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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숙한 신앙인의 자세! (약 1:2-12)

by 【고동엽】 2022. 2. 8.

성숙한 신앙인의 자세! (약 1:2-12)

 

여러분, 모든 것은 바른 성장이 있어야 축복입니다. 어린아이가 자라지 아니하면 보통 비극이 아닙니다. 자라야 힘을 씁니다. 내 인격 속에 지식이 자라면 세상에서 대우를 받습니다. 내 사업체가 커지면 모든 사람이 척사 대접을 합니다. 국력이 커져야 세계무대에서도 무시당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모든 것이 성장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신앙이 성장하지 못하면 늘 마귀의 밥이 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못합니다. 그런데 성장과 성숙은 다릅니다. 성숙은 계속되는 것입니다. 키는 어느 정도 자라면 끝이지만 인격의 성숙은 평생 계속 되어 가는 것입니다. 성도는 어디까지 성장해야 합니까? 엡4:15절의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나야'합니다.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의 분량 따라 축복을 주십니다. '내 믿음대로 될지어다.' /아멘!/ 그런데 신앙의 성숙은 고난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본문을 보면 살아가는데 찾아오는 많은 '시련들을 온전히 기뻐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야 신앙적으로 온전함을 이룬다고 했습니다. 여기 온전함이라는 말은 성숙함을 말하고 성장함을 말합니다.
야고보서는 예수님의 육신의 동생 야고보가 기록한 것으로 이 서신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가 '온전'이란 단어입니다. '온전케 함, 온전함, 온전케 하려함이니라'에서 보듯이 온전이란 말이 가장 많이 쓰여져 있습니다. 이는 '너희 하늘 아버지의 온전하심처럼 너희도 온전하라'(마5:48)는 주님의 명령을 그대로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이 온전이란 말은 '장성했다. 이루었다. 성숙했다.'는 다양한 의미로 본문에서 시도하고 있는 것은 믿음의 성숙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⑴성숙은 무엇이든지 참 좋은 것입니다.
그 모습은 보기에 좋고 내용이 좋습니다. 과일이 잘 익은 모습을 보면 얼마나 보기가 좋습니까? 보기도 좋지만 맛도 좋고 향기도 좋습니다. 씨앗을 심었더니 잎이 나오고 꽃이 피고 열매가 맺더니 그 열매가 아주 탐스럽게 익어갑니다. 거기서 맛이 나오고 멋이 나오고 진가가 나타납니다. 그것이 성숙함이 주는 기쁨입니다. 성숙함은 이렇게 소중한 것입니다.
자녀들이 잘 커서 성숙해 가는 모습을 보면 또 얼마나 보기가 좋습니까. 그 모습을 보기만 해도 행복해집니다. 그 아이가 커서 결혼을 하고 또 손자를 낳았습니다. 그 손자가 커 가는 모습을 보면 또 다른 행복감을 느끼게 됩니다.
식물이나 사람이나 열매를 맺는 모습은 아름답습니다. 거기다 사람이 성숙해서 인격과 지성이 푹 익어 가는 모습을 보면 또 얼마나 보기가 좋습니까? 이렇게 성숙하고 익어 가는 모습을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 성숙함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⑵그런데 이렇게 익어가고 성숙해지는 데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식물이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히고 결실하기까지도 한 계절이라는 시간을 필요로 합니다. 또 아이가 성장하는데도 많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사람이 영적인 성장을 이루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러야 하겠습니까. 평생 신앙생활 해도 그 신앙이 미완성입니다. 신앙인이 영적으로 성숙해지려면 한꺼번에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성격이 매우 급합니다. 그래서 신앙도 빨리 성장하기를 바랍니다. 일 년 믿고 세례 받고 집사 되고 권사 되고 장로 되고 싶은 마음들이 있습니다. 사람은 모두 빨리 성장되기를 기대하지만 하나님은 빨리 성장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그 보다 '얼마나 단단하게 얼마나 온전하게 성장할까?'를 생각하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절대로 급하게 서두르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하고자 하시면 우리를 즉시 변화시킬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완성된 사람으로 성숙하게 하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변칙적인 방법을 사용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출애굽을 시키는데 그 준비시간만도 80년이 걸렸습니다. 출애굽 후 가나안까지 가는데 40년 동안 가게 하셨습니다. 그것은 아주 조금씩 성장속도에 맞추어 나가게 하신 것입니다. 준비 없이 그 땅에 들어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한 사람을 영적으로 성장시키는데 많은 시간이 걸려서 성장하게 하십니다.
⑶성장하는 데는 반드시 괴롭힘과 고통이 수반됩니다. 식물들이 꽃을 피우기까지는 상당한 고통이 뒤따릅니다. 꽃이 피는데 꽃샘추위가 얼마나 괴롭힙니까? 때로 비바람이 얼마나 괴롭힙니까? 무엇이나 성장하려면 반드시 이 같은 고통이 수반됩니다. 아이들이 성장하는데도 고통이 따릅니다. 우선 공부해야하는 고통이 따릅니다. 우리나라 청소년들은 지옥훈련을 받듯 공부하는데 고생을 해야 합니다. 숨이 막힐 정도입니다. 아이들이 그러면서 성장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신앙성장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이 성장하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아픔이 있습니다. 그것은 버릴 것을 버려야 하는 아픔입니다. 믿지 않을 때 좋아하던 습관들을 끊고 버려야 합니다. 그때 포기해야 하는 아픔이 수반됩니다. 신앙의 길에 들어서게 되면 옛날의 습관도 끊어야 합니다. 술도 끊고 담배도 좋지 않은 습관들도 끊어버려야 합니다. 끊고 버려야 하려니까 이것이 보통 질긴 것이 아닙니다. 인이 박혀서 끊기도 어렵지만 또 한편 마음에서는 허전하기도 하고 아까운 마음도 듭니다.
이런 고통말고 또 하나의 고통이 더 있습니다. 그것이 신앙적으로 시험을 받는 일입니다. 신앙인에게는 끊임없이 이 시험이 다가옵니다. 알고 보면 이 시험은 참 좋은 것입니다. 그때 당시는 아픔이 있고 힘들기도 하지만 그 시험을 거치고 나면 곧 좋은 결과가 주어집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시련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뻐하라 이로써 인내를 이루리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들의 신앙은 성숙해야 합니다. /아멘!/


