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질을 붙드는 곳에 길이 있습니다 엡1:23
제자 만드는 것은 목회의 본질입니다.
본질을 붙드는 곳에 길이 있습니다.
이게 시시한 이야기 같아도,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많은 목회자들이 평생 애를 쓰면서 목회를 하는데
제가 보는 (개인적) 판단 이에요.
그분들이 다 잘못했다는 거 아니고요.
목회의 본질을 제대로 붙들었더라면
지금보다 더 훨씬 영향력있는 지도자로서 많은 사람들에게 은혜를 끼쳤을 텐데
목회의 본질을 잘못 파악해 가지고 30년 40년을
'그냥 그렇게 보냈구나' 하는 생각을 가끔 할 때가 많아요.
그만큼 본질이 중요합니다.
본질을 붙들면 길이 열리게 되어 있어요.
길이 열리는 곳에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요즘 같이 까다로운 세상에, 정신 바짝 차려야죠.
정신 바짝 차리고 주님 앞에 설 때 부끄러움이 없도록
우리가 사역을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오늘 낮시간(1강)에, 제가 왜 제자훈련에 눈 뜨게 되었으며
그 제자훈련을 통해서 제가 어떤 은혜를 받았는가 하는 것을
뭐 대충 대충 이야기를 해 드렸습니다.
그래서 제가 제자훈련을 하면서 발견한 것은
'평신도의 놀라운 잠재력' 이었습니다.
나는 목사만 대단한 줄 알았지요.
그리고 주님의 나라와 영광을 위해서 일할 사람은
다 신학교를 거쳐야 되고,
그래도 어느 정도 신학적인 베이스를 닦아야 된다고 (과거에) 생각했는데
제가 제자훈련에 눈을 뜨고, 제자훈련을 통해서 수많은 평신도를 대하면서
제 자신의 생각이 바뀌었어요.
'평신도가 얼마나 대단하냐?
근데 이 멍청한 목회자들이 이 평신도의 잠재력을 전부 다 사장시켜 놓고
자기 혼자 뛰는 교회를 만들어 놓으니..
교회 수는 많아도, 사회에서 제대로 교회 역할을 못 한다..' 그 말이에요.
▲저는 참 많은 평신도들을 봤는데요.
뭐 사랑의교회는 말할 것도 없고요,
제가 (유학가기 전) 처음에 가르치던 제자들 가운데서도
지금까지 35년 이상 저와 교제를 나누면서 *대학부를 맡아서 할 때
서로가 힘이 되고 위로가 되는 사람들이
다 그때 제자훈련 받고, 제자훈련을 통해서 내가 변한 것 처럼
자기들도 변하고...
그래서 인생의 목적이 달라진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많아요.
예를 들면, 이랜드의 박성수 회장 같은 사람은
해마다 스승의 날이 되면 꽃다발 들고, 선물 들고 찾아옵니다.
선물은 별거 아니지만요.
제가 미국에 가서 좀 있을 때도, 박회장이 마침 미국의 있을 때
스승의 날이 되니까 미국에서도 저를 찾아왔어요.
찾아올 때마다 카드 한 장을 써 가지고 오는데
그 카드의 내용은 그냥 5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아요. 이런 카드입니다.
'목사님, 만남의 중요성이 얼마나 중요한지요.
제가 목사님을 만났다는 것은, 제 인생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였습니다.
목사님이 계시지 않았더라면, 오늘의 저는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사실 대학생들을 지도할 때에 *사랑의교회 개척 전
박성수 라는 인물이 앞으로 어떤 일을 할지 전혀 몰랐지요.
그저 저는 한 영혼, 한 영혼을 아끼면서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정말로 멋진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도록 하느라고
뭐 아주 조금 수고해준 것뿐인데...
제가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면서 대학생들에게 카드를 받았어요.
'너희들의 소망이 뭔지 카드에다 좀 써 내라.
그러면 내가 그거 들고 미국에 가서도 기도해 주마'
그래 가지고 그 카드에 자기 명함판 사진 딱 붙여가지고
카드에 자기 소망을 써 냈어요.
대학부 1, 2, 3, 4학년 중에서 저학년 중에는 별로 써낸 사람이 없고요.
그래서 한 200장 정도의 카드가 나왔는데요.
그걸 제가 책으로 딱 엮어 가지고 미국에까지 들고 갔어요.
그리고는 그걸 넘겨가면서 기도할 때도 있었고
그 사람을 참 그리워 할 때도 있었는데요.
그때 박성수 회장(당시 대학생)은 뭐라고 썼는가 하면
'저는 비즈니스를 해서 세계복음화에 기억하고 싶습니다!' 딱 그랬어요.
하나님이 그렇게 사용하시도록 작정을 하셨나 봐요.
그런데 오늘 날 보세요. 한국 40대 기업 가운데 하나로 들어갔잖아요.
