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요 9:1-12)
영국의 대 문호 '셰익스피어'의 일화 중에 이러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셰익스피어가 하루는 런던 시외에 있는 유명한 레스토랑에 가서 식사를 하기 위해 갔습니다. 이미 그의 명성은 널리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그가 식당에 들어서자마자 그 안에 있던 손님들이 한결같이 일어나서 그를 향하여 바르게 경의를 표합니다.
이때 현관에서 청소를 하고 있던 한 젊은 청년이 들고 있던 빗자루를 던지면서 한탄을 합니다. 이 모습을 본 셰익스피어는 들어오던 걸음을 멈추고 다시 되돌아 나가서 그 청년의 어깨를 두드리며 다정하게 말하기를 '여보게! 젊은이답지 않게 왜 탄식을 하고 있는가?'
이때 젊은 청년은 머리를 숙여 말하기를 '선생님 아무리 생각해도 내 신세가 처량해서 그렇습니다. 선생님이나 저나 같은 남자로 태어났건만 선생님은 뭇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있는데 저는 한낱 선생님이 지나간 그 발자국을 쓸어야 하는 청소부에 불과하니 저의 신세가 처량해서 그렇습니다.'
이 말을 들은 셰익스피어는 그 젊은 청년의 어깨를 두드려 주면서 이런 위로의 말을 했다고 합니다. '여보게! 자네는 결코 내가 지나간 발자국을 쓴 것이 아니네! 자네는 빗자루를 들고 하나님께서 만드신 우주의 한 부분을 아름답게 손질하고 있었네! 나도 자네와 똑같이 펜대를 들고 하나님께서 만드신 이 우주의 한 부분을 아름답게 만들고 있을 뿐이네, 자네나 나나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똑같은 직업을 가지고 있는 것일세!' 이 소리를 들은 청년이 밝은 미소를 짓고는 다시 빗자루를 들고 열심히 일을 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사실 사람들이 자기가 하고 있는 일과 처한 환경에 대하여 보람과 가치를 느끼고 의미 있게 산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인생의 행복이 무엇이냐 논할 때 사람들은 '돈을 버는 것, 명예와 지위를 가지는 것, 자식을 낳고 키워서 출세시키는 것' 등 여러 가지 모양으로 설명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재물이 결코 인생의 행복의 조건이 될 수는 없습니다. 명예나 지위가 인간에게 행복을 주는 것도 아닙니다. 자식이 꼭 부모들에게 행복을 안겨 주지도 못합니다.
오히려 '돈 때문에, 명예 때문에, 자식 때문에' 더 많은 염려와 근심으로 고통을 당하며 불행한 눈물을 흘리며 사는 사람들이 더 많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여러분 사람이 산다고 하는 것은 어떤 '돈, 명예, 지위, 출세' 그런 것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다른 차원에서 보람 있는 삶을 찾아야 합니다. 그 삶이 어떤 삶인가? 예수 안에 새로운 생명으로 사는 길입니다. /믿/
▶소설가 이청준이 쓴 '낮은 곳에 임하소서'라는 소설의 주인공인 소경 안요한 목사는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서 아버지에 대한 반발심으로 신앙을 떠나 세속의 생활에 깊이 빠져 있었습니다. 그는 대학을 졸업하고 고등학교 교사가 되어 하루하루 재미있는 생활을 했지만 어느 날 갑자기 실명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갑작스러운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그는 여러 차례 자살을 기도하기도 했지만 그때마다 이상하게 뜻을 이루지 못하고 목숨을 연명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처지가 온 가족을 고통스럽게 하는 것을 괴로워하면서 결국 아내에게 미안한 생각에 가출하여 지하철 계단에서 구걸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스스로 버려진 인간이라고 생각하고 그날그날 목구멍에 풀칠하기 위해서 살아가는 목숨인데 어느 날 지나가는 나그네가 사업에 실패하여 한강에 가서 자살하려다가 걸인 안요한을 보고는 말하기를 '당신 같은 소경이며 거지도 사는데 나라고 못살겠는가?' 하면서 용기를 얻고는 안요한의 손을 잡고 '당신 때문에 나는 자살하지 않기로 했소' 하면서 고마워하더랍니다.
