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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생활! (엡 4:25-32)

by 【고동엽】 2022. 2. 7.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생활! (엡 4:25-32)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대로 인간을 지으시고 기쁘게 즐겁게 행복하게 살아가도록 모든 것을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모든 부모들이 자기 자식들은 기쁘고, 즐겁고 행복하게 잘 살기를 원하듯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도 모든 주의 자녀들인 성도들이 기쁘게 즐겁게 행복하게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창조의 법칙입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이 죄를 범함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떠나 마귀의 뜻을 따라갔기 때문에 기쁨과 평안을 잃어버리고 슬픔과 저주의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없는 삶은 죽은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것을 다 누리고 있어도 하나님 없으면 그의 생명은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삶 속에 하나님이 없다면 그 모든 것이 헛된 것이고 썩어져 가는 것입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 가운데 가장 부귀영화를 누렸던 인물은 솔로몬 왕이었습니다. 최고의 권력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1,000명의 처첩을 거느린 사람입니다. 게다가 그는 세상에 전무후무한 지혜를 가진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는 인생에서 실패한 사람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전1:2절에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고 고백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세상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것을 다 가졌고 다 해보았으면 그는 '복되고 복되며 복되고 복되니 모든 것이 복 되도다'고 고백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는 헛되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왜 헛된 것입니까? 왕이라는 권력 속에 하나님이 없으면 그 권력은 헛된 것입니다. 내가 가진 재물 속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으면 그 재물도 헛된 것이요, 내가 가진 지식과 명예 속에 하나님이 없으면 그 모든 것이 다 헛된 것입니다. 내 가정에, 내 직장에, 내 사업체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으면 모든 것이 헛된 것이고 곧 안개와 같이 사라질 것입니다. /믿/
내가 살아가는 하루 하루의 삶 속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고, 하나님이 내 삶의 주인이 되시지 않으면 나의 하루가 아니 1년이 아니 인생전체가 다 헛된 것입니다. 솔로몬의 그 부귀영화가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 없는 부귀영화는 곧 쉽게 사라지는 이슬 같으며 굴뚝에서 나가는 연기와 같은 것입니다.
솔로몬이 남긴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 어떤 부귀영화와 명예와 권력도 하나님 없으면 헛된 것이란 교훈을 우리에게 남긴 것입니다.
하지만 다윗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솔로몬처럼 부귀영화도 누리지 못했습니다. 솔로몬의 지혜도 갖지 못했습니다. 그의 인생은 늘 죽음의 고비 고비를 어렵게 넘기며 살았습니다. 왕이 되기 전에는 사울 왕으로부터 쫓기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왕이 되고 나서는 아들 압살롬으로부터 쫓기는 부끄러운 왕이 되고 말았습니다.
참 험난한 생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시23:1절에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늘 나를 인도하는 목자가 되니까 부족함이 없는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부족함이 없다고 고백해야 될 사람은 다윗이 아니라 솔로몬입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지난날을 돌아보면 기쁘고 즐겁게 살지 못하고 걱정하며 근심 속에 살았던 것이 안타깝기만 합니다. 솔로몬 왕은 뒤늦게 야 그것을 깨달았습니다. 전3:12-13절에서 '사람이 사는 동안에 기뻐하며 선을 행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는 줄을 내가 알았고 사람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것이 하나님의 선물인 줄을 또한 알았도다' 전에는 몰랐다는 말입니다.
왕이 되고 높은 지위에 앉고 영광스러운 자리에 있으면 모든 것이 제일일줄 알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높은 자리라도 그 자리에 기쁨과 즐거움이 없다면 초가삼간보다 못합니다. 초막에서도 기쁘고 즐겁게 살아가면 왕궁보다 낫습니다.
아무리 돈이 많고 대궐 같은 집에서 산다할지라도 그 속에 기쁨이 없고 괴롭고 답답하면 그것은 가난 속에 행복한 것만 못한 것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사람들은 '높은 지위에 올라가면, 좋은 옷을 입으면 즐겁고 기쁘겠지' 생각합니다. '더 좋겠지, 더 기쁘겠지' 하면서 여행도 하고, 등산도 하고, 사업도 합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들은 기쁨과 행복을 얻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쁨과 행복을 얻으려고 어떤 일을 할 때는 선택을 잘해야 합니다. 즐거움은 과정이 아니라 하나의 열매입니다. 기쁨과 즐거움이 있다는 말은 그만한 알곡이 있고, 내용이 있다는 말입니다.
