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도 산을 옮길 수 있습니다! (마 17:14-20)
어느 한 가정에 부부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집 부인은 아주 열심히 천주교를 믿는 신자였습니다. 그런데 그 남편은 술주정뱅이에 개망나니 짓을 다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남편이 부인에게 '성당에 나가기만 하면 죽이겠다'고 협박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 부인이 성당에 가서 신부님께 의논을 했습니다.
'신부님! 무섭습니다. 남편이 한번만 더 성당에 가면 저를 죽이겠다고 합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라고 하자, 신부는 '오, 가엽게도 그런 일을 겪고 있군요. 그렇지만 믿음을 가지십시오. 하나님께서 당신을 지켜주실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주일 그 부인은 신부에게 찾아가서 '신부님, 큰일났어요. 남편이 제가 성당에 또다시 가면 이제는 신부님을 죽이겠다고 합니다.'라고 하자 그 신부가 기겁을 하면서 '아,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남편이 하라는 대로 따라하십시오'라고 했다고 합니다.
이것이 우리 믿음의 한계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문제가 닥치면 믿음을 가지라고 말하면서 자기 자신에게 문제가 닥치면 믿음을 저버리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오늘 주제는 믿음에 대한 주제입니다.
20절에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고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또 마21:21절에서도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치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 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지우라 하여도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할/ ◀제목 소개!▶
마17장 본문의 배경을 보면 먼저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정리하시기 위해 수제자 셋을 데리고 높은 산에 올라가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얼굴이 변화되어 그 얼굴이 해와 같이 빛나고 그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습니다.
본문의 변화산의 사건은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신앙으로 고백하고 난 뒤 일주일 정도 간격으로 일어난 사건입니다.
어디서 변화하셨는가? 마태/마가복음에는 '높은 산'이라고만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산에 대하여 많은 학자들은 북방 가이샤랴 빌립보와 가까운 2,700m의 '헐몬산'이라는 견해도 있으나 전통적인 견해는 갈릴리에 있는 540m의 '다볼산'이라는 학설도 있습니다.
베드로는 변형된 예수님의 옆에 모새와 엘리야가 함께 있는 것을 보고는 눈앞에 광경에 감동이 되어 자신도 모르게 그들을 위해 초막 셋을 짓겠다는 허망한 말을 합니다. 또 이때 구름 속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희 말을 들으라'는 음성으로 완전히 공포에 빠져 땅에 엎드렸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두려워 말라'는 음성을 듣고 제자들이 고개를 들었을 때, 이 전의 모든 일들은 다 사라지고 '오직 예수'님만 전과 같은 모습으로 계셨습니다. 이 사건을 신학자들은 변화산의 사건이라고 말합니다.
기독교는 산의 종교입니다. 인류의 역사의 시작을 에덴동산에서 시작했습니다. 노아 홍수 후 인류가 재출발한 곳도 아라랏 산에서부터입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이삭을 헌납한 것도 모리아 산이었으며, 그곳은 나중에 솔로몬이 하나님의 성전을 지어 신앙의 진원지가 되었고,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율법을 내려주신 것도 시내 산이었습니다.
여호와의 종교가 위기에 처해 있을 때 엘리야가 참 종교를 증명한 곳도 갈멜산이었으며, 다윗이 이스라엘 왕국의 기초를 놓은 곳도 다윗 성, 즉 시온 산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구속사역을 완성하신 곳도 갈보리 산입니다.
산은 인간이 하나님과 만나는 접촉점을 의미합니다. 변화 산의 예수님의 변형은 기독교의 신비를 드러내 보이는 것으로 주님의 부활과 재림의 확고한 증명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성도에게 해당되는 진리입니다. 예수님께서 산에서 기도하시다가 변형이 되셨습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만남이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의 변형과 함께 그 자리에 동참했던 모세와 엘리야는 그들 생애에 예수님의 변형과 같은 체험을 했습니다.
