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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피조물의 의미! (고후 5:17-21)

by 【고동엽】 2022. 2. 8.

새로운 피조물의 의미! (고후 5:17-21)

 

사람들은 흔히 인간을 가리켜 만물의 영장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잠6:7절에 보면 만물의 영장인 사람에게 '개미에게 가서 지혜를 배우라'고 권면합니다. 그러니까 만물의 영장의 지혜도 대수롭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렘8:7절 "공중의 학은 그 정한 시기를 알고 반구와 제비와 두루미는 그 올 때를 지키거늘 내 백성은 여호와의 규례를 알지 못하도다"고 하나님은 한탄하십니다. 왜 이렇게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이 하나님을 슬프게 합니까? 한마디로 아담이 하나님을 반역하고 범죄함으로 하나님의 형상이 깨어지고 인간의 마음속에 죄가 들어와 주인 노릇을 하면서부터입니다.
그때부터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두꺼운 벽이 생겼습니다. ▶자존심 강하기로 소문난 친구 두 사람이 사소한 이해관계 때문에 말다툼을 하고 사이가 멀어졌습니다. 며칠이 지나자 격했던 감정이 누그러지면서 두 사람은 피차 자기네 사이가 그래서는 안 될 사이라는 것을 깨닫고 후회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자존심이 강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먼저 화해를 청하지를 않습니다.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다른 친구 하나가 두 사람 사이에 끼여들어서 화해를 시켰을 때 그 친구를 가리켜 화해 자 또는 중매자(중계자)라고 부릅니다.
본래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존재로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며 살아야 할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죄성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오히려 도전함으로 하나님과 불편한 관계 속에 살아갑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은 근본적으로 하나님과의 불편한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갈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우리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 세상 모든 것을 움켜 주었다 할지라도 그 속에 참 만족이 있는지 아십니까? 아닙니다. 가지면 가진 대로 누리면 누린 대로 오히려 공허합니다. 허무합니다. 만족이 없습니다.
왠지 아십니까? 우리 모두는 영적으로 하나님과 교제하며 살아가야 할 존재로 지음을 받았는데 그 영적인 교제가 단절됐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친한 친구와 싸우고 말도 안하고 분노와 증오를 가지고 살아간다면 그는 정말 불편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이 하나님을 외면하고 하나님께 죄를 범하며 살아간다고 하는 것은 인간에게 있어서 그 보다 더 큰 불행이 없습니다. 그래서 태초 이래로 사람들이 하나님을 찾는 제사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1. 구약에서 하나님과 화목케 하는 방법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구약시대에는 하나님께 지은 죄를 해결 받고 하나님과 화목하려면 소나 염소나 양을 잡아서 제사를 드려야 했습니다. 레3장에 보면 이것을 '화목제사'라고 합니다. 가령 소를 화목 제물로 드릴 경우 소의 머리에 안수하고 그 소를 잡습니다. 그리고 그 피는 제단 사면에 뿌리고 그 외의 남을 것들은 불에 태웁니다.
여기 세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⑴짐승의 머리에 안수하는 것은 짐승으로 하여금 나를 대신케 한다는 뜻입니다. 즉 내가 잘못한 죄를 짐승에게 전한다는 것입니다. ⑵피를 뿌린다는 것은 나의 생명을 드린다는 뜻입니다. 피는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⑶남은 부분 '내장, 콩팥, 기름 등'은 불에 태운다는 것은 죄의 소멸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내가 지은 죄를 짐승이 내 대신 책임지고 피를 흘리고 불타서 죽게 됨으로 내가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다는 것이 구약 제사의 의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제사를 드리고 나서 다시 죄짓고 다시 제사를 드리는 악순환이 계속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연히 제사의 종류가 많아지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악순환을 되풀이하지 않을 수 없는 인간의 연약한 모습을 봅니다. 또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발견하게 됩니다.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잘못을 저지르면 안 되는 것인 줄 뻔히 알면서도 또 다시 잘못을 저지르게 되는 인간 자신의 갈등이나 고민도 큰 것이지만 그때마다 제사를 통해서 소나 염소를 잡아 죄를 용서받아야 하는 인간의 수고가 얼마나 번거롭습니까?