▶야고보서는 믿음이 온전히 성숙하지 못하는 이유를 다섯 가지로 말합니다.
⑴성급함을 들었습니다.
성미가 급한 것을 경계하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인내하라고 권면을 했습니다.
⑵행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신앙은 행할 때, 자라며 역사가 일어납니다. 기도해 보십시오. 능력이 임합니다. 전도해 보십시오, 주님의 사랑을 덧입습니다.
⑶혀를 조심할 것도 가르칩니다. 새치도 안 되는 혀! 여러분! 세상의 어떤 동물도 쉽게 길들일 수는 있어도 혀는 길들일 수가 없다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길들일 수도 없는 혀는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람이 뺨 한 대 맞고 자살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그러나 남의 말로 인해 깊은 상처를 받고 자살하는 경우를 우리는 종종 보게 됩니다. 야고보는 우리의 혀가 다른 사람에게 타격을 줄뿐만 아니라 우리 신앙생활에도 방해가 된다는 것을 지적해 줍니다.
⑷시기와 다툼 때문에 신앙의 성숙이 저해된다고 지적했습니다.
⑸물질에 대한 욕심과 애착 때문에 우리의 신앙의 성숙을 방해한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 주님은 '하늘의 아버지의 온전함처럼 너희도 온전 하라'는 영광스러운 목표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이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야고보는 시험을 통과하게 하며, 그 시험에서 승리하는 비결을 우리에게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그 당시 시대적인 배경은 주후 313년 로마의 콘스탄틴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하기까지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격심한 핍박과 박해를 받았습니다. 네로 황제는 그중 가장 무섭게 핍박하던 황제로써 큰 핍박이 10번이나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초기 기독교사는 '네로 황제 10대 박해사'라고도 합니다. 평소에도 박해가 계속되었으나 10대 박해 때는 저인망으로 송사리 때까지 멸하는 듯한 철저한 핍박이었습니다.
그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이 핍박을 피해 평생 공동묘지에 지하 무덤 속을 파고 '카타콤'에서 숨어살아야 했습니다. 그렇게 고통을 받으면서도 신앙을 버리지 않고 더욱 더 예수님을 사모하는 형제들에게 야고보는 글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인간적인 생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문장을 대합니다.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어떻게 시험을 받았는데 기쁘게 여길 수가 있습니까? 성경은 이렇게 우리에게 역설적인 교훈을 줍니다. 저는 먼저 이 말씀의 결론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이 시험은 '더욱 더 온전한 사람, 장성한 믿음의 분량까지 이르도록 하기 위한 하나님의 방편'이라는 사실입니다. /믿/아멘!/
열심히 공부한 학생들의 실력을 평가해 주는 시험이 없다면 어떻게 상 받는 자나 진학하는 자를 가려낼 수 있습니까? 주석가 풀빗은 '번영은 구약의 축복이고, 역경은 신약의 축복이다'라고 했습니다. 시험과 고난과 믿음의 단련을 위한 시험이므로 즐거운 마음으로 받아들이라는 의미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시험을 치러보지 않은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학교시험, 입학시험, 자격시험, 면허시험, 사범고시, 행정고시 등 수없이 많은 시험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러한 시험이 귀찮다고 해서 그냥 피해간다면 그 사람은 사회의 낙오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시험에는 이런 세상 적인 시험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인 시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인생은 온갖 종류의 시험을 뒤범벅이 되어 있습니다. 가정문제, 자녀문제, 질병의 문제, 물질의 문제, 또한 신앙의 문제와 같은 영육간 절반에 걸친 문제들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시험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그 하나는 하나님이 주시는 시험이고, 다른 하나는 마귀가 주는 시험입니다. 하나님께서 주는 시험은 마치 입학시험과 같습니다. 막상 시험을 치를 때면 괴롭고, 아프지만, 일단 시험을 합격하면 더 큰 영광이 옵니다.
마치 운동선수들이 최선을 다해 금메달을 땄을 때의 영광보다 더 큰 축복이 믿음의 시험을 통과한 사람에게 임하게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기쁘게 여기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귀가 주는 시험은 우리를 죽이고 도적질하고 멸망하시려는 시험이기 때문에 결단코 믿음으로 승리해야 됩니다. /믿/아멘!/
본문 2-5절까지를 자세히 보면 '여기라, 앎이라, 이루라, 구하라'는 네 가지의 단어를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단어 속에 우리가 당할 수 있는 온갖 시험과 시련 속에서도 믿음의 성숙과 삶의 풍요와 승리를 가져오기 위해 반드시 기억해야 할 신앙의 원칙들을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2절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여기 '여기라'는 단어는 시험을 기쁨으로 대하는 태도를 설명하기 위한 단어입니다. 쉽게 말하면 '시험을 만나거든 피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오직 시험을 '기쁘게 직면하라'는 것입니다. 옛말에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가라'는 말이 있습니다.
문제를 만나면 그 문제와 부딪쳐야 해결이 되지 피하면 근본적인 해결이 없습니다. /믿/ 성경은 예수를 믿으면 시험이나 어려움을 만나지 않을 것이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연단과 시험이 온다고 가르칩니다.
