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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가 축복입니다! (요 4:23-24)

by 【고동엽】 2022. 2. 7.

예배가 축복입니다! (요 4:23-24)

 

미국의 제16대 대통령 아브라함 링컨은 남북전쟁이 예상 밖으로 길어져 희생자가 많아지자 마음이 몹시 아팠습니다. 동족끼리 싸우느라 하루에도 수백 명씩 젊은 청년들이 죽어갑니다. 마음이 괴로운 그는 집무실에서 하나님 앞에 두세 시간씩 엎드려 간절히 기도합니다. 대통령이 열심히 기도하는 것을 본 장관들도 문밖에서 기도를 합니다. 그리고 대통령이 문을 열고 나올 때에 장관들이 송구한 마음으로 그에게 아룁니다. '각하! 우리도 문밖에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편이 되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러자 대통령은 깜짝 놀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편이 되어 달라고! 무슨 말을 그렇게 하나? 나는 지금 내가 하나님 편에 섰는가가 걱정일세. 내가 하는 일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지, 내가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있는지, 그것이 걱정일세.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중일세' /할/ 참으로 귀한 예배자의 마음입니다.
구약의 입장에서 보면 예배는 제사입니다. 하나님 앞에 제물을 가지고 나아가 바치는 제사행위였습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과 인간이 만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입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시고 우리는 죄인입니다. 이미 죄를 지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죄인을 만나실 때에는 제사를 통하여 만나십니다. 죄인 또한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에 제사를 통하여 나아갑니다.
이 제사에는 몇 가지의 기본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 제물이 온전해야 합니다. 흠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부분을 드려서도 안됩니다. 전체를 드려야 합니다. 우리 생애의 일부분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일생을 모두 드려야 합니다.
둘째: 제사는 물량적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양(量)을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질(質)이 문제됩니다. 부유한 사람은 소를 드리고, 좀 못한 사람은 양을 드리고, 좀 못한 사람은 양의 새끼를 드리고, 그보다 더 가난한 사람은 비둘기를 드립니다. 자기의 수준에 맞게 드리는 것입니다.
문제는 정성입니다. 티 없는 정성입니다. 제물은 무엇보다 정성된 것이어야 됩니다. 정결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올 때에는 의복에서부터 마음가짐까지 다 정결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나오는 자세가 분명해야 합니다.
셋째: 제사의 가장 중요한 신학적 의미는 산 제물을 죽여서 드리는 데에 있습니다. 이미 죽은 제물을 드리는 법이 없습니다. 또한 병든 것도 안됩니다. 건강하게 살아 있는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그 생명을 내가 죽이는 것이 아니라 제사장이 죽입니다. 하나님 편에서 그를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내 죄를 대신하여 바쳐진 제물입니다. 생명을 드리는 것이 제사의 기본적인 의미입니다.


▶예배가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오는 출애굽이라는 역사적 사건은 영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풀려나는 것을 예표한 것입니다. 그러면 왜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나와야 했을까요?
출5:1-3절에서 보면 모세가 바로 왕에게 선언합니다. '내 백성을 보내라!' 이스라엘이 누구입니까? '내 백성' 즉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그런데 누구의 허락을 받고 있습니까? 지금 이들은 애굽의 바로의 지배에 놓여 있습니다. 우리는 누구에게 짓눌려 살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내 백성'으로 부르셨는데 여전히 세상에 발목 잡혀 살고 있지 않습니까?
죄와 심판에서 이미 주님이 해방시켜 주셨음에도 여전히 세상에 끌려 다닌다면 참된 출애굽이 우리에게 있기를 원하십니다. 세상에 끌려 다니고 돈에 무릎 꿇고 살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끌려 다니지 말고 자유 함을 얻어야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아멘!/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을 원하셨을까요? 한마디로 예배를 위한 출애굽입니다. 모세가 바로에게 무엇을 요구합니까? '내 백성을 보내라'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내보내라는 것입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모세는 출애굽의 목적을 선언합니다. 출5:1절 '그들이 광야에서 내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이니라' 출애굽의 목적은 절기를 지키기 위함이라고 말합니다. 출애굽 후 그들이 지켜야 할 중요한 절기들이 만들어집니다. '유월절, 오순절, 수장절'이 중요 절기입니다. 이것은 구원의 은총과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감사하며 그 분께 영광을 돌려드리는 예배의식입니다.
