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나의 기도! (욘 2:1-10)
'헤밍웨이'는 그의 작품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에서 세 가지의 인생의 풍랑을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자연의 풍랑'입니다. 두 번째는 '질병의 풍랑'입니다. 여러분, 자연의 바람도 엄청나지만 우리 개인에게는 질병의 풍랑도 엄청납니다. 난데없이 무슨 암이 몰아닥친다. 불치의 병이 몰아닥친다 해 보십시오. 얼마나 큰 풍랑입니까? 세 번째는 '사람에게서 오는 풍랑'입니다. 이것도 병 이상으로 큰 풍랑입니다. 남편이 일으키는 풍랑, 자식이 일으키는 풍랑, 사업을 같이하던 친구로 말미암아 오는 풍랑, 이웃으로 말미암아 오는 풍랑, 이런 풍랑도 큰 풍랑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불순종으로 오는 풍랑이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엡5:6절에 '이를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하나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풍랑을 일으키십니다. 불순종하는 자에게 일어난다고 했습니다. 이 풍랑은 누구도 피할 수가 없습니다. 바로의 궁궐에도 하나님은 풍랑을 일으키십니다. 헤롯의 궁궐에도 풍랑을 일으키십니다. 이유는 하나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바로 살지 못할 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도망갈 때 풍랑이 일어납니다.
오늘 본문의 요나도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고 거역하다가 풍랑을 만났습니다. 요나 선지자가 활동하고 있을 당시 앗수로라는 이스라엘 주변에 있는 강대국으로써 이스라엘의 숙적이었습니다. 그들은 툭하면 이스라엘을 위협했고 침략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고, 쳐들어와서 많은 것을 노략질해 갔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나라 수도인 니느웨에 가서 하나님의 구원의 메시지를 전하라고 하는 것이 요나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요나는 도저히 그 명령에 순종할 수가 없었습니다.
'어떻게 원수의 나라에 들어가 구원의 소식을 전할 수 있겠는가?' 사실 그들이 폭삭 망하는 것을 기대했던 요나였습니다. 왜 요나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했는지 아십니까? '요나(요, 나)' 때문입니다. 쉽게 말하면 '요놈의 나' 때문입니다. 자신의 생각이나 경험으로 하나님의 생각을 일축한 것입니다. 니느웨는 이방인의 도성이요 요나가 싫어하는 원수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니느웨로 가는척하고 전혀 방향이 다른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탔습니다.
요나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고 가는 가운데 풍랑을 만났고 그 풍랑은 자신 때문인 것을 깨닫고는 자신을 바다에 던지라고 했습니다. 욘1:12절에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 너희가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나의 연고인 줄을 내가 아노라'
한글에 '나'라는 글자는 굉장한 변수를 가진 자입니다. 점하나를 밖에 찍으면 '나'자가 되지만 안에 찍으면 '너'라는 글자가 됩니다. 점 하나에 역사에 판도가 달라지고 개인의 운명이 좌우되고 문제의 실마리가 결정됩니다.
'나'와 '너'의 의미의 차이는 하늘과 땅의 차이처럼 큽니다. '나 때문이다.'라고 할 때와 '너 때문이다.'라고 할 때의 의미는 크게 다릅니다. '나 때문이다.'라는 깨닫는 신앙과 '너 때문이다.'라고 고집하는 신앙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지금 요나는 '나 때문이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께 불순종했기 때문에 이 풍랑을 만났다고 했습니다. 내가 교만했기 때문에, 내가 충성하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믿음의 방법으로 살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풍랑이 왔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요나의 아버지는 '아밋대'인데 그 이름의 뜻은 '아멘, 즉 믿습니다.'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요나'는 '비둘기'라는 뜻입니다. '아멘'인 아버지는 항상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았던 믿음이 좋은 아버지였습니다. 믿음이 좋은 아버지는 그의 아들 요나도 그런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뜻에서 '비둘기'라고 지었습니다. 장차 비둘기처럼 평화의 복음을 전하는 하나님의 사자가 되기를 바라서 그렇게 지어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서 '니느웨로 가서 외치라'는 말씀을 어기고 다시스로 도망간 불순종한 선지자가 되어 지금 풍랑을 만난 것입니다. 여러분, 믿음이 무엇인가? 믿음의 속 알맹이는 순종입니다. 