모세는 시내 산에서 십계명을 받아 가지고 내려올 때 그 얼굴에 광채가 났으며 엘리야가 불 병거와 회리 바람을 타고 승천한 사건이 변형된 사건입니다.
변화산의 사건은 제자들로 하여금 예수님이 바로 약속된 메시아라는 확신을 갖게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 여전히 메시야 전의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는 서기관들의 말이 마음에 걸려 이를 예수께 묻자 예수께서는 세례요한이 바로 엘리야로 왔음을 암시했습니다.
이 사건을 베드로는 일생동안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의 생애를 바꾸어 놓았으며 일생 변치 않고 훌륭히 사도의 길을 걸어가는 데는 그때 변화산의 체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할/
벧후1:6절 하반 절부터 17절을 보면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지라 지극히 큰 영광 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그에게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실 때에 저가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고 간증하고 있습니다.
1. 변화산의 사건을 한 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마태/마가복음에는 그저 산에 올라가신 것처럼 기록되고 있지만 누가복음에는 이 말씀을 하신 후 팔 일쯤 되어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시고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사(눅9:28)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눅9:29)고 하며 영광 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씀할 새(눅9:31)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복음서를 대조 종합하여 보면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셔서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고 하였습니다.
①믿음의 길은 기도의 길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는 기도의 세계입니다. /할/
기도는 기도의 응답이라는 분명한 약속이 있습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무엇이든 구하면 들어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라고 하셨습니다(마7:7).
온갖 헝클어진 문제를 풀 수 있는 만능 열쇠 마스터키인 기도가 있습니다. 깊은 기도에 사로잡히면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하나님의 뜻을 찾아내고 그 뜻을 이루는 큰 믿음의 사람이 됩니다. /할/ '스펄젼' 목사님은 '10년을 염려하는 것보다 10분을 기도하는 것이 낫다'고 했습니다.
②변화 산이 주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예수께서 변화산상에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신 사건은 처참한 십자가 대속의 죽음을 얼마 남기지 않은 시점에 이뤄졌습니다. 이때 예수께서 제자들이 비록 주님을 3년 여 따라다니며 여러 말씀을 배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약한 존재에 불과함을 익히 아시고 이제 곧 닥쳐올 자신의 십자가 고난으로 인해 제자들이 절망치 않도록 하기 위해 자신의 본래적인 신성을 밝히 드러내 주시며 그들에게 영적인 힘을 더해 주셨습니다.
⑴제자들로 주님의 십자가 수난 받아들이게 하기 위함입니다.
⑵십자가를 통해서 부활이 있음을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가 무덤에서 사흘만에 부활하심으로써 모든 인생들에게 영원한 생명의 기쁨을 안겨 주셨는데 예수께서 보여 주신 변화산 사건은 바로 이 사건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할/
⑶천국의 영광을 소개하신 것입니다. 천국에서는 우리 모두 신령한 모습으로 변화되어 우리 주님과 영생복락의 축복을 누리게 됩니다. /믿/
⑷오직 예수님만 보였습니다. '예수 외에는 보이지 않더라' 오직 예수만 보인 것은 '인류 의 구세주는 오직 예수'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오직 예수 중심의 신앙생활을 하라'는 깊은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아멘!/
2. 산아래 사건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제 우리가 읽은 본문 14절은 예수님께서 세 제자들과 함께 변화 산에서 내려오시자 산아래 다른 제자들은 귀신들린 소년 하나를 고치기 위해 소란을 떨고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변화 산에서 내려오시매 예수님의 발 밑에 한 사람이 와서 꿇어 엎드립니다. 그리고 '내 아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이 아이가 간질로 심히 고생하여 자주 불에도 넘어지고 물에도 넘어지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이 아이의 형편은 막9장에 보면 '벙어리 귀신이 들린 것'으로 설명됩니다. 이 아이는 말을 할 수 없었고, 이따금씩 귀신으로 거꾸러져 입에서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기도 했습니다. 