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문 앞 광장의 부흥회! (느 8:1-12)
▶총알택시 운전사로 무늬만 가졌던 어떤 집사님과 한 목사님이 천국에서 주님 앞에 섰습니다. 목사님은 자신이 총알택시 운전사보다 훨씬 칭찬을 들을 것으로 기대했으나, 하나님은 총알택시 운전사를 더 칭찬하셨습니다. 억울했던 목사님이 그 이유를 여쭤보자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늘 성도들을 설교로 졸게 했지만, 이 사람은 항상 기도하게 했느니라." ◀제목소개!▶
오늘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70년 포로에서 돌아와 온갖 어려움과 박해 속에서도 무너진 예루살렘 성을 52일 만에 재건축하고, 성전 수문 앞 광장에 모여서 부흥회를 가지고 있는 장면입니다.
주경가 '매튜 헨리'는 에스라와 느헤미야 두 지도자를 가리켜 "그들은 왕관을 쓴 사람들도 아니었고 군대를 지휘하거나 어느 나라를 정복한 사람들도 아니었다. 그리고 철학이나 웅변으로 명성이 높은 자들도 아니었다. 그들은 다만 하나님의 일을 위해 자기 시대에 최선을 다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 당시 헬라를 빛냈던 '크세노폰'이나 '데모스테네스'나 또 '플라톤'보다 훨씬 훌륭하고 영예로운 지도자들이었다."라고 했습니다.
에스라와 느헤미야가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와 활동하던 시기는 바벨론을 멸망시킨 신흥 국가 페르시아의 전성기였던 때였고, 헬라와 로마가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던 때였습니다. ▶에스라는 이스라엘 민족의 신앙적인 지도자로서 학사겸 제사장으로 활동했고, 느헤미야는 행정적인 지도자로서 유대의 총독의 자리에서 활동했습니다. ▶이 두 사람은 다 경건한 신앙의 소유자들이었고 하나님을 절대 신뢰하는 믿음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이 해방을 맞아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긴 했습니다만 어려운 일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신앙적으로는 예루살렘을 너무나 오래 떠나 있었기 때문에 신앙이 해이해져 있었고, 정치적으로는 지도 체계가 확립되지 않은 데서 오는 불안정과 혼란이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거기다가 이스라엘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성을 재건한다는 소문이 퍼지자 주변에 있는 나라들이 긴장하고 방해 공작을 펴기 시작했습니다.
왜 그들이 방해공작을 폈는가? 그 이유는 이스라엘이 성을 재건하고 전열을 정비하게 되면 다시 막강한 나라가 될 것이며, 그리하면 중동의 세력 판도에 변화가 생길 것을 염려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시탐탐 그들은 이스라엘을 괴롭혔고, 이러한 상황 속에서 제사장 에스라는 신앙적으로 이스라엘을 결속시키고 무장시켰으며, 느헤미야는 백성을 총지휘하며 한 손에는 무기를 들고 다른 손에는 연장을 들고서 싸우며 공사하는 총력 체제로 성을 재건했습니다.
우리가 읽은 본문은 에스라가 백성들이 모인 가운데 모세의 율법 책을 백성들이 들을 수 있도록 낭독하는 장면입니다.
1. 우리는 여기서 두 지도자들의 신앙의 인격을 연구해보아야 합니다.
①느헤미야는 누구인가?
그는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유대인의 후손으로 페르시아 제국 아닥사스다 왕을 옆에서 보좌하는 술관원장으로 술을 제조하고 왕보다 먼저 마시는 관리였습니다.
느헤미야는 유대에서 온 자기의 형제들을 통하여 조국이 아주 큰 환란을 당하고 있었으며, 주변 여러 부족들에게 능욕을 받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예루살렘은 성도 없고 성문도 다 불타 없어졌다는 비참한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는 무너진 조국을 생각하면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며칠을 금식하며 통곡하며 기도하다가 수심이 가득한 채로 바사의 황제 아닥사스다 앞에 나아갔습니다. 느헤미야가 왕 앞에 나왔으나 수심이 가득하다 보니 왕이 연유를 물었습니다.
