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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와 설교자

by 【고동엽】 2022. 2. 23.

설교와 설교자

 

 

 

 

 

서론)

 

설교란 문자로 기록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설교문()일 뿐이다. 진정한 설교는 하나님을 체험한 자가 하나님의 말씀 - 보편적 진리를 토대로 하나님의 목적인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속을 얻고 영생을 얻게 하는 하나님의 대언(代言)이다.

설교를 감당하는 설교자는 문서화 된 설교문을 읽어 내는 일로 설교자가 될 수는 없다. 설교와 그 설교를 맡은 설교자의 인격과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 있다. 방법만 전달하는 설교학이나 논증은 할 수 있어도 진정한 설교와 그 설교자란 매우 신령한 의미로 정의되어야 할 것이다.

목회에 있어서, 설교는 목회의 동기를 의도적으로 여러 차례 고할 수 있으며 영혼을 구원하고 영성을 개발하여 하나님이 주시는 승리의 삶을 살게 하는 신령한 직무를 수행하는 설교자 혹은 목사의 사역에 중점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설교와 설교자의 관계를 논증해 내려가는데 있어서 설교학적 논리를 정돈하려고 애쓰지 않겠다. 다만 오래 동안 연속되는 설교와 설교자의 관계 속에 성도의 감동이나 설교자에 대한 이해 및 이 시대에 설교자에게 설교의 자리가 빈약해진 것을 마음 아파하면서 설교의 권위 상실과 그 원인을 짚어보는데 역점을 두려고 한다.

먼저 설교가 무엇이며 설교는 어떻게 짜여지고 설교는 어떤 방법으로 전달되는가를 대략 살펴보기로 하며, 설교자와 그 설교 내용과 함께 동반하는 영성문제를 논하기로 한다.

 

 

 

 

본론)

 

설교란 무엇인가를 정의한다는 것은 결코 학문적으로만 평가할 수 없다. 왜냐하면 설교는 설교자로서의 특별한 경험이 있어야 하고 그 성경적인 정확한 이해는 성령의 영감과 함께 정립되기 때문이다.

신학의 분야로 설교학이 있지만 기교와 방법을 꾸며내는 것은 각자의 신학적 견해를 따라 표현하고 그렇게 창의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필자는 성경적인 설교의 정의와 설교의 유형 그리고 신구약의 설교 작성법과 설교자의 정체를 정의하려고 한다.

1. 설교

 

설교의 정의와 설교의 구체적 형태를 살피고 목적이 수반되는 개혁주의의 이상적 설교가 갖추어야 할 내용을 다루고자 한다. 설교의 정의는 목회 철학에 수반된다. 그것은 청중의 사상을 책임져야 하는 중대한 분야이다. 교회 운영에 설교는 예배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아주 큰 주제이고 설교자는 설교에 대한 성경적이고도 신학적 바른 견해를 가져야 할 것이다. 전도는 설교와 그 성격을 같이 하지만 목회에 있어서 설교는 목회자의 정체성을 다 갖추는 분야이다. 그러므로 노회(老會)는 설교자에 대하여 설교에 대한 나름대로의 논증을 간략히 기록하여 보관할 수 있다면 설교자의 사상과 신학적 정체성을 재고하는데 필요하리라 본다

 

 

1.1. 설교가 무엇인가?

 

설교(說敎)는 다분히 가르친다는 의미가 짙다. 불교에서 설법(說法)이라고 하듯 종교적인 철학을 가르치는 것으로 이해하는데 익숙하다. 하지만 성경적으로 볼 때, 설교는 단순히 도()를 가르치는 것으로 설명될 수 없고 설교를 할 때, 하나님의 영적인 활동이 실재하게 되는 영적 세계가 이루어짐을 간과하면 설교의 진의를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설교는 진리를 성령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설교는 진리와 성령의 공동 역사로 나타내야 한다. 예수께서 지상에 계실 때 아직 회개하지 않았던 예루살렘에는 진리는 있었으나 신령이 없었고 그리심산에는 신령은 있었으나 진리가 없었다’.

설교는 단순히 종교의 지식적 전달이 아니라 설교를 통해 심령에 새로운 구속 역사를 일으키는 하나님의 실재적인 역사가 이루어진다. 또는 그렇게 심령의 운동, 즉 영성(靈性) 운동이 일어 날 때 잘 한 설교자요 잘된 설교가 되는 셈이다.

때문에 설교란 살아 계신 하나님의 다른 음성으로 간주되어진다. 그렇지 않고 성경이나 교리를 말할 때는 강해라든가 교리 공부라고 해야 할 것이다.

설교를 한다면서 강해(講解)로 끝난다면 그것은 설교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설교는 예배 중에 그 자리를 중심으로 차지한다. 그러나 설교가 넓은 의미에서 전도로 혹은 권면으로 짧게 나타날 수 있을 것이다. 그 말의 내용이 하나님의 음성 전달로 간주된다면 말이다.

하나님의 음성이 간주되는 그 설교의 중심은 복음(福音)이어야 한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주제로 하여 영생을 목표로 참 삶의 내용을 전달하는 것이다. 결국 설교란 예수 그리스도의 사활(死活)을 근거로 인간의 실존적 죄악성의 해결과 구원으로 이어지는 길을 알게 하여 영생과 영원한 참 가치를 삶에 도입하게 하는 하나님의 특별하신 지시이다. 구속사 통일성이 내포하는 것은 모든 역사적 본문의 그리스도 중심적 속성이다. 구속사는 그리스도의 역사이다.’

기독교 예배가 신령성과 진리로 온전히 이방 종교 의식과 다르다는 것이 증명되듯이(4:23) 설교는 연설, 강의, 토론 및 사설(私說) 같은 것이 아니다. ‘설교가 학술적인 강연이 되면 동의한다”,“동의하지 않는다는 반응 밖에는 더 이상 나올 것이 없다. 하지만 설교가 예배로서 제시되는 경우 청중들은 성령을 통해 전달되는 하나님의 계시에 반응하게 된다.’

설교는 죄인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구원적 음성을 잘 알아듣게 영혼에 호소하는 하나님의 말씀 대언(代言)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언제라도 말씀으로 존재하시며 말씀하시는 하나님으로서 지난 역사를 되뇌는 것으로 당신의 음성을 대언 하게 하시지 않는다.

즉 어떤 설교자가 영감을 얻어서 설교하게 된 것을 다른 곳에서 그대로 반영시킬 수는 없다는 것이다. 기본적인 진리의 구도는 크게 변하지 않는다 하여도 설교는 설교자와 밀접한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공유될 수 없는 분야이다. 설교는 살아 있는 하나님의 또 다른 음성으로 선포에 있어서는 현재적이기 때문이다.

