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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행 20:31-35)

by 【고동엽】 2022. 2. 8.

주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행 20:31-35)

 

바울은 처음 안디옥교회에서 선교사로 파송 받아 선교사의 길을 걸었습니다. 바울은 일생에 3차에 걸쳐 세계선교여행을 했습니다. 1차는 '구부로, 비시디아 안디옥, 이고니온, 루스드라' 등을 여행하며 전도했습니다. 2차는 '빌립보, 데살로니가, 베뢰아, 아덴, 고린도' 등을 여행하며 전도했고, 3차는 주로 '에베소'에서 3년 동안 전도했습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여러 전도지역 중에서도 특히 에베소에 대해서 애착을 많이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바울의 전도지역 가운데 가장 많은 성공을 거둔 지역이 에베소 지역입니다.
이제 바울은 인생도 황혼기에 와 있고 선교할 시간도 얼마나 남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평소 꿈대로 바울은 로마에 가서 전도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기로 작정합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면 다시 에베소에 방문하기가 어렵게 됩니다. 그렇다고 지금 바울은 드로아에 머물고 있는데 약 50km 거리에 있는 에베소를 방문하기가 시간상으로 어렵습니다. 그래서 에베소의 장로들에게 기별하기를 중간기착지인 밀레도로 나오라고 기별해 놓았습니다.
밀레도에서 바울은 에베소교회의 장로들을 반갑게 만나서 해후하고 그들에게 마지막으로 설교하는 내용이 본문 17-35절의 말씀입니다. 여기서 사도바울은 3년 동안의 에베소에서의 삶을 결산하는 고별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그 설교내용이 이런 내용입니다. '이제 나는 예루살렘으로 가서 전도하려 결심했다, 그런데 내가 예루살렘에 가면 분명 순교하게 될 것이다. 거기서 죽게 되면 주님을 위해서 기꺼이 순교하겠다, 그러니 당신들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을 잘 돌봐달라, 내가 에베소에 있는 동안에 은이나 금 그리고 의복을 탐하지 않았다, 나로 인해서 손해보고 억울한 일 당한 사람 있으면 말해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권고하는 말씀이 35절 말씀입니다.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범을 보여준 바와 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 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십시오.'하고 설교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다 크게 울며 바울의 목을 안고 입 맞추고 다시 그 얼굴을 보지 못할 것을 생각하고 근심하며 전송했다고 했습니다. 참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이것은 바울의 설교입니다만 본문 35절하반절에 보면 '주 예수가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 보다 복이 있다.'라는 말씀으로 미루어 바울의 이야기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고 하신 이 말씀은 4복음서에서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복음서에서만 주님의 말씀이 다 기록된 것은 아니고 본문의 메시지는 주께서 중요하게 강조하신 말씀으로 그 당시 제자들에 의해서 구전된 것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이러한 말씀을 늘 강조하셨다고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것으로 생각되어집니다. 이 메시지는 팔 복과 함께 '참된 행복이 어디에 있는가?'를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메시지이기 때문에 많은 성경학자들은 이 말씀을 '제9복'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할/

 

1. 우리는 먼저 사도 바울의 삶을 조명해 보고 우리도 그의 삶을 배워야 합니다.

 

