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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히려 우리에게 소망이 있습니다! (렘애 3:19-33)

by 【고동엽】 2022. 2. 5.

오히려 우리에게 소망이 있습니다! (렘애 3:19-33)

 

예레미아 애가서는 눈물의 선지자로 통하는 예레미야에 의해 기록된 성경입니다. 애가서는 B. C 586년 바벨론에 의해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지고 예루살렘이 폐허가 된 채 유다 백성이 포로로 잡혀간 민족적 비극을 슬픔에 잠겨 노래한 성경입니다.
▶예루살렘이 어떤 곳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늘 하는 말이 있습니다. <세계의 중심은 이스라엘이고, 이스라엘의 중심은 예루살렘이고, 예루살렘의 중심은 성전이다> 이 곳 위로는 비행기도 지나갈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세계 최대 성지가 되었습니다. 다니엘이 포로로 잡혀갔을 때 이 곳을 향하여 창을 열어 놓고 기도했던 곳입니다.
이곳에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곳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것은 예배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그렇게 축복하셨던 이유는 아브라함은 가는 곳마다 단을 쌓고 예배를 드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 선지자를 크게 들어 사용하신 것도 예배를 잘 드렸기 때문입니다.
당시 아합 왕은 아주 나쁜 왕이었는데 예루살렘 성지에다가 바알 신당을 여기 저기 세워 놓고 온 국민들로 하여금 섬기게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곳을 모두 파괴해 버렸습니다. 그 때 엘리야는 공개적으로 단을 다시 쌓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제물을 드렸습니다. 이렇게 예배를 귀하게 여기는 엘리야를 하나님은 크게 들어 사용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미국을 그렇게 축복하신 이유도 예배입니다. 조상들이 미 대륙으로 건너가서 학교부터 짓지 않고, 먹고 잘 집부터 세우지 않고 그들은 교회부터 세우고 예배로 시작했습니다. 그 조상들이 드린 예배 때문에 미국은 지금도 복을 받고 있습니다. 예배가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예배의 처소인 예루살렘 성지가 무너져 버렸습니다. 한마디로 유대인들의 자존심이요 긍지인 이곳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의해 초토화되었습니다. 그래서 상황이 절대 절망이 된 것입니다.
▶애가서는 유다 백성들로 하여금 과거의 뼈저린 죄악들을 돌아보게 함으로써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 신앙을 버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애가서는 단지 과거의 슬픔에 대한 것만 기록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 대한 소망의 빛을 보여줌으로써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애가서를 '슬픔의 신학'이라고 하면서도 동시에 '소망의 신학'이라고 부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애가서 3장은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 앞에 비탄에 빠진 상태에서 하나님 안에서 소망을 찾아내는 내용이 그려져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당하여 고통 속에 잠긴 성도라도 다시 하나님을 찾으면 하나님이 회복시키시고 눈물을 닦아주시는 소망의 메시지를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의 적대국인 바벨론과의 이야깁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어떤 사람과 친해집니다. 그래서 아주 가까운 사이가 되고 사랑하는 관계가 됩니다. 그라나 이렇게 친하고 좋고 가깝고 보고 싶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주 보기 싫고 만나면 괴롭고 기분이 좋지 않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바로 원수관계가 되는 사람들입니다.