 

 

1.2. 설교의 목적

 

5분의 설교라도 메시지의 주제가 강하게 보여져야 한다. 설교의 목적은 성경의 목적이다. 성경의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시다. 설교는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전달하는데 있다. 성경을 통하여 우리가 도()를 전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이 인생을 어떻게 사랑하시어 구원하시고 또한 시대를 어떻게 이해할 것과 내세에 대한 예언들이다.

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하여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의 목표를 전달하기 위해 설교 작성을 한다. 설교는 성경에서 그 원인과 목표를 발췌해야 할 것과 또한 자체를 성경 자체를 통하여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보다 설교가 우월할 수는 없다. 설교할 이유가 성경 때문이다. 종교개혁 시대에 제네바에서 설교하던 존 칼빈은 일주일 후 설교할 성경 본문을 미리 알려준 적이 있다.’

중세기에는 더더욱 성경을 읽을 수 있게 하는 일이 중요했고 언제라도 성경을 통한 메시지 준비는 설교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일이다. 그런데 성경보다 논증에 가깝거나 인간적인 교훈 작성에 몰두한 설교를 볼 수가 있는데 이것은 설교자가 설교의 정의를 잘못 이해한 결과이다.

20: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에 대한 지식 자체는 예수보다 우월할 수 없다. 성경이 예수를 위해 쓰여졌기 때문이다. 가령 설교에서 예수보다 성경을 위해 지식 전달이 강하게 작용되면 설교가 아니다. 그것은 주석이나 강해일 따름이다. ‘어느 설교에서든지 설교하고자 하는 본문이 그리스도와 그 분의 구원과 어떤 관계인지를 분명히 해야 한다.’

강해와 강해 설교는 다르다. 강해(講解)는 그야말로 뜻을 풀이하는 것이다. 그것은 언어와 사상적 견해를 그 문헌 안에서 충실하게 설명하는 것이다. 그것은 설교를 위한 준비 작업이지 설교 자체가 아니라는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설교를 한다면서 강해를 하고 자신의 견해가 되어 교훈을 하는 태도가 짙다. 원리를 이야기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 성경에는 일반적인 교육적 가치를 논하는 것과 큰 차이가 없는 교훈들도 발췌가 되고 또 그렇게 말하고서 설교를 했다는 오해를 스스로 가진다. 교훈가가 될 수는 있으나 교훈만으로 마무리된다면 그것은 설교가 될 수 없다. ‘설교자가 되는 것이 결코 우발적이 되어서는 안되고 직업의 선택으로 취급되어서도 안된다. 하나님은 구별된 은사를 오늘의 말씀으로 종들에게 주었고 또 들어 쓰신다는 소명의식을 깨닫고 나아갈 길을 촉구하고 계신다.’ 설교자는 특별한 은사적인 것이다. 영적인 일에 몰두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지시 속에 성숙해져야 한다.

설교의 목적은 죄인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을 통하여 죄에서 해방되고 하나님의 새로운 의로움에 거하며 영생을 소유하고 그 가치대로 살아 갈 수 있게 영력(靈力)을 실어 전파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설교는 의미 깊게 말해서 하나님의 음성으로 화해야 하는 신령성(神靈性, spirituality)을 내포한다.

설교는 그 대상과 상황따라 여러 형태의 내용으로 전달되지만 언제나 설교의 그 곳에는 하나님의 뚜렷하신 목표가 강조되고 청중으로 하여금 감동이 되어야 한다. 우리의 견해를 나누는 것이면 하나님을 느낄 수는 없다. 감동 자체는 꼭 설교 시간이 아니라도 어느 곳에서든 가능하기 때문에 눈물이나 기쁨 자체로 설교의 효과라 말 할 수는 없다.

바울이 아덴에서 철학적 논증으로 그들에게 변호하였으나 전도의 효과를 얻을 수 없었다(17:). 그 후 그는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외에는 아무 것도 전하지 않기로 작정하게 되었고, 그는 철학의 진정한 효용 가치 면에서 초등학문에 불과하며 배설물같이 여기면서 단호히 복음적 가치를 높였다.

설교의 목적은 성경의 목적이지 성경의 세밀한 지식을 전달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성경 신구약은 한가지로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믿음을 촉구하는 바 구약과 신약은 새로운 패턴으로 전달된 양식적 차이일 뿐, 언약과 은혜를 믿음 가운데서 수용할 수 있고 적용 될 수 있게 호소하는 것은 차이가 없이 설교가 되어야 한다.

청중의 지적 수준이 낮은데 설교자의 지식과 언어의 함량이 난해하게 호소하면 아주 잘못된 태도이다. 지식인이라고 지식적으로 설교할 이유는 없다. 다만 그들의 언어와 정신 문화를 인식하되 다른 뉘앙스로 설교의 언어는 제공될 수 있는 것이다. 설교는 지식 전달이 아니라 영혼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이어야 한다. 설교가 반드시 쉬운 말로 전달되어야 하는 것도 아니지만 칸트의 과학적 언어와 문장 형식이 요청되는 것도 아니다.

성경이 주는 지식은 영혼을 상대로 하는 전혀 새로운 의식과 태도로 설교자로 하여금 사유를 달리하게 할 뿐아니라 오히려 언어와 지식적 수준은 성령 앞에서 무너져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설교는 일반적 교훈자의 가슴이 아니기 때문에 감동적인 어조와 제스처도 동반되며 개인적인 발성을 잘 가꾸어서 설교자의 진정한 영적 호소가 잘 표현될 수 있게 해야 한다.

문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사활의 역사를 통한 하나님의 목적이 전달되었을 때 설교가 되고 바른 설교자가 되는 것이다. 설교의 목표는 신구약을 토대로 하되 어떠한 언어로든지 그리스도가 증거 되어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나타나야 한다. 따라서 설교를 잘 들었다고 하는 평은 잘못한 설교이다. 심지어 감동 받았다는 예의에 가까운 사례도 잘못되었고 오직 하나님께 굴복하여 죄는 죽고 의()가 살아나는 역사가 있어야 한다.

 

 

1.3. 설교와 전도의 관계

 

전도(傳道)는 주의 도()를 전()한다는 것이다. 주의 도란 성경의 목적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메시지다. 여러 가지로 꾸며진 성경은 결국 한 가지의 목표를 위해 기록되었다. 그것은 영생을 주시기 위한 음성이다.

전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다. 전도한다면서 교회를 전하거나 무슨 복을 말할 때 우리는 언뜻 전도를 한다지만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전도는 주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전도는 설교의 다른 형식이다. 다만 설교는 예배 중에 행해질 때 설교라 하고, 일대 일 혹은 소수를 두고 복음을 전할 때 우리는 전도한다라고 한다. 그러나 또한 설교이다. 설교의 정의가 영생을 목표하는 하나님의 말씀 대언이라는 차원에서 말이다.

