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출 3:1-12)
하나님은 절망된 오늘과는 전혀 다른 내일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성도의 내일은 오늘과는 다릅니다. 창1장과 2장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던 장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던 별,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던 물고기와 땅위에 모든 짐승들, 그리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던 공중의 새,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은 인간이 등장합니다.
그러나 3장으로 접어들면서 분위기를 캄캄한 동굴 속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음침하고 으스스합니다. 마귀의 유혹과 그 유혹에 넘어간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하나님의 저주가 벼락같이 임합니다. 모두가 절망이요, 저주요, 끝장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오늘과 다른 내일을 약속하셨습니다. 창3:15절에서 '여자의 후손'으로 메시아가 될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하여 마귀를 멸망시킬 것을 예언하셨습니다. 그 후부터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오늘과 다른 내일을 약속하셨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백성을 이끌고 40년 간 그 고통스러운 광야를 행진할 수 있었던 강력한 힘은 '오늘과 다른 내일이 있다는 소망' 때문이었습니다. 내일은 만나가 내리고 내일은 메추라기가 내리며 내일은 젖과 꿀이 흐리는 가나안 땅이 보입니다. 그러니까 새로운 희망이 보인 것입니다.
'내일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리라!' 강력한 내일에 대한 소망은 힘든 오늘을 참게 만드는 능력이 됩니다. 강대국 앗수르가 이스라엘을 점령하여 몹시 괴롭히자 하나님은 앗수르를 멸망시켰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해방의 기쁨을 누리는가 싶었더니 이번에는 더 강한 바벨론이 이스라엘 쳐들어와 포로로 잡아갔습니다.
간신히 곰을 피하였더니 사자가 덤벼든 격입니다. 우리 인생살이도 마찬가지입니다. 간신히 문제 하나를 해결했더니 또 다른 문제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제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 절망 가운데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하나님은 또 다른 내일을 약속하십니다. 사41:14-15절 "지렁이 같은 너 야곱아, 너희 이스라엘 사람들아 두려워 말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내가 너를 도울 것이라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니라 보라 내가 너로 이가 날카로운 새 타작 기계를 삼으리니 네가 산들을 쳐서 부스러기를 만들 것이며 작은 산들로 겨 같게 할 것이라"
'너희들이 지금은 바벨론에 포로가 되어 지렁이같이 쓸모 없어도 내일은 타작기계와 같이 쓰임 받게 되리라'는 희망에 메시지입니다. 하나님 앞에 쓰임을 받는다는 이 사실에 감격할 줄 아는 지성이 있기를 소원합니다. /믿/
지렁이는 멸시받는 동물이요, 짓밟히는 동물입니다. 지금은 지렁이가 정력에 좋다고 마구 잡아다 먹었습니다. 그러나 그때까지만 해도 지렁이는 쓸모 없는 미물이었습니다. '지렁이와 같은 이스라엘을 내일은 타작기계로 삼으시는 하나님!' 멋쟁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기계는 기계로, 그 자체로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쓰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기계입니다. 누군가가 써 주어야 그 기계는 빛을 발하게 됩니다. 그런데 누구에게 쓰임을 받느냐가 정말 중요합니다.
마귀가 쓰면 마귀의 기계가 되고 하나님이 쓰시면 하나님의 기계가 됩니다. 여러분 대통령이 쓰겠다고 하여도 펄펄 뛰는데 하나님께서 쓰시겠다니 이 얼마나 감격스러운 일입니까? 우리는 지렁이가 능력 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등뼈도 없이 흠을 되는 보기만 해도 밥맛 떨어지는 동물입니다.
바벨론 포로로 사로잡혀 힘이 쑥 빠져 한숨만 쉬고 있는 이스라엘 민족의 그 때 그 날의 모습은 마치 지렁이와 같은 불쌍한 존재였습니다. 그런 이스라엘을 향하여 '지렁이 같은 너 야곱아 두려워 말라 내가 너로 이가 날카로운 새 타작기계로 삼으리니 네가 산을 쳐서 부스러기를 만들 것이며 작은 산들로 겨 같게 할 것이라' '산을 부스러기로 만들 정도의 능력을 주마, 작은 산을 겨같이 만들 정도의 능력을 주마' 여러분, 하나님은 얼마나 큰 능력을 약속하셨습니까? 이 약속이 있었기에 오늘 우리가 무능하지만 내일은 능력이 주어지는 날입니다. /믿/
오늘 본문 속에 미디안 광야의 모세를 보십시오! 그는 지렁이 같이 미미한 양이나 치는 사람이었으나 하나님을 만나고 나서 강력한 능력을 지닌 하나님의 종이 되었습니다. 구약에서 파란만장한 생을 살다간 풍운아 모세는 이스라엘 민족사에 최대의 위인이요 민족의 지도자요, 정치가였습니다.
