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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라! 쉬게 하리라! (마 11:28-30)

by 【고동엽】 2022. 2. 7.

오라! 쉬게 하리라! (마 11:28-30)

 

얼마 전에 부도 위기를 가까스로 넘겼다는 중소기업을 운영하는 장로님을 만났습니다. 이런 저런 얘기 끝에 장로님은 '어디 조용한 곳에 가서 한 달쯤 푹 쉬고 쉽다.'는 말을 했습니다. 장로님은 지쳐 있었고, 용기마저 상실한 모습이었습니다. 세상에 지쳐 있는 사람이 어디 이 장로님뿐이겠는가? 오늘 현대를 살아가는 인간들을 보면 참 고민도 많고 짐도 많습니다. 옛날에 비하면 생활환경은 좋아졌고 풍요로워졌고, 문명문화는 많이 발달되어서 살기가 얼마나 좋아졌습니까?
그런데 그 옛날에 비하면 고민은 오히려 더 많아졌고 짐도 더 무거워졌습니다. 시대는 더 좋아졌는데 어떻게 된 일인지 살아가는 것은 더 어렵고 힘들어졌습니다. 학생은 학생대로 힘이 듭니다. 공부가 보통 일입니까? 고 3쯤 되면 얼마나 힘이 들어서 고3병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어떤 학생은 공부의 짐이 너무 무거워서 스스로 목숨을 버리는 학생도 있습니다. 얼마나 짐이 무거우면 스스로 목숨을 버리겠습니까? 생각하면 참 불쌍한 세대입니다. 어디 학생들만 무겁습니까?
어떤 어머니는 아들 과외 비를 감당할 수가 없어서 그만 목숨을 끊었다는 보도도 있습니다. 생각하면 참 고달픈 인생입니다. 또 직장인들은 직장인대로 무거운 짐이 있고, 사업하는 사람들은 사업하는 사람대로 짐이 있습니다.
직장인들은 상사로부터 인정도 받아야 하고 승진도 해야 되고 낙오되지 않기 위해서 영어를 배우고 컴퓨터도 배우고 또 사정없이 밀고 올라오는 후배들에게 뒤지지 않으려고 얼마나 애간장이 녹아납니까?
사업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업이 장난이 아닙니다. 직장인들보다 더 힘이 들면 들었지 쉬운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얼마나 힘이 들고 무겁겠습니까?
그런가하면 요즘에는 건강에 대한 고민 또한 많은 때입니다. 웬 놈의 무서운 병들이 이렇게 많은지 어제까지도 건강하던 사람들이 어느 날 갑자기 무슨 암에 걸렸고, 무슨 불치의 병에 걸렸다고 절망하는 모습을 자주 접하게 됩니다.
사람이 건강해야지 병들어 버리면 모든 것이 멀어집니다. 오늘 현대인들은 건강문제로 정신적인 짐을 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늙은 것도 고민입니다. 머리가 조금만 희어져도 그것을 감추느라고 염색을 하고 야단들입니다.
저도 염색을 했습니다. 또 여자들은 얼굴에 주름이 생기는 것 때문에 고민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여성들은 몸부림을 치면서 화장들을 합니다.