조그만한 옷 가게를 시작하면서도 주님 앞에 기도하고
그리고 그 사람의 철학이 뭡니까? 정직 아닙니까.
'정직하게 기업하는 것은 어렵다. 정직해서 치러는 대가는 비싸다.
그렇지만 그것은 지불할 만하다.' 그 사람의 철학입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35년 동안 자기 회사에 중요한 멤버들을
자기가 제자훈련 다 시키고 있습니다. 지금도 시키고 있습니다.
이런 인물들이 제 주변에 적지 않습니다. *나를 키워준 세 사람
▲그리고 제자훈련을 통해서 변화받은 목회자들 가운데는
정말로 제가 감탄할 만한 후배들이 너무 많고요.
제가 한 3~4년 전에 일본에 갔어요.
일본에 100년 된 교회가 하나 있어요. 요도바시 교회 라고 있는데
그 교회에서 일본 목회자들 한 500명 앞에서 제가 강의를 한 일이 있습니다.
제가 매년 일본에 한 번씩 가거든요. 근데 강의를 하다 보니까
우리 교회 장로님 한 분이 앉아계시는 거예요.
대한항공 동경 부지사장이에요.
그 분이 저한테 제자훈련 받고, 사역훈련 받고,
저와 함께 다락방 순장으로 교회를 열심히 섬기다가
이제 동경으로 전근 온 사람이죠. 굉장한 사람이에요.
그래서 제가 강의 중에 '평신도가 얼마나 중요하냐?'는 취지로 말하다가
이런 말을 했어요. "여러분 이 자리에 우리 사랑의 교회 장로님 한 분이
와 계시는데, 이 사람은 목사 뺨치는 사람입니다."
제 옆에서 통역하는 분은 일본 목사입니다.
일본 목회자들 세미나를 할 때 저의 전담 통역자예요.
그 분이 '저 장로님이 목사 뺨치는 사람입니다'를 그대로 직역으로 통역했어요.
그러니까 일본 목사님들이 눈이 휘둥그래 가지고 저를 쳐다보고는
앞에 앉으신 장로님을 이렇게 번갈아 쳐다보는 거에요.
그래서 제가 '통역을 잘못 했구나'하고 금방 깨달았죠.
예배가 끝났습니다. 그랬더니 일본 목사님 여러 분이 우리 김장로님에게로
달려갔어요. 그리고 하는 말이 '장로님, 왜 옥목사님 뺨을 쳤습니까?'
그런 에피소드가 있어요.
저는 그 에피소드에 '목사 뺨친다'는 이야기, 절대 저는 과장해서 하는 게 아닙니다.
정말 과장해서 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나중에 우리가 다 주님 앞에 서면,
주님이, 목사 손을 들어 주지 않을 경우는
많이 있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정말 주님 앞에 헌신적으로 섬긴 평신도의 손은
많이 들어주실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그러므로 한국교회 사는 길은 간단해요. 평신도를 깨워야 돼요.
이 평신도를 묵혀 놓으면 안 돼요. 목회의 본질은 뭡니까?
평신도를 제자리에 앉히는 거예요.
목회의 본질은 무엇입니까? 평신도가 교회의 주체로서 하나님 앞에
평생 쓰임 받게 만들어 주는 거예요. 이것을 위해서 목사가 존재하는 거예요.
▲여러분 <교회론>을 다 읽어 보세요. 교회가 목사를 위해 존재하는 겁니까?
교회의 주체가 되는 평신도를 위해서 목사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거꾸로 됐잖아요.
그래서 평신도는 교회 안에서 주체가 아니라 객체처럼 행세하고
교회의 주인은 목사가 되어버렸어요.
누가 그렇게 가르쳤는지 몰라요.
칼빈주의가 만약 그렇게 가르쳤다면, 칼빈주의를 뜯어고쳐야 돼요.
장로교가 그렇게 가르쳤다면, 장로교회를 수정해야 돼요.
그러나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연구한 바에 의하면,
칼빈이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어요.
장로교회의 본질이 그런 거 아니에요.
한국 교회에 뭐가 잘못돼 버린 거예요.
목사님들이 영적 권위를 내세우다가 탈선해 버린 거예요.
그래 가지고 너무너무 탈선된 자리에서 목회를 하는 거예요.
평신도를 그렇게 놓고 목회하다니...
저는 그것이 죄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말이 있지요. 외과의사가 수술하다가 실수하면 한 사람 죽여요.
그러나 목사가 제대로 목회 못 하면, 평신도 수십명, 수백명, 수천명을 죽여요.
그러므로 함부로 목사되려고 생각하면 안 돼요. *신학교 집회 설교
뭔지도 모르고 신학교 와서 문 두드리고
뭔지도 모르고 목사 안수 받고 나가 가지고는...
