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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가시 면류관과 십자가! (마 27:20-31)

by 【고동엽】 2022. 2. 5.

주님의 가시 면류관과 십자가! (마 27:20-31)

 

▶어느 집사님이 오랜 기도 끝에 하나님의 응답을 받고 친구를 교회로 대리고 왔습니다. 친구가 오기는 왔는데 와이셔츠 주머니에 담뱃갑을 넣고 왔답니다. 그래도 와 준 것이 고마워서 되도록 앞자리에 앉히고 뒤에서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제발 은혜 받게 해 달라고> 드디어 설교는 시작됐고 친구는 은혜를 받기 시작했습니다. 담뱃갑을 꺼내 바지 뒷 주머니에 넣고 손수건을 꺼내 훌쩍거리면서 아주 톡톡히 은혜를 체험하더랍니다.
예배는 끝났고 사람들은 다 돌아갔는데 그 친구는 일어날 생각을 안 하더랍니다. 옆에 가서 왜 안가냐고 물었더니 "내가 은혜를 받았는데 어떻게 그냥 가냐" "그럼 어쩌려고" “은혜를 갚아야지" "어떻게 갚을 건데?" "이 교회 목사님이 총 몇 분이나 되냐?" "전도사님까지 한 열 분이 된다" "다 모이시라구 해라" "아니 다 모아서 뭐 하려고?" "은혜를 갚아야 할 거 아닌가?" "어떻게 갚을 건데?" "내 오늘 한잔 쏠게!"하더랍니다. 지금은 한 잔 쏠 때가 아닙니다. 우리는 주님의 부활을 바라보면서 조용히 고난의 길을 걷는 사순절 마지막 종려주일로 내일부터는 고난주간이 시작됩니다. 특별히 오늘 주님이 머리에 쓰신 가시 면류관과 주님이 지신 십자가를 생각하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제목소개!▶

 

