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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δεδομένα 18,185편 ◑/यू की-सेओङ

방주를 지으라 창6:13~14

by 【고동엽】 2022. 2. 10.

방주를 지으라           창6:13~14        
 
지난번 서울 백석대학교회에서 '1차 예수동행집회'를 하고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감사하고 
주님이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 정말 함께하심을 
확실하게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에 대해서 너무 기뻤고요. 

그리고 이제 두 번째 집회에 대한 기도가 나오더라고요. 
그래서 하나님 앞에 두 번째 집회 때 
인천 부광교회에서 집회를 하기로 이미 계획되어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무슨 말씀을 전하기를 원하시는지, 제게 말씀해 주시기를' 
그렇게 기도하고 잤는데 
잠자면서 너무나 놀라웠고 분명한 주의 음성을 들었어요. 
"방주를 지으라!"

그래서 밤중에 깨서, 그 하나님의 마음이 너무 강해서 
그 제목과 그리고 하나님이 감동으로 주신 가장 중요한 메시지의 
핵심을 노트에 써놓고 나서야 잘 수 있었어요. 

그래서 '방주를 지으라! 두 번째 집회 때에 전할 말씀이다...' 그렇게 썼어요. 

그리고 제 마음에 깨달아지기를 
이렇게 '예수동행운동'을 하고 '예수동행집회'를 하고 
또 '동행일기'를 쓰는 이 일이 '방주를 짓는 일이구나' 하는 사실에 대하여 
너무 명확하게 제 마음에 깨달아졌고 
그 말씀을 오늘 여러분들과 같이 나누려고 합니다. 

그래서 정말 우리의 삶을 통하여 <구원의 방주>를 짓는 삶이 
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시고 그리고 너무 마음이 상하는 일이 있었던 것이 
아담과 하와의 선악과 따먹는 사건이죠. 

그 다음부터 사람의 마음속에는, 육신을 따라 사는 타락이 오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그 일을 너무 마음 아프게 생각하시고 
창6:3절에 보면 우리에게서 성령을 거두세요.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창6:3

원래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사람을 만드실 때는 
우리 안에 성령을 보내주셔서, 하나님과 함께 에덴동산에서 같이 살았던 거죠. 

근데 그때 성령을 거두세요. 그리고 사람이 아주 악하게 타락을 하고 
더 이상 돌이킬 가능성이 없게 되었을 때, 그게 바로 심판의 때입니다. 
회개할 가능성이 없어졌을 때! 

하나님이 죄를 지었다고, 즉시 그를 책망하거나 심판하지 않으세요. 
돌이킬 수 있으면. 
아직까지 회개할 수 있으면! 

탕자가 말도 안 되는 요구를 아버지에게 해도 
아버지는 돌아오기를 기다리면서 허락해 줍니다. 

아주 욕을 하고 매를 들고내어 쫓으면 돌아올 가능성도 없으니까 
아버지가 그냥 내보내줘요. 돌아오게 하려고. 

근데 돌아올 가능성이 없게 되면, 그러면 심판밖에 없는 겁니다. 
그래서 홍수로 온 세상을 심판하시기로 작정하시고.. 

그러나 그런 중에도 하나님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노아를 기억하시고 
그리고 사람을 만드실 때 하나님의 계획 하심을 이루시려고 
노아와 그 가족들을 구원할 방주를 짓게 하십니다. 

자 그런데 이 일이 노아 시대만 아니고, 지금도 똑같다는 사실을  눅17:26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안타까운 것은 많은 분들이 
지금도 우리의 일생은, 노아 방주와 같이, 
구원의 방주를 짓는 것같은 삶이라는 사실을 정확히 알지 못해요. 

그래서 실제로 거의 구원을 받았는데 
구원의 방주 에서 떨어져 나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2021년에 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군이 철수를 하고 
탈레반에 의해서 완전히 점령될 때 
그때 여러분들도 다 뉴스를 보셨겠지만, 카불공항에서 이제 군용기들이 떠납니다. 
미군들과 그리고 데려가야 될 사람들을 싣고 떠나요. 