▶어떤 사람이 여성들의 화장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10대들의 화장은 화장이 아니라 치장이라고 합니다. 안 해도 좋은데 약간 더 모양을 살린다고 해서 그것을 치장이라고 합니다. 진짜 화장은 20대 여성들이 하는 화장을 진짜 화장이라고 한답니다.
화장이라는 말은 '옷매무새를 매만진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옷도 옷이지만 얼굴에 엄청난 신경을 씁니다. 그런데 30대 여성들이 하는 화장은 진정한 화장이 아니고 분장이라고 합니다. 이때부터 자신의 모습을 감추는 때입니다. 그리고 40대가 하는 화장은 변장이라고 합니다. 완전히 모습을 뜯어고칩니다.
그리고 50대가 하는 화장은 무장이라고 합니다. 온통 화장품으로 무장을 한다고 해서 그런 말이 나온 것입니다. 어째든 인생은 이래저래 고달픈 것입니다. 늙어지는 것도 짐이 되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겉에서 볼 때는 별일 없는 것 같이 보이지만 조금만 깊이 들여다보면 누구나 다 무거운 짐이 있습니다. 고민이 있고, 한숨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는 곳마다 보면 거기에 탄식이 있고, 비명소리가 있고, 눈물이 있고, 신음 소리가 있습니다.
▶인생이 언제부터 이렇게 무거운 짐을 지고 비틀거리기 시작했습니까? 창1장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아름답게 창조하셨습니다. 그 사실을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러나 창3장에 넘어오면서 '인간이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죄를 범하게 됨으로 저주를 받게 되었고, 땅 역시 가시와 엉겅퀴'를 내게 되었습니다. 가시와 엉겅퀴가 있는 곳은 인간이 쉴 곳이 못됩니다. 결국 인간은 죄로 인해 영원히 쉴 수 있는 하나님의 품에서 쫓겨나게 되었고 가시와 엉겅퀴로 뒤덮은 세상에서는 진정한 쉴 곳이 없습니다. 노래도 쉼표가 있고, 그림도 여백이 있고, 조각도 공간이 있습니다. 고속도로에도 휴게소가 있고 주유소가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로 쉬어야 할 인생이 마음 푹 놓고 쉴만한 곳이 어디에 있습니까? 제주도에 가면 '쉼 팡'이라는 곳이 있다고 합니다. '팡'은 제주도 방언인데 '높이 쌓은 대, 즉 모종'이라는 뜻입니다. 길 가다가 피곤하면 머물러 쉴 수 있는 곳이 쉼 팡입니다. 예부터 가정을 안식처라고 합니다. 외국 사람들은 스위트룸이라고 합니다. '스위트'라는 말은 '달콤한, 맛있는, 향기로운, 감미로운, 상냥한, 신선한' 등 온갖 좋은 뜻이 다 총 망라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왜 많은 가정이 깨어지고 무너지고 있습니까? 왜 가정에서 한숨소리가 세어 나오고 있습니까? 진정한 안식처가 못되기 때문이요 쉼터가 못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고민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향하여 주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세상에서 지친 사람들에게 생수 같은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이 말씀 속에서 당신이 얼마나 '인간을 극진히 사랑하고 계시며 얼마나 최고로 축복하기를 원하시는가?'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인생들 가운데 짐을 지지 않은 사람이 누구이며 수고의 고통 없이 살아가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제목 소개!▶

 

