 효과적으로 이루기 위해서 이 교회에서 채워주지 못한 것을 저 교회에서 얻으려고 하는 것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목회자의 입장에서 보면 매우 가슴 아픈 일이지만 그들은 내 소유가 아니라 주님의 소유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어느 정도 성숙한다면 교회가 단지 무엇을 배우는 곳만이 아니라 형제들과 교제하며 서로가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는 곳임을 깨닫게 되면서 더 이상 교회를 철새처럼 옮겨다니지 않고 교회의 봉사의 직분을 맡아 일하기 시작하며 뿌리를 내리게 될 것이다.
교회의 다양한 종류는 하나님 나라 전체로 보았을 때 더 많은 사람을 하나님 나라로 끌어들이는데 효과적일 수 있다.
평신도 교회는 바로 그런 다양성의 의미에서 하나님 나라 확장에 매우 필요한 교회라고 확신한다.
평신도 교회의 형태에 대해 계속 반대하는 사람이 있다면, 중국의 처소 교회를 예로 들어 설명하고 싶다. 나는 중국의 처소(가정)교회가 평신도교회와 같은 형태를 띠고 있다고 생각한다.
앞서 말했듯이 중국에는 정부에서 인정하는 삼자교회와 지하조직으로 운영되는 처소(가정)교회가 있다고 한다. 삼자교회는 예배당도 갖추고 있고 정부에서 인정하는 목사도 있으며 여러 종교적 의식을 가지고 운영된다. 그러나 처소교회는 예배당도 없고 목사도 없이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예배를 드린다. 그런데 참석하고 온 사람들의 간증을 들어보면 삼자교회보다 처소(가정)교회에 성령께서 놀랍게 역사하신다고 한다.
회심의 눈물! 감격스러운 예배! 성령의 능력! 그것을 체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처소교회를 교회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목사도 없고 예배당도 없으니 당장 모임을 그만두라고 해야 옳을까?
호주의 로버트 뱅크스 교수는 한국 방문중에 이러한 말을 했다.
호주에는 가정교회들이 점차 확장되고 있는데 가정교회 상호 간에는 가정교회를 인도하는 장로들 간에 정기적 연합모임이 있으며, 교회 구성원 전체가 연간 2차례 함께 모여 수련회를 하고, 몇몇 가정교회가 연합하여 새로운 가정교회를 개척하기도 한다. 가정교회에 대한 기존 교계의 인식은 과거 가정교회에 대한 적대적 태도에서 70년대부터는 가정 교회 내에 무언가 특별한 것이 있음을 인식하고 관심을 갖게 되었고, 80년대에 와서는 각 교단의 지도자들이 찾아와서 가정 교회의 모습을 보고 가정교회를 인정하게 되었으며, 90년대에 와서는 아주 호의적인 태도로 변하여, 감리교와 침례교의 경우 교회 내에 가정 교회가 설 수 있도록 허용하고 있다고 한다.
물론 호주의 가정 교회가 바로 평신도 교회와 같은 형태를 가지고 있는 교회다.
우리 나라에서는 아직 익숙하지 않지만 앞으로는 호주처럼 점차 확산되며 기성교회에서도 이해의 폭을 넓힐 것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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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신도 교회의 특징
[평신도와 성직자의 구분이 근본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요즈음 평신도 교육이라는 것이 유행할 정도로 많은 교회에서 평신도 교육에 열을 올리고 있다. 그리고 파격적으로 평신도와 사역자의 구분을 없애려고 애를 쓰는 교회도 있다. 그러나 진골이 결코 성골이 될 수 없듯이 기성교회에서는 평신도는 결코 성직자는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출신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 출신이란 바로 신학교 졸업여부다. 그리고 그 차이를 스스로 없애려는 사역자는 없다. 누가 어렵게 얻은 기득권을 포기하려고 하겠는가?
또한 전임인가 아닌가가 성직자와 평신도를 구분하는 중요한 기준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그래서 많은 평신도들이 자신은 직업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아직 헌신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헌신하려면 모든 것을 내려놓고 전임사역자가 되어야 한다는 막연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
어떤 목사가 교회 성도가 병으로 죽어가는 것을 보고 그를 살리고자 하는 의도에서 그에게 하나님께 헌신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런데 그 성도는 상당히 헌신된 성도였다. 그렇지만 그 목사는 그 성도가 세상직업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아직 덜 헌신되었다고 생각되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그가 요구한 헌신은 모든 세상직업을 내려놓고 전임으로 사역을 하는 것이었다. 그 성도는 기꺼이 그러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그 성도는 결국 소천했다.
나는 결코 전임사역자가 되는 것이 헌신이고 다른 직업을 가진 겸임사역자는 아직 헌신이 안되었다는 도식을 용납할 수가 없다. 생각해보라! 강남의 어떤 목사의 봉급은 한 달에 천만 원이 넘는다고 한다. 그 정도라면 세상의 어떤 사람도 기꺼이 전임을 하겠다고 말할 것이다. 만일 신학교 졸업생들이 큰 교회 목사가 되려고 애를 쓰는 이유가 보다 윤택한 생활이나 명예 때문이라면 과연 그들을 헌신된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사람들이 회사에서 승진하려고 애를 쓰는 것이나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탐욕이 종교라는 가면을 쓰고 행세하는 것과 같다.
오늘날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의 대다수가 직업을 가진 사람이다. 그리고 '주부'도 아주 중요한 직업이다. 그럴진대 거의 전부가 직업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직업을 가진 사람은 헌신한 사람일 수 없다는 사고가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 그것은 세상 직업을 저급하고 세속적인 것으로 취급하는 이원론적인 사고방식에서 나온 것이다.
헌신이란 단지 전임이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다. 사도 바울은 헌신이 무엇인가를 잘 말해주고 있다.
고전 9:18
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 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하여 내게 있는 권을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라
하늘에 상이 있는 헌신이란 무언가 내 권리를 포기하는 것이다. 만일 목사가 전임사역을 하면서 봉급을 받지 않는다면 나는 '헌신'이라고 말하겠다. 그러나 받을 것을 다 받고 사역하면서 단지 전임사역을 하기 때문에 헌신이라고 말하는 것에는 도저히 동의할 수가 없다. 그것은 직업일 뿐이다. 헌신은 다른 의미에서 찾아야 한다. 목회직을 가진다는 사실이 곧 '헌신'은 아니라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직업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하나님께 효과적으로 헌신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런 것을 보질 못했다. 나는 직장 속에서 회사 직원과 다른 회사의 수많은 직원들을 상대로 전도하며 양육하는 사역을 수 년째하고 있는 형제들을 알고 있다.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을 보고 직장 속에서도 어떻게 헌신된 삶이 가능한 지를 보고 큰 도전을 받는다. 사람들은 무언가를 보아야 행동할 용기를 갖는다. 직업을 가지고도 하나님께 헌신하는 것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각오를 가지게 할 수도 있다.
노예제도가 법적으로 폐지되고 이론적으로는 흑인과 백인이 차이가 없어졌지만 그리고 아무리 백인이 흑인에게 똑같은 인간이라고 말하지만 흑인은 믿지 않는다. 그들은 언제 그것을 믿게되느냐면 자기와 같은 노예 흑인이 백인의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야 비로소 그들은 차별이 철폐되었다고 생각하게 된다. 평신도 교회는 바로 그러한 이론을 실제적으로 만들기 위한 교회다. 평신도 교회에서는 말 그대로 평신도가 사역을 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평신도 교회는 목회자와 평신도의 근본적인 신분의 구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기성교회처럼 신학교 졸업이라는 관문이 결코 요구되지 않는다. 신학교를 졸업하든 하지 않든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직업이 있든 없든 관계가 없다. 오직 교회 내에서 성숙한 그리스도인 중에서 목사나 교사의 은사가 있는 사람이 사람들의 확인 과정을 거쳐 자연스럽게 목사나 교사로 추대될 것이다.
오늘날에 이러한 개념을 다시 새롭게 상기시키고 이러한 구분을 적극적으로 철폐하기 위해 성직자라고 불리는 사람이 스스로 생계를 위해 다른 직업을 가지면서 목사역할을 하는 사람들도 생겨나고 있다. 미국의 폴 스티븐스와 같은 사람이 그러한 사람이었다. 그는 비록 신학교를 나오고 목사 안수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사상을 실천하기 위해서 스스로 목사라는 직업을 버리고 목수 직업을 택했다. 그러나 그는 목사라는 역할까지 버린 것은 아니었다! 직업으로서 목수를 선택했고 교회의 봉사직으로서 '목사'를 한 것이다. 그는 에베소서 4장을 연구하면서 평신도 계층을 폐지해야 함을 깨달았다. 모든 평신도가 사역자라는 것이다. 다만 은사가 다르기 때문에 다양한 봉사의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며 목사는 그러한 은사를 발견해서 각 개인이 충분히 은사를 발휘할 수 있도록 구비시켜주는 역할을 맡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 LIST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주 예수님의 종이 되어 자신의 은사를 따라 봉사한다]
오늘날 평신도와 사역자의 구분이 뚜렷한 기성교회 모델에서는 평신도의 사역은 한계가 그어져 있어서 그가 아무리 오랜 세월을 신앙생활을 해도 그 한계를 넘어가지 못한다. 목사님은 '주님의 종'이지만 평신도들은 '주님의 종'이라는 말을 감히 못한다. 자신을 주님의 종이라고 표현하지 못하는 것은 결국 신앙생활을 적당히 해도 된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내가 대학 때 열심히 성경공부하는 것을 보고 우리 가족들은 이렇게 질문하곤했다. '네가 목사냐? 왜 그렇게 성경을 연구하지? 도대체 성경을 연구해서 어디다 써먹겠다는 거냐?' 그들은 모두 교회를 열심히 다니는 사람이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평신도란 성경을 연구할 필요가 없는 사람들이었다.
평신도에 대한 잘못된 개념은 적당히 신앙생활하려는 경향성을 낳게한다. 평신도는 주일날에 교회에 출석하면서 십일조하고 적당히 봉사하면 모든 의무를 다한다고 생각한다. 그것 이상으로 하려면 신학교를 가서 목사가 되어야 한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비성경적인가! 모든 그리스도인은 열심히 성경을 연구해야 한다. 베드로는 이렇게 말했다.
벧후 3:18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저에게 있을찌어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야 한다. 성경을 읽지 않고야 어찌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갈 수 있단 말인가?
평신도에 대한 잘못된 개념들이 평신도로 하여금 영적으로 성장하려는 의욕을 꺽어 놓는다. 아무리 성경을 많이 알고 성령이 충만해도 그는 영원히 평신도일 뿐이며 언제나 사역에서 소외될 수밖에 없다면 결국 그는 오직 사역할 자격을 얻기 위해 신학교 문을 두드리게 될 것이다.
서울의 J대학의 이모교수는 대학생 선교 사역을 훌륭히 한 분이었다. 그러나 평신도로서 사역의 한계(여기서 한계란 활동영역의 제한을 의미한다.)에 봉착하자 할 수 없이 신학교에 들어갔다. 신학교를 졸업한 후에 그는 고백하기를 신학교에 들어가서 특별히 새롭게 배운 것은 없다고 한다. 단지 목사의 자격을 얻음으로써 보다 넓은 사역을 할 수 있기 위해 들어갔다고 했다. 그러나 내가 생각건대 그가 신학교에 들어감으로써 그의 사역은 오히려 후퇴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가 평신도였을 때에는 대우받지는 못했지만 그의 활동이 다른 사람에게 매우 도전을 주었다. 그러나 신학교를 졸업했다고 하는 순간 사람들은 그를 목사로 특별히 대우해주는 대신 더 이상 도전을 받지는 않는다.
평신도 교회에서는 평신도와 성직자의 구분이 없다. 그가 가진 은사가 무엇이냐에 따라 그의 활동영역이 결정될 것이다. 결코 졸업장이나 학력 따위는 고려되지 않는다. 누구든지 영적으로 성숙하고 은사들이 발견된다면 얼마든지 사역을 일으킬 수 있다. 이것은 다른 그리스도인들에게 큰 도전을 주며 자기와 같이 출발한 그리스도인이 자기보다 더 성숙한 것에 대해 큰 자극을 받을 수 있다.
어떤 사람은 평신도 교회와 직장 신우회 모임이나 제자 훈련시키는 선교회 모임 같은 것과 무슨 차이가 있는가라고 질문하기도 한다. 그것은 매우 적절한 질문이다. 국내 사역하는 선교회와 교회의 차이점은 분명하지가 않아 보인다. 선교회에서도 주일에 모여서 예배를 드리고 제자양육과 봉사가 이루어 지고 있는 데가 태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에서의 선교회와 교회의 차이점을 굳이 들라고 한다면 선교회는 은사가 편향되어 있는 반면 교회는 다양한 은사들의 집합이라고 말하겠다. 예를 들어, 선교회는 주로 바울과 같은 사람들을 이상형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바울과 같은 사역을 하지 못하는 사람은 서서히 도태된다. 가르치기 잘하고 조직을 잘 관리하고 모든 면에서 우수한 사람들이 끝까지 버틸 수 있다. 그러나 교회 내에는 다양한 종류의 사람이 공존할 수 있다. 바울은 그 중에 하나일 뿐이다. 가르치지는 못해도 섬기기를 잘하는 사람, 구제하는 사람, 행정력이 있는 사람, 상담능력이 있는 사람 등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은사를 발휘할 수 있어야 한다. 나는 사람이 거듭나면 하나님께서 그에게 봉사할 수 있도록 적절한 은사를 주신다고 확신한다. 다시 말해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은사를 따라 봉사하도록 하나님께 사명을 받은 사람들이라고 확신한다.