요16:33절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약속은 환난을 제거해 주시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환난 속에서도 승리를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십자가를 눈앞에 두고 '할 수만 있다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주님도 십자가에 고통을 피하고 싶었지만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므로 순종하면서 그 십자가를 질 수 있는 능력을 달라고 기도하신 것입니다. 주님도 그 십자가의 고난을 피하지 아니하시고 그 잔을 받으셨습니다.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십자가의 죽음 뒤에 찬란한 부활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4월 둘째 주에 부활 주일로 지킵니다. 주님의 부활은 어쩌면 성탄의 사건보다 더 귀합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 이 부활의 신앙에 참여하는 자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야고보의 계속적인 교훈은 이 환란이 우리를 교육시키고 훈련시키고, 연단하여 우리로 하여금 주님의 인격과 형상을 닮은 모습으로 영원 속에 들어가게 하기 위함입니다. 시험은 마치 학생들에게 주는 것과 같이 자신의 실력을 점검하게 됩니다.
본문에서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에서 이 여러 가지는 문자 그대로 여러 가지 시험이 온다는 사실을 말해 줍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여러 가지 시험을 재료로 해서 더욱 영광스럽고 아름다우면서 풍성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만들어 주실 것을 계획하고 계십니다. /할/아멘!/
또 '여기라'는 말은 본래 평가하라는 말입니다. 굉장한 가치를 지닌 것으로 평가하라는 것입니다. 욥이 시험을 당할 때, 굉장한 가치로 그 시험을 평가했습니다.
욥23:10절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 자식, 재산, 건강 이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린 현장에서 고백한 욥의 신앙입니다.
욥은 그가 당하는 고통을 비웃고 놀려대는 친구들에게 그들의 철학적인 궤변과 변론 앞에서 '너희들은 모른다, 하나님만이 나를 아신다. 그분이 나를 단련하신 후에 나를 정금처럼 쓰실 것'이라는 고백입니다. /얼마나 멋있는 고백인가?/
욥은 그 환란과 시련이 그의 신앙의 인격을 만들어 가고 있음을 믿었습니다. 그는 정말 빛나고 아름다운 정금같은 믿음의 소유자가 되어 전에 망해버린 모든 부귀영화를 갑절의 두 곱으로 받아 누리는 영광을 안았습니다. /할/
역사상 위대한 업적을 남긴 사람들은 보통 극한 고통을 만날 때 삶의 풍성한 열매를 맺었습니다. '존 번연'은 얼음장같은 감옥 속에서 '천로역정'을 집필했습니다. '파스퇴르'는 반신불수 상태에서 '질병에 대한 면역체'를 개발했습니다. '에디슨'은 청각장애자였으나 축음기를 발명했고 '프랭클린 루즈벨트'는 지체장애인이었으나 미국의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역사는 고통과 시련에 용감하게 맞선 사람들에 의해 새로 쓰여집니다. 태풍이 몰아치면 닭은 자신의 날개 속에 머리를 파묻고 잔뜩 움츠립니다. 그러나 독수리는 날개를 활짝 펴고 바람을 이용해 유유히 안전한 곳으로 이동합니다.
바이킹은 북풍에 시달릴 때 큰배를 만들었습니다. 위인들은 인생의 위기에서 큰 업적을 남겼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자는 시련을 '신의 저주'로 여기고 움츠리는 사람입니다. 벧전4:12-13절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할/
여기 시험은 시련을 뜻합니다. 그런데 시련이란 말은 훈련한다는 말과 같은 동일어입니다. 벧전1:7절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 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믿음을 대개 금으로 비유 하는데, 금을 불로 연단 하듯이 우리 성도들의 믿음을 하나님께서는 시련으로 연단을 하신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면 훈련을 시킵니다. 출19:4절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원어 성경에는 어미 독수리로 기록되어 있는데, 어미 독수리가 새끼를 업고 창공에 높이 올라가서 떨어뜨립니다. 떨어지기 직전에 어미 독수리가 쏜살같이 내려와서 업고 올라갑니다. 그 심한 어미 독수리 때문에 독수리가 새들의 왕이 되는 것입니다. /아멘!/
암탉은 병아리를 훈련시키지 않습니다. 꼬꼬꼬꼬 하면서 병아리들에게 먹일 것만 계속 먹이고, 한 번도 날개에 얹어서 훈련시키지 않고 '내 새끼, 내 새끼'하고 품으며 사랑만 합니다. 그러니까 병아리는 커도 날지도 못하고 고양이나 개가 쫓으면 3m 되는 담에 올라가는데 그것도 죽을힘을 다해 올라가서는 헉헉거립니다. 왜입니까? 어미 닭이 병아리를 훈련시키지 않아서입니다. 그러나 독수리는 새끼를 훈련시켜 창공을 나는 독수리로 만들어 새들의 왕이 되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암탉의 날개로도 사랑하시지만, 독수리의 날개로도 훈련하십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암탉이 병아리를 품듯이 사랑만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어미 독수리 날개로 훈련도 하시고, 어미 닭 날개로 품어 주시기도 하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시련이 올 때 원망하고 불평하면 집니다. 기도해야 이깁니다.
13절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 또 시50:15절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할/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의 키워드는 '여기라'는 명령어입니다. 여긴다는 말에는 '소망과 기대감'이 담겨져 있습니다. 여긴다는 말은 '미리 앞서 생각하다'라는 뜻으로 이 말씀의 의미는 '시련이 당장은 힘들고 어려워 시련 자체가 기쁨은 아니지만, 후에 기쁨이 찾아올 것을 미리 생각하고 기뻐하라'는 말씀입니다. /할/

