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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인 명설교편◑/옥한음목사 설교(66편)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눅6:20

by 【고동엽】 2022. 2. 8.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눅6:20

 

요즘처럼 경제가 어려운 때는, <가난하므로 누리는 천국>을 체험할

절호의 기회입니다...   당신은 부자일 때보다,

어려운 지금, 얼마든지 더 행복하게 천국을 누리며 살 수 있습니다.

 

아래 설교문을 읽고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는 예수님 말씀을

진짜 믿게 되었습니다. 2천년이나 지나도, 틀린 말씀이 아니었군요...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듣기에 매력 없는 말씀

현대인들이 제일 듣기 싫어하는 말 가운데 하나가 ‘가난’이라는 말입니다.

어느 유명한 사상가가 이렇게 외치는 것을 들었습니다.

'가난해지지 않도록 결심하십시오. 가난은 행복의 적입니다.'

이 한 마디가, 현대인들의 그 마음 속 생각을 잘 대변해 주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가난은 악인 것 같습니다. 사람들을 비참하게 만들고,

온갖 사회악을 키우는 온상이 되는 경우를 많이 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가난’이라는 용어를 서슴지 않고 사용하고 계십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누가복음에서는 심령이라는 말을 빼고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런 말씀은, 돈이나 부나 향락을 우상처럼 섬기고 사는 현대인들에게는

정말 매력 없는 말씀처럼 들릴 것입니다.

 

▲원어적 의미는 ‘찢어지는 가난’

더욱이 '가난'(프토코스)이라는 단어의 원래 의미를 알게 되면,

더더욱 ‘가난이 복’이 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말은, 재물을 적당히 가지고 살면서 약간 아쉽게 느낄 정도의 가난이 아닙니다.

사람들에게 굽실거리면서 동냥을 하는 거지의 형편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부잣집 대문 밖에서 일평생 구걸하면서 살다가 간 나사로와 같은 

가난을 일컬어서 '프토코스'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그런 ‘찢어지는 가난’이 무슨 <복>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상식적으로는 저주스러운 것이지요.

 

천만 원짜리 밍크코트에 붙어있던 정가표만을 떼어다가

십만 원짜리 티셔츠에 옮겨 붙였다고 해서

티셔츠가 밍크코트가 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가난은 가난이고, 부한 것은 부한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이 우리가 공감할 수 있도록 말씀하려고 하셨다면

'심령이 부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하셔야 했습니다.

눅6:20에서는, '부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말씀하셔야 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이 말씀을 접할 때의 느낌이고 반응입니다.

우리는 가난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진리 앞에서 인간적 선입견을 제거합시다.

그러나 오늘 이 시간 우리가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권세를 가지고 선언하시는 진리라는 사실입니다.

성경말씀은, 무지함과 어두움에 쌓여 있는 인간들에게... 절대 진리입니다.

 

▲마5:3절과 달리, 누가복음에는 ‘심령이’라는 말이 빠져 있습니다.

틀림없이 이 본문은 영적으로 가난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돈이 없는 빈자(貧者)들을 가리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을 들으면 마치 ‘가난이 복’이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가난한 자가 천국을 소유할 수 있다고 말씀하는 것 같습니다.

거꾸로 뒤집으면 부(副)는 복이 아니고 저주요,

부자는 천국과 거리가 멀다고 하는 말씀을 이면에 깔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누가복음의 이 구절에 대하여 많은 학자들이

이것은 ‘물질적 가난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해석하려는 분들이 있습니다.

사람의 상식과 본능은 가난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해석할 때도 자꾸 그런 식으로 하려고 드는 것입니다.

 

물론 그들의 생각에도 일리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가난을 선(善)이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가난을 미화하거나, 가난을 구원 받는 공로로 말씀하신 일도 없습니다.

가난한 자를 의롭다고 아부하신 일도 없습니다.

 

또한 부자들을 의롭지 못하다고 면전박대를 하신 일도 없습니다.

가난을 선이라고 하고, 부를 악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 자신은 금욕주의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가난한 자들을 사랑하신 예수님

우리 예수님은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부자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오셨다는 성경 구절은 하나도 없습니다.

산상수훈을 듣기 위해서 지금 구름 떼와 같이 예수님 앞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이 가난한 자들이었습니다.

 

우선 예수님의 제자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예수님을 따라가기 위해서 가지고 있는 것을 다 버리지 않았습니까?

