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졸지 말고 깨어 있으라! (행 20:7-12)

by 【고동엽】 2022. 2. 8.

졸지 말고 깨어 있으라! (행 20:7-12)

 

서로 교제하던 남녀가 결혼을 앞둔 어느 날 사주궁합을 보았습니다. 결과는 하늘이 맺어준 천상배필이고, 찰떡궁합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 날부터 틈만 나면 찰떡을 사먹었습니다. 약혼식 때도 축하 케이크 대신 찰떡으로 케이크를 만들고 먹었습니다. 결혼식 때도 일부러 찰떡을 만들어 대접하고, 자기들도 먹었습니다. 신혼여행가서도, 신혼살림을 차리고 난 후에도 찰떡을 일부러 먹었습니다. 찰떡처럼 달라붙어 찰떡궁합으로 살자는 뜻에서 그렇게 했습니다.
그런데 6개월이 지나면서부터 부부싸움이 시작되었는데 초저녁에 시작한 싸움이 새벽까지 계속됩니다. 찰싹 달라붙어 떨어지지도 않은 채 싸웁니다. 쉬는 날이 되면 마주 바라보고 앉아 하루 종일 싸웁니다. 이유는 찰떡을 너무 많이 먹었기 때문입니다. /믿거나 말거나/
찰떡으로 찰떡궁합이 됩니까? 점쟁이나 관상쟁이가 찰떡궁합이라고 한다고 해서 부부가 행복해집니까? '천만에 노- 아닙니다.' 진정한 '성공도, 행복도, 평안도' 하나님 안에 있습니다. /믿/할/ '내가 너희에게 평안을 주노라!' 요15:7절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할/
이 세상에는 '금'이 세 가지가 있습니다. '황금'이 있고, '소금'이 있고, '지금'이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금은 '지금'입니다. 지금 은혜 안에 있으면 최고의 복입니다. 이 복이 찰떡궁합입니다. 이 복을 우리 모두 누리시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제목 소개!▶

 

마26장에 보면 우리 예수님이 십자가를 눈앞에 두고 그 마지막 밤에 수제자인 베드로, 요한, 야고보와 함께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가 땀방울이 변하여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신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눈앞에 두고 '할 수만 있다면 십자가를 지지 않게 해 달라'고 간절하게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나 '나의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하고 기도하셨습니다.
주님은 '죽어야 하느냐? 살아야 하느냐?'의 중대한 결정을 위한 기도마저도 '아버지의 뜻대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모습은 무엇입니까? 주의 뜻보다는 내 뜻 쪽에 더 우선권을 두고 결정권을 둘 때가 많습니다.
엄격하게 말하면 올바른 기도나 올바른 신앙은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를 떠나 온통 '주의 뜻에 맡기고 따르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믿/ 그런데 그 밤에 예수님은 땀방울이 변하여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시는데 수제자라고 믿었던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는 골아 떨어져 자고 있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이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은 '내가 기도하고 있는 동안에 너희도 함께 기도하고 있으라'는 당부이십니다. 마26:41절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성도들이 기도를 쉬면 머리를 드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마귀의 세력입니다. 기도소리가 작아지고 기도시간이 줄어들면 상대적으로 마귀의 활동무대가 넓어지게 됩니다. 기도를 중단하는 순간 마귀는 말씀을 듣는 귀를 어둡게 해 싫증나게 만들며 거역하고 도전하고, 시기하고, 미워하고 게으르게 만들며 원망과 불평을 일삼게 만듭니다. 시험에 든다는 것은 마귀가 파놓은 함정에 깊이 빠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그레이'라는 학자는 '시험에 빠지게 되면 영적 즐거움을 빼앗기게 된다. 그리고 그 영혼이 위태롭게 된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패잔병에게는 개선가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영적 패잔병에게는 찬송과 희열이 없습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그 영혼이 죽어 버리고 맙니다.
우리가 우리의 영적 건강 상태를 진단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내 영혼이 살아서 약동한다면 찬송이 있고, 기도가 있습니다. 그리고 감사가 있고, 기쁨이 있고, 말씀에 대한 감격이 있습니다. 그러나 내 영혼이 병들었다면 찬송과 기도가 떠나고 감사가 사라지게 됩니다. 그리고 말씀에 대한 거부 반응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은 '너희 자신들이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아멘!/
젊은 시절 겟세마네 동산에서 졸며 기도하지 않다가 시험에 빠졌던 베드로는 훗날 그의 서신 벧전5:8절에서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라고 역설했습니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를 향하여 '시험에 들지 않기 위해 깨어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오늘 본문은 바울 사도가 3차 선교 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길에 고린도에서 마게도냐를 거쳐 빌립보에서 배를 타고 닷새만에 드로와 항구에 도착하여 일주일을 머무는 동안 일어난 사건입니다.
드로아는 어떤 곳인가 하면 바울이 3차 전도 여행을 떠날 때 환상 중에 '마게도냐 사람이 와서 자기를 도와 달라'는 환상을 보고 곧 구라파로 떠나갔던 곳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에게는 이 드로아가 인상이 매우 깊은 곳입니다.
이곳에서 일주일간 머물면서 바울은 성경을 가르쳤고, 마지막 떠나기 전 날에는 밤이 깊도록 말씀을 전하는 중에 유두고라는 청년이 3층 창문에 걸터앉아 졸다가 3층에서 떨어져 죽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떨어졌다는 것은 좋은 소식이 아닙니다. '원위치에서 이탈했다거나, 미끄러졌다거나, 낙방했다는 의미'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또 다른 의미로 떨어졌다는 말은 '입학시험에도 떨어졌다, 믿음이 떨어졌다, 은혜가 떨어졌다, 양식이나 기름이 떨어졌다, 지위가 떨어졌다,'는 등 여러 가지 의미로도 해석을 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다'(눅7:23)고 하셨습니다. 사단은 우리를 밀 까부르듯이 흔들어대지만 주님은 우리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셨다고 했습니다(눅22:31-32). 그래서 주님은 '시험에 들지 않기를 기도하라'(눅22:40)고 당부하셨고,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10;12)고 하셨습니다. 떨어지지 맙시다! 넘어지지 맙시다! /할/
오늘 이 시간 저는 청년 유두고의 죽음의 원인을 살펴보면서 영적인 귀한 교훈을 얻으려고 합니다. ▶왜 이런 불행한 죽음이 예배시간에 일어났는가?