국가 관계도 그렇습니다. 가까운 관계를 우방이라고 말합니다. 우방과는 아무리 멀어도 정치 경제 산업 문화 교육 할 것 없이 서로 친근하게 오가면서 교류를 합니다. 그런데 아주 가까이 있어도 먼 나라가 있고 아주 미운 나라가 있습니다.
이북은 같은 민족임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먼 나라입니다. 공산당들은 속이 뻘개서 겉으로 보고는 판단할 수가 없습니다. 일본도 그렇습니다. 독도문제나 역사 왜곡 같은 교과서의 문제뿐만 아니라 우리 민족과는 감정이 골이 깊은 상처를 가지고 있는 나라입니다. 이런 나라들을 적대국이라고 합니다. 적대국과는 서로가 감정적일뿐만 아니라 군대 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대치하게 되고 국민들의 의식 속에도 항상 경계하게 되고 미워하게 됩니다.
구약 성경에 보면 이스라엘과 바벨론이 적대국입니다. 이스라엘은 바벨론에 의해 많은 피해를 입었습니다. 바벨론과의 적대 관계가 1-2년이 아니고 수백 년 동안 계속되면서 이스라엘 사람들의 미움은 점점 더 깊어만 갔습니다.
바벨론은 이스라엘의 여호와 김 왕 때 쳐들어 왔었고, 여호와 긴 때도 쳐들어 왔습니다. B.C 586년 시드기야 왕 때 드디어 바벨론의 느브갓네살 왕은 이스라엘을 빼앗고 맙니다. 그래서 화려하고 웅장하기만 했던 예루살렘 성이 순식간에 밀어닥친 북방의 바벨론 제국의 사람들에 의해서 성전을 비롯해서 온 성이 불타버리고 말았습니다.
얼마 전만 해도 예루살렘 성안에는 아름다움과 부귀와 영광이 충만했었습니다. 이곳에는 귀족들과 현자들과 거룩한 사람들이 살고 있었으며, 중앙에는 솔로몬 왕이 지은 거룩한 성전이 자리를 잡고 있었습니다. 그런 평화의 도성에 바벨론이 쳐들어와 예루살렘 성에 거하던 유다 왕조 시드기야 왕의 두 눈을 뽑아버렸고 왕자들과 신하들은 현장에서 살해되고 말았습니다(렘52:9-11).
그뿐입니까? 유다의 아름다운 청년들과 처녀들은 바벨론 사람들이 포로로 사로잡아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때 다니엘도 끌려갔고, 그의 친구 사드락과 매삭과 아벳느고도 끌려갔고, 선지자 예레미아도 끌려갔습니다. 이런 환란과 고통과 비극이 어디 있습니까?
이리하여 바벨론 제국에서 70년 간의 포로 노예생활이 시작된 것입니다. 구약 시대 이스라엘 백성의 2천 년여 민족사에서 가장 수치스럽고 참혹한 시기였습니다.
유다 왕조가 이렇게 멸망하게 된 것은 유다 백성들이 위로는 임금으로부터 아래로는 천한 백성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서 우상을 숭배하며 사람들의 귀만 즐겁게 하는 거짓 선지자들의 가르침을 분별치 못하고 좇으며 급기야는 깊은 죄 중에 빠져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그 당시 사회상은 한마디로 다 썩어버렸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이 썩었고 정치 지도자들이 다 썩었고, 인간의 윤리와 도덕이 땅바닥에 떨어졌으며 특히 하나님의 종 선지자 예레미야의 경고하는 말씀과 회개하고 돌아오라는 간절한 외침을 거부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종 예레미아의 외침을 보세요! 절대 절망임에도 불구하고 절대 소망이 있다고 외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이 무너지고, 백성들이 살육 당하고, 포로로 잡혀가는 절대 비극 속에서도 하나님의 종 예레미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오히려 우리에게 소망이 있다(21)>고 외치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문제가 무엇인가? 어떤 절망의 문제인가? 아무리 큰 문제라도 본문의 이스라엘보다 더 큰 절망은 없습니다. 그 큰 절망가운데서도 주님을 바라보고 소망을 외쳤던 예레미아의 이 믿음을 우리 모두 붙잡아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절대 절망 속에서도 하나님의 백성들은 절대 소망이 있습니다. ◀제목소개!▶