사람들은 대체로 나쁜 소식은 숨기면서 삽니다. 그러나 좋은 소식은 자랑합니다. 자식이 잘 되면 자랑합니다. 사업이 잘되면 자랑합니다. 가정이 잘 되면 이런 것은 모두 자랑하고 의시대며 뽐내게 됩니다. 그러나 나쁜 것은 숨기며 삽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그렇지 않습니다. 기독교는 예수가 저주의 십자가를 졌다고 전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십자가 위에서 못 박혀 죽으심을 전합니다. 그러니까 메시야로 오신 예수가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그 당시 최고의 저주의 형벌인 십자가 위에서 죽었다는 슬픈 사실입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것을 숨김없이 전하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그런데 초대교회 사도들은 그 저주의 형벌로 죽은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을 자랑하면서 전합니다. 맞습니다. 기독교의 심벌은 십자가입니다. 기독교의 자랑도 십자가입니다. /믿/ 우리도 이것을 증거하며 자랑해야 합니다.
바울의 결심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고전2:2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바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만 바로 알고 전하겠다는 일사 각오의 고백입니다.
예수님은 아무 죄가 없으시지만 흉악한 죄를 지은 두 강도들과 함께 십자가에 매달려야 했습니다. 억울한 십자가였으며, 모함의 십자가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그 십자가는 인간이 당해야 할 죄의 대가를 대신 당하는 구속의 십자가였습니다.
예수님이 이러한 인류의 대속의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는데 한 바리세인이 왔습니다. 눅13:31절에 보면 "헤롯이 당신을 죽이고자 하오니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마십시오!" 이런 제안을 했습니다. 즉 예루살렘에 대한 분위기의 정보를 제공해 준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면서 눅13:33절에서 말씀하시기를 "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고 하시면서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난을 눈앞에 두고도 조금도 비굴해 하시거나 피하려고 하지 않고 십자가를 당당히 지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의 길이란 주님이 지신 십자가를 우리도 지고 따라가는 것입니다. /아멘입니까?/
영국의 국립박물관에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수난을 당한 큰 그림이 걸려 있다고 합니다. 그림 제목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입니다. 어느 날 그 그림 앞에 한 젊은이가 무릎을 꿇고 뜨거운 눈물을 흘리면서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 때 그 젊은이는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습니다. "나는 너를 위해 십자가에 죽었건만 너는 나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이냐?" 깜짝 놀란 이 젊은이는 주님의 물음 앞에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저도 주님을 위해 한 평생 내 몸을 드리겠습니다." 그는 그 고백대로 일평생 주님을 위해 살았는데 그가 바로 영국의 그 유명한 '전젠돌프' 백작입니다. 그는 빈민을 구제하고 전쟁 피난민들을 도왔으며 전도사업에 힘을 썼으며 자기의 '생명, 재산, 권세'까지 모두 바쳐 '모라비안' 형제 단을 만들어 유명한 사랑의 실천자가 되었고,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따르는 제자가 되었습니다.
주님이 당한 고난은 대속의 고난입니다. 대신 받은 고난을 말합니다. 자신이 받지 않을 고난임에도 불구하고, 대신 그 고난을 받았다는 의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은 모든 인류의 범한 죄와 관계된 고난입니다. 즉 한 사람의 잘못으로 인한 고난이 아니라, 모든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받은 고난이었습니다.
▶십자가의 위력은 총검의 위력보다 더 강합니다. 영국의 아프리카 탐험가 중 두 명의 탐험가를 대표적으로 들 수 있습니다.
하나는 '세실 로이드'이고, 다른 하나는 '리빙스톤'입니다. '로드'는 남아프리카에서 소위 황금전쟁을 일으킨 사람으로, 그는 아프리카 원주민 수십만 명을 학살하고 황금과 다이아몬드를 벌어들임으로써 당시 영국의 훈장과 애국자 칭호를 받았습니다. 반면 '리빙스톤'은 아프리카에 가서 노예제도와 영국의 침략정책을 반대하고 식민지 압제 정치를 비판하면서 싸워 그 당시 권력자들로부터 조국의 반역자라는 불명예스러운 칭호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로드'는 무덤조차 없지만, '리빙스톤'은 영국 국립묘지에 안장되어 많은 방문객이 지금도 그칠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무엇이 이들의 차이를 낳게 하였습니까? 하나는 총칼의 힘으로 정복하고 빼앗았지만, 다른 하나는 대신 고난을 받으면서 스스로를 희생한 결과입니다. 이렇게 대속의 고난은 위대한 결과를 낳게 하고 있습니다. 한 알의 밀 알이 땅에 떨어져 묻히면 많은 열매를 맺는 것처럼 우리 주님의 고난은 한 알의 밀 알이 되었습니다.
제자의 길은 십자가 없이는 갈 수가 없습니다. 주님은 마16:24절에서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이 지신 그 십자가! 우리도 그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합니다. /할/

 

1. 종려주일 오늘부터 한 주간의 예수님의 발자취를 생각해 보자!

 

①예루살렘 입성: 예루살렘 입성하실 때에 나귀를 타고 들어 가셨습니다. 겸손하신 예수님의 보습이요, 성경의 예언을 이루신 모습입니다.
슥9:9절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 예수님은 성경의 예언이 그대로 이루어지도록 순종하신 분이십니다.
그 분이 입성하실 때 사람들마다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서 흔들고 길에다 깔고, 또 어떤 사람은 자기의 겉옷을 벗어서 나귀의 잔등에 덮고 예수님을 타시게 하고 또 어떤 사람은 겉옷을 벗어서 길에다 깔고 예수님이 밟고 지나가시게 했습니다.
이것은 개선장군으로 예수님을 왕으로 인정하고 영접한 예식입니다.