그때 그는 자기 같은 쓸모 없는 인간도 이 세상에 살 존재와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그때부터 그는 자기가 소경이 된 데에도 하나님의 뜻이 있다고 생각하고 목회자의 길을 개척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이런 삶이 한 차원 높은 삶입니다.
1. 본문을 알아보자!
오늘 본문 말씀 가운데 보면 어느 모로 보나 삶의 보람과 가치와 의미를 찾기 어려운 한 불행한 인간에 관한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는 나면서부터 소경으로 일생동안 예루살렘 거리 한 쪽 모퉁이에서 구걸을 하고 사는 처량한 신세입니다. 아마도 부모도 친척도 도와주는 이도 없는 불쌍한 고아인지 아니면 병신이라고 매정한 부모에게 버림을 받았는지도 알 수가 없습니다.
고대 중동의 관습에 따르면 병신자식을 키운다는 것은 큰 수치로 생각했다고 합니다. 아마 추측컨대 이 소경은 남들이 다니는 학교도 못 갔을 것입니다. 그 몸으로 길가에 앉아 멸시와 천대를 받으며 죽지 못해 겨우 살아가는 처절한 모습을 상상해 볼 수가 있습니다.
남들은 결혼을 해서 가정을 이루며 아들 딸 낳고 행복하게 살아가야 할 그 나이에 이 사람은 외롭게 고독하게 모든 사람으로부터 소외당하며 천하게 사는 신세였습니다. 일생동안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추우나 더우나 할 것 없이 예루살렘 길 한쪽 모퉁이 남의 집 처마 밑에서 구걸을 할 수밖에 없는 이 소경의 소문이 온 장안에 퍼졌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이 사람에 대하여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루는 예수님과 제자들이 예루살렘에 들어오시다가 예루살렘 길거리 한 쪽 모퉁이 남의 집 추마 밑에서 구걸하고 있는 그 소경을 만났습니다.
본문 속의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 소경을 보자 '그 병이 어디서 온 것인가?'를 궁금히 여기다가 예수님께 '주님 저 사람이 누구의 죄 때문에 저런 불행을 겪습니까? 자기 죄 때문입니까? 아니면 그 부모 죄 때문입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이것은 제자들뿐만 아니라 그 당시 유대 나라 사람들 대부분이 가지고 있던 잘못된 생각이었고 잘못된 관념이었습니다. 그들은 앞 못 보는 사람을 보면 무조건 죄 때문에 그런 형벌을 받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안쓰러워하는 고통이나 불행을 전부 죄 값이라고 몰아세웠습니다.
이것은 유대나라 사람만이 가지고 있는 잘못된 생각이 아닙니다. 어쩌면 전 세계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통념인지도 모릅니다. 특별히 불교 문화권과 유교 문화권에 젖어 있는 동양 사회에서는 모든 것이 일종의 윤회설로 설명이 됩니다. '조상의 죄를 뒤집어쓰고 자녀가 그 고생을 한다.' '전생에 무슨 죄가 있어서 내가 이런 고생을 하나?' 모든 불행을 인과응보로 해석을 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불교가 국교로 되어 있는 태국에서는 선천적인 장애를 겪고 있는 자들은 전부다 전생의 죄 값이라고 해석을 한다고 합니다.
①구약 성경을 보면 인간이 재난을 당하고 어려움을 겪으며 질병으로 고통 당하는 자의 원인을 두 가지로 풀이해 줍니다.
⑴겔18:20절 "의인의 의도 자기에게로 돌아가고 악인의 악도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즉 인간은 죄의 보응을 받으며 따라서 모든 재난을 죄의 결과, 자신의 죄의 결과라는 것입니다.
⑵출20:5절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 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자식이 재난을 당하는 것도 부모의 죄의 결과라는 말씀입니다.
이미 구약 성경을 알고 있던 제자들은 이 두 가지의 문제를 놓고 예수님께 질문을 합니다. '선생님! 이 사람이 소경으로 태어나서 이처럼 고생하고 살아가는 것이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그 부모 때문입니까? 아니면 자기의 죄 때문입니까?' 여러분 이와 같은 질문은 단순히 제자들이 예수님께 던지는 질문만은 아닙니다. 오늘날 저와 여러분들은 수없이 이런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왜 이 한평생 살아가는데 이토록 고통스럽기만 하단 말인가? 이 고통이 누구 때문인가?'
