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자료 18,185편 ◑/자료 16,731편

포도원에 들어가 일하라! (마 20:1-16)

by 【고동엽】 2022. 2. 8.

포도원에 들어가 일하라! (마 20:1-16)

 

사람이든 물건이든 짐승이든 필요할 때, 제자리에 있어야 아름답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은 모두 제자리가 있습니다. 제자리에 있을 때 아름다움이 있는 것입니다. 아름다움이란 바로 있어야 할 자리, 즉 자기의 위치에 있는 것입니다.
반대로 '있어야할 그 자리에 있지 못하고 자기 자리가 아닌 남의 자리, 다른 곳에 있을 때에는 눈에 거슬리게 되고, 아무리 아름다운 것일지라도 아름답기는커녕 오히려 추하게 되고 주위의 모든 분위기를 망가뜨리기'까지 합니다.
자기 자리에 있지 않은 것은 '잃어버렸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자기 자리에 있지 못한 사람들을 찾아오셨습니다. 곧 잃어버린 사람들을 찾아오신 것입니다. 자기 자리가 아닌 곳을 자기 자리인줄 알고 착각에 빠져 있거나 또 자기 자리가 아닌 것을 알면서도 어쩔 수가 없어서 그냥 눌러 앉아 체념해하는 사람들을 찾아오신 것입니다.
첫 사람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했을 때, 하나님은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하고 찾아오셨을 때, 그들은 제자리에 있지 못했습니다. 여기서 '제자리'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자리'인데 아담은 그 자리에 있지 아니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부르실 때에 제자리에 있는 사람들을 쓰셨습니다.
모세도, 사무엘도, 이사야도 다 제 자리에 있을 때 쓰임을 받았습니다. 하루는 하나님이 아들 이삭과 행복한 생활을 하고 있는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다. 부르신 이유는 그가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하는가를 시험해 보기 위해서입니다. 그때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제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순종했습니다. '제가 여기 있다.'는 말은 '제자리에 있다.'는 말입니다. 가정의 아름다움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모두가 자기 자리를 지켜나가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아버지의 자리를, 어머니는 어머니의 자리를, 자식은 자식의 자리를 지킬 때 그 가족은 화목하고 웃음의 꽃이 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할 때 그 가정의 화목과 신뢰는 깨어지게 됩니다. 국가도 마찬가지입니다. 군인은 군인의 자리를 지켜야 합니다. 학생은 학생의 자리에, 노동자, 정치인, 모두가 자기 자리를 지켜야 그 국가는 발전하고 견고히 세워질 수가 있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권사는 권사의 자리를, 집사는 집사의 자리를, 평신도는 평신도의 자리를, 목사는 목사의 자리를 지킬 때, 그 교회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가장 아름다운 교회가 됩니다. 그런 교회는 부흥이 됩니다.
우리 모두 제자리 찾기 운동에 앞장서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할/ ◀제목 소개!▶

 

우리 조상들은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 늙어지면 못 노나니...' 노는 것이 행복으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지구상에서 축복 받은 사람들을 보면 다 일을 많이 한 사람들입니다. 사회적으로도 좋은 자리는 일을 많이 하라고 부름을 받은 자리입니다. 오늘날 정치, 경제, 문화, 사회, 종교, 모든 분야에서 존경받는 인간은 일을 많이 한 사람들입니다.
우리 인생들에게는 '쉼터와 배움터와 일터'의 '삼대 터전'이 있어야 합니다. 쉼터는 가정이요, 배움터는 학교요, 일터는 직장입니다. 삼대 터전이 잘 가꾸어진 사람은 축복 받은 사람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한 동물원에서 인기가 좋은 '고릴라'가 죽었습니다. 고심하던 동물원장이 아이디어를 냈습니다. 고릴라의 가죽을 벗겨 사람에게 입혀서 고릴라 흉내를 내게 하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일을 할 사람을 뽑아 고릴라 가죽을 입혀서 고릴라 우리 안으로 들여보냈습니다.
그런데 고릴라 가죽을 입은 사람은 그 안에서 으르렁대기만 해도 될 것을 어찌나 직업의식이 투철했든지 바나나를 먹기도 하고 그네를 타기도 하면서 진짜 고릴라 흉내를 냈습니다. 아이들이 모여들어 박수를 치고 환호를 하자 그 뜨거운 반응에 고무되어 공중 그네 타기, 연속 텀블링 등의 묘기를 보였습니다.
그런데 그만 실수로 옆에 있는 사자 우리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기겁을 한 그가 고릴라 가죽을 벗으려고 안간힘을 쓰면서 '사람 살려!' 소리쳤습니다. 그 순간 사자가 다가와 그의 입을 막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입 다물어 인마 요즘처럼 취직하기 힘든 때에 두 사람 다 일자리 잃으면 어떡하려고 그래' 결국 그 사자도 가짜였습니다.
지금 얼마나 취업하기가 힘이 뜹니까?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 자기 할 일을 찾지 못하는 것처럼 고통스러운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많은 사람들은 세상에 태어나와 먹고살기 위해 일하다가 죽음으로 갑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영적으로 새로 태어나 사명을 받아 그 일을 시작할 때 비로소 천국생활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할/

