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값은 얼마입니까? (고전 6:19-20)
고린도는 고대 그리스의 대도시로서 로마의 침입에 항전했던 그리스의 최후의 보루였는데 로마에 의해 패망한 후 100여 년 동안은 폐허가 되었다가 그 후 1세기가 지난 기원전 44년에 로마의 시저에 의해 재건되었습니다. 그리고 기원전 27년에는 아가야 지방의 수도가 되어 로마의 총독이 거주하게 된 오래된 도시입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를 기록할 때는 고린도는 금융과 무역, 그리고 선박으로 번창했고 많은 외국인들이 모여 살고 있는 국제도시였습니다. 많은 철학자들과 웅변가들도 고린도로 모여들었고, 여러 나라의 종교도 많이 들어와 종교 박물관과도 같은 그런 도시였습니다. 상업과 학문, 각종 운동경기도 성행하는 고린도는 그야말로 활기찬 도시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러한 발달한 도시 문화 속에 죄악의 그늘도 짙게 깔려 있었습니다. 그곳에는 유명한 '아폴로 신전'이 있었는데 그곳에는 1,000여 명의 여 사제가 그곳에서 성관계를 갖는 것이 제사행위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고린도는 성적으로 타락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에는 타락한 사람을 말할 때 '고린도인들처럼 산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이런 이방인의 풍습이 교회에까지 파고들어 교인들을 타락시키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신앙 안에서의 자유'를 오해해서 '믿음'으로 구원을 얻기 때문에 '행위'는 아무렇게나 해도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즉 신앙이란 영적인 것이기 때문에 육체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주장하며 육체적으로 무슨 일을 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이와는 반대로 '육은 악하기 때문에 육체의 욕구를 완전히 차단해야 한다는 금욕주의자'들도 있었습니다.
신앙인의 삶에 대한 이러한 극단적인 두 태도는 고린도 교회를 심각하게 분열시켰고 급기야 교회에 큰 위기를 초래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 편지를 통해 영과 육을 분리하지 않는 기독교 진리를 전하면서 '전인적인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에 대해 가르치고 있습니다.
바울은 단호하게 말합니다. 15절에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네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가지고 창기의 지체를 만들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사람들은 '내가 내 몸 가지고, 내 돈 가지고, 내 맘대로 하는데 무슨 상관이냐'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정말 내 것입니까? 오늘 본문에서 바울의 가르침을 보세요! 그 당시 고린도교회에 준 말씀이 오늘 우리를 향한 말씀입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제목소개!▶
여러분! 이 세상에서 누가 가장 중요하고 가장 귀하고 값진 사람이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자식입니까? 부모입니까? 아내입니까? 자식이 귀하기는 합니다. 그래서 자식 때문에 목숨을 버리는 부모도 있습니다. 부모와 아내도 소중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부모를 위해서 희생하는 자식도 있고, 아내가 죽은 뒤 따라 죽는 이도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이보다 더 소중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내 자신입니다. 내가 없는 세상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마16:26절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고 하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나라는 존재는 이렇게 중요한 존재입니다.
나는 이 세상에서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가장 값진 존재입니다. 얼마만큼 값진 존재인지 시16:3절 "땅에 있는 성도는 존귀한 자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저희에게 있도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소망이 우리들에게 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적어도 우리의 이름이 하늘의 생명 책에 기록되어 있을 만큼 존귀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같은 기쁨이 없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감사함이 없습니다. 자기의 가치에 대해서 무감각합니다.
여러분! 참 기쁨과 감사함을 느낄 때는 언제입니까? 그것은 자기의 존재 가치를 발견했을 때입니다. 자기 자신의 가치를 알고 값을 알 때 기쁨이 나오고 용기가 나오게 됩니다. /믿/
여러분은 탕자의 비유를 잘 아십니다. 탕자가 집으로 돌아옵니다. 오면서 스스로 생각합니다. 자기가 자기를 보아도 죽일 놈입니다. 아버지의 재산을 모두 탕진했습니다. 그것도 사업을 하다가 실패한 것도 아니고 창기와 함께 놀아나다가 탕진을 했습니다. 게다가 몸에 병까지 들었습니다. 자기가 자기를 보아도 한심하게 보입니다. 자기가 자신을 보아도 용서가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생각합니다. '염치는 없지만 이제라도 아버지께로 돌아가자, 가서 감히 아들이 왔다고 말할 수는 없고 일꾼 중의 하나로 밥이나 먹여 달라고 하자' 그래서 집으로 돌아옵니다. 지금 탕자는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완전히 폐인이 되어 돌아오고 있습니다.