집도 버리고, 재산도 버리고, 가정도 버리고, 직업도 버리고, 다 내 버려서

빈털터리가 되어 주님을 따라가는 가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세상(죄)보다 무서운 가난

현대인들이 제일 두려워하는 것이 <가난>입니다.

 

미국도 그렇고, 한국도 그렇고, 다른 나라도 그렇고...

일부 큰 교회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목회자들은 가난합니다.

세계 모든 나라가 공통적입니다.

 

자본주의 시대를 살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난을 매우 두려워하고 싫어합니다.

 

가난이 마귀보다 더 싫고, 가난을 죄보다도 더 두려워합니다.

그 결과 대부분 사람들은

죄를 짓더라도

가난을 벗어나고, 돈을 벌려고 합니다.

 

세상보다 가난이 더 무섭기 때문에

사람들은 세상을 택하는 것입니다.

 

종교개혁 이전까지, 중세시대까지만 해도, 상인들을 아주 무시했습니다.

그들을 (마치 세리 같이) 죄인 취급했습니다.

상인들이 속이지 않고, 정직하게 해서는... 여간해서 돈을 벌기 어렵거든요.

물론 박리다매로 부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만,

상인들은 항상 ‘속임의 유혹’에 노출되어 있었습니다.

 

또한 물건을 가급적 싸게 팔고, 임금은 가급적 후하게 쳐서 주고,

원자재는 가급적 좋은 것을 가져다 쓰고, 저울추를 정확하게 한 다면

상인이 부자 되기 쉽지 않은 면이 있습니다.

 

▲그래서 경건을 위해 가난을 택한 사람들

예수님 당시에 경건한 사람들 중에, 차라리 가난하게 살면서

하나님과 더 깊은 영교를 맺는 의인이 되기로 결심한 분들이 있었습니다.

요셉, 나사로, 사가랴, 예수님이 세상에 오실 때 영접했던 소수의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다 그랬습니다. 다 가난한 자들입니다.

 

그리고 예수님 앞에 나온 많은 사람들 중에는

태어날 때부터 천한 집안에 태어나서 평생 뼈가 부서지도록 일을 해도

가난을 벗어 날 수 없는 팔자를 타고난 사람들이 수두룩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가난한 사람들은 안중에 두지 않고

영적으로 가난한 것만 말씀하셨다고 본다면

성경을 잘못 해석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실제로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가난한 자가 믿음에 더 부요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가난한 자는 부자보다도 예수님을 쉽게 믿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현실입니다.

 

일본에 갈 때마다 일본 목사님들이 저더러

‘한국교회가 어떻게 그렇게 부흥하고 성장하는가?’ 자꾸 묻습니다.

‘일본교회는 왜 이처럼 부흥이 안 되는가?’ 하고 탄식합니다.

 

지난 여름(1999)에도 그런 질문을 받고 나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한국교회가 부흥하는 이유는 그 배후에 가난이 있었기 때문에,

그 배후에 고통이 있었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정확한 대답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가난한 자는 예수님을 믿기가 쉽습니다.

지금도 교회 안에는 가난한 사람이 훨씬 많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과거에 귀족집에 태어나 어려서부터 돈 걱정 하지 않고

원하는 공부를 다 할 수 있었더라면 예수 안 믿었을 것입니다.

목사가 안 되었을 것입니다. 저는 가난 때문에 예수 믿은 사람입니다.

 

만약 가난 때문에 내가 예수 믿었다면,

이 가난만큼 나를 팔자 좋은 사람으로 만든 조건이 어디 있습니까?

마19:23~24절에서는 예수님이 노골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여기서 부자가 영적인 부자입니까? 아닙니다.

실제로 돈을 많이 가지고 있는 부자를 말합니다.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여러분, 저처럼 가난해서 예수 믿게 된 분들이 계시다면..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동시에 가난한 자는 부자보다 마음을 쉽게 비울 수가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은 심령의 가난을 쉽게 가질 수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 앞에 들고 나올 게 없지 않습니까? 잘 났다고 할 거리도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심령이 가난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가난 때문에 실제로 어렵게 사는 사람들은

예수를 믿어도 생명을 걸고 믿습니다. 예수 믿는 생활이 교양이 아닙니다.

생존에 관계되는 문제입니다. 예수님이 없으면 살 수 없습니다.

 

세상에서도 이렇게 고생하며 서글프게 사는데

예수까지 믿지 못해서 구원 받지 못한다면 억울해서 어떻게 삽니까?