②최후의 만찬: 다락방에서 유월절 최후의 만찬을 하셨는데 이것이 유례가 되어 신약에서 성찬식이 거행되고 있습니다. 그 날 주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셨습니다. 베드로의 차례가 되자 베드로가 너무 죄송해서 "내 발을 절대로 씻기시지 못하십니다." 그때 주님이 "내가 너의 발을 씻기지 아니하면 너와 나는 상관이 없느니라."고 하자 "주여 나의 발뿐만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겨 주십시오." 그러자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고 가롯 유다가 자기를 팔 것을 예측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요13:14-15절에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하여 본을 보였노라" ▶중요한 것은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고 하신 말씀을 늘 기억하고 살아야 합니다. /할/

③예수께서 체포당하심: 만찬이 끝난 후 곧장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가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도록 힘쓰고 애써 기도하신 후에 가롯 유다를 앞세운 병정들에게 체포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밤에 체포되어 <안나스에게! 빌라도에게 그리고 헤롯에게! 다시 빌라도에게 밤새도록 끌려 다니시면서 신문>을 받으셨습니다. 이 날이 금요일 새벽이었습니다.

④빌라도에게 재판 받으심: 빌라도는 아무리 생각해도 예수에게서 죄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빌라도는 아내 클라우디아의 간곡한 만류로 십자가형만은 피하려고 무진 애를 쓴 것은 사실입니다. 그래서 해마다 유월절만 되면 죄수 하나를 놓아주는 전례가 있었는데 그 전례를 이용하여 예수를 살리려고 했으나 그의 생각은 완전히 빗나가고 말았습니다. 군중들은 일제히 소리 지르기를 "바라바는 놓아주고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 그 때 일제히 "십자가에 못 박으라! 십자가에 못 박으라!" 고함을 지릅니다.
이들이 누구입니까? 바로 몇 일전까지 주께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실 때에 겉옷을 땅에 펴던 사람들이요,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서 대환영을 했던 사람입니다.

⑤수치와 조롱을 당하신 예수: 이렇게 십자가형은 결정되고 예수님은 로마 군인들에게 희롱을 당하셨습니다. 이 희롱은 '가혹한 장난'으로, 야만인들을 가지고 노는 문화인들의 장난문화였습니다. 그들은 이것을 장난으로 생각했지만 당하는 사람에게는 모욕이요, 수치요, 아픔과 고통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옷 벗김을 당하셨습니다. 벌거벗음은 수치이며 모욕입니다. 주님이 우리의 죄와 허물의 수치를 가려 주시려고 당신의 피 묻은 옷자락으로 우리의 수치와 허물을 가려 주었습니다. 그리고 의의 흰옷을 입혀 주셨습니다.
▶그 벌거벗은 몸에 홍포를 입혔습니다. 홍포는 왕이나 황제들이 입는 옷이었습니다. 예수께 낡은 주홍색 외투를 입힌 것은 왕이라 불린 것에 대한 모욕입니다. 왕으로써 홍포를 입게 한 것이 아니라 죄인으로써 입혔습니다. ▶그리고 채찍에 맞으셨습니다. 가죽 채찍 끝에 납이나 뼈 조각을 달아 침으로 이 채찍에 맞다 죽는 죄수들도 있었답니다. 이사야는 말씀하시기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53:5)
▶그리고 그 지친 몸의 머리에 가시로 역은 면류관을 씌웠습니다. 홍포를 입히고 금 면류관 대신 가시로 만든 면류관을 씌우며 예수님을 조롱하고 희롱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고난 받으신 그분이 인류의 영원한 구세주이십니다. /믿/
▶그 앞에 군병들이 경배의 흉내를 내고 있습니다. 얼굴에 침을 뱉으면서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 지어다." 이러한 행동은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무서운 회롱이요 모욕입니다. 그래도 예수님은 아무 말씀도 없으셨습니다.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어린양과 같을 뿐입니다. 온갖 고난과 조롱과 멸시를 묵묵히 받으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손에 갈대를 들려주면서 홀을 대신하게 했습니다. 홀은 왕권을 상징한 것으로, 왕은 왕인데 갈대처럼 연약하고 무력한 왕으로 본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연약한 왕이 아닙니다. 갈대 홀을 쥐어준다고 그 분의 왕권이 상실됩니까? 아닙니다. 주님은 영원한 우리의 왕이시며, 통치자이시며 장차 심판 주로 오실 분입니다. 그리고 당신의 백성들을 그의 영원한 나라에 인도하실 분입니다.