이런 요구에 대해 바로가 거절합니다(2절). 왜 바로는 보내지 않으려 했을까요? 경제적 이유입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노동력을 통해 경제를 움직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은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입었습니다. 우리가 스스로 세상에 묶여 사는 이유도 경제적 이유가 아닌지요?
바로의 거절 앞에 모세는 다시 요구합니다. 3절 '우리가 광야로 사흘 길쯤 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려 하오니 가도록 허락하소서' 다시 요구합니다. 역시 이유는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기 위함입니다.
출애굽의 이유가 무엇입니까? 제사하는 백성의 삶을 살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함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잘 살기 위함이 아닙니다. 그들이 고난으로부터 벗어나는 것만이 목적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바른 예배자로 살겠다는 것입니다. /아멘!/
우리에게 예배처럼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오틀런드'라는 사람은 말하기를 '예배는 인간이 하는 일 중 가장 숭고한 것이요, 가장 가치 있는 행위'라고 말했습니다. 인간이 이 세상에 사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 건져내신 이유도 바로 하나님께 예배드리게 하게 위함이었습니다. 출3:12절에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예배)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 /할/
예배가 없는 사람은 죽은 사람입니다. 영적으로 죽은 사람입니다. 그렇습니다. 예배가 중심이어야 합니다. 이것만 바로 이루어지면, 그리하여 내 영혼이 소생하고 성숙하게 되면 모든 문제가 절로 풀립니다. /아멘!/

 

▶저와 여러분이 예배드리고 있는 이 거룩한 교회는 어떤 곳입니까?
⑴'내가 너희 안에 너희가 내 안에 있으리라'고 한 그 장소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가정에서도 길거리에서도 계십니다. 그러나 오늘 이 시간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에 앉아 있는 동안에 주님은 '내가 너희 안에 너희가 내 안에' 임재하고 계십니다.
이 시간 만 군의 하나님이 내게 오시는 시간이요, 내가 하나님 안에 들어가는 시간입니다. /믿/ 오늘 우리 가운데 있는 모든 미움과 시시, 질투, 분쟁과 다툼 등을 다 버리고 거룩한 하나님을 닮아서 하나님 안에 들어가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안에 내가 들어가야 내 양심이, 내 인격이, 내 삶이, 내 신앙이 달라지게 됩니다.
우리는 무디 목사님을 잘 압니다. 그는 학교 공부를 많이 하지 못했습니다. 가난을 이기려고 구두 수선공이 되어 열심히 일을 했습니다. 그런 그에게 예수님을 영접할 기회가 왔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믿자마자 놀랍게도 변화되었습니다. 예수님이 그 안에 들어가시고, 그가 예수님 안에 접속되었습니다. 그는 수없이 많은 영혼들을 건져냈습니다. 많은 능력을 행하는 하나님의 종이 된 것입니다.
무디 목사님이 시카고에서 목회를 하고 계실 때, 시카고에 대 화제가 나서 무디 목사님의 교회가 잿더미가 되었습니다. 그때 많은 기자들이 몰려와서 '목사님은 하나님이 살아 계셔서 우리를 눈동자처럼 지켜주신다고 설교를 하셨습니다. 또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셔서 무엇이든지 원하시기만 하면 다 이루어 주신다고 설교를 했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거룩한 성전이 불이 타서 없어지는 것을 가만히 보고 계십니까?' 빈정거리며, 비웃으며 질문을 퍼부었습니다.
그때 무디는 아무런 표정의 변화도 없이 대답하기를 '나는 오래 전부터 하나님께 큰 교회를 짓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오늘 그 기도가 응답되는 날입니다. 교회를 크게 확장하려면 건물을 헐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비용이 많이 들어갑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일을 공짜로 해 주셨습니다.'