평신도 교회는 이러한 여러 은사를 가진 사람들이 서로 지체의식을 가지고 사랑하며 봉사하는 마음으로 하나가 된 교회가 될 것이다. 그리고 어차피 전임 사역자가 없느니 만큼 한사람에게 사역이 집중되어서도 안될 것이다. 철저하게 분담하며 공동사역을 하게 될 것이다.
경험적으로 보았을 때 사람들은 전임 사역자가 있을 경우 그 사람에게 모든 일들을 미루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각자가 같은 입장이라는 것을 알고나면 사람들은 비로소 안일한 삶이나 비난하는 행동들을 멈추고 자기 할 일을 찾아 나서기 시작한다. 이것은 직장에서 신우회 활동 해 본 사람들이라면 체험적으로 동의될 것이다.
그리고 각자가 사명을 가진 주님의 종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활동하는 것은 각 그리스도인들을 영적으로 건강하게 하고 성숙하게 할 것이다. 자신이 하나님 앞에 책임 있는 그리스도인임을 자각하게 하는 것만큼 이 사회에 빛과 소금으로의 삶을 살도록 하는 강력한 동기도 없다.
평신도 교회는 다양한 은사를 철저하게 개발해서 발휘하도록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은사들이 개발될 때 분명히 사회에서 빛을 발하게 되고 우리 주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될 것이다.
평신도 교회 영적 리더들에게 있어서 형제들의 다양한 은사를 발굴해서 발휘하도록 하는 일을 구상하고 실제화 시키는 것이 중요한 과제라고 믿는다. 예를 들어, 교회의 헌금들이 사회 봉사와 각종 구제 사업에 쓰여질 때 그런 방면에 탁월한 은사를 가진 사람을 발굴하여 그 사업을 효과적이고 공정하게 잘 처리하도록 하는 것이다.
얼마 전에 한 사람으로부터 어떤 고아원에 종사하는 한 원장 목사의 비리를 들은 적이 있다. 고아원생들은 너무도 비참하게 생활하고 있는데 원장이라는 사람은 고급 승용차를 타고 다니고 외국을 한 달이 멀다하고 돌아다닌다고 한다. 사실인즉 상당수의 구제금을 가로챈다는 것이다.
평신도 교회에서는 적어도 그것을 자신의 직업으로 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평신도 교회에서는 철저하게 모든 것이 봉사와 헌신의 개념으로 이루어 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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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개척을 보다 쉽고 적극적으로 할 수 있다]
초대 교회 사람들은 핍박을 피해서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그들은 예배당이 없어도 예배드리는 데 아무런 장애를 느끼지 못했다. 자기 집이나 공원이나 해변 같은 데서 모여서 예배드릴 수 있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교회는 두 세 사람만 모이면 개척이 된 것이다. 지금처럼 건물을 알아보고, 사람들이 많이 올만한 좋은 자리를 모색하기 위해 시간을 낭비할 필요도 없었다. 만일 우리가 초대교회 형제들과 같은 사상을 가지고 있었더라면 훨씬 효과적으로 복음을 많은 지역들의 많은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었을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어떤 그리스도인이 교회가 전혀 없는 동네에 이사를 갔다고 하자. 그가 기성교회 사고 방식에 젖은 사람이라면, 그는 동네에 교회가 없다는 이유로 더 이상 교회 다닐 수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스스로 교회를 개척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평신도 교회의 사상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는 즉시 자기 집을 예배당으로 삼고 가족들과 함께 예배드리기 시작할 것이다. 기회가 되면 이웃도 초청해서 같이 예배드릴 수 있을 것이다.
다른 예를 들어보자.
우리 나라에서 대부분의 백화점은 주일에 영업을 한다. 따라서 백화점 직원들은 주일에 예배를 드릴 수가 없다. 그렇다면 백화점 직원들은 교회에 다니기 위해서는 백화점을 그만두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들의 현실은 그렇게 쉽지 않다.
만일 우리가 백화점 직원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보다 더 적극적으로 백화점이 쉬는 월요일이나 화요일이나 모여서 예배드릴 수 있는 교회를 개척하면 어떨까? 어떤 사람은 일요일이 아닌 다른 날에 예배드린다는 것은 용납될 수 없는 것처럼 생각하나 그런 문제에 대해서는 생명말씀사에서 나온 F.D. 해리스의 '그리스도인과 안식일'이라는 조그만 책자가 좋은 참고가 될 것이다. 그 책은 지금 독자가 읽고 있는 이 책의 절반 정도의 내용밖에 되지 않아서 30분이면 다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작은 책자이지만 꼭 읽어볼 것을 권하고 싶다.
아무튼 백화점 직원들이 예배 드릴 수 있도록 백화점 교회를 세우는 것이다. 예배당은 없어도 괜찮다. 조그마한 공간만 있으면 된다. 목사님이 없어도 관계없다. 백화점 직원 중에 한 명이 예배를 인도하고 미숙하나마 가장 성숙하고 잘 가르치는 형제가 말씀을 전하는 것이다. 그것이 어려우면 기도하며, 성경을 읽기만 해도 된다. 다른 교회에서 말씀을 잘 가르치는 사역자의 도움을 얻을 수 있다면 더욱 좋겠지만 없어도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또한 그렇게 돕는 사역자들은 백화점 교회를 자기 것으로 삼으려는 탐심을 철저히 경계해야 할 것이다.
교회에 대해서는 우리는 소유권이 없다. 오직 주님의 것이며 우리는 그 분의 종일 뿐이다.
결론적으로 평신도 교회는 기성교회처럼 예배당이 있어야 하고 봉급 받는 목회자가 따로 있어야 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훨씬 자유롭게 개척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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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 양육이 실제적이고 그대로 사역에 적용된다]
오늘날 선교회 출신이 신학교 출신보다 제자양육을 더 잘 시키는 경우를 종종 목격한다. 신학교의 커리큘럼과 분위기를 어느 정도 아는 사람은 신학교의 교육과정이 지식을 전달하는데는 효과적이나 영적 성숙과 더불어 사람의 인격과 습관을 형성시키는 제자양육에는 별로 도움을 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부정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런데 선교회에서는 한사람 한사람에 대한 제자 양육이 매우 강조되어 있다. 요절암송, 체계적인 성경 공부, 큐티 점검, 각종 주제에 대한 연구, 실제 생활에서의 적용 등 매우 실제적이고 효과적인 훈련을 시킨다.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제자양육을 효과적으로 시키고 있다는 강남의 모교회 목사도 제자양육을 배우기 위해 네비게이토 선교회에 사람들을 보내어서 정보를 얻어냈다고 한다.
선교회에서 하는 제자 양육은 원래 교회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내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원래 교회가 가지고 있었던 제자양육과 훈련이 신학교이라는 전문기관이 생기면서 없어지게 되고 교회는 얄팍한 성경지식만을 가르치는 곳이 되었으며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선교회라는 기형적 단체를 허락하셔서 교회가 상실한 제자양육을 보여주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다시 교회로 자극을 받게 하고 그러한 프로그램을 교회에 도입하도록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런데 교회들이 제자양육 프로그램을 도입하고 시도하지만 여전히 한계를 느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교인이 한 교회를 30년 이상 다니면서 제자양육을 받았다고 하자. 그렇다면 아주 둔한 사람이 아니라면 이제 제자양육에서 무엇을 가르치는지 환하다. 그는 30년 동안 지식과 더불어 많은 생활 속에 갈등을 거치면서 영적으로 성숙하고 성경의 지식이 이제는 살아있는 간증이 되었다. 그런데 이제 막 신학교를 졸업한 사람이 전도사가 되어서 교회에 부임한다. 전도사는 즉시 30년간 양육 받은 사람의 영적 리더가 된다. 나는 그것이 부조리하다고 생각한다.
솔직히 30년간 제자 양육받은 사람이 3,4년간 신학공부한 사람에게 다시 무언가를 배워야 한다는 것은 매우 부조리한 일이 아닌가? 그러나 기성교회 형태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것이 기성교회의 한계다.
나는 작년에 한 학생을 전도해서 양육한 일이 있다. 그 학생은 대단히 똑똑한 학생이라 요절도 순식간에 수 십 구절을 암송하고 성경의 지식도 매우 빨리 이해했다. 그에 비하면 나에게 수개월 동안 양육 받고서도 성경구절 20구절을 채 다 못 외우는 다른 학생들이 너무 비교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똑똑한 학생은 초신자며 다른 학생은 성숙한 신자로 보아서 같은 그룹에 묶지를 않았다. 똑똑한 그 학생은 자신이 다른 학생보다 더 많이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계속 초신자 취급하는 것이 조금 못마땅해 했다. 그때 나는 이렇게 말했다. '신앙이란 지식이 아니다. 신앙이 성숙하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말씀들이 생활 속에 체험되어져야 하며 많은 갈등과 시험 속에서 단련되고 성숙되어지는 것이다. 너는 비록 남보다 빨리 성경을 깨닫고 많은 구절을 암송하고 있지만 아직 시간이 너무 짧다. 그러기 때문에 너는 여전히 초신자다.'
그렇다. 그가 아무리 신학교에서 많은 지식을 배우고 왔어도 그는 초신자에 불과할 수 있으며 반면 신학교를 안 나왔어도 수 십 년간 신앙생활하면서 여러 시련을 거처 단련된 사람이 더 성숙한 그리스도인일 수 있다.
평신도 교회는 어떤 사람이 제자 양육을 수 십 년간 받아서 영적으로 성숙하면 자연스럽게 교회의 장로가 되어 다른 사람을 제자양육 시킬 수 있는 위치에 서게 될 것이다. 3,4년간 전문교육을 받고 온 사람이 자격증 하나만으로 그 사람의 영적 리더가 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평신도 교회에서는 제자 양육을 하고 그 양육을 받은 사람이 영적 리더가 되는 자연스러운 과정을 거친다. 제자 양육 과정을 통해서 충성된 사람들이 가려지고 헌신된 사람들이 발굴될 것이다. 제자 양육을 거친 사람이 다시 다른 사람을 제자 양육시킨다는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남을 양육하면서 스스로도 성숙할 수 있는 기회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기성교회에서는 양육을 받을 수는 있을지언정 남을 양육할 수 있는 기회는 좀처럼 주어지지 않는다. 남을 양육하는 것은 항상 신학교 졸업생들의 몫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기성교회에서 제자양육이 실제적일 수가 없는 것이다. 사람이 교회에서 제자양육을 받으면 그것이 사용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성경적인 원리라고 믿는다. 신학교라는 장애물 때문에 평생 평신도로만 머무르는 일은 없을 것이다. 평신도 교회는 이런 면에서 볼 때 제자 양육이 매우 실제적이고 구체적으로 적용된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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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신도 교회의 기본 원칙들
평신도 교회는 어떤 원칙을 가질 것인가? '평신도'라는 단어가 붙은 또 하나의 교단을 의미하는가? 결코 그럴 수 없다. 다만 기존의 교회 모델과 다른 모델을 말하고자 하기에 편의상 평신도 교회라고 부르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본의 아니게 타인에 의해 교파로 분류될 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결코 교파화되지 않으려고 노력할 것이다.
나는 몇 가지 기본 원칙을 견지하고자 한다.
[교파화 되지 않는다]
성경을 통틀어 '우리 교회'니 '남의 교회'니 하는 집단 소유적 개념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늘날 우리가 '우리교회'라고 할 때, 단지 내가 속해 있는 교회라는 의미로 말한다면 별 문제가 되지 않지만, 우리 것이라는 의미로 말한다면 그것은 잘못이다. 교회는 다 주님의 것이다.
성경에는 고린도 교회, 에베소 교회 등 많은 교회들이 등장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교회의 간판은 아니었다. 그냥 고린도에 있는 교회이니까 고린도 교회라고 한 것이다.
오늘날 직장 내에서는 장로교, 감리교, 침례교 가리지 않고 그리스도인들이 자유롭게 연합하며 함께 교제한다.
직장에서 신우회를 하거나 고등학교에서 기독학생 동아리를 운영할 때 아무런 교파이름을 붙이지 않는다. 성도들은 복음으로 하나가 되고 사소한 교리 차이는 용납한다. 그리고 성령으로 하나가 된다.
반면에 일부 기독교인들 중에는 자기 파와 조금이라도 대립관계나 경쟁관계에 있는 파와는 아무런 교제를 할 수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전도하다가 이런 질문들을 자주 받는다. '교회는 왜 그렇게 파가 많은가?' 그 때마다 나는 '파'의 불가피성을 말하면서 서로 싸우지 않고 연합할 수만 있다면 '파'가 있느냐 없느냐는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나 실상은 서로 싸우고 있다는데 문제가 있다. 서로가 자기들만이 참된 구원의 도리를 알고 있으며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자기들에게만이 은혜를 베풀고 계시다는 아집과 교만에 사로잡혀 있다.