때로 발작이 심할 때면 불 속에나 물 속에 빠져 허우적거리기도 합니다. 아버지는 절망 속에서 그의 아들을 예수께 데려왔습니다. 예수님은 이 아이의 아버지의 아픔을 함께 느끼셨습니다. 우리도 자기의 아들이 발작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면 그 아픔의 어떨까 하는 것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어떤 모습입니까? 16절입니다. '내가 주의 제자들에게 데리고 왔으나 능히 고치지 못하더이다' 능히 고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마10:1절에 보면 '예수께서 그 열 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은 이미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는 권세가 주어졌습니다. 그런데 본문의 경우에는 여러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고 당황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께서는 능력을 행사하지 못한 제자들을 이렇게 책망하셨습니다.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오래 참아야 하느냐?' 수없이 바라보고 체험한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못하고 낙심하고 있는 제자들과 또 무슨 구경거리나 된 듯이 모여들어 있는 사람들을 보시면서 탄식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오늘 이 시간 우리는 가슴으로 들어야 합니다. 여기에 우리들의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들의 문제는 돈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들의 문제는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열심히 예수님을 따라다녔습니다. 적어도 3년은 예수님과 함께 밥을 먹고 잠을 자고 예수님이 행하시는 수많은 이적과 기사를 보면서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목격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며 감동도 받고 은혜도 받고 용기도 생겼습니다. 그런데 결정적인 순간에 그들은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믿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의 제자들이라는 화려한 이름은 가지고 있었으나 그 속은 다 비어버린 껍데기뿐이었습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들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교회에 열심히 다닙니다. 봉사도 잘 합니다. 헌금도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보고 믿음이 참 좋다고 칭찬을 합니다. 그래서 믿음이 있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결정적인 순간에 전혀 믿음 없는 행동을 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참 믿음이 좋습니다'라는 말에 속은 것입니다. 주님을 진정으로 만난 감격이 없이 습관을 따라 신앙생활을 하면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오늘 예수님이 제자들을 책망하신 이유는 그들에게 권세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믿음이 없어서 사용하지 못한 것을 책망하셨습니다. 우리들에게도 이런 능력을 주셨습니다. 그럼으로 믿음으로 활용하시기를 바랍니다.
막16:17-18절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찌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할/
흔히 '기는 놈 위에 뛰는 놈 있고,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는 말을 합니다. 그런데 요즘 젊은이들은 '나는 놈 위에 붙어 다니는 놈이 있다'고 합니다. 가장 강한 자는 '붙어 다니는 놈'입니다. 성도는 붙어 다니는 자입니다. 누구에게 붙어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에게 붙어서 사는 사람입니다. 요15:5절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할/ 주안에 있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 /아멘!/
▶본문의 아버지를 보자! 그때 소년의 아버지는 주님이 오신 것을 보고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제자들이 고치지 못하는 자기 아들을 고쳐줄 것을 청원합니다.
이 아이의 아버지는 최후의 수단으로 예수께 소망을 걸고 예수의 소문을 듣고 찾아 왔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이의 궁극적인 문제의 해결은 '오직 예수' 뿐임을 알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사회가 아무리 교회를 향하여 무슨 말을 한다고 해도 이 아이의 문제의 해결은 오직 예수이듯이 이 사회의 모든 문제의 해결점은 오직 예수입니다. /믿/
이때 주님은 간질병을 앓고 있는 소년 하나를 데리고 쩔쩔 매는 제자들의 불 신앙을 크게 책망하시고 아이를 데려오게 하여 귀신을 쫓아 내 주었습니다. 이때 제자들은 자기들이 별의별 짓을 했지만 고치지 못했는데 주께서 단번에 고치시니 묻기를 '선생님은 간단히 고치는 것을 왜 우리는 못합니까?' 라고 의문을 제시했습니다. 이때 주님의 대답은 '믿음이 없기 때문'이라는 간단한 대답을 하셨습니다.
