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은 능력입니다! (롬 1:16-17)
우리나라의 독립운동가요, YMCA의 운동을 일으켰던 월남 이상재 선생님에 관한 일화입니다. 그는 일제의 무수한 협박과 핍박에도 굴하지 않고 담대하게 독립운동을 펼쳤습니다. 그러자 조선총독부가 작전을 바꿔서 그를 돈으로 매수해 보려고 했습니다. 하루는 총독부가 보낸 한 청년이 돈 뭉치를 들고 이상재 선생을 찾아와서 선생 앞에 돈 뭉치를 건네면서 하는 말이 '선생님! 이 정도의 돈이면 남은 여생을 편안히 보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어디 시골에나 가서 조용하게 사시면 어떻겠습니까?' 그러자 이상재 선생은 그 청년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이 사람아, 나는 돈으로 사는 사람이 아닐세. 그러니 나를 돈으로 매수하려는 생각은 버리게' 그러자 청년은 선생을 겁내 줄 생각으로 넌지시 이렇게 물었습니다. '선생님, 제가 한 가지 묻겠습니다. 인도의 간디나 영국의 처칠은 100세를 산다고 장담하고 있습니다. 선생님은 얼마나 더 사실 것 같습니까?'
쉽게 말하면 '좋게 말해서 들어먹으라는 으름장'입니다. 그러자 선생은 대뜸 말하기를 '이 사람아! 사람이 한번 태어났으면 죽지를 말아야지, 죽기는 왜 죽어? 나는 죽지 않고 영원히 살 거야' 이 청년이 그 대답을 듣고 기가 막혔습니다. '선생님, 불로초까지 먹었던 진시황도 결국은 죽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어떻게 죽지 않고 영원히 살겠다고 장담합니까? 무슨 불사약이라도 드셨습니까?'
선생이 대답을 합니다. '그럼, 먹었지! 나는 너희 천황도 먹지 못했던 불사약을 먹었지. 그래서 나는 죽지 않고 영원히 살 걸세. 나는 살아서 너희 나라 일본이 망하고 군국주의가 망하는 것을 내 눈으로 똑똑히 보고 말 것 거야' 청년은 웃긴다는 듯이 '세상에 그런 약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때 이상재 선생은 옆에 놓여 있는 성경을 손에 쥐고서는 말하기를 '이것이 바로 그 약일세. 이것은 신약과 구약으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일세.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날마다 먹기 때문에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사람이 되었네. 그러니 그까짓 돈으로 나를 매수하려고 두 번 다시 찾아오지 말게' 그러면서 그 청년을 쫓아내 버렸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복음이 능력입니다. /할/
▶옛날이야기입니다. 고양이가 새끼를 낳았습니다. 너무 대견스러웠고 귀여웠고 잘 생겼습니다. 그래서 고양이의 어머니가 그 새끼고양이를 세상에서 가장 힘이 센 고양이로 키우고 싶어서 강한 이름을 짓기 위해 이 세상에서 가장 힘이 센 것이 무엇인가를 찾아보았습니다.
'아무래도 호랑이가 힘이 세겠지' 그래서 '호랑이 고양이'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우연히 보니 호랑이가 포수에게 쫓겨서 도망을 가고 있었습니다. '아니다. 포수가 호랑이보다 힘이 더 센가 보다.' 그래서 '포수 고양이'라고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지나가다 보니까 포수가 밥을 먹지 못하고 비실비실 됩니다. 고양이는 다시 생각하기를 '아. 곡식이 더 포수보다 힘이 더 센가 보다'고 생각해서 '곡식 고양이'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그런데 곡식은 하늘에서 비가 오지 않자 자라지도 못하고 열매도 맺지 못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비 고양이'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그런데 비는 구름이 없으면 헛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구름 고양이'라 지었습니다. 그리고 구름을 보니까 바람에게 이리저리 쫓겨다니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이름을 '바람 고양이'로 바꾸었습니다. 그런데 바람은 벽이 있으면 꼼짝 못 하는 것이어서 '벽 고양이'라고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한참 지났습니다. 어느 날 보니 벽이 다 허물어져 이 곳 저 곳에 구멍이 나 있었는데 쥐들이 벽에 구멍을 내고 허물어지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러니까 그 벽을 쥐가 무너뜨린 것입니다. 그래서 어미 고양이가 중얼거리기를 '벽보다 쥐가 더 힘이 세구나!' 그래서 '쥐 고양이'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그때부터 쥐는 고양이한테 꼼짝도 못했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고양이 새끼 이름을 '고양이'라고 지었다고 합니다. /믿거나 말거나/ 그렇습니다. 사람도 짐승도 모두 힘을 원합니다.