나는 기성교회의 틀을 부정하면서 평신도 교회와 같은 모임을 형성해온 교파들을 알고 있다. 이들은 모임형태는 초대교회를 본받으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지나치게 폐쇄적이고 다른 파들에게 구원이 있음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그것은 옳지 않다. 얼마 전에 구원파의 아류인 P파의 월간지를 본 적이 있다. 거기에는 그들의 교회에 나온 사람에게 기성교회에서 탈퇴할 것을 요구하면서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하지 말라'(고후 6:14)는 성경을 인용하는 것을 보았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기성교회 교인들을 '믿지 않는 자'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참으로 무서운 착각이며 가공할 교만이다. 그들은 기성교회를 떠나는 것을 마치 개종하는 것처럼 여긴다.
새로운 지식을 몇 가지 가지고 있다고 해서 오직 자기들만이 구원이 있다고 주장하는 파는 다 '사이비'라고 확신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첫째, 교만이기 때문이고
둘째, 하나님의 영적인 역사의 다양성을 모르는 눈먼 봉사와 귀머거리의 가르침이기 때문이며
셋째는 교회 내에 있는 영적인 풍성함을 자기 교파에만 국한시킴으로써 영적으로 빈약하게 됨을 피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교만의 열매들은 항상 '파'로 나타난다. 역사를 돌이켜보면 본의 아니게 다른 사람에 의해 구별되어서 '파'가 되는 경우도 있지만 자신들만이 특별한 존재라고 생각해서 스스로 '파'를 구성한 경우도 많이 있다. 그리고 그러한 아집은 결국 교파 안에 사람들을 꽁꽁 묶어버리고 성경을 읽고 깨달을 수 있는 양심의 자유를 누리지도 못하게 만들어 버린다.
어떻게 하면 교파화되지 않을 수 있을까? 진정으로 교파를 초월하려면 ,
첫째, 다른 교파를 비난해서는 안된다.
어떤 집단은 스스로 '초교파'라고 하면서 아이러니컬하게 초교파라는 이름의 새로운 파를 만든다. 다른 파를 비난하는 이상 더 이상 초교파가 될 수 없다. 다른 파에도 하나님께서 역사하심을 인정하라. 비록 부족하고 연약해도 그 가운데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많은 하나님의 백성이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그렇다고 영적 분별력 없이 이단마저 무조건 다 받아들이라고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자기 교파가 아니라고 무신경하게 평가절하 하거나 헐뜯거나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함부로 비난하거나 거부하는 행위는 도저히 그리스도인의 행위라고 볼 수가 없다. 오늘날 그러한 비난에 연약한 형제들이 상처받고 실족하는 경우가 왕왕 있다. 무신경하게 비난함으로써 형제를 실족케 하는 자는 주님의 심판대 앞에서 톡톡히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우리는 자기와 약간 다른 사상을 가지고 있다고 이단시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 나는 지금까지 신앙생활하면서 두 사람이 하나도 다르지 않고 똑같은 사상을 가진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심지어 내가 양육한 제자들마저 나와 똑같지는 않다. 사람이 어떻게 똑같을 수 있는가? 사람마다 자라온 환경과 영적 성숙도에 따라 깨달음이 조금씩 차이가 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나는 비록 사람들에게 성경을 가르치지만 그들이 100% 다 내 말을 받아들일 것을 기대하지는 않는다. 그들이 만일 내 말을 오류가 없는 진리로 아무런 확인절차도 없이 모두 받아들인다면 나는 오히려 말릴 것이다. 적어도 사도행전의 베뢰아 사람들처럼 정말 그러한가 성경을 통해서 확인하는 태도를 본받으라고 할 것이다. 그들이 그렇게 성경을 통해 확인 절차를 거쳐 스스로 양심적으로 동의할 때 비로소 진리는 그의 것이 되는 것이다.
자신이 장로교인이라고 장로교 교리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거나 감리교인이라고 감리교 교리만이 옳다고 주장하면서 스스로 성경에서 확신을 얻기를 거부하는 사람을 어떻게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고 여길 수 있단 말인가?
자신의 신앙양심대로 믿지 않고 단지 자기 교파의 이론이고 자기는 그 교파에 속해 있으므로 아무런 생각도 없이 무조건 따르겠다는 것은 그야말로 무지몽매한 태도가 아닐 수 없다.
과거에 천주교는 교리가 다양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일반인이 성경 읽는 것을 금하고 심지어 교회 예배시간에서 성경을 라틴어로만 낭독하여 라틴어를 모르는 일반인은 성경을 듣는 것조차 불가능하게 만들었었다. 일반인들은 오직 천주교에서 정해놓은 교리만을 믿을 자유밖에 없었다. 그런데 종교개혁자들이 성경을 자국어로 번역하여 일반인들도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자기 양심대로 하나님을 믿을 수 있도록 하였다. 따라서 개신교는 각 개인의 약간의 사상적 차이를 인정하고 용납해야 할 것이다.
교파라는 것이 어떤 때는 울타리가 되기도 하지만 어떤 때는 장애물이 되기도 한다. 예를 들면, 세례를 줄 때 물에 담글 것인가 적실 것인가를 결정하는 데 있어서 아무리 개인이 성경적으로 확신해도 그가 장로교 목사라면 물에 담그는 세례를 베풀 수 없다. 만일 그랬다가는 장로교에서 축출되는 일이 생길 것이다. 교파에 속해있으려면 자기 양심대로 믿는 것을 포기해야 하는 일도 생길 수 있다. 그러나 교파에 속해 있는 것이 과연 안전한 것인지는 각자가 판단할 일이다. 나는 루터가 저 유명한 보름즈 의회에서 황제와 제후들 앞에서 카톨릭의 주교인 에크의 심문을 받았던 일이 생각난다.
에크가 물었다. ' 마틴, 도대체 어떻게 해서 당신 혼자만 성경의 의미를 이해한 것으로 생각합니까? 당신의 판단이 저 유명한 많은 사람들의 것보다 더 나으며 그들 모두가 당신보다 못하다는 얘기입니까? 조상들은 이 교회(천주교)를 죽을 때까지 믿었으며 우리에게 유산으로 물려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이 교회에 대해서 교황과 황제께서는 우리들이 토론하는 것을 금하고 있는데 그것은 끝없이 논쟁이 이어지는 일이 없게 하려는 뜻에서입니다. 이제 묻겠는데 마틴, 솔직하고 숨김없이 대답하시오. 당신은 당신의 책들과 거기에 담겨 있는 잘못들을 포기하겠소, 포기하지 않겠소?'
루터가 대답했다. '황제 폐하, 귀족 제후 각하들은 아주 간단한 대답을 요구하고 계시군요. 여기 숨김없고 간단한 대답이 있습니다. 성경의 증거와 명백한 이성에 비추어 나의 유죄가 증명되지 않는 이상 나는 교황들과 교회 회의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겠습니다. 사실 이 양자는 서로 주장을 펴오고 있습니다. 내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나는 아무 것도 취소할 수 없고 또 취소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양심에 어긋난 행동을 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옳지 않을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안전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여 이 몸을 도우소서. 나는 여기에 확고부동하게 서 있습니다. 나는 달리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
루터의 마지막 말에 주의해보라. '양심에 어긋난 행동을 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옳지 않을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안전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여 이 몸을 도우소서. 나는 여기에 확고부동하게 서 있습니다. 나는 달리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
양심에 어긋난 행동을 하는 것은 안전하지 않다! 참으로 그것은 위험하다. 사람은 자기가 옳다하는 바를 믿고 실천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 개신교는 자기의 신앙양심을 따라 믿는 것을 허용한다. 그렇다면 성경을 깨닫는 것이나 가르치는 것이 개인마다 약간씩 다양해지는 것은 피할 수 없다.
우리는 다만 성경이 하나님 말씀인 것과 복음과 그밖에 삼위일체를 비롯한 몇 가지 근본적인 진리를 공유하며 나머지 약간씩 다른 것은 용납해야 할 것이다.
둘째, 특별한 이름을 가지지 말아야 한다.
성경에 의하면 바울이 세운 교회나 베드로가 세운 교회나 아볼로가 세운 교회가 아무런 차이가 없었다. 약간의 가르침의 차이가 있을지라도 그들은 다른 조직이나 다른 교파가 아니라 그냥 '교회'였다.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고전 1:11-13
내 형제들아 글로에의 집 편으로서 너희에게 대한 말이 내게 들리니 곧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것이라 이는 다름아니라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는 것이니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뇨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뇨
위의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라! 바울이 무엇을 통탄해했는가? 오늘날 교회를 자신의 영향력 아래 가두고 싶어하고 자신의 이름을 어떻게든 남기려고 애를 쓰는 우리의 모습을 부끄럽게 하지 않는가?
교회는 다 주님 것이다. 거기에 내 이름을 새겨놓지 말자. 어떤 사람이 예배당 하나 지어 놓고 거기에 자기 호를 넣어서 OO교회라고 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이없는 일인가? 선교기관은 어쩔 수 없이 이름이 필요할 수도 있다. 동일한 사역의 방향성을 가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회는 특별한 이름이 필요없다. 오늘날 교회들이 특별한 이름을 가지고 자기들이 또 다른 지역에 개척한 교회에 계속 그 이름을 붙이며 자기 이름과 다른 교회가 부흥하는 것에 대해서는 속상해하고 자기 이름의 교회만이 잘되기를 바란다면 그것은 이기주의와 탐욕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선교지에서도 선교사들 간의 갈등이 바로 그러한 사고방식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수많은 선교사를 보내고 여러 지역에 교회를 개척하는 것이 언뜻 다 하나님을 위한 열심에서 나온 것 같지만 큰 조직의 대표가 되고 싶어하는 인간의 명예욕이 거룩한 탈을 쓴 것에 불과할 수도 있다. 그리고 큰 성과를 보여줌으로 더 많은 후원자들을 확보하기 위한 경쟁일 수도 있다.
그런 유혹을 근본적으로 떨쳐버리기 위한 방법 중에 하나가 특별한 이름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다.
요즈음 직장의 신우회를 통해 수 천 명의 직장인들을 제자양육하고 수많은 사람들을 헌신시키고 열심을 내게 만드는 모임이 있다. 그 모임에 강사로 간 적이 있었다. 수 백 명이 CCC 수련원에서 수련회를 하고 있는데 그러한 큰 모임이 뚜렷한 이름이 없다는 것 자체가 나에게는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총무 되는 형제에게 특별한 이름을 가진 조직으로 만들 생각이 없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렇지 않아도 그런 주문을 하는 형제들이 있지만 아직은 생각이 없다고 했다. 나는 앞으로도 특별한 이름을 갖지 말 것을 권고했다. 이름을 갖는 순간에 나는 종종 명예와 야망의 노예로 전락하는 것을 너무 많이 보아왔기 때문이다.
나는 교회 이름을 너무 아름답게 지은 것 자체가 큰 유혹 중에 하나라고 생각한다. 나중에는 하나님의 교회를 사랑하기보다는 그 이름을 사랑하게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앞으로 새로운 교회를 개척할 때마다 연관되는 특별한 이름을 붙이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냥 지역이름이나 단순한 이름을 붙일 것이다.
OO회 OO교회라는 식의 이름을 붙이지 않을 것이다. 철저하게 개(個)교회 중심으로 활동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 교파 따지기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구별하기 불편하고 혼란스러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우리나라 최대 교파인 장로교 내에도 이미 100개가 넘는 파가 있고 교회마다 장로교라고 되어 있지만 구체적으로 무슨 파라고는 씌어 있지 않다. 설사 쓰여있다고 해도 비그리스도인들이나 초신자들이 그 파가 어떤 특징을 가진 곳인지를 알리가 없다. 심지어 어떤 이단은 장로교 간판을 걸고 포교하는 곳도 있고, 침례교 간판을 걸고 하는 곳도 있다.
어차피 교파간판을 보고 그 교회가 어떤 교회인지를 분별하기 어려운 상황이라면 간판에 어떤 구분을 위해 교파 명을 쓴다는 것은 같은 교파 교인들에게는 의미가 있을지 모르나 비그리스도인들에게는 더 큰 혼란을 초래할 수 있다.
교파화되지 않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탐심을 버리는 것이다.
우리들의 죄악성은 언제나 거대집단의 총수가 되고 싶어한다. 우리 이름을 붙이고 싶어하고 우리의 것을 특별히 사랑하는 경향성을 가진다. 그것은 참으로 물리치기 어려운 유혹이다. 남의 교회가 부흥하면 속이 상하고 자기 교회가 부흥해야 기쁘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일한다고 하지만 우리의 마음속에는 반드시 나를 통해서만 영광을 받으셔야 한다고 고집한다. 언제나 우리가 탐심을 버리고 겸손해질 수 있을까? 우리가 탐심을 버릴 수만 있다면, 적어도 다른 교회 성도를 빼앗아오는 일은 하지 않을 것이다.
교회는 내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다. 내가 속해 있는 교회만 주님의 것이 아니라 다른 교회도 주님의 것이라는 사실을 인식하자. 내가 진정으로 주님을 사랑한다면 주님의 것도 사랑할 것이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영광을 위한다면, 다른 사람을 통해서 영광 받으시는 것도 기뻐할 수 있어야 한다.
교회끼리 서로 연합하여 하나가 되는 것은 사단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막아내는 데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교파는 되지 말자는 것이다. 교파화 되면 그 교파의 총수를 뽑아야 하며 그 과정에서 인간의 탐심은 여지없이 드러난다.