이 말을 들은 기자들은 너무도 어이가 없고 기가 막혔습니다. 왜냐하면 목사님은 밤중에 당한 화재라 잠옷 바람에 겨우 목숨만 건진 빈주먹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자들은 재차 묻기를 '그럼 목사님! 그런 큰 교회를 세울 돈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때 목사님은 손에 들고 있는 성경책을 보이면서 '나는 수표나 돈을 가지고 있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써도 바닥이 나지 않는 하나님의 금고인 성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얼마 후에 불탄 교회보다 더 크고 훌륭한 교회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뒤 목사님은 시카고 시가지가 재정비되는 기간에 영국으로 건너와서 전 영국을 뒤흔드는 부흥을 일으켰습니다. 그때 은혜 받은 영국민들이 '우리가 무디 목사님의 교회를 지어드리자'는 운동이 벌어져 그들이 모은 헌금으로 화재가 난 그 자리에 옛날 교회보다 더 크고 아름다운 교회를 세울 수가 있었다고 합니다. /아멘!/
여러분 주님이 우리 안에 오셔서 우리를 붙들고 계시면 우리를 당해 낼 수가 없습니다. 환경이 문제가 아니고, 조건이 문제가 아닙니다. 다만 주님과 함께 하는 신앙이 문제입니다.
여러분 오늘 이 자리가 어떤 자리인줄 아십니까? '주님이 내 안에 내가 주님 안에 거하는 자리'입니다. 주님은 요15:7절에서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할/
⑵교회는 다양하면서도 통일된 곳입니다. 교회 안에는 키가 크고 잘생긴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좀 부족하게 생긴 사람들도 있습니다. 많이 배운 사람도 있고, 좀 못 배운 사람들도 있습니다. 또 세상 지위가 있는 사람들도 있고,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부자가 있고, 가난한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이 한 가지 분명한 길을 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어디로 갑니까? 영원히 사는 길, 주님이 높여주시고, 붙들어 주시는 새 하늘과 새 땅을 향하여 지금 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믿/
여러분 교회는 천사들의 집합체가 아닙니다. 의인의 집합체도 아닙니다. 교회는 죄인들의 집합체입니다.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 나를 떠나소서!' 고백해야 되는 우리들입니다. 그런데 회개하기만 하면 배운 사람도, 못 배운 사람도, 가진 사람도 없는 사람도, 천국에 갈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기적입니다. /아멘!/
⑶교회는 복음의 파트너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구원하시는 일을 학교에 맡기지 않았습니다. 병원에도 맡기지 않았고, 국가에도 맡기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정치 권력가에게도 맡기지 않으셨습니다.
그럼 누구에게 맡기셨습니까? 저와 여러분에게 맡기신 것입니다. 세상을 구원하는 역사적인 비밀을 교회에 맡겼고, 저와 여러분들에게 맡기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파트너요 동반자입니다. 고전3:9절에서 '우리를 하나님의 동역자'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자부심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할/
⑷교회는 생명과 빛과 사랑을 받는 곳입니다. 오늘 이 자리가 예수님의 생명을 받는 자리요, 주님의 빛과 사랑을 받는 자리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생명을 받고, 빛을 받고, 사랑을 받아서 이제 세상에 나가 그 예수님의 생명을 주고, 빛을 주고 사랑을 주어야 합니다.
⑸교회는 하나님의 손길을 움직이는 곳입니다. 그 손길은 어떤 손길입니까?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손입니다. 놀라운 것은 우리가 간절히 기도할 때에 하나님의 창조의 손길을 움직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인도하시고 보존하시는 하나님의 손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서 우리 생명을 안전하게 보존해 주시는 분이 누구십니까? 부모입니까? 형제, 친구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만이 우리를 안전하게 지켜주시고, 보호해 주실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분만이 우리에게 먹을 양식을 주시고 우리의 소원을 만족해하십니다. 오늘 예배드리다가 우리를 보호하시고 우리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아멘!/
⑹교회는 복을 받고 질병을 치료받는 곳입니다. 출23:25절 "너의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라 그리하면 여호와가 너희의 양식과 물에 복을 내리고 너희 중에 병을 제하리니" /할/ 이 시간 예배드리다가 우리 양식에 복을 받고, 물에 복을 받고, 예배드리다가 치료의 손길에 잡혀서 심신의 고침을 받는 귀한 시간이 되어지고 환경에 고침을 받는 사람이 되어 지고, 영육이 고침을 받는 시간이 되어 지길 바랍니다.