그런데 이 세상의 모든 힘은 상대적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가장 큰 힘이 무엇이겠는가? 복음입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누가 전능 자이신 하나님을 이길 수 있습니까?
▶유난히 힘이 센 장사 개미가 있었습니다. 다른 개미들은 쌀 한 톨을 겨우 드는데 이 개미는 두 톨씩도 거뜬히 들었습니다. 많은 개미들이 이 힘센 개미를 우러러 보았습니다. 기고만장해진 개미는 이 세상에 무서운 것이 없었고, 못할 것이 없다고 생각하여 넓은 세상에 나가 자신의 힘을 자랑하고 싶어졌습니다.
힘센 개미는 사람들이 많은 시장으로 찾아가서 힘 자랑을 했습니다. 쌀 두 톨을 들어 올리기도 하고 집어던지기도 하며 괴력을 발휘했지만 누구하나 개미를 봐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철없는 어린아이 발에 밟혀 죽고 말았답니다.
돈이 많은 사람은 돈으로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식이 많은 사람은 그 지식의 힘으로 못할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권세가 있는 사람은 그 권세의 힘을 과신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인간은 개미 한 마리에 불과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가진 힘이란 겨우 쌀 두 톨 드는 힘밖에 안됩니다. 그런데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 저 어리석은 개미 같은 무모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하나님이 어디 있어?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 그런데 여러분, 나가 보세요. 하늘과 땅 온 세상에 하나님으로 충만해 있습니다. /믿으십니까?/ 여기까지 눈을 떠야 합니다. /아멘!/ ◀제목 소개!▶
저는 무능하고, 부족한 사람이지만 복음을 전한다는 사실 하나 때문에 어떤 때는 위대하게도 생각이 되고 굉장한 능력을 가진 사람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행복합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는 복음의 능력으로 오늘 이 자리에서 하나님을 경배하고 있습니다. /할/
우리가 능력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공부도 하고, 돈도 벌고, 체력도 단련하고, 출세도 하려고 합니다. 공부하면 실력이 있습니다. 돈 벌면 금력이 생깁니다. 그런데 그 힘 중에서 가장 큰 힘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서 자기 인생의 운명이 결정됩니다. 돈의 힘을 의지하는 사람은 돈을 벌 것이고, 실력을 힘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공부를 많이 할 것입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권력도 지식도 물질도 체력도 상대적인 것이고 순간적인 것이고 찰나적인 것이지 영원한 힘이 못됩니다. 그러나 영원한 힘이 있습니다. 어떤 힘입니까? 하나님의 힘입니다. 다윗의 고백이 무엇인가?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합니다' /할/ 영원한 힘이 하나님께 있다고 믿는다면 그 힘의 원천이신 하나님을 잘 믿어야 합니다. /아멘!/
▶16절을 생각해 보자!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할/
①여기서 말하는 복음은 무엇입니까?
복된 소식, 기쁜 소식입니다. '유앙겔리온'이라는 말로 '유'는 '좋다.'는 말이고 '앙겔리아'는 '소식'이란 뜻입니다. 영어로 Gospel은 '좋은 이야기, 복된 이야기'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1945년 세계 2차 대전이 끝난 후에도 종전의 소식을 듣지 못하여 29년 동안 이나 필리핀 루방 섬 정글에 은신해서 짐승처럼 살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일본군 중위 '오노다 히루씨'입니다. 그는 일본군 장교로 22세 때 필리핀에 파견되어 29년이 지난 1974년 그의 나이 52세 때 발견되었습니다. 그는 전쟁이 끝났고 일본이 경제적 대국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그의 나이 52세 되기까지 깊은 동굴에 숨어 불행한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보다 더한 비극이 있습니다. 그것은 죄와 사망에서 자유케 하는 복음을 잘 알지 못하여 고통 당하는 사람들입니다. '전쟁은 끝이 났습니다. 예수가 이겼습니다. 우리는 이제 죄로부터 자유합니다.' 이 소식을 전하는 것이 복음입니다. 복음이 무엇입니까? 치열한 전투에서 이겼다는 '승전의 소식' 이것을 '유앙겔리온'입니다. /할/
②복음을 부끄러워하지 말라!
바울은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놀라운 선언을 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복음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긴다'는 말로서 강조 법이요, 반어법입니다.