사람들은 '부모의 탓, 이웃의 탓, 환경의 잘못으로 돌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부모를 잘못 만나 남들 배울 때 배우지 못하고, 환경 때문에 형제 때문에 또 친구를 잘못 만나 내가 이 꼴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여러 가지 모습으로 자기의 처지의 원인을 환경의 잘못으로 던져 보기도 합니다.
때로는 '아니야 내가 잘못해서, 내가 무능해서, 내가 노력하지 않아서 내가 부족해서 망했지' 그 원인을 자기에게서 찾아보려고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문제는 이 같은 질문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어떻게 대답하시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아마 제자들뿐 아니라 당사자인 이 소경도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나의 운명과 내 신세를 어떻게 대답하실까?'를 궁금하게 듣고 있었을 것입니다.
②우리는 3절의 예수님의 대답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아보아야 합니다.
3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이상한 대답입니다. '이 사람이 오늘 이 같이 살아가는 것은 그 자신의 잘못도 아니고 환경, 곧 그 부모의 잘못도 아니야 하나님께서 이 사람을 통해서 하시고자 하는 뜻이 있기에 그렇단다.'
쉽게 말하면 '이 사람이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야' 이런 말씀입니다. 이 소리를 들은 당사자인 소경은 어떤 반응과 감정을 가졌습니까?
아니 우리들 자신이 이 소경처럼 그 자리에 앉아 있는데 예수께서 지나가시면서 나를 향하여 '너는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야'라고 매정스럽게 말씀하셨다면 과연 우리는 예수님께 어떤 신앙을 고백할 수 있겠습니까?
③우리 이 문제를 한 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⑴좀 감정이 풍부한 사람 같으면 즉시 반발을 할 것입니다. '주님!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너무합니다. 너무해, 제가 소경으로 태어나서 이토록 고생하면 일생을 살아왔는데 이 고생이 하나님의 뜻이라니요, 그런 하나님이 어디 있습니까?' 감정적인 폭발이 나왔을 것입니다. 사람도 감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은 감정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자기의 감정과 자기의 욕망을 통제해야 합니다. /믿/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실 때 인간을 동물과 생태적으로 다른 모습으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동물들의 모습을 보십시오, 먹고 배부르면 아무 불평이 없습니다. 동물들은 생각이 없습니다. 자기 통제 기능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실 때 머리를 위로 향하게 하고 몸을 아래로 두었습니다. 손과 발도 아래로 두었습니다. 손이 머리 위로 올라간 사람 있습니까? 왜 하나님이 머리를 위로 두셨을까요? 그것은 위에 계씬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깊이 생각하고 결단하고 판단하라는 의미입니다.
온몸은 머리의 지시를 받습니다. 여러분 우리 머릿속에 아주 가느다란 뇌신경, 하나만 잘못되면 어떻게 되는 줄 아십니까? 정신착란을 일으킵니다. 우리 몸의 지체가 머리이듯이 우리는 하늘에 계씬 하나님을 지체 삼아야 합니다. /아멘!/
우리 인간의 머릿속에는 깊은 생각이 있고 하나님의 뜻을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은 감정을 조절해야 합니다. 일이 잘 안되고, 기도 응답이 없고, 축복이 없다고 해서 자기감정대로 '하나님이 있긴 뭐가 있어, 네가 이토록 하나님께 충성했는데' 하면서 자기감정 따라 얼굴색이 변하면 안 됩니다.
여러분 그런 감정보다는 먼저 자기의 불 신앙과 불 신앙의 모습을 발견하고 철저하게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바로 서는 것이 축복 받는 비결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할/
⑵이 사람이 소경으로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했을 때, 만약 정통적인 불교나 유교의 문화권에서 살아온 우리나라 사람 중에는 이렇게 반응을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 이것이 나의 운명이겠지, 내 팔자소관이야' 하고 쉽게 체험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래서 천생연분이라는 말도 씁니다. 한 처녀가 시집을 가서 잘 살아도 천생연분이요, 또 남편에게 두들겨 만고 쫓겨 나와도 천생연분이라고 합니다.
