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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자를 살리신 예수님! (요 11:38-44)

by 【고동엽】 2022. 2. 8.

죽은 자를 살리신 예수님! (요 11:38-44)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또 오늘을 '수난 주일, 또는 고난주일'이라고도 부릅니다. 예수님이 인류의 죄를 담당하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시려 예루살렘으로 입성하는 날입니다. 그것을 '예수님의 입성, 왕의 입성'이라고 표현합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많은 군중들이 열광했고 환호했고 요란하게 맞이했습니다. 사람들이 모두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들고 옷을 벗어 땅에 깔고 그 위로 지나가시도록 했습니다. 그래서 오늘을 '종려주일'이라고 부릅니다. 예수님은 수많은 군중들에 에워싸여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으나 그의 모습은 그렇게 의기양양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그 날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이 소리가 머지 않아 '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라'는 소리로 바꿀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마21장에 보면 그 날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어린 나귀새끼를 타고 들어가십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지시하시기를 '마을에 내려가서 아무도 타보지 않은 나귀 한 마리를 끌고 오라'고 하십니다. 주인이 '왜 끌고 가느냐?'고 묻거든 '주께서 쓰시겠다 하라' 하십니다. 그러면 '줄 것'이라고 합니다. 제자들은 의아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가서 '주께서 쓰시겠다' 하니 나귀 주인은 아무 소리 않고 풀어 주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화려하게 입성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일주일 후에 십자가에서 죽으십니다.
주님의 입성하실 때 나귀 주인의 아름다운 헌신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 사람은 '이름도 없는 충성 자요, 빛도 없는 충성 자요, 보상도 없는 충성 자요, 무조건의 충성 자입니다. 그리고 이 사람은 참 기쁨을 아는 사람'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께서 입성하실 때 ⑴어린 나귀를 타셨습니다. ⑵사람들은 예수님이 입성하시는 길에 자기들의 옷을 벗어 깔았습니다. ⑶군중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를 외쳤습니다. 이 세 가지가 그냥 우연히 되어진 것이 아닙니다. 이미 구약에서 예언한 대로 이루어진 줄 믿습니다.
나귀는 바로 평화의 상징입니다. 그 당시 말은 전쟁의 도구였지만 나귀는 화평의 사신이 타는 평화의 도구였습니다. 주님은 평화의 왕으로 샬롬의 왕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영접하는 심령에는 샬롬에 이루어질 줄 믿습니다.

 

1.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신 종려주일에 대하여 알아보겠습니다.

 