그러므로 설교는 누구나 할 수 있으나 설교자는 아무나 될 수 없도록 한다. 심지어 예배 중에 읽는 성경말씀의 봉독은 인도자가 혼자 하는 것이 전통적이며 이치에 맞는 일이어서 바람직하다.’ 그것은 질서 때문이다. 또한 예배 중에 설교자로 등단하기 위해서는 일정의 신학을 수료하고 남다른 성경 지식에 정통하며 풍요한 지식으로 감당할 수 있는 자로 교단에 속하여 인정을 얻어야 한다. ‘설교자는 조직신학의 기초가 되는 성경신학에 매우 정통해야 한다.’

설교자로서 세우는 과정이 대개 건전한 교단에서는 신학과 고시를 통하여 그리고 인격적 무흠한 자로 강단에 세우게 된다. 이것은 흠을 보고 거룩한 교회 전체를 오해하거나 영혼의 실족함을 막기 위해서이다. 근본적으로 공교회의 거룩성을 유지하기 위함에 근거한다.

혹 이단적 교단에서는 사람의 감동에 중점하여 아무라도 설교하거나 안수하게 하는 것 등 사람의 변화하기 쉬운 감정을 기점으로 거룩한 교회의 활동을 지탱하려 하나 우리 인간의 경험으로 볼 때도 위험한 처사이다. 하나님이 개인의 권위를 위해 제도를 두신 것이 아니라 원칙과 약속을 잘 이행하기 불완전한 인간의 인격 때문에 조직을 두시고 일정한 법을 제정하신 것이다.

이것은 상식적으로 이해되어져야 할 부분이기 때문에 신학적으로 논할 여지도 없으나 이미 그러한 교단이 있고 신학이 있다는 것이며, 기성 교회와 조직의 불완전성에 따른 불만으로 그러한 원시적 기독교의 이상적 형식을 원하지만 잘못된 주장이다.

조직의 불완전성 때문에 나타나는 무교회주의의 이상도 그와 같은 맥락에서 나온 주장일 것이나 완전한 형식은 지상에서 얻을 수가 없다. 다만 가장 보전 유지될 수 있는 효과적 제도를 찾는 것이 오히려 지혜로운 것이다. 대책 없는 반항은 건전한 코람데오 정신이 아니다.

전도에도 축복과 심판이 겸하여 증거 된다. 그런데 설교는 조직의 계획적인 의도를 포함하여 가르침을 내포한 메시지가 가능하다. 그러나 전도는 아무래도 주 예수를 믿으라는 단순한 복음 전파에 주력한다.

 

 

1.4. 설교의 발췌

 

성경에서 발췌하지만 성경관에 관련되어 있어서 설교의 의도가 상당히 신학의 영향따라 달리 작성되어진다. 따라서 설교를 만들기 위해 성경에서 얻어내는 지식을 얻기 위해 우리는 (교단) 신학 이전에 하나님이 주실 순수한 영적 은혜를 간절히 사모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설교자의 긴장과 예민한 부분이다. 하나님이 신학도 성경도 없는 족장 시대에 특별한 계시의 형태로 말씀을 주시는 것처럼 성경이 주어진 이 시대라도 하나님이 주실 은혜의 영적 계시에 관심을 가지고 먼저 기도하고 영감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

학문과 과학으로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의 인도를 잘 받아서 영감의 지식으로 설교를 준비해야 한다. ‘성령은 우리 안에서 우리의 듣는 것을 깨닫게 해주시며,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마음으로 아멘 하게 해주신다. 따라서 우리 안에 계신 스승이 깨닫게 하고 가르쳐 주는 것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그런데 자칫하면 비유와 영적 해석으로 빠져들 수도 있다. ‘철저한 주석가였던 오리겐은 뜻밖에도 알레고리적 해석의 명수였다. 설교의 마지막 쯤에는 으레 공상에 가까운 비유적 해석에 빠져 들어가서 성서의 설명과 적용에서 이탈되곤 했다.’ 이러한 위험을 배제하기 위해서 말씀을 토대로 준비하며 바른 신학적 뒷마무리로 교리나 보편 진리 사상에 어긋나지 않게 살펴주는 것이다.

그렇게 준비된 자라도 설교를 위해서 또다시 날마다 영성 훈련에 충실하면서 다만 신학은 성경의 저변 논증에서 좌경되지 않게 살펴주는 역할로 활용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설교를 준비할 때 처음부터 주석을 보려하기 보다 먼저 묵상을 충분히 한 후 다양한 주석과 사전 등을 참고하면 훨씬 나을 수 있다.’ 가끔 이론 지식 전달보다 엉뚱하긴 해도 영감에 사로잡힌 자의 호소력 있는 메시지에 감동받은 사람들이 차츰 정돈된 신앙으로 나아가기 쉽다. 딱딱한 교리적 설교는 좀처럼 영감된 신앙으로 발전하기 어려운 것같다.

그래서 설교와 신학은 사실 다른 차원으로 봐야 한다. 신학의 언어적 한계로 성경의 깊은 하나님의 영감을 대신하려 하면 설교가 아니라 강해가 되어버린다. 그러나 강해와 강해 설교는 다르다고 이미 논하였다.

1:1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설교의 발췌는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나님의 목적을 찾아내는데, 구약과 신약은 엄격히 말해 구속사적 차원에서 나뉠 수 없는 맥락으로 보아야 한다. 이것이 바른 성경관이자 설교의 근거에서도 그러하다. ‘설교의 자료를 위한 원천은 아직 오직 성경이요 전체 성경이다. 신구약 전 성경은 설교를 위한 자료의 원천이다.’

구약의 예언적 말씀이 성취된 신약에서 그 완성된 하나님의 뜻을 정리하는데, 그 구분이 역사성을 잃지 않으나 사상 면에서는 획일하게 전달되는 것이 잘 된 설교 내용이다. 구약 성경에서 가령 아브라함의 믿음을 전달하면서 충분히 믿음의 주제는 있어도 예수 그리스도가 빠지면 완전한 설교가 아니다. 그러나 그렇게 재해석하는 설교는 상당한 영감이 필요할 뿐아니라 신학적으로도 바르게 전달되어져야 한다.

 

 

1.4.1. 구약 성경에서 발췌할 때

 

구약의 특성은 예수 그리스도가 숨겨져 있다는 것이며 이스라엘의 역사를 중심으로 하나님의 사랑, 공의, 구원의 역사를 기록하였다. 우리에게 설교란 구원이 궁극 목표가 되어야 한다고 할 때, 구약이 주는 그 영향력은 무엇이라 해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아주 적절한 부분이 있어서 신약과 교통되는 본문과 그 상황 분석이 손쉽게 설교자로 하여금 부담을 들어주는 부분도 있으나 여러모로 구약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핵심을 전달하는데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재해석을 요청하는 바 상당한 숙고(熟考)가 따라야 한다.

이스라엘 역사 혹은 믿음의 영웅이나 그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을 들어 하나님이 이 시대에 우리에게 전하시는 계시적 은혜를 찾아내고 쉽게 이해시키며 감동시킨다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과제이다.