①먼저 '질병으로 신음하는 인생들의 모습'과 그들을 향한 '교회의 임무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⑴죄로부터 오는 육체의 질병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질병은 인생을 고통 속에서 신음하게 만듭니다. 현대의학의 눈부신 발달로도 인간의 질병을 근절하기는커녕 불치의 병이 새로 생겨나고 있습니다. 아직도 암이 정복되지 않고 있습니다. 특히 에이즈는 공포의 질병이 분명합니다. 이 에이즈는 현대인의 성적 타락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의 병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병자를 고치실 때마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또는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질병이 죄에서 왔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죄는 우리 마음의 평안을 잃게 합니다. 마음의 평안을 잃으면 질병에 걸린다는 것은 현대의학의 증언입니다.
⑵현대인이 앓고 있는 정신적인 질병입니다. 현대인의 정신적인 병은 물질만능 사상과 권력 지상주의 그리고 육체적 쾌락에 지배를 받고 있습니다.
㉠'칼 막스'는 이 세상을 물질이라는 안경을 쓰고 보았습니다. 인간은 물질적 존재이며 물질에 의해서 삶이 좌우된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현대사회를 물질이 많고 적음에 따라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물질은 인간을 비인간화 시켜버리고 말았습니다. 물질로 인한 배신과 물질의 탐욕으로 인한 죄악을 하나님을 슬프게 합니다.
㉡'니체'는 권력을 최고의 가치로 규정했습니다. 그 결과 정치가 현대인의 운명을 좌우하게 되었습니다. 법으로도 해결 못하는 것을 정치적으로 해결했습니다. 이 권력의 우상을 독재와 개인주의 우상으로 바꾸어 모든 사람들을 권력의 도구화로 삼아버리고 비인간화 시켜버렸습니다.
왜 고문이 일어나고 데모가 일어나고 민주화의 투쟁이 일어나느냐 하면 사람이 사람답게 살려고 하는 탈 비인간화의 몸부림입니다.
㉢'프로이드'는 인간을 성적 존재로 보고 모든 인간의 활동을 이 성적 충동에 의한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이 사상을 현대인을 성의 노예로 전락시켰습니다.
작가 '펄 벅'은 오늘 미국 부부의 관계를 '성적 동반자의 의미' 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성의 자유, 성의 개방 사상을 간통과 동성애를 합법화시켰습니다. 미혼모의 증가와 독신주의 등의 사회 문제를 만들어 냈습니다. 이처럼 '물질의 부와 권력의 힘과 성적 쾌락'은 '현대인의 3대 우상'이 되었습니다. 오늘날 현대인들은 이 세 가지 악령에 사로잡혀 정신질환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믿/
②이런 현대인들 속에 교회의 임무가 무엇입니까?
⑴교회는 산아래 사람들과 함께 존재합니다. 그러나 산아래 사람들은 모든 질병에 걸려 있기 때문에 스스로 치유에 능력이 없습니다. 교회가 이들과 함께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이들을 치유해야 할 의무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할 수 있는 이 치유의 능력을 세상에서 스스로 얻은 것이 아니라 산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얻습니다. 교회가 신령한 은혜의 체험을 통해서 신적 능력을 소유해서 이 세상의 모든 질병을 치료하는 의무가 있습니다. /아멘입니까?/
20절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고 하신 말씀을 산에서 내려오신 예수께서 오늘날 모든 교회와 성도들에게 주신 메시지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렇게 예수님을 따라 다녔지만 아무 일도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귀신들린 아이에게 기도를 하니까 그 시간에 바로 나았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물었습니다. '예수님! 어찌하여 우리는 못합니까?' 여러분 우리도 이 질문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을 가졌는데 이런 일이 '왜 나에게 일어나지 않을까?' 이 주제를 붙들고 나가면 주께서 제자들을 향하여 응답했으므로 그 음성이 분명히 이 시간에 성령을 통하여 우리에게 올 줄로 믿습니다. /할/아멘!/
대부분 사람들은 자금이 없어서, 기회가 없어서, 배운 것이 없어서, 배경이 없어서, 사람이 없어서, 무엇이 없어서라고 변명하기가 일쑤입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꼭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믿음이 부족한 것입니다.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부족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오래 전에 서울 올림픽을 치르면서 많은 믿음의 주인공들에게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 중에 감동을 받았던 것은 그 당시 미국 여자 농구팀을 이끌고 왔던 감독입니다. 그분은 암 병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불같은 믿음을 가지고 드디어 금메달을 따냈습니다. 그가 맨 마지막에 인터뷰하기를 '나는 하나님께 감사할 뿐'이라고 고백했습니다.