1. 현대인의 삶의 정황이 본문 속에 있습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수고'라는 단어는 인간이 처음 죄를 범했을 때 찾아왔습니다. 창3:16-17절에 범죄한 하와에게 하나님은 "네가 이제부터는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고, 아담에게도 "이제부터는 종신토록 땀을 흘리며 수고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수고는 단순한 노동을 의미하는 말이 아닙니다. 이것은 고통스러운 노동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우리 모두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입니다. 여기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졌다는 말은 우리 인간의 고통을 두 개념으로 나누어서 설명하는 말입니다.
'수고한다'는 말은 '스스로 일을 만들어서 고생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가만히 보면 고생할 것이 없는 데 만들어서 고생을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런 고생은 모두 스스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욕심 때문입니다. 지나친 욕심 때문에 스스로 사서 고생을 하는 것입니다.
한편 '무거운 짐'은 어쩔 수 없이 지고 나가는 짐을 말합니다. 약하기 때문에 피하거나 모면할 길이 없어서 수동적으로 당하는 고통입니다. 원하지는 않지만 부득이 끌려가면서 억지로 당하는 그런 고통을 말합니다. 이런 짐이 '무거운 짐'입니다. 이 세상 모든 종교에서 그 무거운 짐에 대하여 인정을 합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인생을 고해(苦海)라고 부릅니다. '어렵고 맵고 힘이 드는 인생'이라는 말입니다. 그 고해는 나에게 주어진 업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지금은 어쩔 수 없고, 이제부터라도 많은 공덕을 쌓아서 다음에 태어나는 세상에서는 좀 평안해 보자는 것이 불교의 교리입니다.
▶석가모니는 인생의 4중고를 말합니다. '사는 것이 고생이고, 늙는 것도 고생이고, 병든 것도 고생이고, 죽는 것도 고생'이라고 했습니다.
▶'알베르 카뮈'는 네 가지의 인생의 짐을 말하고 있습니다.
⑴경제적인 짐: 실직, 빈곤, 굶주림, 헐벗음 등을 말하고, ⑵정신적인 짐: 불안, 초조, 고독, 절망 등입니다. 그리고 ⑶생 자체에 일어나는 짐: 질병, 모순, 죄로 인한 죽음, 신음, 괴로움, 비명 등의 짐이고, ⑷종교적인 짐: 율법적인 행위의 강요라고 했습니다.
남자도, 여자도, 어른도, 아이도,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아 피곤해, 힘들어' 그럽니다. 한마디로 인생이 고달프다는 말입니다.
또한 본문의 '수고한다'는 말을 '삶의 지쳐 피곤한 사람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일에 어려움을 당하면서 피곤하고 지친 사람들이요, 너무 힘들어하는 사람들입니다. 또 '무거운 짐 진 자'는 마치 소나 말처럼 무거운 짐에 짓눌려 지친 상태에 있는 사람들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현대인들의 삶의 정황은 한마디로 말하면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입니다. /믿/ 세상에 짐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부모는 부모의 짐이 있고, 자식은 자식의 짐이 있습니다. 남편은 남편의 짐이 있고, 아내는 아내의 짐이 있습니다.
또 세상에는 별의별 고민이 다 있습니다. 있는 것도 고민, 없는 것도 고민입니다. 또 일에 대한 고민, 자신에 대한 고민, 부부간의 갈등들, 하려하고 안정된 직업을 가지고 있는 것과는 전혀 상관없이 인생은 고뇌하며 사는 존재입니다.
사람들은 겉으로 보면 웃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속으로 우는 사람이 너무도 많습니다. 남모르는 한숨이 있고, 슬픔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다 아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졌다는 곳이 죄로 인해 저주받은 인생의 본질이라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절망하는 인생들을 향하여 두 팔을 벌리시고 누구든지 '다 내게로 오라'고 초청하고 계십니다. /할/

 

▶오늘 우리는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이 어떤 멍에와 짐을 지고 살았는가?
⑴정치적 멍에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당시유대인들은 로마의 식민지 하에 있었기에 당연히 정치적인 압박 속에서 숨을 죽이며 살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그 정치적인 압박이 기독교 핍박으로 이어진 것을 우리는 '카타콤'이라고 불리는 지하 무덤교회를 생각해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⑵그 당시 종교적인 멍에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교는 대단히 부패했습니다. 종교는 물질화 되어 갔고 부동산화 되어 갔고 권력화 되다 보니 가난하고 힘없는 백성들은 종교에서조차 소외되어 갔습니다. 그러다 보니 당시 종교는 솔직히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위로와 소망과 용기가 아닌 무거운 짐이요 멍에만 가중되는 고통이 되었습니다.
⑶율법이 무거운 짐이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이 많은 종교적인 규례들을 만들어서 자기들도 지킬 수 없는 무거운 짐을 백성들에게 지웠습니다. 성경말씀의 가르침을 따라 만들었다고 하면서 '하지 말아야 할 것 365개와 해야 할 것 248개, 합해서 613개의 규례를 만들어 지키라'고 강요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과는 관계없이 많은 사람들에게 무거운 짐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종교적인 짐이요, 율법의 짐입니다.
⑷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하여 '수고하다가 지친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하십니다. 명예 때문에, 인기 때문에, 자기 이익 때문에 수고하다가 지친 영혼들도 우리 주님이 초청하고 계십니다.

 

2. 이 초청은 위대한 초청입니다.

 