①그는 '즐거움으로 주의 일'을 했습니다.
바울은 참 즐거운 마음으로 전도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고 자원해서 아주 즐겁게, 만족하게 일했던 사람입니다. 그렇게 인생을 살고 마지막에 가서 고백하기를 '나는 선한 싸움을 다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다'고 고백했습니다. 얼마나 만족한 고백입니까? 또 예수님은 '다 이루었다'고 자신이 사역한 것을 평가하면서 만족하게 고백하고 숨을 거두었습니다.
사람이 자신의 일을 소중히 알고 열심히 일한 사람은 마지막에 이런 고백할 자격이 있습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일을 열심히 일하는 사람은 그 삶이 바로 창조주의 사역에 동참하는 삶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이 바로 이렇게 열심히 일하며 사는 삶입니다. 열심히 일하며 살아가는 사람을 주님이 사랑하시고 도우십니다. /믿/
성경에 많은 사람들도 주께 부름 받을 때 삶의 현장에서 열심히 일하는 중에 부름을 받았습니다. 다윗과 아모스는 들에서 양을 치고 있을 때 부름을 받았습니다. 엘리사도 12마리 소에 겨리를 하고 밭을 갈고 있을 때 부름을 받았습니다. 베드로와 요한 형제도 밤새 고기를 잡던 그 시간에 제자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마태는 세관에 앉아 열심히 일할 때 부름을 받습니다. 사울은 잃어버린 소를 찾으라는 아버지의 명령을 받고 정신 없이 뛰어 다니는 도중에 왕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기드온은 열심히 타작하던 중에 부름을 받습니다. 사람이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소중히 알고 열심히 일하는 것이 아름다운 일입니다.
이렇게 열심히 일하는 사람에게는 또 다른 은혜를 입습니다. 그것이 쉼이라는 은혜입니다. 여러분, 일하는 사람에게 이 쉼의 시간이 얼마나 달고 시원하고 상쾌한 시간입니까? 군에 가서 훈련받다가 '10분간 휴식'이라는 말이 얼마나 신납니까? 군에 가지 않은 분은 이 기분을 모릅니다. 일도 하나님이 주신 은혜지만 쉼도 하나님이 주신 은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6일 일하고 하루 쉬라고 하셨습니다(출20:8).
▶어떤 성악가가 계속 노래를 부르다가 그만 죽었다고 합니다. 왜 죽었는지 아십니까? 악보에 쉼표가 없어서 계속 부르다가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쉼이 중요합니다. /할/
바울은 소명 받은 후 주의 일을 참 열심히 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고백하기를 '나는 달려갈 길을 다 가고 믿음을 지켰다'고 고백했습니다. 이런 고백은 할 일을 다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고백입니다. 우리 모두 이런 고백을 할 수 있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할/


②그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주의 일'을 감당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에게 주어진 복음전하는 일을 그렇게 소중하게 여기며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 사명을 받은 후에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지금까지 소중하게 여겨왔던 것들을 분토와 같이 버린다, 나는 이제부터 예수만 알기로 작정했다,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지노라, 나는 죽든지 살든지 예수만 전하노라' /할/
깨달음은 이렇게 중요한 일입니다. 깨달음이 있으면 그 마음에 감사함의 마음이 솟아나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런 마음을 품고 살면 그 삶이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주어진 현재의 삶에 감사한 마음을 품고 사는 것이 행복입니다. 그래서 행복한 삶은 조건이나 환경이나 소유에서 오는 것 아니고 마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마음이 행복하면 무엇이든지 즐겁고 행복하게 됩니다. 그때 내 마음에 찬양이 나오게 됩니다. 찬양과 감사는 같은 뜻입니다.


③그는 '부끄러움이 없는 그런 삶'을 살았습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귀로에 에베소교회의 장로들을 불러 놓고 이렇게 말합니다. '그동안 나와 함께 있는 동안 내게 무슨 하자가 있는가, 내가 떼먹은 것, 원망들을 일이 있으면 말하라'고 합니다. 그렇게 결산하고 바울은 마침내 에베소교회의 장로들과 작별합니다. 그리고 아주 만족하게 헤어지는 모습이 나옵니다.
37절을 보면 '다 크게 울고 바울의 목을 안고 입 맞추고 근심하며 배웅했다'고 했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작별입니까? 마지막이 이렇게 되어야 그 삶이 행복이고 성공입니다. 처음도 중요하지만 끝맺음은 더 중요합니다.
바울은 끝맺음이 참 은혜롭습니다. 사람이 마지막을 이렇게 끝맺음하려면 사람들과 관계를 잘 해야 합니다. 살면서 누구 것을 떼먹는 일, 손해 끼치는 일, 빚지는 일들이 없어야 합니다. 또 누구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일도 없어야 합니다. 살아가면서 아무리 손해보고 보기 싫어도 원수지는 일도 없어야 합니다. 그런 것이 있으면 마음에 평화가 없어지고 자유 함도 없어집니다.
그러면 마지막 나의 삶을 결산하는 시간이 오면 만족한 것은 고사하고 사람이 초라해 집니다. 여러분, 우리들의 마지막의 인생의 결산도 사도바울의 결단되시기를 소원합니다. /아멘!/