 

2. 신약의 화목 방법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바로 이러한 구약의 악순환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오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롬5:8절에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리고 롬5:10절을 보면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안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이 말씀의 뜻은 구약시대에 하나님과 인간이 화목하기 위하여 소, 양, 염소를 제물로 드렸던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자신을 화목 제물로 십자가에 드려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셨고, 그 결과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화목제물이라는 말씀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예수님은 '화해 자, 증보 자, 중간 역할 자'가 되십니다. 바로 이러한 사실 때문에 오늘 본문에서 사도바울은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할/
누구든지 예수 안에 있으면 즉, 예수님을 믿으면 죄 사함을 받고 새로운 사람이 됩니다. 다시 말하면 죄 때문에 하나님과 불화 했고, 불편한 관계를 가졌던 사람들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새로운 피조물이란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과 화목한 사람'입니다. 하나님과 사이가 좋아진 사람이 곧 새로운 사람입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아멘!/
만일 내가 지금 이 시간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증보 자로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를 결심한다면 나는 나 때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하나님과 화목하게 됩니다.
만일 이 시간 내가 내 마음속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로 작정하고 내 입으로 그 사실을 고백하면 나는 나 때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공로로 구원을 받게 됩니다.
만일 지금 이 시간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 사함 받고 새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라고 기도한다면 나는 나 때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새로운 피조물이 될 수 있습니다. /할/ 지금 이 자리가 중요합니다. 지금 여기에서 나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야 하고 죄 사함을 받아야 하고 하나님과 화목해야합니다. 그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화목 제물로 십자가에 피 흘려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이 가능합니다. /믿/

 

3. 본문 17절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여기에서 '누구든지'라는 말은 인간적인 차별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이라는 말은 '인간이 거듭나고 새로워지는 유일한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고 그리스도 안에 거하기만 하면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안에'라는 '연합, 교제, 연결'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말하며 그리스도와 날마다 교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말은 '그리스도인은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부활할 존재이기 때문에 이제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할/
▶애벌레들이 애벌레의 삶을 다 살면 잠을 자게 됩니다. 애벌레가 잠을 자고 나면 껍데기를 벗고 마침내 나비가 됩니다. 그러면 이 나비는 더 이상 애벌레로 살면 안 됩니다.
'트리나 폴리스'의 '꽃들에 희망을'이라는 동화를 보면 두 마리의 애벌레가 하나의 희망을 가지고 잠을 자게 됩니다. 그 희망은 꽃들에게 희망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애벌레가 잠자는 기간 동안 꼬치 속에서 암흑생활을 잘 견딥니다. 왜냐하면 그 애벌레에게는 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잠을 다 잔 후에 이 애벌레가 껍질을 벗고 나옵니다. 그리고 나비가 됩니다. 이 나비가 하늘을 날면서 꽃을 찾아다니며 노래를 부릅니다. 얼마나 큰 변화입니까? 이제 이 나비는 더 이상 애벌레가 아닙니다. 이제는 새로운 존재,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나비가 된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애벌레가 변화하여 나비가 되듯 그렇게 엄청나게 변화 받은 존재들입니다. 예수님이 그 변화의 모습에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옛날의 나는 애벌레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때는 마음, 정신, 생각, 삶이 모두 애벌레와 똑같았었습니다. 그래서 술 취해 땅에 뒹굴고 별것도 아닌 것들을 쫓아다니느라 하늘이 푸른지도 모르고 살았습니다. 그때가 바로 애벌레와 같은 때였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예수로 말미암아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정신도 마음도 생각도 영적으로 완전히 새로운 존재로 거듭났습니다. /아멘!/
그래서 성경은 '보라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고 말씀했습니다. 이제는 나비가 애벌레 때를 생각하고 땅속으로 들어가면 안 되듯이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 받은 그리스도인은 옛사람으로 돌아가 살면 안 됩니다. 이제는 세속적 생활방식이나 행동방식 그리고 이기적 욕망으로 살면 안 됩니다. 나비는 이제 다시 시궁창으로 들어가면 나비가 아닙니다. 나비는 나비의 수준을 지켜서 하늘을 날아야 나비입니다. 나비는 이슬을 먹고 꽃을 찾아가서 꿀을 따야 그래야 나비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은 생각, 삶, 모양, 추구점이 따로 있습니다. 그래야 그것이 부활의 은혜를 입은 그리스도인입니다. 왜냐하면 이제는 죽었다가 새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그리스도인이 되기 이전의 삶은 이미 다 지나가 버린 것이고 이제는 새로워진 새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귀의 자녀이었던 우리가 이제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죄로 인하여 죽었던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영생을 얻었고, 이 세상의 것을 바라보고 살던 우리가 이제는 영원한 하늘나라를 목적 삼고 살아가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제는 신분이 달려지고, 목적이 달라지고, 인생관, 세계관, 가치관이 달라졌으므로 이제는 그리스도와 더불어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강하게 교훈하고 있습니다. /아멘!/
여자가 결혼을 하면 새색시 또는 새댁이라고 합니다. 결혼을 한다고 해서 사람자체가 특별히 달라지는 것도 아니고, 새로워지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결혼을 하고 나면, 결혼하기 전보다 더 늙은 헌 사람이 됩니다. 그런데도 결혼을 하게 되면 새사람이라고 하기도 하고, 새색시라고 하기도 합니다. 그 이유는 결혼을 한 여자는 그때부터 남편을 위해 사는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삶을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결혼 전에는 나 자신을 위해 살았습니다. 그러나 결혼을 하고 나면 자신만을 위해서 살아서는 안 됩니다. 남자는 아내를 위해서 여자는 남편을 위해서, 서로가 서로를 위해서 새롭게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결혼을 하면 나이가 들은 신랑도 새 신랑이라고 하고 나이들은 신부도 새색시라고 합니다. 같은 의미로 예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그리스도인들은 이제는 오로지 그리고 전적으로 자신을 새롭게 하시는 예수님을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아멘!/

