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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목양 단상[1,073]〓/목양 처신 요령

21세기와 한국교회의 바른 목회

by 【고동엽】 2022. 2. 23.

21세기와 한국교회의 바른 목회

 

서 정 운 목 사

 

1. 21세기에 대하여

 

 

21세기가 어떤 세기가 될 것인지, 정확한 예측은 쉽지 않다. 특히 교회사적 예상은 더 어렵다. 20세기가 시작될 때 적지않은 교회 지도자들은 20세기가 기독교의 세기(The Christian Century)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었다. 20세기말 쯤에는 기독교외에는 다른 종교들은 거의 쇠퇴할 것이라는 생각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그들의 예상이 적중하지 못했음을 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우리는 우리(목회자)의 관심이 있는 측면에서 21세기를 생각하며, 다음의 몇가지를 열거하고 싶다.

 

 

1) 지식과 기술의 시대 (인본주의 시대)

 

증기기관이 발명되기까지 인류는 농경사회속에서 살았었다. 증기기관의 발명이 인간생활의 상당한 변화를 일으켰고, 전기의 발명이 더욱 큰 변화를 미쳤는데 컴퓨터의 발명과 발전과 보급을 통해 21세기는 정보화 시대가 된다는 주장이 지배적이다. 정보화시대를 보다 크게 말한다면 지식과 기술의 시대라고도 할 수 있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미국의 부호라면 석유재벌이었다. 그러나 지금, 미국의 10대 재벌안에 석유 재벌은 한 사람도 없다. 세 사람(1,3,6)이 소프트 웨어로 돈을 벌었고 다른 세 사람(4,8,9)은 메디아 관계의 사업가다. 이것은 21세기가 어떤 시대가 될 것인가 하는 것을 예측케 하는 현상일 것이다. 정보, 지식 및 기술의 시대라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인본주의의 시대요, 매우 세속적인 시대라는 뜻도 된다. 그러면서도 역설적으로 영적 기갈과 갈망을 동반하는 시대일 수도 있다.

 

 

2) 위기의 가중

 

핵 문제

 

21세기는 여러 면에서 인류와 지구의 건강과 생존을 더 위협하는 시대가 될 가능성이 높다. 폭발로 인한 사고, 테러용, 의도적 사용 등에 의해 발생되는 핵폭발로 인한 인류와 지구의 멸망의 가능성이 상존한다.

 

자연환경 훼손

 

공업화와 에너지 과용과 남용에 의해 대기권의 화학적 균형파괴로 인한 기후변화와, 빙산이 녹아 해수가 불어나는 문제, 기타 자연훼손으로 인한 재난등이 현실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인구 폭발과 식량문제와 질병

 

매해 3% 정도의 인구 증가가 앞으로도 계속 지속될 전망이다. 이같은 증가가 계속되면 2012년에 100억명이 되고 21세기 말에는 800억명이 될 수 있다. 이같은 인구폭발은 식량문제와 교육, 복지, 범죄와 급속히 감염되는 질병들(AIDS)의 문제와도 연관이 있다.

 

 

유전공학의 문제

 

유전공학의 발달이 여러 가지로 인류복지에 이바지할 수 있으나 동물의 복제는 물론, 인간 복제에까지 이를때에 생기는 혼란과 고통이 심각할 것이다(D. Messer).

 

인간생활양식의 변화 (가족, 사회)

 

결혼관습의 변화, 독신생활의 증가, 동성연애자의 증가와 권익확대등이 전통적인 가정과 사회생활에 변화와 혼란을 초래할 것이다.

 

 

3) 종교의 상대화 현상

 

과학의 발달과 인본주의의 영향으로 종교의 절대화를 부인하고 상대화와 종교간의 대화와 공존의 요청이 보편화될 것이다.

 

 

4) 교회의 위상과 권능의 약화(?)

 

복음의 절대성에 대한 회의와 도전과 함께 교회에 대한 신뢰성과 존경심이 감소할 수 있다. 또한, 교회가 스스로 그같은 권위와 위상을 양보하거나 포기하는 경향도 생길 수 있다.

 

 

5) 세계교회의 등장

 

오랫동안 기독교가 서구교회 위주로 왔는데, 2/3세계교회의 성장과 함께 교회는 세계적 교회로 탈바꿈하고 있다. 21세기의 교회는 동서남북의 교회의 신학과 직제와 생활이 더 통합적인 교회가 될 것이다.

 

 

6) 한국교회의 중요한 위상

 

민족 복음화

 

한국과 남북한 통일과 통일후 북한의 복음화와 통일에 수반된 문제들에 대한 대응이 현실적인 과제가 될 것이다. 또한 온누리에 산재한 약 600만명정도의 한민족 (Korean diaspora)의 선교문제도 중요하다 할 것이다.

 

세계선교

 

아직도 세계인구의 70% 이상의 불신자들에 대한 선교가 한국교회의 큰 책임이 될 수 있다. 아세아 뿐 아니라, 서구지역과 여러 미전도 종족들이 한국교회 선교의 주요대상이 될 것이다.