①군중들이 흔든 종려나무는 어떤 나무인가? 종려나무는 이스라엘에서 가장 무성하고 크게 자라는 나무입니다. 일명 야자 대추나무라고 하는데 그 나무에서 야자 대추가 열립니다.
또 종려나무는 키가 크게 자라는 나무로서 왕권을 상징하는 나무입니다.
시92:12절을 보면 '의인은 종려나무 같이 번성하며'라고 했고 아가7:7절에서는 '신부의 품위'를 종려나무에 비유하였고 사9:14절을 보면 '이스라엘의 통치자의 상징'으로 종려나무를 일컬었습니다. 그래서 솔로몬의 성전에, 벽돌에, 문에, 손잡이 등에 이 종려나무 가지를 새겨 넣었고 동전에도 이 나무를 새기기도 했습니다. 그러니까 종려나무는 왕권을 상징하는 나무입니다.
그래서 2천 년 전 오늘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환호했던 것입니다. 그 말은 사람들이 예수를 왕으로 상징했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당신은 우리의 메시아입니다, 당신만이 우리를 로마로부터 해방할 수 있습니다'라는 고백입니다. 그래서 오늘을 '종려주일'이라고 부릅니다.
②또 이번 주간을 '대 주간'이라고도 부릅니다. 4세기부터 부활절 전 한 주간을 대 주간이라고 했습니다. 이 한 주간을 엄격한 금식으로 보냈습니다. 오락행사를 금지했고 공공기관은 휴무했고 죄수와 노예들은 해방을 받기도 하였고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충분한 구제 물을 보급했습니다.
그리고 동방종교에서는 종려주일인 오늘 오후 1시부터 감람산에 있는 교회에서 축제가 열렸다고 했습니다. 그곳에서 찬양하고 축복을 선포하고 교훈서를 낭독했습니다. 어린이들은 종려나무를 꺾어들고 행진도 했습니다. 그리고 가장 특징 있는 것은 '종려주일이 애도의 날만 아니고 철저하게 환희의 날로 지켰다'는 것입니다.
그 날 낭송된 성경이 빌4:4-9절입니다.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골고다는 고난의 지점입니다. 예수님이 골고다에서 십자가를 지고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제자들에게는 스승을 잃는 아픔이 있었을 것이고 하나님은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하는 고통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 아들이 고난 받으며 죽어갈 때 어디선가 그 모습을 지켜보아야 하는 하나님의 아픔을 우리는 짐작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일본의 '지다구라'라는 신학자는 '이런 십자가의 아픔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십자가를 함부로 입에 담지 말라'고까지 말했습니다. 그런 신학을 그는 '아픔의 신학'이라고 불렀습니다. 골고다는 아픔의 현장입니다. 수난의 현장이고 고뇌의 현장입니다. 하늘과 땅과 예수와 하나님이 함께 아픔에 떨었던 현장입니다.
그런데 인간에게는 예수님의 그 희생이 그토록 감사할 수 없고 행복할 수 없고 축복이 아닐 수 없고 환희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 예수님의 고통이 있었기에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들이 된 것입니다. 그 고난이 없었다면 구원도, 천국도, 부활도 상상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고난주일은 애통보다는 축제가 되어야 하고 환희가 되어야 하고 축복의 선언이 있고 찬양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할/
③초대교회는 이 주간에 어떤 일을 했을까요? 고난주간에 월요일에서 수요일까지 특별예배를 드렸다고 합니다. 화요일은 모두 감란산에 올라가 철야를 했고 거기서 마24:4절 이하를 읽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하지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아직 끝은 아니니라,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곳곳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이 모든 것이 재난의 시작이니라."
수요일에는 부활교회에서 철야의 예배를 드렸는데 그때 마26:14-16절을 묵상했습니다. "그 때에 열 둘 중의 하나인 가룟 유다라 하는 자가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말하되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주리니 얼마를 주려느냐 하니 그들이 은 삼십을 달아주거늘 그가 그때부터 예수를 넘겨줄 기회를 찾더라"
목요일에는 성만찬을 행하였고 세족식도 있었으며 화해식도 했다고 전해집니다. 모두 그 날 회복의 은혜를 나누었던 것입니다. 금요일은 새벽부터 밤까지 애도의 날로 보냈다고 합니다. 그 날 가장 엄격한 금식과 철야기도회가 있었습니다.