 

▶3절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어떤 회사에서 신입 사원을 뽑기 위한 시험이 새벽 네시부터 치러진다고 공고되었습니다. 너무 이른 시간이었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시간을 맞추어 일찍 회사의 시험장에 도착했습니다. 그러나 공고된 새벽 4시가 지났으나 회사 문은 열리지 않은 채 굳게 잠겨져 있었습니다. 점차 응시자들이 여기 저기서 불만을 틀어놓기 시작했습니다. 예정된 시간보다 무려 다섯 시간이나 늦은 9시에야 문이 열렸습니다. 회사의 무성의에 대해 여기저기서 불평이 쏟아졌고 상당한 응시자들은 화가 나서 돌아가 버렸습니다.
아홉시가 조금 지나 면접시험이 시작되었습니다. 면접시험관이란 사람이 응시자에게 묻는 질문이라는 것이 가관이었습니다. '한국의 수도는 어디입니까? 사람의 손가락은 몇 개입니까? 우리나라 대통령의 이름이 무엇입니까?'라는 식의 정말 웃기는 질문만 늘어놓고는 면접을 끝내었습니다. 입사시험이란 게 그것이 전부이었습니다.
며칠이 지난 후에 단지 몇 명에게만 합격 통지서가 배달되었습니다. '저희 회사 입사시험에 합격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당신은 몇 가지 테스트에서 좋은 성적을 얻었습니다. 첫째, 당신은 시간을 잘 지켰습니다. 새벽 4시 정각에 도착하신 것을 보고 있었습니다. 둘째, 당신은 인내심이 있었습니다. 5시간을 잘 인내하며 기다리신 것을 확인했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평범하고 어쩌면 짜증날지 모르는 질문에도 성실하게 그리고 온화하게 대답하여 성격적으로도 원만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저희 회사에서 요구하는 시간 지키기/오래 견디기/원만한 성품이라는 세 가지 선발기준에 모두 합격점수를 얻었으므로 귀하를 본사에 채용하기로 하였습니다.'라는 내용의 통지문이었습니다.
여기 '앎이라'는 우리의 믿음의 시련은 반드시 인내를 가져온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사람의 믿음의 강도는 시험을 당할 때 그것을 견디어 낼 수 있는 인내력이 강한가 약한가에 따라 좌우됩니다.
우리의 육신의 튼튼한 근육이 생겨나도록 하려면 여러 가지 훈련을 시켜야 합니다. 역기도 들고, 아령도 들고, 팔굽혀펴기도 합니다. 육체가 훈련을 통해서 튼튼해지고 지구력이 생기고 인내력을 길러내는 것처럼 우리의 믿음도 시련을 통해서 비로소 영적 인내력이 배양되는 것입니다. /믿/
▶서양에서는 시집가는 딸에게 어머니가 진주를 주는 관습이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진주를 '얼어붙은 눈물(Frozen tears)'이라고 불렀습니다. 그 이유는 딸이 시집가서 흘려야 할 많은 눈물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왜 여자가 시집가서 흘려야 할 눈물을 진주로 묘사했을까? 그 이유는 진주의 생성과정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진주는 땅에서 캐내는 것이 아니라 바다의 조개에서 생겨집니다. 조개 속에 모래알이 들어오면 조개는 '나카(Nacre)'라는 물질을 만들어 자기 체내에 들어온 모래알을 싸 바르기를 시작합니다. 이렇게 해서 나카가 많이 덮일수록 진주는 커지고 값도 비싸집니다. 그리고 이 나카는 아주 작은 양이 천천히 생성되기 때문에 진주가 만들어지는 과정은 작은 것은 수개월이 걸리고 큰 것은 몇 년이 걸려서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그런데 조개 속에 들어간 모래알이 다 진주가 되는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조개 속에 모래알이 들어가면 조개는 두 가지 반응이 일어난다고 합니다. 하나는 나카를 생산해서 코팅작업을 시작하는 반응과 다른 하나는 모래알을 무시해 버리는 반응이 있는데 이 경우에는 수개월 내지 수년에 걸친 고생은 안 해도 되지만, 그 대신 이 모래 때문에 조개는 병들고 많은 경우에 아주 죽어 버린다고 합니다.
조개의 선택은 '자기 몸에 들어온 모래알을 받아들여 진주로 만드느냐, 그렇잖으면 자기 몸에 들어온 모래알을 무시하고 서로 피차 망하느냐' 하는 선택입니다. 선택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리고 선택은 책임까지도 동반해야 합니다.