또 자랑스러운 믿음의 딸 양 영자의 모습을 봤습니다. '이 모든 영광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했습니다. 유남규 선수는 한 게임이 끝날 때마다 엎드려 하나님께 기도하는 모습에서 큰 감동을 주셨습니다. 오래된 기억이지만 지금도 생생합니다.
여러분 위대한 훈련은 기적의 힘을 낳습니다. 믿음도 훈련된 믿음만이 거대한 힘을 낳습니다. 훈련된 믿음만이 기적의 역사를 이룩합니다. 믿음이란 우리 인생의 강박관념과 모든 어려움을 정복할 수가 있습니다.
오늘 거룩한 주님의 날에 거룩한 성전에서 이렇게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나는 나의 주변을 바꿀 수 있다. 나의 사고방식도 바꿀 수 있다. 나의 건강도, 나의 운명도 바꿀 수 있다. 지금 나의 환경을 바꿀 수 있다' /할/ 훈련된 믿음 속에 하나님의 기적의 손길을 체험하시기를 바랍니다.
⑵교회는 산을 옮길 수 있는 능력을 얻는 곳입니다.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시121:1-2절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여기서 산은 ㈀고난과 역경일 수도 있고, ㈁낙심과 절망일 수도 있고, ㈂좌절과 패배일 수도 있고, ㈃인생의 문제, 즉 요약하면 내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 '불가항력'적인 일을 의미합니다. 우리말에도 '절망이다, 갈수록 첩첩산중'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내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난관에 봉착했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진정한 성숙은 인생의 산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고난과 역경을 통하여 인생은 성숙해 지고 신앙도 뜨겁게 됩니다.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교회는 주님 앞에 나와 도움을 청하는 곳입니다. 시편기자는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나의 도움이 하늘과 땅을 지으신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기 '도움'이라는 말은 히브리어 '에제르'의 '지원하다, 구조하다, 구원하다'는 뜻인데, '어려움이나 위험한 순간에서 구해주거나, 일을 해결해 주는 것'을 말합니다. 도움의 종류는 '적군의 손에서 구해주는 군사적인 도움과 고아나 과부, 질병에 걸리거나 개인적인 곤경에서 구해주는 비군사적인 도움'이 있습니다.
도움을 얻는 비결은 바로 기도입니다. 마21:21-22절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치 아니하면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지우라 하여도 될 것이요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 /할/
③신앙생활은 도전정신이 있어야 산을 옮길 수 있습니다.
제자들의 도전 정신을 봅시다! 19절입니다. '이 때에 제자들이 종용히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우리는 어찌하여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우리는 어찌하여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이 질문에서 우리의 신앙의 태도를 점검해 보는 기회를 삼으십시다
.
⑴믿음의 사람은 불리한 열등의식을 몰아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합니다. '나는 너무 늙었어, 아직 나는 젊어서 경험이 없어, 나는 높은 사람들을 하는 사람이 없어, 나는 자본이 없어, 나는 건강이 딸려' 등등 많은 이유와 변명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어차피 인생은 빈손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어머니 뱃속에서 무엇인가 가지고 나온 사람 한 사람도 없습니다. 삼성의 이 회장도, 현대 가의 정 회장도 빈 손들고 나왔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할/
여러분! 깜짝 놀랄 사실하나를 말씀드릴까요? 인생길이 가장 위대한 것들은 모두 공짜입니다. 우리가 집도 사고, 옷도 사고, 모든 일용할 물품들을 분명히 값을 치릅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이 귀중한 것이 아닙니다. 가장 귀중한 우리의 생명, 공기, 자연, 시간, 건강 이런 것들을 우리 하나님께서 다 공짜로 주셨다는 것입니다. /믿/ 우리의 눈도, 귀도, 손도, 발도 공짜입니다.