그만큼 지금 현재의 모습을 과거적인 업으로 운명으로 해석하려고 합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전생의 업이 현생을 결정해 나간다는 그와 같은 모습 속에 주저 않아 있는 경우가 믿는 사람 가운데도 너무나 많이 있답니다. 과거의 가치 기준 속에서 현재의 나를 해석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과거 속에서 현재를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 속에서 현재를 판단하고 계십니다. /믿/
지난날의 나의 모습이 어떠했는가가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 기독교는 과거의 모습을 추적하는 것이 아닙니다. 돌아올 내일을 추적합니다.
하루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셨는데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이 한 여인을 끌고 왔습니다. 간음하다 붙잡혀 온 여인입니다. 예수님께 묻습니다. '주님 이 여자는 간음하다 붙잡혔습니다. 모세의 법에 의하면 돌로 쳐죽일까요?'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있으면 돌로 먼저 처라'고 하시자 저들은 양심에 가책을 느끼고 다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그 여인을 붙들고 말씀하시기를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리니 다시는 죄를 짓지 말도록 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그 여인을 붙잡아 온 바리새인들의 사고방식과 예수님의 사고방식의 차이를 엿볼 수가 있습니다. 그 여인을 예수님께 데리고 온 그 바리새인들의 사고방식은 과거의 기준을 가지고 현재를 판단하려고 합니다. 예수님의 사고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 여인이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 앞으로의 문제를 가지고 이 여인을 판단하십니다.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 예수님은 다시 죄를 안 지을 그 여인의 모습을 내다보시고 이 여인을 용서해 주셨습니다. /할/
하나님은 우리의 과거를 보시지 않으십니다. 그 분은 우리의 앞길에 비전을 보십니다. 실패한 모습, 병든 모습, 죄악된 모습을 보시지 않으시고 성공할 수 있는 모습, 신앙으로 성결된 모습을 바라보시면서 우리 하나님은 오늘도 저와 여러분에게 찾아오셔서 주님의 뜻을 이루시기를 원하십니다. /믿/
여러분 가치 기준을 너무 과거적인 것에 둘 때 인간은 자기 발전의 힘을 상실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항상 내일을 향하여 오늘을 부단히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 창조의 능력이 있습니다. 또한 그리스도의 삶 속에 변화가 있고 개척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다. 갈 바를 알지 못하였던 아브라함이었지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나아갈 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오늘날도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갈 길을 알려 주신 것처럼 여러분의 갈 길을 분명히 제시해 주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⑶우리 신앙인들은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는 말씀에 눈을 떠야 합니다.
여러분, 나면서 소경된 것은 본인의 탓은 아닙니다. 누가 소경으로 나고 싶겠습니까? 부모의 탓도 아닙니다. 부모가 자기 자식을 소경으로 낳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본문 뒷 절에 보면 이 사람의 나이가 40세쯤 되었다고 했습니다. 참 불행한 사람 아닙니까?
나면서 소경되고, 그것도 가난한 집에 태어나서 거지노릇을 하면서 살아야 했던 이 사람은 더 이상 설명할 길이 없는 불행한 사람입니다. 이 사람을 두고 이렇게 제자들이 시비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주님은 이 사람에게 참으로 아름다운 말씀으로 다가갔습니다. 과거가 원인이 아니라 미래의 목적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제자들의 사고방식을 완전히 뒤집어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이 말씀이 왜 놀랍습니까? 우리도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누가 그 소경에게 기대를 합니까? 누가 길거리의 거지 소경에게 희망이 있다고, 소망이 있다고 지목을 합니까?
'이 사람아 자네도 희망이 있어. 자네도 기대를 가져'라고 아무도 그런 말을 해주지 않습니다. 그런 소망이 없는 그 소경을 향하여 주님은 '이 사람아 자네에게도 하나님의 계획이 있어. 너를 통해 하나님이 하실 일이 있어.' 굉장한 선언입니다. 이 메시지는 우리자신에게도 해당되는 메시지입니다.
버려진 거지 소경, 아무도 다가가지 않는 거지 소경에게도 하나님의 나타낼 계획이 있다고 한다면 눈이 멀쩡한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계획이 있지 않겠습니까? 우리에게도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것을 볼 줄 아시기 바랍니다. 그것을 의식하기 바랍니다. 길거리에 버려진 소경거지에게도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 있다고 한다면 오늘 우리 각자에게도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이 있음을 믿으십시오. /할/
여러분에게 고통이 있습니까? 누구 죄 때문입니까? 무엇 때문입니까? 그렇게 얽매이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고통을 통하여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 무엇인지, 무엇을 내게 가르쳐 주시려고 하는지, 우리하나님의 연단의 목적이 무엇일까? 그것을 믿음으로 보실 줄 알기 바랍니다.