 

▶4절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이루라' 인내를 통해서 다음 세 가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⑴온전하고:완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성숙되어 가는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견습공이 훈련을 마치고 정식으로 일을 맡게 될 때, 이 단어를 씁니다.
⑵구비하여: 흠이 없다는 말로 구약에서 많이 사용됩니다. 제사장을 세울 때, 육체적인 흠이 없는 사람을 세웠습니다. 또 제물로 사용되는 짐승도 머리부터 발끝까지 흠이 없어야 하나님께 바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한 상태, 즉 모두 갖추어진 상태를 구비하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시련은 우리로 하여금 성숙한 신앙의 인격자로 세워줍니다. /할/
⑶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말 그대로입니다. 여러분 시험을 기쁘게 여기고 인내를 온전히 이루면 영 육간에 우리에게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해주시려고 그런 어려운 시험을 주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은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축복입니다. 부족함이 없는 건강을 주십니다. 부족함이 없는 물질을 주십니다. 부족함이 없는 아름다운 환경을 주십니다. /믿/
하나님은 인간을 고통과 시련 가운데서 빛나는 인생으로 변화시켜주십니다. 모세를 보세요! 태어난 지 석 달만에 바로의 공주의 품으로 옮겨가 40년을 부요를 누리며 성장했던 멋있는 청년 모세! 그 혈기 방자했던 그 시절의 모세는 하나님이 쓰시지 않으셨습니다.
40년 동안 그를 광야로 내몰아서 외로움 속에 인생 훈련을 시키셨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무거운 고통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 시련의 인내를 겪은 모세는 온유한 자로 바꿔졌으며 드디어 하나님은 그를 들어 위대한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워주셨습니다.
다윗도 마찬가지입니다. 커다란 왕의 갑옷을 입을 수 없어서 갑옷도 입지 못한 채 조약돌 다섯 개와 막대기를 들고 거대한 골리앗 앞에 섰던 어린 소년 다윗, 그는 목숨을 걸고 국가를 위해 싸웠음에도 불구하고 사울 왕에게 쫓기어 무려 20년 동안이나 죽도록 고생을 했습니다. 다윗은 오늘 야고보가 말하는 신앙의 훈련을 받아 일약 통일왕국 이스라엘의 막강한 왕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시련과 연단을 거쳐 인내를 통해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해 주시려고 오늘도 그 작업을 계속하고 계십니다.

 

