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δεδομένα 18,185편 ◑/उपदेश सामग्री 16,731편

십자가의 자랑! 예수의 흔적! (갈 6:14-17)

by 【고동엽】 2022. 2. 8.

십자가의 자랑! 예수의 흔적! (갈 6:14-17)

 

어느 사람이 바닷가를 거닐다가 마법의 등잔을 주었답니다. 이 등잔을 손으로 문지르면 속에서 노예가 나와서 모든 소원을 다 들어준다는 '알라딘의 램프'였습니다. 이 마법의 등잔을 주운 사람은 감격하면서 얼른 손으로 등잔을 문질렀습니다.
그러자 노예가 나와서 이렇게 말을 합니다. '주인님, 이제는 꼭 한 가지 소원만 남았습니다. 이것을 이루어 드리고 나면 아무 것도 나올 것이 없습니다.' 한번 밖에 소원을 들어줄 수 없다는 노예의 말을 듣고 곰곰이 생각한 후에 노예에게 말하기를 '앞으로 올 일 년 후의 그 날짜의 신문을 꼭 가져 오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일 년 후에 주식시장의 주가를 미리 다 알 수 있다면 거기에 투자를 해서 틀림없이 억만장자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드디어 노예가 일 년 후의 신문을 가져왔습니다. 이 사람은 재빨리 주식시장의 소식을 빨리 보려고 신문을 넘기다가 우연히 사망자의 이름과 학력 장례 일을 소개하는 난이 먼저 눈에 띠었습니다.
이 사람은 그 난을 보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망자의 장례식 기사의 맨 첫줄에는 자기의 이름과 장례식 일시와 장소가 기록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현명한 사람은 죽음을 준비하는 사람입니다. 어느 주일학교 학생이 어머니에게 말했습니다. '어머니 여행갈 때 입는 옷만 준비하지 말고 천국 갈 옷을 준비하세요!'라고 했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죽음을 준비하는 것이 고작 보험에 드는 것으로 착각합니다. 해변 가에서 놀던 어린이가 엄마에게 달려와서 '엄마 나 물에 들어가 수영해도 되요?'하고 묻자 '안 돼, 물이 너무 깊어서 위험하단 말이야' 아들이 '그럼 아빠는 왜 수영을 해' 그러자 엄마는 말하기를 '아빠는 보험에 들어서 안전하단 말이야'
무엇이 안전하다는 말인지 그 의중은 우리가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보험금이 아닌가 생각이 됩니다. 그러나 보험이 우리 생명을 지켜주지 못합니다. 영원한 생명은 오직 하나님 안에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사순절 절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인간의 죄 때문에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셨다가 3일 만에 부활하신 부활주일이 4월 둘째주일입니다. 그 부활주일 40일 전부터 사순절이라고 하는데 그 안에 예수님의 고난주일이 있고 십자가의 죽음이 있습니다. ◀제목 소개!▶

 