슬픈 것은 공연히 슬픈 것이 아닙니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에 슬픈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안에서 즐거움을 누리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그만한 은혜가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믿/
우리는 선택을 잘해야 합니다. 어디서나 기쁨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참 기쁨이 있는 곳을 우리는 선택해야 합니다. 어떤 기쁨은 뒤에 슬픔이 따르기도 하고 저주도 따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기쁨 뒤에 더 큰 축복이 따르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기쁨의 길은 우리가 찾아야 합니다.
시37:4절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
시112:1-3절 "할렐루야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계명을 크게 즐거워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그 후손이 땅에서 강성함이여 정직자의 후대가 복이 있으리로다 부요와 재물이 그 집에 있음이여 그 의가 영원히 있으리로다"
시인은 하나님의 계명을 즐거워하는 자에게는 즐거움만 있는 것이 아니라 복이 따른다고 말씀합니다. 무슨 복입니까? 후손이 복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자손이 복을 받습니다. 여호와의 계명을 즐거워하는 마음으로 가정생활을 할 때 자식이 배우고, 부모가 따라 나와서 예수님을 만나면 그 자식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저절로 생기게 됩니다.
이런 가정은 늘 화목하고 감사가 넘쳐 나서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받게 됩니다. 믿음의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제대로 안 하면 본인들만 문제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자식들까지 방황하게 됩니다. 오늘날 청소년들이 얼마나 방황하고 있습니까? 경제적으로 풍요로워지면서 사회가 자유개방이 된지도 오래되었지만 청소년들은 갈 바를 모릅니다. 세상은 너무나 유혹하는 곳이 많습니다.
여러분 자녀들에게 믿음의 유산을 물려주십시오, 그런 자녀들은 결단코 망하지 않습니다. 분명히 하나님이 책임져 주십니다. /믿/ 또 하나님의 계명을 즐거워하는 자에게 무슨 복을 준다고 합니까? 시112:3절 "부요와 재물이 그 집에 있음이여 그 의가 영원히 있으리로다" 부요함과 재물입니다.
여러분, 물질도 하나님이 주셔야 합니다. 물질도 하나님이 관리해 주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이 부요와 재물은 엉뚱한 곳으로 나가지 않습니다. 한마디로 인생의 그물을 하나님이 잡고 계시므로 구멍이 나지 않습니다.
여러분 인생을 기쁘고 즐겁고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십니까? 먼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기 바랍니다. 그리하면 하나님이 우리의 소원을 이루어 주신다고 약속했습니다. 바울은 고후5:9절에서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또 엡5:10절에 "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의 무엇을 보고 기뻐하실 까요? 한마디로 변화된 삶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세상 사람과 무엇이 달라도 달라야 합니다.
엡4:22절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라"고 했고, 시51:10절에서 다윗은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하고 기도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속 사람이 바뀌어야 합니다. /아멘!/
▶어느 농부가 돼지를 집안으로 끌고 와서 목욕을 시키고 발톱을 깎아주고 전신에 향수를 뿌려주고 목에는 리본을 매어준 후 안방에 들여놓았습니다.
돼지는 제법 모양이 있어 보였습니다. 돼지는 얼마동안 주인과 주인의 손님들에게 훌륭한 애완동물 노릇을 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방문이 열리기가 무섭게 돼지를 방에서 뛰쳐나갔습니다. 어디로 갔겠습니까? 돼지가 제일 먼저 찾아간 것은 시궁창 속이었다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는 아직 돼지의 본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외적으로 모양은 변했으나 내적인 변화가 없습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속 사람이 바꿔져야 합니다. 바울은 '오직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와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고 했습니다.
새사람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은 자입니다. 마음이 변하여 새사람이 되면 중대한 변화는 스스로 체험하게 됩니다.
인간의 가치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존재라는 데 있으며 그래서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라고 합니다. 그런 인간이 죄를 범함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잃어버린 형상은 우리는 예수 안에서 찾아야 합니다. 새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인간의 변화 중 가장 큰 변화는 목적이 변화입니다. 삶의 목적이 변화되지 않으면 참다운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새 마음, 새사람은 하나님을 위한 변화입니다. 이때부터 우리의 가치관이 변화고 인격이 바꿔지게 됩니다.
지금까지는 세상 따라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하나님을 따라 사는 자로 바꿔집니다. 사는 목적이 하나님께 있는 것입니다. 이제 자신을 위해 살지 않습니다. 위하여 사는 대상이 달라져야 새 사람이요 새 마음입니다. /아멘!/
오늘 본문이 예수 믿고 변화된 사람들이 지켜야할 덕목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같이 상고해 보겠습니다.