고향은 참으로 좋은 곳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죽어서라도 고향에 묻히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좋은 고향도 금의 환향하는 사람이나 좋은 곳이지 실패한 사람은 갈 곳이 못 되는 곳이 고향입니다. 병들고, 실패하고, 탕진한 사람이 무슨 얼굴로 고향에 갈 수 있습니까? 그렇지만 탕자는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탕자 아들을 맞아들이는 아버지의 모습은 진지합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보자마자 뛰어나가서 맞아들입니다. 그러고는 '소를 잡아라. 목욕을 시키고 가락지를 끼우라. 잔치를 베풀라'고 말합니다. 아버지는 탕자를 여전히 완전한 아들로 영접하고 있습니다. 내가 나를 보는 관점과 아버지가 나를 보는 관점이 극과 극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대하시는 모습입니다. /이해가 되시면 아멘!/할/
사람들은 자신을 비하하고 비참하게 생각할 때도 있지만 하나님은 나를 보고 '여전히 천하보다도 더 값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땅에 있는 성도는 존귀한 자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저희에게 있도다' 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말씀인가?
여러분! '하나님이 왜 내게는 복을 주시지 않을까?'하고 서운해 할 필요 없습니다. 그 십자가 속에 나의 값이 다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직 십자가만 바라보고 나아갈 뿐이고 이 소중한 십자가를 간직하고 살아갈 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같은 값을 알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그 같은 의미와 뜻을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서 누구보다도 가장 존귀한 존재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서 독생자까지도 아낌없이 내주셨습니다. 우리는 굉장히 존귀한 존재들입니다. 사49:5절에 '나는 여호와의 보시기에 존귀한 자라 나의 하나님이 나의 힘이 되셨도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같은 값을 모르고 살아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때로 비관도 합니다. 자포 자기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심지어는 세상에 태어난 것을 저주스럽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것은 값을 몰라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값을 알고 살아가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입니다.
사람이 자기의 값을 모르고 자기의 가치를 모르고 산다는 것은 참 불행한 일입니다. 그래서 어떤 이는 생을 포기하기도 합니다. 어떤 이는 자포 자기하기도 합니다. 또 어떤 이는 이 믿음의 길에서 미련 없이 떠나버리기도 합니다. 모두 자신의 값을 몰라서 그렇습니다.
여러분! 행복과 기쁨이 언제 옵니까? 그것은 자신의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능력과 자질을 발견했을 때입니다. 이를테면 자신의 가치를 발견했을 때 사람은 행복을 느끼고 기쁨을 누리게 되며 보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학자 칼 바르트는 '나는 십자가만 쳐다보면 나의 값을 발견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귀하게 여기셨으면 '독생자를 십자가에 죽이면서까지 나를 구원하였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십자가만 쳐다보면 나의 값을 발견하게 되고 용기를 얻게 된다고 고백했습니다. 값을 알고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 모두는 엄청난 값을 지닌 사람들입니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①우리의 가치 때문입니다. 사람이나 물건이나 가치가 있으면 존귀한 법입니다. 물건을 보면 어떤 물건은 다른 물건에 비해서 월등하게 값이 비싼 것이 있습니다. 금이나 진주 같은 것은 그 어떤 물건보다도 값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물건 자체가 값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보화라고 합니다.