▶5절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하나님께 구하라' 여기서 우리는 여기서 큰 소망을 발견합니다. 구하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먼저 지혜를 구하라고 하십니다. 어떤 학자는 '지식은 부분적이지만 지혜는 종합적인 것이다.' 또는 '지혜는 지식을 잘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여호와를 아는 것이 모든 지혜의 근본'임을 신명기, 시편, 잠언 등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메튜헨리는 '모든 사물과 사건을 하나님의 안목에서 보는 능력'이 지혜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여러 가지 결정할 문제들이 많이 생기게 됩니다. 어떤 사업을 해야 할까? 어떤 직업을 가져야 할까? 어떤 사람과 결혼을 해야 할까? 아니면 무엇을 먹고, 입고, 마셔야 할지를 끊임없이 선택해 나아가야 하는 것이 우리의 삶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중요한 것은 선택입니다. 여러분 선택은 결과를 책임지는 것입니다. 선택을 해야 할 문제가 닥칠 때, 올바른 판단력을 가지고 결정적인 도움을 주는 것이 바로 지혜입니다. 지식은 배워서 얻어지는 것이지만 지혜는 쉽게 얻어질 수 없습니다.
지식은 사물의 이치를 바로 깨달아 아는 것이라면 지혜는 그 지식을 잘 활용해서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들을 해결 할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 됩니다. 하나님은 이런 소중한 지혜를 하나님께 구하면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우리가 잘 아는 솔로몬도 하나님께 이 지혜를 구하기 위해 일천 번제를 드렸던 왕입니다. 여러분! 구하라고 하신 분이 누구입니까? 우주 만물의 주인이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구하는 대상을 잘 알고 구해야 합니다.
여러분! 돌부처에게 구해보십시오, 우상은 죽어 있는 신입니다. 왜 부처보고 불상이라고 했는지 아십니까? 온종일 그 자리에 서 있기 때문에 불쌍해서 불상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군대에서 기합 중에 가장 큰 기합이 부동자세로 그 자리에 꼼짝없이 세워 놓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하나님의 속성 세 가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⑴모든 사람에게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차별 없이 빼 놓지 않고 공평하게 주시는 하나님임을 알 수 있습니다.
⑵후히 주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여기 '후히'는 '풍성하게, 인색함이 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이 풍성하십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 아무리 부자라 할지라도 그 안에 부족함이 있습니다. 가령 재물이 풍성한 사람에게 신령한 은혜가 부족한 자가 있고, 지식이 많으나 재물이 가난한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무엇인가 부족을 느끼며 살아갑니다. 미국이 세계에서 제일 부한 나라라고 하지만 그 나라도 직업 없는 실업자가 굉장하답니다. 오직 풍성하신 이는 오직 하나님 한 분밖에 없습니다. /믿/
여기 '주시되 후히 주신다'는 말씀은 '하나를 달라고 하면 열을 주시는 하나님'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언제나 우리에게 더 주시고 싶어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솔로몬이 하나님께 일천 번제를 드렸더니 하나님이 그에게 나타나셔서 물으시기를 '솔로몬아, 너는 내게 구하라. 내가 너에게 무엇을 줄꼬?' 그 때 솔로몬이 하나님께 대답하기를 '주여! 종은 작은 아이입니다. 제가 출입할 줄을 모릅니다. 저 많은 백성들을 하나님의 뜻 가운데 바르게 잘 인도해야 할텐데 제게 지혜가 부족합니다. 그러니 저에게 지혜로운 마음을 주시옵소서'