지금부터 약3500여 년 전 모세가 태어날 때 애굽 왕 바로는 히브리 남자아이를 전부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모세의 어머니 요게벳은 아이를 석 달 동안 숨겨 키웠으나 더 이상 숨길 수가 없어 갈대상자를 만들어 역청을 바르고 소나무 진을 칠하여 모세를 담아 나일강 물에 띄었습니다.
그때 강가에 목욕하러 왔던 궁녀들의 눈에 띠어 건짐을 받아 모세는 바로의 궁궐에 들어가 바로공주의 양아들이 되어 그의 사람을 받으며 학문과 무술을 닦았습니다. 하나님은 이때 바로 공주의 마음을 사로잡아 모세의 어머니 요게벳으로 젖을 먹이고 키우는 보모로 세웠습니다. 모세가 청년이 되면서도 어머니 요게벳의 신앙교육을 받고 자랐지만, 모세는 자기의 학문과 힘으로 자기 민족을 구원해 보리라는 간절한 소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스라엘 백성과 애굽인의 싸움을 보고 의분을 느낀 모세가 애굽 인을 쳐죽인 것이 탄로가 되어 실망의 한을 품고 망명길에 오릅니다. 이제 모세는 하늘을 지붕 삼고 떠도는 방랑객이 된 것입니다.
그가 미디안 땅에 도착하여 이드로라는 사람을 만나 그 집에서 양을 치면서 그의 딸과 결혼해서 처가살이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모세는 여자를 잘 만나서 아들, 딸 낳고 양떼를 기르면서 미디안 광야에서 40년의 세월을 보냅니다.
모세가 40년 동안의 미디안 광야의 생활을 통해서 깨달은 것은 '나도 별 볼일 없는 인생이로구나! 아들 딸 낳고 이렇게 살다가 죽는 거지 뭐! 인생은 그렇고 그런 거야!' 한마디로 '나는 아무 것도 아니로구나!' 자기를 깨달은 것입니다.
우리가 자기를 발견하기까지는 굉장히 많은 시간이 걸립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를 잘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을 부인하고 자기주의에 빠져 살아갑니다. '인생이 어디서 와서, 무엇 때문에 살고, 어디로 가는가?'를 깨달은 사람은 하나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할/
그 날도 모세는 장인 이드로의 양 무리를 몰고 광야 서편에 있는 호렙산에 오릅니다. 사실 모세는 이드로의 양 무리를 쳤으나 그의 본업은 하나님께 깊이 기도하며 이스라엘의 구원 문제를 호소하며 과거에 자신의 모든 죄와 인본주의로 행한 모든 것과 완력으로 사람을 죽인 것과 자기 힘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할 수 있다고 믿었던 어리석은 불 신앙의 문제들을 하나님께 깊이 회개하며 40년 동안 피나는 훈련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이 훈련시킵니다. 주의 종은 주의 종 되기까지 훈련시키고 성도들을 성도에 맞게 훈련시키십니다. /할/
▶1절 "모세가 그 장인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양무리를 치더니 그 무리를 광야 서편으로 인도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매"
'모세가 그 장인 이드로의 양을 치더니' 즉 모세는 선택받은 하나님의 백성을 인도할 지도자가 되기에 앞서 약 40년 간 양들을 인도하는 목자로써 지속적인 훈련을 받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요셉을 애굽총리로 세우기 전에 그를 시위대장 보디발의 집에서 종의 신분으로 가정 총무 일을 맡겨 훈련시키신 것과 맥을 같이 하는 사건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일꾼들을 이렇게 훈련시켜서 쓰시는 분이십니다. /아멘!/
'인도하여' 이 말은 장차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내어 가나안땅으로 인도할 모세의 사명을 암시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우리들에게도 이 사명이 있습니다. 억만 죄악으로 지옥 불에 들어가고 있는 네 이웃을 주 앞으로 인도하여 천국의 백성이 되게 하는 것이 저와 여러분들에게 주신 사명입니다. /아멘입니까?/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매' 성경에서는 호렙산을 종종 언약의 산으로 십계명을 부여 받았던 시내산과 동일하게 취급합니다. 한 마디로 산의 호칭은 호렙인데 정상 부분은 시내산으로 생각하면 됩니다. 그러니까 모세가 그 날도 호렙산에서 양을 먹이면서 올라가다가 가시떨기 나무에 불이 붙어 있는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2절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