 

성경에 보면 잘 안 되는 것 때문에 오히려 더 잘 된 이야기가 있습니다. 고통이나 실패 때문에 오히려 잘 된 이야기가 많습니다.
아브라함은 독자 이삭을 죽여야 하는 고통을 감수했기 때문에 복의 근원이 되었고,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히스기야는 병들었기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다니엘은 사자굴속에 던짐을 받았기에 오히려 그의 국무총리 자리가 튼튼해졌습니다. 욥은 고통의 깊은 수렁에 빠졌기 때문에 갑절의 축복을 받았고, 가나 혼인 잔치 집은 포도주가 떨어졌기 때문에 예수님의 축사를 받아 더 좋은 포도주를 준비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은 절대 절망이 절대 소망이 될 수 있습니다. /믿/
▶우리의 문학작품이나 음악 세계를 들여다보면 두 가지 흐름이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아픔과 절망과 고뇌와 좌절과 이별 그리고 죽음을 다루거나 노래하는 경우가 있고, 반대로 희망과 환희와 사랑의 감동을 다루는 작품 세계가 있습니다.
옛날의 기차나 봉고 차는 좌석이 마주보고 앉아 있게 만들었습니다. 저는 뒤를 바라보고 앉으면 쉽게 피로가 오고 어지러움이 옵니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고 사람이면 다 그렇다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요? 사람의 생리적인 기능은 앞으로 나가도록 설계되어 있기 때문에 뒤로 가는 것은 피곤하다는 것입니다.
걷는 것도 앞을 향해 걸으면 몇 십리도 걸을 수 있지만 뒷걸음으로 걸으면 단 오리도 걷기가 힘이 듭니다. 그래서 달리는 모든 것도, 예를 들면 비행기 기차 자동차 쾌속정 오토바이 자전거 등은 앞으로 달리도록 설계되어 있는 것입니다. 물론 때론 필요에 의해 뒤로 갈 수는 있지만 10시간 20시간을 뒤로 갈 수 없습니다.
이 이치는 인생살이나 세상살이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다가오는 미래를 바라보고, 소망을 바라보는 삶이 있는가 하면 어둡고 침울한 과거를 바라보면서 절규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성경 속에도 절망과 고뇌가 있습니다. 죽음도 있습니다. 그러나 소망의 소리보다는 작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이 있는가 하면 부활의 찬란한 아침도 있습니다.
본문의 경우도 보면 바벨론의 침략으로 이스라엘은 초토화되었습니다. 성이 무너지고 사람들이 죽어 갑니다. 비극중의 가장 큰 비극은 전쟁의 비극입니다. 한 나라가 전쟁에 지면 그 나라는 30년에서 50년을 후퇴합니다.
지금 이스라엘은 부모 형제가 오륙을 당하고 재산을 빼앗기고 자유를 빼앗기고 모든 것을 잃어버린 절대 절망 가운데 처해 있습니다. 이 때 하나님의 종 예레미아는 어떠한 경우라도 <오히려 우리에게 소망이 있다>고 외치고 있습니다.
생각해 보면 기뻐하는 사람들에게는 위로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슬픔 당한 자에게만 위로가 필요합니다.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도 약도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병든 사람에게는 필요합니다. 소망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절망과 좌절, 고통과 낭패 속에 빠진 사람들에게 소망이 필요한 것입니다. /믿/

 

1. 이스라엘의 절망이 무엇인가?

 

전쟁의 절망이요, 포로의 절망이요, 빼앗김에 절망입니다. 이스라엘의 절망을 19-20절에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내 고초와 재난 곧 쑥과 담즙을 기억하소서 내 심령이 그것을 기억하고 낙심이 되오니"
바벨론 나라가 쳐들어 왔습니다. 전쟁이 일어나자 젊은이들은 나가서 싸우다 죽고 믿음직한 남편은 바벨론 사람들이 포로로 잡아가고, 남은 사람은 어린애와 여자들과 노인들 밖에 없습니다. 나라는 망했고, 가정은 파탄이 되었고, 붙잡혀 간 남편은 누가 데려 올 수도 없고 이쯤 되다보면 망해도 완전히 망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때에 "나의 고초와 재난을 기억하소서." 라고 기도한 것입니다.
선지자 자신이 겪었던 아픔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당했던 고통입니다. 여기서 그들이 겪었던 고초와 재난을 쑥과 담즙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쑥은 식물 가운데서 가장 쓴 것이고, 담즙은 동물의 내장가운데서 제일 쓴 것입니다. 쓰다는 것은 고통, 괴로움, 환란들을 의미합니다. 고난이 심하면 입에서 쓴 네가 납니다. 저의 인생 길에도 이런 고통의 때가 참 많았습니다. 지금 우리 성도들 가운데서도 이런 고통의 때를 통과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여러분! 왜 우리가 좌절합니까? 그것은 좌절할 수밖에 없는 상황만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절망할 수밖에 없는 현실만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상황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물론 사람은 얼마든지 좌절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직면할 때가 있습니다. 그 상황에 직면하면 사람은 누구나 다 절망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팔자와 운명을 비관하며 좌절합니다. 어떤 사람은 타고난 외모, 생김새 때문에 절망합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의 부모, 집안환경, 태어난 고장 때문에 절망합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처절한 실패를 생각하며 절망합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보지 않고 사람을 보기 때문에 절망합니다. 사람의 감언이설에 귀 기울이기 때문에 오해하고 절망하기도 합니다.
본문의 예레미아 선지자도 개인적으로는 불행한 사람입니다. 그 이유는 유다 민족의 죄와 지도자들의 범죄를 꾸짖고 하나님의 심판을 선고했다는 이유로 관가에 끌려가서 매도 수없이 맞았고 감옥에도 들어갔고 죽을 고비를 수없이 겪었던 사람입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오히려 우리에게 소망이 있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그 근거와 이유가 무엇인가를 알아보고 우리 삶에 접목시켜 이기고 승리하는 삶을 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할/

 

2. 왜 이스라엘이 소망이 있는가?