믿음을 갖는 것도 비용이 필요 없습니다. 모든 위대한 일은 믿음과 함께 시작되어집니다. 마17:20절에 보면 예수님이 하도 답답하니까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고 하셨고, 또한 눅18:27절에서는 '무릇 사람의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할/ 믿음의 큰 재산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⑵겨자씨 같은 작은 믿음이라도 내 영혼에 비타민으로 공급해야 합니다.
육신이 허약하고 병약한 사람은 의사가 비타민을 권합니다. 우리 영혼의 믿음이 허약한 사람도, 영혼의 비타민을 먹어야 합니다. 기도는 내 영혼의 비타민입니다. 찬양도 내 영혼의 비타민입니다. 간증도, 하나님의 말씀도, 설교를 듣는 것도, 네 영혼에 비타민을 먹는 것입니다.
작은 믿음이라도 계속 비타민을 먹이면 큰 믿음이 됩니다. '다니엘 파울링'이라는 학자는 우리에게 성공적인 법칙 3가지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이 분은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두 손을 번쩍 들고 '주여 나는 믿습니다.'를 세 번 외친답니다. 그리고 '주여 나는 할 수 있습니다.'를 세 번 외치고, '주여 나는 오늘 사랑만 하렵니다.'를 세 번 외친다고 합니다.
사람이 자꾸 감사를 하고, 사랑을 하면 특수 호르몬이 나와서 예뻐지고 장수하게 만들고 암세포를 죽인다고 합니다. 이상구박사의 건강비결도 이런 차원입니다.
참된 신앙은 언제나 사람을 죄악감과 공포심과 걱정과 불만으로부터 해방시켜줍니다. /할/ 작은 믿음이라도 붙들고 나가면 하나님의 자녀가 돼는 권세가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작은 믿음이라도 한탄하지 마시고 용기를 모으고 믿음을 비타민을 열심히 공급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⑶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동업자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생의 비밀이며, 성공 자들의 열쇠입니다. 하나님을 동업자로 삼는 사람은 어떤 능력이 따르는지 아십니까?
㈀위대한 통찰력이 따릅니다.
㈁위대한 영감이 따릅니다.
㈂놀라운 지혜가 따라 옵니다.
㈃거대한 현상이 생깁니다. /할/
하나님을 동업자로 삼은 사람은 남이 알지 못하는 강하고 담대한 용기가 있습니다. 그 하나님을 붙들고 강하고 담대하게 달려나가시기를 바랍니다. 환경을 바라보지 마십시오, 지금 보이는 게 없고, 잡히는 것이 없고, 들리는 것이 없다할지라도 믿음을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주님은 확실하게 약속해 주십니다. 요10:10절을 보세요!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 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할/ 여러분! 세상은 만만치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세상을 살 때에 누구나 분명하고 확실한 동업자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육신의 형제를 동업자로 삼습니다. 그러다가 형이 그럴 줄 몰랐느니, 동생이 형을 속인다느니 말이 많게 됩니다.
또 육신의 자녀가 부모를 동업자로 삼습니다. 그러더니 또 실망을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부부가 제일 좋은 동업자라고 하면서 배우자를 동업자로 삼습니다. 사실 부부 이상으로 든든한 동업자는 없습니다.
그런데 그 배우자가 떠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면 낙심하고 좌절하고 포기해 버리고 맙니다. 목회자는 그런 모습들을 많이 보게 됩니다.