"네가 병이 없거늘 어찌하여 얼굴에 수심이 있느냐? 이는 필연 네 마음에 근심이 있음이로다" "왕이여 만 세수를 하옵소서 내 조상들의 묘실이 있는 성읍이 황폐하고 성문이 불탔사오니 내가 어찌 얼굴에 수심이 없사오리이까?" 그는 진실하게 말씀드렸습니다.
이 때 하나님은 아닥사스다 왕을 감동시켰습니다. "그러면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고 했습니다. 느헤미야는 자기가 왕에게 은혜를 입어 자기를 고국에 보내어주시고 성을 건축하게 하여 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마침 그 자리에는 왕후가 곁에 앉아 있었는데 그도 동조해 줌으로 느헤미야가 요구하는 많은 편의를 다 들어주어서 유대의 총독으로 임명받아 막강한 권한을 가지고 부임할 수 있었습니다.
느혜미야가 귀국하여 가장 우선적으로 힘쓴 것은 성벽을 건축하고 성문을 새롭게 수리하는 것입니다. ▶느혜미야서를 읽어보면 느헤미야는 토목공사에 대한 해박한 지식이 있을 뿐 아니라, 뛰어난 조직력도 있었습니다. 제사장들, 여러 장인들, 석공들 모든 기술자들에게 일을 갈라 맡겼습니다.
그는 담대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마리아의 총독으로 와 있는 산발랏과 암몬인 도비야가 방해를 놓고 있었지만, 그들의 음모를 알아차리고 물리치고 시험에 빠져들지 않았습니다. 한 손에는 무기를 들고 다른 한 손으로 일하면서 52일만에 성벽을 건축할 수 있었습니다.
절반의 사람들은 손에 칼과 창과 활을 가지고 예루살렘 지역을 방비하면서 나머지 절반의 사람들은 성벽을 건축하는데 혼신의 힘을 기울였습니다. 주변 여러 부족들의 방해가 만만치 않았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하여 성을 쌓았습니다.
역사가인 '요세퍼스'는 말하기를 "느헤미야는 착하고 의로운 사람이었다. 그는 자기 백성을 행복하게 하고자 큰 포부를 가졌었다. 그리고 그는 예루살렘 성을 자기의 영원한 기념물로 남겨 놓았다"고 했습니다.
그는 위대한 행정가요, 신앙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12년 동안 총독으로 있으면서도 총독의 녹을 먹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즉 총독으로서 마땅히 받아야 되는 돈을 받지 않고 백성들과 함께 이스라엘의 재건을 위해 일한 사람입니다.
②학사 에스라는 누구인가?
그는 제사장 아론의 제16대 손이었고, 이스라엘이 바벨론에게 망할 당시의 대제사장인 스라야의 아들로 제사장이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숙달한 학사였습니다.
에스라는 모세가 물려준 유대교를 재정비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모세의 율법에 아주 익숙한 학사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았으며 왕에게 나아가 구하는 것을 다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당대에 바사 사람들도 알아주고 존경하는 선생이었고, 경건하고 생활에 진실하여 당시의 바사와 흩어진 유대 사회에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느헤미야가 예루살렘 성의 재건이라는 막중한 과업을 감당했다면 에스라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심령의 집을 재건하는 지도자였습니다.
무너졌던 예루살렘 성이 재건되었습니다. 건물이 지어졌습니다. 도시는 새롭게 세워졌습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사람들의 마음은 텅텅 비어있습니다.
도시의 재건, 예루살렘 성의 재건을 위해서 느헤미야를 불러 쓰셨던 하나님께서는 이제 다시 이 도시 사람들의 심령의 재건을 위해서 성경학자요, 설교가인 에스라를 세우신 것입니다.
그는 느헤미야가 예루살렘 성으로 돌아오기 약 14년 전에 일단의 무리들과 함께 고국 예루살렘으로 2차 귀환해서 돌아왔습니다. 에스라는 폐허가 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면서 중대 결심을 하나 한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그 결심은 무너진 예루살렘 성벽보다도, 먼저 사람들 속에 무너진 심령의 전을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성전도 중요하고, 무너진 성벽을 다시 쌓는 일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도 백성들의 심령의 전이 바로 세워지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사람들의 심령의 집을 바로 세우기 위해 자신을 헌신하여 드린 사람입니다.