그리고는 조금 좋은 소리 들으면, 뭐 자기가 대단한 것처럼 착각하고
오늘 날 일부 목회자들이 이렇게 병이 들어 가지고
평신도들을 그냥 묶어 놓고 있잖아요. *30년 전 사정
신학생 여러분이, 누구 목회를 보느냐가 참 중요하고
어디서 (목회를) 배우느냐가 정말 중요합니다.
성경을 똑똑하게 보세요. 목회의 본질이 어디 있는가요?
우리 세대는 이런 식으로 넘어가더라도
여러분의 세대만은 제발 전철을 밟지 말라고
저 자신이 말하고 싶은 거예요.
평신도가 얼마나 무서운 존재인지 여러분이 알아야 돼요.
그들을 묶어놓고 있으니까, 굽신굽신하고 그냥 목사 앞에 그냥 순종하는 사람처럼 보이죠?
정말 평신도의 저력과 평신도의 잠재력을 제대로 발굴해서
제대로 제자리에서 뛰게 한번 만들어 보세요.
얼마나 놀라운 일이 많이 일어나는가...
그 일을 위해서 하나님이 목사를 불러서 교회에 맡겼잖아요.
그 이야기를 이번 집회에 다 할 거예요.
이런 간증식으로 얘기하자면, 한 학기 그냥 통째로 나한테 맡겨도
계속 집회할 수도 있어요. (할 말이 많지요)
이렇게 제자훈련을 통해서 평신도의 참 놀라운 면을 발견하고
저 자신이 엄청난 감동을 받고 합니다.
▲저는요, 설교는 항상 무거운 십자가 예요. 평생 그랬어요.
설교하면서 재미본 일이 없어요.
'재미본 일이 없다'는 말은, 제 자신이 설교자로서
'설교를 즐긴다'.. 이런 것이 실제로 무엇인지 나는 별로 체험을 못 했어요.
왜냐하면 설교가 그렇게 힘들고 무서워요.
그런데 제가 정말 행복해 하는 자리가 어디냐 하면, 제자훈련 하는 자리에요.
제가 15년 전에 병이 나고 나서는
교회 사이즈도 이제는 만 명을 넘어가는 사이즈니까
제가 제자훈련도 못하고, 사역훈련도 못하고, 전부 부교역자들에게 다 넘겼잖아요.
그러니까 제 목회의 노른자위를 다 내어준 거예요.
부교역자를 이제 제가 책임지고 지도하고,
그다음에 평신도 지도자들을 제가 책임지고 지도하지만
소그룹에서 제자훈련, 사역훈련 하는 자리에는
이제 옆에 가 보지도 못 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어요.
제 자신이 얼마나 불행해 졌는지 몰라요.
사역훈련은 우리 교회당에서 할 때가 많아요.
교회 조그만한 방에서 모여서 교역자들이 인도하죠.
한 번은 제가 너무 마음이 안타까워서
제자훈련 하고 있는 방으로 가 가지고
닫혀 있는 문틈으로 귀를 기울이고, 제가 한참 문밖에 서 있었을 때가 있어요.
'안에서 무슨 이야기를 하나?' 들어보니까
서로 소근소근 이야기도 하고, 어떤 때는 깔깔거리고 웃기도 하고...
아무도 주변에 없었기에 다행이지.. 누가 봤으면 저를 이상하게 봤을 거예요.
제 목회의 행복은 거기에 있어요.
한 영혼, 한 영혼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 안에서 변화되고, 그 안에서 감격하고, 자신을 주님께 헌신하기를 원하는
그런 아름다운 모습들을 하나 하나 지켜보는 그 자리,
그 자리가 행복해서..
그런 자리에서 은혜 받고 나도 눈물 흘리고 감사하고
그래서 함께 은혜의 보좌 앞으로 손 잡고 나가는 그 시간이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어요. 나는 그 행복 가지고 목회했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이상하게 대형교회를 만들어주셔서 사람 골병 들게 만들었잖아요.
나는 이런 교회 꿈도 안 꾼 사람입니다.
▲이렇게 제자훈련에 재미를 붙였는데
제가 대학생들을 제자훈련을 할 때였습니다.
제게 질문이 있었어요.
'제자훈련 이라는 게, 정말 신학적으로 확실한 근거를 갖고 있는 것이냐?'
하는 문제에 부딪혔어요.
'내가 선교단체에서 하는 것을 빌려가지고 모방하는 것으로도 만족할 수 없지!
내가 진정 교회의 지도자가 되려면, 신학적인 베이스가 닦여야지..
제자훈련의 성경적, 신학적 뿌리가 분명해야지..'
남의 거 빌려 와 가지고 카피 하다가
그것 때문에 뭐 흥분해서 좋아하다가 끝낼 목회를 해서는 안 되지요.