그때 택한 받지 못했던 아프간 사람들이 
어떻든지 그 비행기에 타려고 막 몰려드는 장면을, 우리가 뉴스에서 다 보았죠. 
심지어는 이륙하는 비행기 바퀴에 올라가서 
그렇게라도 비행기에 타려고 했다가
비행기가 이륙할 때 바퀴가 접히고, 그리고는 공중에서 그냥 추락하는 장면을 
보면서 눈물이 나더라고요. 그냥 가슴에서 울컥하며 눈물이 났어요.

'얼마나 두렵고, 얼마나 간절했으면 저렇게 까지 할까?' 
그게 될 일이라고 생각이 안 되는데도, 그냥 아프간에 자기가 남았다가는 
100퍼센트 죽는게 분명하니까... 아마 그런 사람들이겠죠. 

근데 그때 제 마음속에 '마지막 때에 똑같은 일이 벌어지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노아 방주의 문이 닫히고, 하늘에서 그냥 억수 같은 비가 쏟아지고 
바다에서 샘이 터지고 그럴 때 
그 방주 짓는 일을 조롱했던 사람들이, 아마 방주로 몰려들었겠죠. 
그러나 이미 배는 문이 닫혀버렸어요. 

아마 카불 공항에 비행기가 뜰 때, 바퀴에라도 올라타서 가보려고 했던 
똑같은 일이 그때도 아마 일어났을 거에요. 

어떻게 해서든지 그 배에 타려고, 문을 두드리기도 하고, 매달리기도 하고 했던 사람들... 

이와 같은 일이 지금도 벌어지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이 오실 때, 그와 같은 일이 있을 거라고 하셨어요. 

그런데 안타깝게도.. 구원은 받은 것 같은데 
실제로는 이 구원의 방주에서 떨어져 나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은 겁니다. 

그걸 본인이 깨닫지 못하니까, 영적인 깊은 잠에 들어서 
자기가 지금 실제로는 '구원받지 못한 자'의 삶을 살고 있다는 걸 모르는 거에요. 

▲'예수동행일기'를 쓰면서 주님과 친밀히 동행하자고 하는 일은 
사실은 '구원의 방주를 짓는 일과도 같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처음에 선한목자교회에서 예수동행일기를 교인들에게 쓰게하기 시작했을 때 
그때 교회에서는 굉장히 강력한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기 시작하던 때입니다. 
성도들을 위해서 기도하면, 성도들이 그냥 그 자리에 쓰러지고 
병자가 고침을 받고 
여러가지 은사들이 막 나타나는 일이 기도회 때 일어나는 거예요. 

그런 일이 일어날 때, 그 성령의 은사가 나타나는 일에 대하여 
조용히 뒤에 골방에서 기도사역을 하고 
전체 모이는 회중에게는 전혀 드러내지 않고 
그리고 성도들에게 '영성일기를 쓰시라'고 권해드리기 시작했어요. 

교인들 중에는 그 점이 이해가 안되는 분들이 많으셨던 것 같아요. 
'이렇게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는데, 더 역사가 일어나게 하지 않고 
왜 이런 역사를 자제하고, 그리고 말도 안 되는 영성일기를 쓰라고 하나?' 

그때 우리 교우들이 얼굴 표정이 지금도 제게는 눈에 선해요. 
'무슨 일기를 쓰라고 하는 거야? 세상에!' 

이런 마음인 성도들이 실제로 많았고 
말은 안 해도 사실 아우성이었던 것을 느꼈어요. 

근데 그렇게 했던 이유가 있었어요. 
우리에게 있어서 정말 중요한 것이 뭔가 하면, 
주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에요. 

우리 주님은 정말 능력을 행하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이 시간에도, 주님이 주의 능력으로 죽은 자도 살릴 수도 있으세요. 

근데 우리가 그 사실을 눈으로 꼭 보아야 믿는 겁니까?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이죠. 죽은 자를 살려내신 주님이세요. 

보든 안 보든 그 사실은 너무 분명해요. 
그런데 안타깝게도 많은 성도들이, 그걸 꼭 보아야 되겠다는 거예요. 