첫째, 구약에서도 하나님이 지금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이 계시다 함을 믿고 깨닫는 것이 우선적으로 설교자의 숙제이다. 많은 사람들이 구약을 회피하거나 설교 작성에 어려움을 겪는다. 혹은 전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지식을 전달받을 수 없고 다만 믿음이 무엇인가, 혹은 하나님의 공의가 율법과 언약적으로 어떻게 행해졌는가를 심도 있게 다루고 만다. ‘성경은 성경 자체가 말하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최근 학계에서 논의되고 있는 여러 가지 방법론을 총동원하여 구약 본문 자체가 가지고 있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파헤쳐 그 진수를 찾아보고자 하는 것이다.’ 구약성경에 대한 지식은 성경전서로 메시지를 준비하는 설교자에게 필수적이다. 신약보다 자료가 없으므로 상당히 멀리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구약 자체로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직역해서 설명할 수 없고 의역을 해서 전달하는 과정이 있으므로 구약 설교는 조금은 성숙한 신자에게 가르칠 수밖에 없다고 본다. 구약의 신앙 영웅들에 대한 많은 이야기꺼리를 듣는다고 해서 기독교적 관점에서 말하는 영생과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얻는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러한 영웅에 대한 이야기는 여러 다른 설화나 영웅들의 역사가 많기 때문이다.

우리가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음성이며 동시에 구원과 영생으로 이어지는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 곧 복음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신약에도 영생과 직결되지 않는 입장을 취하기도 한다. 가령 구약 아브라함의 말씀 순종과(12:4) 신약 백부장의 말씀 신앙을 어떻게 구분해 줄 것인가 하는 것이다(8:). 가령 우리의 심령이 믿음으로 밝아지면 이스라엘의 안식일은 사회학적 사건에 근거를 둔 것이 아니라 신학적 사건 즉 죄의 멍에로부터 해방되어 최후 안식의 증거로 하나님이 주신 안식을 누리게 된 그의 백성의 구원에 근거를 둔 것으로 보게 된다.’ 신구약의 해석차이는 이원화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구속사적 입장에서 같은 맥으로 풀어져야 한다.

신약에서 발췌된 말씀 신앙과 구약의 경우가 다르지 않다. 하나님의 말씀 권위에 대한 중심은 동등하다. 그러므로 구약은 더욱 그리스도에 대한 소개를 하기엔 어려워진다는 것이다. 신약에도 그처럼 설교라고 하지만 믿음이 무엇인지를 집중하게 하는 부분이 있다는 것이다. 물론 믿음이 곧 기독교가 전하고자 하는 것이지만 기독교를 단순히 기적을 이루거나 강직한 믿음만으로 기독교 사상을 다 전달한다고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다양한 신앙 양식은 하나님이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지구촌에 주시고자 하는 구원의 그 폭넓은 메시지가 있다는데 문제를 가진다.

구약을 전할 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게 하는 역할에 집중해야 한다. 구약의 내용에서 신약에도 거론되어지는 신앙의 여러 형태들을 발췌하여 전하는 것으로 거칠 수는 없고 왜 그리스도 예수를 중심으로 살아야 하는가를 가르치는 원인으로 작용하게 해야 한다.

율법은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 선생이라는 말처럼(3:24) 구약이 설교로 발췌될 때는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가 그 원인들로 오시고 청중은 그러한 신앙으로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하나님의 새로운 구원으로 들어가야 하는 것 등을 가르쳐야 하는 것이다.

구약은 오실 메시아에 대한 예언이기 때문에 설교의 목적이 그러하다. 그러므로 구약 자체를 소개하는 것만으로는 그리스도를 위한 설교가 되기는 어렵다. 다만 하나님의 존재와 역사하시는 활동을 보여주는 것이다. 따라서 구약은 신약에 성취된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찾아 그 그림자 된 역사를 잘 해독하여 소개하는 것이다.

 

구약 성경에서 설교가 되게 발췌하고 메시지를 정리하는 예,

성경 :

창세기 3, 성경을 3장 전체로 할 필요까지는 없다. 적당한 구절을 택하되 원죄에 관련한 내용이기도 하지만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히신 구원에 주목하게 할 뜻이면 후반에 있는 4-5구절을 선택하면 되겠다.

제목 :

하나님의 구원을 전제로 가죽옷을 지어 입히신 하나님의 사랑과 그 구원에 관련한 설교를 한다. 설교마다 꼭 구원이 직결되는 것만 아니다. 때로는 교훈도 있고 혹은 믿음에 주력할 수도 있다. 여기에는 원죄를 기록한 내용으로 죄에 대한 심도 있는 신학적인 설명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항상 비관에서 낙관으로 희망을 주는 설교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 언제나 궁극적인 하나님의 목표는 인생으로 하여금 말씀 안에서 구원을 얻어야 하기 때문이다.

목표 :

구원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되어지는 것을 전달한다. 여기에 맞는 구절이 신약에도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본문에서 충분한 근거를 찾아내고 반드시 청중으로 하여금 짚어 볼 수 있을 구절과 흐름을 택해야 한다. 창세기 3장의 원죄에 대한 설교를 장황하게 신학적인 논증을 하면 설교가 아니라 결국 강해가 되어버린다. 그러므로 본문을 중심으로 적절히 신약 성경을 배치하여 삽입하므로 한결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게 한다.

 

내용 분석 :

1)하나님의 언약의 성질을 설명한다.

하나님이 동산 중앙에 있는 실과를 먹으면 죽는다는(2:17) 행위 언약의 내용이 인간의 의지에 그리고 그 언약의 정도에 아무런 문제가 없이 충분히 지킬 수 있을 만한 것이었음을 상기 시켜준다.

그 하나님의 그 언약은 사회적인 법도 인격적인 것도 아니었고 단지 순종을 위해 실험된 것이었다. 그러므로 에덴에서의 시험 결과는 전적 사람의 책임으로 돌린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광야 시험(11:)을 대조하여 승리하신 예수님의 입장을 고취시킨다. 첫 아담과 둘째 아담(예수)의 시험 차이를 보여서 얼마나 아담과 하와가 크게 잘못되었나를 두각 나게 한다.

2)변명하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

범죄의 자세한 내용은 성경 구절로도 충분하다(3-4). 여기서는 하나님이 금령의 실과를 먹고 두려워하는 인간을 찾았을 때 그들이 변명한 소리를 분석한다. 죄의 전가성 뿐아니라 회개하지 못하는 인간의 비굴한 모습을 말한다.

3)하나님이 그들의 일회성 나뭇잎 옷 대신 짐승을 잡아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다고 한다.

이것은 그리스도 예수의 희생적 댓가로 우리가 구원을 얻게 되었다는 것으로 영입시킨다. 이렇게 설교를 통하여 하나님의 전적, 희생적 사랑의 구원을 강조해야 한다. 원죄의 사건 자체는 아무리 강조해도 별 소용없는 결과다. 그 속에 하나님의 구원을 떠올려야 한다. 조심할 것은 본문만으로도 충분한데 여러 성경 내용에서 이와 비근한 사건을 발췌하여 설교의 중복성이 없도록 해야 한다.