지금 모세는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를 보신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불로 임재하실 때에 백향목과 같은 좋은 나무 가운데 임재하시지 않고 가시떨기 나무와 같이 쓸모 없고 보잘것없는 나무에 임재하셨습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지혜 있고, 통달하고, 능한 사람에게는 숨기시고, 가시떨기나무와 같이 비천하고 무식하고 미련하고 멸시받고 보잘것없는 자에게 나타나시는 분이심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고전1:28절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떨기나무는 일종의 가시덤불입니다. 보잘것없는 흔한 나무입니다. 떨기나무는 이스라엘을 상징하며 타지 않는 것은 환난 가운데서도 망하지 않는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아더 핑크'라는 유명한 성경박사는 '떨기나무는 실상 모세 자신의 모습'이라고 지적합니다. 사막에 아무렇게나 버림받은 그 흔하고 흔한 떨기나무, 이것이 바로 모세 자신의 모습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모세는 한 때, 오만과 자만심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가시떨기 나무에 불이 붙었습니다. 불은 모든 불결한 것을 태워 멸하는 힘이 있습니다. 불은 모든 것을 정화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특히 모세에게 나타난 떨기나무 불길은 모세를 정화시키기 위한 불이었습니다.
모세에게는 태워야 할 죄와 인간적인 잔재 물이 너무 많았습니다. 그가 주먹으로 애굽사람을 쳐죽인 것은 의분이라 하였으나 사실은 만용이요, 혈기였습니다. 그의 마음속에 혈기와 분노의 인간성이 살아있었습니다. 그것은 성령의 불로만 녹일 수가 있습니다.
가시떨기나무와 같은 연약한 존재라도 그 안에 하나님의 불이 임하면 능력자가 되고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 받을 수가 있습니다. 오늘 이 불을 우리 모두 받으십시다. /아멘!/할/
오랫동안 로마제국의 역대폭군들에 의하여 기독교는 대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러던 것이 콘스탄틴 대왕 때 180도로 전환을 하여 기독교는 자유를 얻고 이때로부터 서방 선교의 문을 열었습니다.
▶역사가 유세비우스에 의하면 콘스탄틴 대왕을 개종시킨 신비한 얘기를 역사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대왕의 로마의 운명을 건 중대한 전쟁을 앞두고 로마 근교에 진을 치고 있던 어느 날 밤 공중에 불붙는 십자가를 보았다고 합니다.
그로부터 콘스탄틴 대왕이 기독교로 개종한 것입니다. 로마가 기독교 국가가 되었다고 합니다. 지금도 불의 체험은 그 경험하는 방법은 달라도 모든 신앙 인들에게 임하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불을 받는 종교입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의 떨기나무에 붙은 불은 누가 붙인 불입니까? 하나님이 붙이신 불입니다. 사람이 붙인 불이 아닙니다. 부흥사가 일시적으로 화끈하게 붙이는 불도 있습니다. 그런 불들은 식어버리기 쉬우나 하나님께서 붙이신 불은 영원히 꺼지지 않습니다. /믿/
하나님께서 불을 붙이신 뜻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다하려면 인간적인 방법으로 하지 말라는 뜻에서 불타는 가시덤불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직분은 세상의 방법, 인간적인 기교만으로는 일을 성취할 수 없습니다. 인간적인 기교 속에는 타지 않은 가시가 있습니다. 가시는 남의 마음을 찌릅니다. 상하게 합니다. 그 결과는 화목을 깹니다. 지도자에게 가시가 있다면 양떼는 다치고 결국은 자기 자신도 다치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가시덤불을 보여 주시며 그 가운데 불로 나타나셨습니다. 행여나 여러분의 마음속에 아직도 가시가 있습니까? 오늘 이 불로 다 태워버리시기 바랍니다. /할/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여기서 떨기나무는 가시나무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가시떨기 앞에서 바뀌었고, 모세의 일생도 가시떨기 앞에서 바뀌었습니다.