이것은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은 그 사람이 지니고 있는 가치 때문에 다른 사람에 비하여 귀하게 여김을 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두뇌가 좋다든지 특별한 재능이 있는 사람은 그것이 그 사람을 값이 있게 만들어 줍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들이 존귀한 것은 그리스도인에게는 그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을 받은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구원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입니다. 얼마나 귀한 사람들입니까? 우리는 이 점에 있어서 만은 확실해야 합니다. 나는 적어도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을 받은 존귀한 사람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이 같은 의식이 있어야 어떤 사명감 같은 정신을 가지고 살아가게 됩니다.
②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귀한 것은 바로 이 쓰임새, 즉 용도 때문입니다. 자동차나 비행기가 귀한 것은 현대 생활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되는 문명의 도구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 앞에서 귀한 것은 모양이 좋고 생김새가 아름다워서가 아닙니다. 바로 이 쓰임새 때문입니다. 적어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위해서 쓰임 받는 그릇 즉 도구들입니다. /믿/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서 부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귀한 존재들입니까?
그리스도인들은 '나는 하나님을 위해 사용되고 있는 도구다'라는 의식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이 의식을 통해 방종을 막을 수 있고, 허황한 꿈이나 세상의 유행이나 시대적인 그릇된 풍조에 휘말리지 않게 됩니다.
가끔 신문을 보면 정치하는 사람들이 뇌물을 받았다 해서 야단이 날 때가 있습니다. 교육하는 사람들이, 예술을 하는 사람들이, 돈을 받고 조작을 하고 부정을 저질렀다고 야단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의식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정치를 하는 사람이 '나는 나라를 위해서 쓰임 받고 있는 도구다'하는 의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뇌물을 받지 않습니다.
교육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신성한 교육을 위해서 부름 받은 도구다'하는 의식을 가지고 있다면 부정 입학도 시험지를 빼돌리는 것도 절대 안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나는 하나님을 위해서 쓰임 받고 있는 도구'라는 의식이 있다면 어떻게 세상을 막 살아갈 수가 있겠습니까? 모두 이 의식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이 같은 의식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할/아멘!/
③우리 주인이 귀하기 때문입니다. 하찮은 물건이라도 그 주인이 귀하면 그 물건도 귀해지는 법입니다. 박물관에 가보십시오. 그곳에 보관되어 있는 물건들은 하나 같이 귀한 것들입니다. 귀하기 때문에 그곳에 보관해 둔 것입니다. 세종대왕이 사용했다는 벼루는 무엇보다도 귀한 보물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이 존경하는 세종대왕이 사용했던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이순신 장군이 사용했던 칼도 귀한 보물입니다. 이순신 장군이 나라를 위해서 사용했던 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칼을 보면 의미가 담겨 있고 역사의 정신이 담겨 있습니다. 미국에서도 가장 귀한 보물을 말할 때는 링컨이 사용했다는 만년필을 꼽는다고 합니다. 위인 링컨이 사용한 것이고 또 그 만년필은 노예 해방 문서에 서명한 만년필이기 때문에 더욱 값이 있는 것입니다. 그 물건 자체가 귀한 것은 아닙니다. 그 물건의 주인이 귀하기 때문에 귀할 뿐입니다.
세상의 그리스도인들이 존귀한 이유는 생김새가 아름답거나 지식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그것은 나의 주인이 하나님이시고 그 하나님이 귀하시기 때문에 내가 귀한 것입니다. 무당이 귀한 사람일 수가 없는 것은 그의 주인이 귀신이기 때문입니다. 술주정뱅이가 귀할 수 없는 것은 그를 지배하고 있는 주인이 술이기 때문입니다. 성도가 이 땅에서와 하나님 앞에서 존귀할 수밖에 없는 것은 우리들의 주인이 귀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믿/
④하나님의 우리를 인정하심 때문입니다. 우리가 존귀한 것은 하나님이 인정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황송하게도 우리들을 향하여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하셨습니다. 또 천하보다도 귀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천사도 흠모하는 대상이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그러면서 20절에 '값으로 산 것이 되었다'라고 말합니다.