오늘 우리 시대의 비극은 산업 문명은 발달하고, 정보문명은 엄청나게 변하고 있지만 정신문명은 따라가지 못하는데 있습니다. 땀을 흘리며 애써 돈을 벌고, 좋은 아파트와 자동차를 샀으나 우리 마음의 정원을 황폐하도록 내버려두었습니다.
사람들이 모두 다 살만해졌습니다. 그런데 백년해로를 약속했던 부부가 이혼합니다. 왜요? 심령의 집이 제대로 세워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상당히 오래 전에 동해안에 잠수정이 침투하여 좌초되었을 때, 그 잠수정을 제일 먼저 발견하고 신고했던 택시 운전사를 여러분 기억하시지요! 그는 그 공로로 보상금을 탔지만 그 후에 그 가정은 이혼하고 말았습니다. 왜? 그 보상금을 관리할 수 있는 마음의 집이 제대로 지어져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요즘 어떤 부부는 로또 당첨금을 놓고 법정에 섰습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납니까? 심령의 집이 제대로 지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믿/
▶북미대륙과 남미대륙을 보십시오.
영국에서 청교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대로 읽고 가르치며 그리고 그들의 신앙의 표현을 자유롭게 하기 위해 북미대륙에 왔습니다.
그와 때를 같이하여 구라파의 일단의 사람들, 스페인, 북구라파, 영국 사람들이 황금을 찾아 남미에 왔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전혀 달라졌습니다.
남미를 찾았던 사람들은 황금도 잃어버리고, 삶의 가치도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나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말씀을 따라 주님을 내 삶의 가장 중요한 자리에 두기로 결심하고 그 주님을 섬기고, 그 주님을 사랑하고, 그 주님을 높이는 일에 삶의 우선 순위를 두었습니다. 그랬더니 북미대륙을 찾아왔던 사람들은 하나님도 찾았고, 자유와 번영과 행복을 동시에 찾을 수 있었습니다. 지금 미국의 모습입니다.
목회자들의 소원은 꿈에도 성전건축입니다. 성전을 짓는 일, 귀하고 근사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하고 귀한 일은 성도들의 살아있는 성전, 성도들의 심령의 전을 먼저 아름답게 짓는 일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눈에 보이는 성전을 건축하고자 함은 바로 이 심령의 전을 바로 세우기 위해서 이 건물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2. 본문의 상황을 주시하여 보십시오.
다행스럽게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을 쌓고 성전을 건축했지만 그것만으로 그들이 행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심령의 문제임을 알았고, 심령의 집을 바로 세우기 위해 지금, 수문 앞 광장에 모인 것입니다.
이 일은 7월 1일 나팔절인데, 모든 노동을 중지하고 성회로 모이는 날입니다. 이 날은 번제와 소제, 속죄제를 드리는 날입니다. 그런데 백성들은 수문 앞 광장에 모여서 이 같은 희생의 제사대신에 모세의 율법 책을 학사 에스라에게 요청했다는 것은 당시의 예배가 희생제사 중심에서 말씀중심의 예배로 바꿔지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 때 부흥회의 주제는 '성경으로 돌아가자'입니다. 이 집회에서 에스라 강사는 나무강단 위에서 새벽 6시부터 정오까지 무려 6시간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고, 모든 백성은 한 마음으로 귀를 기울려 듣고 그 말씀에 감동이 되어 다 울면서 회개하며 감격했다고 본문이 밝히고 있습니다.
특히 9절에 "백성이 그 말씀을 듣고 다 울었다"는 말씀을 새겨들어야 합니다.
3. 본문이 주는 영적 교훈은 무엇인가?
①그 날 집회는 성도들이 먼저 요구한 자발적인 집회였습니다(1).