 

①유두고의 죽음은 졸다가 일어난 사건입니다.
부끄러운 죽음입니다. 세상에 졸다가 죽는 사람도 있습니까? 본문의 유두고는 졸다가 죽었습니다. 유두고는 자기가 죽는 것도 모르고 졸고 있었습니다. 정상적인 수면은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시127:2절에서 '하나님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 잠을 주시는도다.'라고 노래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잠은 축복입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교회에 나와 앉으면 바로 조는 분들이 있습니다. 설교 시작할 때 잠이 들고 끝날 때에 정확하게 깨어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잠이 다 좋은 것은 아닙니다. 우리나라의 교통사고의 경우 사고의 주된 원인은 과속운전, 과로운전, 음주운전, 졸음운전이 사고의 주된 원인이라고 합니다. 그 중에서도 이 졸음운전은 가장 많은 사건사고의 원인을 제공하고 있다고 합니다.
고속도로를 주행해 본 운전자는 누구나 경험하는 것입니다만 운전 중 조는 사람은 불과 2-3초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2-3초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대형사고로 이어질 수가 있습니다.
사실 졸지 않아야 될 자리에서 조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졸음은 얼굴의 생리현상입니다. 졸음의 원인은 수면 부족일 때, 식사 후 식곤증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사실 인간이 잠자고 싶을 때 잠자지 못하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사람들은 3일간 밥을 먹지 않는 고통보다는 3일간 잠을 못 자는 고통이 더 크다고 합니다. 그래서 고문 가운데 가장 무서운 고문은 잠을 못 자게 하는 고문입니다.
분명히 잠은 은혜이며 축복입니다. 그러나 시도 때도 없이 잠을 잔다든가 때와 장소도 가리지 않고 졸고 앉아 있다면 그것은 보통 문제가 아닙니다. 국가의 중요정책은 결정하는 각료회의에서 장관이 끄덕거리며 졸고 있는 모습이 전국에 TV로 생중계가 됐다면 그 장관은 단칼에 모가지입니다.
언젠가 국회에서 국정감사를 하는 의원님이 졸고 있는 모습이 카메라에 잡혀 망신을 당한 의원이 있습니다. 아무 때나 조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육신의 졸음도 문제지만 영적인 졸음은 더 큰 문제입니다. 지금이 때가 어느 때입니까? 영적으로 밤이 깊어가고 있습니다. 더욱이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이 현실은 죄악의 밤이 더 깊어가고 있는 때입니다. /믿/
오래 전에 모 고등학교 씨름선수들이 조를 나눠서 취객들을 상대로 강도 짓을 했습니다. 그 중에는 노상강도를 잡아 대통령 표창까지 받은 학생도 강도단에 끼었다고 합니다. 얼마나 세상이 죄악의 밤이 깊어갔습니까? 밤만 되면 서울시는 온통 죄악의 소굴이 되어 집니다. 마치 유황불로 심판 받기 전에 소돔과 소모라 땅처럼 악한 일들이 얼마나 일어납니까?
어저께까지 신앙생활을 잘 하던 사람들도 넘어지고 죄악의 밤에 휩싸여 가고 있습니다. 영적으로 밤이 깊어 가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졸며 잠들어 가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영적 상태가 무너지면 정신상태가 무너지고 정신상태가 흔들리면 육체도 흔들리게 됩니다.
한마디로 영적 긴장 상태가 무너지면 모든 분야의 나사못이 풀리게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두말할 것 없이 마귀의 밥이 되고 맙니다. 이것은 엄청난 비극이고 저주입니다.