요즘 여자들은 무섭습니다. 부인들이 목욕탕에 앉아서 그르더랍니다. '당신 남편은 얼마짜리야?' '시시해 한 2천만원짜리 되나봐' '그래? 시시하네. 시시한 사람과 계속 살 거야?' '생각해보고 있는 중이야' 세상에 자기 남편을 돈으로 계산해서 가치를 평가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요즘 남자들이 불쌍해졌습니다. 기죽어 살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 지위를 보면서 기죽고, 다른 사람의 사는 집을 보면서 기죽고, 집에 와서 마누라한테 기죽고 삽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께서 사도 바울을 통해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알지 못하느냐 내가 너희를 값으로 샀다'고 하십니다. 이 값을 알아야 합니다. /아멘!/ '네 값이 얼마인줄 아느냐?' 이것은 '너희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생명과 맞바꾼 존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값을 알고 사는 것이 축복입니다. 다윗은 시139장에서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신묘막측하심이라'고 했습니다. 또 다윗은 시8편에서 자기가 사람으로 태어난 것, 그리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렇게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는지 너무 너무 감사해서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이렇게 고백하면서 5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저를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저를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셨다.' 이것은 육체를 입고 있는 인간은 천사보다 조금 못하지만 결국 우리는 천사보다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러므로 천국에 가면 천사가 우리를 섬길 것입니다. 지금도 우리를 섬기는 천사가 있습니다. 그러기에 땅에서 몸을 입고 있는 동안에는 천사보다 조금 못한 죄인의 상태에 있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천사가 할 수 없는 영화와 존귀의 관을 씌우셨다는 것입니다. /감사하지 않습니까?/
이것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창1:26절에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자기 존재가 하나님의 창조물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것입니다. 우리 부모가 나를 이 세상에 창조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나를 창조했다고 하는 창조적 존재라는 신성한 창조적 인생관을 가져야 합니다. /아멘!/
이 세상에는 두 가지의 가치관이 존재합니다. 하나는 상대적 가치관이요, 하나는 절대적 가치관입니다. 상대적 가치관을 비교 가치라고 말하고 절대적 가치를 창조적 가치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각각 창조했기 때문에 아무와도 비교할 수 없습니다. /믿/ 그런데 우리가 끊임없이 우리의 인생을 낙심시키고 좌절시키는 것은 상대적 가치관 때문입니다.
사는 생활을 비교하고, 학위를 비교하고, 재능을 비교하고, 각각을 비교하다가 자기 스스로 자기 자신을 열등 비화시키면서 우리는 낙심하고 좌절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그 어떤 사람과도 비교할 대상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각각 나대로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공부를 잘하고 못하는 것 때문에 내 인생이 거기에서 비교될 대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윗은 이런 고백을 합니다.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 발아래 두셨으니'(시8;6) 여기서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 이것은 천지 창조물입니다. 천지 창조물을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여기서 다스린다는 말은 '주인'이라는 말입니다. 천지만물을 다스리면 이 세상의 주인이 누구입니까? 내가 됩니다.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했다' 다스리는 자는 주인입니다. /할/
이 역사의 센터가 어디입니까? 우리가 서 있는 자리입니다. 내가 서 있는 자리입니다. 이 나라의 주인이 누구입니까? 나입니다. 주인의식을 가지면 역사가 바꾸어집니다. 주인의식이 없는 대통령보다 주인의식을 가지고 있는 농부가 이 민족의 애국자입니다.
이 의식을 하나 가지면 세상이 달라집니다. 자기가 청소하는 자리에서 '내가 이 자리의 주인이다'라고 생각할 때 세상이 내 집이 됩니다. 회사에서 사장이 있지만 주인처럼 일하면 그 사람이 사장이 됩니다. 노동자와 사장의식과 주인의식을 가진 사람은 다릅니다.