우리의 신앙의 초점은 '내가 무엇을 하느냐? 안 하느냐?'에 있지 않습니다.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중요한 것입니다. 내가 주님을 깊이 사랑하고 주님께 깊이 동화되고 주님을 깊이 모시고 동행하게 되면 자연이 주님이 원하시는 삶이 내 안에서 이루어지게 됩니다. /믿/ 주님을 떠난 도덕성, 주님을 떠난 모든 가르침은 다 의미가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만 강조되는 설교를 들으면서 '밤낮 교회와야 예수 이야기 밖에 하는 것이 없어! 그 소리가 그 소리야!'합니다. 그러나 교회에서는 밤낮 예수 이야기만 해야 합니다.
저희 행복한 강단에서는 계속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십자가의 죽음 그리고 부활과 승천과 다시 오실 재림의 주님만을 전하려고 합니다. 왜 그런지 아시지요? 예수님만이 생명이요 십자가만이 부활의 능력이요 예수님만이 우리를 저 천국으로 인도하실 수 있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할/
본문 14절에서 바울은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십자가는 예수님 당시의 흉악범을 처벌하는 저주의 형틀이었습니다. 수많은 강도들과 살인범들과 로마의 반역자들이 십자가에서 죽어갔습니다. 그러나 그 중의 어떤 사람의 십자가도 우리에게 기억되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만이 구원의 상징이요, 평화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설교의 왕자라고 일컬어지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스펄전 목사님은 그의 설교 90%가 예수님의 십자가가 나오지 않으면 가슴이 답답해서 견딜 수 없다고 고백했습니다. 그의 설교는 오직 예수요, 오직 십자가입니다. 그런데 이 목사님이 하루는 이런 간증을 했습니다. 어느 날 성경을 조용히 묵상하다가 십자가의 장면이 나왔는데 목사님 마음속에 십자가의 구속의 감격이 없더랍니다. 그래서 울기 시작했습니다. '주님! 나를 구원한 이 십자가 앞에서 왜 나의 마음속에 감격이 사라진 것입니까?'
날마다 들어도 마르지 말아야 할 그 감격의 샘터! 그것이 십자가입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향한 감격이 사라졌다면 그것은 우리의 신앙이 무엇인가 근본적으로 잘못되어 있다는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십자가는 우리 신앙인의 최고의 영광입니다. 십자가가 없는 기독교는 기독교가 아닙니다. 십자가 없이는 죄 사함이 없고 십자가 없이는 구원의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내게 자랑할 것이 없노라!' /할/
자랑은 인간의 본능인지도 모릅니다. 사람들은 자랑하기를 좋아합니다. 저는 우리 성도들을 자랑합니다. 사람들은 힘을 자랑합니다. 돈을 자랑합니다. 명예와 권력을 자랑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인생의 연륜과 경험을 자랑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의 지식과 지혜를 자랑합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의 이력을 자랑하고 자기의 특별한 달란트와 은사를 자랑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의 종교적 충성을 자랑합니다.
예전에 국회의원 선거에 입후보한 많은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의 이름을 팔아가며 몇 개의 교회를 세우고 몇 군대를 선교하고 그들의 자랑을 들었습니다. 사람들은 자랑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런데 자기자랑을 늘어 놓다보면 서로의 감정이 몹시 상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옛말에 '자랑 끝에 불붙는다'는 말도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 요일2:16절에 보면 '세상 것은 자랑할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또 약4:16절에 '허탄한 것을 자랑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참으로 우리가 자랑해야할 것이 무엇입니까?
믿음의 대부 사도바울의 고백은 무엇인가?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노라' /할/

 

▶여기서 바울 사도가 강조한 그의 신앙의 키포인트인 '내게는'이라는 말이 매우 인상적입니다. 자기에게는 이란 말입니다.
⑴내게는 '십자가가 전부입니다.'라는 고백입니다.
왜냐하면 십자가 안에 구원이 있고, 영생이 있고, 자유가 있고, 무한한 은혜가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곧 복음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할/
⑵내게는 '세상 것이 있지 않습니다.'라는 고백입니다. 예수를 만난 바울은 세상을 버렸습니다. 여기 '세상'은 불 신앙적 요소와 악의 총체를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십자가의 은혜를 체험하고 거듭난 바울은 영혼을 그리스도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그 세상을 십자가에 못 박아 버렸습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십자가에 못박아버렸습니다. 모든 쾌락과 명예와 물질도 바울의 마음을 흔들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는 벌써 세상에 대하여 죽은 자였기 때문입니다.
여기 '세상에 대하여 죽었다'는 말은 세상에 대한 무관심을 나타내는 말로 그리스도의 나라와 전혀 상관이 없는 세상, 인생에게 소망을 조금도 줄 수 없는 세상, 결국 하나님의 심판으로 없어질 이 세상에 목적을 두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더 적극적으로는 예수께서 말씀하신 대로 이제는 '그의 나라와 그의 의'(마6:33)를 추구하며 살아가는 삶을 말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힘있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갈2:20절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할/
⑶내게는 '예수의 흔적을 가졌습니다.'라는 고백입니다.
이것은 일찍이 역사에 없었던 자랑입니다. 바울은 자기의 체험을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또 자기의 명예와 업적을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또 자기의 잘난 논리를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자랑할 것이 없었을까요? 아닙니다. 빌3:5-6절에 "내가 팔일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