 

1. 무엇을 절제해야 하는가?

 

①말의 절제입니다!
절제라는 말은 알맞게 조절한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삶을 조절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25절에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거짓을 버리라고 합니다. 24절에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고 말합니다. 새사람은 '옛사람을 벗어버린 자'입니다. 문자적으로는 '갓 만들어낸 사람'을 의미하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예수 안에서 이루신 구속사역을 통해 재창조된 하나님의 백성'을 가르칩니다.
여기서 '거짓'은 모든 종류의 부정과 속임수와 궤계를 말합니다. 거짓말은 옛사람들이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거짓말을 하므로 내게 유익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또 거짓말을 해야 이 위험스런 고비를 넘기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거짓은 또 거짓을 남게 됩니다.
어린아이들 사이에서 한창 유행하던 속어 가운데 '뻥'이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실컷 어떤 말을 진지한 척 지껄이고 난 후 '뻥'이라고 말하면 그것은 거짓말이었다는 뜻이 됩니다.
▶다이아몬드의 가치는 네 가지로 결정이 됩니다.
첫째 캐럿(carat)입니다. 캐럿의 클수록 비싸고 좋은 것입니다. 1캐럿과 10캐럿은 그 값과 질에 있어서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둘째는 모양(cut)입니다. 누가 어떻게 디자인해서 잘랐느냐에 따라 모양이 달라지고 값이 달라집니다. 셋째는 컬러(color)입니다. 어떤 색깔의 빛을 발하느냐에 따라 값이 달라집니다. 넷째는 완벽한 즉 순결도 입니다. 흠이 있으면 아무리 캐럿이 커도 값이 안 나가고 흠이 없으면 값이 비쌉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위대한 가치는 진실에 있습니다. 여기 '참된 것'은 진실을 의미합니다. 제아무리 공부를 많이 하고 인품이 좋고 경륜이 높고 인기가 있다고 해도 거짓말 잘하는 사람은 지도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정치가가 되면 정치가 온통 권모 술수의 온상이 되는 것이고 그런 사람이 기업가가 되면 모리 협잡에 앞장을 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진리와 의와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자입니다. 그러므로 진리와 반대되는 거짓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거짓말은 그 인격과 신앙과 삶이 거짓되기 때문에 나옵니다 진실한 사람은 거짓말을 할 수 없습니다. 계22:15절을 보면 '거짓말하는 자들은 지옥에 들어간다'고 했습니다. 거짓을 멀리 해야합니다. 이제 믿음 안에 새 사람이 되었으니 거짓을 버려야 합니다. 요8:44절에 보면 '마귀가 바로 거짓의 아비'라고 했습니다.
본문에 '거짓을 버리라'고 한 말은 '단번에 버리라'는 의미입니다. 그 말 자체가 부정과거형으로 되어 있어서 한번 버리는 것이 아니고 단번에 영원히 버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뒤에 나오는 '참된 것을 말하라'는 것은 현재형으로서 '계속해서 그렇게 말하라'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참된 말을 하는 것은 새사람이 된 증거입니다. /아멘입니까?/
▶저는 이번 중국 여행에 가이드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중국은 다민족국가입니다. 어떤 부족은 남녀가 결혼하면 두 부부의 앞 이빨 두 개를 몽땅 빼버린답니다. 이유인즉 부부 싸움하다가 격한 말이 나올까봐 발음을 정확하게 못하게 하기 위해서 이빨을 빼버린다는 것입니다. 그 부족들은 이혼율이 정말 없다고 합니다. 말 한마디에 천 냥 빚을 갚는다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세상 사람들 앞에서도 거짓을 버리고 참된 말을 해야 함은 물론 교회 내에서 같은 성도끼리 거짓을 버리고 참된 것을 말하라는 비중이 더 큽니다. 왜 그래야 됩니까?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라' /할/ 지체가 되었다는 것은 한 피를 받아 한 형제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의 피로 하나가 되었습니다. /믿/


