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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성장론-21세기와 영성 목회

by 【고동엽】 2022. 2. 23.

21세기와 영성 목회

 

다가오는 21세기는 분명코 우리가 예상하는 것보다 더욱 급변된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올 것이며, 우리가 지금 기대하는 것처럼 그렇게 소망적인 모습은 아닐 것이라 생각된다. '예상하는 것보다 더욱 급변된 모습'이란 지금 변화속도로 생각해본다면, 다가오는 21세기는 우리가 지금 예상하고 있는 21세기의 모습보다 더 혁신적으로 변화되어 있을 것이라는 말이다. 지금 우리가 예상하는 21세기는 단지 지금의 관점으로 본 예상치일 뿐이다. 오늘날 우리는 10년 전에는 전혀 상상도 못했던 일들을 현실 속에서 경험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처럼, 아마도 다가오는 21세기에는 지금으로서는 우리가 전혀 상상도 못하는 일들을 맞이하게 될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우리가 '기대하는 것처럼 소망스럽지 못한 모습'이란, '다가올 미래를 어떻게 보느냐?'는 관점에 따라 다를 수 있지만, 자원의 문제나 기술상의 문제를 떠나서, 인간성 본질의 측면에서 지금보다 더욱 나빠지면 나빠졌지 좋아질 것이라는 희망은 솔직히 없다. 그야말로 다가오는 미래는 유토피아(Utopia)의 세계가 열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디스토피아(Distopia)가 될 가능성이 더 크다는 것이다.

 

 

다가오는 21세기

 

아이러니컬하게도, 미래는 세계화를 지향하고 지구촌을 말하면서도 세계는 지금 동시에 지방화를 말한다. 일치와 협력을 이야기하면서도, 실상은 점점 더 민족간, 종족과 인종간, 지역간의 분열과 분쟁은 더욱 심해져 가고 있다. 정보화 시대를 말하면서도 실상은 가장 내게 필요한 정보를 찾아내기가 더욱 어려워져 가고 있고, 그런 정보에 대하여 철저히 소수들에 의해 통제되는 사회가 되어져 가고 있다. 홍수 때에 마실 물이 없는 것처럼, 실상은 정보의 홍수 속에서 필요한 정보, 좋은 정보 보다는 악정보, 거짓 정보, 해로운 정보들이 범람하고 꼭 내게 필요한 정보를 찾는다는 것은 더욱 어려워지게 되었다. 컴퓨터 통신으로 온 세계가 우리의 안방으로 들어오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사람들은 더욱 고독해져 가고 있다. 군중 속의 고독을 느끼는 감정은 더욱 심해 질 것이다.

 

이런 세계 속에서 예상할 수 있는 몇 가지가 있다. 인간 내면 속에 숨겨진 인간성은 결코 바뀌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인간의 본질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 그의 행동양태나 사고방식은 어느 정도 바뀔지 모르지만, 본질적으로 사랑을 주고 받으며 살아야 행복해지는 것, 고독과 사랑에 대한 본질적 반응, 함께 더불어 살아가도록 지어진 사회적 존재, 등등 .

 

켬퓨터 인간은 결코 정상적인 인간은 아니다. 정상적인 인간은 결코 사이버 월드에서 만족할 수 없을 것이다. 가끔씩 미래 영화에 나오는 반란과 같은 일처럼인간은 그렇게 단순한 존재가 아니다. 몇 개의 룰과 원리로 통제되는 것도 아니다. 어느 정도 유행에 따라 사람들은 이리저리 몰려다닐 수는 있을지라도, 인간의 사랑은 컴퓨터가 대체할 수 없고, 몇몇 인간군들에 의해서 그런 현상이 나타날지라도 그것은 비극적인 변태일 뿐 진정한 기쁨과 희열과 행복감은 결코 맛볼 수 없게 될 것이다.

 

 

뉴에이지는 왜 등장하는가?

 

뉴에이지는 왜 등장하는가? '이쪽 세계(現世)'에 대해 강조하는 현대물결에 대한 반동으로 '저쪽 세계(來世)'를 열망하는 표현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현대문명은 극단적으로 물질적이면서도 실상은 극단적으로 영적인 것을 동시에 열망하고 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교회가 영적 필요를 채워 주지 못할 때, 사람들은 대체물을 찾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뉴에이지인 것이다.