보세요! 사랑과 충성과 용기와 진실의 상징이었던 가장 자랑스러운 이스라엘의 베냐민지파에 속한 사람입니다. 또 '나는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이라는 말은 모든 세계의 언어 가운데 가장 뛰어난 히브리어를 능란하게 구사할 수 있었다는 고백이고, 또 히브리인의 탁월한 교육과 유명한 가말리엘 문하에서 유대인의 철학적인 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는 말이며, '바리새인'이라는 말은 율법의 영광과 전통을 소중히 여겨온 사람이며, 종교적인 정통성에 모든 것을 돌파한 사람이며, 열심히 말하자면 유대교를 정면으로 뒤집고 나온 교회를 핍박했던 사람이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사람'이었다고 바울은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런 바울이 어느 날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광채 앞에 비로소 자기 자신을 발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엎드리며 자기를 찾아온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 앞에 소리칩니다. '주여! 뉘시오니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예수님을 만난 바울은 그의 고백이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빌3:7-9절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바울이야 말로 모든 조건들을 자랑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사람들은 바울에 대하여 이렇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바울은 이 세상을 몰랐기 때문일 것이다. 바울이 돈을 사랑했다면 그것을 자랑했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황금의 권력을 알았다면 그 황금의 위대한 힘을 자랑하지 않았겠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누구보다도 바울은 이 세상을 잘 알았던 사람입니다. 바울은 당시에 쟁쟁한 권력자들을 만났습니다. 바울은 나폴리의 엄청난 부를 보았던 사람입니다. 그는 친히 아테네를 방문하고 지성을 자랑하는 수많은 사람들과 더불어 토론하며 지식의 참된 속성과 본질을 알았던 사람입니다.
그는 친히 폼페이를 방문했으며 폼페이의 수많은 쾌락과 허영과 환락의 정체를 잘 체험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세상의 어두움과 허영을 잘 알았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 불과하다는 그 정체를 알았습니다. 또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사단의 지배 아래 있음을 알았고 이 세상의 허구와 속임수를 이 세상의 찬란한 그 모든 영광의 배후에는 허무함과 쓰디쓴 독초 같은 죄악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세상에 돈을 자랑하지 않았으며 명예와 권력과 인기를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바울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만을 자랑한다'고 했습니다. 이것 밖에는 바울 사도에게 아무것도 자랑할 만한 것이 없었던 것입니다.


▶왜 하필이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자랑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분이 탄생하는 날 하늘의 천사들은 노래했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동방박사들이 멀리서부터 와서 예수님 앞에 경배하며 황금과 몰약과 유향을 드린 주님의 탄생을 자랑할 만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왜 예수님의 탄생을 자랑하지 않았습니까?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날 수많은 예루살렘 군중들이 나와서 호산나 다윗의 자손을 찬송하며 환영과 인기와 갈채를 보냈던 그 장면을 자랑할 수도 있었습니다. 아니 죽음을 깨뜨리고 승리하신 부활의 영광도 자랑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십자가만을 자랑했습니다. 그 십자가는 저주의 십자가요, 치욕의 십자가요, 고난의 십자가였습니다.
▶하필이면 왜 십자가만 자랑한다고 바울은 말했을까요? 그것은 십자가에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알았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기에 우리를 사랑하사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십자가를 통해서 확정되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바울은 비로소 죄가 얼마나 무서운 것이며 하나님의 공의가 얼마나 엄격한 것인가를 깨달았습니다. 죄가 얼마나 무서운 것이었으면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인류의 죄 값으로 못을 박았겠습니까?
인간의 죄를 철저히 추적하여 심판하신 하나님의 공의가 십자가를 통하여 나타났습니다. 십자가!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가 놀랍게 조화된 하나님의 완벽한 지혜의 산물입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그대로 관과할 수 없는 의로우신 하나님이십니다. 이 죄의 문제와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이 바로 십자가 아래서 입증되었습니다. 사도바울은 십자가 안에 구원의 능력이 있음을 깨닫고 나서부터는 롬1:16절에서 말하기를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또 고전1:18절에서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한번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 밤 겟세마네 동산의 주님을 바라보십시다. '할 수 있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마태는 그때 우리의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심히 고민하여'라는 말은 고통이 너무 심해서 터질 듯한 모습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마가는 그 날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는 우리 주님의 모습을 보고 '심히 놀라시며 슬퍼 하사'라고 표현했습니다. 누가는 기도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묘사하기를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기까지 기도하셨다'고 했습니다. '할 수 있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이 말씀은 단순히 고난의 잔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죄악의 잔이었습니다.
그 잔 속에는 내일 아침이면 주님을 통하여 주님이 담당하셔야 할 인류의 죄악이 담겨져 있는 잔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죄를 짊어진다는 말을 바꾸어 말하면 그분이 죄를 범한 사람처럼 되어 대신 심판과 저주를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경은 우리 주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묘사했습니다. 죄를 알지도 못하는 그분이 십자가를 거부하신다면 그 잔을 거부하시면 그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영원히 불과 유향이 타는 지옥 불이 떨어져야 할 인류들의 모습을 우리 주님은 바라보신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하고 기도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십자가를 지시던 날 호산나를 소리치며 그분을 환영하는 군중들의 모습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오천명이 넘는 사람을 먹이실 때 그분께 감사하던 군중들의 모습을 고독한 주님의 목전에는 더 이상 아무도 없었습니다. 내가 당신을 위해 죽는 데까지 가겠다고 큰소리치던 베드로의 모습도 없었습니다.
쓰러지며, 넘어지며, 골고다의 언덕을 오르시는 그 주님의 모습 속에서 우리들이 구세주의 모습을 발견해야 합니다. 십자가에 양손과 양발의 못 박힘을 당하시고 마침내 하늘과 땅 사이의 십자가에 매달리시는 우리 주님, 우리 모두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아멘!/ 그분은 마침내 십자가에서 '내가 다 이루었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들의 죄와 저주와 사망과 허물을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거듭해서 내가 '다 이루었느니라'고 하십니다. /할/