①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 여러 가지 형태의 초대를 받습니다.
꽃들이 만발하고 새들이 울부짖으며 아지랑이 아롱대는 봄 동산의 초대는 아가씨들의 가슴을 설레게 합니다. 시원한 바람! 그칠 줄 모르는 바다! 녹음방초 우거진 낭만이 긷던 여름 산과 강과 바다는 젊은이들에게 낭만을 줍니다.
가을은 어떻습니까? 단풍이 붉게 물들고, 황금물결 치는 오곡백화의 초대! 우리를 풍요롭게 해 주지 않습니까? 그런가 하면 눈 덮인 겨울 설경은 얼마나 깨끗하고 아름답습니까? 이와 같은 초대들은 하나님이 베푸신 자연의 초대입니다.
이와는 달리 사람이 사람을 부르는 초대도 있습니다. '생일초대, 약혼식, 결혼식, 개업초대, 회갑초대' 등이 있습니다. 어쨌든 초청을 받았다는 그 사실이 우리의 마음을 얼마나 기쁘게 하는지 모릅니다. 거기다가 청하는 사람이 훌륭하고 유명한 분이면 더욱 더 기분이 좋습니다. 또 대접도 융숭하고 문제도 해결이 잘 됩니다.
회사의 사장님이 은밀히 불러 파티에 초청을 했다면 그 사원은 큰 영광으로 생각하고 충성을 다짐할 것이며, 나라의 대통령이 만약 저와 여러분을 초청해 준다면 이것은 엄청난 행운이요 가문의 영광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인생들의 초대는 극히 제한된 초대요, 신분이 비슷한 사람들과의 초대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하나님의 초대는 차별이 없고, 상하가 없고, 구별이 없습니다. 배운 사람도, 못 배운 사람도, 건강한 사람도, 병든 사람도, 부자도, 가난한 자도, 실패자도 성공 자도, 남여노유 빈부귀천 막론하고 그 누구도 제한하지 않는 초청입니다.
그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는 이 말씀을 읽을 때마다 두 팔을 벌리고 어린 아들을 향해 '어서 오라'고 부르시는 인자하신 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립니다.
아버지의 품! 그곳엔 안정이 있고, 보호가 있고, 사랑이 있고, 숨결이 있습니다. 그 품속 안에는 돈도 있고, 기쁨도 있고, 장래도 있습니다. 그리고 평안과 쉼이 있습니다.
②우리가 믿는 기독교의 특징 중의 하나가 사람을 부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서 범죄하고 숨어있는 아담과 하와에게 오셔서 '아담아' 하고 불렀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먼저 부르시고 믿음의 조상과 복의 근원이 될 것이라고 약속을 하셨습니다.
예수님도 사람을 부르시는 일을 쉬지 않으셨습니다. 12명의 제자들을 부르시고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마4:19). 지금도 교회를 통하여 사람을 부르시고 계십니다. 그렇습니다. 전도는 주님의 지상명령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사람을 초대하여 불러들이는 일을 열심히 해야 합니다. 이것이 건강한 교회의 모습입니다. 우리 참 행복한 교회가 많은 사람들을 초대하여 주님께로 인도해야 합니다. /아멘!/

 

3. 성경에는 '오라'는 말이 신약 약 400여 번, 구약 200여 번이나 나옵니다.

 

①죄의 문제를 다루시기 위해 '오라'고 하십니다. 사1:18절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 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되리라"


②목마른 자들도 '오라'고 하십니다. 계22:17절 "오라 하시는 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사55:1-3절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나를 청종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마음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
⑴나아오라! 하나님 앞에 나오라는 초청입니다. 돈 벌기 위해서 직장에 나가는 것을 빠지면 큰일날 줄 알면서, 사업을 위해서 하루라도 빠지면 안 되는 줄 알면서 주일날에는 잘 빠진다면 이건 뭔가 크게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공부하기 위해 학교에 결석하면 안 된다고 하면서 교회는 너무 쉽게 빠집니다. 은혜 받기 위해서 예배시간에 나오기를 주저해서는 안 됩니다. 열심히 있어야 하고 사모해야 합니다. 그래야 복을 받습니다. /믿/
⑵'귀를 기울이고 들으라! 그리하면 우리 영혼이 살리라'고 했습니다.
롬10:17절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고, 보고, 배우고, 설교 시간에 귀를 기울여 들으며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해야 합니다.
여기에 '목마른 자들,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먹되, 돈 없이 값없이 포도주와 젖을 사라'고 그랬습니다. 여기에 목마른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험한 인생 길에서 삶에 시달리고 지쳐있는 사람들, 어떤 일에 실패와 낭패로 상처가 된 사람들, 더 이상 일어날 기력이 없는 사람들을 목마른 자'들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우리 인생의 목마름은 어디서 어떤 방법으로 해결할 수 있겠습니까?
요4장에 한 목마른 여인이 나옵니다. 그 여인은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고, 지금 함께 살고 있는 남편도 제 남편이 아니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이 여인은 영혼의 목마름, 그 마음의 비어있는 공허를 어떤 남자에게서 얻어 보려고 했습니다. 처음에 만난 남자는 육체적으로는 건강했지만 돈이 없는 가난뱅이였기 때문에 아마 만족함을 얻지 못한 것 같습니다. 두 번째 만난 남자는 돈은 많은데 몸이 약해서 별 재미가 없었나 봅니다. 세 번째 만난 남자는 세상에서 지식도 명예도 갖고 있었지만 성격이 좋지 못해서 헤어진 것 같습니다.
이런 저런 이유들로 인해서 네 번째, 다섯 번째 남자와 헤어졌습니다. 그리고 지금 살고 있는 그 남편도 자기 남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에게서 마음의 공허를 매워 보려고 했던 이 여인은 결국 실망과 실의에 차있습니다. 동네사람들은 그를 죄인이라고 손가락질합니다. 그래서 아침저녁 여인들이 우물가에 모여드는 그 시간에는 함께 우물가에 갈 수 없어 대낮에 아무도 사람이 나가지 않는 바로 그 때에 우물가에 나갔다가 예수님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다시 목마르거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할/ 이 여인이 주님이 주시는 생명수를 마시고 '평안과 기쁨과 자유'가 넘쳐 남으로 너무 기뻐서 물동이를 우물가에 던지고 동네로 뛰어가서 '와 보라! 메시야가 여기 있다'고 외쳤습니다. /할/