④그는 '주는 삶'을 살았습니다.
바울은 평생 남을 위해서 베푸는 삶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진정한 전도자라면 자신의 삶은 없습니다. 조용기 목사님이나 장경동 목사님 같은 목사님들은 자기 시간이 없습니다. 오직 복음을 위하여 인생을 달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의 유명한 이성봉목사님은 부흥회 다니며 받은 사례비로 남들에게는 후하게 나누어주었지만 가족에게는 참 인색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내 가족에게 후하게 사용하고 배려하는 것이 죄송하고 죄스럽게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전도자의 삶입니다. 그러면서도 그 삶에 행복을 느끼고 기쁨을 느끼며 살아갑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늘나라에서 보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멘!/
사도 바울도 그렇게 자신을 다 바쳤습니다. 인생을 바치고 젊음을 바치고 정신과 영혼을 송두리째 바쳐 전도자의 길을 갔습니다. 그래도 바울은 누가 뭐래도 자신은 누구보다도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그것이 주는 데서 오는 기쁨이고 행복이고 보람이고 감사함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말씀을 들어 '주는 것이 받는 것 보다 낫다'고 강조했습니다.
여러분, 준다는 것은 반드시 물질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물질말고도 줄 것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우리들의 마음, 관심, 기도, 부드러운 조언들은 모두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물질보다 더 소중하게 줄 수 있는 것들입니다.
중보의 기도는 베풀고 나누는 그리스도인의 근본적인 나누는 삶입니다. 내가 누군가 병들어 누워있는 이웃의 치유를 위해서 기도해 줄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상당히 소중한 것을 베풀고 주는 삶입니다. 성경은 주는 사람이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세상에는 주는 사람이 있고 받으며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2. '주는 것이 받는 것 보다 복이 있다'는 주님의 말씀을 상고 해 보겠습니다.

 

①주는 것과 받는 것의 관계를 알아보자!
'주는 자가 복이 있다'는 이 말씀은 한마디로 한 가지 중요한 전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을 받는 것도 축복이라는 것입니다. 주는 것은 더욱 고귀한 것입니다. 받는 것도 축복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간 생활의 원리는 결국 주고받는 관계를 중심으로 해서 성립이 되어 집니다. 우리 인간이 이 세상을 살아가려면 많은 필요한 것들을 소유해야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지식을 소유하기 위해서 열심히 공부하고, 재물을 얻기 위해서 피나는 노력을 하며 높은 지위를 얻기 위해서 살벌한 경쟁을 일삼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뭐니뭐니 해도 소유한 것이 있어야 주고받는 법칙이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주고받는 관계의 유형을 네 가지로 말합니다.
㉠받기만 하고 주지는 않으려는 사람 ㉡받고서야 주는 사람 ㉢먼저 주고서 받으려는 사람 ㉣주기만 하고 받기는 기대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대다수의 인간관계는 받고서 주려는 형과 또는 주고서 받으려는 형의 부류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여기서 윤리성을 내세워 개인이나 집단 모두가 먼저 줌으로서 받는 것이 부담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이 원칙은 적용되어집니다. 농부가 밭을 갈아 씨를 뿌리고 비료를 주어 잘 가꾸면 그 곡식은 풍성한 열매로 보상하게 됩니다. 아름다운 산천을 인간이 정성스럽게 보살피면 대 자연은 인간에게 맑은 공기와 아름다운 정서를 우리에게 선물합니다.
이 주고 받는 법칙은 절대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4번째 부류인 주고도 받기를 기대하지 않는 그런 부류는 희생이 따르고 사랑이 앞서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주면서 자유를 느끼게 하고 평안을 얻게 하는 그것은 위대한 사랑의 발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위대한 사랑의 실천자가 누구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그 분은 자기의 모든 것을 다 주시고 우리를 속량해 주셨습니다. 그 안에 진정한 자유가 있고 사랑이 있고, 소망이 있고 생명이 있음을 여러분은 아셔야 합니다.