▶셰익스피어가 어느 음식점에 갔는데 모든 사람들이 다 모자를 벗고 그를 맞이했습니다. 그러니까 거기에서 웨이터 노릇을 하는 음식점의 한 소년이 한숨을 쉬면서 '나는 언제 저런 사람이 되나'하고 한숨을 쉬자 셰익스피어가 등을 두드리면서 말하기를 '오, 소년 자네도 일할 때 내가 글을 쓰듯, 미켈란젤로가 조각을 하듯 그릇을 닦을 때 주인의 마음으로 닦게. 음식을 나를 때도 주인의 심정으로 배달해 보게 그러면 먼 훗날 모든 사람들이 모자를 벗고 자네를 우러러 볼 것이네' /할/
시8:6절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 발아래 두셨으니" '만물을 발아래 두었다.' 이 말은 '만물을 디디고 서라'는 말입니다. 이 세상을 발로 디디고 서서 살게 했지 세상에 넘어지거나 세상을 부둥켜안고 살게 하지 않았습니다. 왜 우리가 만족하지 못합니까? 세상 모든 것을 품으려고 하니까 그렇습니다. 이 세상 것은 발로 디뎌야지 아무것도 가슴에 품을 것이 없습니다. 가슴에는 오직 하나님만 품어야 합니다. /아멘!/
'만물을 발로 디뎌라' 이것은 승리자의 고백입니다. 자기 존재가 창조적 존재요, 예수의 피 값을 지불한 거룩한 존재라고 느낀다면 그때부터 이 세상의 주인이요, 발로 디디고 서서 승리자로 당당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엡1;5절에서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기 위해서 양자로 삼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양자를 삼았느냐'라는 대답이 3절에 있습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할/
복 주시려고 양자를 삼았다는 것입니다. 자녀 없는 부모들은 양자를 삼습니다. 양자를 삼는 이유가 두 가지 있습니다. 자기에게 있는 모든 재산을 그 자식에게 주려고 양자 삼습니다. 그리고 사랑해주려고 양자를 삼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의 양자로 삼으신 것은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주시려고 우리를 자녀 삼으셨습니다. 이 사실만 바로 알아도 우리는 우리의 값을 측량해 볼 수 있습니다. /아멘!/
▶미국 오페라 계에 유명한 '힐리니 헐버튼'이라는 가수가 있습니다. 그 가수가 어느 날 2층 창 밖을 내다보다가 우연히 자기 집 아이와 이웃집 아이가 놀다가 하는 얘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이웃 집 아이가 '우리 아버지는 시장님과 아주 잘 알아 그래서 시장님과 골프 치러 갔다'고 자랑하니까, 자기 아들이 '우리 아버지는 하나님을 잘 아신다. 우리 아버지는 하나님의 사랑을 날마다 받는다'고 하더랍니다. 이 얘기를 듣던 '헐 버튼'이 그만 창가에 서서 '하나님! 감사합니다. 그 사랑을 아들을 통하여 깨닫게 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소리내어 울었답니다. /할/
▶본문을 통하여 몇 기지로 생각해 보겠습니다.
①우리의 몸은 하나님께로 받은 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것을 한번 살펴보면 참 신기하고도 정교합니다. 사계절 변화하는 자연의 신비를 보세요! 과연 경탄할 만 하고 모두가 신비합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더 신비하고, 하나님 자신도 '참 좋았더라'고 감탄하신 창조물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인간의 몸입니다.
▶우리들의 몸을 한번 찬찬히 관찰해 보면 참 오묘합니다.
⑴먼저 머리를 보십시오. 머리는 육체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핵입니다. 그 속에는 수천 개의 세포 조직이 들어 있습니다. 수많은 조직들 중에 하나만 이상이 생겨도 문제가 발생합니다.
⑵그리고 눈을 보십시오. 얼마나 맑고, 정밀하고, 사물을 보고 식별을 하고, 또 색깔을 음미할 수 있는 그야말로 오묘하고도 신비한 기구입니까?
⑶또 손을 보십시오. 창조물 가운데서 유독 인간만이 손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물들을 만드실 때 인간에게만 손을 주셔서 그 손으로 발명하고 창조해서 문화 생활을 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세계에만 역사가 있고, 창조가 있고, 문화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어디 손가락뿐이겠습니까? 코, 귀, 가슴, 다리의 역할은 또 얼마나 중요합니까? 하나님은 이렇게 정교하게 우리의 몸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몸으로 자신의 삶을 살되 몸을 망가트리지 말고 건강하게 잘 관리하라고 분부하셨습니다.