"모든 백성이 일제히 수문 앞 광장에 모여" 하나님을 말씀을 듣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7월을 맞이하여 일제히 일손을 놓고 하나님의 말씀을 먼저 배우고 그 말씀을 먼저 깨닫기를 원했다는 것입니다. 여기 '모든 백성'이란 말은 그들의 단합된 힘을 가리킵니다. 그들은 모이기에 힘을 썼던 것입니다.
7월은 이스라엘에게는 특별한 달입니다. 7월 1일은 나팔절, 신년을 알리는 날이고, 7월 10일은 대 속죄일 이며, 15일부터 한 주간은 초막 절입니다.
그 날은 7월 초하루로서 이스라엘이 성회로 모이는 날이기도 했습니다. 그 날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은혜로 70년 동안 바벨론의 포로 생활 중에서도 죽지 않고 살아남게 된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배하고 기념하는 날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모임이 지도자들이 먼저 모이라고 한 것이 아닙니다. '모든 백성이 일제히 수문 앞 광장에 모여' 들었습니다. 그리고는 백성들이 먼저 '학사 에스라에게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명하신 모세의 율법 책을 가지고 오기를 청했다'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이들이 자발적으로 모임을 갖기로 요구했다는 것입니다.
저들은 심령의 전을 바로 세우기 위해서 에스라에게 먼저 요구했던 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십시오."
심령의 집은 다른 어떤 것으로 세워지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 세워집니다. 눈에 보이는 집은 벽돌로 쌓아 세울 수 있지만 살아있는 성전, 우리 마음의 성전은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만으로 세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들은 지금, 위대한 성경학자요, 설교자인 에스라에게 하나님의 말씀 강론하기를 청한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듣는 태도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고 봅니다.
하나는 억지로 마지못해 듣는 태도이고, 다른 하나는 자원해서 듣는 태도입니다. 다시 말하면 바르게 경청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건성으로 듣는 경우가 있습니다. 은혜 받고 변화 받고 축복 받는 태도는 사모하고 경청하는 태도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수문 앞 광장에 '일제히'모였다고 했습니다. 일제히 모였다는 것은 빠짐없이 모였다는 것이고 모두가 한결같이 말씀을 그리워하고 듣기를 사모하는 심정으로 모였다는 것입니다. 모이는 곳에 역사가 일어납니다. 잘 모이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내내 말똥말똥하다가도 기도 시간만 되면 하품을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내내 정신이 또렷또렷하다가도 설교 시간만 되면 졸기 시작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설교시간에 조는 사람은 영적인 문제가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은혜 받는 비결이나 태도는 수문 앞 광장에 모였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자원해서 모이고 사모하고 바라보아야 합니다.
억지로 먹는 밥은 체할 수가 있습니다. 억지로 따라가는 길은 재미가 없습니다. 여러분!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시기를 바랍니다. 자원해서 말씀에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일은 자원해서 해야 합니다.
출36:3절 "백성이 아침마다 자원하는 예물을 연하여 가져오는 고로"
신16:10절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신대로 네 힘을 헤아려 자원하는 예물을 드리고"
벧전5:2절 "부득이함으로 하지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를 위하여 하지말고 오직 즐거운 뜻으로 하며" /할/
②그들은 말씀을 듣는데 열심이었습니다(3).
"새벽부터 오정까지 앞에서 읽으매 뭇 백성이 그 율법 책에 귀를 기울였다"고 했습니다. 그들이 모인 "예루살렘 수문 앞 광장"은 성전 동문과 성벽 사이의 공터입니다. 스10:9절에서는 이곳을 '하나님의 전 앞 광장'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바로 이 '예루살렘 수문 앞 광장'은 그늘이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들이 말씀을 어떻게 듣고 있었습니까? "새벽부터 오정까지" 말씀을 들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새벽은 대체로 아침 6시를 가리키는 말로 에스라의 설교는 장장 6시간이나 계속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들은 날이 밝자마자 "하나님의 전 앞 광장"에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합숙한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아침 식사를 누가 해 준 것도 아닙니다.