 

4. 다시 한 번 '새로운 피조물 즉, 새 것이 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성형수술을 통하여 얼굴 모양을 고치고 웅변학원에게 말더듬이로 고치고 유명 디자이너가 디자인한 새 옷을 걸치고 새로 지은 아파트에서 새로 장식된 거실에 앉아 잇는 모습이 새로운 피조물일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죄송하지만 그런 것들이 새로운 피조물이거나 새 것이라고는 할 수가 없습니다.
본문이 말하는 새로운 피조물이란 예수 그리스도와 영적으로 하나가 된 사람을 의미합니다. 좀 더 쉽게 설명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주님과 연합하는 자들에게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입니다. 모래도 진주조개 안에 있으면 진주가 됩니다. /믿/ 그렇듯이 예수 안에 있어야 합니다.
저는 늘 말씀드립니다만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형성대로 지음 받은 하나님을 닮은 사람입니다. 이 사건이 굉장한 사건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닮다니!(창1:26)>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이 타락과 범죄로 인간의 생존방식이 달라지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떠난 채 살아가는 생활이 되고 만 것입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을 떠난 채 살아나는 새 부류의 인간상을 보겠습니다.
①무신론자들입니다.
무신론이란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한 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존재하지 않은 하나님을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며 살아가는 것은 별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도 살아 계셔서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는 살아 계신 하나님을 없다고 부정하며 살아가는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신학자 '슐라이 엘마하'는 인간 모두에게는 '피조물의 감정'이 있다고 했습니다. 즉 인간은 자신이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감정이 있기 마련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철학가 '칸트'는 '내게는 두 가지 법칙이 있는데 하나는 무한한 천체의 법칙이요, 다른 하나는 내 양심 속에 빛나는 양심의 법칙'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양심을 주셨습니다.
②자기를 주인으로 삼고 사는 인본주의자입니다. '이방인'을 쓴 유명한 작가 '까뮈'는 '인간은 자신이 중심이다. 이 우주에는 중심이란 없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면서 이 세상은 '신이 중심이 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중심'이라는 무신론 실존철학의 거두노릇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결국은 교통사고로 죽게 되었을 때 '하나님을 불렀다.'고 합니다.
③물질을 힘으로 믿고 사는 유물론자들입니다. 공산주의의 역사관은 유물주의 사관이라고 합니다. 쉽게 말하면 '정신이라든지, 영적인 것은 역사의 축으로 보지 않고 물질, 힘 따위로 역사의 축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겐 종교가 없습니다.
종교란 정신의 문제입니다. 영혼의 문제를 다루는 것이기 때문에 공산주의 세계에서는 용납이 안 됩니다. '레닌'은 살아있는 동안 '우리는 종교를 박멸해야 한다, 이것이 유물론의 ABC입니다.'라고 호연했지만, 그러나 그가 말하는 기독교는 박멸되지 않은 채 레닌이 박멸되고 말았습니다.
실존철학자 '하이데거'는 '인간은 죽음을 향한 존재'라고 독백했습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바울은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라고 희망찬 소식을 전했습니다.
사도바울이 본문에서 말씀하신 '새로운 피조물'이란 타락한 피조물로서의 삶을 벗어 던저 버리고 '하나님 중심의 삶과 신앙 중심의 삶'을 의미합니다. 즉 '하나님이 없이도 살 수 있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멘!/
요3장의 니고데모란 사람이 어느 날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는 유대인이었고, 바리새인이었고, 부자였습니다. 그리고 당시 유대인의 최고 법정인 산헤드린 공의회의 70인 회원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는 지식 계급이었고, 지도계급이었고, 상류계급이었습니다. 그러한 그가 어느 날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갔습니다. 밤중에 온 것도 그의 사회적 신분이 있기 때문에 사람 눈을 피해서 몰래 온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나자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기사와 이적을 얘기하면서 그런 일들이야말로 '당신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분이라는 확신한 증거가 아니겠느냐?'고 예수님을 잔뜩 추켜세웠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관심은 다른데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사람이 거듭나야 한다.'