▶왜 하나님이 그 많은 나무 중에 가시떨기 앞에 나타났을까요? 가시나무가 주는 교훈이 무엇일까요?
⑴성결을 의미합니다. 미드라쉬의 저자는 '가시나무는 성결한 나무'라고 했습니다. 이방사람들이 우상을 만들거나 우상에 관계된 물건을 만들 때 결코 사용되지 않는 나무가 가시나무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가시나무는 성결한 나무입니다. 하나님은 성결한 곳에 나타나신다고 하는 의미입니다.
집에 그릇을 사용할 때 첫 조건은 깨끗한 그릇을 씁니다. 아무리 금 그릇이라도 더러우면 사용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깨끗한 사람에게 나타나십니다. 오래 예수를 믿어도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이 없는 사람들의 가장 큰 문제는 성결입니다.
⑵고독하고 외로움의 상징입니다. 가시나무는 나무 중에 가장 고독한 나무입니다. 왜 고독합니까? 가시가 있어서 새들이 앉지 않는 나무랍니다. 벌레들도 끓지 않는다고 합니다. 근처에 짐승들도 오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고독한 나무입니다.
하나님은 왜 하필이면 가시나무에 나타나셨을까요? 하나님은 고독한 사람에게 나타나신다는 의미입니다. 고독하고 외로우십니까? 하나님이 나타나실 때입니다.
⑶아픔을 상징하는 나무입니다. 가시는 아픔을 의미합니다. 가시는 찌르는 것입니다. 모세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실 때 하필이면 가시나무에 하나님이 나타나신 것은 아파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신다는 소망 적인 이야기입니다.
그는 가장 가시 같은 환경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고통 당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려고 하다가 동족에게 쫓겨서 미디안 광야에 나와 혼자 살고 있을 때입니다. 하나님은 아픈 사람에게 나타납니다. 여러분, 무엇이 여러분을 아프게 하십니까? 돈입니까? 질병입니까? 자식입니까? 하나님은 상한 심령을 외면하시지 않습니다. 찌르는 가시가 있을 때 하나님은 나타나십니다.
⑷철저한 보호를 의미합니다. 왜 하필이면 가시나무에 하나님이 나타나셨을까요? 가시나무를 건드리면 건드린 사람이 상처를 입게 됩니다. 그래서 아무도 가시나무를 만지기를 꺼려합니다. 왜? 가시 때문에 오히려 상처를 당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모세를 건드리려는 사람은 오히려 피해를 입었습니다. 이스라엘을 건드린 나라는 오히려 피해를 입었습니다.
모세도 이스라엘도 가시 같은 존재입니다. 건드릴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리는 요나 백성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요나를 고래가 삼켰습니다. 한 끼 식사인 줄 알고 삼켰는데 3일만 고생만 하다가 결국은 토해 놓고 말았습니다. 이스라엘을 애굽이 400년 간 삼켰었습니다. 그러나 소화시키지 못 하고 결국은 토해놓고 말았습니다. 10가지 재앙으로 만신창이가 되어 왕도 죽고 군사도 죽고 장자도 죽고 토하고 말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가시 같은 존재였습니다.
바벨론이 이스라엘을 70년 동안 삼키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토하고 말았습니다. 블레셋이, 앗수르가 이스라엘을 삼킨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소화시키지 못 하고 토하여 놓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은 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리는 요나 백성이다.' 즉 누가 우리를 삼키면 자기만 피해를 보고 결국은 우리를 토해놓고 말 것이라고 단호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모세나 이스라엘은 가시나무 같아서 누가 건드리면 자기만 손해를 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하필이면 가시나무에 나타나신 것은 이런 의미를 지니고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모두 영적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가시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에 누구도 건드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자부심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아멘!/
▶3절 "이에 가로되 내가 돌이켜 가서 이 큰 광경을 보리라 떨기나무가 어찌하여 타지 아니하는고 하는 동시에"
모세가 이 이상한 장면에 대해서 호기심이 생겼습니다. 여러분 신앙에 있어서 호기심과 탐구심이 절대 필요합니다. 신앙은 두 가지 면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는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추구 심을 가지고 살펴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이되 그 말씀을 우리가 읽고 깊이 연구해야 합니다. /아멘입니까?/
▶4절 "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가라사대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본절은 하나님이 모세를 부르시고 모세가 대답하는 장면입니다. 하나님이 부르시는 것을 신학적인 용어로 소명이라고 합니다. 그 불꽃 가운데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모세야! 모세야!' 지금 하나님이 모세를 부르십니다. 그 부름은 일하라는 신호입니다. 두 번 부르신 것은 그만큼 급하고 상황이 긴박하다는 의미입니다. 이 부름은 미디안 도피 생활의 종말을 고하는 부름이요, 사명을 받는 순간입니다. 모세는 40년 간 한없이 하나님을 불렀으며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음성이 없었습니다. 40년이나 응답이 없었습니다. 그 긴 세월동안 모세를 부르시지 않던 그 하나님이 이제 호렙산 기슭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불러주신 것입니다. /할/
이 부름은 역사의 변화가 도래되는 신호이며 한 역사의 새로운 서막이 열리는 부름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정하실 때에 한 인물이 활동하도록 시대마다 부르시고 부르십니다.