②내 몸은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입니다.
우리는 이 점을 분명히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본문도 '우리 몸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 개념부터 바로 이해해야 합니다. 내 몸의 실질 소유자는 하나님이십니다. /믿/
그래서 나에게는 내 몸이 병들지 않도록 잘 관리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리고 내 몸을 더럽히지 않도록 잘 관리할 책임도 있습니다. 내 몸이 병들면 우선 하나님이 손해를 보십니다. 그리고 국가가 손해를 보고, 가정이 손해를 보고, 사회가 손해를 보게 됩니다. 또 그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 아닙니다.
유교의 정신에서 보면 육체는 부모로부터 주어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몸을 상하거나 병들거나 추하게 굴리면 불효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에서는 이것을 한 차원 더 높여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 몸은 하나님께로부터 왔기 때문에 내가 내 몸을 잘못 관리해서 병들거나 추하게 만들면 그것은 죄라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사람들이 내 몸을 내 것이라고 생각할 때 어떤 결과가 옵니까? 그때는 내 몸을 함부로 사용하게 됩니다. 범죄에 사용하기도 합니다. 악의 구렁텅이로 몰아넣기도 합니다. 내 몸을 방탕으로 병들게 하기도 합니다. 술로 망가트리고, 마약으로 병들게 하고, 음행으로 추하게 만들고 맙니다.
또 내 몸을 상품화해서 사고 파는 매춘 행위를 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때로는 자살을 해서 죽기도 합니다. 왜 이러한 결과들이 나옵니까? '내 몸을 내 것'이라고 생각해서 그렇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내 몸은 내 것이 아니다'라는 의식을 바로 가질 때 세상을 살 때 방종하지 않게 됩니다. /할/
③내 몸이 어떤 몸입니까? '성령의 전'입니다.
"너희 몸은...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이 말씀은 내 몸 속에 성령께서 내주해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몸의 주인은 내가 아니고 성령이십니다. 우리는 내 몸을 내 마음대로 더럽힐 수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내 속에 성령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믿/ 그렇습니다. 모든 믿는 자 속에는 성령 하나님께서 계시면서 우리를 인도하고 계십니다.
성경에서 성령을 나타내는 단어는 구약 히브리어로는 '루아흐'라고 했고, 신약에는 헬라어로 '퓨뉴마'라고 했는데 이 단어의 뜻은 '바람 혹은 호흡, 생기'라는 뜻입니다. 무엇을 의미합니까?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에 생기를 넣어주고, 삶의 바퀴가 잘 굴러가게 바람을 넣어주는 역할을 하시는 분이 성령이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활력 있는 삶, 능력 있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성령을 모셔드리고 환영하고 영접하고 인정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하심을 믿는 것'입니다. /할/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 인줄 알지 못하느냐?" 여러분은 알고 있습니까? 알고 믿으시기 바랍니다.
④왜 우리의 몸이 하나님의 것입니까? 그 분이 값을 주고 사셨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하나님께서 치른 값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의 보혈입니다. 그것을 '하나님이 자기피로 사신 교회'(행20:28) 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몸은 우리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너희는 너희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다" 즉 우리를 예수께서 피를 주고 사셨다고 합니다. 완전히 우리의 소유권이 이전된 것입니다. 그래서 사실은 나의 생명도 내 것이 아니고 나의 시간도 내 것이 아니고 나의 재산도 내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다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언제 이런 소유의 전환이 일어났는가? 우리가 예수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순간부터 이런 소유의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왜 우리를 피 값으로 사셨습니까?
벧전2:9절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의 소유권이 하나님에게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⑴제일 귀한 것으로 샀다는 말입니다. 이 세상에서 사람의 생명보다 더 귀한 것은 없습니다. 마16:26절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바로 그 귀한 예수님의 생명을 지불하고 우리를 사서 하나님께 드렸다는 말입니다. 금이나 은, 썩어질 것으로 산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명을 내어 주셨습니다(벧전1:23).