이 소경 거지는 버려진 과거입니다. 상처투성이 과거입니다. 잘못된 인생의 모습입니다. 그는 운명지어진 불행한 사람입니다. 나면서 소경, 세상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팔자소관이고 운명이라고 돌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 속에서는 운명도, 팔자도, 실패도, 고통도, 잘못된 과거도 하나도 성립되지 않습니다. /아멘입니까?/
하나님의 나라에는 그런 용어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우리 하나님의 역사 속에는 그런 용어가 없습니다. 이 소경은 운명이 아닙니다. 이 소경은 팔자가 아닙니다. 그에게 일어났던 놀라운 역사적인 현실은 오늘 우리에게도 나타날 수 있는 기적이 현장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사람이 이런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뜻이 있어서 그래 하나님의 뜻이야!' 라고 말씀하실 때 오늘 예수님을 믿는 신앙 인이라면 '오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 부족한 저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신 다니 감사합니다.' 이런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이 땅에는 60억이 넘는 인류가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지식으로나, 돈으로나, 권력으로나 건강으로나 소위 내 놓으라는 사람들이 숱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을 다 제쳐놓으시고 나같이 못 배운 사람, 없는 사람, 부족한 사람을 택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 신다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글도 모르고, 몸도 불구이고, 돈도 없고 외로운 예루살렘 길거리에 버림받은 나면서부터 소경이 된 그 한 사람을 선택하셔서 자신의 뜻을 이루시기를 원하시는 그 하나님께서는 어느 모로 보나 그 사람보다 좀 더 나은 입장에 있는 저와 여러분들을 통해서 더 큰 뜻을 이루시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아멘 입니까?/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생활 속에, 환경 속에, 우리의 가정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나가야 합니다. 비록 그 자리가 멸시와 천대를 받는 자리일지라도 핍박과 곤경에 처한 자리일지라도 '하나님이여 나를 통하여 주의 뜻을 이루소서' 이런 고백이 되어지는 신앙 속에 엄청난 하나님의 간섭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할/
2. 사명에 최선을 다하시는 예수님!(4)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아직은 낮입니다. 밤이 되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자신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전까지는 최선을 다해서 아버지의 일, 하나님의 일을 하셔야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자신의 사명에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밤낮으로 사랑하는 제자들을 가르치셨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에게 천국의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병든 자를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쉴 겨를도 없으셨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고통 당하는 그 순간까지 구속의 사명을 완수하셨습니다. 죄인들을 위해서 기도해 주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회개한 강도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지금도 예수님은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시면서 끊임없이 우리를 위해서 중보의 기도를 하고 계십니다.
여러분! 우리도 예수님처럼 우리의 사명에 최선을 다해야 될 줄 압니다. 우리에게도 어두운 밤, 쉴 때가 곧 옵니다. 그 때는 일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낮 기간 동안에는 아버지의 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사명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믿/
3. 다시 본문의 상황을 보겠습니다.
이 소경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이것도 팔자, 운명입니까? 1절을 보시면 "예수께서 길 가실 때에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보신지라"고 했습니다. 이 문맥을 자세히 보면 소경이 앉아 구걸하던 길가에는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길입니다. 주님은 그 길에 다니는 많은 사람도 보셨지만 특별히 이 소경 거지를 주목하셨습니다.