⑥십자가에 못 박히심: 예수님은 자기가 달릴 십자가를 짊어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 가셨습니다. 쓰러지고 또 쓰러지면서 무려 열 네 번씩이나 쓰러졌습니다. 오늘도 그 길을 수많은 순례 객들이 올라가면서 주님의 고난의 발자취를 배우고 있습니다. 그 길은 '고난의 길'이라고 부릅니다. 이 때 아프리카 구레네에서 올라온 시몬이 대신 주님의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까지 올라갔습니다. 비록 시몬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억지로 지었지만 그의 아들이 주의 종이 되어 복음의 일군으로 쓰임 받고 성경을 빛나게 했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에 좌우 편에 두 강도도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그래서 갈보리 산 위에 세 십자가가 섰습니다. 주님은 십자가 위에서 일곱 마디의 말씀을 하시고 운명하셨습니다. 그 때에 열두 시쯤부터 세시까지 해가 빛을 잃고 하늘과 땅이 어두워 졌습니다. 예수님께서 크게 소리 지르시며 영혼이 떠나가실 때에 성소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져 예수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제사장이 되어 하나님께 나가는 길이 열리게 되었습니다(히10:19-20).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며, 무덤이 열리고 자던 성도들이 많이 일어났습니다. 그를 지키던 백부장은 말하기를 "참으로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었다."고 고백했습니다. 예수님이 숨을 거둔 시각은 오후 세시였습니다. 그리고 아리마데 사람 요셉의 새 무덤에 장사지내셨습니다. 그리고 무덤에 사흘 낮 밤을 계셨습니다. 인류의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2. 여기서 '빌라도와 가롯 유다와 예수님의 손'을 조명해 보자!

 

①빌라도의 손은 책임 회피의 손입니다.
빌라도는 주님이 무죄임을 알았습니다. 그의 아내가 그분을 사형에 내주어서는 안 된다고 말을 했으나 그 당시 분위기로 보아 오판을 했습니다. 빌라도와 유대인들 간에는 평소에 관계가 좋지 못했는데, 강압 정책을 썼고, 예루살렘에 좋은 물을 공급한다고 상수도시설을 건설을 했는데, 거기에 드는 비용을 성전 헌금으로 충당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성전의 헌금은 성전을 위해서만 사용해야 하는 법을 갖고 있었는데 빌라도가 성전의 헌금을 사용했으니 분노가 폭발할 수밖에 없었고, 유대인들이 빌라도의 개인적 비리와 약탈, 학정을 고발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는데 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라고 요청을 하니 굴복하고 만 것입니다.
빌라도는 양심의 소리도 있었고 아내의 간청도 있었지만 평소에 유대인들과 갈등을 겪었던 것이 약점이 되어 소신 있게 행동하지 못했습니다. 자기 자리보전을 위해 예수를 성난 유대인들에게 내주고 맙니다. 그래도 양심의 가책과 역사의 준엄한 심판이 두려웠는지 대야에 손을 씻으면서 아무 책임도 없다고 발뺌을 했습니다.