 

②유두고의 사건은 거룩한 주일날에 일어났습니다.
7절에 보면 '안식 후 첫날에'라고 했습니다. 여기 모인 사람들은 주일을 잘 지켰습니다. 그들은 안식 후 첫날에 모였습니다. 유대인들의 안식일은 토요일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주일을 예배일로 정하여 지킵니다. 이 날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으로 그의 구원사업을 확증하신 날입니다. 그리고 성령이 강림하여 교회가 시작된 날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이 날을 거룩하게 지켜야 하고, 소중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모두 교회에 나와서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께 예배드려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주일을 잘 지키는 일에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안식 후 첫날, 여러 사람들이 주일 예배를 드리기 위해 모였습니다. 그 날 강사는 특별강사로 선교여행 중 드로아를 방문한 사도바울이 말씀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은혜 스럽고 복된 날 복된 장소에서 불상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유두고라는 청년이 3층 다락 난간에 걸터앉아서 졸다가 떨어져 죽은 것입니다. 거룩한 주의 날, 거룩한 성전에서 본문의 유두고는 떨어져 죽었습니다.
우리 한국 역사상 주일날 제일 큰 사건은 뭐니, 뭐니 해도 1950년 6월 25일에 북한 김일성 괴로 집단이 남한을 침공한 날이 주일날 새벽이었습니다. 또 1993년 10월 10일 위도 앞 바다에서 여객선 침몰로 270명이 물에 빠져 죽은 사건도 주일날에 일어났습니다. 그때 낚시꾼들 중에는 모 교회 장로와 집사 님들이 있었답니다.
▶오늘 우리는 안식일이나 주일에 대한 개념은 올바로 정립해야 합니다.
창2:2절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그리고 3절에 보면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 /할/
안식일의 출발은 엿새 동안 천지창조 사역을 위해 일하셨던 하나님이 쉬신 날입니다. 아담이나 하와가 쉬는 날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 후에 하나님은 인간에게도 쉬라는 안식의 법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안식일의 원리는 천지를 지으신 창조주를 섬기는 날입니다. 그래서 그 날은 여호와의 날입니다. 신약으로 넘어 오면서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율법의 마침(롬10:4)이 되시기 때문에 창조 기념일인 안식일 제도가 폐지되고 예수님의 부활의 날에 주의 날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할/
글자 그래도 주일은 주의 날, 즉 주님의 날이란 말입니다. 그 날의 주인이 주님이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인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휴일이니, 공일이니 주말이니 하여 제멋대로 남용하고 죄짓는 날로 쓰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더 중요한 사실하나를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유두고의 경우는 안식 후 첫날 교회에 나와 앉아 있었고, 예배를 드리고 있었고, 말씀을 듣고 있었는데 떨어져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건의 교훈은 주일에 교회 나오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떤 태도와 어떤 마음가짐으로 예배를 드리느냐?' 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주의 날, 주의백성이 주의 전에 나오지 않는 것은 말할 가치도 없습니다. 그러나 나와 앉아 있다하더라도 참 예배자의 정신과 자세를 가다듬고 앉아 있어야 됩니다. /아멘!/
한마디로 교회에 나와 바른 예배를 드려야 함을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사도 바울은 롬12:1절에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③유두고의 사건은 성찬예식이 거행되는 순간에 일어났습니다.
7절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이것은 예찬을 말씀합니다. 그러니까 공동 식사를 의미함과 동시에 성찬 예식을 말함입니다. 이에 관한 두 가지 학설이 있는데, 하나는 모두가 다 어려운 처지에 있었기 때문에 모일 때마다 이렇게 사랑으로 식사를 나누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정말로 기도하면서 성찬 예식을 하는, 그런 의미의 아가페 모임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성찬은 눈으로 보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말했습니다. 저들은 모일 때마다 떡을 떼고 성찬 예식을 행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떡을 떼었다는 것은 성찬을 말합니다. 바울은 드로아 교회에서 예수님의 부활하신 승리의 날에 주님의 십자가의 고난을 기념한 것입니다. 십자가 없이는 부활이 없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에서는 모일 때마다 먼저 예찬식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 예찬식은 성도들 간에 교제를 더 돈독하게 하기 위함이었는데 고전11:20절 이하에 보면 당시 부자들이 가난한 사람들을 멸시하여 그들끼리 먹고 편 당을 일으켰습니다.
그래서 '칼타고' 총회에서 예찬식은 폐지하고 주의 성찬만을 남게 되었는데 그 밤에 성찬식이 거행된 것입니다. 주님이 찢기신 살과 흘리신 피를 먹고 마심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에 깊이 참여하여 영적인 생명을 받아 마시는 그런 의식입니다.
그렇습니다. 성찬 시간에 떡과 포도주를 함께 나누면서 구원을 확신해야 합니다. 그리고 내 안에 주님을 모시고 사는 체험을 해야 하며, 주님의 뜻에 따라 살겠다는 다짐을 새롭게 하면서 성찬을 대해야 합니다. /아멘!/ 이 거룩한 예식이 진행되는 동안 유두고는 3층 누각에 걸터앉아 졸고 있다가 떨어져 죽고 말았습니다.