3세기 중엽에는 성금요일과 토요일에는 금식과 함께 철저하게 기도에 몰두하기 위해서 예배도 없었고 교회 문도 열지 않았다고 합니다. 토요일은 '성토요일' 이라고 해서 초대교회 때에는 성금요일 보다 훨씬 더 귀한 날로 여겼다고 합니다. 그래서 토요일에는 아침부터 해질 때까지 애도와 엄숙한 분위기에게 금식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고난주간을 아주 의미 있게 뜻 있게 보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고난 때문에 우리가 구원받았고 살아났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애도보다는 이 고난을 감사로 감격으로 환희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이 환희를 모르는 사람들을 교회로 인도해야 하고 그리고 예수를 알게 해 주어야 합니다. /아멘!/
'예수님의 고난의 의미가 무엇인지? 왜 고난을 받아야 했는지? 그 예수의 고난이 오늘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를 알려 주어야' 합니다. 그런 면에서 오늘 사람들을 전도하는 것도 예수님의 고난에 크게 보답하는 일입니다. /믿/
④성경에 보면 최초의 전도는 부활 현장에서 이루어졌습니다. 막16:6절을 보면 안식 후 첫날 무덤을 찾은 여인들에게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에 계시지 않느니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최초의 전도입니다. 최초의 전도는 부활을 전하는 메시지였습니다. 천사는 먼저 여인들에게 부활을 전하였습니다. 여인들은 가서 제자들에게 부활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안 믿었습니다(막16:11,13/눅24:11).
그때 부활하신 예수께서 나타나셔서 '왜 전하여 준 부활소식을 믿지 않느냐?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이 있다'고 책망하셨습니다. 그리고 주께서 마지막으로 다시 분부하시기를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이 복음을 전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고 하셨습니다.
⑤전도는 살려내는 일입니다. 죽음에서 살려내서 영생의 길로 인도해 천국에 이르게 하는 작업이 전도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고난을 되새긴다고 우울하고 침울한 마음으로만 있는 것이 고난절의 의미는 아닙니다. 이 주간에 구원의 길을 안내하는 것이 훨씬 더 의미 있는 일입니다. /아멘입니까?/ 그것이 고난절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그런 면에서 죽음에서 깨어나게 하는 일은 중요한 일입니다.
여러분, 죽음은 세상에서 가장 심각한 일입니다. 더 심각한 것은 그 죽음을 모르고 있는 일입니다. 죽음을 모르고 있는 사람에게는 알도록 빨리 깨우쳐 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죽음을 알아야 하고 피할 길도 대처법도 잘 죽는 법도 알게 해 주어야 합니다. /할/
▶옛날 한 사냥꾼이 독수리를 잡기 위해 나무에 앉아있는 독수리를 응시하며 화살을 겨누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독수리는 자신이 죽을 줄도 모르고 무엇인가를 노려보고 있었습니다. 보니까 뱀을 잡기 위해서 눈독을 드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냥꾼이 뱀을 보니까 그 뱀은 죽을 줄도 모르고 어딘가를 또 노려보고 있었습니다. 뱀은 개구리를 보고 있었습니다. 또 개구리를 보니까 죽을 줄도 모르고 또 뭔가를 노려보고 있었는데 그것이 무당벌레를 잡아먹으려고 노려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무당벌레는 또 죽을 줄도 모르고 눈만 끔뻑, 끔뻑거리고 있었습니다.
그 순간 사냥꾼이 슬그머니 화살을 내려놓고 자신의 뒤를 돌아다보았답니다. '나도 누군가 뒤에서 노려보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뒤를 돌아보니까 누군가가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그것이 '죽음의 그림자'이었습니다. /할/
지금 그것도 모르고 뭔가를 더 먹어보겠다고 정신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렇게 정신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은 대개 죽음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는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이 모른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러기에 그들을 깨우쳐 알게 해 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전도입니다. /아멘!/
기독교는 십자가의 종교입니다. 십자가는 고난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죽음이 있었기에 부활의 찬란한 새 아침이 찾아온 것입니다. /할/