▶여러분 진정 이 십자가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이 절망의 십자가는 우리에게 희망을 가져다줍니다. 이 치욕의 십자가는 우리에게 영광을 가져다줍니다. 이 저주의 십자가는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줍니다. 이 정의의 십자가는 우리에게 평화를 가져다줍니다. 이 말할 수 없는 곤욕의 십자가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었습니다. 이 미움의 십자가는 우리에게 사랑을 심어주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말합니다.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노라!' 여러분! 사도바울의 이 고백이 오는 저와 여러분의 고백이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아멘!/할/
이제 우리 모두는 십자가 안에서 한 피 받은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크리스천이란 이름은 초대교회 안디옥에서 불렸습니다. 성도들을 보고서 불신자들이 붙여준 이름인데 '예수쟁이'라는 말입니다. 즉 '크리스티아 노스', '예수 전문가, 예수의 무리들, 예수님의 것'이라는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세상에서도 전문가를 부를 때에 쟁이라는 말을 씁니다. 땜장이, 침쟁이, 이발쟁이 등, 그렇다면 우리 그리스도인이라면 예수님에 대해서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전문가가 되어야 합니다. '기도의 전문가, 말씀의 전문가, 전도의 전문가, 천국의 전문가'가 되어야 합니다. /아멘!/
지금 우리는 서로 성도라고 무르지만 초대교회 때는 제자라고 불렀습니다. 제자라는 말은 오늘날의 학생과는 다릅니다. 학생은 교사로부터 지식과 기능을 배우지만 제자는 스승의 인격을 배웁니다. 학생은 다 배우면 졸업을 하지만 제자는 평생 배워야 하므로 졸업이 없습니다.
제자는 스승의 인격, 성품, 지식, 사상, 그분의 신앙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자는 배우고 따르고 절대 순종하고 절대 신뢰하고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은 예수님을 본받고 닮아 가는 삶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제자 됨의 증거는 예수님을 닮은 흔적이 어느 부분이라도 나타나야 합니다. 내가 나를 보아도 예수 닮은 흔적이 보이고, 남이 나를 보아도 예수님을 닮은 흔적이 있어야 합니다. /믿/
바울은 십자가만 자랑한다고 했고, 17절에서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고 했습니다. 한마디로 나는 예수님의 제자라고 선언한 말씀입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소유한 것이나 자기가 만든 것에 흔적을 남기곤 합니다.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은 어디를 가든지 자기 이름을 나무나 돌등에 새겨놓기도 하며 사진도 많이 찍어 둡니다.
옛날 노예제도가 있을 때에도 주인이 노예에게 또는 말이나 황소 등에게도 그 주인의 흔적을 새겨 놓습니다. 유대인들도 가슴에다 유대인의 표시로 노란 별을 달고 다녀서 어디 가든지 이 유대인의 흔적 때문에 핍박을 당했습니다.
또한 자녀들의 외모나 성격이나 행동들을 보면 부모의 흔적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자기의 흔적을 가졌기에 사랑하고 간섭하고 책임을 지는 것이며 나쁜 짓을 하면 잠을 이루지 못하면서 고민하는 것입니다.
흔적은 히브리어로 '스티그마'인데 이는 로마에서 희랍에서 주인의 소유를 표시로서 짐승의 몸에다 쇠도장을 찍는 표시입니다. 또 전쟁에서 포로로 잡아온 노예를 표시하는 것도 스티그마라고 합니다.