는 진리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니고데모로써는 어려운 이야기였습니다. 사람이 한번 나서 한번 살다가 한번 죽는 것이 일정한 생의 과정임을 알고 있는 니고데모로서는 '다시 나야한다'는 말씀을 이해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사람이 두 번 날 수가 있습니까? 어머니 뱃속에 다시 들어갔다가 올 수 있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이 물음에 예수님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나라에 갈 수 없다'는 놀라운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여기서 거듭난다는 것은 새로 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을 바울은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는 것은 '다시 난다'는 것입니다. '중생 한다'는 말입니다. 다시 '거듭'이라는 말은 헬라어원으로는 '아노텐'이라고 합니다. ▶이 말속에는 세 가지 뜻이 있습니다.
'⑴완전히 근본적으로, ⑵다시 두 번째로. ⑶위로부터'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거듭난다,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는 말은 '완전히 근본적으로 새로워지는 것'을 말하는데 '위로부터 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가 스스로 새로워지고 내가 스스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새롭게 하시고 나를 다시 새롭게 만들어 주신다는 뜻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가 중요합니다. 세례가 무슨 뜻이냐 하면 '물로 씻어서 새 사람을 만들어 자녀로 받아들이는 의식'입니다. ▶세례라는 말에는 두 가지의 뜻이 들어 있습니다.
⑴물로 씻는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이 죄로 너무 더렵혀졌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물로 깨끗이 씻은 다음에 하나님의 자녀로 용납 받는 것입니다. 그 의식이 곧 세례입니다.
예를 들면 이렇게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고아원에서 어린아이를 하나 입양하려면 아이를 데려다가 그냥 살지 않습니다. 아이가 더럽고 추해서 그냥 데리고 살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먼저 깨끗하게 씻깁니다. 머리를 깎아 주고 새 옷을 사다 입히고 또 새 이름을 지어 줍니다. 그런 후 데려다 집에서 함께 삽니다. 그것이 입양 절차입니다.
▶옛 문헌을 보면 이런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청나라 사람들이 서울에 와서 여자들을 마구 잡아갔습니다. 당시는 우리가 힘이 없었기 때문에 아무런 항거도 못했습니다. 여자들을 데려다가 몇 년씩 살다가 다시 돌려보냅니다. 이들을 가리켜서 사람들은 '환향녀'라고 불렀습니다. 이 말은 '돌아올 還, 시골 鄕, 계집 女'를 써서 '다시 집으로 돌아온 여자'란 뜻입니다. 그래서 옛날부터 바람난 여자를 '환향녀'라고 불렀던 것은 바로 여기서 나온 말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돌아왔다고 해서 사람들은 선뜻 받아들이지를 않았습니다. 돌아와서 반갑기는 했는데 이미 여인들이 부정해졌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자식들이 돌아왔는데 어떻게 받아들이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한 가지 방법을 강구했습니다. 그것이 환향녀들을 모두 '세검정'으로 데리고 가서 '깨끗한 물로 몸을 씻기는 방법'이었습니다. 이를테면 부정한 몸을 깨끗하게 씻기는 의식을 행했던 것입니다. 이들을 그렇게 씻긴 후에 비로소 용서를 했고 용납을 했습니다.
그렇다고 그들을 곧바로 집으로 데리고 온 것이 아닙니다. 이들이 '무악재' 고개를 넘어서 문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모두 고개 너머에서 함께 모여 살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함께 모여 사는 동네 이름을 '홍재동'이라고 했습니다.
홍제동은 '클 弘, 건널 濟, 마을 洞'인데, 그 말의 뜻은 '크게 인심을 써서 구제 받은 사람들이 모여 살게 한 동네'라는 뜻입니다. 홍제동은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동네랍니다. 그렇습니다. 세례가 무슨 뜻이냐 하면 이렇게 씻어서 새 사람을 만들어 자녀로 용납하는 의식입니다. /할/
⑵또한 세례는 '담근다.'는 뜻도 있습니다. 이를테면 세례는 나의 존재를 물 속에 담근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익사'를 말합니다. 쉽게 말하면 세례는 '물에 빠져 죽는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다시 물에서 나옵니다. 그것은 '죽은 내가 다시 태어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옛날의 나는 물에 빠져 죽었고, 지금 예수의 이름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뜻이 세례의 의미입니다. /믿/ 그래서 저와 여러분들은 모두 이미 죽었다가 다시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옛날의 나는 이미 죽었고 오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다시 태어나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입니다. /할/