평신도 교회들끼리의 연합모임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교파적인 성격을 전혀 띠지 않는다. 우리는 서로 같지는 않다. 예를 들면, 성령세례를 인정하는 곳이 있는가하면 그렇지 않은 곳도 있다. 장로교회 스타일도 있고 오순절 교회 스타일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연합모임은 화기애애하고 사랑과 이해가 넘친다. 우리는 서로가 약간씩의 지식의 차이가 있지만 서로가 하나님 나라 백성이며 같은 성령으로 움직이고 있음을 확신한다. 우리는 모여서 같은 교리를 만들어 내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는 서로 연합된 어떤 조직체를 만들려고도 하지 않는다. 오직 함께 기도하며 서로가 도움을 주고받으며 도전과 자극을 줌으로 더욱 하나님 나라 사역에 열심을 내게 만들 목적으로 만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가 되는 것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다. 그것은 교파적인 의미로서가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형제이기 때문에, 그리고 도움과 도전을 줄 수 있다는 의미에서 그리고 사단과 싸우는 그리스도의 군사적 의미에서 연합의 필요성을 느끼는 것이다.
앞으로 우리는 어떤 형제가 교회를 개척했을 때 우리가 그를 돕고 충분히 자립할 수 있도록 후원한 후에는 그를 우리 지배하에 둘 것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하나님 나라 사역에 부름을 받은 동역자로 여길 것이다. 그리고 그의 신앙 양심을 따라 사람들을 가르치도록 용납할 것이다. 만일 그가 다른 복음을 가르친다면 우리는 그를 충분히 권면할 것이다. 그가 권면을 받지 않으면 그는 더 이상 우리의 형제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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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역자들은 봉급을 받지 않는다]
사역자들이 봉급을 받는 것과 안 받는 것, 어느 것이 성경적인가라는 질문은 무의미하다. 성경은 이 두 가지를 다 말씀하고 있다.
딤전 5:18
성경에 일렀으되 곡식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 하였고 또 일군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느니라
이 말씀에 의하면 교회에서 사역하는 자들이 사역비를 받는 것은 조금도 잘못된 것이 아니고 정당한 것임을 말해주고 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의 경우는 그 삯을 받지 않았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행20:33-35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 너희 아는 바에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의 쓰는 것을 당하여 범사에 너희에게 모본을 보였노니 곧 이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의 친히 말씀하신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이 부분은 내게 대단한 감동을 주는 구절이다. 바울은 그 바쁜 전도여행 중에서도 그가 쓸 비용을 스스로 감당했을 뿐 아니라 그와 동행하는 전도팀이 쓸 것까지 담당하였다. 우리는 바울이 천막 깁는 기술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행18:3). 그런데 그 업이 제법 부가가치가 높은 직업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바울은 그날그날 번 것으로 자기만이 아니라 일행의 생계까지 유지할 수 있었다. 아마도 어떤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바쁜 사람 중에 하나인 바울이 돈 버는데 시간을 소모했다고 비난할 지 모르나 그것은 바울의 의중을 몰라서이다.
고전 9:12-15
다른 이들도 너희에게 이런 권을 가졌거든 하물며 우리일까보냐 그러나 우리가 이 권을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함이로라 성전의 일을 하는 이들은 성전에서 나는 것을 먹으며 제단을 모시는 이들은 제단과 함께 나누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이와 같이 주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명하셨느니라
....
그러나 내가 이것을 하나도 쓰지 아니하였고 또 이 말을 쓰는 것은 내게 이같이 하여 달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차라리 죽을지언정..... 누구든지 내 자랑하는 것을 헛된 데로 돌리지 못하게하리라
바울은 복음의 더욱 효과적인 전파를 위해서 자신이 마땅히 누릴 수 있는 권리를 포기한 것이었다. 나는 오늘날 봉급을 받는 사역자들을 결단코 비난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정당하다!
그러나 봉급을 받지 않기 위해 직업을 갖는 것도 결코 비난받을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아니, 오히려 칭찬 받아야 할 일이다. 오늘날 많은 목회자들이 궁핍한 삶을 살고 있고 생활고를 타개하기 위해 현실과 타협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만일 그들이 다른 직업을 갖고 생계를 유지하면서 목회의 일을 했더라면 오히려 훨씬 더 당당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지금까지 우리는 직업을 버리고 목회직을 갖는 것을 헌신이라고 불러왔다. 그러나 앞으로는 봉급을 받지 않기 위해 직업을 갖는 것이 오히려 더 헌신으로 여겨질 것이다.
내가 알고 있는 어떤 분은 직장에서 아주 효과적인 사역을 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는 보다 더 하나님께 헌신하기 위해 직장을 그만두고 신학교에 들어갔다. 그리고 목사가 되었다. 갖은 고생을 다하면서 개척을 했지만 너무 힘들었다. 자녀들은 자꾸 늘어가고 생활비는 눈덩이처럼 불어나는데 교인이 없으니 제대로 봉급이 나올 리가 없었다. 그는 점점 더 사역이 어렵다는 생각이 들어 산에 가서 하나님께 부르짖기도 많이 했지만 상황은 별로 바뀌지 않았다. 결국 그는 사역하던 교회를 떠나 고향으로 내려갔다. 거기서 아버님의 목회를 이어받으려 한다고 들었다. 나는 이런 생각이 든다. 차라리 직장에 있으면서 목회를 했더라면... 솔직히 일 이 십 명되는 사람을 돌보는데 직장까지 버릴 정도로 시간이 없을까? 오히려 몇 명 안 되는 성도들이 목회자를 지탱하려고 쩔쩔매게 되지 않는가? 양이 목자를 돌보는 꼴이 되어버리지 않는가?
그러나 그 당시에는 직장을 가지면서 목회를 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가 없었다. 우리나라 풍토에 목사가 직업을 가진다는 것은 용납되지 않았고, 그것을 거의 '타락'과 같은 수준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고정관념이 깨져야 한다. 도대체 왜 성경적인 것이 '타락'으로 간주되어야 하는가? 물론 수백 명의 교인이 생기면 아마 직장생활하면서 그들을 돌보기란 어려울 것이다. 그럴 때는 어쩔 수 없이 직장을 그만 둘 수도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직장을 가진 사람은 목회를 할 수 없다는 공식은 이젠 버리자.
사역비를 받지 않고 다른 직업을 가짐으로써 생계를 해결한다는 것은 평신도 교회의 중요한 특징이 될 것이다.
나는 목회자가 사역비를 받지 않으면 훨씬 유혹을 덜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도시목회거나, 농촌목회거나, 부자가 교회에 나오거나, 가난한 사람이 나오거나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사람들을 끌기 위해서 영적인 복보다는 물질적인 복을 더 기원하는 식의 사이비적인 사역을 하지 않게 될 것이다. 오직 각 사람의 영혼들에 대해서 더 관심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직장에서 신우회 활동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얼마나 순수한 동기로 활동하는가? 그들의 활동 동기는 전혀 이익에 얽혀있지 않다. 그러한 순수함이 교회 안에서도 계속 이어져야 한다고 믿는다.
사역을 하는 것이 돈이 생기거나 명예를 얻는 것이 아님을 안다면 잘못된 동기로 활동하는 사람들이 상당수 사역을 내려놓을 것이다. 그것은 교회를 위해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나처럼 평신도 사역을 하는 형제들은 직장을 그만두고 집에서 성경 연구나 기도하면서 생활하고픈 충동을 종종 느낀다. 직장 생활이라는 것이 퍽 고단할 때는 더욱 그렇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유익을 위해서 그런 희망을 접어둔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지방에서 결코 사역비를 받지 않고 자비량으로 사역했듯이 오늘날에도 그러한 사역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역이 가능하기 위해서 직업은 매우 조심스럽게 선별되어야 할 것이다.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근무해야 하는 직장은 평신도 교회에서 사역자로 활동하기에는 부적합하다. 사역을 위해 다소 물질적인 손해가 있더라도 직업을 바꾸어야 할 것이다. 그것이 헌신이다.
평신도 교회에서 직장을 가진 사람이 사역을 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다른 사람들에게 그 자체가 큰 도전이 될 수 있으며 그들에게 진정한 '봉사'와 헌신의 의미를 깨우쳐 줄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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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당 전용 건물을 건축하지 않는다]
예배하고 성경을 가르치며 교제하는 장소가 넓으면 정말 편하다. 그럴 수 있는 전용 건물이 있다는 것은 축복 중에 하나다. 그러나 그러한 건물을 짓기 위해서는 많은 돈이 필요하고 그 과정에서 헌금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오늘날 돈 문제로 교회를 떠난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사회에서 돈에 찌들어서 그것을 피해서 예배당에 왔더니 거기서도 돈, 돈 하는 것을 보고 크게 상처를 입어 다시는 교회에 나가지 않겠다고 하는 사람들을 나는 주위에서 쉽게 볼 수 있다. 사실 교회에서 사역자들이 봉급을 받지 않고 , 예배당 건물을 짓지 않는다면 많은 헌금들을 사회 봉사와 선교와 구제에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많은 교회의 헌금 사용 내역서를 보라. 거의 대부분이 자체 소비되고 있다. 만일 그 중에 상당부분이 사회에 투자되었더라면 오늘날의 비그리스도인들이 교회를 보는 눈이 달라졌을 것이다.
밤에 높은 빌딩 옥상에 올라가서 주변을 살펴보면 곳곳에 상상외로 많이 있는 십자가를 보고 놀랄 것이다. 그러나 비그리스도인들은 예배당이 많은 것에 대해 오히려 비난하는 경향이 있다. 그럴 때마다 나는 '그 자리에 술집에 생겼으면 좋겠소?'라고 반문하며 그들을 나무란다. 그렇지만 내 마음 한 구석에도 그들의 비난을 나무랄 수만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 많은 십자가가 너무 경쟁하는 듯한 인상과 그 많은 예배당이 도대체 이 사회에 어떤 의미를 가질까에 대한 의구심 때문이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밖을 생각할 여유가 없어 보인다. 너무나 자체적인 소비가 크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외국인은 한국 교회를 박스 안에 갇혀있는 거인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한국에 오면 많은 교회, 많은 교인에 놀라지만 그들이 세계 선교에 기여하는 것은 지극히 적은 것을 빗대어 하는 말이다.
우리는 돈을 좀더 효과적으로 써야 한다. 밖을 돌아보아야 한다. 만일 우리가 교회 헌금의 반을 구제와 선교에 투자한다면 오늘날 우리나라는 교인이 줄어들고 있다고 안타까워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고아원이나 미혼모 보호소, 양로원, 정박아 교육 등 사회에서 떠맡기 싫어하는 것을 교회가 담당하는 것이 구제사업인 동시에 장기적 안목에서 볼 때 분명히 '선교'다.
그러나 교회가 아름다운 건물을 소유하다보면 그것으로 만족하고 그것에 집착하는 경향성을 가지게 된다. 내가 학교에서 학생들 성경공부 모임을 가질 장소가 없어서 여러 교회에 문의했을 때 주로 건물이 아름다운 교회들은 개방하기를 꺼려했다. 이유인즉 예배당이 더럽혀질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거의 일주일 내내 텅 빈 넓은 공간이 나는 몹시도 아까웠다. 오히려 조그마한 개척교회나 임대 건물을 사용하는 교회들은 기꺼이 우리에게 예배당을 빌려주었다.
수천 만원이 되는 오르간, 수천 만 원 짜리 방송 시스템, 수천 만원 짜리 강대상 등 물론 있으면 좋은 것들이지만 헌금하는 형제들을 생각해보라! 그들 중에는 하루 벌어 하루 연명하는 사람들도 있지 않은가? 그러한 돈들이 모여서 쌓인 헌금을 그런 식으로 다 소비하는 것은 참으로 보람없는 일이지 않는가? 예배당 건축으로만 끝나면 다행이다. 겨우 예배당을 건축하면 그 다음에는 교육관을 건축하고 그 다음에는 수양관을 만들고 그 다음에는 교회묘지를 사고 사역자들을 위한 아파트를 사고, 주차장을 넓히기 위해 인근 주택을 사들이고 그리고 예배당이 좁다는 이유로 허물고 다시 짓고 ... 끊임없는 소모다. 어느 교파에서는 전략적으로 예배당을 크고 아름답게 짓는다고 한다. 그래야 사람들이 많이 모인다는 것이다. 내가 볼 때 이것은 선교라기 보다 거의 사업이라고 생각한다.
유럽에 여행을 다녀온 사람들의 이야기로는 수많은 유럽의 아름다운 예배당들이 이제는 박물관과 관광물로 전락했다고 한다. 결국 세상의 손에 넘어가 버렸다! 우리는 건물이 아니라 사람에게 투자해야 한다. 어떤 사람은 건물을 짓는 것이 사람을 위한 투자라고 항변한다. 그러나 건물을 짓기 위해서 강행한 결과 상처를 받고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교육관을 짓고 수양관을 만들고 ....하는 이유는 다 그럴싸하다. 그런 것이 갖추어져야 사람들이 많이 오고 성도들이 좋아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 기업들이 소비자에게 번 돈을 다시 소비자에게 환원시키는 것을 아주 훌륭한 처사로 우리는 간주하지만 교회는 그렇지 않다. 교회가 헌금받은 돈을 헌금한 사람들을 위해 다 소모하는 것은 아주 잘못하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희생도 헌신도 없는 육신의 안일을 추구하는 세속적이고 이기적인 발상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런 것은 세상의 취미써클에서 회비를 받아서 회원들을 위해 쓰는 것과 아무 다를 바가 없다. 교회의 목적 중에 중요한 하나는 바로 세상에서 잃어버린 바 된 죄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들을 구원하는 데 있다. 그것을 위해 구체적으로 투자되어야 한다.