'정말 제자훈련이 신학적으로 개런티(보증)를 받을 수 있는 것이냐?'
이것을 내가 좀 연구하고 싶었어요.
일반 선교단체는 그럴 필요가 없지요.
그러나 나는 교회의 목사니까..
'이건 과연 내 목숨을 걸어도 될 만큼, 신학적으로 분명한 근거가 있느냐?'
하는 것을 제가 확인하고 싶어요.
그리고 또 하나 문제가 있었어요.
'대학생들을 상대로 해가지고는 제자훈련이 너무 아름답게 잘 되는 걸
내가 이제 체험했는데,
일반 목회에서도 이것을 적용할 수 있을까?'
50명이 모여도 남녀노소 빈부귀천이 다 모여 있는 일반 목회에서
과연 이 제자 훈련이 대학생들을 상대로 하는 것처럼
분명한 능력을 갖고, 열매를 맺을 수 있을 것이냐?'
여기에 대해서 숙제였어요. 안 해 봤으니까요.
그리고 그 당시만 해도, 내 주변에 그런 것을 증명할만한 목회현장이 없었어요.
그래서 작심하고 제가 유학을 결심했습니다. 1975년도 제가 유학을 떠났는데요.
그 당시만해도 유학가는게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어요.
국가고시를 쳐야했고요, 국가고시에 여덟 과목을 다 합격하려면 쉽지 않아요.
'제2의 고시다' 하는 말이 들릴 정도로 골치 아팠어요.
그리고 또 장학금을 받아야 가지, 아무 것도 없이 내가 뭐 어떻게 유학갑니까?
그래서 하나님 앞에 제가 대학생들 목회에 시달리는 바쁜 시간에도 *1970년대초반
제가 하나님 앞에 주사위를 던졌어요.
'하나님, 제가 이 교회에 한 5년 있었으니까 됐잖아요.
제가 미국에 유학가서 제자훈련에 대한 신학적인 이론을 연구하고 싶은데
유학 좀 보내 주세요!'
'유학 자격시험에 단번에 합격하게 해 주시고,
장학금도 하나님이 해결해 주시면.. 제가 유학갑니다.
식구는 안 데리고 가겠습니다.' 라고 기도드렸죠.
식구까지 먹여 살릴 만큼 장학금 주는 신학교는 없었으니까요.
그냥 식구는 고생을 하더라도 한국에 떼 놓고
'제가 공부할 수 있을 만큼만 주시면 제가 유학 가겠습니다.'
그랬는데 참 하나님이 그런 기도도 들어 주시데요.
그래가지고 유학자격시험도 한 번에 다 패스됐고
그 다음에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는 장학금을 절반을 주겠다 그랬고,
왜냐하면 풀 장학금을 준 사례가 없대요. 재정이 약해서.
그런데 캘빈 신학교에서는 풀로 주겠대요.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래가지고 제가 캘빈 신학교로 건너갔습니다.
그래 가지고 제 관심은 학위도 아니요,
제 관심은 뭐 공부를 깊이 파고드는 것도 아니고
내가 공부하는 목적은
'내가 앞으로 제자훈련을 하려고 할 때
신학적으로 이것은 흔들림이 없도록, 확실한 베이스가 되어서
내 평생 좌우로 두리번거리지 않고
한 평생 내 짧은 인생, 한 번 하고마는 목회, 한 번의 젊음을,
내가 송두리째 바칠 수 있도록
정확하게 내가 (제자훈련을) 좀 배우고 오겠다, 연구하고 오겠다..'
이게 저의 유학 목적이었어요.
▲그래서 켈빈신학교로 왔습니다. 가서 연구를 하면서 보니까
결국은 '왜 제자훈련을 해야 되느냐, 왜 평신도가 중요하냐?
왜 주님께서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고 할 때
모든 목사를 제자 삼으라고 하지 않고
그 모든 민족이란 말 속에는
모든 믿는 자가 다 포함된, 전 공동체를
주님께서 거론하시면서 제자를 만들려고 하셨느냐?'
결국 그렇게 따지고 공부를 하면서 보니까
어디에 귀결되느냐 하면, <교회론>에 귀결되더라고요.
결국 제자훈련의 신학적 기초는 <교회론>이더라고요.
결국 성령께서 제 마음에 이런 음성을 주시더라고요.
'옥목사, 너는 교회를 뭐라고 생각하니?
네가 보는 교회는 어떤 교회냐?'
대답이 금방 나올 것 같아도, 금방 나오지 않는 대답이에요.
아는 것 같은데 모르고 있는 거예요. 막연해요.
그래서 제가 <교회론>을 주목하게 되었고요.
나름대로 도서관에 앉아서 좀 씨름을 했고요.
그래서 캘빈신학교에서 씨름을 하다가
그 다음에 졸업하고 나서는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 가서도 씨름을 했는데요,
짧은 3년이었지만, 제가 <교회론>에 대해서 많은 것을 깨달았어요.