 

21세기에, 인간은 더욱 고독해진다. 더욱 영적 갈증을 느낀다. 더욱 사람과 사람 사이의 사랑을 찾고 갈구하며, 진정한 교제와 만남에 목마를 것이다. 대안은 무엇인가? 영성훈련을 통해 그 영적 필요를 채워주는 것뿐이다. , 고대사회로부터 지금까지 한결같은 모습으로 우리 가운데 다가오신 영광의 주님을 소개하고, 우리들의 구체적인 삶 속에서 그 영성을 보여 주며, 그들을 향한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다.

 

 

전문성을 회복하자

 

전문성을 찾아야 한다. 이것저것 잡것에 매여서는 안된다. 폴 틸리히의 신학은 철학적 물음과 신학적 대답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는 미래사회에 대하여 미래학적 물음과 분석에 의지한다. 그러나, 그 대안까지도 미래학에서 받아내려는 것은 무리다. 질문은 미래학에서 그러나, 대답은 신학과 말씀에서 찾아야 한다.

 

오늘날 목회자들은 전문성을 상실했다. 설교는 미학과 커뮤니케이션 이론에, 목회행정은 행정학과 경영학에서, 성경해석은 일반 의미론과 해석학과 비평학 이론에서, 상담은 일반 상담학과 정신과 이론에서 찾아 왔다. 통전적 목회가 조각조각, 모든 세상 이론들로 나뉘어 한 목소리를 찾아낼 수 없게 되었다. 목회자들은 이것저것 조금씩 알지, 전문적으로 깊이 이해하지 못한다. '선무당 사람잡는다'는 말이 있다. 오늘날 목회자는 선무당이다.

 

유진 피터슨은 말했다. "오늘날 목회자는 구멍가게 주인처럼 포장지만 그렇 듯하게, 가게 앞에 진열해 놓고 있다. 목회의 마인드가 편의점 사장의 마인드와 같게 되었다. 어떻게 하면 저 아랫집으로 가는 손님들을 우리 가게로 끌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더 물건을 쉽게 찾아서 빨리 팔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손님으로 하여금 물건을 사게 만들까? 이것이 현대 목회의 위기이다."

 

피터슨은 이런 목회를 으로 목회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선으로 목회하는 것이란 무엇인가? 눈에 보이는 것들에만 관심을 가지는 목회, 설교, 교육, 선교, 상담, 프로그램 등은 모두다 으로 목회하는 것이다. 반면에 이 아니라 으로 목회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기도, 말씀, 영적 인도 이 세 가지이다. 三角形을 만들기 위해서 우리는 세 개의 線分이 필요하지만, 정작 그 세 개의 線分三角形을 이루기 위해서는 세 개의 이 만들어지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어찌 보면, 은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 그러나, 만일 이 존재하지 않으면 이 아무리 굵어도, 아무리 길어도 三角形은 만들 수 없다.

 

오늘날 너나 할 것 없이 눈에 보이는 것들만을 잘해도 금방 존경받는 사람이 될 수 있다. 어느 누구도 자기 교회의 목회자가 기도를 하는지, 내면적으로 하나님과 늘 만나는 경건을 유지하는지 않는지, 영적으로 교회 공동체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알아가기를 열망하는지 않는지를 모른다. 그저 설교만 잘하고, 프로그램만 잘 운용하면 좋은 목회자라고 존경받을 수 있다. 그러나, 진정한 목회자란 누구인가?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사람이다.(Giving his attention to God. Giving God's guidence in His people.)

 

이제는 전문성을 되찾아야 한다. 목회자의 전문성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이다. 靈性이다. 다시 기도를 시작해야 한다. 다시 하나님 앞에 대면해야 한다. 그 분만이 우리의 전문이다. 전문가는 다른 전문가들의 이야기를 참고는 한다. 하지만, 자기 전문 과목을 절대 양보할 수는 없는 사람들이다. 전문성을 회복해야 한다. 무엇을 할 것인가? 외과의사가 내과의사들의 의견을 듣기 위해서, 자기 외과연구를 게을리할 것인가? 다른 전문가들의 의견을 참고하되, 專門的 意見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靈性神學이란 무엇인가? 영성, 즉 영적 생명의 실체를 찾아서, 진실된 참 영성을 유지하도록 연구실험하는 학문이다. 靈的 生命, 靈性이란 무엇인가? 영적 생활이 나타나게 되는 그 본질, 기독교인을 기독교인 되게 하는 그 본질, 자기 정체성(Identity), 그것을 靈性이라고 한다. 牧會者牧會者되게 하는 그 本質, 그것을 牧會者靈性이라고 말할 수 있다.