평신도 교회는 예배당이 없어도 얼마든지 예배드릴 수 있고 신앙생활이 가능하며 짜임새있는 교육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줄 것이다.
유치원, 태권도장, 학원 등은 우리가 모일 수 있는 장소들이다. 약간의 돈을 주면 일주일에 한 두 번 빌리는 것은 쉽다. 교회 멤버 중에 그런 직업을 가진 사람이 있으면 더욱 좋다. 또는 유치원이나 어린이 집 같은 것을 교회가 세워서 직장 없는 형제들에게 취업의 기회를 제공하고 그런 장소를 예배당으로도 쓰면 더욱 좋을 것이다.
나는 평신도 교회가 예배당이 없으면 예배 못 드릴 것처럼 생각하는 교회들에게 큰 자극이 될 것으로 생각한다.
성도는 잠깐이요(언제라도 교회를 떠날 수 있으므로) 건물은 영원하다(건물은 언제나 자기 소유로 되어 있으니까)고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그 반대임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요일 2장 17절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그렇다. 건물은 언젠가는 무너진다. 그러나 성도는 영원하다. 사람을 위해서 건물이 있는 것이지 건물을 위해서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 돈 때문에 교회에 못 나가는 사람들을 끌어안을 만한 교회가 필요하다. 조금만 부흥하면 건축문제를 들먹이는 기존의 형태와 다른 형태가 필요하다.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을 구체적으로 도울 수 있는 교회가 필요하다. 21세기에는 비그리스도인들이 교회가 사회에 매우 유익한 단체임을 인식하게 되고 동네 사람들이 자기 동네에 교회가 세워짐에 대해 기쁘게 생각할 수 있게 되어야 한다.
평신도 교회가 그러한 것을 감당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돈 없어도 다닐 수 있는 교회, 가난해도 사랑 받을 수 있는 교회, 돈이 아무리 많아도 장로가 될 수 없는 교회. 헌금하지 않아도 용납되는 교회, 대부분의 헌금을 구제와 선교에 쏟는 교회 ... 그러한 교회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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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와 자매로 호칭한다]
형제와 자매로 호칭한다는 것이 한국문화 정서에 안맞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평신도교회에서 아주 중요한 원칙이 되어야 한다. 경험상 호칭이 달라질 때 평신도 교회의 개념은 깨지기 쉽다. 예를 들면, 목사, 장로, 집사 등으로 호칭될 때 이미 기존의 계급 개념을 가진 사람들이 자신도 모르게 담을 쌓을 수 있다. 우리들은 모두 죄악된 본성을 가지고 있다. 대접받고 싶어하고 다스리고 싶어하고 우쭐대기 좋아한다. 호칭은 그러한 본성에 불을 질러서 지체들간에 깊은 골을 만들기도 한다.
전에 내가 있던 선교회는 처음에는 형제, 자매로 불리웠다. 그러나 그 선교회가 교회를 세우면서 형제, 자매들에게 새로운 호칭이 생겼다. 목사님, 집사님, 장로님, 부장님 등이 된 것이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내가 가르친 형제가 목사가 되고 나는 집사가 되었다. 전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교제할 수 있던 형제가 이젠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집사가 목사를 어떻게 가르칠 수 있단 말인가? 우리는 계급화되지 않았다고 말로는 아무리 떠들어대도 집사가 목사에게 무언가 조언을 하면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는다. 어떻게 목사에게 그럴 수 있느냐고 분해한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
마 23: 8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이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형제의식을 갖는다는 것은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계속 상기시켜야 할 말이다. 우리는 수평적인 관계를 가지고 서로 사랑할 수 있어야 하며 서로 복종할 수도 있어야 한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명령하셨다.
요 13:34-35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
우리는 형제를 사랑할지 말지 선택할 권리가 없다. 우리는 형제를 사랑해야할 의무가 있다. 프란시스 쉐퍼가 말했듯이 형제사랑 - 이것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의 표지다. 그리고 형제 의식없이 형제 사랑이란 있을 수 없다.
기성교회에서 오래 생활하던 사람은 자기보다 한참 젊은 사람이 자기를 향해 '형제님'이라고 말하면 심히 불쾌할 지 모르겠다. 전에 어떤 회의석상에서 젊은 사람이 나이든 사람에게 형제라고 부르는 것이 한국 문화에 거리끼는 일이 아니냐고 내가 말했더니 어떤 한의원을 경영하는 나이 드신 분이 괜찮다고 말하면서 우리가 이런 것을 겸손하게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한다고 했다.
그런 겸손함이 나이든 사람에게 있고 또한 젊은이들은 겸손함으로 그런 형제들을 존경하고 따를 수만 있다면 호칭에서 오는 불편함이나 불쾌함은 전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나이가 너무 차이가 나서 '형제님'이라고 부르기가 꺼려진다면 '부형(父兄)(아버지 같은 형님)' 또는 '자모(?母)(어머니 같은 누님)'등으로 부를 수도 있지 않을까?
아무튼 호칭은 서열을 나타내는 것으로 붙여지면 안 된다. 단지 나이 드신 분에 대한 예의 정도에 그쳐야 할 것이다.
나는 세련된 계급 형태를 가지고 있는 기존 형태를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확장에 필요한 또 하나의 교회 형태일 수 있기 때문이다.
내 견해로는 사람들의 절반은 강력한 리더십에 의해 종속되어 이끌려지기를 바라는 사람들이고 절반은 무언가 자율적으로 움직이기를 원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권위주의가 팽배한 교회를 오히려 좋아하는 사람도 있겠고 그것을 혐오하는 사람도 있다. 한 교회가 그것을 다 만족시킬 수는 없다. 평신도 교회는 특성상 기성교회처럼 한사람의 강력한 리더십에 의해 움직여지지 않는다. 형제, 자매로 호칭되며 평등한 지체의식 속에서 은사를 따라 움직이게 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평신도 교회는 아무런 권위도 존재하지 않는 교회로 생각하면 그것은 오해다. 권위가 없는 곳에는 어떤 성숙도 발전도 기대할 수가 없다. 평신도 교회는 '장로'라는 권위를 가질 것이다. 비록 호칭은 '형제'라고 불리울 것이나 교회 형제들은 장로들의 권위를 인정하고 그들에게 순종하려는 겸손한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이다. 다음의 성경 말씀을 묵상해보라.
벧전 5: 5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복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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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신도 교회의 문제점과 해결책
[영적 지도자의 양성과 전문성 문제]
평신도 중심의 교회는 신학교이라는 과정을 두지 않기 때문에 지도자들을 대량으로 배출하기 어렵다. 그것은 매우 급속하게 발전하는 모델에서는 심각한 문제점으로 대두될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의 한국교회에서의 문제는 지도자의 숫적인 부족이 아니다. 오히려 지도자의 과다 배출이 문제다. 우리 나라는 신학교가 약 300여개 있는데 그들에게서 배출되는 학생이 일년에 수 만 명씩이나 된다. 그들을 흡수할 만큼 자리가 남아있지 않다. 그러다 보니 경쟁이 치열해지고 그런 과정에서 갈등이 심화되고 있다. 앞으로 한국교회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지도자의 대량 배출이 아니라 소수 정예화가 절실하다.
평신도 교회는 그 특성상 지도자를 대량으로 배출할 수는 없지만 교회 성장 속도에 맞추어 알맞게 지도자들이 양성, 배출되리라고 확신한다. 아마도 평신도 교회에서 지도자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그의 은사가 뚜렷이 나타나고 그의 인격과 삶이 자연스럽게 많은 검증을 거치게 될 것이다.
왜냐 하면 평신도 교회에서는 졸업장과 같은 외적인 조건을 기준으로 삼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평신도 교회의 문제점 중에 하나로 지적되는 것은, 신학교 같은 전문기관에서 전문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교회의 지도자가 될 수 있는가 이다. 그러한 지적은 인격적인 문제보다는 전문성의 문제를 지적한 것으로 생각된다. 성경은 아무나 가르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전문교육을 받은 사람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참으로 평신도 교회의 가장 큰 우려는 지도자의 성경 지식의 빈약함과 전문성의 결여로 인한 미숙한 목회다. 이것을 극복하는 것이 평신도 교회의 과제다.
그러나 이것이 극복하기 불가능한 문제들은 아니다.
폴 스티븐스는 말하기를 지역 교회가 가장 훌륭한 신학교라고 했다. 교회에서 많은 실제적 문제들과 부딪히면서 교육받고 성숙하는 것이 훌륭한 영적 지도자가 되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것이다. 나는 폴 스티븐스의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신학교와 같은 전문 기관을 거치지 않는 대신 오랜 기간동안의 제자 양육은 신학교의 교육을 능히 대치할 수 있을 정도의 시간적 분량과 지식의 성숙과 삶 속에 적용할 수 있는 과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평신도 중에는 우수한 인재들이 많이 있다. 그들 중에는 지적으로 탁월해서 남이 일년 해야 끝낼 수 있는 공부를 석 달만에 끝낼 수 있는 사람들도 있고 영적인 통찰력을 갖추어서 문제점들을 금방 포착할 수도 있는 예민한 사람들도 있으며 인격적으로 성숙한 그리스도인들도 많이 있다. 이들을 제자양육 시키고 그들 중에서 은사가 있는 자를 얼마든지 지도자로 세울 수 있다는 것은 평신도 교회가 가질 수 있는 큰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제자 양육을 받았다고 다 영적 지도자가 되는 것은 아니고 성경의 기준을 따라 그리고 은사를 따라 잘 발굴하여 세워야 할 것이다. 교사의 은사나 목사의 은사를 가진 사람들은 특성상 성경연구에 대단한 열성을 보이는 사람들로 이러한 은사를 가진 사람을 빨리 발굴하여 잘 양육시키면 뛰어난 자질을 가진 지도자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과정으로 지도자가 된다는 것은 느리고 적을 수밖에 없지만 오늘날 대량배출이 절실히 요구되는 것도 아닌 상황에서 지식과 신앙과 인격이 균형 잡힌 지도자를 만들어 내기에는 적당하리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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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운영의 부진]
평신도 교회의 지도자는 보통 다른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다. 따라서 목회직을 직업으로 하는 전임 사역자에 비해 일반적으로 시간이 부족하며 양들 한 명 한 명에 대해 관심을 쏟는 것이 전임 사역자에 비해 떨어진다. 그것은 교회 운영이 부진하게 되는 원인이 될 수 있다.
아무래도 한 곳에 집중하는 사람보다 두 곳에 집중하는 사람이 덜 효과적이고 덜 능률적일 것이다.
평신도 교회가 이것을 극복하려면 모든 성도들이 기성교회에서 하던 습성들 - 하나서부터 열까지 전임 사역자에게 의지하려는 태도 -을 버리고 스스로 자신의 할 일을 찾아 능동적으로 해주어야 한다. 기성교회가 목자에게 많은 것이 집중되어 있는 반면에 평신도 교회는 철저히 일을 분담할 것이며, 그것은 모든 성도들에게 소명의식을 심어주고 책임있는 그리스도인으로 성숙하게 하는데 일조할 수 있을 것이다. 만일 우리가 그럴 수만 있다면 오히려 전임 사역자가 없는 평신도 교회의 단점은 장점이 될 수 있다.
나의 경우, 교회의 형제들에게 이것을 요구했다. 나는 그들과 똑같은 직장인이며 같은 신분임을 이야기하고 내가 설교 준비하는 것 만해도 쉽지 않은 일임을 인식시켰다. 그러자 모든 형제들이 그것을 충분히 이해하고 나에게 기존 목회자에게 기대할 수 있었던 일들 - 심방이나 가정 대소사에 뛰어다니는 일 등-을 더 이상 바라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일들은 하나의 공동체에서 없어서는 안될 일임을 알기에 나는 교회의 성경공부 각 팀의 인도자들에게 팀원들을 위해 희생할 것을 요구하고, 우리는 기꺼이 그러기를 다짐했다. 만일 형제가 우리 교회에 와본다면 새벽 2시에도 형제가 도움을 요청하면 뛰어 갈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는 인도자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나는 비록 형제들을 위해 충분히 시간을 내지 못하지만 그들을 위해 중보기도는 쉬지 않고 있다.
그리고 철저한 분담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장로들은 교회의 필요에 보다 더 적극 부응하기 위해서 스스로 시간을 많이 낼 수 있는 직업으로 전업하 것도 고려해 보아야 한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직장에서 시달리는 사람이 목회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참으로 주님께 헌신되었다면 어느 정도의 경제적 희생을 무릅쓰고서라도 시간을 확보해야 할 것이다.
또한 평신도 교회는 목사 중심제보다는 평신도 중심제의 모양을 가지고 있어서 일사분란한 움직임보다는 다양한 의견의 수렴과정 때문에 의사 결정이 느리고 시간이 낭비되며 언제나 논쟁에 빠지게 될 우려가 있다. 우리가 성경을 모든 결정의 기준으로 하고 서로가 겸손할 수만 있다면 이것은 극복할 수가 있다. 또한 평신도 교회라고 해서 아무런 권위가 없는 곳은 아니라는 것이다.