 

5. 새로 태어남과 성장의 관계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우린 여기서 한 가지 오해를 넘어서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순간 내가 죄 사함을 받고 새 사람이 되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것은 출생과 같습니다. 신생아는 성장이라는 과제를 안고 태어납니다. 어린 유아는 분별력도 없고, 철도 없고, 자제능력도 없습니다.
우리 '동하'가 '우리 어머니 지금 바쁘시니까 젖 달라고 말아야지, 그러면서 한가할 때 달라고 해야지' 그렇습니까? 아닙니다. 자기 배가 고프면 어머니 사정은 아랑곳없습니다. 바로 떼를 써서 달라고 합니다.
어린아이는 부모의 보살핌이 절대 필요합니다. 대소변도 부모가 가려주어야 하고, 금방 새 옷을 입혀 놓으면 30분도 채 못 되어 흙투성이가 되어 돌아오는 것이 아이들입니다. 이치를 보면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를 믿고 교회를 다닌다고 해서 당장 성자가 되고 천사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를 다니면서도 행실의 옷을 망가뜨리고 흙투성이가 되는가하면 신경질, 다혈질 그대로 다 가지고 있고, 고치지 못한 행실이나 버리지 못한 습관도 수두룩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새로운 피조물로 태어나간 했습니다만 아직 자라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라는 것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오늘 등록하고 다음 주일 천사가 될 수는 없습니다. 신앙이 자라야 합니다. 신앙이 자라면 인격의 성숙도 따라 옵니다. /아멘!/
또 우리가 전도하다 보면 '나는 죄가 커서, 나는 끊을 것을 끊지 못해서' 아직 갈 수가 없다고 그럽니다. 그러나 그것은 마치 머리가 너무 길기 때문에 이발소에 갈 수 없다는 것과 같은 것이며, 몸에 때가 많기 때문에 목욕탕에 갈 수 없다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수영선수가 되기 전에 절대로 물 속에 들어갈 수가 없다고도 합니다. 이것은 굉장히 잘못된 생각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새로운 피조물이 됩니다. /아멘/

 

6. 새로운 피조물이 된 우리들의 몸은 어떤 몸이며 또 어떻게 사용되어야 하는가?

 