 

헨리 뉴엔은 이렇게 말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왜 그렇게도 쉽게 세상의 물결에 휩쓸리는가? 그것은 그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이 말은 '영성'을 상실했다는 것이다. 알맹이가 빠졌다 그 말이다. 정말 중요한 것은 다 사라지고, 별로 중요치 않은 것들이 대체되었다는 것이다. 主人이 되고, 主人은 자신의 자리를 잃어버렸다.(主客前途되었다.) 그 잃어버린 영성의 회복을 위해서, 참된 기독교 영성이 무엇인가, 어떻게 해야 영성을 회복할 수 있는지 그 해결책을찾아가는 노력을 가리켜서 '영성신학'이라 한다.

 

 

훈련 그 긴급한 요청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딤전 4:7)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한마디로 훈련생이 된다는 뜻이다. 영어로 '제자'란 말이 'disciple'인데, 이것은 '훈련', '연단'을 뜻하는 'discipline'이란 말에서 온 단어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예수 믿고 따라가는 삶은 그냥 건들건들 시간나는 대로 따라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훈련)하라"

 

여기서 '연습하라'는 말은 헬라어로 ՃՕՌՍՁՆՙ(귐나조)인데, (이 단어의 본래 뜻은 '벌거벗음'이다. 그리스로마시대 운동은 벌거벗은 몸으로 했다.) Gymnasium(짐내지움;체육관)이란 말의 어원이다. 이 말은 단순한 연습 즉, 하다 안되면 다시 할 수도 있는 그런 연습이 아니라,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기 위해 체계적이고 엄한 계획 아래 훈련하고 연단하는 것을 의미하는 단어이다. 이 단어를 쓸 당시의 소아시아 지역의 운동경기의 분위기는 체육관에서 훈련하다가 목숨을 잃는 사람이 많이 있었다는 것으로 보아서, 당시의 체육훈련은 오늘날 태능선수촌의 훈련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엄청나게 힘든 일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래서, 위 본문은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고 번역해서는 안된다. "경건에 이르도록 훈련하라"고 번역해야 한다. 표준 새번역은 "늘 자신을 훈련하십시요"라 했다. 공동번역은 "자신을 위해 훈련을 쌓으십시요"라고 했다. ԉ

 

사도 바울은 고백했다.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지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노라 하노라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여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고전 9:24-27) 새번역은 "이와같이 여러분은 달려야 합니다" 현대인의 성경은 "힘껏 달리십시오" 공동번역은 "힘껏 달려서 상을 받도록 하십시요"라고 옮겼다.

 

젊은 시절에 훈련소 입구에 서 있던 입간판에서 다음과 같은 글을 보았다. "훈련소에서 땀을 적게 흘리는 사람은 전쟁터에서 피를 많이 흘린다." 어디든지 요령 피우는 사람들이 많다. 적당히 시간만 때우는 사람, 후회할 날이 올 것이다. 땀 흘리기를 싫어한 사람, 언젠가는 그 대가를 톡톡히 치루고, 피눈물을 흘리게 될 것이다. 적당히 하는 것은 미래를 담보로 잡고 오늘을 낭비하는 어리석은 일이다.

 

'아는 것''실제로 하는 것'과는 완전히 차이가 있다. 기도할 줄 아는 것과 기도하는 것은 다르다. 구제할 줄 아는 것과 구제하는 것, 찬송할 줄 아는 것과 찬송하는 것, 예배드릴 줄 아는 것과 예배드리는 것은 전혀 다르다. 농구 선수가 골을 넣을 줄 몰라서 하루에도 수천 번씩 골대에 골을 넣는 훈련을 하는 것이 아니다. 야구선수 이만수 집사가 배팅할 줄 몰라서 하루에도 수만 번씩 폐 타이어를 두들겨 대는 것이 아니다. 그 신들린 장한나가 바이올린을 켤 줄 몰라서 세계적인 스타가 된 지금도 하루에도 십수 시간씩 계속해서 바이올린을 켜고 있는 것이 아니다. 피아니스트들이 피아노 칠 줄 몰라서 하루에 7-8시간씩 연습하는 것이 아니다.

 

다 훈련이다. 연습하지 않으면, 내 마음은 할 것 같지만, 내 몸이 말을 듣지 않기 때문이다. 계속해서 내 몸에 공을 때리는 훈련을 통해서 내 몸을 제어하지 않으면, 분명히 공은 저기 오지만 방망이는 엉뚱한 곳으로 나가는 것이다. 무의식중에도 어떤 공이라도 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야구 선수는 자기 몸에 훈련을 가하는 것이다. 어떤 음악가는 이런 말을 했다. "연습을 하루 쉬면 내가 알고, 연습을 이틀 쉬면 실력있는 사람들이 알고, 사을 쉬면 모든 청중이 안다."