진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내가 주님과 정말 친밀히 동행하는 삶을 살고 있느냐? 하는 거예요. 
그 예수님을 정말 내 마음에 모시고, 
그 주님과 친밀히 동행하는 삶을 내가 살고 있느냐가 중요한 거지 

주님이 어떤 능력을 행하시느냐?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는 거에요

▲성령의 역사가 막 나타나기 시작하니까 
그러니까 우리 교인들의 영적인 실상이 드러나요. 
주님보다는 나타나는 어떤 기적에 더 관심이 있는 거예요. 

목사님들이 이제 기도하는 시간에 나와서 기도사역을 했는데 
-어느 목사님이 기도하면 성도가 쓰러지고 
-어느 목사님이 기도하면 계속 그대로 서 있고 
교인들이 도대체 어느 목사님 앞에 줄을 서서, 가서 기도받아야 되나?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는 거예요. 
기도해 주는 목사님들 사이에도 그런 문제가 묘하게 자꾸 갈등이 되는 것 같아요. 

왜냐면 어느 목사님은 손만 대도 쓰러지고 
어느 목사님은 그렇게 간절히 머리를 부여잡고 침을 튀겨가면서 기도해도 
안 쓰러지느냐 말이에요. 
이게 뭐 무슨 능력의 차이가 있나, 경건의 차이가 있는 건가? 

'아, 이건 엄청난 미혹을 받을 수도 있는 일이겠구나!' 
우리가 이런 능력이나, 어떤 기적이나, 은사에만 치우치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지를 
책으로 배워서도 알았고, 실제로 목회하면서도 경험했기 때문에 
'이 일은 오히려 자제해야 될 일이다!'

그리고 실제로 우리가 이처럼 그냥 병자가 고침 받고 
무슨 은사가 나타나는 것만 보고 '하나님은 살아계시구나' 이런 믿음이라면 
이건 믿음도 아니에요. 

마지막 때는 마귀는 더 무서운 미혹을 행할 거예요. 
성경에 그렇게 예언이 되어져 있습니다. 

마지막 때 마귀는, 진짜 죽은 자도 살려내는 그런 일들을  계13:12
막 도처에서 일으켜서 
'와 저 사람이 하나님의 종인가보다..' 이렇게 미혹할 때가 올 거예요. 
그때 그걸 어떻게 분별할 거냐 말입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은사의 나타남보다) 
내 안에 정말 주님이 계시고, 내가 주님과 동행하며 
그래서 성령의 열매가 맺어지는 삶을 내가 살고 있는가?' 그게 중요한 거죠. 

그래서 '주님과 동행하는 훈련부터 먼저 받자! 
어떤 의사나 능력은 주님이 원하시는 대로, 
주님이 기뻐하시는 뜻대로 하실 것이고, 
우리가 할 일은 주님과 동행하는 일을 하자!' 

그래서 이제 성도들에게 매일 일기(신앙에세이)를 쓰면서 
그리고 그것을 서로 나누면서,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자고 했던 거에요. 
그게 '예수동행일기' 사역의 시작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사와 이적을 행했던 많은 사람들이 
마7장에 보면, 주님 앞에 섰을 때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사와 이적을 행했던 사람들인데 
'내가 너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그런 말을 들을 거라는 거죠. 
한 두 사람이 아니고 '많은 사람들이' 그럴 거라는 거죠. 마7:22

여러분 우리가 능력과 또 권세가 있으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지금도 귀신에서 놓임받고, 병자도 고침받고, 
죽은 자도 주님이 살릴 자는 다 살려내세요. 

그건 사실 보고 믿을 것도 아닌 거예요. 
엘리사가 보지도 않았지만 
불말과 불병거가 도단성을 둘러싸고 있음을 알았듯이 

그걸 꼭 보아야 압니까? 
우리가 정말 분별해야 될 것은, 
더 이상 불법을 행할 수 없는 사람, 

더 이상 불법을 행할 수가 없어요! 주님을 친밀히 아니까요.

주님이 함께 계심을 아니까, 자기에게 은밀한 죄가 없어요. 그게 진짜 우리가 사모할 은혜에요. 