 

1. 본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1절 "천국은 마치 품군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으니" 성경에서 천국을 말할 때에는 몇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마음의 천국'을 가리키는 경우도 있고, 두 번째는 '교회'를 가리키는 경우도 있으며, 또 하나는 '새 하늘과 새 땅인 저 영원한 천국'을 가리키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본문에서 말하는 천국은 어디인가? 여기에서 말하는 천국은 '교회'를 가리킵니다.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이 이루어 나가시는 구원운동을 포도원에 들어가 일하는 것'으로 비유했습니다. 여기서 '포도원은 교회요, 품꾼은 복음을 위하여 일하는 모든 성도'들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천국(교회)을 일하는 곳으로 비유하고 계십니다. 당시 팔레스타인에는 많은 영세민들이 일자리를 구하기 위하여 이른 새벽부터 장터에 나가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서울에도 이와 비슷한 곳이 많이 있습니다.
①한 포도원 주인이 이른 아침에 일꾼을 구하여 장터에 나갔습니다.
유대는 지중해성 기후로 인하여 포도를 재배하기에 좋기 때문에 포도원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포도를 8월말에서 9월초에 수확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그 이후에는 우기가 돌아와서 익은 포도가 떨어지기 때문에 상품가치가 떨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시기에는 포도원에 많은 일꾼들이 필요합니다.
그 일꾼들은 동이 틀 무렵부터 서늘하게 해가 질 때까지 일을 합니다. 포도원 주인은 일 할 품꾼들을 얻기 위해서 그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찾아갑니다. 그곳에는 일감을 찾는 실직자들이 많이 모여서 서성거리고 있었습니다.
유대나라의 시간은 우리나라와는 다릅니다. 여기 해가 뜨는 아침 6시경에 그들에게는 영시에 해당합니다. 이 농장의 주인은 이른 새벽에 장터에 나가서 일꾼들에게 고용계약을 맺고 데려왔습니다. 그리고 유대시간으로 3시쯤 우리나라 시간으로는 오전 9시에 해당되는 시간에 다시 장터로 나가 보니까 또 놀고 서 있는 사람들이 있기에 '얼마를 주면 일하겠는가?'를 묻고 한 데나리온 씩 받기를 결정하고 포도원에 데리고 왔습니다.
한 데나리온은 당시 사람들에게 '하루를 먹고 살 수 있는 정도'의 일당입니다. 그런데 이 포도원 주인은 참 좋은 주인입니다. 일꾼을 한번만 부르고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계속 일꾼을 부릅니다. 그 후 낮 12시쯤 다시 장터에 나가보니까 아직도 장터에서 일을 못 찾고 서 있는 사람들이 눈에 보입니다. 이들 또한 같은 조건으로 계약을 하고 데려왔습니다. 그 후 3시에 똑 같은 조건으로 일꾼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유대시간으로 6시면 해가 지게 됨으로 일을 그만두어야 할 시간인데 6시가 되기 전 오후 5시쯤 주인이 장터에 또 나가보니 아직까지도 고용되지 못하고 놓고 서있는 사람들이 눈에 띠었습니다.
그들은 가족들의 생계를 생각해서 아주 절망적인 상황에 있었습니다. 농장 주인이 묻기를 '당신들은 왜 종일토록 놀고 서 계십니까?' '써 주는 이가 있어야 일을 하죠?' 그래서 이 주인은 '우리 집 농장 문을 닫으려면 한 시간정도 밖에 안 남았지만 이제라도 내 농장에서 일을 하시겠소!'하고 제안했습니다.
얼마나 감사한 소식입니까? 그래서 오후 5시에 고용된 일꾼들은 아주 감사한 마음으로 농장에 들어가서 해가 지기까지 1시간 동안 일을 열심히 했습니다. 이렇게 계속 일꾼을 부르고 있는 이 주인은 참 은혜로운 주인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요즘 직장마다 불경기라고 감원바람이 새 찬데 본문의 이 주인은 많은 사람들에게 일할 기회를 골고루 주고 있으니 얼마나 좋은 주인입니까?
②여기서 우리는 이 좋은 주인이 누구인가를 알고 지나가야 합니다.
여러분, 이 포도원 주인은 우리가 경외하는 하나님이십니다. /할/ 하나님은 오늘도 포도원을 세워놓고 일꾼으로 계속 부르고 계십니다. 조건 없이 부르고 계십니다. 주인의 그러한 부름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부름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일꾼을 계속 부르는 이 은혜가 없었다면 아마도 이 세상이 심판을 받고 끝났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를 부르기 위해서 아직도 하나님의 심판은 종말을 고하지 않고 우리에게 기회를 주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포도원에 부름 받을 자격이 없지만 하나님의 조건 없는 부름 때문에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포도원에 일하러 오게 된 것입니다. /믿/
③그런데 이 포도원에는 불변의 질서가 있습니다.
주인과만 계약을 맺었습니다. 2절에 "저가 하루 한 데나리온씩 품꾼들과 약속하여 포도원에 들여보내고"라고 했습니다.
주인은 이 품꾼들과 한 데나리온씩의 약속을 하고 불렀습니다. 이것은 주인과 부름 받은 품꾼의 계약입니다. 이 계약은 불변합니다. 절대로 파기할 수 없습니다. 이 계약을 잘 살펴보면 부름 받은 품꾼의 의지나 조건이 아니고 주인의 절대적인 의지입니다.
④한 데나리온의 영적인 의미가 무엇인가?