마무리 :

어차피 하나님의 사랑은 주어졌다. 구약 첫 범죄(원죄)의 상황에서도 반영구적인 가죽옷을 지어 입히신 사랑으로 시작된 하나님 구원 작업은 신약에 와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만방에 전파된 것이다. 이것이 복음이다, 믿음으로 의의 옷을 입자, 이렇게 결론을 내리면서 도덕주의나 신비주의나 그러한 인본적 구원론 사상을 무효하다고 곁들여 강조한다.

 

 

1.4.2. 신약 성경에서 발췌할 때

 

신약은 예수 그리스도의 육성과 함께 예수 곁에서 살며 보며 느낀 사도들이 기록한 문헌들로 구성되었다. 그러므로 신약은 예수님을 직접 소개하는데 용이하며 복음을 전하는데 손쉬워 진다. 그래서 신약 설교, 그 중에서도 4복음서의 본문으로 가장 많이 설교하게 되었다. 그것은 당연한 시대적 상황이고 하나님의 뜻이 성취된 현장이 있고 그 주인공이 되신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설교를 하셨는가?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해본다. 예수님은 천국 복음을 전파하신다고 하셨으며(9:35) 회당에서 가르치셨다(4:44). 그러나 우리는 그 예수님의 활동과 함께 예수의 출현과 하나님의 목표를 전하는 설교를 하게 된다. 이것을 사도들은 기도와 말씀 전파로 전무 한다고 표현했다(6:4).

신약에서는 예수님의 육성이나 사도들의 증거 혹은 사건들을 통하여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사 인생을 구원하시고자 하는 직접적 내용이 많은 곳에서 발췌된다. 그런데 신약이 복음 사상에 관여하지만 직접적으로 영생에 직결되지 않고 성도의 삶이나 교회 운영에 관한 것 등으로 전도 설교가 아닌 여러 유형의 내용이 있다. 신약이지만 자칫하면 설교의 근본 목적에서 벗어나게 유혹 받는 부분도 없지 않다. 성경적 교훈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궁극 목표에서 지엽적으로 흐를 가능성이 많다는 것이다.

율법의 완성으로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교훈을 다룬다는 것이 오히려 청중으로하여금 부담감을 안겨다 주는 경우라든가 교회의 거룩성을 보유하고 교회 전체를 위해 전체를 위해 권징에 대한 교훈을 하는데 성경대로 하기에는 불편해 하므로 인본주의로 설명하게 된다든가 하는 것들이다(18:17-20, 권징).

혹은 예수께서 주신 구원과 함께 얻을 축복에 대해 이 세상 문화를 너무 강조한 나머지 기복주의, 물질주의 사상으로 전락시키는 설교자도 있는 것이다. 신약에 주어진 예수는 모든 것 중에 귀중한 존재로 부상되어지게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예수는 인물사적 소개로 끝나고 종교적 가치로 물질과 환경적 요소에 대한 많은 지혜나 성구들을 소개하며 사람의 종교적 욕구를 풍성케 하는 설교자도 많다.

큰 교회를 움직이는 사역자들이 그런 경우가 많은데 대중화 설교가 되야 한다는 입장에서 변명하지만 청중이 하나든 천이든 설교는 설교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는가? 혹 전달할 때 어려움이 있을지라도 근본마저 흔들릴 수는 없는 일이다. 개혁주의 설교라고 할 때 주로 선포되는 말씀이라는 주관도 약간의 문제가 있으나 사람의 지성에 호소하여 철학적 논증으로 하나님을 증명하겠다는 것도 성경적이지 못한 것이다.

설교가 설교되기 위해 신약에서 그 본문을 발췌할 때도 복음 사상에 적합한 부분을 살펴보는 것이 유익하다. 물론 한계는 있다. 같은 본문이라도 그 날에 기도와 간절함으로 하나님의 영적 새로운 은혜는 또 새롭게 내려질 것이다. 영적 평안과 새로운 은혜의 마음을 회복하는 것이 목적이지 또 다른 지식을 얻으려고 예배하고 설교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신약 성경으로 설교를 위해 본문 선택과 그 효과적 정리의 예,

성경 :

누가복음 191-10절로 삭개오의 내용을 선택한다. 본문이 길지만 내용을 충분히 전달하기 위해서는 이 내용의 전부를 읽고 소개하는 것이 좋다.

제목 :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정한다. 그냥 삭개오의 신앙, 혹은 삭개오에 대한 인물 연구보다는 복음적 의도를 지닐 수 있다. 인물 연구에서 복음이 나오긴 해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란 구절이 있기 때문에(9) 다행히 제목을 정하는데 어려움이 없다. 가능한 본문에서 단어와 구절을 선택하고 제목을 삼는 것이 자연스럽고 설교 내용을 기억하는데 용이하다.

목표 :

본문은 참 중요한 구원 얻는 자의 변화를 목격한다. 삭개오가 뽕나무에 올라 예수님이 지나가실 때 어떤 분인가 보려다 주님이 불러 주셔서 그가 집으로 모시고 가서 회개하는 장면을 보게 된다. 그러므로 그의 회개 장면에 집중하여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려면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를 강조하고자 하는 것이다.

 

내용 분석 :

1)인간은 언제나 부족함을 느끼며 사는 죄된 존재임을 전한다.

삭개오는 직업도 좋고 부자다. 그러나 키가 작았다. 그의 약점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것이 인간의 죄스런 실존을 설명하는데 도용될 수는 없다. 키 큰 죄인도 많으니까... 문제는 당시에 세리라면 허가증 가진 도적이라 할 만큼 로마 치하에 있던 유대인들은 그들의 백성에게 민족적 자긍심도 없이 로마인의 수하에서 동족에게 세금을 거두면서 토색한 일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본문에서 그의 언변을 볼 때(8).

현대 사회는 풍요 속에 빈곤이라는 아이러니한 삶을 사는데 이것을 삭개오의 정서를 비추어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가진 자라도 맘은 언제나 가난한 처지인 인간의 실존을 말하는 것이다. 적당한 철학적 언어를 빌릴 수도 있다(에릭.프롬의 소유와 존재에 대한 말을 선정할 수도 있다).

2)회개하는 자의 진정한 양심적 고백을 강조한다.

말로만 회개하는 것이나 감정적 표현이 아니라 삭개오의 단호한 고백을 살펴준다(8). 이것은 얼마나 성도들이 깊이 새겨야 할 내용인지 모른다. 진정한 회개의 결과인 3번째의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 우리는 그의 회개에 대한 발언과 작정을 유심히 바라봐야 한다. 회개의 진정한 문자적 의미를 소개해도 좋을 것이다. 참된 회개는 행동으로 죄의 자리에서 돌이키는 언행을 통하여 보여준다는 것으로 회개의 바른 정의를 내린다. 삭개오를 통한 회개의 모습은 오늘 우리들의 회개 행위가 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3)구원의 선포로서 제목을 인식시키며 결론에 도달한다.