▶모세의 응답은 매우 짧은 문장입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그러나 그 대답 속에는 세 가지의 커다란 주제가 담겨 있습니다.
⑴내가: 이것은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 앞에 선 모세 자신입니다. 하나님은 집단으로 부르지 않으십니다. 꼭 개인적으로 부르십니다. 1:1의 부름입니다.
지금 모세는 창조자의 빛 앞에서 자신을 보는 순간입니다. 전능자의 부름을 받고 있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여러분 인간이 어디에 가서 자기의 모습을 바로 볼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만 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주 앞에서 자신이 죄인인 것을 발견하고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창조주 앞에서만이 피조된 나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죄인의 모습도, 연약한 모습도 그 분 앞에서만 발견한 수 있는 것입니다. /아멘!/
⑵여기: 모세가 서 있는 곳은 미디안 광야의 호렙산 기슭입니다. 평소에 양떼를 몰고 다니던 곳입니다. '여기'는 자기가 서 있는 위치입니다. 여러분! 사람은 자기의 자리가 있습니다. 삶을 위한 최소한의 자리가 있는 것입니다. 가정에서도 남편의 자리, 아내의 자리가 있습니다. 교회에서는 권사님의 자리가 있고, 집사님의 자리가 있고, 평신도들의 자리가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자기 자리를 늘 정검해 보면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왜 내게 이런 자리를 주었을까? 하나님이 내게 왜 이 직업을 주었고, 이 재능을 주셨을까? 여러분 우리 모두 자신의 서 있는 현주소를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할/
⑶있나이다: 이 말은 현재 시간의 개념입니다. '여기'는 삶의 공간이며, '있다는 것은' 삶의 시간입니다. 시간이란 삶의 내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시간을 바로 쓰고 있다는 것은 바로 살고 있다는 말과 같습니다.
시간의 가치를 아는 사람은 삶을 바로 아는 사람입니다. 시간은 자연적 시간과 역사적 시간이 있습니다. 자연적 시간이란 불가항력적입니다. 그저 흘러가는 시간입니다. 인간이 잡을 수도 없고, 수정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 자연적 시간 속에서 인간의 행동이 시작될 때, 그 시간은 역사적 시간이 됩니다. 기도하는 시간, 역사적 시간입니다. 봉사, 전도하는 것, 역사적인 시간입니다.
모세는 자연적인 시간 속에서 부름을 받았습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지금 역사적인 시간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흘러가는 자연적인 시간을 붙잡아 역사적인 시간으로 바꾸십시다. 지금 예배드리는 이 시간도 역사적인 시간입니다. 주님께 거룩한 산 제물이 되었다는 것은 축복 중에 축복입니다. /믿/
하나님은 모세의 첫 응답을 들으신 후에 놀라운 말씀으로 계시하십니다.
▶5절 "하나님이 가라사대 이리로 가까이 하지 말라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이리로 가까이 하지 말라' 이는 창조자와 피조물과의 근본적인 구별입니다. 절대자 하나님과 피조물의 구별이며 영원 자와 유한자의 구별이며 경배를 받으시는 자와 경배를 드리는 자의 구별입니다.
'네가 선 땅은 거룩한 땅이니' 이 말씀은 땅 자체에 있지 않습니다. 모세가 선 곳은 결코 거룩한 곳이 될 수 없습니다. 평당 몇 억씩 하는 명동 중심가도 아니요, 강남 일 번지의 땅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평야의 기름진 땅도 아닙니다.