그들은 말씀을 듣는데 열심이었습니다. 사실 에스라가 한 설교가 6시간이 지속되었지만 오늘날처럼 말씀을 재미있게 풀어서 설교한 것은 아닙니다. 아마도 에스라는 모세 오경을 낭독했을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에 사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즐거움에 푹 빠져 있었던 것입니다.
한 사람도 말씀이 길다고 말하는 사람이 없었고, 지루하다고 하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조는 사람도 장난치는 사람도 딴 생각하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오직 말씀만 듣는 데만 열심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요 생명의 말씀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먼저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데 열심이어야 합니다. 말씀을 듣는데 열심히 사라진 사람들 대부분은 신앙이 병들기 시작합니다.
말씀을 듣는 시간에 딴 생각을 하는 사람도 역시 그렇습니다. 몸은 여기에 있고 마음은 전국을 헤매면서 들로, 산으로, 풀장으로, 골프장으로, 낚시터로 가 있는 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입술로는 열심히 '아멘!'하면서도 마음은 이미 예식장으로, 친구 만나는 곳으로, 가 있는 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신앙이 건전하려면, 먼저는 말씀을 듣는데 열심을 내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잘 듣는 신앙이 정말 아름다운 신앙입니다.
③그들은 알아들을 만한 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2-3).
"무릇 알아들을 만한 회중 앞"에서 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 주목해야 합니다. 목청이 터지도록 큰소리로 외쳐도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딴 소리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알아들을 만한"사람이라는 것은 단순히 청력, 즉 귀가 정상인 사람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듣고 깨닫고 그리고 순종할 수 있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러기에 주님도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하셨고,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라고 했습니다.
듣는 귀가 있는 사람은 깨닫게 됩니다. 깨닫는 것이 축복입니다. 그들은 말씀을 깊이 깨달아 자신의 것으로 삼았습니다.
7절 "다 그 처소에 섰는 백성에게 율법을 깨닫게 하는데", 8절 "하나님의 율법 책을 낭독하고 그 뜻을 해석하여 백성으로 그 낭독하는 것을 다 깨닫게 했다"고 합니다. 12절 "이는 그 읽어 들린 말을 밝히 앎이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언제든지 그것을 자기 자신의 삶에 적용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나에게 하시는 말씀이지 내 이웃이나 형제나, 친구나 부모에게 하는 말씀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명심해야 합니다.
말씀은 언제나 내게 주시는 말씀으로 받을 때에 은혜가 되고, 그 말씀을 붙잡을 때 능력이 되고, 축복이 됩니다. /믿/
④이스라엘 백성들의 말씀을 받는 태도는 어떠합니까?
⑴에스라가 책을 펴 읽기를 시작하자 그들은 일제히 일어섰습니다(5).
'일어섰다'는 것은 '공감과 동의와 찬양'을 의미합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이 에스라를 통해 낭독되고 있는데 멍청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우린 여기서 참으로 멋지고 아름다운 광경을 보게 됩니다. 수문 앞 광장에 수많은 사람들이 제사장의 예복을 입은 에스라가 높게 만든 나무 강단에 올라가 우렁찬 목소리로 말씀을 낭독하기 시작하자 모든 백성은 약속이나 한 듯 조용하게 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서 있습니다.
이것이 그 날 수문 앞 광장의 스케치입니다. 말씀의 낭독 소리가 울려 퍼지자 일제히 일어서는 백성들, 그것은 말씀을 사랑한다는 표시이며 존경한다는 표시이며 순종하겠다는 표시이며 행동을 함께 하겠다는 표시인 것입니다.
믿음이 있고 말씀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 일어서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대로 순종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미국 L.A. 나성 한인 장로교회가 성전을 짓기 위해 만 오천 평의 대지를 구입해 놓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우체국으로부터 제안이 들어오기를 3000평 정도만 땅을 준다면 그 땅에 우체국을 짓고, 그 대신 교회가 원하는 대로 교회를 지어 주겠다는 제안이 들어 왔습니다. 이때 목사님이 성도들과 의논을 하는데 모든 성도들이 한결같이 반대를 했답니다.