그래서 '제자훈련을 제대로 하려면
보이지 않는 뿌리가 든든하고 깊이 박혀야 된다...
뿌리가 박혀서 그 뿌리에서 난 제자훈련이라야
나무가 열매를 풍성하게 맺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
아~ 이렇게 확신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교회론을 주목 하다 보니
'내가 교회를 어떻게 보느냐?'가 목회 방향을 결정하는 것을 알았어요.
그렇잖아요, 여러분. 과거에 독재정권과 싸울 때
일부 교인들은, 교회를 사회정의를 구현하는 공동체로 봤잖아요.
심지어 극단적 일부 교인들은 남미의 해방신학을 본받아 가지고
이 세상 사람들을 가난과 독재로부터 해방시켜주는 것이
교회의 본질적인 사명이라고 가르쳤어요.
그 사람들은 교회를 그렇게 보니까
예배 드리고 나서 교인들 하고 나가서, 피켓 들고 데모 하러 나가는 거예요.
그렇게 보니까 목회를 그런 식으로 하는 거예요.
장로교회의 많은 목사님들은 교회를 어떻게 봅니까?
'영혼을 구원해서 천국 갈 때까지 양떼들을 돌보는' 걸로 교회를 교회를 봅니다.
켈빈의 교회론에 있어서, 어떻게 보면 강점이면서도 약점이 바로 여기에 있어요.
교인들을 돌보는 거예요.
경건하게 교회를 유지해서 세상속으로 빠져들어 가지 않도록
교회의 성도들을 지키는 '어머니'
그래서 캘빈은 교회를 '어머니'라고 했죠. (자녀를 지키는) 어머니 역할을 하는 거예요.
교회를 그렇게 보면, 목회도 그런 식으로 하는 거예요.
장로교 특히 보수주의 계통에는 그렇게 목회 했어요.
교인들이 교회에 들어오면, 어떻게 하든지 교회 울타리를 넘어서
세상으로 나가지 않도록 돌보아주고 그들을 위로해 주고
경건하게 살도록 하는 것이 목회의 전부인 줄 알았어요.
그러니까 장로교 목회자들을 가만히 보면
꼭 독일의 목사들하고 비슷하잖아요.
자기 교구 맡은 데서 그냥 50명이든 100명이든 잘 돌보고
그저 교회가 평안하고 성도들이 경건하게 살면
'내가 목회 잘 한다' 이런 식으로 생각했잖아요.
어떻게 보면 굉장히 소극적인 목회를 한 것이죠. 왜 그렇게 했느냐?
교회가 그런 곳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랬던 거죠.
▲저는요 어려서부터 특별히 경건을 많이 강조하는 청교도적인 정신이
너무 지나친 교단에서 저는 자랐어요. 그렇기 때문에 제가 어려서부터
귀가 아프도록 들은 교회의 이미지는 뭐냐면
'할 수 있으면 세상과 거리를 두라.
그게 경건이고 거룩이다'
'오직 주님만을 위해서 살려고 해라.
그리고 주님이 부르실 때, 주님 앞에 떳떳하게 설 수 있도록 헌신하며 살아라'
그것뿐이에요. 교회 밖에 있는 세상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어요.
지상교회가 왜 세상에 있어야 되는지에 대한 목적도 가르쳐 주지 않았어요.
잃어버린 영혼에 대한 애착도 별로 없었어요.
그저 교회 안에서 우리만 경건하면 되는 거에요.
그리고 천국에서 비행기가 올 때까지, 믿음이라는 여권들고 기다리면 되는 거예요.
나는 이런 식의 분위기에서 살았어요.
그러니까 주일성수 같은 것을 엄청나게 강요하고
그것이 그냥 나중에는 율법이 되어 가지고 사람을 죽이려고 달려들었죠.
그리고 주일 날 이발을 했는데,
이발하다 보니까 11시에 교회 종을 치길래
'이발 반 쯤 하다가 중단하고 왔습니다' 하는 사람은 영웅이 되더라고요.
나는 이런 분위기에서 자랐던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교회를 어떻게 보느냐? 이게 굉장히 중요한 거예요.
요즘에 많은 목회자들은, 교회를 예배당으로만 보는 거예요.
교회가 뭐냐? 예배 드리는 곳이다.
그래서 예배에다 모든 강조를 다 두는 거예요.
열린예배든 뭐든 모든 관심사가 예배에 가 있어요.
그 사람은 그런 목표를 가지는 이유가 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들이 와서 예배 드리는 것이
교회의 전부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게 목회하는 거에요.
그러니까 내가 교회를 어떻게 보느냐?
거기에 따라서 나의 목회 방향이 결정되는 거예요.
목회 방향이 결정되면서, 나는 목회 신념을 갖고 돼요.