⑺교회는 어떤 곳입니까? 믿음을 심는 곳입니다. 몸을 드리고, 물질을 심는 곳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법칙도 심고 거두는 법칙입니다. 갈6:7절 이하에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고 하셨습니다. 심지 않고서는 거둘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누구에게나 심는 대로 거두는 추수의 원칙을 적용하십니다.
⑻가장 중요한 것은 교회는 예배드리는 곳입니다. 그래서 성전을 예배당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오늘 예배드리기 위해 여기에 모였습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 있다는 것은 인간이 받은 최고의 은혜이며 최고의 축복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바르게살기를 원합니다. 불의하고 악한 사람도 '악한 자'라는 말을 듣기 싫어합니다. 죄를 지으면서도 죄인이라는 말을 듣기 싫어합니다. 이것은 인간이 선을 행하며 하나님을 찾는 양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수가성의 우물가에 물 길러온 여인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을 만나보려고 먼저 오셔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유대인들이 지나가지 않는 길이었지만 예수님은 먼저 오셔서 죄인 하나를 찾기 위해서 그곳을 찾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여인에게 참 예배가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십니다. 예수님은 참 예배를 예루살렘의 웅장한 건물 안에서의 엄숙한 의식으로 설명하지 않으시고 구약으로부터 예배를 전매특허 받은 제사장에게서 찾지 않으시고 죄 많은 여인을 통하여 우리에게 가르치고 계십니다.
▶구원받은 자의 특징은 예배드리는 일입니다. 마9:13절에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는 이 말씀과 요4:23절의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이 말씀은 동일한 어원입니다.
본문의 사마리아 여인은 어디에 가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 하는가를 물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그린심산에서 예배를 드렸으며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 예배를 드렸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21절에서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그렇다면 예배가 무엇입니까? 원어의 뜻은 '엎드린다. 경배한다'는 뜻으로 사용했습니다. 한문의 뜻은 '하나님 앞에 예하고 무릎 꿇어 경배한다는 뜻이 예배'라고 했습니다. 미국 사람들은 예배를 섬기는 것으로 생각해서 영어의 섬긴다는 단어 Service(서비스)를 사용합니다.
구약의 제사를 생각해 보면 거룩한 제사장의 예복과 제물과 거룩한 예식이 떠오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들이 살아 계신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믿음이 중심이요, 사랑과 존경심이 중심이 되고, 살아 계신 하나님과 인격적인 교제가 예배입니다.

 

▶예배에는 몇 가지 중심이 있어야 합니다. 물론 마음을 묶어 드리는 것이 예배입니다 만은 우리 마음의 중심에 흐르는 사상이 있어야 합니다.
①우리들의 예배는 감사가 필수 조건입니다. 감사 없는 기도, 감사 없는 찬송, 감사 없는 헌금, 이런 것들은 생각할 수 없습니다. 감사가 빠지면 예배가 될 수 없습니다.
②기쁨과 즐거움으로 드려야 합니다. 한마디로 예배를 축제의 분위기가 되어야 합니다. 시66:1절 "온 땅이여 하나님께 즐거운 소리를 발할지어다" /할/ 우리들이 드리는 예배는 기쁨을 가지고 드려야 합니다. 구원받은 기쁨, 하나님 안에서의 새 마음! 이런 기쁨이 찬송으로 기도로 예배로 이어져야 합니다.
③예배는 보는 것이 아니고 드리는 '드림'입니다. '우리 예배 보러 가자'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예배는 모든 것을 전부 드리는 것입니다. 찬송을 드리고, 기도로 드리고, 헌금으로, 내 몸도, 마음도 다 드리는 것입니다.
수22:5)절 "너희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여 그를 섬길지니라" 혈기 죽이고, 고집 죽이고, 변덕 죽이고, 아집과 자아를 죽이고 하나님께 깨끗한 양심으로 드리는 것이 예배입니다. 디모데는 청결한 양심으로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딤후1:3절에 '청결한 양심으로 조상 적부터 섬겨 오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④사모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마음, 하나님의 능력을 사모하는 마음, 하나님의 축복을 사모하는 마음, 이 마음이 없으면 온전한 예배라고 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만나기를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축복도, 은사도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입니다. /아멘!/
⑤주일을 소중이 여기는 마음입니다. 성일도 온전히 성수하는 것, 축복 받는 비결입니다. 하나님은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고 명하셨습니다. 구약에 보면 온전한 주일을 지키는 자에게 네 가지 복을 약속하셨습니다.