하나님은 솔로몬이 구하는 지혜를 주셨습니다. 그것만 주셨습니까? 아닙니다. 솔로몬이 구하지 않은 장수, 부귀, 영화, 권세, 명예를 다 더불어 주셨습니다. 하나를 구하면 열을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무엇이든지 구하면 구하는 데로 풍성히 주시기를 좋아하십니다. 지혜를 구하면 지혜를 주십니다. 권능을 구하면 권능을 주십니다. 건강을 구하면 건강을 주십니다. 재물을 구하면 재물을 주십니다. 여러분, 무엇이든지 구하는 대로 후히 주시는 하나님께 기도해서 응답 받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⑶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 소유 중에서 무엇을 다른 사람에게 줄 때 크게 생색을 내면서 주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떤 사람은 받는 사람이 무한을 느낄 정도로 무시하면서 거드름을 피우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절대적인 관용을 가지시고 꾸짖지 않고 무안 주지 않고 생색내지 않고 후히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주님은 마7:11절에서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요15:7절에서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여기 '꾸짖지 아니하신다'는 말은 '어제 구한 기도를 오늘 또 구하고, 내일 또 졸라대도 하나님은 번거롭게 생각지 아니하신다'는 의미입니다. 또 우리가 만일 남의 아버지에게 가서 무엇을 구한다면 어떤 반응이 나올까요? '아저씨 우리 전세 값 좀 대 주세요! 아저씨 제 학비 좀 대 주세요! 아저씨 제 결혼 비용 좀 대 주세요!' 그러면 뭐라고 할까요? '저 놈이 정신 나간 놈이 아닌가! 네가 왜 주냐?' 그런 반응일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 부모에게 무엇을 구할 때 필요에 따라 다 들어주고 더 주지 못해 아쉬워합니다. /할/

 

▶어떻게 하면 우리가 지혜를 얻을 수 있겠습니까?
⑴자신의 부족함을 깨달아야 합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자기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을 가리켜 성경은 불쌍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부족함을 깨달아야 합니다. 깨닫는 것이 지혜입니다.
⑵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6절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는 믿음으로 맺어진 관계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믿음으로 구하지 않습니다. 또 믿음으로 예배드리지 않을 때가 많으며 믿음으로 찬송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여러분 과학은 철저한 규명과 실험과 논증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신앙은 그것들에 앞서 믿음을 요구합니다. 과학의 세계는 알고 나서 믿는 세계이며 신앙의 세계는 믿고 나서 아는 세계입니다. 가령 내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받게 된다는 사실의 경우 컴퓨터나 생체공학이나 첨단의 우주 과학도 그것을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오직 신앙은 믿음으로만 이해와 설명이 가능합니다. /할/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신뢰감입니다. 서로 믿을 때에 만족합니다. 평안합니다. 위로가 됩니다. 그러나 믿지 못할 때에는 불안합니다. 일이 제대로 풀리지 않습니다. 만일 부부가 서로 살면서 상대를 의심하면 어떻게 될까요? 아내는 남편을 항상 의심합니다. 저 사람은 혹시 나 말고 다른 여자를 사랑하지는 않을까? 반대로 남편은 아내를 의심합니다.