그렇기 때문에 예수 믿는 것을 생사의 문제로 생각하고 달려듭니다.

그렇다면 그 가난은 복이 아니겠습니까?

 

마음을 비우면 주님이 그 마음에 임재하셔서 다스리십니다.

자비로우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넉넉하지 못해 늘 얼굴에 주름살이 지고,

어떤 때는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쉬는 그 심령을 포근히 안아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이 모르는 행복이 가슴에 있습니다.

 

 

◑가난하지만 천국을 누리며 살기

 

▲가난한 가정에 임한 천국

우리 교회에 남편과 딸 애 하고 셋이서 15평짜리 아파트에 사는 어느 부인이

교회 신문에 쓴 간증입니다. (1994년)

그 가정이 10여년 정도 사용하던 냉장고가 이제는 도무지 더 쓸 수 없어서

조금 큰 것으로 교체했는데, 그 냉장고를 들여 놓으니 집안이 가득합니다.

 

게다가 부인이 피아노 레슨을 조금씩 하기 때문에

자그마한 그랜드 피아노가 한 대 있습니다. 집안에 들어가면 숨이 막힙니다.

책상 하나 놓을 자리가 없어서, 밥상을 필요할 때는 펴 놓고 쓰다가

다 쓴 후에는 접어 두고 사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부인이 이런 간증을 했습니다.

'감사하신 하나님 아버지 아무 것도 없을지라도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쁘게 노래했던 하박국 선지자처럼,

이 좁은 공간에서도 끊이지 않는 웃음을 허락하시니 감사합니다.

 

비록 지위와 명예와 부가 없을지라도,

잠잘 때 코끝이 시려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잘지라도,

제게 믿음 주시고 하나님을 믿는 남편과

건강하고 기도 잘하는 딸 주셨음을 감사합니다.

평생 지금의 마음을 잃지 않게 하옵소서.

이곳은 아버지가 함께 하시기에 바로 천국입니다.'

 

가난하다고 다 불행한 줄 아십니까?

돈이 없어서 아이들 학비도 제대로 못 주고 밤새 그저 눈물을 흘리고 있다고 해서

그 사람이 처량한 줄 아십니까? 그렇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모시고 사는 사람은 겉으로는 울지 모르지만

속은 다릅니다.

이 정도의 깊이 있고 차원 높은 행복을 누리고 있습니다.

 

▲며칠 전에 아내와 함께 저는 30년 전에 살던 아파트를 30년 만에 가 보았습니다.

그 때 제가 서울 시내에 있는 어느 교회 부교역자로 있었는데

교회 사택이라고 주는 것이 그렇게 좁은 아파트였습니다.

고작 8평 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화장실이 들어갈 자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화장실은 공동 화장실을 사용합니다.

 

30년 만에 그곳을 찾아가면서 아내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혹시 아파트가 재건축되지는 않았을까? 그대로 있었으면 좋겠는데.'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진짜 그대로 있는 것입니다.

30년 전의 여닫이 현관문이 많이 낡기는 했지만 그대로 있었습니다.

그래서 참 감개무량했습니다.

 

저희가 살았던 4층 505호실을 찾아 갔습니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연탄을 때던 집이 도시 가스로 바뀌었다는 것뿐이었습니다.

창문이 열려 있어서, 안을 들여다보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저는 아내에게 이런 곳에도 행복은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 당시에 우리는 행복했기 때문입니다.

아침이면 줄을 서서 기다리던 공동 화장실에도 가보았습니다.

'그 때는 여기서도, 이런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살았지.'

하며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그 아파트를 들어갔다가 나오면서 저는 몇 번이고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진정한 행복은 겉으로 보기에 화려한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행복은 내 속에 있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이 이 행복을 우리에게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마음만 비우면 천국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예수님이 다스리도록 내 마음을 내어 놓기만 하면 거기에 행복이 있습니다.

돈 하고 관계가 없습니다.

 

▲행복은 ‘부’와 아무 상관 없습니다.

로버트 우스터 교수가 발표한 자료를 언젠가 한번 소개한 것 같습니다.

그가 아주 중요한 데이터를 제공했습니다. 전 세계 54개국을 대상으로

어느 나라 사람들이 가장 행복을 느끼는지 행복지수를 조사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제일 못 사는 나라,

제일 천재지변이 많은 나라, 방글라데시 사람들이 1위였습니다.