②유다의 손은 배신의 손입니다.
유다는 예수님에게 제자로 선택을 받아 3년 동안 제정을 담당하는 사랑을 받았는데 그의 스승을 팔아 은 30냥에 팔고 적들에게 넘겨버립니다. 그의 손은 배신의 손이요, 스승을 팔아서 은 30을 움켜쥐고 있는 탐욕의 손입니다.
지금도 인간 세상에는 이런 손들이 많습니다. 배신의 손, 남을 배신하고 골탕 먹이고 사기 치고 그래서 거두어 드리는 그 돈을 세고 있는 손, 남을 곤경에 빠뜨리고 돈을 세고 있는 손, 남을 십자가에 매달려놓고 돈을 세고 있는 손, 이런 손들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③예수님의 손은 희생과 용서의 손입니다.
예수님의 손은 수많은 병자들을 고치시던 손입니다. 나병환자들을 만나면 나병환자들의 손을 만지시고 중풍 걸린 사람을 만나면 중풍 걸린 손을 만지시고 결핵환자들을 만나면 결핵환자들의 손을 잡으시며 어루만지시며 상처를 싸매시며 고쳐주시는 자기 희생적이던 손입니다.
예수님은 죄인들을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그의 손은 죄인들을 위해 못 박히고 찢어지고 피 흘리신 손입니다. 평생을 남을 위해 사시더니 마지막 생애조차 남을 위해 피 흘리고 사랑을 나누어주신 아름다운 손이요, 구원의 손입니다. 예수님의 손은 하나님의 손입니다.

 

3. 왜 우리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셨는가?

 

사53:4-5절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본래 십자가는 로마제국에서 내란을 일으킨 정치범이나 살인자, 강도 등과 같이 중한 죄를 지은 범죄자를 처벌하는 사형도구였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십자가는 무능력한 패배자의 상징이었으며, 심지어는 십자가가 하나님의 저주라고까지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또한 이방인들에게도 십자가는 어리석고 미련하고 나약함의 상징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써 그 의미는 달라졌습니다. 십자가는 사랑, 승리, 구원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믿음의 눈으로 십자가를 바라보면 십자가야말로 지혜 중의 지혜요, 능력 중의 능력이요, 하나님과 동행하는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우리의 운명을 결정적으로 바꾸어 놓을 위대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죄로 허물로 죽을 수밖에 없었던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왜 주님이 십자가를 지셨는가?

①십자가는 하나님 사랑의 극치입니다(롬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인간은 하나님께 불순종했습니다. 죄를 범했습니다. 하나님을 배반했습니다.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죄인 된 우리를 심판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당신의 외아들까지도 십자가를 통해 아낌없이 내어 주셨으며,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하나님과 다시 화목하게 해 주셨습니다.
요3:16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②우리 죄를 담당하시려고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벧전2:24절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죄는 원자탄보다 더 무섭습니다. 구 소련의 '체르노벨' 원자력 발전소의 누출사고로 보이지 않은 방사선이 나왔을 때 그 주변 200km까지는 동물도 못 먹고, 식물도 못 먹고, 땅도 저주를 받았습니다. 사고 이후 5-6년이 지나도 풀 한 포기 먹을 수가 없습니다. 근처 70-100km 주변 사람들이 그 때는 괜찮았는데 차츰 차츰 병이 들어 나기 시작을 했습니다. 특히 갑상선 이상이 많다고 합니다.
어린이들이 성장이 멈추고, 10세, 15세 아이가 5세의 아이로 그냥 머물러 있었고, 여인들은 임신이 안 된답니다. 구 소련의 과학자들이 다 모여도 아직 여기에 대한 치료약이 없다고 합니다. 얼마나 무섭습니까? 그런데 죄는 더 무섭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인류는 죄로 인하여 사망 선고를 받아 놓고 있습니다. ▶그 무서운 죄의 문제를 청산하시려고 주님이 갈보리 언덕에서 십자가를 지셨답니다. /믿/