목사냐, 장로냐, 권사냐, 선교사냐? 
그런 직분.. 주님 앞에 섰을 때는 크게 중요하지도 않아요. 
'내가 몇 대 신앙의 후손이다' 그것도 중요한 게 아니에요. 

▲독립선언 민족대표 33인 중에 한 분이었던 정춘수 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분은 목사요. 감리교회 감독까지 지낸 분이에요. 

이분이 1903년 원산 하디 집회 때 회개한 사람이에요. 공개 회개를 했어요. 
그리고 하디 선교사에게 세례받고, 그리고 목사가 되고 
나중에 감리교회 감독까지 되지요. 
독립선언서 민족대표 33인 중에 한 사람이 됐어요. 훌륭한 사람이죠. 

그런데 이분이 감옥에 들어가서 고초를 한번 겪고 난 다음에 
완전히 변질이 됐어요. 친일파가 됐습니다. 

그래서 한국교회와 일본교회에 통합하는 일에 앞장서고 
교회 재산 팔아가지고 일본 비행기 헌납하는 일도 하고 
하여튼 노골적인 친일행각을 하고, 그러다가 해방이 됐는데 
그 친일행각이 문제가 돼 가지고, 감리교회에서 출교가 됐습니다. 
감독까지 했던 분인데... 

그리고 천주교에 입교했다가 625 전쟁 때 고향마을에 피난갔다가 
거기서 그렇게 죽었습니다. 
바로 이런 일이 지금도 우리 가운데 일어나고 있는 거예요. 

여러분이 진짜 구원받은 사람인지, 
정말 마지막 때에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그런 거룩한 성도인지는 
우리가 늘 잘 분별을 해야 하는 거예요. 

우리가 진짜 두려워해야 될 것은 
한번 복음을 받았고 그리고 구원은 받았는데 
내 영혼이 황폐해지는 거예요. 마음이 딱딱하게 굳어져버리는 겁니다

세월이 지나면 지날수록, 더 깊은 은혜의 사람이 돼야 되는데 
감동도 없고, 그리고 변화도 없고, 마음은 굳어져버리고 
정춘수 씨와 같이 되어버리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렇게 안타까워했던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이 굳어져버린 것이라고 그랬어요. 

히3:8, 10절에 보면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그들이 항상 마음이 미혹되어 내 길을 알지 못하는도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마음 아프셨어요.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이 굳어져버린 거죠. 

오늘 이 시간에 우리는 볼 수 없습니다. 
제 마음도, 여러분의 마음도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아요. 

그러나 하나님은 오직 하나를 보십니다. 
우리가 오늘 어떤 옷을 입고 왔는지, 우리의 외모가 어떤지.. 관심 없으세요.

오직 주님이 보시는 것은, 여기 있는 여러분들의 마음이에요. 
마음이 굳어져버린 사람.. 그건 심각한 문제에요. 

여러분, 마음이 굳어지려면.. 어떻게 해야 마음이 굳어지는 거죠? 
가만 내버려 두면 돼요. 
여러분, 땅이 어떻게 하면 굳은 땅이 됩니까? 그냥 내버려두면 굳은 땅이 돼요.
해마다 농사를 지으면, 땅이 곡식이 자랄 수 있는 부드러운 땅이 되지만 
그냥 내버려 두면 어느 순간에, 완전히 돌덩어리 같이 굳어져 버려요. 

우리의 마음이 꼭 그렇습니다. 
그래서 히2:13절에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 

'오늘이라 일컫는 매일 피차 서로 곧 면하여,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 
그래서 매일 예수동행일기를 쓰는 이유에요. 

'나는 오늘 기도생활, 말씀묵상, 하나님께 예배하는 일에 문제가 없었는지?' 
'나는 오늘 누구랑 대화하고 무슨 일을 했을 때, 늘 주님이 함께 계심을 
진짜 의식하고 살았는지?' 그걸 매일 점검하는 거예요. 

내 마음을 그냥 내버려두면.. 그러면 어느 순간에 굳어져버려요. 
자기가 굳어지는지도 모르고 어느 순간에 굳어지는 거죠. 