이 말을 하고 있는 사도 바울이 누구입니까? 당대의 석학이요, 명문가 출신이며, 당당한 권세를 자랑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원래 사도 바울은 율법주의자로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한없이 부끄럽게 생각하던 사람입니다. 나사렛 목수의 아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이 그렇게도 부끄러웠습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죽이는 것을 자랑으로 알고 살아가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지금 이 내용이 로마 시민을 향해 외치는 서신이라는 데 있습니다. 로마 사람들은 무력으로 세계를 정복하려고 했습니다. 로마는 오직 힘만 통하는 국가였습니다. 그들에게는 강자만이 진리요, 승리하는 것만이 진리였습니다.
더구나 로마인들은 유대인을 몹시도 무시하고 멸시했습니다. 살인강도와 함께 무력하게 죽은 예수! 그분이 외치는 설교의 주제는 로마 시민들이 그렇게도 싫어하는 '겸손하라! 사랑하라! 회개하라!'였습니다.
바로 이러한 로마를 향하여 그들과 함께 복음을 부끄러워하던 사도 바울이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지금 선전 포고를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유앙겔리온'은 '승전의 소식이 로마에 있는 것이 아니고 나사렛 예수 그분의 복음 안에 있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로마인들이여, 너희들이 말하는 힘, 능력이 무엇인가? 진정한 능력은 복음 안에 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의 외침입니다. /할/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이 한마디는 엄청난 선언이었습니다. 로마가 힘의 상징이 아니라 복음이 힘의 상징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③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여기서 '능력'이라는 말로 '뒤나 미스'인데 이 말은 '다이너마이트'와 같은 폭탄과 같다'는 말입니다. 즉 반석이라도 폭발시켜 산산조각을 내는 엄청난 힘, 즉 초자연적인 능력을 의미합니다. 다이너마이트는 산도 부수고 바위도 타작하듯이 깨뜨려 버립니다. 주님께서 세상에 오시기 전에 수많은 위인과 성인과 철인들이 천성 가는 길을 뚫기 위해 온 힘을 기울였으나 그들의 수고는 헛수고였습니다. 성인 현인들의 수고는 호미 한 자루, 괭이질, 삽질 하나에 불과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십자가의 다이너마이트만이 천국 가는 고속도로를 건설하셨습니다. /믿/
원래 사도 바울은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을 죽이려고 다메섹으로 가던 도중에 부활의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비출 때 그는 땅에 엎드렸습니다. 그때 하늘로부터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어찌하여 네가 나를 핍박하느냐' '주여 뉘시오니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가 같이 가던 사람의 손에 이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 사흘 동안을 보지 못하고 식음을 전폐하고 있을 때 다메섹에 있는 아나니아라는 사람에게 주께서 환상 중에 나타나 사울을 찾아가라고 말합니다.
사도 바울이 아나니아라는 사람으로부터 안수를 받을 때 눈의 비늘이 벗겨지고 완전히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전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를 핍박하던 사람이 이제부터는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가 되었고, 남을 죽이려고 살기 등등하던 사람의 마음속에 예수의 사랑으로 충만해서 수많은 사람에게 사랑을 베푸는 위대한 사도가 되었습니다. 그것을 사도 바울은 복음의 능력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체험의 종교입니다. 체험한 자만이 이런 고백을 드릴 수 있습니다. /아멘!/ 사람의 능력은 제한된 것이고 유한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은 무한합니다.
당시에 세계는 로마의 권력아래 있었습니다. 로마의 무력이 약소국가들을 침략하고, 강탈하여 노예로 삼고 있었기 때문에 그 힘은 무서운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거기에 선전포고를 합니다. '너희는 무력과 권력으로 세계를 제패하지만 나는 하나님의 힘을 가지고 로마에 간다. 그 힘은 곧 복음의 능력이다. 사람을 구원시키는 능력이다.' 이렇게 선포합니다. /할/ 그러니까 '이 복음의 폭탄이 떨어지면 로마라고 하는 도시가 무너진다.'라는 무언의 선전포고입니다. /할/
▶원래 다이너마이트는 1866년 노벨이라는 사람이 만들었습니다. 그것을 발명함으로 그는 거부가 되었고 위대한 발명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유명해지던 어느 날 신문을 펼쳐보니까 이런 기사가 쓰여 있었습니다. '알프레드 노벨 죽다. 다이너마이트 왕 죽음의 사업가 파괴의 발명자가 죽다.'
노벨이 살아있는데 이 기사가 신문에 나온 것입니다. 알고 보니까 동명이인이 죽은 것을 기자가 잘 모르고 그렇게 '알프레드 노벨'이 죽은 것으로 썼던 것입니다.