②마음의 절제입니다!
26절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여기 '분을 내어도'란 말을 보면 사람들은 누구 나가 분을 낼 수 있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금술 좋은 부부사이라도 이따금 분을 내는 일이 있습니다. 부모 자식간에도, 형제간에도, 친구간에도, 성도간에도 분을 내는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분을 내어도 죄까지는 짓지 말라고 했습니다. 분을 내고 그 분풀이를 다 하게 되면 죄를 짓게 됩니다. 제가 옛날에 분내고 분풀이 하다가 엄청 손해를 봤습니다. 참는 자는 이기는 자입니다. 참아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이 화를 잘 낸다든지, 신경질을 부린다는 것은 자기 통제가 안 된다는 증거입니다. 분을 낸다는 것은 단순히 분 자체로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신체 기능과 정신 기능과 영혼 기능의 삼부 합작이라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분 내기를 힘쓰면, 신체도 정신도 영혼도 결국은 결정적 손해를 보게 됩니다. 마귀는 가능하면 최선의 방법을 동원하여 오해 미움 보복 갈등 분열을 꾀합니다. 분내는 것은 마귀에게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됩니다. /믿/
오늘 본문의 '분을 내어도'란 말은 '의분'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혈기를 버려야 합니다. 그러나 의분은 잊어야 합니다. 우리 주님은 의분을 내셨습니다.
막3:5절에 보면 예수님이 분을 내셨습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안식일 날 회당에서 병을 고쳐도 되느냐 안 되느냐 비판하는 무리들을 향하여 그들의 마음이 완악 함을 보시고 노하셨다고 합니다.
또 한 번은 막10:14절에 어린아이들이 예수께 나오자 사람들이 막는 것을 보시고 마음이 분해서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막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행17:16절을 보면 사도바울이 분을 냈습니다. 왜 그 성직자가 분을 냈습니까? 아덴에 가보니 너무 많은 우상을 보고 분이 난 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세상 적인 지성인이라고 자처하면서 이렇게 우상 밖에 못 섬겼느냐 생각하니 화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이런 것은 소위 의분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도 바른 의분이라 할지라도 죄를 짓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말로 다 깨닫게 가르쳐주셨습니다.
여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 이 말씀은 그 날의 문제를 그 날 해결하라는 것입니다. 내일도, 모레도 계속 분을 품고 살아가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지 말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하루에 일어난 분을 하루에 다 풀어버리시기 바랍니다. 가끔 부부싸움을 할 때도 그것을 풀어버려야 합니다. 오래가면 안 됩니다. 부부는 어떻게 보면 남입니다. 유행가도 있습니다. 남이라는 글자에 점하나를 빼면 임이 되고 임이라는 글자에 점하나를 찍으면 남이 된다는 것입니다.
오래 분을 품고 있다가 남이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기독교는 어떤 경우라도 이혼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짝지어준 인연은 사람이 임의로 나눌 수 없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분내는 사람을 기뻐하지 않습니다.


③믿음의 절제입니다!
27절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는 말씀은 26절의 '분을 마음에 오래 품으면 마귀가 틈을 타기 쉽다'는 것입니다. 도적이 어디로 들어옵니까? 도적은 틈이 있으면 들어옵니다. 그래서 문단속을 잘해야 합니다.
도적이 들어오면 손에 잡히는 것 다 가져갑니다. 손해입니다. 우리 믿음의 도적은 마귀입니다. 마귀는 틈을 타고 들어옵니다. 약한 데로 꼭 뚫고 들어옵니다. 돈을 좋아하는 사람은 돈을 통해 마귀가 들어옵니다. 여자에 약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마귀가 여자를 통해 들어옵니다. 명예심이 강한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바로 명예심이 약점입니다.
마귀는 이런 약점을 타고 들어와 믿음을 모두 도적질해 갑니다. 우리의 믿음이 한 결같이 빈틈이 없어야 합니다. 틈만 주면 마귀는 우는 사자처럼 덤벼듭니다.
벧전5:8-9절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니라"
하나님은 마귀에게 넘어가는 성도를 보시고 슬퍼하십니다. 그러나 굳센 믿음 속에 살아가는 성도들을 보시고 기뻐하시고 좋은 것을 상으로 준비해 주십니다.
히11:6절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2.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생활은 덕을 세우는 일입니다(28-29).