순종하지 않는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드디어 요나는 선원들에 의해 바다에 던지움을 당했습니다. 1:15절에 '요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매 바다의 뛰노는 것이 곧 그친지라' 17절에 '여호와께서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하사 요나를 삼키게 하셨으므로 요나가 삼일 삼야를 물고기 배에 있으니라' 이 물고기는 하나님의 은혜를 상징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안전장치를 마련해 놓으셨습니다. 여기까지가 1장의 배경입니다. 오늘 본문 1-2절에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그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지금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제목소개!▶
일생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많은 고난을 겪습니다. 우리가 원하든 원치 않든 간에 우리의 생애는 고난의 일생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순탄한 생애를 사는 사람도 있지만 많은 사람들이 실패의 쓰라린 경험과 괴로운 탄식을 하면서 생을 살아가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누가 병고에 시달리는 것을 원하겠습니까?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병에 시달리면서 병상에서 고통하고 있습니다. 어떤 때는 억울한 일을 당해서 우리의 많은 것을 빼앗기고, 마음에 한을 품고 살아야 하는 사람들이 이 땅에 많이 있습니다. 하늘 아래 인간고의 고통, 눈물, 한숨, 슬픔, 이것은 말로 다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유명한 나폴레옹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육대주에 부는 바람 인간의 한숨이며 오대양에 넘실거리는 파도는 인간의 한 맺힌 고해라'
인간은 누구나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인간의 고난에 대하여 몇 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먼저 애매한 고난을 당하는 경우입니다. 아무런 잘못이 없기에 자기에게 그런 회오리바람이 불어오리라고 예상도 못했던 슬픔의 고난, 질고의 고난, 많은 고난들이 있습니다. 이런 고난은 참으면 은혜가 된다고 했습니다.
두 번째 고난은 죗값으로부터 오는 고난입니다. 조상들이 지은 죄 때문에 자손들이 그 죄에 대한 대가를 치르는 사람들, 또 내가 하나님 앞에 범죄하고 하나님 앞에서 당하는 심판의 시련, 이런 것은 모두 죗값으로 오는 고난입니다.
세 번째는 의를 위해서 핍박을 받는 고난입니다. 고생을 안 해도 되는데 자원해서 합니다. 순교자들, 의롭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자원해서 감옥에 들어가고, 핍박을 당하고, 시련을 겪습니다. 이것은 의롭게 살기 때문에 당하는 시련입니다.
또 하나의 고난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명자의 고난입니다. 사명을 받았는데 사명을 회피하고, 거역하고, 반역할 때 하나님께서 시련으로 주시는 고난인데 이런 고난은 하나님 앞에서 실패자의 고난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실패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사업의 실패, 직장의 실패, 진학의 실패 등 인간적인 실패가 있습니다. 마땅히 사랑할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고 존경할 사람을 존경하지 못하고 배신한 것이 실패입니다. 부모에게 불효한 것도 인간적 실패입니다. 자식으로서는 엄청난 실패입니다. 부부가 마땅히 사랑할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고 미워하는 것도 인간적 실패입니다. 자기에게 은혜를 베푼 사람에게 은혜로 보답하지 못하고 배신하는 것이 실패입니다.
또 하나의 실패가 있는데 그것은 건강의 실패입니다. 몸을 무리했다든지, 안 먹을 것을 먹었다든지, 내 몸에 대해서 필요 이상의 장해를 주었다든지 이것은 자기 자신의 건강에 대한 실패입니다. 건강하게 사는 것도 성공입니다. 그런데 가장 큰 실패는 하나님 앞에서 사명자의 실패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사명을 받았는데 그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는 자의 실패입니다. 오늘 본문의 요나의 실패가 바로 사명자의 실패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회개하고 돌아서면 하나님은 또 다시 세우셔서 큰 일을 도모하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회복의 통로가 바로 기도입니다.
1. 요나의 실패의 원인이 무엇인가?
미국에서 한 때 베스트 셀러로 인기를 끈 '챨스 콜슨'이 쓴 '회복'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콜슨이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는 범죄자들을 자세히 관찰하고 쓴 책인데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는 죄수들은 세 종류로 분류해 놓았습니다.
⑴자기를 자학하는 죄수가 있습니다. 자학하는 죄수는 절망감속에서 자살을 기도합니다. 최악의 죄수입니다.