③화해의 역사를 이루기 위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원래 인간은 하나님과 교제하며 살도록 하나님이 지으셨는데 아담이 하나님을 배신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했습니다. 그 때부터 인간은 하나님과 멀어졌고 큰 벽이 생겼고, 그 때부터 인간은 저주가 임함으로 땀을 흘려야 했고, 가시와 엉컹키 나는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그런 인간들을 불쌍히 보시고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화목제물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어 그를 십자가에서 단번에 속죄양으로 죽였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상에서 처절하게 몸부림치실 때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절규하신 다음에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이 말씀을 하신 후 운명하실 때 성소의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쫙 갈라졌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가로 막혀있던 담이 무너진 사건입니다. 이 사실을 골1:20절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엡2:14절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셨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⑴인간과 하나님과의 화목을 이루었습니다. 십자가로 인하여 인간의 신분이 다시 원상복귀가 된 것입니다.
⑵인간과 인간 사이에 화목을 이루었습니다. 십자가는 위에서 밑으로, 우에서 좌로 이어지는 것인데, 율법의 핵심은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의 완성입니다. /할/
④십자가는 우리에게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깃발입니다(골2:15).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
정사와 권세는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사탄의 세력을 말합니다. 죄의 권세는 최초의 인간인 아담이 죄를 범함으로 세상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롬5:12). 그래서 악한 마귀 사탄은 '공중의 권세 잡은 자'가 되었고(엡2:2), 인간은 사탄의 권세 아래 놓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귀의 포로가 된 인간은 그 누구도 마귀의 포로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마귀로부터 정사와 권세를 빼앗아 버리고 십자가에서 진정한 승리를 하셨습니다. ▶주님이 십자가 위에서 죄를 이겼고, 사망의 권세를 이겼고, 사탄의 권세를 겪었습니다. 가난과 저주와 질병도 이겼습니다. 인간의 실패와 고통도 친히 담당하셨습니다. 주님의 십자가 위에서 마지막 하신 말씀은 <내가 다 이루었다>는 말씀입니다.
●십자가는 인류 역사에 가장 큰 영적 싸움이었습니다. 세상에는 수도 셀 수 없는 전쟁이 많습니다. 세계 제1-2차 대전, 미국의 남북 전쟁, 한국의 남북 전쟁, 중동 전쟁, 이라크 전쟁, 수도 없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싸움은 영토를 위한 싸움이요, 물질을 위한 싸움이요, 자기 권세욕, 명예욕을 채우기 위한 지도자들 자신을 위한 싸움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싸움은 그런 싸움이 아닙니다. 죄에 빠져 사망의 늪 속에 빠져있는 우리 인류를 구원해 내고자 사탄과의 싸움을 벌린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힘이 없어 죽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살리기 위해 죽으셨습니다. 그러니까 가난한 우리를 부유케 하기 위해서, 또 온갖 상처투성이인 우리를 깨끗케 하고, 건강하고 자유롭게 해 주기 위해 주님이 화목 제가 되어 주신 것입니다. 더 쉽게 말하면 '죄의 삯은 사망'인데 그 사망이 있어야 해결되기에 그 분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고 끝났으면 기독교는 사장되고 맙니다. 삼일만에 부활하셨기에 우리가 승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갈6:14절에서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고 외쳤습니다. /할/
그렇습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죽음이 있었기에 부활이 있습니다. 네가 죽어야 부활이 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죽고자 하는 자는 살고, 살고자 하는 자는 죽는다."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부활이 있음을 믿으시면 크게 아멘! /할/
▶오래 전에 로마 군인이 전도를 받았습니다. "예수를 믿으십시오! 그 분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3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누구든지 그를 믿으면 부활합니다." '예수 죽음, 내 죽음, 예수 부활 내 부활'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군인이 하는 말이 기독교는 다 좋은데 왜 하필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난다고 하느냐? 그것만 아니면 당장 예수 믿겠는데 그것이 마음에 걸린다는 것입니다.
왜 그러느냐고 물었더니 자기는 군인이라 사람을 많이 죽였는데 그들이 모두 살아나 자기에게 복수하면 어떻게 하느냐는 것입니다. 어떤 집사님은 일찍 죽은 자기 부인이 부활하면 신세 망친다고 했고, 어떤 장로님은 재산 물려준 자기 아버지가 부활하면 그 재산 다 빼앗아 가기 때문에 부활은 결사 반대한다고 했답니다.
이런 사람들은 잘못 알았습니다. 큰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부활하는 것은 복수하려고 부활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과 저 영원한 천국에서 영생복락하라고 부활하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할/
▶지금도 부활의 주님을 만나면 우리의 인생이 새로워집니다. <저 낮은 데로 임하소서!>의 주인공 안요한 목사님은 젊은 시절에 무역업을 하면서 돈도 잘 벌고 장래가 훤히 보이는 성공의 길을 걷고 있을 때 갑자기 안질이 생기더니 눈이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한마디로 어느 날 갑자기 장님이 된 것입니다.
그는 실망과 좌절의 늪에 깊이 빠져 고통에 나날을 보내야 했습니다. 그러던 중 그 동안 막연하게 믿던 신앙이 불이 붙게 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매달려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영안이 열리기 시작했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빛이 비쳐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새로운 생명력을 얻게 되었습니다.
육안은 멀었으나 영안은 열렸습니다. 그 후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가 되어 방방곳곳을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는 새로운 용기와 희망을 가지고 더욱 강한 삶을 살수가 있었습니다.
한번은 미국에 집회를 인도하기 위해 갔을 때 그곳의 동료 목사님들이 미국의 유명한 안과 의사에게 진찰을 받고 수술을 권하더랍니다. 그런데 목사님이 거절했습니다. "목사님 고맙습니다. 저는 지금이 더 행복합니다. 처음 눈이 안 보일 때는 엄청난 고생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 고난을 겪으면서 예수님을 만났고, 더 강한 생명의 빛을 받으면서 삽니다. 앞을 볼 때보다 지금이 더 기쁩니다. 지금이 더 할 일이 많습니다. 다시 눈을 떠서 옛 생활로 돌아가기 싫습니다."
그렇습니다. 지금도 부활의 주님을 만나면 십자가의 승리를 우리도 체험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⑤십자가는 승리의 통로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무엇으로 승리할 수 있습니까?
요16:33절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누가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까? 누가 죄를 이길 수 있습니까? 누가 악을 이길 수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만이 세상의 죄악을 이길 수 있습니다.
고전15:57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요한1서 5:4절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믿음이 없이는 세상과 싸워 이길 수 없습니다. 믿음이 있어야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런데 믿음의 원동력은 ▶하나님의 말씀이요, ▶성령의 능력이요, ▶기도해야 하고, ▶전도할 때 더 큰 믿음의 역사를 일으킵니다. /믿/