 

①변화의 덕을 세우십시오,
"도적질하는 자는 다시 도적질하지 말고 돌이켜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
도적이 변하여 구제하는 사람이 되라고 했습니다. 도적질하지 말라는 말씀은 십계명 중 여덟 번째입니다. 도적질은 당시 이방인의 사회에서 보편적으로 행해지던 죄입니다. 에베소교인의 증거도 예수 믿고 구원을 받았지만 마음속에 탐심이 아주 없어지지 않아 도적질하는 사람이 있었다고 합니다.
도적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⑴좁은 의미로는 실제로 남의 것을 훔치는 자를 말하는 것이고 ⑵넓은 의미로는 게으른 자가 스스로 일하지 않고 남의 수고로 덕을 보며 사는 것도 사실은 남의 수고를 도적질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도적질하지 말라'는 것은 남에게 이익을 주지 못하고 손해를 주던 생활에서 이익을 주는 생활로 바꾸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도적질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행'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근면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게으름을 바로 도적질의 원인이 됩니다. 게으르지 않고 근면 성실하게 자기의 일을 다 할 때 죄의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으며 나아가 '선한 일'을 하게 되어 이웃을 도와줄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아멘!/


②언어의 변화를 가져야 합니다.
29절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예수 믿는 사람들은 행동뿐만 아니라 말을 조심해야 합니다. 더러운 말은 더러운 마음에서 나옵니다. 마15:18-19절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 말은 그 사람의 인격이 됩니다. 여기서 더러운 말이란 문자 적으로 '부패한, 썩은'이란 의미로 단순히 좋지 않은 언어가 아니라 악의 있는 험담과 남을 중상하고 모략하고 비방하는 것도 포함됩니다.
이것은 남에게 해를 끼치고 분쟁을 일으킵니다. 어떤 사람은 남의 험담에다가 이간질시키는 일에 앞장서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마12:36절에 보면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때 우리의 행동뿐만 아니라 말의 책임도 하나님은 심판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도여러분 덕을 세우는 말, 남에게 은혜를 주는 말만하시기를 바랍니다. /할/


③감사하는 말을 해야 합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친절미가 넘치는 말입니다. 감사를 나타내면 감사의 조건이 열립니다. 잠6:2절 "네 입의 말로 네가 얽혔으며 네 입의 말로 인하여 잡히게 되었느니라" 우리의 말이 우리의 환경과 운명을 좌우합니다.
▶말에는 세 가지 놀라운 힘이 있습니다.
⑴각인력이 있습니다. 뇌세포의 98%가 말의 지배를 받는다고 학자들은 발표했습니다. 자기가 말하는 것이 자기도 모르게 뇌세포에 각인됩니다.
⑵견인력이 있습니다. 말에는 행동을 유발하는 힘이 있습니다. 말을 하면 뇌에 박히고 뇌는 척추를 지배하여 행동을 이끌어 냅니다. 그래서 언행일치라고 합니다.
⑶성취력이 있습니다. 말이 씨가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말에는 성취력이 있습니다. 무하마드 알리는 전투 경기 전에 꼭 말로이깁니다. '3회전에 KO 시키겠다.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쏘겠다.'고 경기 전부터 떠벌립니다. 그의 고백에 보면 '나의 승리는 반은 주먹이고, 반은 말이었다.'고 했습니다.
말에는 각인력, 견인력, 성취력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감사하는 말인 '나는 행복해요' 긍정적인 말을 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말끝마다 부정적인 말을 합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말의 권세가 다릅니다. 절대로 부정적인 말을 하지 않고 적극적이고 생산적이고 긍정적이고 남을 칭찬해 주는 그런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어떤 남녀가 열렬히 사랑하다가 드디어 결혼에 골인했는데 일 년 후에 아무 이유 없이 이혼을 했다고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자세히 조사해 봤더니 남편이 직장에 갔다 오기만 하면 방에 앉아서 기타를 치는데 날마다 이별 곡만 쳤다고 합니다.
한국의 이별 곡이 13곡이 있는데 '이별의 부산정거장'으로부터 시작하여 '목포의 눈물'까지 13곡의 이별 곡을 일 년에 부르고 나니까 그들의 머릿속에 이별만 새겨지고 드디어 이혼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말에는 성취력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 믿음의 소리만 합시다. /할/