일당 한 데나리온은 영적으로 하나님께서 믿는 자에게 주시는 구원을 가르칩니다. 한 데나리온의 약속은 누구든지 교회에 들어와서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할/
⑤이제 주인은 청지기를 시켜 나중에 온 자들부터 먼저 온 자까지 삯을 주라고 명합니다.

그러자 오후 5시에 와서 1시간동안 열심히 일한 농부에게 한 데나리온의 삵이 주어졌습니다. 이 사람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불과 한 시간을 일했는데 말입니다.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일찍 와서 일을 한 다른 일꾼들이 생각하기를 '와! 한 시간 일한 사람에게 한 데나리온을 주었으니 우리에게는 더 많은 것을 주겠지'하며 큰 기대와 설렘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주인은 이 사람들에게도 똑같은 일당 한 데나리온씩을 주었습니다. 더 받을 줄 알고 잔즉 기대했던 일군들이 기대가 무너지자 불평과 원망을 했습니다.
'우리는 아침 일찍이 와서 온종일 땀을 흘리며 열심히 일을 했는데 오후 5시에 와서 일을 한 사람과 똑같이 대우를 해주다니 이건 너무합니다.'하고 불평했습니다. 그 때 주인이 먼저 온 사람들에게 대답하기를 '너희에게 한 데나리온을 주는 것은 약속대로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약속대로 한 것이므로 주인에게는 아무 잘못이 없었으나 그들은 불평을 한 것입니다.
나중에 온 사람들에게 한 데나리온을 주는 것은 어디까지나 그 주인이 뜻입니다. 아까도 말씀 드렸지만 한 데나리온은 구원을 가리키는 것인데, 죄 값으로 지옥에 가야할 사람을 천당에 가도록 구원을 베풀어주었으니 그 구원의 은총이 우주보다 더 크고 귀한 것입니다. /믿습니까?/ 구원에 은혜를 아는 자는 신앙이 좌우로 치우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구원의 은총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계획과 섭리 안에 있는 권한에 속한 것입니다. 그 누구도 하나님의 계획을 간섭할 자가 없습니다. /믿/
⑥심리학자들이 인간을 여러 가지로 해석한 자아분석이란 이론이 있습니다.
⑴자기만 긍정으로 보고 타인을 부정적으로 보는 심리를 가진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자기 확신에 살면서 교만합니다. 자기 것은 최고이고 남의 것은 예사로 생각하는 아주 교만한 사람입니다. 자기 고집이 굉장히 강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일을 시키기가 어렵습니다.
⑵자기 자신을 부정하고 남의 것을 긍정하는 심리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남의 것을 부러워하면서 세월을 보내는 사람입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한 가치는 모르고 남의 것은 다 좋은 것입니다. 다 똑같은 차종인데 남이 타는 차는 더 좋아 보이고 심지어 남의 남자나 남의 여자는 더 잘나 보이고 좌우간 남의 것은 좋아 보이는 그런 사람입니다.
⑶자기 자신을 부정적으로 보면서 남의 것도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전문가는 '비관론자'라고 말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우울증에 빠지기가 쉽다는 것입니다. 우울증의 이론에 보면 우울증의 뿌리가 '비교의식'이라는 것입니다. 남하고 비교하는 것이 오래가면 우울증이 됩니다. 포도원에서 일하고 품삯을 받을 때 원망하는 이 품꾼도 비관론자인데 이것이 남과 비교하다가 일어난 병입니다.
오래 전에 전해오는 전통적인 속담도 있습니다. '남이 장에 가니까 거름 지고 장에 간다.' 이것은 거름을 지고 밭에 가다가 남들이 장에 가니까 그만 장꾼들 따라 장에 간다는 비교의식을 꼬집는 속담입니다.
⑷자기를 긍정하면서 남도 긍정적으로 보는 사람은 참 좋은 사람입니다. 우리가 가져야할 인격의 덕목입니다. 이런 사람은 정서적으로도 건강합니다. 정서적으로 건강하지 않으면 겉으로 아무리 조건이 갖추어져도 그것은 행복하지 않습니다.
⑦여러분, 왜 불평이 일어나는가?