 

위치만 니의 정상적인 그리스도의 사역자라는 책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예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 기도하러 올라가실 때에, 열두 제자 중에 믿을 만한 제자인 베드로, 야고보, 요한만 이 세 명만 데리고 올라가셨다. 그때, 주님은 그들에게 간곡히 부탁하셨다. "내가 심히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기도하라." 그러나, 한참을 기도하다가 예수님께서 돌아와 보니, 제자들이 다 골아 떨어져 세상 모르고 자고 있었다. 그래서 주님께서 그들을 깨우셨다. "얘들아, 일어나라 일어나.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해라." 그리고는 예수님은 또 다시 저 앞에 조금 떨어져서 땀방울이 피방울이 되기까지 진을 빼는 기도를 하셨다. "아버지여,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그렇게 얼마를 기도하신 후 다시 와서 제자들을 보았다. 그랬더니, 제자들은 또 세상 모르고 골아 떨어졌다. 기가 막힌 예수님께서 다시 제자들을 깨우셨다. 그리고 당부하셨다. "얘들아,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해라. 내가 심히 죽게 되었다." 그리고는 또 다시 돌아가 기도하셨다. 세 번째로 얼마 동안을 그렇게 간절히 기도하시던 주님께서 마침내, 이젠 마지막이라는 것을 직감하시고는 비장한 마음을 가지고 제자들에게 다시 돌아와 보니, 제자들은 이번에도 또 골아 떨어져 있었다. 바로 그때, 주님께서 아주 중요한 말씀을 하셨다. "너희가 잠시 동안도 깨어있을 수 없었더냐?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위치만 니는 다음과 같이 결론을 맺었다. "그렇다. 마음만 원해서는 안된다. 원하는 몸이 있어야 한다. 아무리 기도하기를 원해도 기도할 수 없는 몸을 가진 사람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시험에 들 수밖에 없다. 믿는 우리들은 예수께서 깨어 있으라 하실 때, 그 언제든지 깨어 있을 수 있는 연단된 몸이 필요한 것이다."

 

그렇다. 마음만 원해서는 참된 신앙생활을 할 수가 없다. 마음을 뒷받침할 수 있는 훈련된 몸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주님께서 깨어 있기를 원하실 때, 밤새라도 깨어 있을 수 있는 훈련된 몸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주님께서 금식하라 하실 때, 며칠이라도 금식할 수 있는 훈련된 몸을 가져야 한다. 언제까지 "육신이 약해서 할 수 없습니다"라는 핑계를 댈 것인가?

 

바로 여기에, 훈련의 필요성이 있다. 기도하는 훈련이 필요하다. 기도할 줄 안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사랑하는 훈련도 필요하다. 가만 있어도 저절로 사랑이 되는 것이 아니다. 혀를 잘 다스리는 훈련, 말을 잘하는 훈련도 필요하다. 순종하는 훈련, 섬기는 훈련, 재물을 지혜롭게 쓰는 훈련, 내 몸을 쳐서 복종시키는 훈련, 이해되지 않는 하나님의 섭리 앞에 나를 복종시키는 훈련, 훈련이 필요하다.

 

오늘날 왜 힘있는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는가? 훈련받지 못해서 그렇다. 군인이 훈련을 못 받으면 엉터리 병사, 말썽꾸러기, 고문관이 된다. 포복하라고 해도 못한다. 수류탄을 던지면, 표적을 향해서 날아가지 않고 엉뚱한 곳으로 날아간다. 총을 쏘라고 했는데 못맞히고 엉뚱한 사람만 상하게 만든다. 구보를 하는데, 4킬로도 못가서 기권하고 만다. 이런 사람은 군인이 아니다. 제 몸도 지키지 못하는 군인이 어떻게 나라를 지키겠는가?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다. 그렇다. 아침마다 산에 오르는 등산은 목숨 얼마를 연장시켜줄지 모른다. 그러나 매일매일의 영적인 훈련은 우리로 영생을 얻게 한다.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위대한 꿈과 일을 이루어가게 하는 능력을 받게 된다. 하루하루를 기도로 시작할 때, 신령한 은혜로 말미암아 하루 온종일이 복된 삶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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