⑵모든 것을 포기하는 죄수가 있습니다. 이제 모든 것이 끝장이라고 인정하고 맥없이 앉아 있습니다. 죽으면 죽고 살면 사는 것입니다.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살아갑니다.
⑶그러나 다시 한 번 회복하리라고 다짐하는 죄수가 있습니다. 지금은 비록 감옥에서 갇혀 있지만 감옥에서 나가게 되면 새로운 인생을 멋지게 살 계획을 세우고 그 날을 기다리며 당당하며 살아가는 죄수입니다. 그렇습니다. 다 잃어 버렸어도 꿈과 소망을 잃어버리지 않으면 회복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를 바로 진단하고 돌이키기만 하면 또 다른 하나님의 은총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멘!/
그렇다면 요나의 잘못이 무엇인가? 요나의 잘 못이 우리의 잘못입니다. 같이 진단해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요나에게 내린 명령은 '니느웨에 가서 복음을 전하라'입니다. 그러나 그는 정반대인 '다시스'로 갔습니다.
▶여기서 요나는 세 가지를 상실했습니다.
⑴방향(목적)을 상실했습니다. 현대인의 가장 큰 비극도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바른 방향을 향하여 가고 있습니다. 어디인가? 저 영원한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할/ 우리는 거룩한 천성을 향하여 달려가는 순례자들입니다. 이 목적의식이 바로 되면 어떤 일에도 흔들림이 없습니다. /할/ 제가 묻겠습니다. 여러분들 그 방향으로 잘 가고 있나요? 혹시 그 방향을 상실하지는 안 했나요? 상실하면 큰일입니다.
⑵요나는 의욕을 상실했습니다. 의욕을 상실한 요나는 배 밑창에 가서 자고 있었습니다. 의욕을 상실한 사람의 특징은 시간을 낭비하는 것입니다. 의욕을 상실한 사람은 누워있는 시간이 많습니다. 요나는 자고 있었습니다. 그 때 풍랑이 일어났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영적인 면에서 의욕이 사라졌다면 그 때가 위기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깨어 있으라'고 당부하고 있습니다. /믿/
⑶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상실했습니다. 가장 큰 비극입니다. 성 어거스틴은 '사람은 하나님이 창조하셨기에 하나님 안에서만이 참 안식을 누릴 수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상실한 사람은 방황하게 됩니다. 요나는 하나님을 상실하고 배 밑에 숨었습니다. 한마디로 물고기가 물을 잃어버렸다는 이야기와 같습니다. 주님은 요15:7절에서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할/
여러분, 본문의 요나를 보세요! 모든 것이 다시 회복되었습니다. 고래 뱃속에서 나와서 니느웨를 회개시켰습니다. 성경에서 가장 놀라운 선지자가 되었습니다. 왕부터 짐승까지 모두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났고 한 나라가 몽땅 구원을 받았습니다.
2. 요나의 회복의 비결이 무엇인가?
①고난이 방법이었습니다.
요나는 고래 뱃속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2절에 '내가 받은 고난을 인하여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삽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다윗은 고난의 신비를 알고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시119:67절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또 71절에서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할/
욥은 고난의 대명사입니다. 그런 욥이 모든 고난을 극복하고 고백하기를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할/
미국의 골프 선수인 '보비 죤스'는 '나의 이긴 게임에서는 아무 것도 배운 것이 없지만은 진 게임에서는 교훈을 얻을 수가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요나는 고난 때문에 하나님을 만날 수가 있었습니다. /아멘!/ 고난은 우리에게 방해물이 아닙니다. 고난 때문에 회복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고난을 받으면서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할/
②기도가 방법입니다.
1절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그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지금 요나가 어디에서 기도하고 있습니까? 물고기 뱃속에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물고기 뱃속은 어떤 곳일까요? 그곳은 빛이 없는 어두운 곳입니다. 5절에 보면 '바다풀이 자기 머리를 감싸고 있다'고 말합니다.
큰 물고기는 물과 함께 해초를 삼키기 때문에 바다 풀이 요나의 머리와 온 몸을 감싸고 있는 곳입니다. 위액의 분비로 악취가 나는 곳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기도는 장소를 초월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기도하면 길이 열립니다. 기도하면 보입니다. 기도하면 문제가 풀리고 해결됩니다. 기도하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고 순종하려는 마음이 생겨납니다. /할/
여러분이 기도하는 장소는 어디입니까? 기도원입니까? 성전입니까? 작은 골방입니까? 혹시 일터나, 가정이나, 자동차 안에서 하십니까? 혹시 기도하시기 위하여 물고기 뱃속으로 들어가시는 분은 안 계십니까? 지금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기도의 골방을 찾았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은밀하게 자기와의 대화를 기뻐하십니다.