그때 그는 이런 생각을 합니다. '내가 죽는 날 나는 죽음의 사업가요, 파괴의 발명자가 된단 말인가? 내가 이렇게 인생을 끝내서는 안 되지' 이런 생각을 갖고는 거대한 재산을 바쳐서 인류 문화를 살려내고 인류를 살려내는 일에 공헌한 사람에 대하여 시상하는 노벨상을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노벨 의학상, 문학상, 평화상을 만들어서 세계 인류를 살려내는 일을 하는 사람에게 시상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전 세계 노벨상을 받는 사람들 대부분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인만이 살려내는 일에 생명을 걸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정신입니다.
로마의 시저, 나폴레옹, 히틀러 이런 사람들은 모두 죽음의 파괴자들이었습니다. 무서운 무기의 폭약을 가지고 수많은 도시를 무너뜨리고 전쟁을 일으켜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는 복음을 가지고 인류를 살려놓습니다. 가정을 살려놓습니다. 국가를 살려놓습니다. 우리를 살려놓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능력입니다. /할/
④복음은 사람을 살리는 구원의 능력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전해야 합니다.
구원은 하나님이 주신다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내가 노력해서 얻는 것이 아닙니다. 내 공로, 내 자격으로 얻은 것이 아닙니다. 내 선행을 쌓아서 얻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선물은 자기 돈으로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남이 사서 나에게 주는 것이기에 공짜입니다. 그렇다면 구원이 무엇입니까? 구원을 어렵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구원은 지옥 가는 인생을 천국으로 끌어올리는 것입니다. 건져 내는 것입니다. 어디서? 실패에서, 질병에서, 죽음에서 건져내는 것이 구원입니다. /믿/
인간의 어떤 철학이나 사상이나 지식도 사람을 살려내지 못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죄인들을 살려냅니다. 죄로 말미암아 죽은 인간들을 살려냅니다. 우리는 죄로 말미암아 죽은 자들입니다. 우리는 죄와 허물로 죽은 자들입니다. 그런 우리들을 살려놓는 힘이 복음입니다. /아멘!/ 그렇습니다. 이 구원의 복음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주실 수 있다고 본문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복음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복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구원하셨다는 소식이 복음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속죄함을 얻습니다. 죄 용서함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이 선포가 바로 복음입니다. /할/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하셨고, 행4:12절에서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느니라." /할/
'예수 믿으시오' 이 한마디가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내 입에서 일단 나가면 그 말은 총알과 같은 것이요, 폭탄과 같은 것입니다. 입 속에 있을 때는 아무 능력이 없습니다. 마치 탄피 속에 있는 폭약과 같이 아무 힘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한번 터져 나가면 수많은 사람들을 살리고 언덕을 무너뜨리고 파괴의 능력을 갖는 것처럼 내 입 속에 있는 폭약과 같은 '예수 믿으시오'라는 말이 입 밖으로 나가 어떤 심령 속에 떨어지면 심령 속에 있는 죄악이 무너지고 마을에 떨어지면 마을 전체가 무너지며, 가문에 떨어지면 가문 전체가 변화되는 위대한 역사가 일어납니다. /믿/
▶전 연세대 총장이었던 백낙준 박사는 한국 교회사에서 유명한 인물입니다. 그 아버지는 점쟁이였습니다. 길거리에 앉아서 지나가는 사람들 관상을 봐주고 돈을 벌었습니다. 어느 날 길을 지나가던 한 집사가 백낙준의 아버지를 보고 한마디를 했습니다. '여보시오. 그런 짓 하다가 당신도 망하고 자식들도 망할 텐데 그 짓 빨리 그만두고 예수나 믿으시오' 그때 그는 눈을 흘기면서 '너나 잘 믿어라 재수 없게 왜 떠들고 가' 하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 날 밤잠을 자려고 누워있는데 그 집사님이 한마디 던진 말이 계속 귀에서 맴돕니다. '그런 짓 하다가 당신도 망하고 자식들도 망해' 잠을 자도 그 소리가 들립니다. 드디어 그는 그 모든 것을 다 청산해버리고 예수를 믿었는데 그 아들이 연세대 총장이 되었습니다. 지나가는 말 한마디로 그렇게 위대한 인물을 낳았습니다. 한국 교회사에서 위대한 인물들이 다 예수 믿은 사람들입니다. /할/ 지금 대통령이 장로님이십니다. /할/
사도 바울은 복음의 능력을 알았습니다. '이 폭탄이 로마에 떨어지면 로마는 무너진다. 로마의 제국이 무너지고 예수 왕국이 설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도 바울의 가슴속에 타올랐던 복음의 위력입니다. /아멘!/
우리 주님이 마25:32-40절에서 우리에게 당부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가 육신적으로 주린 자에게는 먹을 것을 주어라! 목마른 자에게 마실 것을 주어라! 헐벗은 자에게 입혀라! 나그네를 영접하고 병든 자를 돌아보고 옥에 갇힌 자를 찾아보아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있습니다.