 

한국교회 신학의 대두

 

한국교회 역사가 2세기째로 접어들면서, 동서의 기독교가 만나는 한국에서 전통적인 서구신학과 한국이라는 현장(context)이 한국교회의 경험을 바탕으로한 한국적 신학의 모색과 정립을 불가피하게 할 것이다.

 

 

 

 

2. 바른 목회를 위하여

 

 

21세기에 우리가 지향할 바른 목회는 사도적 목회(apostolic ministry)이다. 역사적으로 교회는 크게 두가지 유형의 목회가 있었다. 첫째는 사도적 목회(Apostolic Paradigm)이고 둘째는 기독교왕국하의 목회(Christiandom Paradigm)였다. 사도적 목회 유형은 초대교회부터 4세기초까지의 틀이었고, 기독교 왕국형은 313, 콘스탄틴 대제가 기독교신앙의 자유를 선포한 이래 20세기까지 일반화된 목회유형이다. 두 유형에서 첫 300년동안은 기독교인이 소수자였고 때로는 박해를 받았으며 세상살이가 여러 가지로 힘들고 위험하였었다. 기독교에 대한 적대감이 강했고 크고 화려한 성전이나 기구적인 관료체제가 제도화되지 않았었다. 지교회(local church)중심이었으며 교회는 세상에서 불러냄을 받은 공동체 (ecclesia)였고 세계속에서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존재하였었다. 그리고 그들의 증거는 고난과 순교를 대가로 지불하기도 했었다.

 

콘스탄틴 이후 이같은 상황이 바뀌었다. 기독교는 로마 제국의 유일하게 인정받는 신앙이 되었고 로마의 국민은 법적으로 기독교인이 되는 정교일치의 세계가 되었다. 교회안에서도 입신양명과 득세와 치부의 기회가 생기고 회중중심의 지교회들이 감독의 지배를 받는 교구(parish) 중심으로 변했다. 목회는 더 이상 선교(사도적) 위주가 아닌 자기보존 위주의 형태가 되어 목회의 초점이 내향적이 되었고 교회(교구)를 관리하는 것이 중요하게 되었다. 종교개혁자들이 요구했던 것은 이런 기독교 왕국적 체제하에서 타성화되고 관료화된 교회를 사도적 교회로 복원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프로테스탄트 교회도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는 정신을 간신히 유지한 채 시대속에서 기구화되고 기독교 왕국형의 목회유형에 안주해 온 편이 많았고, 그 현상은 오늘날까지도 계속되고 있음이 사실이다.

 

총체적인 혼란과 위기가운데 21세기를 맞는 우리의 현실 속에서, 사도적 목회가 우리가 지향할 바른 목회임을 다시한번 새기며 오늘의 사도적 목회를 수행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몇가지 점을 특별히 더 생각하고자 한다.

 

 

1) 복음의 고수

 

복음을 그대로 가르치고 전하는 것이 사도들의 임무였다. 복음을 그대로 선포하고 가르친다는 뜻이다. 사도성의 계승이란 사도들처럼 사도들의 멧시지를 선포하고 가르치는 것이다. 말씀에 대한 논란보다 말씀을 묵상하고 배우고 가르치고 선포하는 쪽으로 치중해야 한다.

 

 

2) 인도(lead)하는 것이다.

 

목회는 현상유지를 도모하는 일이 아니다. 회중을 돌보는 것이긴 해도 단순히 내부조정(control)이나 교회일을 수습하는(caretaker) 것만이 아니다. 목회자는 지도자이다. 옳은 것을 보여주고 행하는 사람이다. 비젼을 가지고 교회를 지도해야 한다. 그 비젼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가 이루어지게 하는 비젼이다. 교회는 이땅에서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으로 선택된 무리일뿐 아니라 이 역사안에 하나님의 나라를 구현할 도구이기도 한 것이다.

 

 

3) 섬기는 목회(ministry)

 

우리가 지도자임으로 섬기는 자인 것이다. 목사(minister)는 섬기는 자라는 뜻이다. 주님께서도 섬기셨고 사역자들에게 섬기라고 가르치고 명령하셨다. 사도적 개척자(Apostolic Pioneer)의 시대가 지나고 기독교 왕국하의 목회가 되면서 교회가 이방문화의 영향을 받은 것 중에서 최악의 것은 교회지도성(leadership)이 섬김의 개념에서 지배(왕권)의 개념으로 바뀐 것이다(K.S. Latourette). 기독교 역사의 가장 큰 아이러니중의 하나는 지도자들이 가지는 권력(power)에 대한 유혹이다.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자기를 비우고 사람이 되신 그리스도를 우리가 가르치고 따른다고 하면서도 목회자들이 권력에 대해 집착을 가지는 것은 맞지 않는 것이다(J.M. Nouwen). 목회자가 권력을 탐하는 것(the lust for power)은 죄다(Urban T. Holmes). 사도들도 누가 크냐하는 유혹에 시달렸으나 그 유혹을 극복하고 사도의 직무를 바로 수행하였었다.