 

2. 오늘 본문을 통하여 기독교의 위대한 승리는 부활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성경에 나타난 나사로를 다시 살리신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는 성도의 부활을 보여주는 계시적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입니다. 우리는 부활신앙을 믿습니다. /아멘!/ 부활은 완전히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것을 말합니다. 죽어서 다시 산 것이 부활입니다.
요12:24절을 보면 부활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밀 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썩어야 싹이 나고 열매를 맺습니다. 바로 부활이란 것은 땅에 묻혀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마치 밀이 다시 싹을 내는 것처럼 다시 살아나는 것을 말합니다(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①성경의 66권속에는 하나님이 죽은 자를 살리신 장면이 6번이나 나오는데 구약에 3번, 또 신약에서 3번이 나옵니다.

먼저 구약에서 보겠습니다. ⑴왕상17장에서 사르밧 과부의 아들을 살리신 사건, ⑵왕하 4장에서 수넴여인의 아들을 살리신 사건, ⑶왕하 13:21절 이하에서 엘리사가 죽어 장사하고 해가 바뀐 뒤 모압 사람 하나가 몰래 엘리사의 묘실에 죽은 시체를 들어 던지매 시체가 엘리사의 뼈에 닿자마자 곧 살아났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신약 성경에 보면, ⑴막5:41절에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즉시 살리셨습니다. ⑵눅7:14절에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고 하시매 나인성 과부의 아들이 즉시 살아났고, ⑶오늘 본문의 나사로는 죽인지가 나흘이나 지났는데 살리셨습니다. /할/ 다음 주일은 '예수님이 다시 사신 부활절'입니다.
②요11장은 처음부터 끝까지 나사로를 살리신 사건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45, 53절을 보면 나사로 때문에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고, 또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나사로 때문에 예수님을 믿게 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사실 죽은 자가 다시 살아 날 수 있다는 것은 인간의 논리와 과학과 이성으로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불신자들은 이해하지 못합니다. 세상에는 많은 종교가 있지만 그 종교들 중에 부활을 전하는 종교는 하나도 없습니다. 불교는 윤회설을 주장합니다. 전생이란 사상 속에 환생을 말합니다. 이것은 우리 성경의 부활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이야기입니다. 이집트에서는 영혼이 불멸한다는 사상을 믿고 미이라를 만들었지만 부활의 개념은 없습니다.
빌3:21절에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고 하셨고 사도바울은 고전15장 부활 장에서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다시 살리기 위하여 그 무덤을 해치고 사흘만에 부활하셨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죽음을 피하나 그 죽음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우리에게 부활을 약속하셨습니다. 본문 25-26절에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보증으로 오늘 나사로의 무덤에서 그 죽음의 사슬을 풀어 보여주셨습니다. 죽어도 사는 생명, 그것은 부활을 믿는 성도의 생명입니다. 이 생명을 가진 성도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이 생명을 소유한 사람은 핍박을 두렵지 않습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부활의 능력이 지금도 임하기 때문입니다. /할/아멘!/
③여기서 '나는 부활'이라고 하신 말씀에는 세 가지의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⑴예수님께는 죽음이 없다는 뜻입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므로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살 것이고 죽는 자는 다시 살아날 것이므로 '병들었다, 죽었다' 하는 것이 아무 문제가 없다는 것입니다. 마치 빛 앞에는 어두움이 있다고도 할 수 있고 없다고도 할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부활시키시는 예수님 앞에서는 죽음이란 전혀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⑵예수님은 나사로의 사건을 하나의 교본으로 해서 부활의 생명과 진리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참 죽음이란, 육체의 죽음이 아니라 주님과의 관계가 끊어지는, 즉 죄의 종이 되는 상태로서 육체의 목숨이 살아 있고 죽는 것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육체의 죽음은 그리스도께로 가는 생명으로서 참 죽음이 아니요, 비록 육체적으로 살아 있다 해도 죄 중에 살고 하나님께로부터 떨어져 있으면, 그 생명은 영원히 죽은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생명에 대한 안목입니다. 그러므로 '죽어도 살고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는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참된 죽음은 영적인 죽음이요 죄의 노예된 죽음으로 하나님의 사랑의 은총에서 이탈된 상태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나는 부활이요' 즉 '죽음으로부터의 해방이요, 하나님의 저주로부터의 구원'임을 선포하고 계십니다. /할/
⑶'나는 부활이다'의 뜻에는 예수님만이 유일한 부활이심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어느 한 부활이 아니라 '그 부활'입니다. 만약 어느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그대로 살아나는 것을 부활이라고 한다면 그 부활은 없는 것이 오히려 좋습니다. 여자는 여자로, 늙은이는 늙은이대로, 병신은 병신대로 부활한다고 생각하면 차라리 꽃다운 젊은 나이에 죽었다가 다시 젊게 살아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부활은 죽었던 사람이 그 모습 그대로 다시 살아난다는 의미의 부활이 아닙니다. 신령한 몸으로 다시 태어남을 의미합니다. 고전15:44절에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라고 하셨습니다. /아멘!/할/