⑴건강의 복을 약속하셨습니다. ⑵야곱의 업을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야곱의 업이란 '빈손 들고 멀리 하란으로 도망갔지만 돌아올 때는 엄청난 부를 가지고 온 것'을 가리킵니다. ⑶연합해서 하나가 되는 복을 주시고, ⑷성결의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⑥교회를 사랑해야 합니다. 교회를 가리켜 성전이라고 말씀합니다. 거룩한 전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거룩한 전입니까?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시122:6-7절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안을 구하라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하리로다 네 성안에는 평강이 있고 네 궁중에는 형통이 있을지어다"
⑦준비하는 마음이 귀합니다. 예배를 위하여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준비한 그릇대로 복을 주십니다. 준비한 만큼 은혜를 주십니다. 준비는 정성으로 해야 합니다. 입고 나갈 옷도 준비해야 합니다. 성경, 찬송, 헌금, 모두 준비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마리아 여인은 목마름이 많은 여인이었습니다. 물론 육신의 목이 말라 물을 길러 왔습니다만 사마리아 사람이라고 하는 역사 속에서 그는 고통을 당하며 살았고, 또 그는 윤리적으로 온전치 못하다는 손가락과 비웃음 속에서 삶의 보람을 느끼지 못하는 여인입니다.
그런 중에 예수님을 만나 참 자유를 얻고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되어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사람으로 바꾸어졌습니다. 이 여인이 예수님을 만나자 이번 기회에 궁금하게 생각했던 예배에 대하여 물어봤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그리심 산에서 예배를 드리고 당신들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꼭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하고, 전통적으로 이런 예배가 온전한 예배라고 하는데 이스라엘의 스승 되는 당신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물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간단하게 대답했습니다. '너희는 모르는 것을 예배하지만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한다. 살아 계신 하나님을 내 아버지로 믿고 그분을 향해 기도한단다.' 이런 의미로 말씀하시고 이어서 '살아 계신 하나님께 경배하라! 의식이나 형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가 중요하느니라! 하나님은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오늘도 찾으시느니라' /아멘!/ 의역해 보았습니다.

 

▶성경을 통해 '바른 예배자의 모습'을 조명해 보자!
①먼저 구약 성경 창28:1절 이하에 보면 아버지의 눈을 속이고 장자의 축복 권을 약탈한 야곱이 형의 칼을 피해 외삼촌 집으로 도망하는 기사가 나옵니다.
한참 가다가 밤이 되었는데 아무리 보아도 집이 없습니다. 광야에 괴나리봇짐을 내려놓고 돌 하나를 취하여 베개삼고 누워 잠이 들었는데 하나님의 계시가 꿈속에 나타난 것입니다.
'너 누운 땅을 너와 내 자손에게 주리라 네 자손이 땅의 티끌같이 많아져서 동서남북에 편만할것이며 모든 족속이 네 자손들로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켜줄 것이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 것이다.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네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잠에서 깨어난 야곱이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노라'고 하면서 베고 자던 돌을 세우고 그 위에다 기름을 부은 다음에 '하나님! 나에게 평탄한 길을 열어 주셔서 이곳에 돌아오게 해 주시면 저는 평생 하나님 중심으로 살겠으며 이곳 벧엘에다가 하나님의 성전을 짓겠사오며 온전한 십일조 생활을 꼭 하겠습니다.' 이렇게 서약하였습니다.
그 뒤 야곱은 20년의 세월 속에 많은 어려움도 있었지만 하나님이 복을 주심과 엄청난 재벌이 되어 소 떼, 양떼를 몰고 수없이 많은 종들을 거느리고 네 명의 처와 12아들을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돈을 벌고 보니 생각이 달라져 고향보다는 기름진 땅, 소와 양을 기르기에 좋은 숙곳이라는 곳에서 머무릅니다. 그러다가 더 살기 좋은 곳으로 옮겨 세겜이라는 동네에서 아예 땅을 사고 장막을 짓고 아주 기반을 내립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야곱 가정에 큰 수치를 당하게 만들었습니다. 야곱에게 어여쁜 딸 디나가 있었는데 이 딸이 세겜 추장 아들에게 요새말로 표현하면 성폭행을 당한 것입니다.