또, 양이나 염소, 송아지 등 동물의 피를 주고 산 것도 아닙니다. 자신의 생명을 주셨습니다. 히9:12절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죽음 앞에 초연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달랐습니다. 사53:7절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 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얼마나 억울한 죽음입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의 죄 값을 지불하기 위해 조용히 생명을 내어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이 피를 주셔야만 했을까요? 히9:22절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구약의 제사는 피 뿌림으로 정결케 되었고, 유월절 어린양의 피가 죽음을 건너뛰어 유월 시켰습니다. ▶히브리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가장 완전한 제사요, 가장 고귀한 제사요, 영원한 제사'임을 강조합니다.
⑵우리는 주님의 것이라는 말입니다.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구속하다'란 뜻입니다. 피를 지불하는 것 자체가 바로 구속이라는 말입니다. 원래 이 말은 전쟁 포로를 본국으로 데려오기 위해 돈을 지불하거나, 노예가 자유를 얻기 위해 돈을 지불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죄로 인하여 노예상태에 있을 때, 구원하시기 위해 주님께서 피를 지불하신 것입니다.
일단 대가를 지불하고 사오면 그 소유권은 사온 사람에게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피 값을 지불하고 우릴 사셨다는 것은 곧 소유권이 주님이십니다.
사43:1절 "야곱아/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우리는 너무도 엄청난 실수를 합니다. 나의 생명이 나의 것이라 착각합니다. 나의 가족이, 나의 재산의 나의 것이라 착각합니다. 착각에서 빨리 깨어나야 합니다.
⑶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증거입니다. 주님께서 우릴 사랑하시지 않았다면 죄 가운데 있든지, 무지하게 살든지, 지옥으로 가든지 참견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분은 우릴 너무나 사랑하시기에 죄 가운데 빠져 사는 걸 두고 볼 수 없어 자신의 생명을 지불하고 사 주신 것입니다(요3:16).
주님은 우릴 피 값으로 빼내어 나라와 제사장을 삼아 주셨습니다. 놀라운 은혜입니다. 이 값을 알고 살아야 합니다. /아멘!/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 삼으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왕처럼, 왕답게 사시기 바랍니다. ▶제사장으로 삼으셨습니다. 제사장은 백성의 죄를 위해 제물을 드리고 기도하고 축복을 비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죄를 위해 희생을 드려야 하고, 축복을 빌어주며, 민족을 위해 기도할 특권이 있습니다. 우리는 제사장의 영적 권위를 가진 사람들로 당당하게 세상의 악한 영의 지배에 맞서는 용기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할/
⑤우리의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은 이 세상에서 해야 할 일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으로 영광을 돌려야 하는가?
⑴예배로 영광을 돌리라! 예배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사람을 내신 첫 번째 목적입니다. 예배의 사전적 의미는 '초월적 존재 앞에 경배를 드리는 행위'입니다. 하나님 앞에 엎드리고 찬양하는 게 바로 예배입니다. 예배라고 말할 때, 많은 사람들이 의식적인 예배시간만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배는 그 이상임을 알아야 합니다. 예배시간에 찬양하고 말씀을 듣고 기도하며 헌금을 드리는 것 이상입니다. 삶의 현장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즐거워해야 합니다. 의무가 아니라 즐거움이 따르는 헌신이어야 합니다.
예배는 주의 사랑 때문에 헌신하고, 사랑 때문에 시간을 드리고, 사랑 때문에 물질을 드리는 행위입니다. 야곱이 라헬을 사랑하였기에 칠 년을 수일같이 여기며 라반의 집에서 종살이를 자처합니다. 예배는 이런 사랑의 심정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⑵이웃을 사랑함으로 영광을 돌리라! 가장 큰 계명은 사랑의 계명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귀한 게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행위는 예배를 통하여 나타납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행위는 이웃을 가족처럼 생각하는 데서 나타납니다. 우리는 모두 한 형제요 한 자매입니다.
▶성경에도 나오는 페르시아에 고레스라는 왕이 있었습니다. 이 왕은 주전 6세기에 사람인데 아주 덕망이 높은 왕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을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시켜 준 그런 고마운 왕입니다. 이 왕이 주변 나라를 정벌할 때 적국의 왕과 왕의 아들, 왕의 부인, 그 가족 전부를 포로로 잡혀 왔습니다.