오늘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문제들은 전부 타인과 비교하다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나하고 주인과는 문제가 없습니다. 나와 주인과의 계약은 한 데나리온입니다. 나 혼자 일하고 한 데나리온을 받아 가면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이 와서 조금 일하고 자기와 똑같은 대우를 받으니까 비교하면서 원망하게 되고 그렇게 하는 주인을 악한 주인으로 보는 것입니다.
죄라는 것은 발전합니다. 처음에는 불평입니다. 왜 공평하게 대해주지 않습니까? 불공평하다는 것입니다. 이 불공평은 자기 기준입니다. 주인의 뜻에서 보면 주인은 공평한 분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자기 기준을 가지고 타인과 비교하여 형제를 원망하는 것만 아니라 그렇게 대우하는 주인까지 나쁜 주인으로 오해를 하고 죄를 범하는 자리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주인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내가 너를 일꾼으로 불렀을 때 너는 나를 선하다고 여겼는데 지금 내가 하는 일에 대해서 네가 나를 악하게 보느냐는 주인의 이 말속에는 상당히 준엄한 책망이 있습니다.
⑧불평하고 원망하는 사람들에게는 몇 가지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⑴한 데나리온, 즉 구원이 큰 줄을 몰랐습니다.

⑵구속의 은혜에 대해 감사하지 않았습니다.

⑶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았습니다.

⑷다른 사람과 비교하고 간섭했습니다.

⑸자기 공로를 내세워 욕심을 부렸습니다.

⑹하나님이 하는 일에 원망했습니다.

⑺하나님의 주권적인 행사를 절대 복종하지 않았습니다.

⑻선한 일을 악하게 본 것입니다.
이런 비유를 들려주신 예수님은 결론 내리시기를 16절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고 하십니다.
⑨다시 한 번 생각해 보자!