그래서 이 목회 신념을, '목회 철학'이라고도 하죠.
▲그러면 누가 제게 묻기를 '당신은 교회를 어떻게 봅니까?' 하면
저는 지상 교회를 이렇게 정리합니다.
'세상으로부터 부름받은 하나님의 백성인 동시에
세상으로 보냄받은 그리스도의 제자의 공동체!' 저는 그렇게 봅니다.
세상으로부터 부름받은 특권이 있어요. 그러나 그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에요.
지상 교회는 세상으로 보냄받은 소명이 있어요.
이 두 가지가 밸런스를 맞추어, 교회가 제 구실을 할 때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신다고 하는 게.. 제 교회관이에요.
그러니까 '세상으로부터 부름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특권만 강조하는 교회는
예배가 전부예요. 거룩이 전부예요.
거룩하게 살고, 교회에 출석 잘 하고, 교회에서 봉사하면
그것으로 훌륭한 크리스찬으로 인정받을 수 있어요.
그러나 저는 거기에서 절대 만족할 수 없는 거예요. 왜냐면
하나님이 왜 지상에 교회를 남겨놓으셨느냐,
왜 교회를 세우시고, 하나님께서 이 어려운 세상에서
하나님은 교회를 계속 계속 번성하게 하시느냐?
그 이유는, 세상에서 부름받은 특권을 가진 사람들이
세상으로 다시 보냄을 받아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펼쳐나가라!
그것이 하나님께서 지상에 교회를 세우신 목적이거든요.
▲그러니까 저는 '와서 예배 드리는 것' 가지고 만족할 수 없어요.
이 사람들이 예배를 드리고 흩어지고 시작하면
이제는 세상으로 보냄받은 그리스도의 제자로 소명자가 되는데
세상으로 흩어지는 이 사람들을, 맨손으로 가게 만들어 되겠어요?
총도 쏠 줄 모르고, 활도 쏠 줄 모르고
그냥 맨손으로 가가지고 영적전쟁을 하라고 하면 할 수 있겠어요? 못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사람들이 예배드리고 나면, 세상으로 흩어져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쓰임 받아야 되겠는데
그렇다면 이들을 무장 시켜야 돼죠. 어떻게요?
예수님이 명령하신 대로 제자 만드는거죠.
제자 만들려면 입만 가지고 제자 만들어지나요?
프로그램 하나 가지고 되는 거예요?
성경공부 몇 권 가지고 되는 거예요? 한번 해봐요, 되는가?
3개월 코스 마치고 나서, 요란하게 가운 입혀 준다고 해결되는 문제인지
한번 해 보라고요.
그런데 오늘 날 대부분의 목회자들이 그런 식으로 생각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교회를 그런 식으로 보고, 그런 식으로 목회하니까
교회가 힘이 없죠. 많이 모이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는 거예요.
어떤 사람이 모이느냐가 중요하지,
얼마나 모이느냐.. 그것은 많이 모일 수도 있고, 적을 수도 있는 거예요.
성경의 숫자 가지고 이야기하는 성경구절 있으면, 제게 보여 주세요.
▲자 이런 문제를 이제 저 자신이 갖고 씨름하면서 정리하다가 보니까
자연히 이제 교회에 대해서 주목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교회론>은 기독교 역사를 통해서 보면
약간 좀 오랫동안 주목을 받지 못한.. 어떻게 보면 약간 천대받은 신학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벌써 여러분 4~5세기에
한참 이단이 벌집 쑤시듯이 일어날 때
그 이단에 대처하기 위해서 우리 위대한 믿음의 선배들이
<기독론>이라든지, <삼위일체론>에 대해서 주목을 했지요.
그래서 그때 정해진 <기독론>, <삼위일체론>은
오늘날까지 그대로 계승해서 믿고 있습니다.
15~16세기에 로마교회가 부패했을 때
종교개혁자들이 일어나서 그들이 주목한 것이 뭡니까?
<구원론, 구속론> 이예요.
그래서 그 위대한 종교개혁자들의 황금 같은 유산을 우리가 받았지요.
그런데 20세기가 될 때까지 '교회가 뭐냐?' 하는 문제를 놓고
씨름을 한 흔적이 별로 없어요.
당연한 걸로 받아 들여 가지고
그냥 교회가 국교가 되고, 그 다음에 교회가 점점 덩치가 커지면서 조직화 되니까
그 자체를 그냥 자연스럽게 받아들여 가지고
나중에는 로마 가톨릭과 같은 잘못된 교회론이
긴 역사 동안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불행한 일을 우리가 겪는 것을 보았죠.