그 이유는, '교회는 우리가 우리 힘으로 기도하고, 땀 흘리고, 헌금해서 건축해야지 남이 쉽게 그의 돈으로 지어 준다면 그것은 우리 교회가 못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성도들이 복을 받습니다. 지금 L.A. 나성장로교회는 엄청난 부흥을 했고, 그 교회 성도들이 L, A. 한인 회에서도 가장 돈이 많은 재벌 급들이 쏟아져 나왔답니다. /믿/
교회는 이렇게 함께 일어서고 함께 걸어가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어디 교회뿐 만이겠습니까?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정이 무엇입니까? 피를 나눈 사람들이 함께 모여 뜻을 나누고 정을 나누고 대화를 나누는 곳입니다. 그리고 일어설 일이 있을 때 함께 일어서고 앉아 쉴 때 함께 쉬는 곳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즐거움도 어려움도 함께 나누는 곳이 교회입니다. 홀로 서면 외롭습니다. 혼자서 걸어가면 고독합니다. 그러나 함께 일어서고 함께 걸어가고 함께 쉬면 고독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목사는 함께 해줄 동역자만 있으면 힘들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우리 모두 하나님의 동역 자로 묶었으니 함께 성림의 교회를 이루어나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⑵그들은 말씀을 받고 아멘으로 화답했습니다(6).
"에스라가 광대하신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하매 모든 백성이 손을 들고 아멘 아멘 응답하고"
'아멘'이라는 말은 '과연 그렇습니다', '동감입니다'라는 뜻도 있고, '꼭 그렇게 하겠습니다' 라는 맹세의 뜻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도할 때도 '아멘' 하고, 찬송을 부를 때도 '아멘' 하고, 말씀을 들을 때도 '아멘' 합니다.
그리고 또 이 '아멘'이라는 말속에는 '진실로(Truly)', '참으로' 라는 뜻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 말씀은 진실합니다', '옳습니다' '그렇게 믿습니다' 라는 의미로 우리가 '아멘'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언제 아멘 했느냐 하면, 요한계시록에 보면 찬송 후에 '아멘' 했습니다. 천군 천사들과 하늘의 24 장로들이 주님을 찬송할 때 네 생물이 '아멘' 하고, 장로들은 엎드려 경배했다고 했습니다.
또 축복 후에 '아멘' 했습니다. 롬15:33절 "평강의 하나님께서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 계실지어다" 할 때 '아멘'으로 응답했고, 또 갈6:18절에도 축복의 말씀이 있은 다음에 '아멘'으로 화답했습니다.
여러분! 이와 같이 '아멘'은 우리 기독교의 축복의 언어요 세계 공통어입니다.
고후1:20절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⑶말씀을 듣는 사람들이 취하는 태도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아멘 하는 태도입니다. 행2장을 보면 베드로의 긴 설교가 끝나자 그 설교를 듣고 있던 사람들이 취한 반응이 나옵니다.
37절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저들은 찔림 때문에 회개하고 자신을 고치려는 태도를 취했습니다.
히4:12절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죄로 병든 심령이 그 죄를 깨닫고 내가 어이할꼬! 가슴을 치는 회개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둘째는, 저항하는 태도입니다. 행7:54절을 보면 스데반의 긴 설교를 듣고 난 사람들이 취한 태도가 나옵니다.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저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마음에 찔렸고, 스데반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도 마음에 찔렸습니다. 그러나 전자는 '어찌할꼬!'라고 회개했고 후자는 '이를 갈며' 스데반을 돌로 때려 죽였습니다.
중요한 것은, 말씀을 듣고 아멘 하는 사람은 축복을 받고 이를 가는 사람은 저주를 받는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말씀을 진실로 받고 아멘으로 받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⑷그들은 하나님께 경배 드렸습니다(6하).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여호와께 경배하였느니라." 에스라를 통해 하나님을 송축하는 말씀이 낭독되자 백성들은 모두가 '아멘, 아멘'으로 화답했으며 무릎을 꿇고 얼굴을 땅에 대며 하나님을 경배했습니다.