 

④그 날 집회가 어떤 집회인가? 사도바울의 송별회와 같은 집회였습니다.
7절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그러니까 그 날의 집회가 송별회와 같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뜻을 잘 모릅니다. 그러나 바울 만은 알고 있습니다. 이게 마지막 시간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오늘 이 설교를 하고 나는 떠날 것이고, 그러면 너희는 다시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는 말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 추측을 38절에서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다시 그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한 말을 인하여 더욱 근심하고 배에까지 그를 전송 하니라.'
아주 심각한 시간입니다. 단순한 송별회가 아니라 바울의 입장에서는 세상을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당부의 말씀을 남기는 유언 적인 설교시간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렇게 심각한 말씀을 하고 있는데도 듣는 사람들은 그렇게 심각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이런 얘기가 예수님의 생애에도 있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밤에 성찬 예식을 행하십니다. 그래서 요13장에서 17장에 이르기까지 무려 5장에 걸쳐서 긴 말씀을 하십니다. 얼마나 중요한 시간입니까? 그런데 제자들이 그렇게 중요하게 듣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내가 십자가를 지리라'고 하시는 귀한 말씀도, 그리고 당부의 말씀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갔을 때, 그 중요한 시간에 쿨쿨 잠을 자고 말았습니다. 영 시원치 않은 사람들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심각한 말씀을 심각하게 받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시간에 유언하시듯 하시는 말씀인데도 불구하고, 그 뜨거운 가슴으로 말씀하시는 것을 뜨겁게 받지 못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니까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께서 그 마지막 기도하시는 그 시간에 제자들은 꿀꿀 자고 있었습니다.
오늘의 본문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울은 심각하게 '이게 마지막이다, 다시는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고 하면서 한마디 한마디를 아주 신중하게 유언처럼 말씀하고 있는데 듣는 사람은 그렇게 듣지 못하고 졸다가 떨어져 죽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신중하게 듣는 자세가 귀한 줄 믿습니다. 순교자 주기철목사님의 '일사각오'가 절대 필요합니다. /아멘!/

 