 

▶'스티그마'가 무엇인가?
⑴스티그마는 자신의 몸이 자기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팔려온 주인의 소유임을 나타내는 표식이요, ⑵스티그마는 병사의 복장에 그 지휘관의 이름을 새겨 표식으로 나타내는 경우를 의미합니다. ⑶스티그마는 소와 양에게 낙인을 찍어 소유주를 나타낼 때 사용하였습니다. ⑷스티그마는 도망간 노예가 붙잡히면 그 노예의 몸에 불에 달군 인두로 주인의 이름을 새길 때 사용했고, ⑸스티그마는 그 주인을 위한 절대적인 복종을 나타내는 표식입니다. ⑹스티그마는 엄격한 자유의 통제를 나타내는 표식입니다. ⑺스티그마는 사실상 죽음의 표식입니다.
스티그마는 불명예스러운 단어임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예수님 안에서 영광스럽게 자신에게 이 흔적이 있음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내 몸에 예수님의 흔적을 가졌노라'고 한 이 외침은 당시 유대인들에게 보내는 도전적인 말입니다.
유대인들의 몸에는 선민 이스라엘의 흔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으로부터 이어지는 할례입니다. 유대인들은 할례 받은 민족으로 신민의 흔적을 자랑삼고 있었습니다. 할례 받은 흔적을 가진 자에게는 구원이 있음을 선포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십자가 안에서는 할례나 무 할례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역설합니다. 바울이 그토록 유대인들에게 핍박을 받았던 원인 중에 하나가 바로 할례의 무의미를 주장했다가 그런 어려움을 당했습니다.

 

①흔적은 그리스도인의 최고의 신앙고백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그리스도인 됨을 입술로 증거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다가 처형당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바울 당시 로마 황제 치하에 있던 사람들은 황제를 큐리오스(주)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이 칭호를 그리스도에게만 사용했습니다. 내 몸에 예수님의 흔적을 가졌다는 바울의 고백은 곧 나는 예수님의 종이요 그의 소유로 죽으나 사나 주님의 것이라는 개념입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인은 자기의 소속감을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땅에 살고 있으나 하늘의 시민권을 가진 자요, 세상에 살고 있으나 세상 사람들과는 사는 목적이 다르고 종착점이 다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언젠가는 예수님 앞에서야 합니다. 그때 예수님이 '내가 너를 확신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의 흔적을 보여 다오'라고 요구하신다면 우리가 무엇을 보여 드리겠습니까? 예수님의 흔적을 만드십시다. '내가 죽어도 주의 것이요, 살아도 주의 것이요'라는 분명한 고백이 예수님의 흔적을 가질 수 있습니다.

 

②예수의 이름으로 다른 사람의 영혼을 살리는 전도의 흔적이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전도 여행 중에 행14:19절에 보면 실제로 갈라디아 지방의 한 성 루스드라에서 돌에 맞은 후 죽은 줄로 여김을 받아 성 밖에 버려진 일까지 있었습니다. 고후11:22-28절에 보면 바울이 예수님의 복음을 위해서 수없이 매를 맞았다고 증거합니다. 유대인들에게 40에 하나 감한 매를 5번 맞았습니다. 태장으로 3번 맞았고, 돌로 1번 맞고, 3번 배가 파선하는데 1주일 주야를 깊음에서 지냈고, 여러 번 복음을 들고 여행 중에 위험이 따르는데 강, 강도, 동족, 이방인, 시내, 광야, 바다, 거짓 형제의 위험을 당했고, 잠자리도 편치 못하고, 목마르고, 굶고, 춥고, 헐벗었던 흔적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③예수 이름으로 핍박받은 흔적이 우리에게 있다면 우리는 축복입니다.
마5:11-12절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딤후3:12절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한 걸음 더 나가서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행14:22)고 말씀하십니다.