여러분! 인간의 마음은 조석변개로 변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사람의 인정은 떠나도 우리 하나님은 절대로 안 떠나십니다. /믿/ 하나님은 우리에게 먼저 모든 것이 합력해서 선을 이루어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어떤 사람에게 그런 축복을 주십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즉 믿음을 자긴 자들에게 축복해 주시며 오늘도 기적을 베푸시기를 원하십니다. /믿/아멘!/
▶보잘 것 없는 시골뜨기 소년이 뭉게구름 피어오르는 언덕에서 하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을 동업자로 삼았을 때 나라를 구원하는 다윗 왕이 되었습니다. 인생의 반나절을 수많은 수모와 허탈 속에 지내던 갈릴리 바다에 고기 잡는 보잘 것 없는 청년들이 하나님을 동업자로 삼고 세계의 운명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여러분! 우리도 이 시간 이후부터는 '나의 동업자는 하나님이시다'라고 외치시기 바랍니다. 신앙은 입술의 고백입니다. /할/
⑷믿음을 금이나 생명처럼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우리는 별로 가치 없는 것들을 위해서 많은 것들을 낭비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믿음은 낭비할 수도 있고, 투자할 수도 있습니다.
오늘 하나님의 권면도 믿음을 계산하는 습관을 가지는 것이 우리에게 유익합니다. '어찌하여 우리는 못했습니까?' '내 믿음이 얼마나 될까?' 믿음의 계산을 통해서 우리의 자고한 마음이 열리고 새로운 활력소를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깨닫는 자가 복된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믿음을 측량해야 승리할 수 있습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으면서도 왜 나에게 축복을 안겨줍니까?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있습니까? 예수님을 믿으면 뭔가 풀린다고 말하더니 나는 예수 믿고 더 어려움을 당했다고 불평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진심으로 네가 하나님께 얼마만큼 '믿음을 보였는가?'를 반성해야 합니다. 여러분! 죄 때문에 통곡한 일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한 일이 있습니까? 주님이 내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고 하셨는데 사랑해 보셨습니까? 그 영혼이 지옥 음부에 떨어질 것을 바라보고 얼마나 가슴을 조였습니까? 정말 모든 문제를 놓고 하나님께 얼마만큼 매달렸습니까? 우리는 진지하게 이 문제들을 한 번 반성해야 합니다. /아멘입니까?/
▶한번은 예수님을 모시고 제자들이 갈릴리 해변 가버나움으로 가는 길에 풍랑을 만나 죽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부랴부랴 예수님을 깨웁니다. 그러자 주님이 일어나서 바다를 꾸짖어 잠잠케 하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시기를 '너희 믿음을 어디에 두었느냐?'고 하십니다.
여러분! 믿음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믿음의 분량만큼 축복하시고 역사를 일으키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오늘 이 시간 진실하게 우리의 믿음을 한번 정검해 보아야 합니다.
㈀내 믿음을 달아보아야 합니다.
㈁자기 믿음에 늘 도전해야 합니다.
㈂믿음에 자극을 주어야 합니다.
㈃싱싱한 믿음을 사모해야 합니다.
㈄어느 곳인가 나를 도울 믿음의 사람이 있다고 하는 기적을 알아야 합니다. 산 아래 내려오신 주님은 '믿음이 없고 패역한 시대'라고 꾸짖으셨습니다.