⑤그 사건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설교 시간에 일어났습니다.
7절 '저희에게 강론할 새' 여기 '강론'을 '디아레고마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설교를 뜻합니다. 그 시간이 어느 시간입니까? 얼마나 엄숙하고 진지한 자리입니까? 능력의 사도 바울의 애절한 설교와 가르침은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켰고, 그곳에 모인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이 가슴 깊이 와 닿은 감동의 순간이었습니다.
날이 밝아 오면 사도는 떠나갑니다. 그 날 드로아의 집회는 저녁집회였습니다. 이제 몇 시간 후면 사울바울과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이별의 순간이 옵니다. 그러기에 사도는 밤이 깊도록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당시 사도바울의 형편을 보면 이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면 핍박 자들에 의해 죽음을 맞이해야 할지 모릅니다. 그래서 그는 사명을 위해 목숨을 걸어야 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가지라도 더 가르치고 가려는 사도의 열심 있는 설교시간에 유두고 청년은 졸고 있다가 변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도 성도들 간에 교회에 무슨 일이 있는지 목사가 어떤 일로 기도하고 있는지 무관심 속에 졸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기독교는 예배를 가장 신성시하는 종교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십니다. 예배 없이는 하나님의 복은 절대로 오지 않습니다.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축복을 주십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 예배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것이 그 본질적 생명입니다. 말씀은 하나님의 종을 통하여 하나님이 주시는 음성입니다. 그 말씀에 대한 응답으로 감사와 찬양이 수반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앉아 있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가기 위함입니다. 바로 예배는 하나님 자신의 계시 행위인데 그 행위는 말씀 선포로 이어집니다. /할/
그만큼 예배시간에 설교시간이 귀한 시간입니다. 생명의 양식을 먹는 시간이요, 능력에 양식을 먹는 시간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설교시간입니다. 그 귀한 시간에 유두고 청년은 졸다가 떨어져 죽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밤에 예배는 설교시간이 대단히 길었습니다. 7절 하반 절에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 또 9절에 '바울이 강론하기를 더 오래하매' 아마 유두고 청년은 설교가 길다는 이유로 졸았는가 봅니다.
사람들이 잡담하고 노닥거릴 때는 시간 가는 중 모릅니다만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예배하는 시간은 지루하고 답답하게 느끼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것은 그 사람의 영적 상태가 잘못되었다는 증거입니다.
▶저는 영화를 보면서 중간에 쉬고 본 영화 둘이 기억납니다. 하나는 '빅터 프레임'이 감독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이고, 또 하나는 '윌리엄 와일러'가 감독한 '벤허'입니다. 지금도 생생한 것은 그 누구도 '왜 이렇게 영화가 길지? 쓸데없이 왜 이렇게 길어'하고 투덜거린 사람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영화의 끝을 알리는 'The end' 사인이 화면에 나오고 극장 안에 불이 켜졌는데도 사람들은 의자에서 일어나지 않고 있었습니다.
물론 조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세기의 명화인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보면서 조는 사람은 '바람과 함께 사라지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유두고는 하나님을 만나는 예배시간에 그것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설교 시간에 졸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졸아서는 안 될 이유가 하나 있습니다. 8절을 보면 '우리의 모인 윗 다락에 등불을 많이 켰는데' 환하게 불을 밝혔다는 말입니다. 조명은 수면과 직접 관계가 있습니다. 불은 끄거나 조명이 어두우면 졸거나 잠은 청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날 밤은 윗 다락까지 등불이 밝혀 두었다고 본문이 말하고 있습니다.
등불은 많이 켰다는 표현으로 보아 당시 그 장소에 모인 회중의 수가 많았음을 짐작케 합니다. 그 밤 집회는 인산인해의 집회였습니다. 그런데 그 날 밤 졸았던 사람의 수가 수십 명이었다면 그것은 바울의 책임입니다. 그런데 다 정신을 차리고 말씀을 듣는데 유독 유두고 혼자만 졸았습니다. 누구 책임인가? 전적으로 유두고의 책임입니다. /믿/
▶한 우스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교회 목사께서 설교를 하는데 조는 성도가 많아서 설교 도중에 '조는 사람 눈에 고춧가루를 치시오' 그러니까 도리어 졸던 성도가 '목사님의 설교에다 고춧가루를 치시오' 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쨌든 본문은 유두고 혼자만 졸았습니다. 왜 졸았습니까? 한마디로 은혜의 등불, 마음의 등불, 영혼의 등불이 꺼졌기 때문입니다. /할/ 꽃피고 새우는 봄날에도 마음이 싸늘하게 식으면 춥게 느껴지는 것처럼 마음의 등불이 꺼지면 은혜는 떠나고 졸음만 오게 되어있습니다. 마귀는 성도가 은혜 받는 것을 제일 싫어합니다. 이유는 은혜를 받지 못해야 다루기가 쉽기 때문입니다.
▶사탄이 은혜 받는 것은 방해하는 몇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⑴말씀에 대해 거부감을 일으킵니다.