 

①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기 때문입니다(22).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기 때문에 완전히 망했다 싶은 상황 속에서도 소망을 가지는 것이 믿는 성도의 자세입니다. 우리에게는 그런 하나님, 즉 믿는 바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고난 중, 이제는 끝이 났다고 하는 고난 중에서도 소망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은 고난 자체만 보기 때문에 실망하게 됩니다. 우리는 고난 뒤에서 양손에 자비와 긍휼을 들고 계시는 그 하나님을 바라보면 얼마든지 우리에게는 소망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자비라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원문에 자비라는 말은 '헷세드'인데 이 말은 아주 의미가 깊은 중요한 단어입니다. 우리말로 은혜라는 말인데 그 속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사랑과 자비'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헷세드는 조건을 초월한 하나님의 사랑, 이해를 초월한 하나님의 자비입니다.
사람들이 주고받는 사랑은 조건적인 사랑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조건 없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이해를 초월한 자비입니다.
바로 예레미야는 이 하나님의 헷세드에 희망을 걸었습니다. 지금 나라가 망하고 민족이 노예로 끌려가는 상황 속에서도, 그래서 하나님을 향해서도 절망할 수밖에 없는 현실 속에서도 다시 한번 이 하나님의 헷세드에 희망을 걸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으신다.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으신다. 아무리 우리나라가 망하고 우리가 노예 민족으로 끌려가도 하나님은 우리를 절대로 버리지 않으신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랑은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사랑이기 때문이다.> /할/
이것이 바로 예레미야의 희망 줄이었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더 이상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이 희망 줄을 붙잡고 기도하였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실수하고 넘어져도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아무리 우리가 못된 짓을 하고 저주받을 짓을 해도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우리를 버리시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자비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희망 줄이 되어야 합니다. /믿/
▶'긍휼'은 무엇입니까? '긍휼'은 '측은히 여기고 불쌍히 여긴다'는 뜻인데 입장을 바꾸어 놓고 생각해 본다는 뜻입니다.
동네 사람들은 내 아들을 죽일 놈이라고 손가락질하지만 어머니는 그렇지 않습니다. 당신네들이 몹쓸 사람이라 하지만 그래도 내 아들은 소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어머니는 반드시 아들의 입장을 바꾸어 놓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바꾸어 놓고 생각하면 이해 못할 것이 없고, 용서 못할 것이 없고 안 도울 수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긍휼입니다. 그러기에 한 손에는 은혜, 한 손에는 긍휼을 가지고 우리를 지켜보시는 그 하나님을 바라 볼 때에 오히려 소망을 된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도 때로는 가정의 어려운 일, 사업의 어려운 일, 병들어 고생스러운 일, 이제는 끝이 아닌가 싶어도 이런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바라보시면서 소망을 가지고 살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 그것 때문에 우리가 용서받고 은혜 받고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을 슬프게 했습니까? 믿음으로 산다고 하면서, 주님의 뜻대로 산다고 하면서, 주님의 뜻보다는 자신의 뜻과 수단대로 산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님 앞에 약속하고는 못 지킨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오히려 하나님을 반역하고 거역한 죄가 많고, 하나님은 안중에도 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함에도 오늘날 우리가 이 자리에 달려 나와 하나님 앞에 예배드릴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 때문입니다. /믿/
하나님의 긍휼이 없었다면 한 사람도 하나님 앞에 설 자가 없습니다. 우리나라도 보험제도가 이제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교통 법규 위반한 횟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보험 부을 액수가 많아진다고 합니다. 국가법은 그렇습니다. 어기면 어길수록, 죄질이 무거워지고 결국 전과자의 낙인만 찍혀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세계에는 전과자 기록부가 없습니다. 왜 없습니까? 그 이유는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가 그것들을 말소해 버리기 때문입니다. /할/

 