 

④우리는 주님 앞에 충성의 흔적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충성을 요구하십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되어 주님의 뜻에 자기의 전 생애를 바치며 살았습니다. 그의 온 몸은 충성스런 종의 흔적 뿐 이었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두 종류의 흔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쾌락과 동물적 본능에 따라 산 죄악의 흔적을 가진 사람이요, 다른 하나는 주님의 말씀에 따라 산 흔적을 가진 사람입니다.
본문에서 '흔적을 가졌노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낙인이 내 등에 찍혔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철저하게 충성스런 삶을 살았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여러 번 죽을 뻔했고, 동족들에게 버림도 받았고, 먹고 입고 자지도 못한 때가 많았습니다.
육체적인 고통은 말할 것도 없고, 정신적으로도 날마다 고통이 있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이 모든 것이 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충성의 흔적을 보인 것입니다. 주님은 이 많은 충성의 흔적을 보시고 '잘했다. 충성된 종아, 네가 너에게 열 고을을 다스릴 권세를 주겠노라! 너는 내 잔칫상에 참여함을 받으라. 내가 너를 위하여 생명의 면류관을 예비하였느니라.' /할/
우리 모두 충성의 흔적을 가지고 이 귀한 축복을 누리십시다. /아멘!/ 여러분 십자가를 벗어 던지고 평안히 예수 믿으려는 사람은 참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나의 마실 고난의 잔을 너희도 마실 수 있느냐?'라고 물으신 이 다짐 앞에 '예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을 것이며 나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겠으며 좁은 문으로 들어갈 것을 고백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흔적은 고통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기적은 고난의 작품입니다. 가장 위대한 기적의 시대는 가장 큰 고난을 극복한 자에게 열려있습니다.
A.D 325년 콘스탄틴 대제에 의하여 소집된 세계 제 1차 종교 회의인 니케아 회의에 모인 감독의 수는 300명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회의에 참석한 감독 중에는 오른쪽 눈이 뽑힌 사람, 양손이 없는 사람, 그 외에 다른 여러 불구자들이 참석했습니다. 이들은 모두 주를 위해 받은 고난의 흔적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⑤우리는 박해의 흔적은 없다 할지라도 무릎 꿇고 기도한 흔적은 있어야 합니다.
기도를 많이 한 사람은 무릎과 발목에 굳은살이 박입니다. 하나님은 기도하다가 생긴 흔적을 기뻐하십니다. ▶야곱도 기도의 흔적을 일생 지니고 살았던 사람입니다. 형 에서가 자기를 죽이러 400명의 군사를 끌고 올 때에 '죽느냐 사느냐'의 갈림길에서 밤새 부르짖으며 기도했습니다. 그 때 천사가 나타났습니다. 야곱은 그 천사에게 '축복을 주고 떠나라'며 놓지 않고 매달리자 이 때 천사는 야곱의 환도 뼈를 쳐서 야곱을 죽을 때까지 절었습니다. 물론 기도응답을 받았습니다. 야곱은 환도 뼈가 부러져서 일생을 절었습니다. 기도의 흔적이었습니다.
▶기도의 왕이라 별명을 가지고 있는 '죠지 뮬러'에게도 기도의 흔적이 있었습니다. 그는 후원자 한 명도 없이 3,000명의 고아를 일생동안 하나님의 방법으로 먹여 살린 신비한 기도의 왕이었습니다. 모두가 신비하게 생각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어느 날 한 부자가 뮬러에게 와서 물었습니다. "당신의 돈 나오는 구멍이 도대체 어디요?" 뮬러가 알고 싶으면 따라 오라고 하면서 자기의 기도 실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는 너무나 기도를 많이 하여 구멍이 난 방석을 들어 보이면서 말했습니다. "이 구멍이 바로 돈 나오는 구멍이요" 이런 기도의 흔적을 가지고 있었던 뮬러를 하나님께서는 놀랍게 사용하셨습니다. /할/
▶프란시스 이야기입니다. 성 프랜시스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잊은 적이 없었습니다. 어느 날 길을 가면서 눈물을 흘리니까 제자가 묻습니다. '선생님 왜 우십니까?' 그러자 '예수의 십자가의 고난을 생각하고 울고 있노라'고 하면서 '나는 예수를 위하여 십자가를 등에 지고 땅 끝까지 헤매어도 부끄럽지 않다'고 했습니다. 그는 두 가지의 기도제목이 있었는데 하나는 '내 생전에 주님이 친히 맛보셨던 십자가의 수난을 맛보게 하옵소서'이고, 또 하나는 '주께서 우리 죄인을 위하여 그처럼 참으실 수 있었던 그 불타는 끝없는 사랑을 알게 하여 주옵소서' 그렇게 눈물 뿌려 간구 하던 어느 날 그는 자기도 모르게 손바닥에 십자가의 흔적이 나타났고 옆구리 창자 국에서 물이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기도하다가 주님의 형상, 즉 흔적을 받은 것입니다. /할/