'굶주린 자는 하나님의 말씀이 없어 굶주린 자'를 말합니다. 이 '굶주린 자에게 생명의 말씀을 주었느냐'는 것입니다. '헐벗은 자는 하나님의 영광의 옷을 버리고 죄인의 옷을 입은 자'인데 이 사람들에게 '의로운 옷'을 입혀야 됩니다. '목마른 자가 누구입니까?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목마른 자'들입니다. '돈을 벌어도 공허하고, 출세해도 만족하지 아니하고, 술로 살아가고 마약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공허하기 때문입니다. 이들에게 하나님의 생명수를 공급해서 저들의 심령 속에 하나님의 은혜로 만족시켜야 됩니다.
또 '나그네가 누구입니까?' 나그네는 '집 없이 방황하는 자가 나그네'입니다. 정처 없이 헤매는 자가 나그네입니다. 인생의 목적도 없이 방향도 없이 헤매는 자들, 수많은 불신자들이 다 나그네입니다. 이들을 다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해서 안식을 주어야 되며 목적을 바로 세워주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들에게 무엇을 주어야 합니까? 복음을 주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어야 합니다. /할/
옥에 갇힌 자가 누구입니까? 오늘날 현대인들은 포로가 되어 있습니다. 세상의 헛된 사상과 유혹과 헛된 정욕에 포로가 되어 자기 자신을 온전히 세우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들을 자유케 하는 능력을 주어야 합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이 복음이 저들에게 절대 필요합니다. 오늘날 병든 자가 누구입니까? '정신과 영혼과 심령이 병든 자'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없는 자는 다 병든 자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치유하는 능력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믿/
▶우리는 '빚진 자'의 의식을 가지고 살아야 전도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모든 사람들에게 '다 빚진 자'라고 자신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14절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나 우리가 다 복음에 빚진 자'라는 이 고백은 우리들 모두가 가져야 할 심정이요 고백이어야 합니다. /아멘!/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사랑에 빚진 자요, 용서에 빚진 자요, 은혜에 빚진 자요, 복음에 빚진 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 값없이 받았기 때문입니다. 빚을 지면 매인 자가 됩니다. 빚졌다는 말은 채무자란 말입니다. 빚진 죄인이란 말이 있습니다. 빚은 무섭습니다. 자고 일어나면 이자가 불어납니다. 저희도 죄인입니다. 빚은 꼭 갚아야만 합니다. 그래야 자유 함을 얻을 수 있습니다.
▶빚은 크게 세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⑴돈을 빌려 쓰는 경제적인 빚이 있고, ⑵인간관계에서 성립하는 사랑의 빚이 있고, ⑶주님과의 관계에서 비롯된 복음의 빚이 있습니다.
바울은 롬13:8절에서 '사랑의 빚 외에는 지지 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14절에서 바울은 '복음의 빚진 자'라고 했습니다. 빚이란 그것이 어떤 성격의 빚이든 간에 갚아야 하는 특성이 있습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복음에 빚진 자이기 때문에 복음의 빚을 갚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 번 더 주님을 위해 빚을 져야 합니다. 주를 위해 빚을 진자의 마음으로 다시 한 번 주의 몸 된 제단을 위해 헌신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복음을 어디까지 증거 해야 합니까? 땅 끝까지 복음을 증거 해야 합니다(행1:8).
⑤구원은 모든 믿는 자에게 주어지는 은총입니다.
14절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당시에 유대인이나 헬라인은 전 세계 인류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선민과 이방인' 이 사람들은 누구든지 다 복음이 필요합니다. 모든 자에게 필요한 이 복음을 우리가 저들에게 전해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15절에서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고 했습니다.
▶사도바울은 빚진 자의 심정으로 복음을 전하는 마음 자세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고전9:16절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
복음을 전할지라도 뭐할 것이 없다고 했습니까? 자랑할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빚진 사람이 자랑할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늘 수치스럽고 부끄러울 뿐이지요. 빚진 사람은 당연히 빚을 갚아야 합니다. 자랑할 것이 어디 있습니까? 그리고 빚진 자의 심정을 가진 사람들은 언제나 겸손합니다.