②본문은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보다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⑴하나님의 자비는 무궁하십니다. 22절 "무궁하시므로" '무궁하다'는 말은 <영원하다, 끝이 없다, 지속적이다>는 뜻입니다. 잠깐 긍휼을 베풀고 자비를 행하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그러나 영원토록 끝까지 자비를 베푸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만 가능합니다. 사람들이 누구를 동정한다든지 누구를 사랑한다든지 누구를 도와준다든지 하는 것은 그 시간과 길이가 제한되어 있습니다. 영원토록, 끝까지 도와주지는 못합니다. 부모와 자식이 그렇고, 부부가 그렇고, 형제자매가 그렇습니다. 친구 관계가 그렇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은 무궁하십니다.
⑵하나님의 자비는 늘 새롭고 큽니다. 23절 "이것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크도소이다" 이 말은 하나님의 자비는 세월이 흘러도 변치 않고 아침마다 새로 뜨는 태양처럼 새롭고 크다는 것입니다. 쉽게 표현하면 하나님의 자비는 영원히 그리고 날마다 변치 않는다는 것입니다. 변한다는 것은 좋은 것이 아닙니다. 얼굴빛이 자주 변하는 것, 좋지 않습니다. 마음도 자꾸 변하면 좋지 않습니다. 교재의 대상을 자주 바꾸는 것 좋지 않습니다. 믿음도 자꾸 변하면 좋은 것이 아닙니다.
⑶하나님의 자비는 풍부하십니다. 32절 "그 풍부한 자비대로 긍휼히 여기실 것임이니라" 지금 세계가 걱정하는 것은 자원과 식량 부족입니다. 2천 년대에는 물을 물 쓰듯 쓸 수 없다고 합니다. 지금 오지의 나라들은 식량이 없어 굶어 죽어가고 있습니다. 이북은 굶어 죽어가면서도 전쟁준비에 광분하고 있습니다.
지하자원은 그 나라의 산업 발전과 국력 신장에 필수적인 조건입니다. 가령 일년 정도 파내면 바닥이 나고 마는 지하자원이라면 별 가치가 없습니다. 나하고 동기 목사인 홍병익 목사님이 온양의 온천물을 팠다가 망했습니다. 분명히 처음에는 온천물이 쏟아져 나왔는데 몇 달 지나니까 흙탕물만 나오더랍니다. 그래서 그 양반 망했습니다.
지하자원 뿐 아니라 국고에 돈이 가득 차 있어야 합니다. 몇 년 전에 우리나라는 외환보유액이 바닥이 나서 IMF를 맞이했습니다. 그때 얼마나 힘이 들었습니까? 어느 정도 보유할 절대 양이 있어야 합니다. 자비나 긍휼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분 좋을 때 자비롭고 화나면 포악해지는 것은 자비가 아닙니다. 자기가 맘에 들면 긍휼히 여기고 싫어지면 외면하는 것은 긍휼이 아닙니다. 그리고 다함이 없이 베푸는 자비가 곧 풍부한 자비입니다. 하나님의 그 풍부한 자비 때문에 우리는 절대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왜 우리가 소망이 있습니까?

 

③구하고(기도하고) 주실 것을 믿고 기다리기 때문에 소망이 있습니다.
24절의 끝을 보면 "내가 저를 바라리라"고 했고, 25절 "무릇 기다리는 자에게나 구하는 영혼에게 여호와께서 선을 베푸신다."고 했으며, 26절은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다."고 했습니다. ▶구한다는 것은 기도한다는 말입니다. 어느 때 기도해야 합니까? 물론 기도는 쉬지 말고 해야 합니다. 그러나 낙심이 올 때, 환난이 올 때, 우리는 더욱 더 기도해야 합니다.
눅18:1절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라"고 했고, 시50:15절에서는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또 사55:6절에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간구하는 자에게 가까이 하십니다. 시145:18절 "여호와께서는 자기에게 간구하는 모든 자 곧 진실하게 간구하는 모든 자에게 가까이 하시는도다." /할/
하나님은 모든 자의 기도를 들어주십니다. 그런데 기도할 때 진실하게 간구해야 합니다. 과장이나 꾸밈이나 거짓이 없는 기도가 진실한 기도입니다. 간구라는 말은 가까이서 부른다는 말입니다. 진실한 사이는 가까운 사이입니다. 서로 허물이 있고 거짓이 있고 꾸밈이 있으면 사이가 가까워 질 수 없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가까이서 부르지 못하는 것은 나에게 허물이 있고 감추고 싶은 죄가 있기 때문입니다. 부부간을 가리켜 무촌이라고 합니다. 인간관계에서 가장 가까운 관계라는 의미입니다. 왜 부부가 무촌인가? 그것은 서로 숨김이 없는 사이라는 뜻입니다. 부부간에도 숨김이 있다는 것은 사랑에 금이 갔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도 그렇습니다. 하나님과 멀어진 사람은 숨기고 있는 죄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실한 사람은 하나님과 가까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기도가 능력이고, 기도가 축복입니다. 기도는 지금도 역사를 일으킵니다. /믿/

 