 

3. 본문의 배경을 살펴보겠습니다.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한 오리쯤 떨어진 조그마한 빈민굴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살다가 실패한 사람들이 베다니에서 살았습니다. 지금까지도 베다니는 예루살렘 근교에 있는 빈민굴입니다.
그곳에 예수님을 사랑하는 나사로와 마르다와 마리아 세 남매가 살고 있었는데 그들은 일찍이 부모를 잃고 어려운 가운데 살고 있었지만 신앙이 좋고 진실하고 착하게 살았기에 예수님의 사랑을 받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행복한 가정에 느닷없이 불행이 찾아왔는데 그것은 하나밖에 없는 오라비 나사로가 원인 모를 병에 걸려 정성껏 간호한 보람도 없이 병세는 더 깊어만 갔습니다. 이때 마르다와 마리아는 급히 예수님께 연락을 했지만 예수님이 베다니의 나사로 집에 오실 때는 이미 나사로가 죽은 뒤였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이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마중을 나가 예수님의 손을 붙잡고 눈물로 '주께서 여기 계셨다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을 것'이라고 고백을 합니다. 마르다의 이 고백은 현재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게 하시는 예수님의 능력을 무시한 고백입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지요?/
여러분 우리 예수님은 현재도 역사 하시고 기적을 베푸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믿/
어떤 사람은 '기독교의 기적은 2천 년 전이나 있었지 지금은 없다'고 말합니다. 기적은 없다고 믿는 사람은 절대 기적의 체험을 할 수가 없습니다. 신앙은 고백대로 되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십니까?
히13:8절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또 마28:20절에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할/
주님은 지금도 기적을 행하십니다. 주님은 지금도 우리 죄를 사해주시며 지금도 성령의 충만함을 주십니다. 지금도 귀신을 쫓아주시고 질병도 치료해 주시고 무너진 자를 일으켜 세우십니다. /믿으시면 아멘!/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현대의 하나님이십니다. 지금도 이 자리에 우리 하나님은 계십니다. /할/ 주님은 마22:32절에서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니라'고 하셨습니다.
①마르다는 첫 번째 신앙고백이 잘못 되어진 것을 깨닫고 급히 신앙의 고백을 고칩니다. 22절에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라고 고백하자 예수님은 마르다의 이 고백이 끝나자마자 23절에서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고 말씀하십니다. /할/
여러분! 우리의 신앙고백은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이런 고백을 하시기 바랍니다. 신앙은 고백이 중요합니다. 우리의 고백이 바꿔지면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라는 축복이 떨어집니다. /믿/
그런데 인간들은 하나님의 기적을 의심합니다. 감각과 경험에 의지한 인간은 하나님께 응답을 받고도 '정말 그럴까? 정말 기적이 일어날까?' 의심하게 됩니다. 본문의 마르다도 그랬습니다. 그녀는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도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 지금 마르다는 '다시 살리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듣고도 현재의 부활을 믿지 못하고 '장차 주께서 강림하시는 날 다시 살겠지요'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마르다의 모습을 본 예수님이 얼마나 답답하셨겠습니까? 오늘날도 많은 신앙인들이 주님을 답답하게 해 드리고 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또 마18:20절에서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고 약속해 주셨건만 도대체 하나님은 과거의 하나님으로만 믿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현재 지금 이 장소에서 거하시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마르다의 고백에 답답함을 느끼신 예수님이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고 재차 말씀해 주셨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현재 기적이 일어날 것을 말씀하심에도 불구하고 마르다는 '주는 그리스도시오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내가 믿나이다' 재림의 주만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우리의 신앙 고백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신앙고백을 통해 역사하십니다. 신앙을 고백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죄 사함에 고백을 드려야 하고 성령 충만함을 달라는 고백을 해야 하고 질병 치료의 신앙고백을 드려야 합니다.
또한 풍성한 축복의 신앙고백, 영생 천국의 신앙고백을 하십시오. 하나님은 여러분의 신앙고백을 통해 위대한 역사를 베풀어주십니다. /믿/ 죽고 사는 권세가 여러분의 혀에 달려있다고 야고보 장로님이 말씀해 주셨습니다. 성도들의 신앙고백은 예수님께서 타고 오시는 구름수레입니다. /아멘!/할/
②마르다의 불확실한 믿음을 보신 예수님은 마리아를 불러오라고 하셨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찾는다는 말에 급히 예수님께로 나아왔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말씀을 사모하고 경청했던 신앙 인입니다.