오늘 이 시간에도 기도가 안 되는 분이 있으실 거에요. 
통성으로 기도하고, 뜨겁게 소리질러 기도해도 기도가 안 되는 분,
기도가 자꾸 뭔가 이렇게 헛도는 것 같은... 자기도 모르게 굳어진 거예요. 

사랑이 없는 사람.. 마음이 굳어진 거예요. 
전도의 열정을 잃어버린 사람.. 자기도 모르게 마음이 굳어져버린 거예요. 
그 이유는, 그냥 내버려 두었기 때문에! 

예수동행일기를 매일 쓰고, 
그리고 '피차 서로 권면하라'는 거예요.

그래서 동행일기 나눔방에서 
서로 일기에 댓글을 달아드리고 점검해 드리면서 사는 일을 보고서 
많은 분들이 '꼭 그렇게 힘들게 살아야 되나?' 
그렇지 않으면 우리 마음이 다 굳어져버리기 때문이에요. 

▲여러분 예수를 믿어도, 자기 삶이 안 바뀐다고 답답해하시는 분들. 
예수 믿으시는 가족들, 남편과 아내, 부모님과 자녀들..  삶이 변했나요? 
예수 믿으면 진짜 삶이 바뀌나요? 

많은 분들이 '예수를 믿어도 삶은 안 바뀐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그건 사실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진짜 믿게 되면, 삶이 안 바뀔 수가 없어요. 
예수를 믿어도 삶이 안 바뀌는 것은, 이유가 딱 하나예요. 

날마다 보고 듣는 것이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TV, 인터넷, 무슨 동영상...

요즘 우리가 보고 듣는 것이 거의 '세상'으로 완전히 사로잡혀 있어요. 
그러면 반드시 마귀가 우리 속에 
우리가 늘 보고 듣는 인터넷 뉴스, 동영상이나 그런 것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계속 부추깁니다. 

결국은 우리 마음이, 성령의 역사하심에서 완전히 멀어져버려요. 
주님의 말씀에 대한 갈급함이 점점 없어져 버립니다. 

요즘과 같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세상이 이렇게 완전히 사로잡는 시대가, 인류 역사상 없었어요. 
요즘은 정말 특별한 시대에요. 

여러분, 꽤 인생을 오래 사신 분들, 
지금까지 여러분이 살아온 여러분의 생애만 놓고 보더라도 
요즘처럼 여러분의 눈을, 세상에 사로잡는 때가 과거에 있었나요? 

여러분, 기도 하고, 말씀 묵상하고 하는 마음이 
저절로 내 속에서 욕구가 되어져서 일어나야 되는데.. 그런 욕구가 없어요. 
기도 하고 싶고, 말씀 보고 싶고.. 이런 욕구를 전혀 느끼지를 못해요. 

왜? 우리 눈과 귀를 자극하는 게 너무 강력한 거에요. 
결국은 어떻게 되죠? 성령의 역사 다 소멸시키고 
내 마음의 은혜는 다 떠나고... 
그리고는 내 마음이 어느듯 황폐해지고, 기쁨과 감사는 다 사라지고... 

▲자 이걸 바꾸려면 
그러면 지금과 같은 형태, 
즉 오랜 시간 찬양을 같이 하고, 같이 또 뜨겁게 기도하고
그래야 해야 겨우 바뀌어요.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집회가 끝나고, 오늘 집에 가면 
또 이전과 똑같이 또 영상 보고, 인터넷 보고, 그러면
집회에서 회복했던 은혜는 다 사라져 버려요. 

그러니까 어느 순간에, 이제 집회에 참여하고 싶은 마음도 없어져요. 
왜요? 그래 봐야 그때는 은혜받은 것 같은데 
집회 후에 아무것도 달라지는 게 없으니까 그렇죠. 

아무리 좋은 말씀을 들어도 
아무리 성령의 체험을 강하게 해도 
내가 날마다 보고 듣는 것이 세상이면 
그러면 우리의 삶을 변화시킬 역사가 일어날 수가 없는 거예요. 