④기도하는 성도는 소망이 있습니다. /할/
렘33:3절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이 말씀은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가 조국 유다가 바벨론 느부갓네살 군대에 에워싸여 풍전등화의 위기 앞에 있는 유대인들에게 기도하라고 당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3가지의 교훈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⑴부르짖으라! 부르짖는 다는 것은 힘써 기도하라, 전심으로 기도하라, 소리 질러 기도하라는 뜻입니다. 또 통회하는 기도, 열심 있는 기도, 끊임없는 기도, 울부짖는 기도를 의미합니다.
▶부르짖는 기도는 열심히 하는 기도입니다. 기도는 뜨겁게 해야 합니다. 가슴이 뜨거운 사람이 성공적인 삶을 삽니다. ▶부르짖는 기도는 간절한 기도입니다. ▶정성들을 쏟아 바치는 기도입니다.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온 정성을 쏟아서 기도했습니다. 머리를 무릎 사이에 넣고 간절히 기도하니 삼 년 육 개월 가문 하늘에서 비가 내렸습니다(왕상18:42,45). ▶부르짖는 기도는 낙심하지 않고 하는 기도입니다.
▶또 부르짖는 다의 더 깊은 원 뜻은 쥐어짜며 부르짖는다는 말입니다. 눈물을 짜며, 땀을 짜며, 피를 짜며, 생명을 짜며 기도하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기도를 통해서 옵니다. 하나님의 역사도 기도를 통해서 오고 하나님의 비밀도 기도를 통해서 깨닫게 됩니다.
기도의 원어는 '데필라/자이크' 등이 있는데 '씨름한다.'는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붙들고 씨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씨름 선수들의 경기를 볼 때마다 온 힘을 다해 상대방을 넘어뜨리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을 봅니다. 기도는 바로 젖 먹는 힘까지 동원해야 합니다.
또 다른 원어의 뜻은 '고문당하는 사람이 살려달라고 울부짖는 것'과 같습니다. '한번만 살려주세요!' 기도는 생명을 걸고 필사적으로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기도해야 합니까? '의심하지 말고 믿음으로' 해야 합니다. 약1:6-7절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이스라엘 사람들의 전설에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이 사흘 동안 여행을 갔다 왔더니 아내가 잔득 화가 나 있었습니다.
아담이 아내를 보고 말하기를 이 넓은 천지에 여자라고는 당신 한 사람밖에 없으니 내가 외도한 것도 아닌데, 어딜 좀 갔다 왔기로 왜 이렇게 화가 났습니까?
그리고 아담은 여전히 기쁨으로 찬송을 부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그런데 하와는 가만히 있다가 밤에 몰래 아담의 갈빗대를 세어 보드랍니다. 갈빗대 하나 더 뽑아 가지고 어디다 여자를 하나 더 만들어 놓은 것은 아닌가? 해서입니다. 그렇지 않고야 저 남자가 왜 저렇게 좋아할까 싶어서였습니다.
사람은 이렇게 에덴동산에서부터 의심이 많았답니다. 이 의심 때문에 갈등이 생기고 평화가 깨어집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왜 의심하느냐?>고 책망하셨습니다.
⑵응답하리라! 응답하신 다는 것은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께서 살아 계신 분이심을 나타내는 증거입니다. 세상에 어리석은 사람들은 죽어 있는 우상에게 가서 복을 달라고 아우성을 칩니다.
삼상18:25절 이하를 보면, 하나님의 종 엘리야와 바알을 섬기는 선지자들과 한판 대결이 벌어졌습니다. 누가 능력 있는 신인가? 살아 있는 신인가를 대결하는 자리입니다. 먼저 바알 선지자들이 자신들의 방법대로 송아지를 잡아 놓고 아침부터 낮까지 바알의 이름을 불러가며 '우리에게 응답하소서! 우리에게 응답하소서!' 소리쳤지만 아무소리도 응답도 없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종 엘리야가 그들을 조롱하면서 말합니다. "큰 소리로 불러라, 행여나 너희 신이 묵상하고 있는지, 잠을 자고 있는지 모르니 큰소리로 부르라"고 야유를 보냅니다. 그랬더니 그들이 큰 소리로 부르고 심지어 자신들의 몸을 칼과 창으로 베며 피를 흘리게 하면서 고래고래 소리칩니다. 그러나 끝내 바알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이때 엘리야가 무너졌던 여호와의 단을 새로 쌓고 열두지파의 돌의 세우고 그 위에 번제물을 올려놓고 '여호와여 응답하소서!' 기도하니 여호와의 불이 임했습니다. 왕상18:39절 "모든 백성이 보고 엎드려 말하되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하나님은 살아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믿/ 오늘도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⑶우리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까지도 보여 주리라!
▶크고 비밀한 것을 보여 주신다는 것은 ⑴아직 경험하지 못한 것 ⑵다른 사람에게는 알리지 않은 것 ⑶자신의 생각으로는 짐작도, 꿈도 꾸지 못했던 깜짝 놀랄 사건들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크고 비밀한 뜻은 이러합니다. 요셉을 향한 하나님의 비밀한 계획은 요셉 자신도 몰랐고, 그 형들도 몰랐고, 그의 아비 야곱도 몰랐습니다. 그가 비로소 애굽에 총리가 되고 난 이후에 비로소 하나님의 섭리를 알게 되었습니다(창45:5).
다윗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도 그러했습니다. 다윗 자신도 몰랐고, 그 형들도 몰랐고, 그 아비 이새도 몰랐습니다.