장로들이 교회의 권위로서 여러 결정에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다. 권위가 존재하지 않는 집단은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결코 발전하지 못했다. 사실 지도력이 부재한 교회 치고 제대로 부흥한 교회를 보기란 어렵다. 그리고 지도자가 없는 교회란 가장 비 성서적 교회다. 평신도 교회는 지도자를 부정하는 교회가 아니라 누구나 성숙하면 지도자가 될 수 있는 교회다.
평신도 교회에는 분명히 장로들이 있으며 성경의 명령을 따라 젊은 자들은 장로들에게 순복하려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다만 본질이 다른 신분인 것처럼 위장하지 않고 같은 평신도이자 신앙 선배로서 그들의 안내자적인 위치에 서는 것뿐이다. 평신도 교회 형제들은 서로 겸손함으로 섬기려는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모임 자체도 성립하기 힘들 것이다.
그리고 지도자의 영적 권위는 어떤 지위로 세워지는 것이 아니고 진리의 지식과 영적 성숙과 인격적 성숙에 의해 자연스럽게 세워지는 것이다.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이라면 누가 더 영적으로 성숙한 자인지를 잘 구별할 수 있다. 구태여 영적 권위를 유지하기 위해 직함을 내세울 필요도 없다. 양육한 사람이 양육 받은 사람보다 일반적으로 우선이 되며 그것은 물 흐르듯이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그러나 그들이 어느 정도 성숙했을 때는 동역자로 간주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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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신도 교회의 부르심
나는 평신도 교회의 부르심이 다음과 같다고 생각한다.
첫째, 불신자들을 보다 많이 전도하기 위해 부르심을 받았다.
불신자들을 전도해야 하는 것은 모든 교회가 가져야 할 공통된 사명이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아래와 같은 지상명령을 내리셨기 때문이다.
막 16:15
또 가라사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평신도 교회는 이와 같은 주님의 명령을 순종하기 위해 우리 나라를 넘어서서 해외에까지 복음을 전할 것이다.
그런데 불신자 중에는 기성교회의 사역자에 대한 거부감이 너무 커서 도저히 교회에 다닐 수 없는 사람도 있다. 기성교회의 여러 구습들, 예를 들면 성직자들의 권위주의나 금권주의나 신문이나 잡지 등에 오른 목회자들의 스캔들을 문제삼아 교회에 나가기를 거절하는 사람들이다. 돈, 돈 하는 세상이 싫어서 돈을 초월한 종교의 세계에 귀의해보자고 큰 맘 먹고 교회에 나갔더니 거기서도 헌금을 강조하는 설교를 듣고는 크게 분노하여 다시는 교회에 안나가겠다고 결심한 사람들을 당신은 가끔 만나보았을 것이다.
평신도교회는 그들의 마음을 상당히 누그러뜨릴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 교회에 그러한 대학생 청년이 한명 등록했다. 그는 평생에 교회에 가 본 적이 없는 학생이었다. 그리고 기성교회에 대해 별로 좋지 않은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 교회 형태에 대해 그는 호감을 가졌다. 친구에 의해 교회로 인도된 그는 몇 주간 신입반 교육에 참여했고 마침내 예수님을 영접하고 구원의 확신을 가진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한번도 교회 문턱을 밟아보지 못한 그 청년에게 내가 우리 교회의 형태에 대해 설명했을 때 그는 이런 식으로 말했다.
'바로 그 점 때문에 제가 이 교회에 오게 된 것입니다.'
나는 직장에서도 그런 것을 종종 본다. 기성교회에 참가하기는 절대적으로 거절하지만 신우회 모임에는 참석하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그런 자들에게 평신도 교회는 자기와 동질의 사람들이 사역하는 교회로 부담없이 나올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이와 같이 한사람이라도 더 하나님 나라에 이주시키기 위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또 다른 형태의 교회를 허락하신 것으로 믿는다.
둘째, 잃어버린 양을 찾는 사역을 위해 부르심을 받았다.
오늘날 기성교회의 여러 행태에 염증을 느껴서 교회를 떠난 사람이 많이 있다. 이런 사람들을 기성교회가 다시 흡수하기는 쉽지 않다. 이럴 때 이들이 별 저항감 없이 다닐 수 있는 교회들이 필요하다. 그것은 새로운 형태로 보여질 필요가 있다! 평신도 교회는 바로 그러한 목적을 위해 세워지는 것이다.
셋째, 잠자고 있는 평신도들을 깨우기 위해 부르심을 받았다.
자신이 평신도에 불과하다고 예배에 참석하는 정도로 의무를 다했다고 생각하고 아무런 꿈도 없이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우리 주위에는 많다. 그들에게 평신도인 당신은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부르심을 받았다.
넷째, 종교적 타성에 젖은 교회를 각성시키기 위해 부르심을 받았다.
평신도 교회는 타성에 젖어 있는 목회자들에게 큰 도전과 자극이 될 것이다. 어쩌면 목회직에 대한 위기감마저 느낄지도 모른다. 그들은 어떻게 해서든 평신도 지도자보다는 더 나은 것을 보여주기를 원할 것이며, 그것은 한국교회에 플러스 요인으로 작용할 것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한국교회는 피차간에 시너지(synergy-공동상승)효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런 시너지 효과를 기대하지만 저 여우들은 서로 헐뜯고 비난하게 함으로 서로에게 상처를 주도록 유혹할 것이다. 깨어 기도해야 할 것이다.
다섯째, 통일 한국을 대비하기 위해서 부르심을 받았다.
한국이 통일이 된다고 하자.
한국의 수많은 신학교 졸업생들이 과연 북한으로 물밀 듯 들어갈 것인가? 솔직히 말해 회의적이다. 왜냐하면 오늘날의 남한의 농촌 현실이 북한의 현실보다 좋으면 좋았지 결코 나쁘지 않은데도 많은 목회자들이 농촌목회를 꺼려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떻게 남한 농촌보다 훨씬 더 열악한 환경의 북한에 가서 목회를 하겠는가? 농촌 교회의 고질적인 병이 목회자가 와서 한 일년정도는 열심히 하다가 그 다음에는 힘이 빠져서 무기력증세를 보이다가 나중에 좋은데 자리가 나면 옮겨버리는 것이다. 그런 상황을 미루어보건대 북한선교에 낙관적인 전망을 가지기란 어렵다.
그런 상황일진대 만일 통일이 된다면 누가 기꺼이 북한에 들어가 목회를 하려고 하겠는가? 물론 일부 헌신적인 형제들이 그것을 맡아 해줄 것이고 막강한 교회의 지원을 힘입어 선교하는 사람도 일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원은 지극히 적은 부분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한국 교회 중에 그렇게 선교에 많은 돈을 투자하는 교회가 많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알기로는 선교나 구제사업에 교회재정 중 10%이상 투자하는 교회도 별로 없다. 결국 북한 교회들은 거의 대부분 자립해야 할 상황이 속히 도래할 것이다. 그렇다면 오직 헌금에 의존하는 사역자들이 가솔들을 데리고 북한에 들어갈 것을 기대하기란 어렵다. 온 마을이 다 예수 믿어도 100명밖에 안되는 그런 곳에서 과연 누가 목회를 하려고 하겠는가?
나는 평신도 교회가 그 대안이라고 믿는다. 교회를 개척하고 그들을 양육한 후에 그 들 중에 장로들을 세우고 그 장로들 중에 목회할 사람을 선정해서 양들을 돌보게 하는 것이다. 물론 최초의 개척자는 후원을 받는 선교사이던가 아니면 직업을 가진 평신도이어야 할 것이다. 그가 선교사라면 교회를 개척한 후에는 장로들을 세우고 다른 지역으로 떠날 것이다. 그런 식으로 농촌마다 도시마다 교회를 세우는 것이다. 나는 이것이 사도행전 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사도행전 8장에 의하면 사마리아교회는 빌립 집사가 세우지 않았던가? 회교도의 나라 터키에서 선교를 해서 수 백년 만에 처음으로 법적으로 공인된 교회를 세운 사람은 평신도였던 최바울 선교사였다.
지금까지의 선교전략이 사람들을 전도해서 교회가 되면 그 중에 한 사람을 목회자로 세우기 위해서 직업을 다 내려놓고 신학교이라는 곳에 보내서 3 년 내지 6년간의 학업을 쌓게 해서 학위를 받아 오게 해야 했다. 그 과정에서 그는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 많은 희생이 따르게 되고 결국 학위를 땄을 때 그는 자신의 고향으로 오는 것을 주저하게 되고 그것이 직업이 된 만큼 생계가 될 만한 장소를 물색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미 세계 선교에서 실패의 전형적인 패러다임으로 인정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선교사가 원주민 중에 한 명을 본국으로 보내서 학위를 받게 했을 때 다시 그 원주민이 자기나라에 선교사업에 뛰어들지 않는다는 사실은 이미 수없이 많은 선교보고에서 확인된 바이다.
이제는 그러한 패러다임을 버리고 다른 패러다임... 그것은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닌 바로 사도행전에서 제시된 것이다. 말하자면 선교사를 투입해서 그들이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개척하면 그 교회 사람들 중에서 장로들을 뽑고 그 중에서 목사나 교사를 찾아내어 활동하게 하는 것이다. 이런 패러다임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이북에 어려움 없이 교회를 세울 수 있다. 농촌에서도 전도해서 그들 중에 장로를 세우고 장로들이 교회를 목회하게 한다. 물론 그들은 각자 자기 직업을 그대로 가지고 있을 것이다. 목사가 된다는 것이 자신의 과거의 직업을 버리는 것을 의미하지도 않을뿐더러 교회 목회가 그들의 수입에 어떤 보탬도 주지 않을 것이다. 오직 주님을 향한 사랑과 봉사정신만이 그들을 움직이게 할 것이다.
농촌에서는 농부를, 어촌에서는 어부를, 공장시대에서는 노동자들을 목회자로 세울 수 있어야 한다. 그들 중에 목회자를 세우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선교 패러다임은 농촌에서 농사를 잘 짓는 사람을 목회자로 세우겠다고 농사를 그만두게 하고 신학교를 보내는 것이었다면 이제 제시하는 패러다임은 그 사람으로 하여금 농사를 계속 짓게 하면서 형제들을 돌보고 양육하게 하는 것이다. 평신도 교회는 이러한 패러다임을 과감하게 보여줌으로써 통일되었을 때 사람들이 북한에 물밀 듯이 들어가서 두려움없이 교회를 개척할 수 있도록 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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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세기 한국교회 발전을 위한 제언
우리 한국교회는 21세기를 대비해야 한다. 지금과 같은 상태로는 21세기에 한국 교회가 유럽의 교회처럼 몰락할 수밖에 없다. 이제 우리는 바뀌어야 한다.
한국 교회가 21세기에도 부흥하면서 선교적 사명도 잘 감당하려면, 나는 다음과 같은 자세가 되어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다른 교회를 경쟁상대로 보는 태도를 버려야 한다]
매년 약 300여 개의 신학교에서 배출되는 수 만 명의 신학생들이 사역할 자리가 없어서 전전긍긍하고 있다. 신학교 졸업생들이 목회를 하려면 개척을 하던가 아니면 큰 교회 부목사로 들어가야 한다. 그러나 개척을 하자니 도시에는 가는 곳마다 예배당이 빽빽이 차 있어서 더 이상의 공간을 용납치 않고 부목으로 들어가자니 교회마다 이력서가 수북히 쌓일 정도로 경쟁률이 보통이 아니다. 결국 이젠 목사가 된다는 것은 생존경쟁에 진입하게 됨을 의미하게 되었다.
그래서 한 건물에 예배당이 무려 3개까지 들어서 있고 교회끼리의 교인 쟁탈전이 심화되고 있다. 요즈음의 이단이란 자기 교회 교인을 빼앗아 가는 곳이라고 누군가 냉소적으로 말했다. 참으로 별 것 아닌 것 같은 것을 꼬투리 삼아서 이단으로 몰고 가는 행태를 너무 많이 본다. 그 한 예로는 여의도 순복음 교회를 통합측 장로교회에서 사이비로 규정했던 것과 같다. 나중에는 철회했지만 한국교회의 단면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이런 식으로 교회끼리 서로 물고 뜯으면, 결국 우리는 몰락할 수 밖에 없다.
사도 바울의 충고를 기억하자.
갈 5:15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이젠 교회끼리 경쟁하는 태도를 버리고 동역자 개념을 가져야 한다.
서로의 교인을 빼앗는 행동을 버리자. 멀리 이사를 가도 계속 자기 교회에 나와야 한다고 강
요하지 말자. 오히려 좋은 교회를 선정해서 다닐 수 있도록 배려할 수 있는 아량을 갖자. 버스
회사를 방불할 정도의 많은 고급 버스를 소유하면서 수십Km 떨어진 사람들까지 실어 나르는 일을
자제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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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도의 신학을 경계해야 한다]
몇 년 전에 한양대학에서 한 학기동안 대학생 성경공부를 인도한 적이 있었다. 어느 날이었다.