이 사건을 알게 된 오라비 시므온과 레위가 그들에게 너희들이 할례만 받으면 네 누이동생을 주고 너희와 무역도 하고 결혼도 할 것을 약조해서 그들로 하여금 모든 남자가 할례를 받게 만들어 놓고 제3일 되는 날 그들이 아파 누워있을 때 시므온과 레위가 칼을 차고 들어가 모든 남자들을 죽여 버리고 여자들과 제물들을 약탈해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한마디로 야곱 가에 큰 사건입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성별 의식을 팔아 사람을 죽이고 다 도둑질까지 했으니 하나님 앞에 엄청난 죄를 짓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세겜 동네에서 살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음성을 주십니다. '너는 하나님께서 네게 나타나셨던 벧엘로 올라가라!' 야곱이 서원해 놓고 살기 좋으니까 그만 까마득히 그 서원을 잃어버린 세속에 취해 사는 야곱을 하나님이 깨우쳐 주신 것입니다.
이때 야곱이 크게 깨달았습니다. 전 가족을 모아놓고 벧엘로 올라가자고 하면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면서 그 온 자식들에게 하는 말이 창35:2절에서 '너희 중에 우상을 가진 자 있느냐? 우상을 다 버려라! 너희 중에 몸이 불결한 자가 있느냐? 자신의 몸을 정결케 하라! 너희 중에 옷이 더러운 자가 있느냐? 옷을 전부 바꿔 입으라'
그러니까 '우상을 버려라! 자신을 정결케 하라! 의복을 바꿔 입어라!' 세 마디를 합니다. 여기에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릴 것을 야곱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⑴우상을 버려라! 우상의 개념이 어떤 형상을 만들어 놓은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 그것이 우상의 개념입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있다면 내려놓으시기 바랍니다.
이 말씀은 바꿔 말하면 우리의 삶의 우선순위를 하나님께 두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질투의 관계는 사랑의 관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깊은 관심을 가지십니다. 또 이 말씀 속에는 정욕, 욕심, 탐심을 모두 버리라는 뜻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⑵네 자신을 정결케 하라! 제물 되기 위해 마음을 깨끗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요즘 교회에서 사용하는 회개하라는 말입니다. 회개 없이 나온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을 향하여 세례요한은 '이 독사의 자식들아' 책망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드리면서 지은 죄를 회개하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축복입니다. /믿어지면 아멘!/ 회개는 씻는 행위입니다. 그릇이 깨끗해야 음식을 담을 수가 있습니다. 깨끗한 심령 속에 하나님의 축복이 임합니다. 하나님의 영성을 깨끗한 심령에 뿌리를 내리십니다.
⑶의복을 바꿔라! 깨끗한 옷을 입으라는 말입니다. 값비싼 옷을 입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문자 적으로는 그렇게 해석되지만 본래의 깊은 뜻은 신분을 바꾸라는 말입니다. 생활태도를 바꾸라는 것입니다. 생활의 방편을 바꾸고, 태도를 바꾸라는 것입니다.
야곱은 도망가면서 급하니까 하나님께 서원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중심, 성전 중심, 예배 중심'으로 살겠습니다. 이 기도가 벧엘의 기도입니다. 우리도 이런 기도를 종종 합니다. '하나님! 이 고난에서 나를 건져주시면 하나님의 뜻대로 살겠습니다. 하나님 이 질병에서 나를 고쳐주시면 하나님 위해 이 몸 바치겠습니다. 하나님 이번 사업에 축복하시면 하나님께 물질 드려 큰 일 하겠습니다.' 그런데 야곱처럼 복을 받게 되면 세겜이 더 좋고 숙곳이 더 좋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벧엘의 기도를 잊지 않으십니다. 그 기도대로 살지 않으면 야곱에게 세겜의 사건을 주어 다 무너지게 만들고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게 하십니다. 오늘 우리의 바른 예배의 자세는 '벧엘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먼저 우상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케 씻고 의복을 바꾸어 입으시기 바랍니다.

 

②신약의 눅18:9-14절을 보면 두 예배자가 나옵니다. 한 사람은 바리새인이요, 다른 한 사람은 세리입니다. 바리새인은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굉장한 기도를 합니다. 반면에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고 기도를 합니다.