아비의 양을 치는 목동이었으나 적은 일에 충성함을 보고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시고, 구원역사에 징검다리로 놓으신 것입니다(마1:1).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십시오, 그리하면 응답주시고 깜짝 놀랄 하나님의 사건들을 허락하십니다. /믿/
렘29:12-13절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 ▶기도하는 사람은 어떠한 일에도 소망이 있습니다.
▶1994년 3월 18일 새벽 6시! 천호동 제일교회 김인식 목사님이 새벽기도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중 길가 쓰레기차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는 것을 듣게 되었습니다. 걸음을 멈추고 가까이 가 보았더니 분명 신음소리와 울음소리였습니다. 자세히 살펴보니 쓰레기 봉지 안에서 들리는 소리였습니다. 미화원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함께 쓰레기봉지를 뜯어보니 그 안에 새파랗게 질린 피투성이의 신성아가 들어 있었습니다.
추위와 세균 감염 때문에 생명이 위급했습니다. 목사님은 교회로 안고 와서 난로를 피우고 물을 끓여 사모님과 함께 씻기고 응급조치를 취해 목숨을 건졌습니다. 그 누군가가 무책임하게 버린 생명이 기적적으로 살아난 것입니다. 그리고 이 아이의 이름을 '금봉지'라고 지었습니다. 쓰레기봉지에서 죽었어야 할 핏덩이가 금봉지가 된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나게 합니다. 핏덩어리를 내다버린 비정이나 타락한 윤리 이야기는 제쳐 두기로 합시다. 만일 그 때 그 핏덩어리가 본능적인 울음을 터뜨리지 않고 신음소리를 내지 않았더라면 그 생명은 죽음의 봉지 안에서 시체가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 소리, 그 울음소리, 그 신음소리가 그를 살게 해 준 것입니다. ▶성경은 소리내어 부르짖고 하나님을 찾으라고 명령합니다.
왜 우리가 절망가운데서도 소망이 있습니까? 구하고 주실 것을 믿고 기다리기 때문입니다. 요14:14절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구하고 기다립시다! 기다림은 인내입니다. 26절에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다"고 하셨습니다. 더 쉽게 말씀드리면 참고 기다리는 사람만이 소망을 이루게 된다는 말입니다. 살전1:3절에 '소망의 인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너무 조급한 것이 문제입니다. 무엇이든지 빨리 빨리 입니다. 음식점에 들어가도 앉자마자 빨리 달라고 재촉하기 일쑤입니다. 기독교는 기다리는 종교입니다. 구약 성도는 메시야를 수천 년 동안 기다렸습니다. 어리석은 유대인들은 지금도 오신 메시야를 몰라보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신약 성도는 재림하실 우리 주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꿈을 이루고 이상을 실현하려면 참고 기다려야 합니다. 초여름에 모내기를 하면 늦가을에 추수를 합니다. 농부는 그 때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도 기도하면서 은혜의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갈6:9절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우리 모두 믿음으로 하나님의 정하신 축복의 때를 기다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⑤회개하는 사람만이 소망이 있습니다(29).
"입을 티끌에 댈 지어다 혹시 소망이 있을 지로다." 입을 티끌에 대는 것은 유대인의 회개하는 방법입니다. 그들은 회개할 때 자신의 옷을 찢고 재나 티끌을 뒤집어씁니다. 그리고 재나 티끌에 꿇어앉자 애통해 합니다.
▶옷을 찢는 것은 마음을 찢는다는 상징이며, 재나 티끌을 뒤집어쓰는 것은 자신을 재나 티끌만도 못한 존재로 비하시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티끌이나 땅에 입을 대는 것은 한없이 자신을 낮추고 천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중요한 것은 입을 티끌에 대는 사람에게 소망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 뜻은 자신을 낮추고 회개하는 사람이라야 소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진정으로 회개하는 심령 위에 은혜를 주시고 권능을 주시고 축복을 주십니다. 회개는 복을 받는 그릇을 준비하는 것이요, 회개는 자신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할/
영국의 철학자 '존 로크'는 <회개란 과거의 잘못을 슬퍼하는 것이고, 그 다음에 하나님의 법을 따르기로 한 결심이며, 회개에 맞는 행동을 하는 것이고, 그리고 남은 일생을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며 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레미야는 눈물을 강처럼 흘리면서 회개하라고 외쳤습니다. 애2:18절 "저희 마음이 주를 향하여 부르짖기를 처녀 시온의 성곽아 너는 밤낮으로 눈물을 강처럼 흘릴 지어다." ▶눈물은 사람을 슬프게 합니다. 눈물은 사람을 감동시킵니다.
사38:5절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하나님은 히스기야의 눈물의 기도를 보셨습니다. 그의 눈물이 하나님의 마음을 감동시킨 것입니다. 여기서 눈물은 회개를 의미합니다. ▶'눈물은 왜 흘리는가?'에 따라서 의미가 달라집니다. 매 맞고 흘리는 눈물은 아픈 눈물입니다. 춥고 배고파 흘린 눈물은 처량한 눈물입니다. 억울하게 흘린 눈물은 한 맺힌 눈물이 되고 회개하고 흘리는 눈물은 보석보다 아름답고 고귀한 눈물이 됩니다. /믿어지면 아멘!/