고전6:19-20절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①내 몸은 내 것이지만 알고 보면 내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것'입니다. 우리는 이 점을 분명히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바울은 '우리 몸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이라고 했습니다. 또 '너희 몸은 값을 주고 산몸이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내 몸은 내 것이지만 사실은 내 것이 아닌 하나님의 것입니다. 우리는 이 개념부터 바로 이해해야 합니다. 내 몸의 실질 소유자는 하나님이십니다. /믿/
그래서 나에게는 내 몸이 병들지 않도록 잘 관리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리고 내 몸을 더럽히지 않도록 잘 관리할 책임도 있습니다. 내 몸이 병들면 우선 하나님이 손해를 보십니다. 그리고 국가가 손해를 보고, 가정이 손해를 보고, 사회가 손해를 보게 됩니다. 또 그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 아닙니다.
유교의 정신에서 보면 육체는 부모로부터 주어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몸을 상하거나 병들거나 추하게 굴리면 불효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에서는 이것을 한 차원 더 높여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 몸은 하나님께로부터 왔기 때문에 내가 내 몸을 잘못 관리해서 병들거나 추하게 만들면 그것은 죄라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사람들이 내 몸을 내 것이라고 생각할 때 어떤 결과가 옵니까? 그때는 내 몸을 함부로 사용하게 됩니다. 범죄에 사용하기도 합니다. 악의 구렁텅이로 몰아넣기도 합니다. 내 몸을 방탕으로 병들게 하기도 합니다. 술로 망가트리고, 마약으로 병들게 하고, 음행으로 추하게 만들고 맙니다. 또 내 몸을 상품화해서 사고 파는 매춘 행위를 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때로는 자살을 해서 죽기도 합니다. 왜 이러한 결과들이 나옵니까? '내 몸을 내 것'이라고 생각해서 그렇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내 몸은 내 것이 아니다'라는 의식입니다. 내 몸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런 정신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이 시대에 몸을 잘 관리할 수 있습니다. /아멘!/
②내 몸이 어떤 몸입니까? '성령의 전'입니다. 이 말씀은 내 몸 속에 성령께서 내주 해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몸의 주인은 내가 아니고 성령이십니다. 우리는 내 몸을 내 마음대로 더럽힐 수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내 속에 성령 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가 귀한 것은 그 속에 주의 영이신 성령께서 내주 해 계셔서 그분이 주인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무엇보다도 마음을 중시해야 합니다. 그 마음속에 좋은 생각을 품고 좋은 이상을 품고, 좋은 뜻을 품고, 아주 좋은 정신을 품고 살아야 합니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마음속에 성령님을 모셔들이고, 환영하고 영접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 성령이 나를 지켜 줍니다. 그 성령이 나를 만들어 줍니다. 또 그 성령이 나를 경건하게 살아가도록 지켜 줍니다. 이런 정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바로 우리 신앙인의 삶입니다. /아멘!/
③내 몸이 어떤 몸인가? '하나님께 드릴 몸'입니다. 롬12장에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고 했습니다. 구약 시대에는 수많은 제물로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양을 잡아서 제물로 드렸고, 제물을 태워서 향기로 드렸습니다. 그런데 그 제물들은 생명이 없는 제물입니다. 호흡이 중지되고 활동이 멈추어진 이미 죽은 제물입니다.
그런데 신약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죽은 것을 하나님께 제물로 드리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산 제사를 드리라'고 했습니다. 산 제사라는 말은 '정신을, 뜻을 드리는 것'을 말합니다. 죽은 제물이 아니고 살아 있는 나의 인격과 삶을 모두를 드리는 것입니다. 나의 몸을 드리고, 나의 영혼을 드리고, 나의 생각도, 뜻도, 이상도 드리고, 심지어는 나의 인격도 드리고, 지식도 드리고, 감정도 드리고, 의지도 드리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 전심으로 드려지는 예배가 산 제사요 진정한 제물이 되는 것입니다.

7. 새로운 피조물이 된 우리가 이제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

 

①가치관이 변해야 됩니다. 과거에는 육신에 속한 것들을 귀하게 여겼지만, 이제는 영혼의 것에 값어치를 두고,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영혼이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며 살아야 합니다.
여기서 '변하다.'라는 말이 히브리어의 '하파크'인데 그 뜻은 '빙그르 돌다. 뒤집어엎다. 돌아온다.'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변한다는 것을 180도 빙그르 돌아서 주님께로 돌아오는 것을 의미합니다. 썩고 병들고 타락한 내 삶을 완전히 뒤집어엎어 버리는 영적 혁명이 '하파크'입니다.
그런데 예수를 아는 것만으로는 변하지 못합니다. 예수를 공부하는 것만으로도 변하지 못합니다. 교회를 다니는 것만으로도 변하지 못합니다. 오늘 여기서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오늘 여기서 예수님을 내 심령에 주인으로 모셔야 합니다. 내가 예수 안에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변합니다.
②삶의 목적이 달라져야 합니다. 값어치가 달라졌기 때문에 삶의 목적이 바뀝니다. 본문 15절에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제까지 우리 삶의 목적이, 어떻게든 내가 더 잘 살고 행복하게 쾌락을 누리며 살아보겠다고 하는 나 중심적인 목적이었지만, 이제부터는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어찌하든지 주님을 기쁘시게 하며, 말씀대로 순종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삶의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할/
③삶의 방법도 새로워져야 합니다. 여기서 '새롭게 하라'는 히브리어는 '하다쉬'인데 '다시 세우다, 수선하다'라는 뜻입니다. 역사와 세계와 인간을 다시 세우고 고치시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 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안에서 새로워져야 합니다.
지금까지는 나 자신의 성공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다른 사람과 분쟁하고 싸우면서, 또한 목적을 위해 악한 일을 서슴지 않았지만, 이제부터는 아닙니다.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이제는 내가 손해를 보아도, 불이익을 당해도 깨끗하게 삽니다. 죄악을 끊어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삶의 방법이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 땅위에서 많은 손해와 어려움과 가난과 질병을 겪고, 멸시와 천대를 받아도 이제부터는 죄를 범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바르고 깨끗하게, 의롭게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이 새로운 피조물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할/