두 예배 자에겐 공통점이 있습니다. ⑴둘 다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립니다. ⑵둘 다 의에 관심이 있습니다. ⑶각각 자기를 돌아보게 됩니다. 하나님을 우러러 보면서 자신이 어떠한 사람인가를 성찰하게 됩니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볼 때 차이점이 있습니다. 바리새인은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린다고 하면서 자기의 의를 내세웁니다. 자기가 잘난 것을 자랑하며 자기의 의를 내세우다가 마침내 하나님께 외면을 당합니다. 그의 예배는 실제로는 겉모습뿐이었습니다. 끝내 그는 참 예배 없이 성전을 나오게 됩니다.
그러나 세리는 자기의 의를 전적으로 부정합니다. '하나님!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나는 아무것도 아닌 죄인입니다. 하면서 울부짖던 그는 오히려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함을 얻고 기쁜 마음으로 성전을 나섭니다.
▶예배의 궁극적인 관심은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 안에서 나를 발견하고 하나님 앞에 나 자신을 용서받는 것'입니다.
바리새인의 예배는 실패했습니다. 그 원인은 자기중심적인 예배를 드렸기 때문입니다. 자기중심적인 사람은 하나님을 못보고 이웃도 보지 못합니다. 다른 사람보다 자기가 낫고 똑바른 존재로 구별해 놓고 있고 자기만 의롭고 자기만 진실하다고 소리칩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는 이미 무너져버린 상태입니다.
바리새인은 노골적인 표현으로 기도합니다.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교만한 사람입니다. 나만이 특별한 사람이고 다른 사람은 대수롭지 않게 보았습니다. 바리새인은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한다고 자랑합니다. 이틀이 아니고 두끼니 입니다.
본래 경건한 이스라엘 사람들은 일주일에 한번 금식하는 풍속을 지킵니다. 그러나 나는 두 번씩 금식한다고 자랑하는 것입니다. 나는 그들보다 더 경건하다고 자랑하는 것입니다. 형식적이고 외식 적인 자랑입니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보다 뭐 좀 안다고 우쭐됩니다. 재산이 더 많습니다. 지위가 높다는 것을 자랑합니다. 그러나 무서운 자랑은 영적 교만입니다. 내가 얼마나 기도했는데 얼마나 하나님께 봉사했는데!
▶한 성도가 목사님께 전화를 걸더니 대뜸 '목사님 저를 아십니까?' 묻더랍니다. 잘 모르겠는데요. '아니 목사님 제가 40일 금식기도한 사람인데 저를 모릅니까?' 40일 금식한 것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어떤 목사님은 아예 명함에다 '40일 금식 두 번'하고 찍어 가지고 다닙니다.
주님은 은밀하게 하시는 손길을 붙잡습니다. 마6:3절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하십니다. 바리새인은 외식, 형식, 의식만을 중요시했지 예배에 내용이 없습니다.
반면에 세리는 말이 적습니다. 오로지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가슴을 칩니다. 진실로 죄인입니다. 통탄을 합니다. 세리는 하나님과 절대적인 관계를 이룹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도 자랑하지도 않습니다. 그는 다만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기도합니다. 여기 '불쌍히 여기다'의 '헬'의 의미는 '일반적으로 용서를 빈다'는 뜻입니다. 또 '복을 달라는 뜻도 되고 의를 달라는 뜻'도 됩니다. 긍휼을 바라는 기도입니다. 예배는 하나님께 드림의 자세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자비와 긍휼을 기다리는 마음입니다.
본문은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성령의 인도하심으로만 참 예배가 됩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를 하나님 앞에 인도하시고 하나님과 교통하게 하십니다.
롬8:14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고전12:3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린다는 것은 성도의 영이 성령에 힘입어 신령한 세계에 들어가서 예수 그리스도와 영적인 교통을 하며 성경의 말씀대로 하나님을 섬기며 말씀에 복종하며 하나님을 따라 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사람의 외모를 보시지 않습니다. 중심에 얼마나 진실이 있느냐 그리고 얼마나 정성이 있느냐를 보십니다.