 

③회복을 주시려고 '오라'고 하십니다. 호6:1절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하나님은 때때로 우리를 치시기도 하시고, 때때로 우리를 찢으시기도 하십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살지 못하고 죄를 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만 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치셨다가도 싸매어 주시고 우리를 찢으셨다가도 도로 낫게 해주십니다.

 

④쉼을 주시려고 '오라'고 하십니다. 오늘 본문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4. 오늘 예수님의 '다 오라'는 초청에는 몇 가지 깊은 뜻이 있습니다.

 

①짐을 덜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다 내게로 오라'는 말씀은 '너희가 정말 나를 믿느냐? 그러면 그 짐을 다 내게 맡겨라'는 강한 의미입니다.
여러분들이 지고 있는 짐은 무엇입니까? 생활의 짐입니까? 질병의 짐입니까? 아니면 죄의 짐입니까? 주님이 오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행복자입니다. 우리들이 지고 있는 무거운 짐들은 모두 벗어줄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은 행복한 일입니다.
시37:5절에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 시55:22절에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 버리라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영히 허락지 아니하시리로다" 벧전5:7절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조지뮬러는 '믿음이 시작되는 곳에 염려가 끝나고, 염려가 시작되는 곳에 믿음이 끝난다.'고 말했습니다.
현대인들이 고독한 것은 주변의 사람이 많은데 마음을 모두 털어놓고 이야기할 대상이 없다는 데 문제인 입니다. 사람은 많은데 내 마음에 고민을 털어놓을 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현대인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고독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다 내게로 오라, 와서 그 무거운 짐을 다 내려 놓으라' /할/
▶어떤 집사님은 늘 생각하기를 '자기의 짐이 너무 무겁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늘 지치고 힘겨워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기도하다가 지쳐서 그만 잠이 들었습니다. 꿈속에 하얀 눈 덮인 설원 풍경이 나와 있었습니다. 소복하게 쏟아진 눈 길 위로 두 사람이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두 사람의 발자국이 선명하게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한참 있다 보니까 한 사람이 없어져 버렸습니다.
자세히 보니 한 사람이 몹시 지쳐 있을 때 다른 한 사람이 그를 업고 가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이 사람은 생각을 했습니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저 사람도 나처럼 지쳐있구나' 그런데 유심히 보니까 업고 가는 사람은 주님이었고, 등에 업힌 사람은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면 그 어떤 짐도 해결 받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우리 인생들을 피곤하게 합니까?
첫째는 사람 때문에 피곤합니다.
가족들과의 관계가 불편해서 피곤할 수 있습니다. 이웃들과의 불협화음 때문에 피곤해집니다. 직장에서 매일 만나는 사람들 때문에 피곤할 수 있습니다. 개중에는 밤에 잠을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게 만드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떻게 그 사람이 나한테 이럴 수가 있나?' 낙심하게 만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를 피곤하게 만드는 것은 사람입니다.
두 번째는 경제적인 문제입니다. 날이 갈수록 먹고살기가 힘들다고 말합니다. 한 세대 전만 해도 평생직장이라는 개념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언제 나가라고 할지 모릅니다. 더욱이 아이들에게 들어가는 돈이 점점 더 많아집니다. 옛날에는 '다 제 먹을 것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했는데 그야 말로 옛말이 되고 말았습니다. 일은 더 열심히 하는데 사는 것은 늘 불안합니다. 먹고사는 것 때문에 피곤한 세상입니다.
세 번째는 우리가 사는 환경의 문제입니다. 사람은 환경의 지배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온통 세상은 문제덩어리입니다. 산 넘어 산을 만납니다. 고난이 고통이 우리를 피곤하게 합니다. 조건이, 환경이 사람들을 피곤하게 만듭니다. /할/