그런데 빚진 자의 심정이 없는 사람은 어떻습니까? 다른 사람 정죄하기를 잘합니다. 자기가 제일인 줄 압니다. 바리새인처럼 교만합니다. 그래서 칼로 무 자르듯이 남을 잘라냅니다. 빚진 자의 심정을 모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또 빚진 자의 심정은 어떠한 것입니까?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화가 있을 것임이라'고 했습니다. 빚진 사람이 빚을 갚지 않으면 책임추궁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빚을 갚아야 합니다.
여러분! 사도 바울에게 화가 미친다면 저와 여러분에게도 역시 화가 미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바울이 받은 복음을 우리도 받았습니다. 바울이 받아 누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도 지금 받아 누리고 있고, 바울이 받은 구원의 은혜를 우리도 역시 받아 누리고 있습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지 아니해서 그에게 화가 있다면 저와 여러분이 복음을 전하지 아니할 때도 역시 화가 우리에게 미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바울 사도의 이 복음의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교회의 주특기는 복음전도입니다. 성도의 장기는 복음전파입니다. 우리의 취미도 복음전도입니다. 교회의 초점은 불신자 전도입니다. /할/ 초대교회 성도들은 잃어버린 영혼을 얻고 교회를 확장하기 위한 열정으로 넘쳐났습니다. 오늘 우리가 회복해야 할 영성이 있다면 바로 복음전도의 영성이요 열정이요 야성입니다. /아멘!/
▶시골에서 농사를 짓던 중년 부부가 서울로 이사를 왔습니다. 이 부부가 시중에서 판매되고 있는 참기름을 먹어보고는 통탄을 했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가짜 참기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진짜 참깨로 참기름을 짜서 그것도 가짜 참기름과 같은 가격으로 팔았습니다. 소문이 나면 장사가 잘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결과는 정반대였습니다. 손님이 오지 않아 몇 달 후 가게문을 닫게 되었습니다. '그 집 참기름 맛이 이상하다고 소문이 났기'때문입니다. 오랜 동안 가짜 참기름을 먹고 살아온 사람들이 진짜 참기름 맛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이 참된 복음의 진리가 가짜 참기름과 같이 대접을 받고 있습니다. 너무도 오랜 동안 왜곡되고 빛 바랜 잘못된 가르침에 젖어서 참된 복음을 멀리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와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이야기하면 기독교를 너무 과격한 것으로 받아드립니다. 죄와 죽음과 심판과 지옥을 이야기하면 시대에 뒤진 설교자로 여깁니다. 그런 것말고 듣기 좋고 평안을 주며 위로하는 설교를 듣고 싶어합니다. 일주일 동안 세상에서 상처받고 당하며 살았는데 교회 와서는 좀 위로를 받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참 복음을 깨달으려면 죄와 죽음을 알아야 합니다. 십자가를 체험하려면 심판과 지옥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으려면 죄와 죽음과 심판과 지옥에 대해 들어야 합니다. /아멘!/
▶오래 전에 고재봉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육군 중령 일가족 4명을 도끼로 쳐죽인 무서운 살인자입니다. 그가 교도소에 들어오니까 그 옆에 아무도 접근하지 못합니다. 간수도 접근하지 못합니다. 누구든지 죄수들끼리 만나서 '나 고재봉이야' 하면 모든 죄수가 '형님' 했습니다. 사람 셋 죽인 사람도 '나 고재봉이야' 그러면 '형님' 하고 고개를 숙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소포 하나가 고재봉한데 왔습니다. 열어보니까 성경이 들어있었습니다. '재수 없다'고 성경을 던졌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화장실 휴지로 쓰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것을 뜯어 가지고 화장실에 가서 무슨 내용이 쓰여 있나 보다가 복음이 그 심령 속에 들어왔습니다. /할/
어느 날 한 감방 안에 시국사범으로 와 있던 이인수 대령이 보니까 눈에 살기가 빠졌는데 하루는 그르더랍니다. '대령님, 나 같은 사람도 하나님이 받아줄까요?' 이 말을 들은 이인수 대령이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 무슨 트집이나 잡힐까봐 아무 말도 못하고 가만히 있었습니다. 그런데 보니까 차츰 차츰 태도가 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형목'에게 '목사님, 저 사람 신상에 변화가 온 것 같으니 와서 확인 좀 해주시죠' 확인해보니 달라졌습니다. '목사님, 나 예수 믿으면 용서받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래서 그가 예수 믿고 영접해서 그때부터 전도를 하는데 2천명의 죄수 가운데 1800명이나 전도를 했답니다. 그가 전도하는 내용은 '이 앞길이 구만리 같은 놈들아 너희가 이렇게 살다가 갈 거냐? 이 감방에서 다시 나 같은 사람을 안 만나려면 너희들도 예수를 믿어야 한다' /할/ 그런 그가 마지막 죽으면서 한 말은 '내가 좀 더 일찍이 하나님을 알았다면 이렇게 악한 자가 되지 않았을 것을, 나에게 일찍 복음을 전해준 사람이 있었다면 이렇게 죽지는 않았을 텐데...'