소경된 사람을 '보셨다'고 했는데 이 말은 '관심을 가지고 주목하신 것'을 의미합니다. 이 사람은 소경거지로 그 자리에 앉아 있기 때문에 주님의 관심에 들었던 사람입니다. 그가 만약 소경이 아니었더라면 한평생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소경이라는 그 불행 때문에 지금 그가 예수를 만나게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결정적인 약점이 있고 지난날의 실수도 있지만 그것이 예수님을 만나는 순간에 다른 사건으로 다가옵니다. 사람들의 놀림 앞에 자존심도 다 짓밟혀 버린 거지 소경인 그에게 메시야가 다가오셨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그 소경의 눈에다가 진흙을 침으로 비벼 이겨서 발라 주셨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소경의 눈이라고 해서 눈이 아닙니까? 여러분, 눈에 작은 티끌이 들어가도 얼마나 쓰라리고 아픕니까? 그런데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발랐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만약 진흙에 돌멩이라도 들어있어서 그것이 눈에 들어가면 얼마나 고통스럽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경은 말이 없습니다. 그 모든 것을 참고 받아들였습니다. 한 평생 한 맺힌 흑암의 고통에서 주님이 자신을 해방시켜 주신다는 데 그까짓 침 좀 바르고 진흙을 바른들 어떻습니까? 그 이상인들 왜 못 바르겠습니까? 소경은 그런 심정으로 다 받아들였습니다. /아멘!/
여러분! 은혜 받기를 원하십니까? 체면, 체통, 자존심을 다 버려야 합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놀라우신 은혜를 베풀어주실 것입니다. /할/
또한 진흙은 하나님의 창조의 재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주 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시고 그 다음 인간을 창조하실 때에는 흙으로 만드셨습니다. 흙은 창조의 재료입니다. 그래서 흙은 말씀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고 하는 그 사람에게 사명을 주십니다. 말씀을 주십니다. 침은 예수님의 진액 즉 성령을 의미한다고 학자들이 말했습니다. 성경에 보면 성령을 상징해서 '생명의 강, 생수, 물' 등으로 표현합니다. 바로 예수님의 능력을 그에게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에게나 성령의 권능을 주시고 말씀의 능력을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자 하는 그런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주시고 사명을 주시고 성령의 권능을 허락해 주십니다. /믿/
4. 실로암 못에 가서 씻어라!
이제 어디로 가라고 했습니까? 실로암 못에 가라고 했습니다. 실로암은 '보냄을 받은 곳'이란 뜻입니다. 즉 외곽에서 물을 예루살렘으로 보냈다하여 붙여진 이름입니다, 영적으로 말씀드리면 '부름을 받은 곳, 또는 보냄을 받은 곳'이란 뜻입니다.
요8장에 보면 우리 주님은 '보내심을 받은 자'라는 것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께 보냄을 받았다'고 표현했습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로부터 세상의 빛이 되기 위해 보내심을 받았습니다.
주님은 본래 온 우주를 창조하신 창조주이실 뿐 아니라, 흑암 속에 있는 사람들의 빛이 되시기 위해서 창조주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보내심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실로암이란 보내심을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능력을 상징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아멘!/
그 당시 실로암 못에는 33개의 가파른 계단이 있었다고 합니다. 성한 사람도 내려가기 어려운 계단입니다. 그런데 33개의 계단을 내려가서 눈을 씻는다는 것은 너무나도 힘든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소경은 어떻게 했습니까? 7절 하반부에 보니까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가라고 말씀하셨으니까 갔습니다. 예수님이 씻으라고 말씀하시니까 씻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는데 실로암인들 못 가며, 요단강인들 못 가겠습니까? 33개의 계단이 아니라, 3,300개의 계단이면 왜 못 내려가겠습니까? 그런 심정으로 그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다시 보십시다. 예수님이 '가라'고 말씀하시니까 가기 힘들어도 갔습니다. 예수님이 '씻으라'고 말씀하시니까 씻기 힘들어도 씻었습니다. 그것이 순종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순종이 얼마나 축복인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실로암의 기적 사건은 우리가 이성적으로 논리적으로 따지려고 하면 일어나지 않습니다. 정말 바보처럼 순종해야 합니다. 우리 주님은 진흙을 바르지 않고도, 실로암까지 가지 않고도 충분히 말씀으로만 그 소경을 고치실 능력이 있으신 분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너무 똑똑해서 따지기를 잘 합니다. 기독교를, 하나님의 모든 것을 이 형편없는 인간의 머리를 가지고 다 판단하려고 합니다. 머리로 판단해서 안 맞으면 순종을 안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소경에게 순종과 수고를 요구하시는 것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역사에다가 우리의 공로를 더할 수가 없습니다. 소경이 눈을 뜨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이며 능력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기적을 동반하는 역사에는 순종을 요구하십니다. 그 이유는 그 기적의 역사를 믿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소중하게 간직하도록 하시기 위함입니다. 우리의 수고 우리의 순종이 구원에 보탬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결정적인 순간마다 우리에게 순종을 요구하시는 것은 그의 능력을 나타내기 위한 전주곡이라는 것을 여러분들이 알아야합니다. 순종을 싫어하는 사람 치고 믿음이 자라는 것을 본적이 없습니다. 순종이 없는 사람 치고 기적적인 신앙을 체험했다는 사람을 본적이 없습니다. 신구약 성경의 66권 전체에 나타나는 신앙의 인물들의 걸음에는 순종하는 일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밤새도록 고기를 잡지 못하던 베드로에게 오셔서 깊은 곳으로 가서 그물을 내리라고 하자 베드로는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리리이다'고 순종했더니 만선의 축복을 받았고, 요2장에 가나 혼인잔치의 기적도 순종에서 온 축복입니다.