②받는 것도 축복입니다. 받아본 사람이 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가장 큰 축복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받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8복을 말씀하실 때 맨 먼저 '심령이 가난한 사람'을 말씀하셨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만이 하나님의 통치와 선물을 받을 수 있습니다. 교만한 사람의 특성 중 하나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줄 모른다는 데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도 거절합니다.
자신의 부족을 깨닫는 사람들만이 하나님의 은혜를 수용할 수 있으며 그 안에서 축복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믿/ 나아가서 받는 것을 체험하지 못한 사람은 줄줄도 모릅니다. 사랑은 받아본 사람만이 주도록 되어 있습니다. 어린 시절에 사랑을 받고 자란 사람은 장성하여서도 받은 사랑을 남에게 줄 줄을 압니다.
이는 그가 사랑을 받아 보았기에 받는 즐거움과 행복을 알고 있으므로 이 축복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필요한 것을 알고 주게 됩니다. 그러므로 받는 것도 축복임을 알아야 합니다.


③주님은 왜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축복이라고 말씀하실 까요?
⑴줄 수 있는 것은 성숙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어린아이일수록 받으려고 하지만 성숙해 갈수록 주는 것의 가치와 보람을 알게 됩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나이가 많아서도 줄 줄을 모른다면 그는 심리학자들이 말하는 일종의 '유아기적 고착, 즉 어린아이 그대로 머무르는 현상'이랍니다.
인간의 성숙은 이기심의 극복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로마의 옥에 갇힐 때 빌립보의 성도들로부터 선물을 받았습니다. 바울은 성도들이 보내준 선물에 대하여 '이것이 너희에게 유익하다'고 했습니다.
준다는 것은 인격적 성숙이 없이 절대 불가능합니다. 인간이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받으려고 하는 이기심이 주는 것으로 극복되는 순간입니다. /할/
▶앨버트 듈러라는 유명한 화가가 있었습니다. 그는 어린 시절에 무척 가난하여 학비를 낼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자기와 똑같은 처지의 친구를 만나 의논을 하였으나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의 친구가 제의하기를 '듈러여! 우리 두 사람 모두 학업을 계속할 수 없으니 이렇게 하자! 네가 먼저 학교에 가서 열심히 공부하렴, 나는 식당에서 일을 하여 돈을 벌어 너를 돕겠다. 그리고 네가 공부를 마치고 나를 지원하면 우리 둘 모두 공부를 할 수가 있지 않겠니?'
이렇게 의논한 친구는 식당에 가서 그를 위해 열심히 일하여 매월 꼬박꼬박 학비를 보내었습니다. 듈리는 친구의 도움으로 미술학교를 다닐 수 있었고, 졸업한 후에는 상당한 인기 있는 화가가 되었고, 그래서 듈러는 약속대로 친구를 돕기 위해 식당을 찾아갔더니 그 친구는 식당 한 모서리에서 친구 듈러를 위해서 열심히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 저희 친구 듈러가 열심히 공부하여 훌륭한 화가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많은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그러나 하나님! 이미 제 손은 식당에서 일을 하다가 그림을 그릴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제가 할 몫까지 친구 듈러가 다 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이 친구의 모습을 지켜보면 앨버트 둘러는 자기를 위해 희생한 사랑하는 친구의 기도하고 있는 손을 바라보는 순간 커다란 감동을 받고 붓을 들어 사랑하는 친구의 기도하는 손을 스케치하였습니다. 그것이 유명한 듈러의 '기도하는 손'입니다. 인간이 줄 수 있다는 것은 가장 거룩한 것입니다. 성숙함이 없이는 결코 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⑵주는 자는 '참된 기쁨'을 선물 받기 때문입니다.
자녀들을 위하여 선물을 준비하는 부모들의 기쁨은 선물을 받는 당사자보다 더욱 큽니다. 받는 것이 표면적인 기쁨이라면 주는 것은 영원한 기쁨입니다.
'죠오지 피바디'라는 사람은 그의 막대한 재산을 자선 사업과 교육 사업을 위해 바치면서 놀라운 말을 했습니다. '내 평생에 걸쳐 피와 땀을 흘려 모든 재산을 내 놓는 것은 확실히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결딴하고 내 놓았을 때 재산을 모으는 기쁨에 비교할 수 없는 신비로운 쾌감이 있었습니다. 나는 이 기쁨 때문에 자원해서 재산을 내놓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선물을 주는 것은 사실상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주는 것입니다. /할/ 그렇습니다. 주는 자는 자기에게 '참 기쁨'을 선물 받게 됩니다. /믿/아멘!/
⑶주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이기 때문입니다.
성부 하나님은 엿새 동안 우주를 창조하시고 마지막으로 인간을 창조하신 후에 그가 지으신 모든 것을 인간에게 선물로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시되 깨끗하게 주셨습니다.
인간관계에서는 종종 주고받는 것에 치사한 예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름답고 좋은 것을 모조리 주시면서도 우리로 하여금 열등의식이 없이 받도록 해 주셨으며 뿐만 아니라 가장 소중한 생명 같은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아낌없이 주셨습니다.
또한 성자 예수님도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막10:45절에서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 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다시 말하면 주님은 저와 여러분을 섬기시기 위해서 목숨까지도 주시되 기쁨으로 주셨습니다. 성경은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롬8:32절에서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야고보 장로님은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온다'고 약1:17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할/