무릎을 꿇고 얼굴을 땅에 대는 것은 종이 주인을 경배할 때, 노예가 주인을 경배할 때 취하는 태도입니다.
우리의 찬송과 경배의 대상은 천년만년의 세월이 흘러도 오직 한분, 하나님뿐입니다. 계5:13절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능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라고 했습니다.
⑸모든 백성이 말씀을 듣고 울었습니다(9).
"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우는지라" 그 날 에스라가 낭독한 하나님의 말씀에 그들은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말씀을 듣는 동안에 자신들의 죄가 밝혀졌고 허물이 드러났고 잘못이 떠올랐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울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9:2-3에서 보면 "모든 이방 사람과 절교하고 서서 자기의 죄와 열조의 허물을 자복하고 / 이 날에 낮 사분지 일은 그 처소에 서서 그 하나님 여호와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낮 사분지 일은 죄를 자복하며 그 하나님 여호와께 경배"했다고 합니다.
그들은 진정으로 회개했습니다. 철저하게 회개한 것입니다. "서서 자기의 죄와 열조의 허물을 자복"했습니다. 심지어 그들은 "낮 사분지 일은 죄를 자복"했다고 합니다. 그들이 잘못이 있어서 이렇게 회개한 것만이 아닙니다. 그들은 "자기의 죄와 열조의 허물"을 자복한 것입니다.
우리도 역시 말씀을 들을 때에 이러한 깊이 통회하는 마음이 일어나야 합니다. 말씀을 들을 때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죄를 지적하는 것은 과감하게 회개할 줄 알아야 합니다.
또 진정한 회개를 과거의 죄에서 돌아서는 것을 의미합니다. 단순히 모여서 기도하고 울면서 통회하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됩니다. 진정한 회개를 과거의 모든 것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온전하게 돌아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죄가 밝혀지고 허물이 드러나고 잘못이 노출됐다고 해서 다 통곡하고 회개하는 것은 아닙니다. 마음이 완악한 사람은 더 완악해 지고 발악을 할 수도 있습니다.
요나 선지자가 니느웨 성에 들어가 40일 후에 이 성이 멸망할 것이라고 외쳤습니다. 그의 외침이 떨어지자마자 왕과 대신들과 모든 백성이 굵은 베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회개했습니다. 그래서 니느웨는 구원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노아 시대에는 노아가 아라랏 산꼭대기에 방주를 만들어 놓고 홍수가 나 멸망할 것이니 방주로 들어오라고 외치고 다녔지만,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시집가고 향락을 즐길 뿐 단 한 사람도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모조리 멸망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먹고 마시고 즐기고 향락에 빠진 채 지내다가 롯의 말을 무시한 그의 사위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불에 타 죽고 말았습니다.
수문 앞 광장에 모였던 백성들은 에스라가 낭독하는 말씀을 듣고 회개했습니다. 설명도 없이 모세의 율법 책을 그대로 낭독했습니다만 그 말씀을 듣고 백성들이 회개의 눈물을 흘린 것입니다.
이 눈물은 천국확장의 능력을 만드는 재료가 됩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 진실로 한번 울어 보십시오! 하나님은 눈물을 보시고 약해지십니다. 히스기야 왕의 눈물을 보시고 기도의 응답을 주셨던 그 하나님은 오늘 저와 여러분의 하나님이십니다. 오늘도 눈물의 기도를 받으시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먼저 우리 기독교인들이 수문 앞 광장에 모였던 사람들처럼 내 가슴을 치고 내 옷을 찢고 내 머리에 재를 뿌리고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 시대의 비극은, 내 가슴은 치지 않고 남의 가슴을 치고 내 옷은 찢지 않고 남의 옷을 갈기갈기 찢으며 내 머리에는 재를 뿌리지 않고 남의 머리에 재를 뿌리려는 데 있습니다. 회개란 좋은 것은 하고, 나쁜 것은 안 하는 것입니다. 버릴 것은 버리고 취할 것은 취하는 것이 바른 회개입니다.