 

 

4) 소명으로 하는 목회

 

사도적 목회는 소명받은 사람들이 하는 일이다. 목사는 소명(calling)에 의해 되는 것이고 직업(careerjob)이 아니다. 직업중의 하나가 아닌 것이다. 소명은 절대적이고 무조건적이다. 제자들이 소명을 받았을 때 그대로 따랐다. "저희가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저희가 곧 배와 부친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4:22)"고 했다. 바울도 소명받은 자로 헌신하였다. 수많은 고통과 역경과 박해를 투철한 소명의식으로 극복하고 오히려 기쁨과 감사와 감격으로 희생하였었다. 웨슬레에게 소명은 주님과 복음을 위해 무엇이나 할 수 있는 것(ready to do anything), 무엇이나 잃을 수 있는 것(to lose anything), 그리고 어떤 고난도 감내하는 것(to suffer anything)을 의미하였다. 오늘날, 교회안에 횡행하는 가장 심각한 이단은 목회를 소명으로가 아니라 직업적으로도 할 수 있다는 생각과 행태이다(Donald E. Messer).

 

 

5) 하나님의 나라를 실현하는 것

 

목회는 교회를 통하여 이 역사위에 하나님의 나라를 가시적으로 실현하는 노력이다. 하나님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나라(통치)가 이 역사에 구현되도록 힘쓰는 것이다. 죄와 악이 역사하는 세상속에서 회개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이 새 공동체의 새 삶을 삶의 대안(alternative)으로 제시해야 한다. 하나님의 공동체가 되는 것이 바른 존재와 삶의 양식임을 설득력있게 과시해야 하는 것이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koinonia)과 섬김(diakonia)으로 사는 하나님의 백성의 삶의 실천과 과시(?)를 추구해야 한다.

 

 

6) 목사는 하나님의 종들의 종이다.

 

목사는 세상속에서 하나님의 종들로 사는 사람들을 돕고 섬기고 지도하는 사람이다. 사도적(파송과 선교)인 목회가 현장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평신도들에 의해서이다. 평신도들의 사도성(lay apostolate)이 실행됨이 없이 교회의 사도성이 역사 안에서 작용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평신도들을 사도적으로 교육하고 지도해야 한다. 평신도들을 교회안의 임무에만 치중시키고 교회밖에서의 말, 인격, 삶을 통해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살게 하는데 등한히하는 것은 비사도적 목회다. 목사는 우선, 자기가 맡은 그리스도인 공동체(교회)를 섬기고 그 공동체가 세상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창조해 가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7) 성령의 능력

 

위에서 열거한 모든 항목들은 우리의 지식이나 결심, 노력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오직" 성령의 권능으로 되는 것이다.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고 성령께 순종할 때 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목회에서 성령에 대한 이해가 좌우로 치우치지 않는 건실한 성령론을 가져야 한다. 목회는 성령의 능력과 도움과 은사로 행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외에도 더 많은 항목들을 열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상황에서 시급하게 반성해야 될 몇가지 만을 나누어 보았다.

 

 

 

3. 맺는 말

 

 

많은 생각과 말을 할 수 있어도 단순하게 생각해 보면 목회는 단순한 것이 아닐까. 목회는 성령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을 누리는 공동체를 형성하고 키우고 그 교회를 통해 의와 평강과 희락이 넘치는 하나님의 나라를 구현하는 것이다 (14:17). 샹봉교회 이야기로 결론을 삼으려고 한다. 제이차 세계대전 중에 독일군이 유대인들을 학살할 때 남불의 작은 유구노들의 도시, 샹봉(Chambon)에서 약 2,500명의 유대인들을 숨기거나 피신시켜준 일이 전쟁이 끝난 후 알려지게 되었다. 그때 유대인을 숨겨준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폴란드(Bialo 마을)에서 96명의 마을 사람들이 유대인을 숨겼다는 죄목으로 처형되었었다. 그런데 샹봉에서 어떻게 그같은 엄청난 일을 할 수 있었는지를 물었을 때 동네 사람들은 목사님(Andre Trocme)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가 자기 교회를 그렇게 인도했던 것이다. "사람들에 있는 이곳의 개신교회에 도움과 보호를 받기 위해 왔었다. 양들이 도움을 구할 때 거절하는 것은 양을 배신하는 것이라는 생각으로 성경공부반과 청소년들을 통해 그같은 일을 한 것이다." 사람들이 그 비결을 물었을때도 그의 대답은 단순하였다. "우리가 유대인을 숨기고 은신처를 마련하는 복잡한 문제의 해결을 위한 해답은 하나님께로부터 얻었다. 비폭력주의니 하는 이론이 아니라, 매일 계속된 공동기도회와 성령의 명령에 순종한 것 뿐이다 (Andre Troc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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