예배 순서에서 말씀을 받고, 은혜를 받고, 축복을 받는 것은 신령에 속하며 기도를 드리고 찬양을 드리고 헌금을 드리는 것은 진정에 속합니다.
사29:13절 "주께서 가라사대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
마음이 떠나고 중심이 떠나고 형식만 남은 예배를 가리킨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진실과 정성을 다하는 예배를 받으십니다. 가난한 과부가 엽전 두 잎을 연보 함에 넣을 때, 예수님은 '이 가난한 과부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다'고 칭찬하셨습니다. 지금 우리 중심이 어디에 있습니까? 이 시간 우리의 마음을 온전히 드리십니다. 한 마음으로 드리십니다.
야고보 장로님은 두 마음을 품는 것은 영적 간음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형식적인 것을 싫어하십니다. 형식적인 예배는 습관적입니다. 하나님은 의식적인 것도 미워하십니다. 마음 없이 드리는 헌물은 뇌물이 됩니다. 정성 없는 예배는 가증한 것이 됩니다.
진정을 드린다는 것은 회개하는 마음입니다. 회개 이상의 진실이 어디 있습니까? 최대의 거짓은 회개 없는 마음입니다. 다윗은 그의 참회록에 '하나님이 구원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은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라!' 마음을 찢고 진실을 드릴 때 하나님은 우리를 만나주십니다.
▶어느 TV에서인가 '양심추적 386 기동 팀'을 종종 보았습니다. 고액 세금 체납자를 추적하여 세금을 받는 고발 프로입니다. 대부분 몇 십억에서 수천만 원의 연체자들입니다. 그런데 공통점은 돈이 없어서 세금을 내지 않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교묘하게 다른 사람의 명의로 변경시켜 놓고 고의적으로 체납을 하는 것입니다. 기동 팀이 찾아가면 대부분 욕설을 하고, 폭력을 휘두르기도 합니다.
그런데 저는 TV를 보다가 가슴이 뜨끔했습니다. 카메라를 확 비추는데 그 집 거실에 이런 액자가 보였습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참으로 아찔했습니다. 무슨 의미로 그 말씀을 걸어 놓고 사는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서 그런 액자를 거실에 걸어 놓았다면 당연히 집을 팔아서라도 세금을 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가슴 아픈 우리의 현실입니다. 바닷물은 2.65%의 염분으로 썩는 것을 막습니다. 그런데 왜 이 땅에 5만개가 넘는 교회의 십자가가 하늘을 붉게 물들이고, 천 만 명의 넘는 성도들이 살고 있는데 이 민족은 갈수록 어렵고 힘든 상황으로 빠져들고 있습니까? 이것은 누구의 잘못이 아니라 바로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잘 못입니다. 가슴을 치면서 회개해야 합니다.
▶최고의 신학자 '칼 바르트'는 예배의 중요성에 대하여 세 가지로 말합니다. '예배는 가장 중요한 것이요. 가장 긴급한 것이요. 또 가장 영광스러운 일이다' 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배는 성도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예배보다 더 소중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예배 없는 봉사, 예배 없는 충성은 헛된 열심입니다.
그리고 예배보다 더 급한 것도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예배는 오늘 못 드리면 다음에 드리면 되지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아닙니다. 예배는 그 순간 지나쳐 버리면 다시 돌아오지 않습니다. 세상일은 오늘 못하면 내일 하면 됩니다. 그러나 예배는 오늘 나에게 주어진 시간을 놓치면 영영 돌아오지 않습니다.
예배는 가장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세상에서 성공하고 출세해서 영광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지나가면 잊혀집니다. 들에 피어있는 꽃과 같습니다. 그러나 거룩하신 주님 앞에 몸과 마음을 다하여 드리는 예배는 죄 많은 우리들이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과 능력을 덧입는 가장 영광스러운 자리입니다. 이것은 천국은행에 저축하는 것과 같습니다. 천국 은행은 절대로 파산 당할 우려가 없습니다.
'아버지께서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를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예배를 통해서 우리를 만나시고 용서해 주시고 은혜를 주시며 축복을 주십니다. 여러분 우리의 신앙의 최고의 관심은 예배입니다. 예배 성공이 인생 성공이 됩니다. 하나님을 만나면 모든 것이 해결됩니다. 그래서 예배가 축복입니다. /할/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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