그 땅은 황막한 사막의 땅입니다. 버려진 땅이요, 저주의 땅입니다. 그런데 어째서 그 땅을 거룩한 땅이라고 합니까? 그 의미는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시는 거룩한 사역을 하신 곳이기에 거룩한 땅입니다. 하나님이 쓰시는 땅, 하나님이 일하시는 땅, 바로 그곳이 거룩한 땅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 가정을 저주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못난 부모, 유산 없는 가문이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비록 가난과 무지가 있을지라도 하나님이 내 가정을 통하여 일하시는 한 거룩한 가정입니다. /믿/
또한 현대교회에 가끔 비리도 있고, 부조리가 다소 있을지라도 그래도 하나님이 쓰시는 교회는 거룩한 교회입니다. 오늘 이 자리가 바로 거룩한 땅입니다.
여러분 우리 성도의 위치가 거룩한 위치라는 뜻도 됩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께 속했기 때문에 거룩하고 성령께서 거하시는 전이기 때문에 거룩하며 물과 성령으로 중생한 영이 있기 때문에 거룩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씻음 받았기 때문에 거룩합니다. /아멘!/할/
하나님은 모세에게 가까이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신을 벗기 전에는 하나님께 가까이 나갈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신을 벗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도 신을 벗으라고 하십니다.
'신을 벗어라'는 무슨 의미인가? 신이란 지금까지 걸어온 그 인생의 발자취입니다. 모세가 '닦아놓은 것'과 '노력해 온 것'의 그 모든 것을 벗어버리고 하나님 앞에서 벌거벗은 그대로 서라는 의미입니다.
▶신을 벗으라는 것에는 몇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①인생의 새 출발의 신호입니다. 신을 신는다는 것은 활동을 의미하고 신을 벗는다는 것은 끝을 의미합니다. 모세에게 발에서 신을 벗으라고 한 것은 네 인생은 이제 끝이 났다. 그리고 모세 너는 죽었다는 말입니다.
어린아이는 신이 없습니다. 엄마가 업고 다닙니다. 즉 모세 스스로 걷지 않고 하나님이 걷게 하리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걷게 해 주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인도하는 대로 가고 하나님이 인도하는 자리에 있으라는 것입니다. 천국은 자신의 발로 걸어가는 곳이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들어가는 곳입니다.
시121:8절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 어떤 사람을 지켜 주십니까? 발에서 신을 벗은 자입니다.
②자기를 포기하라는 말씀입니다. 자기의 지식과 수단과 방법과 그리고 자기의 교만과 무지를 내려놓으라는 말입니다.
③인간의 죄를 벗으라는 뜻입니다. 신발은 사람들이 신고 다니므로 더러운 것이 많이 묻습니다. 그러므로 그 신을 신고는 깨끗한 곳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회개하는 심령 속에 임합니다.
④종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옛날 노예들에게는 신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종의 관계입니다. 절대 순종의 관계요, 절대 복종의 관계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 전적으로 복종해야 합니다. 조금이라도 자기의 주장이나 의견을 고집해서는 안 됩니다. 축복 받는 비결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믿/
여기서 모세를 부르신 것은 그를 사명자로 쓰시기 위해 부르신 것입니다. '칼 힐티'는 '사명을 받은 날은 생일날보다 더 소중한 날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사명의 소중함을 좀 알아보고 갑시다!
①남보다 더 많이 가졌다는 것은 축복이 아니라 사명입니다. 무엇이든지 남보다 더 많은 것을 받은 것은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할 사명이 주어진 사람들입니다. 남보다 지혜가 많은 사람은 그 지혜로 하나님의 일을 하라는 명령입니다. 남보다 물질을 많이 받았다면 다른 사람을 위하여 사용하라는 사명을 받은 것입니다. 남보다 더 건강을 받았다면 남을 위하여 건강을 사용하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②남보다 아파하는 것은 고통이 아니라 사명입니다. 하나님이 아픔을 주셨다면 그것은 사명입니다. 그 아픔을 통하여 같은 아픔을 가진 사람들을 위로하고 사랑하라고 하시는 명령입니다.