9절로서 충분히 본문의 의도를 전할 수 있을 것이다. 구원의 선포는 삭개오의 회개가 있었다는 것을 한번 더 강조해주면서 주님이 선언한 구원의 선포를 의미 있게 전달한다. 우리들에게는 어떻게 이러한 축복의 선언이 와 닿아야 하는가를 짚어 준다. 우리들의 가슴에 전해질 주님의 구원의 선포를 어떻게 성경은 말하고 있는지 가려서 잘 찾아 줘야 한다.

마무리 :

삭개오라는 사람을 통하여 보여주신 하나님의 구원에 대하여 구약의 아브라함의 자손이 가시적 백성이라면 신약의 우리 이방인은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정되는가를 가르치는 내용이다. 때문에 아브라함의 후예가 믿음 안에서 선언되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우리에게도 삭개오의 회개 정신이 요구된다는 것을 강조한다. 진정한 회개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렇게 될 때 우리들의 맘 속에 구원이 선포된다는 것을 말한다.

 

 

1.4.3. 신학과 목회 현장()에서 발췌할 때

 

종교 개혁 이후 그리고 과거 기독교사에는 주일 오후예배와 수요예배 및 수요일이나 특별한 날을 정하여 교리를 강좌하는 것으로 예배 형식을 가졌다. 물론 말씀을 가르치신 예수님의 사역처럼 설교 말씀을 통한 영적 운동이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도 이성적으로 정돈이 되야 하므로 교리를 가르치게 된다. 배운다는 개념이 철학적 소치가 아니라 믿는 바를 정립시키는 것이다. 새로운 개념을 찾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원색적 내용을 약간의 형식으로 갖추어 놓자는 것뿐이다.

설교가 상황에 적응되기 위해 우리는 신학적 견해를 토대하고 목회 현장의 삶 과정에서 필요 충분 조건을 성경에서 발췌하는 것이다. 설교가 대개 그렇게 시작되는 것이지만 특히 성경 읽는 생활과 영성운동 중에 주시는 하나님의 영감에 근거하여 설교 준비를 하는 것 외에 목회 현장에 필요를 따라 주제를 정하여 설교에 임하는 경우이다.

이것은 설교자로 하여금 더욱 긴장하게 만든다. 그것은 자칫하면 사설(私說)이 될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교자는 존경받을 자로 그 사회적 입장을 지키기 위해 인격적으로도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가령 국가 조찬기도회를 위해 설교를 만든다고 할 때는 일상적인 복음적 설교에서 그 형태를 달리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국가관과 아울러 시대 역사 의식에 따른 하나님의 지혜로운 인도하심을 선지자답게 증거하는 것이다.

목회의 현장에서 요청되는 예절설교나 절기설교도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를 사상으로 하되 그 삶에 구체적인 하나님의 지도를 발휘하는 것이어서 성경과 영성으로 다 할 수 없고 목회관의 철학적 설교자의 의도가 동원되는 바이다.

선지자적 설교가 매력이 있어서 사회주의 복음 사상자들은 종종 복음의 본질적인 요소를 간과하는 무례를 한다. 하나님이 사회에 우리더러 선지자적 역할을 하라고 하셨으나 그 역할 내용에서 영생이 빠지고 죄의 심판과 내세(來世)가 소망으로 선포되지 않는다면 신약적 선지자의 사명으로 볼 수가 없는 것이다.

 

 

 

 

2. 설교자

 

설교와 설교자는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 있다. 아무리 좋은 설교문이 있어도 그 자격이나 설교하는 순간에 갖추어진 영성에 문제가 있다면 설교자로 설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설교는 영적으로 말하면 마귀의 영력(靈力)을 대항해서 우리 영혼의 승리를 위해 성령의 조명을 얻어 그 영감과 능력으로 영적 전투를 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설교자란 아주 특별한 자이어야 한다. 아무라도 설교를 하겠다는 것은 사실상 전도(傳道)를 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설교를 하도록 사람을 정할 시에는 신구약에 모두 특별히 대상을 부르시고 가르치시고 계시하사 따로 세우셨다. 구약에서도 선별하셨고 신약에서도 따로 세우셨던 것이다. 이것을 설교자로 소명을 받는다고 한다. 물론 일정의 신학의 과정이 따르고 평신도와 영적인 격이 있으며 더욱 열심을 내는 자이다. 말씀을 사모하되 진실로 평신도보다 월등하며 사명감을 지니고 연구하게 된다.

 

 

2.1. 설교자의 영적 상태

 

설교자는 하나님을 알고 불신자나 영적으로 약한 자를 두고 하나님의 구원을 선포하고 영적 각성을 일으키는 신령한 지도자이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반드시 갖추어야 할 중대한 과제가 있다. 그것은 자신이 영적으로 중생하는 것이 필수적이며 성령의 인도를 아는 자이어야 하는 것이다.

설교가 신학적 언어의 표현이라고만 안다면 사도들이 성령으로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더라는 성경을 알지 못하는 자이다.

설교는 구원 얻은 영적 중생자로서 구원을 말하는 영감의 사람이어야 한다. 구원을 얻지 못한 자가 외치는 설교라는 것은 거짓된 증언이다. 그의 말에는 영생이 없고 영원한 가치의 목표가 없다. 신령한 말을 한다 해도 영지주의나 신비주의자는 되어도 하나님의 생명의 영감을 소유한 자는 못된다.

사실 교회사에 많은 지도자 중에 설교자 비슷한 철학자들이 많았다. 우리는 그들을 종교적으로 이단자라고 하지만 엄연히 목회를 하는 자 중에도 철학자로 설교하는 자도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 자를 자유주의 신학자라고도 한다. 성경의 보편 진리 사상에 위배될 뿐아니라 성령이 없는 자이다.

우리는 그 자의 메시지가 설교라고 할 수는 없다. 그의 메시지가 성경의 목표를 가지지 못한다면 그것은 필시 설교가 아닐 것이다. 교훈일 뿐이다. 교훈은 설교가 아니고 철학이다.

위대한 설교자라 할 때, 우리는 한가지 선입관을 버려야 옳다고 보는데,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킨 자로 보는 예이다. 그러나 그것은 꼭 그렇지 않다. 청중이 많지 않아도 설교는 위대할 수 있다. 설교는 감동 이전에 사상이어야 한다. 그런데 역사에 설교로 감동시킨 많은 설교자 중에는 철저한 원고설교를 하거나 원고에 메이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다. ‘19세기 복음 전도자 찰스 피니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오랜 세월 설교를 했으나 한번도 내가 설교해야 할 내용을 24시간 이전에 결정해 본 적이 없다그는 설교를 한 후에 원고를 적어두던 사람이었다.’ 그에게는 특별한 하나님의 은사적인 설교자의 힘을 가졌을 것이다. 우리는 대개 원고를 가지고 설교에 임하는 것이 가장 안전하고 허튼 말을 혹은 중언부언하지 않도록 정돈된 내용 전달이 가능한 줄 안다.