이런 기도가 하나님을 만나는 기도입니다. 온갖 세상의 잡생각이 다 들어가면서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 한 분과 만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광야와 산에서 기도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지붕에 올라가서 기도하기도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옥중에서도 기도했습니다. 루디아는 강가에서 기도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은밀히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많은 군중 속에서 핸드폰을 받을 때 종종 일어나는 현상 하나는 '안 들려!' 이렇게 외칠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상대방이 '좀 조용한 데로 가봐!' 그럽니다. 조용한 데서는 잘 들립니다. 하나님께서도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이 '너 있는 곳은 너무 시끄러운 곳이다. 좀 조용한 곳으로 가서 내 말 좀 들어 봐!' 그러십니다. 하나님과 우리사이는 은밀한 곳에서 대화가 이루어집니다. 조용한 곳이 어디인가? 요나의 고래 뱃속입니다. /할/
여기서 우리는 이 물고기가 어떤 물고기인지는 확실히 모릅니다. 다만 큰 물고기 중에 고래로 보고 있습니다. ▶저는 오래 전에 63빌딩에서 '고래'라는 아이맥스 영화를 보았습니다. 이 세상에서 지금 가장 큰 동물은 고래입니다. 큰고래는 심장이 소형 자동차만 합니다. 뱃속에 10명 가량 들어갈 수 있습니다. 무엇을 먹든지 4시간이면 뼈까지 소화시킬 수 있는 소화력이 강한 동물입니다. 그런데 요나가 3일 3야를 있었는데 소화되지 않고 생생히 살아 있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할/
그렇습니다. 요나의 기도를 그렇게도 기다리던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의 기도 역시 기다리시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구하면 주시고, 찾으면 만나주시고, 두드리면 열어주시겠다고 약속하고 계십니다. 기도하면 하나님을 만납니다. /아멘!/
③아무리 우리의 환경이 지옥 같을지라도 기도하면 역사는 일어납니다.
요나는 지옥 같은 그곳에서 기도했습니다. 2절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삽더니 주께서 나의 음성을 들으셨나이다'
여기 '스올'은 음부 혹은 지옥을 말합니다. 그 고통이 얼마나 처절하였던지 '이곳이 바로 지옥이구나!' 싶어서 몸부림치며 부르짖었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너무 고통이 심하면 죽고 싶은 때도 있지만 죽을 수도 없는 고통이 바로 지옥의 고통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지옥의 고통이 인간을 인간스럽게 만듭니다. 욕심도, 교만도 다 내려놓게 됩니다. 그리고 자가의 연약함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때부터 진정한 회개가 터져 나옵니다. 사면초가가 바로 하나님을 만나는 곳입니다. 하나님을 피하여 도망치던 요나가 하나님을 향하여 고개를 들고 하나님을 바라보기 시작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께 방향을 돌리는 것입니다.
요나의 기도는 단순한 기도가 아니라 회개하는 기도입니다. 무슨 회개냐? 하나님의 사명을 저버린 것에 대한 회개입니다. 기도 가운데 운명을 바꾸는 기도는 역시 회개하는 기도입니다. /할/ 회개하는 기도는 진실한 기도이며, 하나님 앞에 가까이 나아가는 은혜의 기도입니다. /아멘!/
▶다이아몬드 구별 법이 있습니다. 진짜 다이아몬드와 가짜 다이아몬드 구별 법은 간단합니다. 물 속에 넣어 보면 단번에 알 수 있습니다. 진짜 다이아몬드는 물 속에 넣어도 빛이 그대로 영롱하게 빛나게 됩니다. 그러나 가짜는 물 속에서는 빛을 발하지 못 합니다.
마찬가지로 참 성도는 고난 중에도 하나님을 향하여 나아가는 성도입니다. 참 성도는 고난 때일수록 하나님께 더 나아갑니다. 가짜 성도는 조금만 어려움이 와도 하나님이 없다고 떠나갑니다. 정말 불쌍한 영혼입니다. 하나님을 떠나면 어디로 갑니까? 지옥 음부로 갑니다.