△음란물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계속 음란물을 보시는 그런 목사님과 
상담을 했습니다. 참 안타깝더라고요. 
그분도 '어떻게 하면 내가 여기서 벗어날 수 있을까?' 
그게 그 목사님의 간절한 소원이에요. 

근데 그 목사님과 같이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에 깨달은 것이 
그 목사님이 수시로 인터넷뉴스 보고, 수시로 영상 보고...

설교준비 하다가 잠깐 좀 쉴 시간에 또 인터넷 열어서 뉴스 보고 
어디 심방갔다가 집에 와서 컴퓨터에 앉으면 
또 뉴스 보고 무슨 영상 보고... 

그렇게 자꾸 보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어느 순간에 음란물로 들어가는 거예요. 
제가 권면했죠. '목사님, 진짜 주님과 동의하기를 원한다면 
그러면 보는 것을 철저하게 주님 앞에 복종시킵시다.' 
'주님이 보지 않게 하는 건 보지 않고, 항상 예수님을 바라봅시다!'

'24시간 예수님을 바라보자'고 한 이유가 거기에 있는 거에요. 
우리가 보는 것과 듣는 것만 주님께 집중하면 
그러면 우리의 삶에 변화가 일어나요.

△어느 사모님이 일기를 이렇게 쭉 쓰시는데 
정말 정직하게 자기의 극복이 안 되는 문제를 쓰셨는데 
그게 뭐냐면 게임을 하시는 거예요. 휴대폰으로 하는 게임,
'보석 게임'인가요? 

'오늘도 보석게임을 했다' 
참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일기에 나누자고 했으니까 
다른 분들도 '아유, 이 사모님이 이런 게임을 좋아하는구나' 

그리고 같이 기도도 해드리고 그런데 
그 다음 날도 '오늘도 보석게임을 했다' 그렇게 3일, 4일, 5일 지나가니까 
다른 사모님들이 걱정이 많습니다. 
'도대체 이 사모님은 언제까지 보석게임을 할 건가?'

숨기면 아마 몇 년을 갔을 거예요. 
빛 가운데 드러내고, 또 드러내고 하니까
어느 순간에 더 이상 게임 하지 않게 됐다는 거죠. 

우리는 날마다 보고 듣는 것이 주님 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죄와 세상에서부터 정말 우리가 지킴을 받으려면
주님의 빛앞에 우리가 날마다 자기를 점검하며 나아가야 하는 거죠. 

여러분 이렇게 살기 시작하는 일이, 우리 자신의 구원의 방주를 만드는 거에요. 

▲우리가 매일 일기를 쓰는 이유는,
더 이상 세상만 바라보고 살지 말고 
기도하고 살고, 또 말씀 묵상하고 살고, 
하나님께 예배하고 살고, 혼자 있는 시간에도 주님 바라보고 살자! .. 는 거죠.

바로 이처럼 늘 내 안에 오신 주님과 동행하며 살고자 하는 
그 마음의 간절한 갈망이 
방주를 짓는 노아와 같은 삶을 사는 거거든요

저는, 온전히 성경만 보고, 온전히 기도만 하는 삶
그러면 사회생활 제대로 못할 것 같았어요.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데 
어떻게 늘 성경만 보고 기도만 하고 살겠어요? 

꼭 들어야 될 뉴스는요. 그냥 다 들려주시더라고요. 내가 굳이 안 봐도. 
지나가는 길에 들려주고, 버스 타고 하다가 보면 전광판에 뜨고 
그걸로 충분하더라구요. 
'세상은 요즘 이렇게 돌아가고 있고, 저게 큰 뉴스구나' 그 정도로만 충분해요. 
더 깊이 파고 들어도, 아무것도 유익한 게 없어요. 

△예배드리는 모습을 보면 교인들이 다 똑같지 않습니다. 
어떤 분은 너무너무 은혜를 많이 받아요. 
찬송을 하는 것도, 기도하는 것도.. 
어떤 분은 너무 냉랭해요. 