그러니까 '교회가 무엇이냐?'를 진지하게 검토한 때가 별로 없었는데
20세기에 들어와 가지고 공산주의가 세계를 장악하는 아주 위험스러운 상황이
발생했고, 히틀러와 같은 미친 개가 엄청난 비극을 일으키는 이런 힘든 상황이
20세기에 들어와서 시작되니까, 세계교회의 지도자들이 모여서
에큐메니칼 운동을 일으켰어요. 그게 후에 WCC를 만든 전신입니다.
WCC 초장기의 그 취지에 저는 공감해요.
존 스토트 같은 위대한 신학자들이 전부 조인해 가지고
WCC를 창립 하는데 기여했잖아요. 신학적인 베이스를 닦는데 기여했어요.
그래서 '교회가 하나로 뭉쳐야 20세기에 교회가 살 수 있다.
교회가 하나가 되어야 20세기의 어려운 시기에
공산주의도 이기고 나치도 이기고 세속주의도 극복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세울 수 있다'는 절박감을 가지고
교회가 뭉치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자연이 뭉치다 보니까 주목하게 된 것이 <교회론>이에요.
그래서 1948년 WCC 대회 때 조지스 플로로브스키 라는 분이 기조연설을 하면서
유명한 예언을 하나 있습니다. '20세기는 교회론의 시대가 될 것입니다.'
그 예언이 적중했어요.
20세기에 들어와 가지고 교회가 뭐냐 라는 주제로
씨름하는 학자들이 많이 생기고
거기에 대해 그분들이 쓴 책과 논문들이 쏟아져 나오고
그래서 교회에 대한 값진 연구논문들이 쏟아져 나왔어요.
그래서 사람들이 비로소 '교회가 뭐냐?'를 주시하기 시작한 거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에) 한국은, 참 모든 면에서 느리고 닫혀 있었어요.
그래서 제가 개쳑하던 1978년도 만 해도
<교회론>에 대해서 책을 찾아보면, 별로 없던 시대였어요.
시중에 나가서 둘러보면, <교회론>은 그냥 조직신학 속에 들어있는
한 파트를 찾아서 읽는 정도 뿐이었죠.
<교회론>을 전문적으로 다룬 책들이 거의 없었죠.
그 당시에는 그만큼 황무지 였어요. 그만큼 관심이 없었어요.
그러나 한 10년 전부터는 <교회론>에 대해서 관심이 많아져서
<교회론>에 대해서 쓴 책들이 여러 권 나왔죠. 우리나라에도.
대표적인 것이 신복윤 교수의 <칼빈의 교회론>,
또 주목할 만한 책은 이종성 박사의 <교회론> 상하권이 나왔죠.
그리고 한스 큉의 <교회론 매뉴얼> 요약집이죠.
한참 나온 지가 오래 됐는데, 구석에 처박혀 있다가
사람들에게 발견이 안 됐어요. 일부에서만 그것을 사용했죠.
그 교회론도 대단한 교회론이죠.
요즘에는 그런대로 영어로 된 것이든, 한국말로된 것이든
나름대로 '교회가 무엇인가?'라는 주제로 씨름을 하기 위해서
나름대로 자료를 찾는 사람들에게는 길이 열린 시대가 되었어요.
그러나 지금부터 20년 전만 해도 그건 어려운 일이었어요.
지금만큼 '교회가 뭐냐?' 를 놓고 씨름하는 일이 별로 없었다는 얘기죠.
▲제가 부탁드립니다. 여러분은 그런 식으로 신학을 하고
그런 식으로 목회현장으로 달려가지 마세요.
평생 교회 안에서 살아야 되고, 교회를 위해 헌신해야 될 사람이
'교회가 뭐냐?'에 대한 확고한 철학도 없이, 목회하는 그런 사람 되지 마세요.
'나는 교회를 뭐라고 보느냐?'
구약에서 카할 이라는 단어가 헬라어에 에클레시아 라는 단어로 바뀌었죠.
그래서 에클레시아 라는 단어가 신약성경에 만해도
114번 이상 사용이 됩니다.
그 가운데서 60~70% 는 바울서신 에서 나오는 단어입니다.
에클레시아가 굉장히 중요한 거에요.
에클레시아 가 뭐냐?
물론 천상의 교회 와 지상의 교회를 다 망라하는 말입니다.
가견적 교회와 불가견적 교회를 다 망라하는 교회입니다.
그러나 제가 관심을 갖는 것은, 천상의 교회가 아니에요. 지상의 교회입니다.
하나님이 지상에 세우시고 지상에 남겨 놓으신 교회가 뭐냐?
저는 이게 더 관심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상의 교회는,
하나님의 포괄적인 통치를 가리키는 '하나님 나라'는 아니에요.
그러나 그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어 가는 과정에서 보여지는
현실적이고 세상적인 표현이에요.
마치 하나님의 나라가 만삭되어가는 모습이 '지상교회'입니다.
그러므로 지상 교회는 완전하지 못 해요.