 

3. 하나님은 경건의 삶을 기뻐하십니다.


▶어떤 부잣집 주인이 회갑을 앞두고 어떤 짐승을 잡아서 잔치를 벌일까 고민하다가 모든 짐승들을 집합시켜놓고 민주적이고 신사적으로 잔치에 죽어 줄 짐승을 선택하기로 했습니다. 먼저 가장 만만한 닭에게 말합니다. '이번 잔치를 위해서 네가 죽어줘야겠다.' 그랬더니 닭이 '주인님을 위해서 죽는 것은 영광입니다만 내가 죽으면 새벽마다 깨워주는 것과 계란을 낳아서 주인님 영양을 보충해 주어야하는데 누가 하겠습니까?' 주인이 생각해 보니 그럴만합니다.
그래서 개에게 말합니다. '네가 죽어 주어 내 회갑을 즐겁게 하라' 그러자 개가 말하기를 '주인님! 내가 죽으면 도둑놈은 누가 지키며 애가 똥을 싸면 누가 청소합니까?' 주인이 생각해보니 개도 안 되겠다 싶어서 소를 불러 세웠습니다.
그리고 '우 선생이 죽어줘야겠다.'고 말하자 '주인님 나도 힘들어 죽고 싶습니다. 허구한 날 밭 갈고 논 갈고 쓰레질하고 죽도록 부려먹고 밥도 아니고 죽만 주니까 자존심이 상해서 죽고 싶었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닙니다. 잘 됐습니다. 주인님 회갑 잔치에 좋은 일 하고 죽겠습니다.'하고 항의 겸 순교를 자청하자 죽만 먹인 것이 미안하기도 하고 농사지을 일도 걱정이어서 주인의 마음이 약해집니다.
그래서 돼지에게 죽어 줄 것을 주문하고 혹시 죽지 못할 이유가 있으면 말하라고 합니다. 그러나 돼지는 아무 생각이 없는지 꿀꿀거리면서 먹기만 합니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하는 일이라고는 없고 먹고 자고 싸고 하는 것밖에 떠오르는 일이 없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주인님 물 끓이세요'하고는 장렬히 죽어갔다고 합니다.
우화이지만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웃을 수만은 없는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사람이 마땅히 사명 따라 살아야 하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사명도 내 힘 가지고 하면 힘이 들지만 성령이 주시는 능력을 붙잡고 나가면 감사할 뿐입니다.
▶사람을 분류하는 가운데 규범적 입장에서 세 종류로 나누고 있습니다.
첫째는 육체적 본능과 정욕에 따라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가리켜 자연적인 본능대로 살아간다고 해서 '자연인'이라고 합니다.
흔히 사람에게 속물이라는 표현을 하는데 바로 이런 사람들 즉 영적인 세계에 대해서 무지할 뿐만 아니라 이해하지도 못하고 다만 짐승처럼 자기 육신만을 위해서 사는 사람을 속물이라고 합니다. 관심과 욕망은 오직 육체적이고 세속적인 것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둘째는 자기의 이성과 지식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지식을 위주로 살아가기 때문에 소위 '지성인'이라고 부르고 있지만 언제나 자기가 기준이 되고 자기가 중심이 되어서 자기를 내세우고 자기를 자랑하고 자기 멋대로 살아가려고 합니다. 그래서 자기를 인정해 주면 기뻐하지만 인정받지 못할 땐 비참한 기분에 빠져버립니다.
이런 사람에게 구제하라면 내 놓을 돈이 없지만 체면이라고 하면 얼마든지 내 놓습니다. 자존심에 목숨 걸고 평생을 사는 불행한 사람입니다.
그런가하면 셋째는 성령에 이끌리어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자기의 마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삽니다. 자기의 생각이나 판단은 십자가 위에 못 박아 버리고 주님의 판단에 따라 성령께서 감화해 주시는 대로 살아가는 사람을 말하는데 '성령 주도적 인간'이라고 부릅니다.
오늘날 모든 그리스도인이 바로 이런 사람들입니다. 오늘 우리가 바로 이런 성령의 주도적인 사람들입니다.
본래의 인간은 타락한 존재입니다. 성품이 타락했고, 지식이 타락했고, 모든 계획, 모든 판단이 전적으로 타락되었고 완전히 타락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 지식, 내 판단이라는 것이 온전치가 않습니다. 내 감정 그대로 내버려두면 큰일납니다. 내 의지라는 것도 믿을 것이 못 됩니다.
그러니 인간의 이 잘못된 이성과 성품과 지식에 자유를 줘 버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세상은 망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누려야 할 자유가 따로 있습니다. 무엇인지 아십니까? 성령에 매여 사는 자유입니다.
분명한 사실은 참된 매임에 참된 자유가 있는 것입니다. 이 말을 신앙적으로 해석해 봅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성령에 매일 때 그 속에 진정한 자유가 있는 것임을 알기 바랍니다.
이것이 좁은 길이지만 주님 말씀하시는 자유의 길입니다. 진리에 매이고, 은혜에 매이고, 사랑에 매여서 그리스도의 종이 되는 순간 그것이 자유입니다.
그래서 가장 행복한 그리스도인은 어떤 사람이겠습니까? 말씀과 성령에 노예가 되어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고 성령이 이끄는 대로 따라가면 그것이 행복입니다. /할/