이 비유에서 나타난 포도원 주인은 '하나님'을, 포도원은 '그의 교회'를, 이른 아침에 온 품꾼은 유대인과 바리새인들이요, 늦게 온 품꾼은 이방인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일찍 예수님을 알았던 유대인들은 원망과 불평을 하다가 다 낙오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예수께서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는 것을 강조하시고 계십니다. 뒤집어 생각해 보면 '먼저 된 자가 나중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19:30절에서부터 이어집니다.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이 말씀을 좀 더 자세히 설명하시려고 주님이 품꾼의 비유를 해주신 것입니다.
▶한 부자 청년이 주님에게 나아와 영생을 얻을 방법을 물었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그 청년에게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준 후 주님을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들은 그 청년은 슬그머니 사라져 버렸습니다.
성경은 그 청년이 재물이 많기 때문에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영생을 얻기 위해서 재물을 포기할 수 없었다는 말인데 즉 생명보다 재물이 더 소중하다고 생각이 되어 주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 때 그 모든 상황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베드로가 주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 모든 것을 포기한 자신들은 '과연 무엇을 보상받게 될 것인가?'를 주님에게 물었습니다. 마19:27절에 보면, "이에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사오니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라는 질문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위하여 희생하며 따라 다니다보니까 어느 날 본전 생각이 난 것 같습니다. '이 화창한 날씨에 산으로, 바다로, 고양시 꽃 축제가 얼마나 신나겠는가?' 이런 생각이 든 것 같습니다. 주일이면 쉬지도 못하고 주님 따라 다니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희생을 했는데 나에게 돌아온 대가는 도대체 무엇입니까? 베드로의 이 질문이 오늘날 수많은 그리스찬의 질문일 수도 있습니다.
베드로의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 예수님은 오늘 본문의 포도원의 비유를 말씀하시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당시 제자들의 마음속에 중대한 의식의 모순과 잘못된 동기를 가지고 있음을 보시고 그 동기로 인해 먼저 된 사람이 나중이 될 수밖에 없다'는 비유를 주셨습니다. 당시 제자들이 예수님을 정치적인 메시아로 보고 나라가 해방되면 우의정, 좌의정이나 차지하려는 자리다툼을 가지고 있는 자들에게 천국백성의 의식을 심어주려고 주신 말씀입니다. /할/

 

2.본문을 통해서 몇 가지로 생각해 보십시다.

 

①천국, 즉 교회는 일하는 곳입니다.
하나님은 천국에서 일할 일꾼을 찾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일꾼을 찾으려 장터에 나가십니다. 나를 일꾼으로 부르십니다. 천국(교회)은 일하라고 부르신 곳입니다.
본문 1절 '천국은 마치 품군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으니' 2절에서도 '들려 보내고', 4절에서는 '포도원에 들어가고', 7절에서도 '포도원에 들어가라'고 했습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은 우리를 택하여 부르신 것은 당신의 일을 하라고 부르신 것입니다. /아멘!/
인간의 고통 가운데 가장 큰 고통은 할 일 없는 자들입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고독한 사람은 할 일 없는 사람들이며, 가장 복된 사람들은 평생 할 일이 있고, 일할 수 있는 건강을 보장받은 사람들이랍니다. /믿/