성령님 역시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는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께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속성이 주시는 분이기에 우리가 주는 삶을 살 때 우리도 그 하나님의 인격을 닮을 수 있게 됩니다.
⑷천사들의 성품도 주는 스타일입니다.
히1:14절을 보세요! '모든 천사들은 부리는 영으로서 구원 얻을 후사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뇨?' 분명히 천사들을 '섬기는 영'이라고 하셨습니다. 택함 받은 백성들을 섬기기 위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는 영이 바로 천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줄 때, 이 천사들의 아름다운 모습을 닮아갑니다. 우리는 그래서 탤런트 문근영을 천사표의 기부자라고 부릅니다. 그는 많은 이들에게 주면서도 한 때 안티 펜에 시달림을 받기도 했습니다.
⑸우리가 주는 것을 통해 주님과 천사는 대접할 수 있습니다.
구약의 아브라함은 길손들을 대접했는데 그 분이 바로 하나님이 보내신 천사들이었습니다. 마25:35절 이하에 보면 '마지막 심판 날에 주린 사람에게 먹을 것을 준 사람, 목마른 사람에게 마실 것을 준 사람, 나그네를 영접하고 헐벗은 사람에게 옷을 입히며 병든 사람들을 돌아보았던 사람과 옥에 갇힌 사람들을 위로한 사람'들을 가리켜서 주님은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히13:1-2절에서는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들은 동방박사를 세 사람으로 알고 있고 성경에서도 분명하게 그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외경에 보면 동방박사가 네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이 네 번째 박사는 주님께 드릴 의약품을 가지고 갔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천사가 사막을 지나가다가 병들어 신음하는 환자를 발견하고 그대로 지나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세 박사는 먼저 보내고 그 병자를 간호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환자를 그늘진 바위 곁으로 데려다 누이고 자기의 식량과 의약품으로 정성껏 간호했다고 합니다. 여러 날이 지나자 이 환자는 소생했습니다.
그런데 환자가 소생했을 때는 이미 주님께 드리려고 준비했던 의약품을 다 써버린 후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피곤해서 더 이상 걸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네 번째 박사는 엎드려 기도했습니다. '사랑의 주님, 저는 메시아 되신 주님의 탄생을 경배하기 위해 의약품을 가지고 가다가 다 써버리고 이제 지쳐서 갈 수가 없사오니 주님이 이 땅에 오신 놀라운 사실을 마음을 다하여 환영하고 경배하고 제 마음을 알아주세요.' 그가 기도를 마쳤을 때 그의 곁에서 신음하던 환자는 놀랍게도 주님의 모습으로 앉아 있었답니다. 이 예화는 우리 주변의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주께 한 것임을 나타내 주는 이야기입니다. /아멘!/
⑹주님은 주는 자들을 쓰시며 축복해 주십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이 제일 싫어하던 사람들은 서기관과 바리새인이었습니다.
마23:5절 이하에 보면 저들은 시장에서 인사 받기를 좋아하고 상좌에 앉아서 대접받기를 좋아하며 많은 사람들 앞에서 칭찬 받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었으므로 주님은 저들은 받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받으려고만 하였지 주는 덕을 알지 못했습니다. 주님은 이 교훈의 결론으로 마23:11-12절에서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은 힘으로 통치하는 강력한 지도자를 추앙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쓰시는 지도자는 사랑으로 섬기는 사람들이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교회를 섬기는 여러분들은 모두다 지도자들입니다. 지도자들은 자신을 드려야하고 낮아져야 하나님이 쓰시며 그런 그릇에 기적을 부어주십니다. /할/
⑺기독교사를 보면 언제든지 성령 충만한 교회는 반드시 구제운동을 했습니다.
성경에 '나는 고아와 과부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놓고 어떤 분은 '하나님의 편견'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연악하고 외로운 자의 편에 서셔서 그들의 보호자가 되어주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들을 억울하게 대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징벌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나그네를 대접하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런가하면 잠19:17절에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니 그 선행을 갚아주시리라' 이 말씀은 '가난한 자를 돌보는 것은 여호와께 꾸어드리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구제와 기도'를 통하여 인정받은 사람이 있습니다. 누구인가? 로마의 백부장 고넬료입니다. 행10:31절 '고넬료야 하나님이 네 기도를 들으시고, 네 구제를 기억하셨으니' 또 천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너의 기도와 구제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 상달되었다'고 말합니다. /할/
구제는 우리들의 마음과 영혼과 몸과 삶에 풍요로움과 축복을 가져다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렇다고 약속하기 때문입니다. 잠11:24-25절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윤택하여지리라' 또 신15:10절에서 '구제할 때에는 아끼는 마음을 품지 말 것이니라. 이로 인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범사와 네 손으로 하는 바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할/