 

⑥이제 우리에게 눈물의 흔적이 있어야 합니다.
베드로와 같은 통회하는 눈물이 있어야 합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부인하고 배신하던 밤에 닭의 울음소리를 듣고 주님의 말씀이 생각이 나서 베드로는 밖으로 뛰어나가 통곡하고 울었습니다.
그 통곡하는 눈물이 있었기에 베드로는 예수의 수제자의 위치를 지켜나갈 수가 있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눈물로 매달려 보십시오, 하나님은 성도의 눈물에 약하십니다. 히스기야 왕은 눈물로 기도하다가 응답을 받았습니다.

 

⑦이스라엘은 매 맞을 흔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이스라엘을 바라보는 하나님의 탄식이 사1:2-3절에 기록되어 있는데 한마디로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서 '배은망덕한 죄를 지었다'는 말씀입니다.
5-6 "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더욱더 패역하느냐 온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뿐이어 늘 그것을 싸매며 기름으로 유하게 함을 받지 못하였도다" 주석학자들은 하나 같이 이스라엘의 세 가지 병을 말씀했는데 첫째 머리요 둘째 마음이요 셋째 발바닥이라고 합니다. '머리는 이스라엘 국가의 지도자요, 마음은 이스라엘 종교와 종교인들이요 발바닥은 이스라엘의 백성'이라고 주석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선지자를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책망하기를 '너희는 온 머리가 병들었다', '생각이 병들고 지식이 병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 곳도 성한 곳이 없다, 너희 생각이 병들었고, 마음이 병들었고, 손발로 행하는 모든 행위가 다 병들었다'고 책망하면서 '너희에게 남은 것은 매 맞을 일밖에 없다'고 경고하시면서 '지금 치료하고 싸매지 않으면 가망이 없다'고 애타게 호소하고 계십니다. 이 책망은 오늘 우리를 향한 책망일수도 있습니다. /할/
그러면서 하나님이 10절 이하부터 보면 유다 백성을 '소돔과 고모라'로 부르면서 그들의 상태가 얼마나 심각한가를 가르쳐 주는 말씀도 되고, 그들 앞에 무서운 심판이 다가오는가를 깨우쳐 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또 11-16절 "너희의 무수한 재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겠느뇨?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재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내 마음이 너희의 정한 월삭과 절기를 싫어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라."
요약해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예배를 거부하십니다. '너희들이 지금 영적으로 생각이 병들고, 마음이 병들고, 너희들의 행위가 병들어 있으니 내 앞에 와서 예배하지 말라, 재물을 드리지 말라, 기도를 드리지 말라'는 아주 단호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손에 피가 가득하다는 것은 두 가지 뜻입니다. 손은 일을 상징하는 의미인데 하나님이 그들의 손으로 하는 모든 일을 불신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손을 들고 기도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손을 들지 말라고 했습니다. '피 묻은 손을 들지 말라.' 불 신앙을 저지르면서 내게 기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또 손에 피가 묻었다는 말은 히브리 사람들의 이웃을 향한 범죄 문제를 말합니다. '이웃에게 상처를 주고, 이웃을 해롭게 한 그 모든 손에 피가 있다'고 표현합니다. '너희들은 내 앞에 나아올 자격이 없다, 재물을 드리지 말라, 너희들이 가지고 오는 재물 받기에 내가 피곤하다, 오히려 짐이 된다, 너희들은 성전 마당만 밟고 갈 뿐이다.'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탄식을 하시면서 선지자를 통하여 해결책을 하나님이 주십니다. 16절 이하를 요약해 보면 '먼저 씻고 버리라, 스스로 씻으라, 악업을 버리라, 하나님 앞에 악행을 그치라'는 것입니다. '씻고 버리라'는 것은 '회개'를 말합니다. 악한 행위를 버리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버려야 할 것은 버리는 일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스스로 씻으라' 우리의 할 일을 우리가 하라는 것입니다. '죄를 회개할 때 용서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지만 그 죄를 회개하는 것은 죄인이 해야' 합니다. /아멘!/