▶셰익스피어의 희극 가운데 가장 비극적인 것이 '오델로가 직장을 잃어 버렸다.'라는 이야기라고 성서 주석가 바클레이가 말했습니다. 예수께서는 30세까지 목수의 일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노동, 직업의 신성성을 몸소 체험하셨습니다. 우리 기독교의 직업관은 하나님의 부르심입니다. 우리는 세상일을 하면서도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일거리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 확장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세계적으로 가장 큰 문제는 실업자가 늘어가고 고용할 일자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건 비단 우리나라 뿐만은 아닙니다. 세계적인 불황의 탓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일거리가 많아져야 하고 일꾼을 필요로 하는 일터가 많아져야 그 사회의 노동가치가 상승이 되고 경기가 회복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고급 일역이 남아돌고, 생산직종에 사람이 없어 외국인들이 그곳에 채워져 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 사람들은 쉽게 편하게 돈을 벌려고 한답니다. 그래서 힘든 산업체를 외면해 버리고 서비스 업종이 인기가 좋은 것은 힘도 안 들고 많은 팁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경향은 장기적으로 볼 때, 국가의 발전을 크게 둔화시키는 일이 되는 것이므로 뜻 있는 많은 사람들이 걱정하고 있습니다.
본문을 보면 천국은 차별 없이 누구든지 일할 수 있는 세계요, 무제한 일터가 보장된 곳입니다. 이른 아침부터 9시, 12시, 3시, 5시, 시간이 제한 없이 일할 수 있는 곳이랍니다. 이른 아침에 고용된 일꾼은 '유아 때 부름 받은 자'로 볼 수 있고, 오전 9시에 일과가 시작되면서부터 일한 사람들은 '소년시절부터 교회에서 일한 사람'입니다. 정오 12시에 초청된 사람들은 '인생의 반을 헤매다가 중년기에 주 앞에 부름 받은 사람'들이며, 오후 3시에 온 사람들은 '인생의 장성기를 넘어서서 부름 받은 사람'들이며, 오후 5시에 초청된 사람들은 '인생 황혼기에 부름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일꾼으로 부르실 때 나이도 묻지 않고 시간이나 건강이나 재능도 묻지 않습니다. 나와서 일하는 그 모습을 보고서 기뻐하시고 상급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교회에 나와서 열심히 일을 하면 건강도, 재물도, 재능도, 능력도 주님이 주십니다. /아멘!/
불란서 대문호 '루소'는 '인생을 두 번 태어난다.'고 했습니다. 한번은 살기 위해 태어나는 것이요, 또 한 번은 일하기 위하여 태어난다고 했습니다. 이 세상일에는 때가 있고, 기회가 있습니다. 항상 기회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에는 항상 기회가 있습니다. 지금부터 시작하면 됩니다. 지금부터 봉사하십시오, 지금부터 전도하십시오, 지금부터 말씀 읽고, 기도하고, 찬양해 보십시오, 놀라운 능력과 은혜를 주십니다. /할/
'마르틴 루터'는 하나님의 종이든, 왕이든, 노동자든, 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하는 일은 다 거룩한 일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을 통하여 하시려고 하는 일을 발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일꾼들을 부르셔서 사명을 맡기는 것이 하나님나라 질서입니다. 일꾼들은 생명의 면류관이 보장되어 있습니다. 계2:10절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할/ 하늘나라는 일꾼이 모자랍니다. 주님은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다고 한탄하셨습니다. 우리 모두 해야 할 일들을 찾아 솔선수범해서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아멘!/