 

▶여기서 말하는 짐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⑴뭐니, 뭐니 해도 죄의 짐이 무겁습니다. '호돈'의 작품 '주홍글씨'가 있습니다. 간통한 사람은 그 앞가슴에 간통의 첫 글자 A자를 쓰고 다녀야 한다는 19세기 초기 청교도들의 율법이 있습니다. 이 A 글자를 쓰고 다닐 때 죄의식 때문에 인간의 가슴에 파고드는 죄의식은 무거운 멍에입니다.
어떤 사람이 죄 문제를 해결하려고 공자(孔子)를 찾아갔답니다. 공자는 '획죄어천이면 무소도야라'(獲罪御天 無所陶冶) 즉 '하나님 앞에서 죄를 범하면 사함 받을 길이 없다'고 답변했습니다. 또 석가모니에게 갔더니 '전생에 죄를 지었으면 이생에서 그 죄의 업보를 받을 것이고 이생에서 죄를 지었으면 내생에 그 업보를 받아야 한다.' 그러니까 난행고행(難行苦行)으로 그 죗값을 치러야 한다고 했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무어라 말씀하십니까? 사1:18절 "오라 우리가 서로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되리라." 아무리 큰 죄인이라도 주님 앞에 나오면 해결 받습니다. 살인강도도, 세리장 삭개오도, 창녀와 같은 막달라 마리아나 간음하다가 끌려온 여자도 용서를 받았습니다. 요일1:9절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라" 어떤 죄도 용서하십니다.
⑵질병의 짐도 무겁습니다. 눅5:17절 "병을 고치는 주의 능력이 예수와 함께하더라" 출15:26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 /할/
⑶생활고(生活苦)의 짐도 만만치 않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굶어죽기를 원하시지 않습니다. 마6:31-33절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 사람들이 하는 것이라 너희는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신8:18절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믿으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을 주셨음이라" 하나님을 잘 믿으면 재물의 복을 주신다고 약속했습니다. 이 언약 붙들고 승리합시다. /할/ 또 하나님은 겸손한자에게 재물을 약속하십니다. 잠8:21절 "이는 나를 사랑하는 자로 재물을 얻어서 그 곳간에 채우게 하려 함이니라"
그런데 재물도 관리를 잘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자상하시게 관리하는 법을 가르쳐 주십니다. 마6:20절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
⑷죽음의 공포, 무서운 짐입니다. 그런데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힌 자도 다 초청하십니다. 사람은 누구나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아무 염려가 없습니다. 왜? 예수 안에 영원한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고전15:55절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 죽음을 호령했습니다.

 