 

3. 바울사도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는 아름다운 교훈을 실천했습니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에게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다'고 했습니다. 그의 생애는 문자 그대로 주는 삶의 모범을 보였습니다.
본문 34-35절에 '너희 아는 바에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의 쓰는 것을 당하여 범사에 너희에게 모범을 보였노니 곧 이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바울의 가장 큰 관심은 오직 복음의 선포였습니다. 그리고 이에 못지 않게 그에 관심을 약하고 눌린 사람들에게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의 모든 것을 나누어주었고, 자신의 목숨을 주었습니다. 그의 삶은 실로 주는 삶이었습니다.
빌립보서에서 나타난 바울의 생활을 주시해 보면 실감 있게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빌1:24절에 '그러나 내가 육신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놀라운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자신의 삶을 남들에게 주어버린 자만이 자신 있게 고백할 수 있는 말입니다.
그 다음에 보면 '내가 살 것과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너희 무리와 함께 거할 이것을 확실히 아노니'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여러분의 삶을 위해 저희 모든 것을 당신의 삶 속에 투자하기 원한다고 바울은 고백했습니다.
특히 빌2:17-18절에서 바울의 생애를 한마디로 요약했습니다.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봉사 위에 내가 나를 관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 /할/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제물을 드리던 광경을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제단을 쌓고 제물을 잡아 피를 쏟고 깨끗이 씻어 각을 떠서 올려놓습니다. 그리고 기름을 부어 태웁니다. 그런데 바울은 자신의 몸 전체를 성도들을 섬기는 일을 위해 관제로 바친 것을 인하여 기뻐한다고 했습니다. 바울의 삶은 철저하게 주는 삶이었습니다. 우리도 이런 바울의 삶을 따라 실천하며 사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아멘!/