▶여기서 '스올' 지옥에 대하여 알아보고 넘어가야 합니다. 과연 지옥이 존재하는가? 지옥은 반드시 있습니다. 농사를 지으면 마지막에 추수해서 알곡과 쭉정이를 갈라놓는 때가 있듯이 세상 끝날 에 심판이 있고 영원한 천국과 지옥으로 갈라지는 때가 있습니다.
어떤 분은 '사랑의 하나님이 어떻게 끔찍한 지옥을 만들어 사람을 집어넣어 고통을 받게 할 수가 있겠는가?'라고 합니다. 그러나 지옥은 애초에 사람을 위해 만든 곳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대적하고 사람을 유혹하고 괴롭히는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해 마련한 곳이라고 했습니다. 마25:41절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배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어느 목사님이 주일날 지옥에 대한 설교를 했더니 한 교양 있는 여자가 들어와서 '목사님, 20세기에 무슨 지옥설교를 합니까?' 하더랍니다. 그때 목사님이 웃으면서 '자매임, 사람들이 형무소를 싫어하고 사형 당하는 것을 싫어하지만 나라의 질서와 공의를 위해서 반드시 형무소도 있고 사형집행도 필요한 것입니다. 정부가 국민을 괴롭히기 위해서 형무소를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도 되시고 심판의 하나님도 되시는 법입니다.
▶예수님이 지옥이 있다고 여러 번 말씀하셨습니다. 마10:28절에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막9:48절에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바울도 지옥이 있다고 했습니다. 살후1:7-9절에 '주 예수께서 저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중에 나타나실 때에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시리니 이런 자들이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
▶베드로도 지옥을 말씀했습니다. 벧후2:4절에 '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 때까지 지키게 하셨으며'
▶사랑의 사도 요한도 지옥을 말했습니다. 계20:15절에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고 했고, 21:8절에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하는 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고했습니다.
지옥이 없는 복음은 복음이 아닙니다. 복음이란 죄 값으로 심판 받고 지옥 갈 인간이 우리 죄를 대속하신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누구든지 지옥 가지 않고 천국 가기 때문에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그 지옥은 어떤 곳인가? ⑴꺼지지 않는 불이 있는 곳입니다. '영원히 꺼지지도 않으며 벌레 한 마리도 죽지 않는 곳'이라고(막9:48) 했습니다.
지금도 땅속 깊은 곳에는 유황불이 끓고 있습니다. 하와이의 빅 아일랜드에 가면 화산이 폭발했던 곳에 팥죽같이 부글부글 끓어올라오며 누런 유황이 쌓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집에 있는 가스 불이나 석유 불보다 더 뜨거운 불이 꺼지지 않고 붙는 곳입니다.
눅16장에 나오는 부자는 '내가 이 불꽃 가운데 고통을 당하고 있나이다'하고 부르짖으며 '손가락으로 물 한 방울만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하고 애원했으나 그것도 허락되지 않자 그는 '나는 어차피 나갈 수 없는 몸이 되었지만 우리 집에 형제가 다섯이 있는데 나사로를 보내어 이 지옥에 오지 않게 해달라'고 했을 때 '세상에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의 말을 듣고 믿지 않는 사람은 죽은 자가 벌떡 일어나 지옥이 있다고 해도 안 믿은 사람은 안 믿는다'고 했습니다. ⑵피할 수 없는 곳입니다. 어느 빌딩이나 집에나 다 출구가 있고 비상구가 있는 법이지만 출구도 없고 영원히 피해나갈 소망이 없는 곳입니다.
▶그렇다면 지옥을 피할 수 있는 길이 무엇인가? 가장 중요한 메시지입니다. 주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주 예수를 믿어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할/ 또 요3:16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아멘!/
④회복의 비결 그 네 번째는 성전 중심의 생활입니다.