예수님은 마리아가 '주님 이제 주님께서 오셨으니 제 오라비는 살았습니다.' 이런 고백을 기대하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예수님을 만나자 말자 그 발 앞에 엎드려 '주께서 여기 계셨다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 하였겠나이다.' 절망적인 고백을 합니다.
이때 유대인들이 호곡을 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통분히 여기셨습니다. 성경은 당시의 예수님의 심정을 33절에서 '예수께서 그의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의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사'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더 이상 그곳에 머무르지 않고 '그를 어디에 두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오늘날도 예수님은 믿음이 없는 자를 보시고 통분히 여기십니다. 38절에서도 예수님이 다시 속으로 '통분히 여기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를 초청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초청한 것이 아니라 우리 주님이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3:20)고 하십니다. 오늘 우리가 먼저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합니다. 주님이 오셔서 우리의 심령을 노크하고 계십니다. 주님의 음성을 듣고 마음의 문을 열고 주님을 영접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③마르다와 마리아의 어리석은 고백에 통분함을 느끼신 예수님은 그들과 무리를 이끌고 나사로의 무덤으로 가셨습니다. 무덤 앞에 당도하신 예수님은 '돌을 옮겨 놓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현재 기적이 일어나니 실천하라'는 말씀입니다. /할/
그런데 예수님의 이 말씀에 '아멘!'하고 따라오지 않습니다. 마르다는 39절에서 절망적인 말을 하고 있습니다.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울먹이며 주님을 쳐다봤을 때 40절에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고 하십니다.
여러분 주님의 이 말씀에 우리 모두 아멘하시기 바랍니다. /할/ 주님의 말씀을 우리가 믿으면 지금도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습니다. /믿/
예수님은 마르다에게 믿음의 실천을 요구하셨습니다. 오늘날도 우리 하나님은 성도들에게 확실한 신앙고백과 행함의 결단을 요구하십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인간의 고백과 실천을 통해 나타납니다. 우리가 가만히 있으면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광야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실 때 처음에 빌립에게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에게 먹이라'(요6:5)고 하십니다. 빌립의 믿음을 시험해 보셨습니다. 그러나 빌립은 믿음의 고백과 실천을 하지 못하고 '돈도 없고, 떡도 없다'고 했습니다. 이때 안드레가 한 소년의 도시락으로 싸온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덩이를 주님 손에 드리니 오천 명을 먹이시고 열두 광주리를 남기는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할/ 주님은 안드레의 믿음과 행함을 보시고 역사하신 것입니다.
오늘날도 우리가 눈에는 아무 증거 안보이고 귀에는 아무 소리 안 들려도 손에는 잡히는 것 없을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해서 믿음을 고백하고 실천하는 사람에게 기적을 허락하십니다. /믿/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우리의 삶이 절망으로 인해 앞 길이 칠흑같이 어둡다 할지라도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이 말씀부여 잡고 담대히 믿음으로 고백하고 행함으로 나가면 어리고 성이 무너지고 홍해가 갈라지고 반석에서 생수가 터집니다. /할/ '순종하면! 행하면! 실천하면! 따르면!' 이런 역사는 지금도 일어납니다. /믿으시면 아멘!/
④주님이 '돌을 옮겨 놓으라'고 명하신 것은 인간의 노력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인간의 노력을 무시해버리고 무조건 축복만 달라고 합니다. 이것은 비극입니다. 주일을 지켜야 합니다. 공 예배 때마다 나와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전에 나와 봉사를 해야하고 전도도 해야합니다. 말씀공부도 열심히 하고 깨어 기도하는 성도들이 하나님의 이적과 능력을 붙드는 비결입니다. /믿/아멘!/
두 여인이 있는 힘을 다해 돌을 밀어내자 캄캄한 굴 무덤이 나타났습니다. 시체 썩은 냄새가 주위에 진동합니다. 그때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저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41-42) 기도를 마치신 후에 예수께서 '나사로야 나오라!'고 명하시니 나사로가 얼굴이 수건에 사인 채로 수족이 베로 동인 채로 무덤에서 나왔습니다. /할/
순간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깜짝 놀라면서 예수님께서 현재 역사 하시는 메시아임을 믿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 기독교는 무덤에서 생명으로 불러내는 종교입니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멸망에서 영생으로, 어둠에서 빛으로 이끌어 내는 종교입니다.
어떤 분은 재미있는 말을 했습니다. 주님이 지금 그 자리에서 그냥 '나오라'고 하지 않으시고 '나사로야 나오너라'고 하신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냥 '나오너라'고 했다면 공동묘지에 있는 모든 시체들이 다 나왔을 거라는 겁니다. 그래서 나사로의 이름을 불렀다는 것입니다. /믿거나 말거나/할/