▶35절 "범사에 너희에게 모본을 보였노니 곧 이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의 친히 말씀하신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범사에 너희에게 모본을 보였느니' 바울은 자신 있게 장로들에게 신앙의 모범과 지도자의 모범을 보인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열심히 일해서 자기만 모은 것이 아니라 전도일행도 먹여 살리고 또 약한 자와 가난한 자도 많이 구제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는 주님의 말씀을 믿고' 주는 생활에 전력을 기울였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받는 사람이 아니라 주는 사람이 됩시다. 남에게 유익을 끼치고 은혜를 베푸는 사람이 되십시다.
받는 사람을 가리켜 뭐라고 합니까? 거지라고 합니다. 꼭 먹을 게 없어야만 거지가 아닙니다. 남을 바라보는 사람도 거지 철학을 가진 자입니다.
▶옛날 희랍의 한 왕이 있었습니다. 그는 태평성대를 누리면서 24시간 호색과 주지육림(酒池肉林)에 탐닉하면서 자기를 더 즐겁게 하기 위하여 '쾌락과 행복'을 더 높이는 수단과 방법에 대하여 큰 상금을 걸고 천하에 널리 구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하고 싶은 일 다 해 보았습니다. 가지고 싶은 것 다 가져 보았습니다. 그러나 만족치 않습니다. 그래서 더 높은 행복, 더 높은 즐거움은 없을까 해서 높은 즐거움을 추구하기 위해서 방법을 간구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별별 기발한 아이디어가 다 나왔습니다. 새로운 아이디어를 가지고 왔다고 해서 만나봅니다. 왕은 실망하게 됩니다. 그럴 때는 자기를 실망 시켰다고 해서 그 아이디어를 가져온 사람에게 '그까짓 아이디어를 가져 왔냐'고 하면서 사형에 처해 버렸습니다.
이렇게 끝없이 향락과 기쁨을 추구했으나 별도리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어떤 소녀 하나가 자기가 왕께 나아가서 기뻐할 수 있고, 행복할 수 있는 비결을 말하겠다고 합니다. 모든 사람이 궁금하게 여겼습니다.
그런데 이 소녀가 왕 앞에 나타나서 당돌하게 막 꾸짖는 얼굴로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왕은 절대로 행복할 수 없습니다.' 참 놀라운 말입니다. '기쁨을 단념하십시오. 남을 행복하게 하거나 기쁘게 한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만일 행복을 원하신다면 다른 사람을 먼저 행복하게 하십시오. 그리고서야 왕이 행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말에 왕은 숙연해 지고 한참 생각 끝에 '딸아! 그대의 말이 옳다'고 하면서 그에게 많은 상을 주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랑의 방법 열 가지를 말한 사람이 있습니다.
⑴계산하지 말 것. ⑵후회하지 말 것. ⑶되돌려 받으려 하지 말 것. ⑷조건을 달지 말 것. ⑸다짐하지 말 것. ⑹기대하지 말 것. ⑺의심하지 말 것. ⑻비교하지 말 것. ⑼확인하지 말 것(내가 사랑한 것이 어떻게 됐나 그거 확인하려고 들지 말 것). ⑽상황에 온전히 맡길 것.
▶여러분, 왜 주어야 합니까?
⑴주는 것이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섬기는 것입니다. 사랑은 대접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주는 것입니다. 마음을 주고 시간을 주고 물질을 주고 나아가 사랑하기 때문에 생명까지라도 바치는 것이 사랑입니다.
⑵주는 자에게 행복이 있고 주는 것이 복입니다. 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복입니다. 아무리 주고 싶어도 가진 것이 없으면 줄 수가 없습니다.
⑶주는 자에게 하나님의 축복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눅6;38절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예수님이 친히 말씀하십니다. '오른손이 하는 거 왼손이 모르게 하라.' 또 '하늘에 쌓아 두라. 냉수 한 그릇을 네 이름으로 줄 때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네 이웃에게 향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니라.' /할/

 