'그가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나님의 기적은 언제나 순종하는 곳에 있습니다. 그곳에 언제나 주님은 보화를 감추어 놓고 계십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그냥 기적을 행하지 않습니다. 움직이게 하시고 일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내가 일한 대가를 받게 하십니다. 믿음으로 움직이고 행해야 합니다. 언제든지 주님을 향하여 기적이 나타나는 방향으로 움직여야 합니다. 물을 가득 채운 후에 주께서 나눠주라고 하셨을 때 그 물이 포도주로 변하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오늘 본문은 소경의 신앙의 위대성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순종과 헌신을 요구하시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다는 사실입니다. 순종하는 것이 행동화되면 위대한 역사가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이제 그 잘난 머리가지고 우리 너무 따지지 말고 좀 순종하는 일을 행동화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①실로암이란 어느 의미에서 교회를 가리킵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이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권능에 사로 잡혀서 예수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 속에 신앙적인 삶을 형성해 나갈 때 실로암 못으로 간 소경이 눈을 떠 변화가 온 것처럼 오늘 이 자리에서 귀한 역사가 일어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멘!/
주님은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기도하는 곳으로 가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입니다. 기도하면 병 고침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할/ 오늘도 기적은 일어납니다. 기적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믿음이 사라진 것입니다.
②실로암은 내려가는 곳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눈을 뜬 사람도 33개의 계단을 내려가서 물을 떠온다는 것이 힘든 일인데, 하물며 소경이 가파른 33개의 계단을 밟고 내려가서 두 눈을 씻는다는 일은 엄청나게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소경에게 왜 그렇게 말씀하셨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가장 낮은 곳에서 받을 수 있고, 눈을 씻는 것은 가장 낮은 곳에서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얼마나 낮은 곳으로 내려가셨습니까? 세상에 나실 때도 마구간에서 나셨습니다. 그곳은 가장 낮은 곳입니다. 궁궐도 아니고, 집도 아닙니다. 예수님의 친구는 누구입니까? 창녀와 세리와 죄인입니다. 가장 낮은 계층의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직업은 무엇입니까? 가장 낮고 천한 목수였습니다. 재산은 얼마나 있었습니까? 이 세상에서 가장 가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죽으셨습니까? 가장 낮은 살인강도의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이처럼 주님은 얼마든지 높은 권세를 누릴 수 있었지만 낮은 곳을 찾아 다니셨습니다.
여러분, 낮은 곳에 은혜가 있습니다. 낮은 곳에 위로가 있고, 감사가 있습니다. 감사할 것이 없습니까? 그렇다면 낮은 곳으로 가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우리는 올라가려고만 하기 때문에 은혜를 받지 못합니다. 고침을 받지 못합니다. 낮은 곳으로 내려가시기 바랍니다.
③실로암은 씻는 곳입니다. 사람들은 실로암까지는 잘 갑니다. 그러나 씻지를 않습니다. 교회는 실로암못입니다. 올 때는 더러움으로 왔다가 갈 때는 예수님의 보혈로 깨끗해져서 돌아가는 곳입니다. 울면서 왔다가 기쁨으로 돌아가는 곳입니다.
영적소경으로 왔다가 신령한 눈을 뜨고 돌아가는 곳입니다. 절망에 빠진 사람이 찾아 왔다가 희망을 가지고 돌아가는 곳입니다. 불행한 사람이 왔다가 행복을 가지고 돌아가는 곳입니다. 교회는 주의 보혈로 씻김을 받는 곳입니다. 이것은 회개를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믿/ 엡5:26-27절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 /할/
5. 이제 이 소경이 몇 가지 변화가 있었습니다.