 

⑧이제 예수의 흔적을 가진 우리는 영원한 주의 종으로 살아야 합니다.
출21:1-11절에 보면 영원한 귀에 구멍을 뚫린 종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종들은 의무적으로 6년 간은 종살이해야 합니다. 그리고 7년 되는 해는 안식년이므로 해방이 됩니다. 그런데 주인과 살다보니 주인이 너무나 좋고, 나가서 자유인으로 사는 것보다 주인의 종으로 사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될 때가 있습니다. 나가보니 집도 없고 취직자리도 없습니다. 그럴 때에 처리하는 법이 규정되어 있는데 문설주에 귀를 댑니다. 그리고 귀에 구멍을 뚫어서 흔적을 분명히 남깁니다. 귀에 구멍을 뚫으면 6년으로 끝나지 않고 영원한 관계가 되는 순간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영원히 하나님의 종으로 살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어느 정당에서 정당 수련회를 하면서 주제를 내걸었습니다. '우리는 평생 동지다' 그러나 평생 동지는 없습니다. 관계가 깨질 때까지만 동지입니다. 조금만 이해관계가 어긋나면 언제나 배반하고 돌아섭니다. 귀에 구멍이 없습니다. 말로만 평생 동지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우리는 평생 동지다'라는 말을 한 번도 하지 않았어도 결론적으로는 평생 동지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평생 동지 관계입니다. /아멘!/
귀 뚫은 종은 자유를 거절하고 주님이 시키는 대로만 살겠다고 서원한 종입니다. 우리 모두는 내게 주어진 자유를 거절하고 매여 살겠다고 서원한 종입니다. /할/
▶링컨이 어느 날 노예시장을 걷고 있었는데 노예 한 가정이 팔려나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버지 따로, 어머니 따로 오빠 따로 팔려 가는 것을 보고 어린 딸이 목을 노아 울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노예해방을 소원했고 그 노예 한 가족을 다 값을 주고 사서는 '너희들의 몸값은 내가 다 지불하였다. 너희들은 자유다' 그러자 '주인님! 우리는 주인님을 따라가겠습니다. 그리고 주인님의 영원한 종이 되겠습니다.'
귀 뚫은 종이 된 것입니다. 우리도 이런 정신으로 매인잡니다. /믿/ 새벽기도 시간에 푹 잘 수 있습니다. 그러나 편히 잘 수 있는 기회를 거절하고 일어나 기도하는 사람이 귀 뚫은 종입니다. 내게 주어진 돈을 내가 다 쓸 수 있는 자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감사 드리고 10일조를 하나님께 드리고 사는 삶은 내가 쓰는 자유를 거절한 종입니다. 하루 24 시간을 내가 자유롭게 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절하고 하나님의 사역에 시간을 쓰는 사람들이 귀 뚫은 종입니다. /아멘!/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예수님은 인류의 최대의 영광스러운 흔적을 남기셨습니다. 인류의 죄를 담당하시기 위하여 머리에 가시관의 흔적을 남기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흔적을 부활하실 때 그대로 간직하시고 의심 많은 도마에게 보여주었습니다.
사람들은 화장품으로 마사지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의 흔적을 지니도록 하나님의 말씀으로 마사지하고 십자가의 보혈로 얼굴을 씻으십시다. /할/ 그리고 성령으로 기름 부어 아름다운 얼굴로 단장합시다.
이제 우리는 성령의 열매인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 흔적을 가져야 합니다. 바울은 나는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나는 예수님의 십자가 외에 자랑할 것이 없다'고 선언합니다. 십자가는 부활의 능력이 있습니다. 오늘도 십자가 아래 죽은 자가 살아나고 병든 자가 치료받고 실패자가 성공 자로 슬픈 자가 기쁨을 얻게 될 줄 믿습니다. /아멘!/할/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