⑵말씀에 대해 의심을 일으킵니다.

⑶신앙생활 모든 것에 불평스러운 마음을 일으킵니다.

⑷졸도록 유도합니다.
본문의 유두고는 졸다가 떨어져 죽었습니다. 누가 손해입니까? 죽은 사람이 손해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졸지 말아야 합니다. /아멘입니까?/할/

 

⑥그 사건은 예배의 자세가 잘못되었기 때문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9절 '창에 걸터앉았다가' 그러니까 걸터앉았다가 죽었습니다. 사람이 어디를 가나 앉는 자세를 바르게 함이 예의입니다. 또 어디를 가든지 앉은자리를 잘 택해 앉아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은혜 받는 자리는 더욱 더 그렇습니다. 전5:1절에 '너는 하나님 앞으로 들어갈 때에 네 발을 삼갈지어다. 가까이 하여 말씀을 듣는 것이 우매한 자들이 제물을 드리는 것보다 낫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요! '가까이 하여' 말씀을 듣는 것이 복입니다. 그래서 앞자리가 황금자리입니다. /아멘!/
그런데 유두고라는 이 청년은 창문에 걸터앉았으니 도덕상으로나 예의 상으로나 바르지 못합니다. 걸터앉았다는 것은 안정감이 없고 그리고 빙자한 행동입니다. 한마디로 예배드리는 자세가 잘못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졸다가 죽었습니다. 우리 바른 예배의 모습을 보이십시다. 예배드리는 자의 자세와 태도는 너무 중요합니다. /할/
오늘 본문의 사건 때문에 주의 종들이 위로를 받는답니다. ▶일본의 전도사 '미요시'라는 분이 어느 날 미국 선교사를 만났습니다. '원'이라는 이 선교사가 미요시 전도사에게 많은 도움을 주신 분입니다. 그런데 그 원 선교사가 어느 날 '미요시'에게 '행20:7-12절을 한 번 읽어보십시오' 바로 오늘의 본문입니다. 미요시 전도사가 읽어본즉 유두고가 졸다 떨어진 얘기가 나옵니다. 그래서 '하필이면 왜 여기를 보라고 합니까?'하고 물었더니 원 선교사가 '당신이 설교할 때에도 조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고 설교하십시오. 위대한 사도 바울이 설교할 때에도 조는 사람이 있었는데 하물며 우리가 설교할 때이겠습니까? 그러나 조는 사람이 있다고 낙심하지 마십시오' 이때 미요시 전도사가 큰 위로가 되고 귀감이 되었다고 합니다. /할/
▶예배시간에 졸다가 일어난 사건들이 많습니다. 옛날에 평양 산정현교회에서 목회 하시던 송창근 목사님은 한국교회사에 나오는 유명한 분입니다. 평양 산정현교회에서 많은 명사가 나왔습니다. 또 장로님 가운데에도 사회적으로 지위가 높고, 상당히 저명한 인물들이 많이 있었는데 그 중에 조만식장로님이 그곳 출신입니다.
송 목사님이 어느 날 설교를 하면서 보니까 사회적으로 아주 유명한 어떤 장로님이 꾸벅꾸벅 졸고 있었습니다. 송 목사님이 큰 소리로 '장로님, 일어나서 밖으로 나가 예배당 세 바퀴만 돌고 들어오십시오' 그러자 그 장로님이 벌떡 정신 차려 일어나 가지고 군소리 없이 나가서 정말 예배당 세 바퀴를 돌고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깊이 회개했다고 합니다. 참 목사님도 대단하고 장로님도 훌륭한 분입니다. 지금 이런 목사도, 장로도 찾아보기 힘듭니다.
좀 우스운 얘기가 하나 있습니다. 어떤 목사님이 부흥회를 인도하는데, 예수님께서 계신 곳에 대한 설교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장로님이 꾸벅꾸벅 좁니다. 그때 목사님이 '장로님, 예수님이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하고 물었더니 졸던 장로님이 '우편국에 계십니다'라고 대답을 합니다. 옛날에 우체국을 우편국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사도신경에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이 부분이 생각나서 엉겁결에 '우편국에 계십니다'라고 대답한 것입니다. 그래도 대단한 장로님이 아니십니까? 예배시간에 졸지만 안 하면 일등 장로님이 될 분이십니다. /할/