⑥주님의 십자가는 죄인을 의인되게 하고 치료에 능력이 임합니다(벧전2: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사53:5절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말4:2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같이 뛰리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경외하는 사람,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질병에서 고침을 받게 됩니다. 병들었다고 낙심하지 마십시오. 현대 의학으로도 고치지 못한다고 절망하지 마십시오. 하나님 앞에 나와서 죄를 고백하고 간절히 간구하면 하나님께서 불치의 병도 고쳐 주십니다.
마8:16-17절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를 다 고치시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할/

 

4.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는 순간 성소 휘장이 찢어졌습니다. 그 의미는?

 

①예수님의 몸이 찢기어진 슬픔을 의미합니다.
예부터 슬플 때는 옷을 찢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요 성전의 주인이 되신 주께서 우리의 죄 값으로 몸이 찢긴 사실에 대한 지극한 슬픔을 나타낸 것으로 해도 빛을 잃고 땅도 슬퍼 진동했습니다.

②하나님께 나아갈 길이 열렸다는 뜻입니다.
일 년에 한 차례씩 대제사장만이 피를 가지고 들어가던 지성소에 누구나 그리스도의 피를 믿는 자는 다 들어갈 길이 열렸다는 뜻입니다. 구약의 제사 규례가 끝난 것을 의미합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 공로만 믿고 나아가면 누구나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갈 수가 있고 하나님이 계신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어떤 죄인이라도 회개하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믿고 영접한자는 누구나 천국에 들어갈 수가 있게 된 것입니다. 천국의 고속도로가 열린 것입니다.