▶최수동이라는 분이 사우디아라비아 사막에서 일하다가 교통사고를 당해 다리를 잘렸습니다. 트럭 운전수가 '어설프게 살아 있으면 골치 아프다. 아예 깔아 죽여'라는 소리를 얼떨결에 들었습니다. 트럭이 다시 덮쳤습니다. 하나 남은 다리마저 잘려 나갔습니다. 죽은 줄 알고 트럭운전사는 갔지만 간신히 구사일생으로 살아났습니다. 그는 지금 '두 다리 선교회'를 만들어 다리가 없는 자를 모아 사랑하고 있습니다. '불 속에라도 들어가서'라는 복음 송은 그가 지은 노래입니다. 그렇습니다. 아픔은 사명입니다.
③남보다 가슴 설레는 것은 망상이 아니라 사명입니다. 그것만 생각하면 가슴이 설레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명입니다. 그것만 생각하면 미치도록 좋은 것이 사명입니다. 차범근 감독은 늘 말했습니다. '나는 공을 찰 땐 공만 찼고 공을 차지 않을 때는 공만 생각했다.' 이렇게 가슴 설레는 것이 사명입니다.
코카콜라 사장은 콜라만 생각하면 자다가 깨어나도 즐겁습니다. 핏줄 속에서 피를 모두 빼어 버리고 콜라를 넣어도 좋다고 말했습니다. 열심히 콜라를 개발하고 팔아서 오래 전에 1000만 불 120억 원을 '에모리' 신학대학에 헌금했다고 합니다.
빌2:13절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마음속에 불타는 소원이 일어나는 것은 바로 사명입니다.
여러분은 가슴 설레게 하고 싶은 일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사명입니다. 그것을 하나님이 하라고 마음에 소원을 두고 명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주신 소원의 사명입니다. 그것을 하셔야 합니다. 가슴 설렘이 사명입니다. /아멘!/
④남보다 부담이 되는 것은 강요가 아니라 사명입니다. 하나님께서 부담감을 주시는 것이 바로 사명입니다. 모세는 40살에 자기 백성을 고통에서 해방시켜 하겠다는 부담감이 생겼습니다. 행7:23절 "나이 사십이 되매 그 형제 이스라엘 자손을 돌아볼 생각이 나더니"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400년이나 살았지만 자기 백성을 바로의 손아귀에서 구해야 한다는 부담감을 가진 사람은 겨우 모세 한 사람이었습니다. 부담감을 가진 사람이 그 일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 천우 목사님은 거지들만 보면 부담감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그는 '나그네 선교회'를 조직하여 거지들을 돌보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청량리588골목에 가나안교회의 김도진 목사님도 버려진 노숙자만 보면 부담감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나안쉼터를 만들어 놓고 진정한 사회복지가 무엇인가를 실천하고 계십니다. /할/
▶6절 "또 이르시되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모세가 하나님 뵈옵기를 두려워하여 얼굴을 가리우매"
모세를 부르신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조상의 하나님! 지금도 살아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할/
이제 하나님은 신을 벗게 하시고 모세에게 본론을 주십니다.
▶7절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정녕히 보고 그들이 그 간역자로 인하여 부르짖음을 듣고 그 우고를 알고"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⑴당신의 백성의 고통을 보시는 분이십니다. 여기 '본다'는 말은 단지 시야에 들어오는 풍경이나 광경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세히 본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먼저 하나님께서 보시는 행위로 시작됩니다. 관심 있게 우리의 아픔을 보십니다. 하나님의 눈길이 내게 와 닿고 그분이 나를 보시기 시작할 때 새로운 구원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할/
⑵그 부르짖음을 들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들으시는 경우는 언제입니까? 우리가 괴로워서 부르짖을 때 하나님께서 들으신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들으시는 통로는 바로 이 '부르짖음'에 있습니다. 렘33:3절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할/
⑶그 우고를 아시는 분입니다. 여기서 '안다'는 동사는 단지 '지적으로 아는 것, 개념적으로 파악하는 정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히브리어의 안다는 말이 남녀간에 쓰이면 이것은 '성적으로 관계를 맺는다'는 정도의 깊은 앎을 말합니다. 낱낱이 체험하여 아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고통을 피상적으로 알지 않으십니다. 남녀가 깊은 성적관계를 맺고 서로를 낱낱이 알 듯이 그렇게 우리를 아신다는 하나님이십니다. /할/
그러니까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형편과 사정을 '보고, 듣고, 아시는 분'이십니다. /믿/ 하나님은 고난 받는 성도의 사정을 보시고 부르짖는 기도를 들으시고 그 수고를 알아주십니다. 한마디로 인격적인 하나님! 멋쟁이 하나님이십니다. /할/
⑷▶8절 '내가 내려가서' 세 번째 까지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시고 들으시고 낱낱이 아십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그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그 다음 하나님의 행동은 '내려오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탄의 이야기입니다. '함께 있기 위해서' 내려오십니다. 지금도 그 하나님은 우리와 임마누엘로 함께 하시는 분이십니다. /믿/
⑸8절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여기 건져내고는 구한다는 말입니다. 구원! 이것은 우리 기독교의 큰 주제이고 교회를 통해 우리가 늘 강조되고 있는 핵심적인 주제입니다.