 

⑦유두고는 옆 사람이 붙들어 주지 않았기에 죽었습니다.
졸고 있는 사람을 보고도 그냥 놔두었습니다. 그렇게 위험한 곳에서 졸고 있는 모습을 보고도 내려 않으라고 자리를 비켜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또한 졸면 안 된다고 뒤통수를 때려 주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떨어지는 순간 아무도 붙들어 주지 않았습니다.
우리 주위에 졸고 있는 성도는 없습니까? 보고만 있지 말고 깨우쳐 주어야 합니다. 유두고의 죽음은 본인에게도 책임이 있지만 이웃 모두의 책임도 큽니다. 본인은 자신의 모습을 잘 모를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옆 사람은 잘 알 수 있습니다. 이왕 보고만 있지 말고 사랑으로 권면하고 깨워줍시다. /할/

 

⑧오늘 설교의 주제가 '깨어 있어라'입니다.
롬13:11절에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니라'고 하십니다. 깨어 있어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어 있는 사람만이 교회와 세상을 변화시킬 수가 있습니다. 오늘의 교회와 오늘의 사회도 어두워 가고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 시기를 잘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곧 이 때가 어느 때인지 알아야 합니다. 때를 알아야 우리 자신의 모습을 알 수 있습니다.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여기 '이 시기'란 어떤 시기인가? 어떤 이는 종말의 때를 가리킨다고 하고, 또 어떤 이는 복음의 시대를 뜻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주님이 오리라고 약속한 시기이든, 복음의 시대이건 간에 지금이 어느 때이며 지금이 어느 시기인 것을 아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참 흥미 있는 것은 사도 바울이 이 시기를 알아야 한다고 강조한 후에 이 시기를 해설하면서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다'는 것입니다. 죄악의 잠에서 깰 때가 되었습니다. 육신의 안일한 잠에서 깰 때가 되었습니다. 게으름과 태만의 잠에서 깰 때가 되었습니다.
▶잠자는 사람은 깨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하여 내린 명령은 '깨어 있으라'고 했습니다. 영적인 각성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왜 깨어있어야 합니까?
살전5:4-6절 "형제들아 너희는 어두움에 있지 아니하매 그 날이 도적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두움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근신할지니라."
자다가 깨어야 할 이유는 아침이 오기 때문입니다. 아침이 와서 일할 때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잠을 자는 것은 무엇인가 잘못되어 있다는 증거입니다. 여러분! 지금은 종말의 시대요, 예수께서 재림을 바라보는 시기입니다. 심판의 때가 점점 가까워 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심판의 때, 역사의 종말을 고하는 이 순간에 나는 무엇을 준비해야 할 것인지, 어떻게 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는지, 더 나아가 어떻게 하면 천국 갈 수 있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구원이 점점 더 가까웠다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구원을 세 가지로 해석하면 '과거의 구원, 현재의 구원, 미래의 구원'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과거의 구원은 이미 받은 구원을 말합니다. 우리는 이미 의롭다함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현재와 미래의 구원도 이루어져야 됩니다. 현재의 구원은 내 생활이 점점 발전해서 성화 되는 것, 거룩하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미래의 구원은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 우리가 완전하게 구원받아 하나님 앞에 상을 받고 천국에서 영생을 누리며 사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마26장에서 예수께서 겟세마네동산에서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여러 가지 시험이 닥치고, 유혹이 닥쳐와도 깨어서 기도하는 사람은 시험을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하지 않는 사람, 아직도 잠자리에 있는 사람, 즉 영적으로 깨어있지 않은 사람들은 시험에 빠지고, 유혹에 빠지고, 죄악에 빠져서 허우적거립니다.
또 한번 말씀드립니다. 그 날 겟세마네 동산에서 졸다가 사단의 밥이 되었던 베드로가 크게 깨닫고 벧전5:8-9절에서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고 말했습니다. 문제는 마귀가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우리 생활 속에는 악한 마귀가 있습니다. 우리를 죽이고 멸망시키는 악한 마귀, 사탄이 있다고 했습니다. 믿음으로 대적하지 않고서는 인간으로서 어느 누구도 이 마귀와 싸워 이길 수 없습니다.
깨어 있는 자는 등에 기름을 준비한 지혜로운 자입니다(마25:4). 여기 '자다가 깰 때'란 말은 '슬럼프에서 일어나라'는 말입니다. 슬럼프 상태는 의욕을 상실해서 완전히 자포자기한 상태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또 '깨어 있으라'에서 '깨어 있는 자'란 한 마디로 '하나님과 교제하는 자' 즉 기도하는 자입니다. 믿음은 능력이요, 이 능력은 기도를 동반하지 않고는 얻을 수가 없습니다.
유명한 설교자 스펄전 목사는 '10년을 염려하는 것보다 차라리 10분간 기도하는 편이 좋다'고 말했습니다. '레날드 레보넬'은 '천만 명의 군중보다는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는 단 한 사람이 더 위대하다'고 했습니다. '발튼 비쳐'는 '슬픔과 고통으로 엎드려 있느냐? 기도할 것 밖에 없다. 핍박당하고 욕을 먹고 미움을 받느냐? 기도할 것 밖에 없고, 죽음이 너희 집안에 찾아 왔느냐? 기도할 것 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우리 주님도 '기도 외에는 이런 역사가 일어나지 않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기도가 그렇게 중요합니다. /아멘!/