그런데 은혜받는 건 왜 그렇게 다르지요?
주님을 주목하고 바라보는 게 다르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인생이 뒤집어지는 은혜를 받고 
어떤 사람은 보면 냉랭하게 집에 돌아가는 거예요. 
주님을 바라보는 믿음의 눈을 뜨는 일이 너무너무 중요해요. 

근데 주님이 역사 알지 못하도록 사니까 
날마다 세상만 보고, 영상 바라보고, 인터넷 뉴스 바라보고 
스포츠 보고.. 맨날 이런 식으로 사니까 
내 심령이 다 굳어져 버리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가 우리 자신이 방주를 짓는 삶을 살아야 돼요. 

▲지금 예수동행운동은 정말 노아 방주 짓는 것과
똑같은 과정을 겪고 오고 있어요. 
처음에 예수동행 운동을 시작할 할 때 
이 일이 제대로 될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어요. 

저도 기도 하는데 하나님이 '너는 실패할 거다' 아주 찬물을 확 끼얹어 주시더라고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진짜 '너는 실패할 거다'라고 말씀 하신 것을 의미는 
-너 실패한다고 해도 할 거냐?  
-안 된다고 해도 할 거냐, 반응이 없어도 할 거냐? 
-그래도 할 거냐, 아니면 될 것 같으니까 할 거냐? 
-안 될 것 같으면 안 할 거냐? 

하나님께서 그 때 저에게 다짐을 받으셨어요. 
그래서 '하나님, 실패해도 제가 가겠습니다.' 그리고 여기까지 온 거예요. 

이 일이 정말 주님이 원하시는 일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에요. 

우리가 예수님을 정말 개인적으로 알고 
주님과 동행하는 일이 우리에게 너무너무 중요하기 때문이었죠. 

▲하나님께서 왜 하늘에서 방주를 뚝 떨어지게 보내주시지 않으셨는가요?
아니 온 천지도 지으신 하나님, 
그리고 이 땅을 완전히 물바다가 되게 하셔서 
모든 호흡하는 것은 다 죽이시는 심판을 행하시는 하나님이잖아요.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노아의 방주를 
그냥 노아에게 그냥 내려주시면 쉽지 않습니까?

'너는 나를 온전히 믿는구나. 너는 정말 온전한 믿음을 가졌구나. 
그러면 내가 너를 구원받게 해주겠다. 어디 어디로 와라' 

그래서 가봤더니 방주가 있는 거예요. 
왜 이렇게는 하시지 않으셨을까요?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방주를 지을 때 
'네가 알아서 상자 같은 배를 하나 만들어 봐라' 이렇게 말씀 안 하셨어요. 

구체적인 크기와 모든 식양, 모든 나무 재질까지 다 정해 주셨어요. 
하나님께서 그 정확한 치수대로 지으라고 지시 해 주셨어요. 

그러니까 이 방주는, 사실 하나님께서 노아와 그 가족들이 
진짜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는 믿음을 길러주신 일이에요.  

우리에게도 똑같은 거예요. 여러분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성전이에요. 
우리가 노력해서 된 일이 아니에요. 

예수님의 십자가, 그 은혜로 
누구든지 예수를 믿으면 우리 안에 성령이 오셔서 
우리는 하나님의 성전이 되어버렸어요. 

여러분이 성전이 되고 싶다/ 안 되고 싶다.. 하는 문제가 아닌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의 성전을 되었지만 
성전 답게 사는 일은, 우리가 해야 하는 거예요. 

만약에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이 됐다고 해도 
성전 답게 살지 않으면, 성전을 정결하게 관리하지 않으면 
성전을 멸하시겠다고 하셨어요. 

고전3:17절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그러니까 우리가 성전된 삶을 살아가는 일.. 그게 방주 지어가는 일이에요. 
그냥 저절로 되는 일이 아니라니까요. 

'내 안에 하나님이 계시다. 나는 왕을 모시고 사는 사람이다'
이 사실을 정확하게 알고, 믿고, 
그리고 그대로 누구를 만나든, 무슨 일을 하든.. 
그렇게 사는 사람이 되는 것이 '예수동행 운동'의 목표라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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