 

8. 새로운 피조물이 된 우리들의 삶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과 불편한 관계에서 화목제물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해결되었을 때 어떤 결과가 옵니까?
①삶이 즐거워집니다. 롬5:11절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화해의 결과는 기쁨입니다. 그래서 불신자들은 화해하고 나면 화해술이라면서 한잔씩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불화는 불안하고 초조했던 관계가 청산되면 술잔에 비교할 수 없는 마음에 평화가 솟아납니다.
요14:27절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여러분! 이 평안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이 기쁨과 평안을 돈이나 권력이나 세상 조건으로 살 수 없는 그런 기쁨입니다. 이 기쁨을 하나님 안에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할/
②하나님께 마음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엡2:18절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높은 분의 눈 밖에 나면 만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용서 받고 만나 줄 테니 들어오라고 하면 그때 들어가서 만날 수 있습니다. 아무 때나 수시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은 보통 특권이 아니라 특권층에 특권입니다. 이렇게 거듭난 자들은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요일5:4절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할/

 

9. 새로운 피조물의 사명은 무엇입니까?

 

18절 아래에 보면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다'고 했고, 19절에서는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다'고 했습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①'계속하여 화목하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거역하거나 그 뜻을 거스리는 것은 다시 불화를 조성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회개가 따라야 합니다. 정월 초하룻날 모욕했다고 해서 일 년 내내 그 몸이 깨끗한 것은 아닙니다. 날마다 씻어야 합니다. 회개도 마찬가지입니다. 회개의 생활화! 그렇습니다.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중요하지만 그 신앙을 생활화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또한 하나님과의 화목도 중요하지만 이웃과의 화목도 정말 중요합니다.
마5:23-24절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한 마디로 말하면 사람과 불화한 관계에 있는 사람과는 하나님께서도 그를 상대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제사를 통해야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인데 하나님께서 예물을 받지 않으신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교제를 하지 않으시겠다는 것입니다. 땅에서 풀어야 하늘에서도 풀린다는 것입니다.
②'화목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내가 새로운 피조물이 된 사건은 내가 예수 믿고 마음에 평화를 얻게 된 기적을, 내가 하나님과 화목하고 나서 변화라고 새롭게 된 모습을 다른 사람에게 가르쳐 주고 전해주라는 것입니다. /할/
사마리아 수가성에 살고 있던 어떤 죄 많은 여자가 우물가에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가 예수님과 말하는 동안 그녀의 영혼 속에 구원의 은혜가 임하고, 평안이 임했습니다.
사실 그 여인은 그 동네에서 지탄을 받을 만한 그런 부끄러운 여자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눈을 피하여 대낮에 물을 길러 나온 여자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사정이 달라졌습니다. 예수를 만나고 구원의 은혜를 받고 보니 기쁨과 평강이 샘솟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녀는 동네에 뛰어 들어가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메시아를 만났다. 내가 구세주를 만났다. 내가 새 사람이 되었노라! 당신들도 나와서 내가 만난 예수를 만나 보라'
창녀라고 지탄받은 이 여인이 사마리아성의 일대 부흥의 불을 일으킨 전도 부인이 되었습니다. 은혜를 받으면 이런 용기가 나오고 사명이 나옵니다.
여리고 성에 삭개오를 보세요! 예수를, 만나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그의 인격이 새로워졌습니다. 그는 자기가 토색한 물건에 4배나 갚아 주고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일에 전 재산을 털었습니다. 그가 예수를 만나 어떤 사람이 되었습니까? 오늘 주제인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할/ 우리도 이 소식! 화목의 기쁜 소식! 새로운 피조물이 움트는 이 복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나를 보라가 아니고 내 안에 계신 예수를 보라! 내 속에서 나를 새롭게 하시는 예수를 보라!' 이 복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아멘!/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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