 

4. 본문에서 주는 교훈을 몇 가지로 생각해 보겠습니다.

 

①예수님은 잠든 인생들을 깨우려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에덴에서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과 단절된 인간들이 죄의 잠에서, 불 신앙의 무덤에서 잠을 자는 인간들을 깨우러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내가 깨우러 가노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깨우는 것이 구원이요, 부활이요, 영생임을 성경은 말합니다.
시17:15절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보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 또 롬13:11절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니라" 성도는 잠에서 깨어난 자들이요, 죽음에서 깨어난 자들입니다. /믿/
그러므로 죽음에서 잠에서 깨어난 자들은 늘 깨어 있어 시험에 들지 않도록 조심해서 믿음을 지켜야 합니다. /아멘입니까?/ 겟세마네 동산에서 제자들이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너희가 나와 함께 한시 동안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성도들이 시험에 빠진 것을 염려하십니다. 시험의 잠에서 깨어나라고 하십니다. 불 신앙의 잠에서 깨어나라고 하십니다. 성도가 깨어 있어야 주의 음성을 들을 수가 있습니다.

 

②잠을 깨우기 위해 큰소리로 나사로를 부르십니다.
예수님은 큰소리로 나사로를 불렀습니다. 이는 나사로가 죽음의 깊은 잠이 들어 있기 때문에 큰 소리로 깨우신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부르는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무덤은 죽은 자가 누워 있는 곳입니다. 주님은 나사로가 누워 있는 것을 보시고 35절에 '눈물을 흘리셨다'고 했습니다.
왜 우셨습니까? 나사로란 뜻은 '엘르아살'에서 온 이름으로 '하나님은 나의 도우심, 하나님을 의존하는 자, 하나님을 믿는 자 곧 성도'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주님은 우리가 '죄에 잠에서, 어둠의 잠에서, 불 신앙과 불순종의 잠에서 깨어 있어야 할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깊이 잠들어 있는 모습을 보시고 슬피 우신 것'입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인을 쳐주셨지만 마귀의 종이 되어 끌려 다니는 백성들을 보고 우십니다. 우리는 일어나야 합니다. '일어나라'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일어나라'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일어나는 자'는 복을 받습니다. /아멘!/
요셉은 보디발의 아내가 조용한 장소에서 유혹할 때 하마터면 무덤 속에 갇힐 뻔했었는데 '요셉아, 어서 나오라'는 양심의 음성을 듣고 옷가지 벗어 던지고 도망쳤습니다. 그러나 삼손은 드릴라의 무릎에서 잠자다가 수없이 나오라는 양심의 음성을 들으면서도 끝내 나오지 못하고 망했습니다.
주님의 음성을 듣는 자는 오늘도 일어설 수가 있습니다. /할/ 주님의 명령은 창조주의 명령이므로 권세가 따릅니다. '실패에서 나오라! 좌절에서 일어나라! 질병에서 나오라!' 지금도 명하십니다.
우리는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주여! 세상의 어떤 유혹보다도 강한 주님의 목소리가 내게 들려지게 하옵소서!' /아멘!/ 요5:25절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③살아난 나사로를 풀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무덤에서 나온 나사로를 '풀어놓아 다니게 하라'고 명하십니다. 그는 장사되었던 그대로 나왔습니다. 그는 살았으나 산 사람의 행동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손과 발이 여전히 목이여 있었고, 눈은 가리웠고, 얼굴을 싸여있습니다.