①성령의 보증을 받아 경건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30절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축복 중에 제일 귀한 것은 보혜사 성령님을 우리에게 보내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님은 인격체이신 하나님이시기에 성령을 근심하게 하면 하나님이 슬퍼하십니다. 여기 '근심하게 한다'는 것은 우리가 죄를 짓거나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살 때 성령은 근심하시고 탄식하십니다.
또한 성령님은 능력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엡5:18절을 보면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고 했습니다. 땅의 사람들은 술에서 쾌락을 얻고, 하늘의 사람들은 성령으로 쾌락을 취합니다. 기쁨의 원천은 다른 것입니다.
⑴술은 취하게 하고 성령은 각양 은사로 충만케 합니다.
⑵술은 방탕하게 하고 성령은 창조적인 삶을 살게 합니다.
⑶술은 허탈감을 주고 성령은 참 만족을 줍니다.
우리는 성령으로 인 침을 받은 사람입니다. '성령이 보증해 주는 사람! 성령을 선물로 받은 사람! 성령의 인 침을 받은 사람!' 이 사람은 나중에 하나님 앞에 설 때 성령이 구원을 보증해 주시고 하늘의 영광을 보증서 주십니다.
가령 누가 보증을 서 주게 되면 그 사람을 보고 나에게 물건을 다 내어주는 것과 마찬가지로 성령이 우리에게 보증서 주시면 하나님께서 온갖 은혜와 축복을 다 허락해 주십니다. 하나님은 성령 충만한 성도를 기뻐하시고 함께 하십니다. /아멘!/
▶1866년 8월 9일 상선 제너럴셔먼호를 타고 조선 땅을 밟은 28세의 한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그는 이 땅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통역관이란 직함을 가지고 이 배를 탔습니다. 오로지 조선에 예수를 전하고 조선에 사는 영혼들이 구원받기만을 간절히 소원하는 열정으로 그의 가슴은 불타올랐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제대로 전도해보지도 못하고 대동 강변에서 참수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예수 믿으라'고 외쳤지만 결실을 맺은 적도 없었습니다. 세례를 베풀어 본 적도 없었습니다. 성경공부를 인도해본 적도 없었습니다. 그냥 그는 예수 믿으라고 외치며 그가 가져왔던 성경을 건네주며 죽어갔습니다.
어떻게 보면 그의 죽음은 열매 맺지 못하고 사람들의 기억에 사라져 가는 의미 없는 한 사람의 죽음이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최초로 이 땅에서 순교한 토마스 선교사의 죽음에 복에 복을 더하셨습니다. 그가 참수 당했던 대동 강변에 그의 기념교회가 세워졌고 결국 그 교회가 1907년 평양 대 각성 운동이 일어났던 장대현 교회가 되었습니다.
토마스 선교사가 죽어 가면서 자신의 죽음을 통해 조선에 교회가 세워지며 조선을 변화시키는 '성령의 대 각성 운동이 일어나리라'고는 그도 상상도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인 침 받은 사람의 헌신을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그의 죽음이 헛되지 않았고 하나님은 그의 죽음을 헛되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의 순교의 피 위에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②성령의 인 침을 받은 사람이 버려야 할 것이 있습니다.
31절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믿음이 도움이 안 되는 것은 빨리 버려야 합니다.
⑴모든 악독입니다. 악하고 독한 마음입니다. 이런 마음 속에는 성령님이 임재하지 않습니다.
⑵노한다는 것은 감정이 부글부글 끓은 것을 말합니다. 그러다가 폭발하게 되는데 그것이 무엇입니까?
⑶분냄입니다. 분을 낸다는 말은 화가 터져 나온다는 말입니다. 적대감정이 있어서 당장이라도 이혼하고 싶습니다. 당장이라도 때려 주고 싶습니다. 폭발하고 싶은 것입니다.
⑷떠드는 것은 큰소리로 불만이 터져 나오는 것을 말합니다.
⑸훼방은 비난입니다. 상대방이 모르게 상대방의 뒷덜미를 물어뜯는 것입니다.
⑹악의는 남을 헤치고자 하는 마음의 독소입니다. 그게 우리 속에 있으면 세상이 다 밉고 사람이 다 밉고 사는 것이 다 밉습니다. 이런 것을 완전히 해가 지기 전에 청소하고 잠을 자야 합니다.