▶여러분! 산 아래는 어떤 곳인가? 산 아래로 내려오신 예수님은 단번에 그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아셨습니다. 이미 산 위에서부터 산 아래를 내려다보시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세 제자를 데리고 부랴부랴 내려오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아니고서는 산 아래의 문제가 해결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산 아래는 '믿음이 없고 패역한 곳'이었습니다. 지옥 같은 곳이었습니다. 그 산아래 많은 사람이 있습니다. 9명의 제자들이 있고, 병든 자가 있고 그 가족이 있습니다. 대적 자 서기관도 있고 우르르 몰려다니는 군중들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간질병으로 불에도 넘어지고 물에도 쓰러지는 병자와 그 아비의 아픔에 예수님은 견딜 수 없는 사랑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급히 산 아래로 내려오셨습니다. 그러나 산 아래의 모습을 보시는 순간, 절로 탄식이 나왔습니다.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여기 '믿음이 없다'는 말은 '예수님을 나의 생명의 주인으로 모시지 않았다'는 말씀이고 '패역하다'는 말은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셨다고는 하면서도 '주인을 향한 섬김이 없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패역'이라는 말씀은 헬라어로 '왜곡시킨다' '그르친다' '굽게 한다'는 뜻의 '디아스트레포'입니다. 이 말은 잘못된 삶이 계속되고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믿는다고는 하면서도 믿는 티가 나지 않는 생활이 바로 패역한 생활입니다. 헌신이 없는 생활, 그래서 주인을 기쁘게 하지 못하는 생활이 패역한 생활입니다.
▶믿음이 없는 세대가 된 것은 언제부터인가? 믿음이 없는 세대가 된 것은 아담이 범죄 하여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면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불신의 근원은 하나님을 잃은 데서 왔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가치와 의미의 근원이 되시는데 그 근원을 잃어버렸으므로 가치와 의미를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잃으면 자기 자신을 잃은 것입니다. 왜 그런지 아시지요?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할/
㈂이웃과의 관계에서도 거짓되며 믿음의 관계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패역했다.'고 하신 것은 '하나님에 대한 거역이요, 진리에 대한 거역'입니다. 하나님을 거역한 인간은 부모형제를 거역하고 이웃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까 '패역'은 '거룩에 대해서, 정직에 대해서'의 거역합니다. 살인이 일어나고 범죄와 폭력과 테러가 일어나고 자연은 공해로 죽어가고 지구는 멸망으로 치닫게 됩니다. 여러분! 얼마나 무섭습니까?
그러나 믿음의 능력은 귀신을 이깁니다. 예수님께서 귀신을 꾸짖으시니 귀신이 나가고 아기가 간질병으로부터 고침을 받았습니다. /할/ 마귀를 이기는 길은 핵폭탄이 아닙니다. 말씀의 능력을 가진 믿음만이 이깁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간질병을 고친 사건은 육적인 질병만을 치료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의 생활 전부의 질병을 고치시는 능력이 예수께 있습니다. 우리들의 가정을, 사업을, 직장을, 모든 부분을 다 일으키시는 주님의 능력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왜 오늘 예수님의 제자들이 실패했습니까?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또한 주님께서 주신 은사가 없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은사를 통하여 건설됩니다. 이 은사는 믿음을 수반해야 하며 기도를 동반하지 않고서는 얻을 수가 없습니다.
⑸이제 '우리들의 생명 위에 주님의 손이 얹어져야' 합니다.
무식했던 어부 베드로와 그의 동료들에게 주님께서 손을 얹으시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할/
저들은 낙심하여 자신들을 바닷가에 쓸모 없는 인간이라고 한탄하고 있을 때 바로 그 어깨 위에 손을 얹으시고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에 제일 값있는 사람이 될 수 있다.' /할/
오늘 본문 20절에서 주님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또 마21:21절에서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치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 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지우라 하여도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산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들의 삶 속에 일어나는 모든 어려운 문제의 짐을 가르쳐 말씀할 것입니다. 가정의 짐, 사업의 짐, 물질의 짐, 그 어떠한 짐도 던져지고 옮겨지는 역사가 주안에서 이루어집니다. /할/
▶중요한 것은 '믿음'이 있어야 하고 '의심'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약1:6-7절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말씀을 마칩니다. 오늘도 우리 주님은 지금 성령으로 우리들의 어깨에 손을 얹어주시고 '너는 내 아들이다. 너는 내 딸이다. 더 큰 일을 할 것이요 더 큰 축복을 받으리라'고 하십니다. /아멘!/ 이 위대한 영감, 이 위대한 손길이 닿은 자마다 산을 옮기는 믿음이 임하게 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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