4절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지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 /할/
아주 드문 경우이지만 어린 시절 추운 겨울 부모님께 매 맞고 집밖으로 쫓겨난 아이가 있다고 칩시다. 그는 추위에 떨면서도 멀리가지 않습니다. 비록 매를 때린 부모이지만 그 품에 들어가야 안식할 수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지금 기도하고 있는 요나의 형편은 주께로 호되게 매를 맞고 있는 상황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고 가다가 모진 풍랑을 당한 배에서 바다로 던짐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큰 물고기 뱃속에 들어갔습니다. 바로 이 상황에서 요나는 여전히 주님 계신 성전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9절에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구원은 오직 주님에게만 옵니다' /할/
그렇습니다. 요나는 그 어려운 현실 앞에서도 낙심하지 않고 하나님의 성전만 바라보고 기도합니다. 구원은 오직 주님께만 있기 때문입니다. /아멘!/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하고 봉헌 기도를 드릴 때에 역대하7:12-16절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밤에 여호와께서 솔로몬에게 나타나사 이르시되 내가 이미 네 기도를 듣고 이곳을 택하여 내게 제사하는 전을 삼았으니 혹 내가 하늘을 닫고 비를 내리지 아니하거나 혹 메뚜기로 토산을 먹게 하거나 혹 염병으로 내 백성 가운데 유행하게 할 때에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하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구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 죄를 사하고 그 땅을 고칠지라 이곳에서 하는 기도에 내가 눈을 들고 귀를 기울이리니 이는 내가 이미 이 전을 택하고 거룩하게 하여 내 이름으로 여기 영영히 있게 하였음이라 내 눈과 내 마음이 항상 여기 있으리라" /할/
여러분, 성전은 단순히 아름답고 웅장한 건물이 아닙니다. 성전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집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길이길이 머무는 거룩한 하나님의 집입니다. 하나님의 눈길과 마음이 항상 깃들어 있는 영광으로 가득한 집입니다. 성전은 성도들의 기도를 하나님이 귀를 기울여 들으시는 '만민이 기도하는 집'입니다. /할/
그러므로 다니엘은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가서도 성전이 다 무너지고 없었지만 매일 같이 예루살렘을 향하여 하루에 세 번 씩 창문을 열고 기도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성전을 바라본다.'는 것은 곧 '하나님을 바라본다.'는 뜻입니다. 성전을 바라봤던 요나는 드디어 이렇게 찬양합니다. 6절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내 생명을 구덩이에서 건지셨나이다" 7절 "내 영혼이 내 속에서 피곤할 때에 내가 여호와를 생각하였삽더니 내 기도가 주께 이르렀사오며 주의 성전에 미쳤나이다"
무슨 말씀인가? '내 목숨이 힘없이 꺼져 갈 때에, 내가 주님을 기억하였더니, 나의 기도가 주께 이르렀으며, 주님 계신 성전에까지 이르렀습니다.' /할/
▶여기서 가장 중요한 단어가 바로 '다시'입니다. 다시 라는 말을 보면 얼마동안 요나와 하나님 사이의 관계가 끊어진 관계에 있었음을 말합니다. 요나의 불순종으로 인하여 하나님과 요나 사이에 커다란 공백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요나는 다짐합니다. '여호와여 내가 주의 성전을 다시 바라보겠나이다.' 오늘 우리에게도 '다시'가 있어야 합니다. 새롭게 시작하는 오늘의 '다시'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매일 새로운 날들을 주신 것은 어제의 일은 잊어버리고 오늘 새롭게 다시 시작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꼭 '다시'가 있어야 합니다. 내가 비록 요나와 같이 불순종의 삶을 살아왔을지라도 주님 이제 다시 순종하겠습니다. 이제 다신 기도의 무릎을 꿇겠습니다. 이제 다시 섬김의 삶을 살겠습니다. /할/
⑤요나는 감사와 서원을 새롭게 다짐하고 있습니다.
9절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오늘날 우리가 가장 많이 배워야 할 것이 바로 이 감사입니다. /할/ 행복의 3가지 요건이 있습니다. 행복하다고 생각하고, 행복하다고 말하고, 행복한 사람처럼 행동하는 것이랍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감사하다고 생각하고, 감사하다고 말하고 감사한 사람처럼 해동하시기를 소원합니다.