그날은 기독 동아리 연합으로 집회를 갖기 때문에 성경공부를 할 수 없다고 학생들이 말했다. 나는 성경공부 인도를 포기하고 기쁜 마음으로 연합집회에 참석했다. 그때 강사는 감신대의 박 모 교수였고 주제는 '하나님 나라'였다. 주제가 평소에 내가 관심을 둔 분야라 열심히 강의를 들었다. 그런데 강의를 듣는 도중에 나는 크게 실망했다. 신학대 교수라는 사람이 기껏 한다는 소리가 신약 성경에서 예수님이 진짜 하신 말씀은 '회개하라,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다!'는 것 뿐이고 나머지는 제자들이 다 각색한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예수님은 정의를 위해서 싸우다가 죽으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가상히 여겨서 하나님의 아들로 삼아주셨다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 나라의 특징은 귀신을 쫓아내는 것인데, 저 데모하는 학생들이 정신 나간 정치인들에게 붙은 귀신을 쫓아내는 정의로운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저 최루탄 가스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데모하는 학생들을 보라! 그들이야 말로 성령충만한 학생들이 아닌가!'라고 했다.
어이가 없어서 그냥 나와버릴까 하다가 내가 양육하던 학생들이 혹시라도 잘못 듣고 실족할까봐 강의를 끝까지 듣고 질문을 던지기로 했다. 강의가 끝난 직후에 나는 예수님의 신성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그랬더니 그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나도 교회에 가서 설교할 때는 은혜롭게 설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는 대학이기 때문에 학문적으로 접근해서 설교한 것입니다.'
나는 그것이 무슨 소리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사람은 사상과 말이 일치해야 하는데 속에는 그러한 사상을 품고는 설교할 때는 은혜스럽게 한다는 것이 도대체 무슨 소리인가?
더구나 그 교수의 말이 기가 막혔다.
"우리 학교에 학생들이 들어오면 저런 식의 질문들을 많이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기도원이나 가지 왜 학교에 들어왔니? 학교는 학문하는 곳이야.'"
그리고 그는 덧붙이기를 자기 대학에 대부분의 교수가 자기와 같은 사상이며 한신대와 광나루에 있는 장신대 등 상당수의 신학교의 교수들이 자기와 비슷한 사상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마치 내가 아직도 시대착오적인 미신적 신앙을 가진 사람인 것처럼 내몰았다.
나는 다시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교수님은 예수님께서 삼위일체 하나님이심을 믿습니까?'
그랬더니 그 교수가 말하기를
'내가 왜 그 질문에 대답해야 합니까?'
라고 하며 자기 자리로 돌아가 버렸다.
왜 예수님께서 삼위일체 하나님이심을 시인하는데 그렇게 인색한가?
한마디로 그는 삼위일체를 믿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면 이단으로 몰릴 것을 아니까 대답을 회피한 것이다.
그 후에 나는 감신대에 들어간 학생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그런데 그 학생이 하는 말이 자기 대학에 처음 들어가면 보수적인 신앙을 가진 아이들은 굉장한 혼란을 겪는다고 했다. 심지어 지금까지의 신앙관과 너무도 차이가 나서 어떤 학생들은 수업시간에 울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2학년이되고 3학년이 되면 이젠 익숙해지고 심지어 그 사상에 동조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그러한 교수들의 사상에 영향을 받은 어떤 신학교 학생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기 보다는 '전태일(청계천 피복 노조 활동하다가 분신자살한 사람)의 이름으로' 기도하기도 한다는 소리도 들었다.
그 후에 감신대에서는 일대 교수 제명 파동이 일었다. 종교 다원론(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는 사상)을 주장하는 변 모 학장을 비롯한 몇몇 교수가 한국 감리교단의 압력으로 제명되었다.
불교에도, 마호멭 교에도 구원이 있다고 주장하니,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께서 얼마나 통탄하실 일인가! 그런 사람이 신학교 학장으로 있었다는 것이 놀라울 뿐이다.
아무튼 그들이 제명된 것은 참으로 한국 교회의 보수신앙을 지키기 위해서는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생각되면서도 위에 언급한 박모교수는 아직도 그 학교에서 건재한 것을 보면 아마 그 학교의 신학 사상이 바뀔 것을 기대하기란 어려울 것 같다.
이화여대의 어떤 신학교수가 요나의 이야기가 이솝우화와 같은 종류의 이야기라고 주장한다는 것도 전해들었다. 그것은 연세대 신학과에서도 마찬가지다.
이것은 단순히 지나칠 사건이 아니다. 성경의 오류성을 주장함으로 기독교의 근본뿌리를 흔들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진보라는 이름 하에 벌어지고 있는 사탄의 전략이다. 소위 진보 신학은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합리주의 시대에 기독교를 보호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신학인데 결과적으로는 기독교에 가장 큰 해악을 끼치는 것이 되었다. 진보신학이 휩쓸고 간 유럽을 보라! 예배당마다 텅 비어 있지 않은가!
그리고 미국의 신학교를 보라!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앙고백을 부끄러워하게 만들고 예수님의 부활을 미신으로 생각하게 만드는 신학들이 이미 대부분의 신학교를 점거하고 있지 않은가! 헌신하는 마음으로 신학교에 들어간 사람이 신앙을 다 버리고 하나님을 떠나게 되도록 하는 일을 신학교에서 했다면 믿을 사람이 있을까? 그런데 그것이 현실로 일어나고 있다. 나는 독자들이 우리 시대의 위대한 신학자인 프란시스 쉐퍼의 '위기에 처한 복음주의'(생명말씀사 刊라)라는 책을 한번 읽어볼 것을 권하고 싶다.
프란시스 쉐퍼는 그 책에서 오늘날의 진보와 보수를 이것으로 가르자고 했다. 강력한 성경관!
다시 말하면 성경을 오류가 없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는가 아닌가로 가르자고 제시했다.
나는 그러한 구분이 매우 현명하고 핵심을 파악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옛날에는 성경이나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교회를 떠났다. 그러나 요즈음에는 성경이나 예수님 의 신성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교수나 목사 자리에 앉아 있다. 불쌍한 사람들은 그 밑에서 배우는 사람들이다.
성경에 사도 바울은 일찍이 이것을 경고했다.
살후 2:1-3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는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하심과 우리가 그 앞에 모임에 관하여 혹 영으로나 혹 말로나 혹 우리에게서 받았다 하는 편지로나 주의 날이 이르렀다고 쉬 동심하거나 두려워하거나 하지 아니할 그것이라
누가 아무렇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하지 말라 먼저 배도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이르지 아니하리니 저는 대적하는 자라 범사에 일컫는 하나님이나 숭배함을 받는 자 위에 뛰어나 자존하여 하나님 성전에 앉아 자기를 보여 하나님이라 하느니라
그렇다! 말세의 참된 징조는 두 가지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는 '배도'다.
주님이 오시기 전에 우리는 세계적인 배도를 목격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이젠 그것이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배도는 초대교회 이래로 계속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처럼 신학교 같은 기독교 집단 핵심부에서 이론적으로 배도의 기초를 놓아준 적은 없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가장 강력하게 주장해야 할 신학교에서 오히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오류투성이의 책 임을 증명하려고 애쓴다는 사실이 바로 배도의 시작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말세를 잘 살아가려면 어떤 사람이 유명한 사람이라고 무조건 따르지 말고, 과연 그 말이 사실인가를 성경을 통해서 확인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싶다. 정말 꼭 그래야 한다. 우리 목사님이, 우리 박사님이 말씀하셨다고 무조건 따르다가는 함께 멸망당할 수 있다.
나는 내게 배우는 학생들에게 뚜렷한 성경관을 가지며 아무 말이나 믿지 말고 항상 성경으로 확인하려고 하는 태도를 가지라고 강조한다. 그런 태도를 길러주는 것이 말세를 맞이한 양들이 끝까지 주님을 배반하지 않고 따를 수 있도록 하는 최선의 방법이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양심에도 걸리지 않는다. 무조건 내 말만 믿고 따르라고 하는 목자는 비양심적인 목자라고 생각한다. 그가 그런 말을 할 수 있으려면 두 가지가 전제되어야 한다. 자신은 오류가 없다는 것과 평생 그 사람을 보살필 수 있다는 것이 전제되어야 한다.
우리는 21세기에 더욱 거세게 불어닥칠 배도의 신학을 주의해야 한다. 그것은 한국 교회를 유럽처럼 텅 비게 만들 것이다. 지금까지 한국은 보수적인 목사들이 교회를 지켰다. 이것은 하나님께 감사드릴 일이다. 그러나 이젠 그들은 늙어서 물러나고 신세대들이 영적 지도자로서 교회에 들어오고 있다. 호랑이의 발톱을 숨기고 위의 교수처럼 '은혜스럽게 ' 설교하지만 진짜 사상은 신학교에서 배운 것으로 무장되어있는지도 모른다. 오늘날의 교인들은 비복음 적이라고 하더라도 재미있고 교훈적이면 은혜 받았다고 생각하고 있으므로 그런 사람들도 제법 많은 사람을 끌어 모을 수도 있다.
우리는 강력한 성경관을 가지고 스스로 진리에서 이탈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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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된 목회관이 고쳐져야 한다]
예를 들어보자. 예배당 건물이 커야 사람들이 많이 모인다고 해서 큰 빚을 얻어 커다란 예배당을 지었다. 의자가 없으면 사람들이 불편해한다고 해서 의자를 샀다. 예배가 길면 사람들이 오지 않는다고 해서 예배를 1시간으로 줄였다. 손뼉치고 춤추면 사이비 교회로 오해할 수 있다니까 조용히 예배를 드린다. 물질적 축복을 강조해야 사람들이 많이 모인다고 해서 '복! 복!'을 떠들어대어 기복신앙을 심어준다.
.... 여기까지 읽으면서 어떤 문제가 있다고 느끼는가?
이것은 목회철학의 문제다. 목회철학이 '오직 사람을 많이 모으는 것'이 성공적인 목회라고 할 때 그런 타협적 행태가 나오게 된다.
진정한 목회는 단순히 사람을 많이 모으는 것이 아니다. 그 사람들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 교회는 지나치게 사람들의 숫자에 집착한다. 그 결과로 숫자를 얻은 대신 내용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교회는 가벼운 마음으로 다닐 수 있는 곳이 되었으며 어떤 희생도 대가도 지불하지 않으려는 사람들로 붐비게 되었다.
성경에 보면 제자들은 얼마나 당당했는가? 왕 앞에서도 그들은 당당했고 부자들에게도 아무런 아쉬움을 나타내지 않았다. 그들은 아무 사람이나 교회에 나와달라고 애원하지 않았다. 오히려 잘못된 사람을 교회에서 쫓아낼 수도 있었다. 만일 교회가 그러한 당당함을 가지고 있었다면 오늘날 교회 장로라는 사람이 각종 비리에 연루되어서 감옥에 가는 비극이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오늘날 큰 교회들은 교인 수에 대해 허수(虛數)를 가지고 있다. 출석인원이 삼천 명 정도밖에 되지 않아도 대외적으로는 만 명이라고 대답한다. 그들은 재적인원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교인수가 많아야 노회에서 인정받고 같은 목회자 중에서도 높임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큰 교회는 무조건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 성령의 역사로 크게 부흥한 교회들도 있다. 그리고 큰 교회는 작은 교회가 할 수 없는 큰 사업을 효과적으로 진행시킬 수도 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앞 뒤 안 가리고 무조건 사람들만 모으려고 하나님보다는 사람들의 기호에만 관심을 가진 목회철학을 경계하자는 것이다.
목회 철학은 사람을 모으는 것만이 아니라 올바른 교회를 만들어 가는 것이어야 한다. 사람은 하나님께서 더하게 하실 것이다.
행 2:46-47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행 16:4-5
여러 성으로 다녀 갈 때에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의 작정한 규례를 저희에게 주어 지키게 하니 이에 여러 교회가 믿음이 더 굳어지고 수가 날마다 더하니라
오직 하나님만을 두려워하는 교회, 숫자가 줄어드는 한이 있어도 원칙을 버리지 않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평신도 교회는 그런 교회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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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바른 부흥관을 가져야 한다]
한국교회 대부분이 총동원주일을 하면서 한꺼번에 수 백 명, 수 천 명, 수 만 명씩 끌어 모은다. 매년 크게 부흥하는 교회들이 생긴다. 이론적으로 한다면 우리 나라는 전체적으로 기독교인들이 많이 증가해야 한다. 그런데 이것이 웬일인가? 전체적으로 한국에서 기독교인구가 감소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상당수의 교회의 성장이 새로운 신자가 생긴 것이 아니라 기존의 신자들이 이동한 것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한국교회는 위기다. 서로가 불꽃튀기는 교인쟁탈전을 벌이고 있는 셈이니까!
이것은 부흥이라고 말할 수 없다. 우리는 부흥의 정의를 기존 신자들의 각성과 비신자들의 회심으로 봐야한다. 그것이 없는 수적 인 증가는 음식점에 손님이 붐비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 교회에 설교가 다른 교회의 설교보다 더 재미있고 편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더 모인 것이다.
[무릎으로 사는 그리스도인]의 저자가 쓴 '능력충만한 그리스도인'에서 저자는 이런 말을 하고 있다.
복음 전도자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던 것은 내 특권이었다. 그러나 고(故) 윌버 채프먼 박사처럼 내게 그렇게 많은 감명을 준 사람은 없었다. 죄인들을 설득하는 그의 명쾌한 방식과 눈에 깃든 사랑과 입에서 나오는 은혜로운 말들은 그의 말을 기쁘게 들었던 사람들이라면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그가 항상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어느 부자 교회에서 '가장 성공적인'사역을 하던 중에 그의 삶에 위기가 어떻게 닥쳤는가를 허심 탄회하게 이야기했다.