②예수님의 초청 속에는 참 평안과 쉼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쉬게 하리라'
진정한 쉼은 예수님께로 가야 얻을 수 있습니다. 육신의 쉼은 가정을 가야 얻을 수 있고, 영의 안식은 주님께 가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참 안식처이시오 쉼터이십니다. 그분 안에서 행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쉬게 하리라'는 약속에 대한 응답입니다. 여기서 쉼을 '얻으리니'(휴레세테)란 원래 '찾다', '발견하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참 안식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예수님 안에 있었고, 그 분이 주리라고 약속한 것을 발견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아멘!/
여기서 '쉼'은 만족, 평안, 휴식, 즐거움 등을 모두 포함한 총체적 의미입니다. 특별히 본문이 제시한바 '마음(영혼)의 쉼'은 주위의 어떤 환경적 변화에도 손상되지 않는 평정된 자세를 말합니다. 예수 안에서 얻는 안식은 가장 바람직하고 초월적이며 영원한 것으로서, 현재의 수고와 무거운 짐을 모두 상쇄하고도 남음이 있는 쉼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마지막 날의 영원한 안식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에서의 모든 갈등을 해소한 후의 평화와 안식까지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하나님 안에서 자신을 발견하기까지는 참 평안을 누리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요14:27절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주님은 영혼의 안식처이십니다. 본문의 28절 이하에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절의 '너희 마음에 쉼을 얻으리니' 우린 여기서 '내가'라는 말과 '마음이'라는 말을 주목해야 합니다.
그 뜻은 주님이 주시는 참 안식은 마음에 쉼을 얻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제 아무리 잘 먹고, 살 입고, 잘 놀아도 마음이 불행하면 거기에 즐거움이 없습니다. 찬456장에 '주와 같이 길가는 것, 즐거운 일 아닌가?' 그렇습니다. 주님이 함께 하는 곳이 참 안식이 있습니다.
여러분 진정한 위로와 참 평안을 얻기를 원하십니까? '다 내게로 오라'고 하십니다. 이 초청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주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예수님께로 가는 길은 예배를 통하여, 기도를 통하여, 만나는 길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은 예배하는 처소요, 기도하는 집입니다.
▶성도가 교회에 와서 기도하는 모습이 여러 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은 혼자 앉아서 큰 소리로 실컷 울고 갑니다. 참 푸짐하게 울면서 얼마동안 기도하고 갑니다. 그 사람이 목사님을 보고는 '목사님 죄송합니다. 저는 이렇게 한 번 풀고 가야 당분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것이 무슨 말씀인가 하면 '교회가 고향'이라는 말입니다. 영혼의 고향이기에 와서 그렇게 실컷 울고 가면 상당기간동안 위로가 되어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참 좋은 영적인 통로를 찾은 것입니다. 우리들도 이런 눈물이 있어야 합니다. /아멘!/
어떤 권사님은 집을 짓는데 방향과는 상관도 없이 교회를 향하여 문을 내도록 했습니다. 교회가 고향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병원에 누워서 몇 날을 보내 보십시오, 주일날 교회에 가는 길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를 알게 됩니다. 그래서 성도가 있어야 할 자리는 따로 있습니다. 그곳에 바로 성전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품입니다.
성도들은 주의 품에 있을 때가 가장 힘이 있을 때고, 가장 행복한 때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 품이 가장 안전하고 힘을 얻을 품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내게로 오라. 와서 쉬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이 있어야 할 곳이 바로 그곳이기 때문입니다. /할/

 