▶눅17:11-19절에 보면 어느 날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다가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를 지나시게 되었습니다. 그 마을의 나병환자 열 명이 소리쳐 외쳤습니다. '예수 선생님,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예수께서 그들을 불쌍히 여기며 말씀하셨습니다.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 그들이 가는 도중에 자신들의 문둥병이 깨끗이 나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 사마리아 사람 단 한 사람만이 되돌아 와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온 사람이 이 이방 사람 한 명밖에 없느냐?' 하나님은 오늘도 감사하는 자들을 찾으십니다. /할/
여기서 말하는 서원은 아마도 사명 적인 서원 같습니다. 서원은 어떤 것이라도 갚아야 합니다. 신23:21절 "네 하나님 여호와께 서원하거든 갚기를 더디 하지 말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반드시 그것을 네게 요구하시리니 더디면 네게 죄라" 전5:4-6절 "네가 하나님께 서원하였거든 갚기를 더디게 말라 하나님은 우매 자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서원한 것을 갚으라 서원하고 갚지 아니하는 것보다 서원하지 아니하는 것이 나으니 네 입으로 네 육체를 범죄케 말라 사자 앞에서 내가 서원한 것이 실수라고 말하지 말라 어찌 하나님으로 네 말소리를 진노하사 네 손으로 한 것을 멸하시게 하랴"
▶우리가 왜 감사하고 서원도 갚아야 합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귀한 직분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고전4:1-2절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군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부르시고 '복음의 비밀을 맡은 자'라는 직분을 주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일꾼이라는 말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워졌다는 뜻이요 예수께 소속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위해서만 살아야 될 일꾼입니다. 일꾼이기 때문에 일하라는 것입니다. 일꾼다운 모습은 직책의 인식에서 오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충성해야 합니까? 직책 때문에 충성된 자가 되어야 합니다. 학생이 왜 공부를 해야 합니다. 학생이라는 직책 때문에 공부를 해야 됩니다. 왜 우리가 일을 해야 합니까? 직책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멘!/
이 직책에는 반드시 사명이 주어집니다. 사명이라는 것은 그 본질이 충성입니다.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고 했습니다. 충성과 사명은 함께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직책을 받았기 때문에 사명이 있습니다.
사명을 수행한다는 것은 충성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명 때문에 우리는 충성을 다해야 합니다. /아멘!/
충성은 반드시 두 가지 성격을 가집니다. 하나는 주인을 기쁘게 하는 것입니다. 나를 기쁘게 하는 것은 충성이 아닙니다. 나의 주인을 기쁘게 하는 것이 충성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주인만을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주인으로부터 신임을 받는 보상이 따라오는 것이 충성입니다. 다시 말하면 보상받지 못하는 것은 충성이 아닙니다. 진정한 충성은 반드시 보상이 있습니다.
진정한 충성은 주인으로부터 신임을 받습니다. 첫째는 인품이 진실해야 하고 믿음직해야 됩니다. 주인이 일을 맡길 수 있는 사람이라야 신임할 수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일을 잘 감당할 수 있는 실력이 있어야 됩니다. 능력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진실하지만 일을 처리하는 능력이 없어도 신임을 못 받습니다.
세 번째는 최선을 다하는 자세가 귀한 충성입니다. 최선을 다한다는 말은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서 아주 중요합니다. '호랑이는 토끼를 잡아도 최선을 다한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⑥회복의 역사는 바른 신앙의 고백 뒤에 일어 났습니다.
9절 하반절에 '구원은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나이다 하니라' /할/ 이 고백 뒤에 10절은 '여호와께서 물고기에게 명하시매 요나를 육지에 토하니라'
하나님은 쓰실 자를 토해내게 하십니다. /아멘!/ 물고기가 요나를 토해낸 것은 물고기가 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물고기에게 '물고기야, 내가 네게 명하노니 요나를 토해내라'하시니 요나를 토해낸 것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한 요나를 토해낸 것입니다. 바른 신앙의 고백을 들으시고 토해낸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을 괴롭게 하는 고통의 환경이 있습니까? 그 자리에서 토해내라는 주님의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스카불'이라는 훌륭한 신앙 인이 있었습니다. 학교에서 돌아온 어린 아들이 방에 뛰어 들어오더니 '아빠! 아빠!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 통째로 들어갔다고 그르잖아요. 아빠는 이 사실을 믿으세요' '그럼' '아빠 그 사실을 어떻게 믿을 수 있어요?' '큰 물고기는 누가 만들었을까?' '하나님이 만 드셨지요' '요나는 누가 만들었을까?' '하나님이 만드셨지요' '사랑하는 아들아, 그렇다고 하면 하나님이 만든 큰 물고기가 요나를 삼킬 수 있다는 사실을 아빠는 믿을 수 있어. 아니 반대로 요나가 큰 물고기를 삼켰다 해도 아빠는 믿을 거야' /할/ 이런 믿음이 우리 안에 있기를 소원합니다. /아멘!/
왜 하나님께서 요나를 살리십니까? 사명자로 우뚝 세우기 위해서입니다. 사명 자는 그 사명이 끝나기 전에 절대 죽지 않습니다. /믿/
▶다니엘은 붙잡혀 사자굴속에 집어 던져졌습니다. 보나 마다 사자 밥이었습니다. 그러나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다니엘이 사자굴속에 들어 가보니 하나님은 다니엘보다 먼저 천사들을 보내어 사자 입을 막고 계셨습니다. 사자 굴이 천사 굴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늘 함께 계심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어떤 환경도 감사 드릴 수 있습니다.