'이제 죽이느냐 살리느냐'하는 중요한 시간이 왔습니다. 그 때 고레스 왕이 적장의 왕을 보니 죽이기에는 참 아까운 사람 같았습니다. 그래서 그를 향해서 말하기를 '만일에 내가 당신을 살려주면 당신은 나에게 무얼 주겠소?' '저는 내 재산 절반을 드리겠습니다.' 그 아들을 보면서 '이 아들을 해방시켜주면 어떻게 하겠소?' '나머지 재산을 다 드리겠습니다.' 이번에는 그 아내를 보면서 '당신의 아내를 내가 풀어주면 당신은 어떻게 하겠소?' 그러자 지체 없이 힘주어 말하기를 '그리하면 내 생명을 드리겠습니다.' 그 소리를 듣고 고레스 왕은 입가에 미소를 띠면서 명하기를 '이들을 전면 사면하노라' /할/ 사랑이 이렇게 고귀합니다.
⑶이웃을 섬김으로 영광을 돌리라! 마20:28절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 물로 주려 함이니라" 하나님이 주신 재능, 재산, 은사, 기술을 가지고 이웃을 섬겨야 합니다. 자기 혼자 먹고살라고 여러 가지 재능과 은사와 물질을 주신 게 아닙니다. 다른 사람을 도우라고 주셨습니다.
⑷말씀을 전함(전도)으로 영광을 돌리라! 입은 말함으로 그 가치를 드러냅니다. 무슨 말을 해야 합니까? 욕하고 불평하고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을 찬미하고 그 도를 전하는데 있습니다.
⑸착한 행실로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여기서 착한 사람은 '약간 손해를 보는 믿음의 삶'입니다. '한쪽 뺨을 때리면 다른 쪽도 돌려주는 그런 삶'을 말합니다. 그러면 처음에는 바보인 줄 알다가도 결국 그가 섬기는 하나님을 찬양하게 됩니다.
⑹감사함으로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시50:23절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일은 이론이나 어떤 법칙이 아니라 믿음의 행동입니다. 교부 '이레니우스'는 '하나님의 영광은 인간이 온전히 살아가는 그 자체다'라고 말했습니다. /할/
⑥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아야 합니다!
갈5:1절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케 하시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이제 우리는 죄의 종이 아니라 의에 종이 되었습니다. 롬6:17-18절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할/ 종이 되려면 죄의 종이 되지 말고 의의 종이 되십시오. 주인을 잘 만나면 종도 팔자를 고치게 되지만 주인을 잘 못 만나면 고생을 많이 하게 됩니다. 세상 사람들은 다 죄악의 종이므로 그 죄 값으로 심판을 받고, 멸망을 당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롬8:1절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할/아멘!/
▶피카소의 작품 중에 '황소 머리'라는 조각이 있습니다. 이 작품의 값은 부르는 게 값입니다. 수천만 원을 부르면 수천만 원이 되고, 수억 원을 부르면 수억 원이 됩니다. 그래서 값으로 환산하기 어려울 정도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합니다.
특히 이 작품은 피카소의 예술성과 독창성이 가장 잘 드러난 것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작품의 재료가 되는 자전거는 피카소가 쓰레기장에서 주워온 것이라고 합니다. 피카소는 그런 자전거를 값으로 환산할 수 없는 예술작품으로 변화 시켰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처럼 누가 손을 대느냐에 따라서 그 가치는 완전히 달라질 수 있습니다. 버림받고 아무 쓸모도 없는 쓰레기도 피카소가 공을 들여 작품으로 만들었더니 수천만 원, 수억 원짜리가 되었습니다.
피카소의 손만 닿아도 이렇게 달라지는 데, 만약 하나님의 손길이 여러분에게 닿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나님의 손길이 여러분의 인생에 닿고,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해 주신다면 쓰레기 같은 인생, 저주받은 인생, 버림받은 인생도 하나님께서 높이 들어서 영광스럽게 만들어 주십니다. /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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