⑹그들은 하나님을 기뻐하며 힘을 얻었습니다(10).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에게 힘이라"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언제나 기쁨으로 가득 찹니다. 사실 우리가 말씀을 알지 못했을 때는 답답합니다만 은, 말씀을 듣고 그 말씀으로 인하여 나의 생활에 하나님의 약속이 보장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기뻐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 앞에 나와서 예배드릴 때 언제나 기쁨이 충만한 축제로 드렸습니다. 오늘 우리들의 예배가 바로 이러한 기쁨이 넘쳐나야 됩니다. 예배는 근본적으로 축제입니다.
9절 '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울자' 에스라는 '오늘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성일이니 슬퍼하지 말며 울지 말라'고 말합니다. 그리고는 "이 날은 우리 주의 성일이니 근심하지 말라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고 위로합니다.
▶힘에는 ㉠육체적인 힘이 있습니다. 이 힘이 있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건강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잘 먹고 체력을 단련시켜야 합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이런 육체적인 힘도 강해야 합니다.
㉡인간적인 힘, 세상 적인 힘도 있습니다. 지식의 힘, 물질의 힘, 권력과 명예의 힘을 말합니다. 세상을 살면서 우리에겐 이런 힘도 필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우리가 부지런히 성공하고 출세도 해야 합니다.
㉢진정으로 중요한 힘은 영적인 힘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힘입니다. 저 하늘로부터 오는 힘입니다. 이 힘은 어느 누구도 막을 수 없습니다. 이 세상 어떤 힘도 막을 수 없습니다.
그 힘은 어떤 자에게 옵니까? 그 힘은 '여호와를 기뻐하는 자'에게 옵니다.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할/
⑺말씀을 받은 그들은 크게 기뻐하고 즐거워했습니다(12).
"모든 백성이 곧 가서 먹고 마시며 나누어주고 크게 즐거워하였으니 이는 그 읽어 들린 말을 밝히 앎이니라."
걷잡을 수 없을 만큼 백성들의 통곡이 심해지자 느헤미야와 에스라와 레위 사람들은 백성을 진정시키며 울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고 호소했습니다. ▶거기엔 세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회개함으로 화평이 왔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하나님께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하는 순간, 그들의 심령에는 화평이 찾아왔습니다.
회개하면 화평이 찾아옵니다. 죄는 우리를 불안하게 하지만 참 회개는 심령을 평안해 지게 합니다. 진정한 평안은 진정한 회개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둘째는, 그 날이 바로 성일이기 때문입니다. 11절 "오늘은 성일이니 마땅히 종용하고 근심하지 말라" 성일은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송하고 기쁘시게 해드리는 날입니다. 그 날은 모든 걱정과 근심을 주님께 맡겨 버리고 참 기쁨을 소유하는 날입니다.
근심과 걱정, 슬픔과 고통을 가지고 왔더라도 주의 제단 앞에 모조리 내어놓고 주님이 주시는 참된 평안을 소유하는 날이 바로 성일입니다. 그래서 성일은 안식의 날이며 평화의 날이며 복된 날인 것입니다.
행여나 여러분! 근심과 걱정, 슬픔과 고통을 가지고 왔습니까? 우리 주님께 맡기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은 오늘도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우리를 부르십니다.
셋째는, 말씀의 깊은 뜻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12하 "이는 그 읽어 들린 말을 밝히 앎이니라." 말씀을 깊이 깨달은 사람은 더 이상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 하나님의 말씀 속에는 우리 인간들의 모든 고통을 해결 받을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말씀을 듣고 깨달아 실천할 수 있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공자는 아침에 도를 깨달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고 했습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깊은 진리를 깨닫는다면 우리가 어떻게 더 기뻐하고 즐거워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듣기는 들어도 깨달음이 없으면 멸망할 짐승과 같다고 했습니다.
그날그날 주시는 말씀을 깨닫는 성도들이 됩시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은혜 받은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은 "어쩌면 그렇게도 내 사정을 낱낱이 아시고 말씀으로 깨닫게 하시는지 모르겠다."고 말합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을 내 말씀으로 받아 변화되고, 힘을 얻고, 기뻐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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