 

②천국(교회)은 보람된 일을 하는 곳입니다.
보람은 남을 섬기는 희생의 대가로 얻어진 정신적 보상입니다. 여러분! 공허한 마음은 자기 안일과 정욕을 위하여 치른 삶의 낭비에서 생긴 마음의 부채랍니다. 그러나 보람은 이웃을 섬기는 정신적 가치의 만족함입니다. /할/
또 공허는 자기 안일과 육체적 쾌락의 후유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일하므로 보람을 얻는 사람은 삯을 묻지 않습니다. 선한 일은 돈 받고 하는 일이 아닙니다. 아이를 기르는 어머니는 월급이 없습니다. 돈을 받으면 보모가 됩니다. 남편을 섬기는 아내에게 월급이 없습니다. 월급을 주면 가정부가 됩니다. 어떤 남편을 자기 아내를 가정부 정도로 월급을 주면서 살아가는 분들도 있습니다.
주님의 일은 전혀 보상을 기대하지 않고 보답으로 하는 일이 천국의 일입니다. 그런데 본문의 먼저 온 일꾼들은 흥정하려는 의식으로 일을 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무엇이라고 물었습니까? '내가 이렇게 주님을 위해서 희생을 했으니 내게 돌아오는 것이 무엇입니까?' 흥정의식을 보게 됩니다. 여기 비유에 나오는 품꾼들은 '내가 이만큼 일했으니 이런 보상을 받는 것이 마땅하지 않습니까?' 이것이 품꾼들이 가시고 있는 마음입니다.
베드로의 물음에 예수님은 마19:28-30절에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좇는 너희도 열 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할/
보상을 안주는 것이 아닙니다. 땀 흘려 일한 대가를 주님께서 반드시 보상하십니다. 이름 모를 소자 한 사람에게 냉수 한잔의 친절을 건넌 것까지도 주님은 기억하시고 보상하시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단순히 이 보상을 받은 동기로만 주님을 섬긴다면 잘못되었다는 것을 본문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인의 계산법과 품꾼의 계산법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 비유에 나타난 5시에 부름 받은 일꾼들을 생각해 보십시다. 이 사람들은 어떤 생각으로 일을 했습니까? 감사하는 마음으로 일을 했습니다. 5시에서는 불러 주셔서 일감을 맡겨 주신 주인을 향한 고마움에 대한 감격이 넘쳤습니다.
그러나 앞선 일꾼들은 이런 은혜에 대한 감격이 전혀 없었습니다. 나중에 부름 받은 일꾼들은 하나님의 일꾼으로 써주신 것을 감사했습니다. 주님의 얼굴만 보아도 감사하고 그분의 은혜를 생각해도 가슴이 벅찼습니다. 그래서 찬양하며 감사하며 일을 했습니다.
바로 이 점을 주님이 귀하게 보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봉사의 양을 보시는 것이 아니라 질을 보십니다. 그 사람의 중심을 보십니다. /아멘!/
여러분! 참된 신앙생활의 동기는 어떤 상을 받기 위해서만 일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 다른 동기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격, 나의 죄를 용서하시고, 나를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주신 것만도 감사한데 거기다가 당신의 일까지 시켜주시니 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여러분! 하나님의 자녀된 것에 감사하고 있습니까? /아멘!/할/ 그렇다면 포도원의 일꾼들을 누구를 바라보고 일을 해야 합니까? 주인, 자기를 불러주고 일감을 맡겨주신 그 주인을 바라보고 일을 해야 합니다.
⑴오늘 본문의 먼저 온 일꾼들은 주인을 바라보지 아니하고 옆에 있는 사람, 즉 나중에 온 사람들을 바라보며 불평을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다가 이웃을 바라보고 일하다가는 시험에 빠지기가 쉽습니다. 또 비교하기 쉽습니다. 나는 누구보다 그 무엇을 더 많이 했는데 그래서 주의 종이 알아주니 안 알아주니 섭섭 마귀가 틈을 타 시험에 들 때가 있습니다.
주의 종은 여러분에게 아무 것도 해주실 수 없습니다.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만이 여러분들에게 좋은 것으로 상주시는 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히11:6절에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럼으로 이웃을 보지말고 오직 주인만 바라보고 일하시면 아무 시험에 들일이 없습니다. /할/
⑵또 본문의 먼저 온 사람들은 자만심에 빠져있었습니다. 10절에 '먼저 온 자들이 와서 더 받을 줄 알았더니' 이 말은 '자신들이 더 받을 수 있는 자격자'라는 착각을 했습니다. 이런 의식을 '공로자의식'이라고 합니다. 이 의식은 '정치판 의식'입니다. 정치판은 철저하게 공로 따라 직위가 나눠집니다.
그러나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빚진 자의 의식'을 가지고 일해야 합니다. /할/ 우리는 '복음에 빚진 자'들입니다. 롬1:14절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여러분! 공로의식이 많은 사람들은 불행과 원망에 사로잡히게 되지만 빚진 자의 의식을 가진 사람은 겸손해집니다. 오른손이 하는 것 왼손이 모르게 합니다. 주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을 들어 은혜'를 주십니다. /할/
'내가 이만큼 했는데, 나를 몰라주다니' 하는 섭섭한 마음을 갖는다면 그것은 우리가 아직 주님께 빚진 자 의식을 갖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교회를 위해서 열심히 일했다고 해서 그에 상당한 대접을 요구할 권리가 없습니다.
▶한 성자가 그리스도의 심판대에 선 성도들의 맨 뒷자리에서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모두들 훈장처럼 잘한 것을 달고 나온 가운데 그만은 유별났습니다. '그대는 무엇을 하였느냐?'고 주님이 물으실 때 '주여, 잘한 일이 하나도 기억되지 않습니다.' 이런 겸손함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할/
▶일생을 아프리카 선교사로 생애를 바쳤던 '리빙스턴'은 '천국에 관계된바 없이는 내게 있는 것 그 어느 것도 아무 가치를 두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는 '사람들을 내가 아프리카에서 나의 생을 희생한다고 말들을 하는데, 그러나 나는 단 한 번도 희생한 일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건강한 몸으로 좋은 일을 하게 하셨고, 마음에 평화를 얻고 이후에 올 영광스러운 새 하늘과 새 땅의 밝은 소망 가운데 일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할 뿐이요, 나를 불러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할 뿐'이라고 했습니다. /할/

 