 

⑥하나님의 본심을 이해하는 사람에게 소망이 있습니다(33).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심이 본심이 아니시로다." 여러분! 무엇이 하나님의 본성입니까? 하나님의 본성은 사랑이며 축복이며 은혜입니다. 그 본심을 바로 깨닫는 사람이라야 소망이 있습니다.
그런데 왜 이스라엘이 고통 속에서 살았으며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가 하나님의 징계 속에 살 때가 있습니까? ▶히12장에 보면 '왜 때리고 징계하시는가?'를 밝히고 있습니다. 히12:6절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여기서 보면, 사랑하시기 때문에 징계하신다고 했고, 아들이기 때문에 징계하신다고 했습니다.
또 8절을 보면 징계가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11절을 보면 징계 후에 의의 평강한 열매는 맺게 된다는 것입니다.
▶왜 이스라엘은 그토록 연단 하셨고 훈련하셨습니까? 선택한 자식이기 때문입니다. 남의 자식이라면 왜 관심을 갖습니까? 부모가 자식을 때리는 것은 잘되라고 때리는 사랑의 매입니다. 하나님의 본심을 바로 알고 믿읍시다. 하나님의 본심은 인생들이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본심은 우리의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고 강건한 축복을 받아 누리며 살기를 원하십니다.
●저는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지금은 포르투갈의 수도가 되어 있습니다마는 한때 스페인령에 속해 있던 리스본이라는 항구도시의 해안이 끝나는 곳에 큰 바위 하나가 있었는데 이 바위에 이런 말이 새겨져 있었다고 합니다. <여기가 끝입니다. 이 너머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1492년에 한 사나이가 이 항구에서 도착하자마자 이렇게 외쳤습니다. "이 바위에 새겨진 글은 사실이 아닙니다. 여기가 끝이 아닙니다. 이 너머에는 위대한 희망의 세계가 있습니다." 이 사나이가 바로 누구인줄 아십니까? 그가 바로 유명한 탐험가 '콜롬부스'입니다. 이런 믿음 때문에 그는 마침내 그 광활하고 위대한 아메리카 신대륙을 발견할 수가 있었습니다. 이것은 우리 신앙생활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절망을 만나면 모든 것이 끝인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그 절망 뒤편에 살아 계신 하나님이 계심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본문에 이스라엘은 절대 절망 가운데 있었습니다. 민족의 절망이 개인적인 절망보다 더 어둡습니다. 그런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예레미야는 <오히려 우리에게 소망이 있다>고 외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절대 절망, 절대 위기가 절대 소망으로 가는 지름길입니다. /믿/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신 하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고 주실 것을 믿고 기다리기 때문에 소망이 있습니다. ▶우리가 바르게 살지 못하고 지키지 못한 신앙생활을 회개해야 소망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본심을 잘 이해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야 소망이 있습니다. /아멘! 할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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