4. 예수 그리스도의 주는 삶의 모범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주님의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는 말씀을 기억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는 온전히 주는 생애였습니다. 바울은 고후8:9절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하늘과 땅의 주인으로써 그 모든 영광을 내어버리고 이 땅에 가난하게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위해 자신의 모든 열정과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머리 둘 곳도 없었고, 돌아가셨을 때는 그를 위해 예비한 무덤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이 역사를 다스리는 분은 누구입니까? 성경은 분명히 아직도 그 분이 왕 노릇하고 있다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어느 날 이 세상이 주님의 나라가 되어 그리스도가 이 우주를 통치하는 광경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 분은 이 우주의 주인이 될 것입니다. 그때 천국의 스타들은 누구입니까?
계20장에 보면 그들은 주님을 위하여 목 베임을 당한 즉 순교를 당한 영혼들이라고 했습니다. 목숨까지 주를 위해 드렸던 사람들은 천국에서 가장 놀라운 대접을 받으며 주님과 함께 왕 노릇하게 됩니다. '주는 사람들!' 복음을 위하여 목숨도 생명도 아낌없이 내어준 사람들! 어디 그것뿐입니까? 물질로 헌신하고 시간 드려 주님을 섬겼던 그 모든 사람들에게 주께서 영화롭게 해 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5.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줄 수 있습니까?

 

이 세상의 가장 큰 선물을 뭐니뭐니 해도 복음입니다. 복음, 예수 그리스도의 소식을 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선교를 위해서 참으로 주는 교회이어야 합니다. 선교는 주는 것입니다. 행3:6절에 보면 베드로는 성전 미문에 앉아 있는 앉은뱅이에게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즉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주었습니다. 예수 안에 기적이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축복이 있습니다. 그 안에 생명과 소망과 풍성한 사랑과 헌신이 있습니다.
그뿐입니까? 그 예수 그리스도 안에 세상을 이길 능력이 있고 그분 안에 참 평안이 있습니다. /할/ 우리 모두 네 사랑하는 이웃에게 예수 생명을 선물로 주십시다. 이것이 가장 큰 축복이고 선물입니다. /아멘!/
한 기독교 철학자는 이 세대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경고했습니다. '기독교는 언제나 가난한 자들의 편에 서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이유는 민중에게 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소외되지 않기 위해서' 라고 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부유케 하는 것과 해방시키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책임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들에게 예수님의 복음 뿐 아니라 헌신적인 사랑도 주어야 하고 관심도 주어야 하고 동정도 주어야 하고 마음도 주어야 합니다.
하늘나라는 주고받는 법칙대로 축복이 오는 것입니다. 몸을 드릴 때 영생을 주시고, 시간을 드릴 때 건강을 주시고, 물질을 드릴 때 더 큰 풍요를 주시며, 마음을 드릴 때, 참 삶의 쉼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사랑하는 참 행복한 성도 여러분, 주는 자가 복되다고 하셨습니다. 사랑을 주고, 마음을 주고, 자비와 긍휼을 베푸시는 그리스도인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는 원리를 비추어 남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자신에게도 큰 은혜가 됩니다. 그렇습니다. 자신을 위해 기도하는 것도 귀합니다. 그러나 남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더 높은 차원의 신앙입니다.
목사님을 위해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권사님, 집사님들을 위해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또 자녀들을 위해 기도하는 어머니, 멀리 출장 가 있는 남편을 위해 기도하는 아내, 얼마나 아름다운 사랑입니까?
'내가 당신을 위해 기도합니다'라는 말은 가장 진실하고 가장 거룩한 사랑의 고백입니다. 성도가 목사를 위해 기도하는 것, 목사가 성도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당연한 것을 하지 않은 사람들이 있기에 문제입니다. /할/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는 원리를 비추어 더 시급하고 급한 문제는 예수 생명을 주어야 합니다. 때가 임박해 오고 있습니다. 인류의 종말이, 한 개인의 종말이 가까이 오고 있습니다. 야고보 장로님의 말씀을 들어보세요!
약4:14절에서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그런데 바울은 뭐라고 했습니까? 고후6:2절에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할/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여러분! 언제 감사해 보셨습니까? 병들어 보십시오. 건강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오늘 우리가 하루 세끼를 먹는데 그래도 한끼라도 거르지 않고 먹을 수 있음에 감사해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그런데 성경은 더 나아가서 '받는 것 보다 주는 것이 복이 있다'고 하십니다. 우리 모두 주는 자들이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할/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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