③천국은 오직 하나님을 위하여 일하는 곳입니다.
천국의 일은 누가 시켜서 하는 것도 아니요, 비교의식으로 경쟁하는 곳도 아닙니다. 인간에게는 두 개의 눈이 있습니다. 하나는 겉 사람의 눈인데 이 눈은 다른 사람을 봅니다. 비교해 보고, 경쟁심을 일으키고 또 사기하고 원망하고 불평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체험할 수 없습니다.
또 다른 눈은 하나님을 보는 속마음의 눈입니다. 이 눈은 부르심의 소망을 봅니다. 자기 할 일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은혜를 받으면 받을수록 속 사람의 눈이 열림으로 자기 일을 알고 충성하며 승리합니다.
이런 사람은 주님께서 이웃을 사랑하시므로 그들을 사랑하게 됩니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므로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나도 사랑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전도합니다. 구제합니다. 물질을 드려 대접을 합니다. 그래도 아깝지가 않습니다. 오히려 기분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습니다. 섬기는 자의 기분은 해보지 않으면 체험할 수 없는 그런 고차원적인 기쁨입니다. /믿/
이런 사람들이 모이는 포도원(교회)는 항상 찬양이 있고, 은혜가 넘치고 기쁨이 있고 낭만이 있습니다. 이런 포도원은 항상 배가에 운동이 일어나며 세계를 향하여 선교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도 절대로 교만에 넘어지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깊이 성찰해 보기만 합니다.
'할 일이 없었던 나! 인생을 낭비하다가 지옥으로 갈 수밖에 없던 나를 은혜로 구원해 주시고, 주의 일을 할 수 있는 자리를 허락해 주신 것을 감사, 감격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주님과 늘 올바른 관계를 맺기를 소원하며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또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하나님께 매달립니다. 나를 붙잡아 당신의 온전한 도구로 사용하여 주옵소서!' /할/
여러분! 하나님의 축복의 법칙은 심은 자가 거둔답니다. 많이 심으면 많이 거둡니다. 적게 심으면 적게 거둡니다. ▶고후9:6절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눅6:38절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고후5:9-10절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④본문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그들의 잘못된 의식을 깨우쳐 주고 계십니다.
⑴제자들의 잘못된 비교 의식을 깨우치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품꾼들이 가져야 할 의식은 비교의식도, 경쟁의식도 아닙니다. 동업자 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함께 일하는 정신'입니다. /할/
⑵제자들의 잘못된 공로의식을 깨우치는 말씀입니다. 내가 마땅히 특별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생각은 금물입니다. 우리는 저 영원한 하늘나라의 소망을 가진 자들이요 부름의 상을 바라보고 달려가야 할 사람들입니다. /아멘!/
⑶제자들의 잘못된 흥정의식을 깨우치는 말씀입니다. '내가 이렇게 주님을 위해서 희생을 했으니 내게 돌아오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 말속에서 베드로의 흥정 의식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의 일꾼들은 정치판처럼 흥정하는 것이 아니고 받은 은혜에 감사해서 자발적인 사랑의 발로에서 나타나는 충성이 있어야 합니다. /아멘!/
⑷잘못된 동역자의식'을 깨우치는 말입니다. 13절에서 주인이 원망하는 자들을 향하여 '친구여'라고 부른 것을 주목하십시오. 이 말은 일차적으로는 '동료'라는 의미이지만, '전우'를 가리키는 데도 쓰입니다. 즉, '같은 목적을 가졌고 운명을 같이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대단하지 않습니까? 성도들에게 '동역자의식'이 강할 때 그 교회는 화목한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아멘!/
▶한 주인 밑에 말과 당나귀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주인의 짐을 등에 가득 싣고 함께 떠나게 되었습니다. 하루 종일 걷다가 밤늦게 주막에 들러 잠시 쉬고 다음날 새벽이면 길을 떠나는 힘든 나날이 며칠씩 계속되자 몸이 약한 당나귀가 말에게 부탁을 합니다.
'여보게 좀 도와주게. 이대로 가다가는 죽고 말겠네. 그러니 내 짐을 조금만 가져가 주게' 당나귀는 숨을 헐떡이며 말에게 애원했습니다. 그러자 말은 몹시 화를 내며 단번에 거절했습니다. '안 돼, 나도 지금 무거워 죽을 지경인데, 네 짐이나 더 가지고가라'며 오히려 더 큰소리를 칩니다. 그러자 당나귀는 더 이상 부탁하지 못하고, 얼마를 가다가 그만 쓰러져 죽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주인은 당나귀의 등에 실었던 짐과 죽은 당나귀까지 말의 등에 실었습니다. 그래서 말은 훨씬 더 무거운 짐을 지고 걷게 되었습니다. 이솝우화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우리 교회에서 얼마나 '동역자의식'을 가지고 계십니까? 바울이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동분서주 할 때 그의 동역자들은 물질적인 필요를 채워 주었습니다. 사도의 손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 그들은 주님의 일을 감당했습니다. 바울이 어려울 때마다 많은 위로가 되어주었습니다. 그러자 바울이 '그들의 목숨을 위해서 자기의 목이라도 내어놓겠다'고 했습니다.
포도원에 먼저 왔던 품꾼들은 나중 온 사람들과 함께 주인의 일을 '동역한다.'는 동료 의식이 없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동역자'들입니다. 바울은 롬16:3절에서 '동역자들에게 문안하라'고 했고, 빌4:3절에서는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고 했고, 고전3:9절에서는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고 했습니다. 우리 모두 동역자의 의식으로 하나되기를 소원합니다. /아멘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