 

▶의심하는 자에게는 세 가지 불행이 따라 옵니다.
⑴삶의 불안정성입니다.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가정 생활이 불안정합니다. 직장 생활이 불안정합니다. 대인관계가 불안정합니다. 모든 것이 항상 유동적이고 흔들립니다. 결코 평안한 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⑵인격의 분열입니다. 8절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현대인의 성경은 '그는 이중인격자이며, 언제나 자기가 하는 일에 갈피를 못 잡고 흔들리는 사람입니다'라고 했는데 여기 '이중 인격자'는 인격이 분열된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의심하는 사람에게는 어떤 바른 말을 해도 의심합니다. 제아무리 좋은 조건을 제공할지라도 결코 평안할 수 없고, 안정된 삶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⑶기도 응답이 없습니다. 7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도 의심을 품으면 삶이 불안정하고 인격이 분열됩니다. 하물며 하나님을 의심하게 될 때에 우리가 하나님께 얻을 것은 단 한 가지도 없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을 철썩 같이 믿는 사람도 고난이 오면 마음이 흔들리는데, 하물며 의심하는 사람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제대로 유지할 수 있겠습니까?
욥은 정말 중심에서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믿은 사람입니다. 아브라함도 아들을 주시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도 25년 동안 응답을 받지 못했어도 그는 여전히 하나님을 의심치 않고 믿었습니다. 다윗은 선지자로부터 왕으로 기름부음 받은 지 여러 해가 지나도록 왕이 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사울 왕의 시샘으로 죽을 고비만 여러 번 겪었습니다. 그래도 그는 사울을 죽이지 않고 묵묵히 기다렸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그 약속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십니다. '믿고 구한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아멘!/ 우리 모두 믿음으로 기도하다가 응답 받고 축복 받는 사랑하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아멘!/할/

 

▶이 모든 시험을 이기는 자에게 생명의 면류관을 주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2절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
이 시험을 끝까지 참는 자들에게는 생명의 면류관이라는 상급이 약속된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새로운 욕심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이 주실 상급에 대한 욕심과 기대가 있어야 합니다. 히11:6절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할/
여러분! 이 상급에 대한 욕심과 간구가 없다면 그 신앙은 별 볼일 없는 신앙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는 것은 바로 이 생명의 찬란한 면류관을 바라보면서 믿는 것입니다. 이 생명의 면류관이 없다면 누가 힘들게 예수님을 믿겠습니까?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라고 했습니다. 프로 축구의 경우를 보면 선수가 있고 트레이너가 있고 감독이 있고, 구단주가 있습니다. 선수들이 모여 뛰기만 연습하다가 힘들다면서 오늘 연습은 그만 하자고 한다면 그 구단은 희망이 없습니다. 그리고 훈련의 계속 여부는 선수가 결정짓는 것이 아닙니다. 훈련시키는 사람 쪽에서 결정짓는 것입니다. 코치나 트레이너가 이만하면 됐다고 인정될 때 연습이 끝납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시험과 연단이 끝마침은 하나님은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끝나게 됩니다. ▶우리가 받은 연단은 막연한 연단이 아닙니다. 그 연단을 통해 얻는 것들이 있습니다.
⑴내가 하나님의 소유이며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됩니다.
⑵연단을 통해서 내 믿음의 성숙을 체험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등 따습고 배부르고 평안할 때는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그러나 문제가 터지고 고난이 닥쳐와 하나님 앞에 부르짖게 됩니다. 하나님과 가까이해야 우리의 신앙은 성숙되어집니다. ⑶이 모든 과정을 거쳐 그 찬란한 생명의 면류관을 받게 됩니다. 우리 모두 이 생명의 면류관을 받아 쓸데까지 참고 인내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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