그들이 제일 행복하다고 고백했습니다. 예상을 완전히 뒤엎는 결과였습니다.

 

그러면 54개국 중에서 미국은 몇 번째인지 아십니까? 46번째입니다.

한국은 23번째입니다. 이 자료는 잘 사는 것과 행복하다고 느끼는 것은

다르다는 것을 입증해 주고 있습니다.

 

(방글라데시 등 최빈국이 1위 조사는 과장이 아니라 정확한 사실입니다.

사실 인간 행복지수의 80%는 가족유대관계에서 오는 행복이라고 합니다.

빈국일수록, 가족간 유대관계가 돈독하고 끈끈합니다. 그래서 저들은 행복합니다.

한국에도, 부자보다는 가난한 집이 가족간, 형제간 우애가 더 뜨겁습니다.

그래서 한국도, 가난한 집이 상대적으로 부잣집보다 더 행복하다는 말도 됩니다.)

 

그런데 이 우스터 교수가 내린 결론이 중요합니다.

'선진국의 경우 물질적 포만도가 일정수준을 지나면

소득상승이 더 이상 행복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

 

쉽게 이야기 하면 이렇습니다.

잘 사는 나라 사람들은 적당한 수준의 부를 갖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그 수준 이상으로 돈을 벌어도, 재물을 쌓아도

행복하고는 관계가 별로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50평 집에서 살던 사람이 120평 집을 사서 옮기면

며칠 동안은 기분이 좋을지는 모르지만

그것이 행복하고는 전혀 관계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미 어떤 수준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그 이상은 행복하고는 아무 영향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스터 교수의 말 중에 또 하나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후진국에서 가난하게 사는 사람들의 경우는 소폭의 소득증가에도,

조금만 생활이 나아져도 그것이 삶의 질에 큰 영향을 미친다.'

 

20만원 밖에 월급을 못 타던 아빠가 회사가 잘 되어 30만원을 받아 왔습니다.

그러면 그 10만원 때문에 그렇게 행복해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방글라데시 사람이 더 행복을 많이 느끼는 것입니다.

 

▲차라리 가난한 자가 행복합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속지 마십시오. 예수님의 말씀이고, 예수님의 진리입니다.

속지 마십시오. 부자가 행복한 것 아닙니다.

차라리 가난한 자가 행복하다는 것을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행복하고 아무 관계도 없는,

오히려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데 장애가 되는 부를 쌓아 놓고 계시다면

하나님 앞에 내 놓고 놓으십시오. 이 세상 떠날 때 가지고 갈 것 아니지 않습니까?

그 대신 여러분의 마음에 천국을 소유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행복을 소유하시기를 바랍니다.

 

돈은 좋은 것이지만, 이상하게 사람을 갈라 놓는 속성이 있습니다.

부잣집은 형제간이 갈라지고, 부부가 갈라지고, 심지어 부자지간까지 갈라집니다.

결국은 하나님과도 갈라지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부자가 천국을 누리려면, 끊임없이 '가난하게 살려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2000.02.20. 설교 스크랩, 정리 *원제목 : 마음을 비울 때 천국이 임한다.

 

  

▲냉장고 비우기

제가 아는 어떤 집은 <냉장고 비우기>를 한답니다.

세상에 하루 3끼를 다 못 먹는 사람들이 수 십 억이라는데,

자기들은 냉장고 안에서 먹지 않고 오래 보관하니까

식재료가 결국 썩어서 내 버리는 것이 죄송하답니다.

 

그러니까 냉장고 안에 들은 음식을 다 먹어서, 냉장고가 텅텅 빌 때까지

절대로 장보러 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냉장고가 텅텅 빌 때까지 기다린답니다.

(실제로 빈국에 가 보면, 텅 빈 냉장고를 가진 집이 꽤 많습니다.)

그래서 냉장고 안에 남은 음식은, 먹기 싫은 것이라도 악착같이 챙겨 먹는다고 합니다.

 

그들은 수퍼에서 장을 보고 나면,

쇼핑 리스트(영수증)를 냉장고 전면에 자석으로 눌러둡니다.

그래서 먹은 음식 리스트를 지워 나가면서,

냉장고 안에 든 음식물 내용을 한 눈에 파악한답니다.

 

그러면 장 보는 비용 절약, 장 보는 시간 절약,

그리고 낭비하는 못된 습관도 고치고,

더욱이 그렇게 절약한 비용을, 빈자들과 나누는데서 더 큰 기쁨을 얻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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