▶10절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무슨 말씀인가? '시방 내가 너를 애굽으로 보내리라' 즉 파송을 하고 계십니다. 사실 모세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몇 번 거절하다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애굽으로 갔습니다.
▶부름 받은 우리들의 태도에 대해 몇 가지 알아보겠습니다.
⑴감사하라! 사실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존재들이 못됩니다. 자격이 있어서 우리를 부르신 것이 아니요, 경력이 화려해서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사랑의 계획 가운데 우리를 불러주셨으니 감사한 것입니다.
⑵부르심에 대한 확신을 가져라!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함이 없느니라!"
⑶죽도록 충성해야 합니다. 고전4:2절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충성이란 온 정성을 다 쏟는 것입니다.
⑷모든 사람들 앞에 신앙의 본과 덕을 세워라! 원래 '본'이란 뜻은 '펜글씨 배우는 사람을 위해 점을 찍어서 이렇게 쓰라고 견본을 만들어 놓은 것'을 말합니다. 즉 모방을 말합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본받아서 그도 자신 있게 나를 본받으라고 권면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 귀한 사명을 주시려고 모세의 출생에서부터 성장과정도 훈련도 그 모든 삶의 발자취를 하나님의 사명을 위하여 준비하고 훈련시킨 것입니다. /아멘!/
모세의 사명은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너는 내 백성 이스라엘을 구원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도 이 사명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영적인 이스라엘입니다. 하나님이 선택해 놓으신 생명을 살리는 일, 우리가 전도하는 일, 그 일 감당하시고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아 주셨습니다.
▶11절 "모세가 하나님께 고하되 내가 누구관대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이 고백은 잘못 생각하면 불 신앙적으로 들립니다. 그러나 그게 아닙니다. 지금 모세는 자진의 부족함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40년 전의 모세가 아닙니다. 그 때는 잘못된 열심과 열정의 교만한 모세는 애굽 사람을 죽이고, 또 자기 동족을 재판하려다가 결국에는 버림을 당하여 모세는 미디안 광야로 정신 없이 도망하여 왔습니다. 그 광야에서 결코 짧지 만은 않은 40년 세월 동안에 모세는 철저하게 그의 교만이 깨어졌습니다. 그래서 본 절의 대답은 하나님 앞에 자신의 부족함을 진실하게 드러내는 고백입니다.
▶12절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
하나님은 사명도 주시고, 또 감당할 능력까지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 능력이 무엇입니까? 곧 여호와 자신입니다.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모세와 함께 하신 하나님이 오늘 우리와도 함께 하십니다. /믿/
출애굽의 목적이 무엇인가? 하나님에게 예배드리라고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너희가 이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여기 섬김은 예배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십니다. /아멘!/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여러분, 신앙은 참는 것입니다. 모세는 40년 간 참았더니 하나님이 떨기나무에 오셔서 신을 벗으라고 하십니다. 그때부터 모세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서 430년 동안 온갖 핍박과 고통 속에서 노예 생활을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구원자가 되어졌습니다.
그렇습니다. 성도는 오늘보다 전혀 다른 내일을 주십니다. 이 소망 때문에 우리는 위대한 승리지가 될 수 있습니다. /믿/
모세는 우리 예수님의 모형입니다. 억만 죄악 세상에 죄의 포로가 된 그래서 절망 가운데 어찌할 수 없는 우리들을 위하여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시고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모세를 통해서 애굽에서 구원하신 하나님이 오늘 우리 주님을 통해서 죄에서, 실패에서, 사망에서 건져 구원의 길로 인도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오늘과 내일은 엄청난 차이가 있음을 확실히 믿고 예수 안에서 위대한 승리자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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