③예수님의 이 초청 속에는 감당할 힘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세상을 살면서 아무 짐도 지지 않고 살수는 없습니다. 주님께 모두 갖다 내려놓는다고 해서 아무 짐도 지지 않고 살 수 있다는 말은 아닙니다. 기본적인 짐을 지고 살아야 합니다.
이를테면 부모 공경의 짐을 져야 합니다. 그 짐은 아무리 무거워도 져야 합니다. 불신자들보다 더 철저하게 져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의 의무의 짐을 져야 합니다. 국민의 의무의 짐도 져야 합니다. 그리고 때로는 실패의 짐도 져야 합니다. 그리고 종말을 맞이했을 때, 죽음의 짐도 져야 합니다.
그것은 누가 대신 져 줄 수 있는 짐이 아닙니다. 그래서 주님은 '내게로 오라 애가 쉬게 하리라' 이 말씀은 주님께서 짐을 질 수 있도록 힘을 주신다는 말입니다.
방법이 '나의 멍에를 매고'입니다. 우리나라는 밭을 갈 때 한 마리의 소가 그 일을 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한 마리의 소가 멍에를 메우는 것이 아니라 두 마리를 나란히 놓고 멍에를 메웁니다.
이스라엘은 땅이 우리나라처럼 좋지 못합니다. 아주 험한 자갈밭입니다. 그래서 소 두 마리가 밭을 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소에게 씌우는 것을 멍에라고 합니다. 이 멍에라는 말은 굴레입니다.
사람들에게도 여러 가지 멍에가 있습니다. 곱게 자란 처녀도 일단 시집을 가면 아내로서 며느리로서 멍에를 져야 합니다. 살림살이의 멍에가 있습니다. 밥도 해야 되고 청소도 해야 되고 빨래도 해야 합니다. 그것이 멍에입니다.
또 남자는 식구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새벽 일찍부터 일어나서 일을 해야 합니다. 남편으로서 아버지로서의 멍에입니다. 선생님도 선생으로서의 멍에가 있고, 학생도 학생으로서의 멍에가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면 다른 멍에를 매라는 것이 아니라 '나의 멍에' 바로 주님의 멍에를 매라는 것입니다. 그 말을 예수님과 함께 멍에를 매자는 것입니다. 두 마리의 소가 멍에를 맬 때에 한 마리가 힘이 세면 다른 한 마리는 그냥 따라만 가면 됩니다. 그런 이치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멍에를 매면 예수님께서 앞서 가시기 때문에 그 멍에는 쉽고 그 짐은 가벼운 것입니다.
여기 멍에라는 말은 '쥐고스'라는 희랍어를 번역한 말로 '연합, 짝짓기, 예속, 사로잡힘'이라는 단어로 사용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배운다는 것은 예수님과 한 몸을 이루어 가는 생활을 말합니다.
교회가 예수님의 몸이며 우리는 그분의 지체라고 사실입니다(고전12:27). 그러니까 예수님을 배운다는 말은 곧 '예수님과 연합하여 그의 지체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교회는 우리 모두의 지체들의 공동체입니다. /아멘!/
여러분, 우리가 십자가를 지면 너무 힘이 들고 무겁습니다. 도저히 못 갈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한참 가다보면 내가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가 나를 지고 세상 길을 가게 해 줍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그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에게 주님의 멍에를 지라고 말씀하십니다. 바울은 빌4:13절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할/
어거스틴은 예수님의 멍에를 새의 깃털에 비유하여 '그 깃털이 창공을 자유롭게 날 수 있을 만큼 가볍다'라고 설교한 바 있습니다. 우리 집 강아지 기쁨 이는 개 줄을 가져오면 좋아합니다. 그 이유는 개 줄을 매면 밖에 나가기 때문입니다. 밖에 나가서 더 좋은 세상을 볼 수 있기 때문에 좋아합니다.

 

④예수님의 초청 속에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라'는 당부입니다.
제자는 그의 스승에게 배우는 자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배워야 잘 알아야 합니다. 사실 인생이란 전부가 배우는 과정입니다. 아기가 태어나면서부터 세상을 배웁니다. 사람되는 법을 배웁니다. 평생 죽는 순간까지 배우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본 교과서는 예수님이십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믿는다는 말은 곧 예수를 배운다는 뜻입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는 다는 말은 예수님을 배워 구원받은 인생을 산다는 뜻입니다. ▶무엇을 배우라는 말씀인가?
⑴주님의 온유함을 배워야 합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여기 '온유하다'는 말은 '벌판을 질주하던 고집 세고 거친 야생마를 잡아서 훈련 시켜 온순하게 만들어 교통수단으로 쓸 때에 파생된 말'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온유라는 말은 원래는 야생마처럼 거칠고 난폭한 성품이었는데 예수님에게 길들여져서 따뜻하고 부드러운 성품으로 변화된 상태를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온유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잘 길들여진 상태, 이것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⑵주님의 겸손을 통한 순종을 배워야 합니다. '나는 겸손하니' 예수님은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낮고 천한 이곳에서 아버지의 뜻인 십자가를 지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겸손은 남을 나보다 좋게 여기도 높이는 것입니다. 오늘 수고하고 무거운 짐은 주님께 맡기는 비결은 바로 온유와 겸손한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구원하시고 겸손한 자의 기도를 들어주십니다. 또 겸손한 자를 높이시고, 겸손한 자에게 재물을 주십니다. 잠22:4절 "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응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니라" /아멘!/ 결론은 '오라 쉬게 하리라' 그리고 '가라 내 증인이 되어라' /할/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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