설교는 하나님의 목표를 전달하는 것이다. 그런데 시류를 따라 사람을 감동시키겠다는 목적이 강하게 나타나는 것은 견제돼야 할 것이다. 준비되지 않은 채 느낌대로 사람을 감동만 하는 것은 금물이다.

1:10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우리가 교단의 헌법 기준으로 일정의 신학을 수업하고 노회(老會)의 인준으로 설교를 위임 맡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그와 같은 제도가 꼭 그를 정상적인 설교자로 만드는 것은 아니다. 설교는 만들 수 있어도 설교를 할 수 없는 자도 있다. 사상적인 것과 신령한 자질 문제로 그러하다는 것이다.

도무지 무슨 말을 하는지 연결도 되지 않는 중언부언의 설교를 하는 사람이라면 무엇으로 그를 설교자라 할 것인가? 가끔 그런 사람을 보았다. 그는 설교를 하지 말아야 한다. 설교는 영적으로 활기를 찾게 하고 새 생명의 영적 혁명을 불러일으키는 위대한 영적 전투이다. 공자 왈, 명자 왈도 아니며 어떤 주관적 기독교 이론 성립을 정리하는 시간도 아니다.

설교자는 반드시 거듭난 경험을 확실하게 간증할 수 있어야 하고 신령한 영적 감각의 소유자로 영적 분별력을 함께 발휘 할 수 있어야 설교를 잘 할 수 있다.

 

 

2.2. 설교자의 설교를 위한 수고

 

설교자는 고독하다. 왜냐면 설교자의 위치가 가르치는 자의 입장이기도 하므로 성경적으로 볼 때 행위에 관련하여 온전하지 못하면 아무리 설교를 잘한다 하여도 청중의 신뢰도를 얻지 못하기 때문에 대단히 어려운 직분이다. 힘들어도 힘들다 할 수 없고 아파도 아픈 모습을 보이기 힘들다. 왜냐면 힘들지 않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말해야 할 위치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억지로 자리 매김을 해야 한다는 변명이 아니라 평신도보다 열 배로 수고해야 하는 직분이라고 하는 사실을 말한다. ‘설교자 자신은 그 설교이다. 설교 그 배후에 있는 사람이 바로 그 설교의 무게를 좌우한다.’

 

설교를 잘 하기 위해서 설교자가 준비해야 할 부분이 많은데,

첫째, 성경과 영감에 충실해야 한다.

그것은 성경 읽는 생활이 평신도보다 훨씬 많아야 한다. 그리고 학습하는 자세로 성경의 풍성한 지식을 정립시키기 위해 계속적으로 연구해야 하는 것이다.

또한 영성 훈련이 생활화되어야 한다. 강단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 한다는 것은 영적인 일이다. 설교 자체만을 위해서도 영적으로 성숙하기 위해 영성 훈련의 기회를 많이 가져야 한다.

따라서 기도하는 시간이 많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설교자인 목회자는 사실 하루 24시간이 부족할 정도로 시간 활용에 충실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입장을 교인들이 알아서 가능한 목회자의 영성을 위해 시간을 빼앗기지 않도록 도와 줄 수 있으면 좋을 것이다.

설교를 위해 주간 하루씩 금식을 하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혹은 설교의 은혜를 위해 금식 기도를 정규적으로 한다는 사람도 있다. 그런 태도는 진실로 설교하는 자의 노력의 한 부분이다. 기도 없이는 영감을 얻기가 어렵다. 설교자가 책으로만 산다면 좋은 설교문을 얻을 수는 있어도 좋은 설교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금식 기도 한번 못해보고 설교하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평신도 앞에 부끄러운 일이다. 주님은 성령으로 사셨지만 그래도 말씀을 전하시기 위해 기도하셨다. 기도 없이 진리를 전달하는 힘이 생기지 않는다.

설교자가 꼭 여러 경험을 통하여 영적 경험을 쌓아야 한다는 것은 아니지만 신앙 훈련의 기회를 많이 가질 필요가 있다. 하나님이 또한 지도자에겐 그러한 기회를 마련하는 것으로 안다.

설교자가 되려면 하나님께서 성경을 남달리 많이 읽게 하시는 것이다. 성경을 많이 그리고 애독하며 열심히 읽는 것도 기회가 있다. 그리고 평신도 때부터 많이 읽는 시간을 얻게 된다. 그에 따른 영적인 경험을 위해 기도하는 시간도 많은 것이다. 신령한 경험을 통하여 개발된 영적 분별력을 기르고 개인적으로 성경적인 노하우를 가지게 되어 있다. 그렇지 않다면 노력해야 한다. 하나님은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애쓰는 자에게 그런 시간을 주실 것이다.

 

둘째로, 언행에 본이 되어야 한다.

이 부분에는 윤리적 소행을 포함한다. 어쩔 수 없이 성도들은 일상적인 생활 속에 그 리듬을 타고 목회자를 생활 속에서 볼 수밖에 없다. 가령 목회자가 일반 성도와 다름없이 같은 말로 부족한 우리들의 생활 실태를 변명이나 한다면 무슨 존경심을 가지겠는가 하는 것이다. 그래서 설교자는 힘들고 고독하다는 것이다.

설교가 언어로 전달되지만 실상 전달자의 현실적 삶은 얼마나 그 설교를 평가하는데 냉정한지 모른다. 언어는 성경적으로 생명을 살리기도 하고 죽게도 할 만큼 조심 가는 매체이다. 누가 말을 못해 설교자가 못되겠는가? 참으로 언어의 전달은 단순한 뜻의 전달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때문에 언어의 효과는 그 사람의 삶과 직결되는데 설교자의 언행 일치에 대한 성도들의 평가는 언제나 생활 주변을 긴장스럽게 한다.

3:2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

3:6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생의 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불에서 나느니라

설교자의 행위에 있어서 온전해야 함이 원칙이다. 그러나 실수도 한다. 특별히 성도들과의 인간적 관계에서 때론 시험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목회자가 신자와 싸움을 했다고 했을 때 설교자가 어떻게 강단에서 은혜로운 설교를 하겠는가? 설교자는 예수의 복사판으로 보는 성도에게는 치명적인 사건이 된다. 그러므로 싸움하면 지는 것이며 실패자가 되는 것이다. 성도들이 때리면 맞아야 한다. 그 이상은 답이 없다.

일상의 문화 생활에도 금기된 장소와 방법들을 잘 고려해야 한다. 성도들과 친밀하기 위해서라는 이유를 달고 함부로 행동하면 구설수에 오른다. 행동의 반경이 좁은 편이다. 설교자는 일반 평신도가 움직이는 곳마다 모두 수용할 수는 없다. 가능한 것이라도 절제가 필요하다.