⑴새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고후5:17절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거듭난 인생, 새로운 인생으로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⑵소경이 눈을 떴습니다. ▶'눈은 영혼의 창'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마음을 눈으로 표현되기도 합니다. 사랑스럽고 평화로운 마음도, 반면에 미움과 질투의 마음도, 먼저 눈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또 '눈은 몸의 등불'이라고도 합니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그 눈이 나쁘면 그 생활 전부가 어둡다는 말입니다. 눈은 창문과 같아서 창이 깨끗하면 맑은 빛이 몸 안으로 밀려들어오지만 창이 더러우면 그 빛이 들어오지 못하게 됩니다. 욕심에 눈이 어두운 사람, 질투에 눈이 어두운 사람은 사물을 제대로 볼 수가 없습니다. 또 편견과 불신에 메여있는 사람, 미움과 시기에 메여있는 사람은 사람을 바로 볼 수 없고 사물을 바로 이해할 수 없고 세상을 바르게 살지 못합니다.
▶최고 밝은 눈은 '믿음의 눈'입니다. 이 눈으로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가장 멀리 보는 눈입니다. 먼 미래를 보는 눈입니다. 죽음 이후까지 보는 눈입니다. 그리고 놀라운 것은 자기를 보는 눈이 열리게 됩니다. 보통 눈은 남을 보는 눈이지만 믿음의 눈은 자기를 봅니다.
이 눈으로 자기의 허물을 보아야 합니다. 예수 안에서 나를 볼 때 내가 죄인 됨을 보며 주의 의를 봅니다. 주의 의가 나를 덮어줍니다. 그래서 나에게 영생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보면서 나를 볼 수 있는 눈이 열려야 합니다. /아멘!/
▶맹인으로 믿음의 눈을 가지고 일평생을 하나님만 찬양하며 살다간 여인이 있습니다. 찬송 시를 9천 여곡이나 쓴 '패니 크로스비'여사입니다. '예수로 나의 구주 삼고 성령과 피로써 거듭나니/나의 갈길 다가도록 예수 인도하시니/나의 영원하신 기업 생명 보다 귀하다' 등 주옥같은 찬송 시를 쓰신 분이십니다. ▶그 분은 인간적인 면에서는 가장 불행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1820년 3월 24일 미국 뉴욕 주의 작은 마을 푸트남에서 태어났는데 생후 6주부터 맹인이 되었습니다. 돌팔이 의사의 잘못된 약물 치료로 생후 6주부터 95세까지 맹인으로 평생을 살았습니다. 그는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제대로 의사의 치료를 받아보지 못했습니다. 그가 한 살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고 그가 11살 되었을 때 가장 사랑하고 아끼던 할머니도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가 늦게 맹인 교수 밴 앨스틴과 결혼해서 첫 아이를 낳았는데 그 아이도 세상을 떠나버리고 말았고, 그의 사랑하는 남편도 아내를 떠나 먼저 하늘로 갔습니다. 패니 크로스비는 한 평생 수많은 슬픔과 고통과 아픔을 거듭해서 경험한 참으로 불행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92회 생일을 맞았을 때 그의 생일을 축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을 했다고 합니다. '이 세상에 나보다 더 행복한 사람이 있으면 내게 데려오세요. 그 사람과 악수하고 싶어요.' 가장 행복하게 느끼면서 세상을 산 사람, 그는 분명히 가장 행복한 사람입니다. /할/
⑶이 소경은 이제 오직 예수만 전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11절 "대답하되 예수라 하는 그 사람이 진흙을 이겨 내 눈에 바르고 나더러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기에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노라" 이 소경은 자기가 만난 예수 그리스도를 자랑스럽게 증거 합니다. 여러분 은혜 받고 구원받은 성도들은 이 예수 그리스도를 자랑스럽게 전해야 하며 드러내야 합니다. /믿/
▶말씀을 마칩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이 소경을 통해서 주의 뜻을 이루어 주신 것처럼 저와 여러분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를 원하십니다. 오늘도 실로암의 기적은 순종을 통하여 일어납니다. /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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