그는 '하늘가는 밝은 길이' 이 찬송을 하면서 하나님께 갔습니다. 그렇습니다. 고재봉과 같은 악한 사람에게 복음이 들어가니 순한 인간으로 변화되었습니다. 감옥을 변화시켰습니다. /할/
▶17절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여기에 나오는 의는 믿음에서 오는 의입니다. 롬3:28절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그런데 우리가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닙니다. '십자가를 지는 일이요, 자기를 부인하는 삶'이 바로 우리의 신앙생활의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결단이 있어야 하고 행함이 있어야 산 믿음의 소유자가 될 수 있습니다.
①'버릴 것을 버리는 것'입니다. 버려야 얻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기독교의 가장 기본적인 진리입니다. 옛것을 버려야 합니다. 옛 생각, 옛 사상, 옛 습관, 옛 지식, 옛 악행 등, 신앙생활을 방해하는 것은 과감히 버려야 합니다.
엡4:22-24절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그렇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과감히, 얼마나 철저히 옛 것을 버리느냐'가 좋은 신앙에 관건입니다.
여러분! 지난 날 잘못된 것들은 과감히, 철저히 버리십시오. 미련을 갖지 마십시오. 잠간의 행복을 주었던 것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싫어하는 것이라면 버리십시오. 대부분의 성도들이 이 관문에서 패스하지 못합니다.
②'드릴 것을 드리는 것'입니다. 버리고 포기하는 수준을 넘어 드리는 것이 신앙입니다. 신앙 인은 예배를 드리는 사람입니다. 아무리 신앙이 좋은 것 같아도 예배를 드리지 않는 사람은 신앙 인이 아닙니다. 예배를 드린다고 해도 주께서 받지 않는 예배를 드린다면 그것도 신앙인의 모습은 아닙니다. 가인과 아벨은 모두 예배(제사)를 드렸습니다. 하지만 한 사람은 예배가 상달되었고, 한 사람은 상달되지 못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제물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의 문제입니다. 헌신이 있는 예배가 진정한 예배입니다.
가난한 과부는 두 렙돈을 드릴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세상을 예배정신으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도 향유 한 옥합을 깨뜨려 드렸습니다. 사도들은 일생을 주를 위해 헌신을 드렸습니다. 예수님은 온몸을 십자가에 던짐으로 우릴 위해 주셨습니다. 여러분! 무엇을 드렸습니까? 무엇을 드릴 것입니까?
③'순종할 것을 순종하는 것'입니다. 구약 성경은 특별히 '믿음'이란 말이 없습니다. '순종'이란 말만 있습니다. 그것은 '믿음은 곧 순종이라는 말'입니다.
삼상15:22절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믿음의 대부인 아브라함도 순종으로 그 믿음을 보인 사람입니다. 창26:5절 "이는 아브라함이 내 말을 순종하고 내 명령과 내 계명과 내 율례와 내 법도를 지켰음이니라 하시니라" 그 순종이 그를 복의 근원이 되게 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의심 없이 순종한 아브라함의 태도가 바로 의로 여겨졌다(롬4:22)고 말씀합니다.
▶순종은 훈련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작은 일에 충성했기 때문에 큰일을 맡긴다고 했습니다. 작은 일에서부터 순종하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작은 일에 자꾸 자꾸 순종하다 보면 큰일에도 순종하게 됩니다. /믿/
작은 일에 순종하지 못하는 사람은 큰일을 순종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어렸을 때 순종을 배워야 합니다. 순종체질이 되어야 합니다. '토레이' 박사는 '권능은 하나님께 속했는데 우리가 그 권능을 받은 데는 오직 한 가지 조건이 있다. 그것은 절대 순종'이라고 했습니다. /할/
④'기뻐하며 사는 삶'입니다. 성경에서 기쁨이라는 말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마소스'라는 말이고, 다른 하나는 '카라'라는 말입니다.