먼저 얼굴의 수건을 벗겨야 합니다. 그래서 두 눈으로 주님을 바라볼 줄 알아야 합니다. 바울은 '믿음으로 우리를 온전하게 인도하시는 예수를 바라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보고 달려가면 세속에 빠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환경 바라보고 달려가다 베드로처럼 물에 빠집니다.
또 얼굴에 수건을 벗는다는 것은 위선을 벗고 '진실 하라'는 것입니다. 얼굴에 가면을 쓰고 거짓되게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는 좀 더 진실해야 합니다. 또 수족을 묶는 끊을 풀어야 우리는 일할 수가 있습니다.
많은 교인들이 열심히 교회를 다니면서도 세속에 수족이 묶인 채 다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세속에 묶인 손과 발을 풀고 우리 열심히 기도하고 봉사하고 선한 사업에 앞장서야 합니다. /할/아멘!/

 

④수의를 벗고 새 옷을 입어야 합니다.
수의를 입고는 다닐 수가 없습니다.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일입니다. 롬13:12절 "밤이 깊고 낮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또 엡4:22-24절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할/

 

⑤여기서 우리가 중요한 것은 부활신앙이 확실해야 합니다.
여러분, 부활 신앙이 확실합니까? /아멘!/할/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오늘 우리는 어떤 부활신앙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마르다처럼 삶의 현장에서는 아무런 효력을 발휘할 수 없는 아무런 능력이 없는 겉만 번드름한 부활의 신앙으로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입으로만 시인해 버리는 그런 신앙으로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하고 교회를 들락거리면서도 부활신앙이 없으면 아무런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나 부활신앙을 가진 사람은 다릅니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할/
▶미국의 유명한 부흥사 D.L 무디가 임종할 때 많은 사람들이 그의 임종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 때 무디는 감격에 찬 음성으로 이렇게 외쳤습니다. '보라 영화스럽도다. 땅이 물러가고 하늘이 열리는구나. 하나님이 나를 부르신다' 그러면서 그는 주변의 사람들에게 이렇게 마지막 당부를 했습니다. '여러분 내일 아침 조간 신문에 무디가 죽었다는 기사가 나도 믿지 마십시오. 이렇게 무디는 하늘로 올라가지 않습니까?' /할/
그렇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부활신앙이 부활될 때 우리의 가정도 부활될 줄 믿습니다. 우리의 부활신앙이 부활될 때 날마다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하며, 우리의 삶을 통해서 날마다 죽었던 나사로가 살아나는 경험을 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아멘!/
전도는 죽은 나사로를 살리는 일입니다. 얼마나 축복된 일입니까? 절망을 회복시키는 것입니다. 부활신앙은 그리스도의 생명을 오늘 나의 삶 속에서 체험하는 일입니다. 우리 모두 부활의 산 증인이 되어 위대한 승리자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할/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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