▶요나는 고래뱃속에 들어갔습니다. 모두가 죽음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고래는 요나를 데리고 니느웨로 갔습니다. 그리고 요나가 가야할 니느웨에 토해 놓았습니다. 요나는 물어 볼 필요도 없이, 배 요금을 낼 필요도 없이 니느웨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성경을 보면 요나는 고래뱃속에서 나오자 말자 외치기 시작하였습니다. '40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지라. 회개하라' 요나가 외치는 소리를 듣자 말자 니느웨 백성들은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하면서 베옷을 입었습니다. 그리고 철저히 회개하였습니다.
욘3:7-9절에 보면 '짐승까지 베옷을 입었습니다. 짐승까지 금식을 했습니다. 니느웨 백성들은 철저히 회개했습니다.' 그렇게 되자 하나님께서 니느웨 백성들을 한 명도 멸하시지 않고 살려 주셨습니다. /아멘!/ 이만큼 선교가 성공한 예는 역사상 없었습니다. 전무후무한 역사였습니다. /할/
▶오래 전에 삼풍백화점이 무너진 사건은 온 세계를 놀라게 했습니다. 그 때 정광진 변호사 사연이 지금까지 여운을 남기고 있습니다. 아내와 세 딸이 삼풍백화점에 갔다가 한꺼번에 죽었습니다. 기가 막힌 일입니다. 그 때 그는 기진 맥진하여 쓰러져 말했습니다. '나는 모든 것을 잃었다.'
그러나 보상금 7억 원과 사유 재산 3억 그리고 모금 3억 원을 해서 13억 원으로 큰딸이 다니던 맹아 학교에 장학 기금으로 기탁했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인재들을 길러 내고 있습니다. 그는 비극의 주인공이 아니라 사랑과 희망을 나누어주는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아무리 고래 뱃속에 지금 있어도 다시 하겠다고 하면 다시 할 수 있습니다. /아멘!/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한 평생 정신 없이 바쁘게 살았습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무엇이 이로운지 해로운지, 하나님이 계신지 안 계신지 생각할 겨를 없이 살았습니다. 그저 돈버는 데에만 정신을 썼습니다. 무작정 바쁘게 일에 쫓겨다니며 살았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천국 문 앞에는 베드로가 지키고 서있었습니다. 오른손에 생명 책을 들고 이었습니다.
그가 천국에 들어가려고 하니까 베드로가 말했습니다. '당신 이름은 이 생명 책에 없습니다.' 그리고 못 들어가게 막았습니다. 그가 말했습니다. '내가 세상에서 얼마나 바쁘게 살았는지 압니까? 당신이 그것을 몰라서 그렇지 내 이름이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베드로가 대답하기를 '나도 바빠서 당신의 이름을 생명 책에 기록하지 못했소'
▶이제 마지막으로 이 사건이 우리 주님의 부활을 예표하신 말씀이 되었습니다.
마12:39-40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 속에 있으리라" 예수님이 무덤 가운데서 3일 동안 죽었다가 살아나므로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처럼 요나는 새로운 존재로 나타난 것입니다.
우리는 고난을 당할 때마다 고난에서 벗어나는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존재로, 병을 고쳤으면 건강한 자가 아니라 영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새로운 존재로, 사업에 실패했다가 일어섰으면 실패자로서 성공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의 성공 자로, 사명을 바로 세우는 자로 하나님 앞에 예배하는 자로, 복음을 전하는 자로, 하나님 앞에 충성하는 자로, 진실한 자로 서야 합니다. /아멘!/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마음이십니다. /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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