 

셋째, 때를 알아야 한다.

이 말은 시기에 맞는 언어로 말씀을 대언하기 위해 공부하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세상 지식은 별 무관하다는 생각으로 교역자가 책 읽기를 게을리 하면 청중의 시대 언어에 부합되지 못한다.

따라서 정신 문화에 따른 시대 읽기를 위해 공부해야 하고 지구촌의 현실적 시사에 밝아야 한다. 그것은 선지자(히브리어, 나비, aybin; )의 해석처럼 미리 보는 자로서의 역할을 위해 그런 지식을 함유해야 한다는 것이다.

세계의 역사 속에서 특별히 크게 보도되는 부분에 대해서는 청중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구속사적 세계관으로 일어나는 뜻을 알고 전해야 한다. 세계는 하나님의 역사 안에서 주도적으로 진행되고 있고 설교자는 선지자적 역할을 감당하고 그들의 미래와 바른 판단을 해줄 의무가 있다.

신문이나 인터넷을 통하여 세계 흐름을 알지 못하고 산다면 감각적으로 교통하는데 문제가 발생한다. 진리를 책임 있게 전달하는 자로서 또한 유식할 수 있어야 한다. 무엇이든 모른다는 것은 이원론자나 신비주의자가 아니고는 성도들에게 유익한 면이 될 수 없다.

대개 신자들은 목회자를 무엇이든 다 아는 것으로 착각을 가지고 있으며 모든 문제의 해결사로 알고 있다는 것이 크다란 부담이다. 그러나 설교를 맡은 자로서는 어찌하든지 시대를 읽어 나가기 위해 노력해야 하므로 쉴 틈이 없다. 물론 시사에 밝다고 설교를 잘하는 것은 아니다. 시사만 늘어놓는 설교는 설교가 아니다. 따라서 유익한 시사를 필요로 한다. 다만 시기를 알고 말하는 선지자적 노련미가 있어야 하는 것뿐이다. 복음의 진수는 시사에 있지 않기 때문에 듣는 이로 하여금 시사가 하나님의 뜻을 반영하기 위한 소재이면 좋을 것이다.

2.3. 설교자의 가정 생활

 

목회자로서 설교를 담당한다는 것은 생활의 모습과 연관하여 성도들은 설교를 검정하게 된다. 가령 가정이 온전치 못할 시에 어떠한 설교를 해도 목회자의 가정에 온전치 못한 점을 알고는 은혜를 입을 수가 없다. 또한 자녀와 관계를 살피게 되어 있다. 그래서 설교자(목회자)는 상당히 힘들다. 그렇지 않아도 좋은 가정이어야 하겠지만 설교를 맡은 자로서는 거의 절대적으로 인식하려는 성도들 때문에 온전한 가정이 못되면 설교를 할 수가 없게 된다.

성도들이 설교를 단순한 교훈으로 들으려고 온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가정에 대해서는 전혀 무관하고 오직 목사의 설교를 통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 교회를 나간다고 하거나 그래야 옳다고 주장도 하지만 현실적으로 절대 그렇지를 않다. 반드시 목사의 가정을 살피게 된다.

가정 생활이 평신도보다 의롭고 은혜롭지 못하다면 아무리 옥구슬같은 이야기를 한다고 해도 신뢰도가 없어서 결국은 그 전도(傳道)의 내용이 마음에 와 닿지 않는 것이다. 그것을 부인 할 수 없는 일이다.

제자들의 경우에도 베드로가 비록 집을 나와 스승과 함께 동거를 하였으나 장모가 앓고 있을 때 주님을 모시고 치유를 하게 한 일을 보면 가정적인 사람이었다. 자기 가족을 돌보지 못한 자가 타인을 가르칠 수야 없지 않는가?(4:38)

딤전 5:8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

정상적인 가정이라면 당연히 자식도 있고 건강하게 살아가는 모습이다. 그렇지 않으면 특별한 점이 오히려 주목이 되어 변명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목회자에겐 가정의 화목한 모습이 대단히 중요한 면이다. 이혼이라든가 사별하여 너무 오래 홀로 사는 것은 참으로 시험이 많을 수밖에 없다. 정상적인 가정 형태를 잘 이끌고 나가는 것도 어려운 숙제인데 그런 특별한 환경은 더더욱 설교자로 혹은 교훈자로 나서기에 힘겹게 된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설교의 내용만큼이나 가정 생활에 은혜가 충만해야 한다. 성도의 기본 진리를 생활 중심으로 반듯하게 살아가는 것과 아울러 하나님의 사랑이 넘치는 것이 생활 가운데서 보여 줄 수 있어야 한다. 생활이 곧 설교가 된다. 설교와 생활의 모습이 너무 다르면 아무리 좋은 설교를 들어도 성도가 힘을 얻을 수 없다.

 

 

 

 

결론)

 

설교를 잘 하는 것과 좋은 설교자는 비례한다. 설교를 잘하는데 설교자가 나쁘다는 것은 감정이나 이론에 치우쳐 설교의 본질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설교하는 이가 어떤 인격자인지 설교를 처음 들으면서 파악한다는 것을 매우 어려운 일이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속기도 하고 이단을 따라서 방황하게도 된다.

설교자에 대해 신상이나 설교를 위한 신학과 개인 신앙의 깊이를 알지 못한 상황이더라도 신령한 영감으로 설교를 자세히 듣게 되면 처음부터 성경 사상에서 굴절된 이해나 그 강조점 등으로 대략 건전함과 부적절한 신학 사상자로 그 설교자의 영적 바탕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설교와 그 설교자의 상관에 대한 예민한 이해는 건전한 진리를 수호하고 영혼을 위한 진정한 목회자로서 서기 위해 필수적인 과목이다. 설교를 잘 해도 설교자일 뿐 목회자로서는 부당할 수 있음을 유의할 것이다.

목사로 임직 되고 교역의 선상에 있어도 설교가 매우 부진한 사람도 있다. 본문에서 이탈하거나 전혀 상관이 없는 소리로 한 시간을 지탱해 나가는 자나, 전혀 경험도 없는 이론적인 소리로 일관한 원리 강해자, 세뇌시키는 주입식 설교자, 말을 잘해서 만담같이 이야기로 끝나는 사람, 학자풍으로 혹은 교훈자로 위엄과 인격으로 내미는 자, 고함 소리로 아멘, 아멘 하면서 단순한 이방 종교식 중언부언으로 신도를 기만하는 자 등은 모두 설교도 설교자로도 가치가 없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의 토대 위에서 성령의 조명으로 영혼의 소리를 불어내는 참다운 설교를 해내기 위해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야 하고, 그 설교를 위해 모든 문화에 성실할 수 밖에 없는 부담감으로 일관되게 수고하는 종이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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