 

⑨유두고의 죽음은 사도바울의 기도를 통하여 다시 살아났습니다. /할/
오늘의 본문은 유두고가 죽었다고 합니다. 의사인 누가가 들여다보고 죽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인즉 사도 바울은 딱 가서 보고 기도하더니 유두고는 '안 죽었다, 살아날 것이다'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대로 설교를 계속합니다. 그 침착성에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 사람이 죽고 살고' 그것이 설교자에게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오늘의 본문을 가만히 보니 사도 바울은 그런 사실에 대해서 별로 놀라지 않고 있습니다. 설교자에게 중요한 것은 '말씀 전하는 것'입니다. /할/ 말씀이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태연하게 말씀을 다 전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유두고가 살아났습니다. 유두고의 이름의 뜻은 '운이 좋은 사람, 다행이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과연 그는 그의 이름에 일치하는 사건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이 크게 위로를 얻었다고 본문은 말씀합니다. 왜 그들이 위로를 받았습니까? 유두고를 보니까 하나님이 살아 계신 것이 분명하다는 것입니다. /할/
▶여기서 우리는 그 당시 사도 바울이 행했던 능력의 현장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10절 '바울이 내려가서 그 위에 엎드려 그 몸을 안고' 이 청년에 대한 깊은 연민과 그를 위한 사랑이 넘치는 관심의 표현입니다. 구약의 엘리야나(왕상17:21) 엘리사(왕상4:34)가 하였듯이 그에게 엎드리어 그를 안았습니다. 그렇게 한 것은 '죽은 시체 위에 생명을 소생시키시는 성령의 능력이 임재'를 바라보고 그렇게 했고 그는 속으로 간절히 믿음을 가지고 기도한 줄로 믿습니다. /할/
'떠들지 말라. 생명이 저에게 있다'고 소리쳤습니다. 확신 있는 자의 고백입니다. 주의 종이 그렇게 선포하면 그대로 됩니다. /믿/ 그 당시 회중 안에서 별의 별 불 신앙적인 언어들이 쏟아져 나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러한 모든 생각을 종식시키기 위해 '떠들지 말라'고 외치고 나서 '생명이 저에게 있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에 대하여 어떤 사람은 '말씀을 들을 때에 졸음을 주의하라고 모든 사람들에게 경고하기 위하여 그 사건을 하나님께서 계획하였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유두고가 당한 징계를 우리들도 경고로 삼아야 합니다. /아멘!/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운전도 졸면 안 되고, 공부도 졸면서 하는 것은 효과가 없습니다. 신앙생활도 졸면서 하면 안 됩니다. 유두고 처럼 떨어져 죽습니다. 우리의 신앙의 자세가 중요합니다. 실패했다고 힘들다고, 괴롭다고 걸터앉으면 안 됩니다. 정신 차리고 말씀을 잘 듣고 신앙생활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졸고 있는 사단 병력보다는 깨어 있는 1개 소대가 훨씬 더 강한 법입니다. 정신 못 차린 천만 명보다는 정신 차리고 깨어 있는 단 10명이 더 큽니다.
졸고 있는 교인 10만 명보다는 눈을 똑바로 뜨고 말씀을 경청하는 100명의 교인이 더 힘이 있습니다. 졸지 맙시다! 졸면 떨어져 죽습니다. 깨어 있어야 합니다. 주님은 당부하시기를 '그런즉 깨어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깨어있는 참 행복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아멘!/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