윌버 채르먼박사가 부자교회에서 한참 성공적인 사역을 하던 중 무디가 그를 방문했다. 무디는 집회를 인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의 설교를 들으러 온 것이었다. 엄청난 회중! 놀라운 설교! 아낌없는 헌물! 굉장한 열광! 윌버 채프먼이 그 모든 것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했던 것은 조금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무디는 매우 조용하게 있었고 전혀 감명을 받은 것 같지가 않았다.
절정의 날 마지막 시간에, 하나님의 사랑하는 그 사람은 윌버 채프만의 어깨에 손을 가볍게 얹고 말했다.
"당신이 이곳에서 실패자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당신은 당신의 사역에서 큰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당신이 하고 있는 일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당신의 설교는 영혼들을 구원하지 못합니다. 당신에게 이 말을 하는 것은 형제의 정 때문입니다."
정이라고? 그러나 진리는 어떻게 되었는가? 어느 교회가 그의 교회와 맞서거나 겨룰 수 있었는가? 모두가 훌륭하게 성공한 사람이라고 갈채를 보내지 않았던가? 무디의 책망은 채프먼에게 깊은 상처를 주었다. 그는 몇 날 며칠을 그것 때문에 괴로워했다. 그러나 그의 마음 속으로 그는 지난 5년 동안 그가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비전을 갖고 있었으며 그것은 성령으로 충만해지기만 하면 이루어질 수 있다는 생각을 한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는 하지만, 그는 이미 성공한 사람이 아니었던가? 무디가 와서 용기를 가지고 다른 사람들이 '성공'이라고 하는 것을 지적하며 낮은 소리로 "이 곳에서는 실패했습니다! 당신의 일은 중요하지 않습니다."하고 말할 때까지, 그는 그 5년동안 하나님과 싸우고 있었다.
실패라고? 그랬다. 실패했다. 뛰어난 웅변으로 윌버 채프먼은 사방에서, 대개는 다른 교회에서 훌륭한 회중들을 끌어 모았다. 그러나 그들은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았고 그의 교인들마저 하나님께 철저하게 굴복하지 않았고 전심으로 헌신하지 않았다. 실패했다!
마침내 그렇게 유명하게 '성공한'목사는 하나님 앞에서 무너졌고 자기의 야망과 교만을 시인했다. 그렇다. 그의 실패였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그가 개인의 안락을 사랑하고 하나님보다 가정을 더욱 사랑하고 있음을 가르쳐 주셨다. 마침내 그는 하나님께 그의 뜻을 굴복했다.
진정한 부흥에는 불신자들이 회개하고 주님께로 돌아오며 기존 신자들 간에 회개의 각성들이 있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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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에 구체적으로 기여해야 한다]
오늘날 전도하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종교에 귀의하려는 사람들이 개신교와 카톨릭 중 어떤 것에 더 매력을 느끼고 있을까? 정확한 통계를 내보지 않았지만 내가 직장 내에서 체감적으로 느끼는 것은 '카톨릭'이다. 사람들이 개신교보다 카톨릭에 더 매력을 느낀다. 카톨릭은 독신으로 사는 신부들의 청빈한 삶과 종교의 엄숙함과 헌금을 전혀 강조하지 않는 것과 사회에 여러 봉사 활동을 하고 있는 것에 비해 개신교는 극성맞고 말만 많으며 행동이 따르지 않는 수다장이들로 여겨지고 있다. 심지어 어떤 목사의 설교에서 대학생들의 설문 조사 결과 수년 전에는 호감가는 종교로 기독교가 단연 앞섰지만 최근의 대학생들의 설문 조사에서는 호감가는 종교로 불교가 기독교를 앞섰다는 소식을 들었다. 도대체 어찌된 일인가?
교회가 사람들에게 매력을 상실해가는 이유가 많이 있겠지만 그 중에 하나는 사회에 기여도가 너무 작다는 것이다.
내가 알고 있는 어떤 교회는 엄청난 헌금으로 예배당을 세우더니 그 다음에는 묘지를 사고, 그 다음에는 현대식 교육관 빌딩을 건축하고, 그 다음에는 미션 스쿨을 사고, 거대한 수양관을 만들고, 이제는 예배당 근처의 집들을 수 십억 들여 사들여서 터를 넓히는 작업을 하고 있다.
언뜻 보기에는 다 좋은 사업을 하고 있는 듯하다. 그것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헌금 사용의 우선순위를 상실한 것 같은 느낌을 버릴 수 없다. 도대체 비그리스도인들이 보았을 때 무엇을 느끼겠는가?
오늘날 사회가 간절히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가? 치매환자들을 위한 시설도 필요하고, 고아나 노인들을 위한 시설도 필요하다. 그것은 참으로 많은 돈이 필요한 사업들이다. 그러나 한국 교회는 그들을 돌아볼 여력이 없다. 너무도 자체 소비가 크기 때문이다.
헌금은 법대로 걷고 쓰기는 멋대로 쓰는 행위는 분명 헌금 안 내는 죄보다 훨씬 큰 범죄다.
교인들이 바친 헌금을 이용해서 겉으로는 선교라는 명목으로 학교 세우고 병원 세우지만 내면적으로는 재벌이 학교나 병원 세우는 목적과 별 다를 바가 없고, 게다가 목회자가 이사장이 되어 사람들 위에 군림하고 자기 맘에 드는 사람을 교사나 의사로 세우고, 수 많은 사람들의 굽신거림을 받아가며 지배하고, 강단에서는 십일조를 안 바치는 것은 무서운 죄악인양 설교하면서 자신이 그런 헌금을 자기 탐욕대로 쓰는 데 대해서는 아무런 죄책감도 안느끼는 자는 더 이상 목회자의 자격이 없다. 생각해보라. 고급 승용차와 호화 아파트에 사는 목회자가 사글세 사는 사람에게 '십일조 안 바치는 무서운 죄'에 대해 설교해서 다 바치게 하면서 자신은 그러한 헌금을 정말 하나님의 뜻인가 물어보지 않고 인심쓰듯이 함부로 사용하는 자가 과연 양을 사랑하는 참다운 목자라고 할 수 있겠는가?
지금까지 한국교회는 그런 식으로 잘도 버텨왔지만 이제는 계속 그런 식으로 나가다가는 몰락한다. 성경에서 감독을 뽑을 때 이런 기준이 적혀있다.
딤전 3:7 외인에게서도 선한 증거를 얻은 자라야 할지니...
여기서 외인이란 교회 밖의 사람 즉 비그리스도인이다. 교회에서는 성가대나 교인들에게 척척 한턱 내고 헌금도 잘 바치지만 막상 직장에서는 직원들에게 저임금에다 그나마 제 때에 주지도 않는 노랑이는 더 이상 교회의 장로가 되면 안된다.
비그리스도인들에게도 선한 증거를 얻은 사람이 감독의 자격이 있다면 오늘날 교회도 마찬가지가 적용될 수 있다.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 칭송 받을 일을 해야 한다. 사도행전 시절에 교회는 외인들에게 칭송을 받았다.
행 5: 12-13 사도들의 손으로 민간에 표적과 기사가 많이 되매 믿는 사람이 다 마음을 같이하여 솔로몬 행각에 모이고 그 나머지는 감히 그들과 상종하는 사람이 없으나 백성이 칭송하더라
교회가 사람들에게 칭송을 받은 이유가 무엇인가? 표적과 기사가 많이 행해져서 많은 병자가 고침을 받았다. 그들이 기독교인을 비난할 이유가 없었다!
오늘날의 한국 교회도 사회를 위해서 무언가를 해야 한다. 그것이 간접 선교다. 우선 순위를 따라 헌금을 사용하라. 교인들의 복지 시설 투자를 조금 뒤로 미루라. 날마다 비신자들이 회심하는 역사가 일어나야 살아있는 교회다.
예수님의 이름조차도 잘 몰랐던 시절의 '예수 천당!'의 선교방식이 효과가 있었다고 해서 오늘날에도 그러한 방법으로만 선교를 몰고 가려고 한다면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는 주님의 말씀에 지혜는 비둘기 같고 순결은 뱀처럼 함으로 따라가는 어리석은 종이 될 것이다.
한 교회가 벅차면 여러 교회가 힘을 합쳐서 사업을 일구어 낼 수 있다. 도대체 교파란 것이 다른 교파 흠집이나 내고 남의 교파의 비난으로부터 방어하는 역할만 한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힘을 합쳐서 사회에 무언가 기여하자. 외인으로부터 교회가 칭찬을 받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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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을 마치면서
내가 우려하는 것은 이러한 나의 글이 마치 기성교회를 비난하는 것처럼 비쳐지는 것이다. 만일 독자 중에 나의 글을 읽고 기성교회를 비난하는 마음으로 가득 차게 된다면 형제는 오해한 것이다. 나의 글 중에 일부 기성교회를 비판하는 부분이 있으나 그것은 기성교회 전부의 모습이 아니다. 실제로 훌륭한 기성교회도 여럿 있고 헌신적인 목자들도 상당수 있다. 그러한 교회들이 있기 때문에 한국 교회는 쇠퇴기라고 말하기에는 아직 이르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거듭 말하거니와 평신도 교회는 기성교회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또 하나의 다른 모델로 제시되는 것이며 오히려 더욱 더 사도행전적인 교회를 이루어 보자는 것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은 시작한지 약 9개월이 지났다. 여러 시행 착오를 겪으면서 우리는 착실히 모이고 있고 지금은 50명 가량 된다. 우리는 한 시간 반에서 두 시간 정도 예배를 드린다.
개척 초기에 어떤 형제는 예배가 너무 길면 다른 사람들이 오기를 꺼려한다고 짧게 드리는 것이 어떠냐고 건의하기도 했다. 그러나 예배는 오직 주님을 위한 것이다. 사람들의 기호를 위해 적당히 짜르고 싶은 마음은 없다. 현재 우리 교회 형제들은 예배 시간이 길다고 느끼는 사람은 거의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사람은 금방 적응(?)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임재와 성령 충만한 예배이기 때문이기도 하다고 확신한다.
나는 평신도 교회에 대해 예배당도 없고 목사도 없으니 '이단'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가끔 만난다. 그러나 그들 중에 적어도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고 있는 사람들은 성경을 통해서 이러한 교회에 대해 설명하면 마침내 이해를 하고 오히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그러나 정말 대화가 통하지 않는 사람은 성경보다는 자기 상식을 더 믿는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은 예배당이 교회가 아니라고 설득하는 것조차 힘이 든다. 내가 성경을 들이밀어도 그들은 아예 보려고 조차 하지 않기 때문이다. 교인들이 영적 분별력을 상실하고 고집만 세진 것은 그들을 그런 식으로 키운 목회자의 책임도 있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평신도 교회 형제들만큼은 보다 겸손하고 열린 마음으로 다른 교회를 받아들일 것이다.
내가 이 길을 처음 걷는 사람이 아니다. 수년 전에 충남대 교수인 이원돈 형제가 대전에서 평신도 교회를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마침 나를 강사로 초청해서 내려가서 말씀을 전한 일이 있었다. 한 50여명이 근처 레스토랑을 빌려서 모임을 갖는데 매우 따뜻하고 친절해서 인상적이었다. 그것은 나에게 큰 도전과 자극이 되었다. 내가 이런 교회를 시작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진 것은 그러한 교회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원돈 형제는 이미 미국에 유학 가 있는 동안 이러한 형태의 교회를 다녔고 그것에 익숙해져 있던 터라 한국에 와서 별 어려움 없이 이러한 교회를 개척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한국 교회 교인들에게는 매우 어려운 개념이었다.
얼마 전에는 인천에서 평신도 교회를 하고 있는 소아과 병원 의사인 조광신 형제를 만난 적이 있었다. 조그만 빌딩의 맨 윗층을 예배당으로 만들어 모임을 가지고 있었다. 비록 적은 무리지만 그들의 열정이 예배당의 광고판이나 도구 하나 하나에 배어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이번 여름에는 평신도 교회들이 10 교회나 모여서 연합 수련회를 가졌다. 수 백 명이 되는 형제들 한 명 한 명이 귀중한 하나님의 종들이었다.
이러한 형제들과 만나서 교제한다는 것은 매우 즐겁고 유익한 일이다. 내가 알기로는 이러한 평신도 모임이 서울에서만 여러 개가 된다고 한다. 그리고 미국이나 남미, 호주 같은 곳에는 이미 수 백, 수 천 개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내가 이 길을 걷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21세기에 무언가 전 교회 적으로 어떤 일을 이루려하신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제는 한국 교회가 평신도 교회를 받아들인 만큼 성숙했다는 생각도 들기 때문이었다.
나는 이러한 형태의 교회가 앞으로 있을 배도의 시대를 대비하며, 하나님 나라에 사람들을 더욱 많이 인도하는데 유익이 되리라 믿는다.
그리고 직장과 가정과 주변의 사람들과 함께 두려움 없이 교회를 세울 수 있도록 하는 촉매 역할이 되게 될 줄로 믿는다.
평신도교회는 이제 겨우 시작 단계다. 그리고 아직 소수다. 앞으로도 기성교회에 비해 소수일지 모르겠다. 그러나 지금보다는 분명히 늘어날 것이다. 우리의 유익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확장과 유익을 위해 시작하는 것이니 만큼 부디 기성교회 사역자님들은 아량을 베풀고 기도해 주기 바란다.
바울의 말로 이 글을 끝내고 싶다.
빌 1:18
그러면 무엇이뇨 외모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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