⑴'마소스'는 세상 적인 기쁨이요 일차적인 기쁨입니다. 일차원적인 기쁨은 세상 사람들이 기뻐하는 기쁨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많아야 기뻐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위로 올라가야 기뻐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좋아야 기뻐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즐거워야 기뻐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잘 되어야 기뻐합니다. 술을 먹어서 기쁩니다. 돈을 벌어서 기쁩니다. 출세하고 나니 기쁩니다. 이런 조건적인 기쁨을 '마소스'라고 합니다. 그런 기쁨은 언젠가는 그칠 수밖에 없는 기쁨입니다. 그래서 예레미아선지자가 말하기를 '우리 마음에 희락이 그쳤고 우리의 무도가 변하여 애통이 되었사오며'(애5;15)라고 했습니다.
세상 적인 기쁨은 조건적인 기쁨이기에 그 조건이 사라지면 그 기쁨도 사라지게 마련입니다. 돈을 벌어 기쁘면 돈이 사라지면 슬픈 것입니다. 술을 먹어서 기쁘다면 술에서 깨어나고 나면 다시 원상 복귀된다는 말입니다. 이런 기쁨은 일차원적인 기쁨입니다.
⑵2차원적인 기쁨이 있습니다. 세상 적인 기쁨이 아닌 '카라'의 기쁨입니다.
이 기쁨은 세상 적인 조건이 없는 기쁨입니다. '카라' 기쁨은 성령이 내 마음속에 임재하실 때에 주어지는 무조건적인 기쁨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롬14:17절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했습니다. /아멘!/
성령이 임할 때 임하는 기쁨은 차원이 다른 기쁨입니다. 기쁨의 근원은 하나님이십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먼저 기뻐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시고 기뻐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셨습니다.
▶배가 고팠습니다. 지갑을 꺼내니까 5천 원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배고파 쓰러진 거지가 앞에 보였습니다. 그는 5천 원으로 거지에게 밥을 사주었습니다. 맛있게 밥을 먹는 거지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배가 고파도 기뻐집니다. 이것이 '카라'의 기쁨입니다. 이 기쁨의 주인공들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그렇습니다.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어 놓고 행복을 느끼는 기쁨입니다. 다른 사람을 기쁘게 만들어 놓고 기쁨을 느끼는 기쁨이 '카라'의 기쁨입니다. 다른 사람을 즐겁게 해 주고 즐거워합니다. 다른 사람을 평안하게 만들어 놓고 평안을 느끼는 기쁨입니다. /할/
▶'원 브란트' 목사님은 시베리아 감옥으로 끌려가서 18년 동안 감옥살이를 했습니다. 밥도 조금 주고 물도 조금 주었습니다. 죽지 않을 정도로 주었습니다. 갇힌 자들이 모두 배고파하고 목말라했습니다. '원 브란트' 목사님은 같이 갇힌 자들에게 자기 밥에서 10분의 1을 떼어 나누어주면서 기뻐했습니다. 자기에게 준 물에서 10분의 1을 덜어 갇힌 자들에게 주면서 즐거워했습니다. 그래서 감옥 전체가 예수를 영접하게 되었다는 아름다운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카라'의 기쁨입니다. 이것이 성도의 기쁨입니다. 이것이 2차원적인 기쁨입니다. /아멘!/
▶아프리카 선교사 '폴 칼슨'이라는 의사는 아프리카 흑인들을 치료해 주면서 전도했습니다. 그런데 아프리카는 본래 의료 시설이 부족하여 의사가 왔다니까 구름 떼와 같이 몰려들었습니다. '폴 칼슨'은 도무지 쉴 시간이 없었습니다. 날마다 격무에 시달렸습니다. 피곤이 겹쳐서 고통을 받게 되었습니다.
어떤 이가 물었습니다. '피곤하지 않으십니까?' 이 때 그는 미소를 지으면서 말하기를 '나는 항상 환자들을 주님을 섬기는 마음으로 대하기 때문에 보람과 기쁨을 느끼기에 피곤을 전혀 느끼지 못 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만큼 보람된 일이 어디 있습니까? 전도하는 것만큼 큰 일이 어디 있습니까? 온 천하보다 귀한 생명을 살리고 천국으로 보내는 것보다 더 큰 기쁨이 어디 있습니까?' /할/
아이를 기르는 어머니는 어떤 고된 일이라도 그 일을 기쁨으로 감당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고통은 고통스럽지가 않고 즐겁게 느껴지는 법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사랑하며 고통을 받는 것도 우리에게는 기쁨이 됩니다. /할/
말씀의 결론은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하셨으니 믿음으로 사는 참 행복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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