③서로 불쌍히 여기고 서로 용서하라고 했습니다.
32절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용서는 세 가지입니다.
⑴기억해 두는 용서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잊어버릴만하면 다시 끄집어냅니다. 그것은 진정한 용서가 아닙니다.
⑵잊어버리는 용서입니다. 용서해 주고 잊어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하시고 잊어버리십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그때 그때마다 용서받고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것입니다.
⑶사랑하는 용서입니다. 잊어버리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까지 하는 용서입니다. 누가 이런 사랑을 합니까? 하나님이 우리 죄를 다 용서해 주시고 끝까지 사랑해 주십니다.

 

4. 성령의 인 침을 받은 자는 몇 가지 자신을 향한 질문이 있어야 합니다.

 

①우리의 삶의 중심이 무엇인가?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가? 무엇을 이루려고 살고 있는가? '직업, 가족, 스포츠, 돈, 취미' 다 좋은 것들이긴 하지만 이런 것들이 인생의 중심을 차지하면 안 됩니다. 삶의 중심에는 항상 하나님이 계셔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성전 중심, 예배가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아멘!/
②어디에 기여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교회, 가정, 나라, 직장에서 가장 적합한 역할이 무엇인가? 우리는 섬기도록 지음 받았습니다.
고후9:12절 "이 봉사의 직무가 성도들의 부족한 것만 보충할 뿐 아니라 사람들의 하나님께 드리는 많은 감사를 인하여 넘쳤느니라." 사역입니다.
③남에게 어떤 영향력을 미쳐야 하는가? 믿지 않는 사람을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이 무엇인가? 좋은 말, 친구 되어주기 등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유일한 것은 선교요 전도입니다. 빌1:27절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④누구와 친밀하게 사귀고 있는가? 끼리끼리 법칙이 있고 무리의 법칙이 있습니다. 누구와 가장 많이 친교를 나눕니까? 지금 여러분의 현주소입니다.
⑤어떤 성품의 사람인가? 하나님은 우리가 지금 무엇을 하는지 보다 어떤 사람인지에 관심이 많으십니다.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사람인지, 남을 맘 아프게 하는 사람은 아닌지 생각해 봐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의 삶입니다. /아멘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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