③위로부터 아래로 완전히 찢어졌습니다.
어느 사람이 한쪽 귀퉁이를 찢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위로부터 아래로 찢으신 것입니다. 구원은 인간의 노력이나 공로로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위로부터 열어 놓으신 십자가의 길을 통해서만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완전히 한가운데가 찢어진 것입니다. 강도라도 들어 갈 수 있습니다. 도적놈도 들어 갈 수 있습니다. 창녀라도 들어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를 힘입으면 천국에 못 들어갈 사람이 없습니다. 이제는 하나님과의 막혔던 담이 무너졌기 때문에 누구나 예수님을 통하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화해의 길이 열린 것입니다.
엡2:13-16절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④하나님과 교통하는 길이 열렸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 공로를 의지하고 나와 기도하면 하나님과 교통할 수가 있고 기도응답을 받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성소에서 지성소를 보며 기도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뜰에서 멀리 바라보며 기도하는 이방인이 있었고, 대제사장이 지성소에서 피를 가지고 들어가 기도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멀리서 두려워할 필요가 없이 예수님의 피 공로를 의지하고 나오면 누구나 기도할 수 있고 지존하신 하나님과 교통할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대통령과 직통전화를 연결하여 교통하는 것 보다 더 큰 특권입니다. /믿/

 

5. 주님이 쓰신 가시 면류관은 어떤 의미가 잇는가?

 

①인류의 모든 저주를 가시 면류관에 담았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왕들은 머리에 금 면류관을 씁니다. 금 면류관은 인간의 부귀와 영화와 존귀를 홀로 누리는 상징입니다. 그들은 모든 저주와 아픔과 고통을 백성들에게 씌웠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인간의 고통과 아픔과 질고와 저주를 홀로 담당한 왕이시므로 그 머리에 가시 면류관을 쓰신 것입니다.
가시 면류관은 아담의 타락으로 인하여 인간에게 다가온 모든 저주가 예수의 몸 위에 옮겨졌음을 의미합니다. 죄는 아담이 졌고, 저주는 의로우신 예수님이 담당하사기 위해 가시 면류관을 쓰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범한 아담에게 창3:17-18절 이하에서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갈3:13절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고 하셨습니다.

②가시 면류관은 우리의 수고하고 무거운 가시에 찔린 상처를 치료하십니다.
우리는 험악한 세상에서 살면서 너무도 많은 가시에 찔려 상처투성이로 살고 있습니다. 가정에서 사회에서 직장에서 저마다 우리는 찌르는 가시가 있습니다. 상처가 있습니다. 이런 상처를 어디에서 치료받을 수 있는가? 예수님의 가시 면류관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스펄죤' 목사님은 <주님이 쓰신 가시 면류관은 신비한 수술 도구가 된다.>고 했습니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를 초청하고 계십니다. 마11:28절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할/
여러분! 우리가 선한 일을 하다가 오해받을 때도 있고, 교회에서 충성하다가 허망스런 일들로 인해 마음에 상처를 입고 낙심하고 시험에 들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 때 가시관을 쓰신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우리가 선을 베풀고 유익을 주었는데 오히려 배신을 당하고 상처를 입을 때가 있습니다. 이 때도 가시 면류관을 쓰신 주님을 바라보세요! 내 안에 불평이 있고 원망이 있다면 가시관을 쓰신 주님을 바라보세요! 그 원망 불평이 사라질 것입니다.
가시 면류관은 세상의 헛된 자랑도 욕심도 치료해 주십니다. 교황의 삼각 면류관보다 영국 여왕의 수많은 보석으로 장식된 왕관일지라도 예수님의 가시 면류관과는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은 <주님! 저희 생전에 재림하옵소서! 저의 왕관을 벗어 주님 발 앞에 드리기를 원합니다.>라고 했답니다. 주님의 가시 면류관의 의미를 아는 여왕입니다. /할/

▶말씀을 마칩니다. 이제 우리가 십자가의 의미를 바로 깨닫고 십자가의 능력을 받기만 하면, 불행한 가정도 행복한 가정이 될 수 있고, 망해 가는 직장도 흥하게 되고, 쓰러져 가는 사업도 다시 일어날 수 있습니다. 우리 개인의 질병과 죄악에서만 구원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한 나라도 선진국가·복지국가로 만들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할/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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