알곡과 가라지가 섞여있어요.
마귀가 얼마든지 시험할 수 있고, 활동할 수 있는 장이 되어 있어요.
구원받은 자와 미처 구원받지 못한 자들이 함께 신앙 생활을 하는 공동체가
지상교회 입니다.
그리고 이 지상교회는, 말세를 알리는 싸인입니다.
주님이 이 세상을 심판하실 마지막 날
하나님 나라가 온 땅에 충만하고, 온 세계가 교회로 충만해지는 그 마지막 때를
향해서 걸어 가는 과정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한 모습이 교회예요.
에클레시아 입니다.
중략
(50분30초~)
▲저는 개척을 시작하면서 하나님이 특별한 은혜를 제게 주셨어요.
그게 뭐냐면 '다른 분과 비교하지 않는 은혜'였어요.
비교에는 아주 둔감한 사람으로 저를 만들어 주셨어요.
제가 비교적 늦게 개척을 시작했는데
제 주변에서 소망교회가 불티나게 일어나고 있었죠.
광림교회도 강북에서 내려와 가지고, 큰 교회당 짓고서 지금 막 영차영차 하지요.
저기 구반포에는 홍정길 목사님이 남서울교회 지어놓고
벌써 뭐 수백명이 모인다고 야단이죠.
그다음에 충현교회도 (시내에서) 강남으로 내려온다고 야단이죠.
이거 뭐 중간에 앉아가지고 완전히 샌드위치가 될 신세였어요.
근데 저는 뭐 조그만한 상가에서 몇 십 명 놓고 씨름을 하는데
그것도 다른 교회처럼 한 번씩 유명한 강사를 불러서 집회를 하는 것도 아니고..
그래도 천국갔다왔다, 지옥갔다왔다 하는 사람 데리고 와서 집회를 하면
교회 홍보도 되고,
그 당시에는 교회들이 그렇게 했어요.
어떤 교회 목사는, 축도할 때도 방언으로 축도 한다 그러고...
뭐 그러면 굉장히 그런 축도 받으면, 교인들도 상당히 뭐 굉장히 복을 받는 것처럼 착각하게 만들고...
저는 그런 것 일절 안 하고, 상가 교회에서
오직 제자훈련 하겠다고 눈에 불을 켜고 목회했어요.
그런데 주변에 있는 큰 교회들, 잘 되는 교회들 하고 나하고 비교하는 마음이 없었어요.
'왜냐면 하나님이 내 분수에 맞게 교회를 맡기실 것이고
내 분수에 맞게 최선을 다 하면 되는 거야...'
'하나님이 나로 하여금 한 영혼, 한 영혼을 그리스도의 제자로 만들라고 명령
하셨으니까, 그 일을 하다가 내가 죽어도 되고,
그 몇 사람 때문에 내가 희생당해도 된다. 이게 목자의 심정이다.'
그러고 보니까 숫자를 가지고 씨름할 필요가 없었어요.
▲여러분, 꼭 믿으세요. 하나님의 교회는 지역 교회입니다.
내가 섬기는 교회 입니다.
이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교회입니다.
이 지역교회 하나가 완전한 교회입니다.
이 지역교회 하나가 하나님의 나라 전체의 모든 교회를 대표합니다.
얼마나 당당합니까. 얼마든지 당당해도 돼요.
이런 확신이 분명히 있는 사람은, 한 영혼 붙들고 생명 겁니다.
이런 확신이 없는 물량주의에 빠진 목사,
자기 야심에 이끌려 가지고 목회를 하려고 하는 목사는
한두 사람이 눈에 들어오겠어요?
그러니까 나중에 교회가 잘못 되는 거예요.
제가 3~4년 전에 광나루 장로교신학교에 가서 집회했습니다.
사흘동안 낮밤을 6시간을 설교했어요.
거기에 드나들면서 지나가면서 흘려듣는 말로 한 마디 들었어요.
'이 학교에 한때 기숙사 안에 재밌는 학생 하나가 있었습니다.'
'무슨 학생인데요?'
'기숙사 그 학생 방의 책상 앞에는, 큰 글씨로 이렇게 붙어있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에게 만명의 교회를 주시옵소서!>'
그래서 기숙사 교목이 물었답니다. '왜 만명 교회를 목회하려고 하나?'
'하나님께 인정을 받으려면, 적어도 만 명은 모이는 교회가 돼야죠!' 그러더래요.
참 한심한 이야기죠.
교회가 뭔지를 모르니까, 그따위 기도를 하는 거에요.
하나님께서 발로 차 버리지 않으시면 다행이지요.
그런데 목사님들이 배출되어 나오는데, 교회가 분명히 뭐냐를 제대로 모르면
겉으로는 예수 이름으로 포장하고, 겉으로는 거룩이라고 포장을 하고
하나님 나라로 포장하고, 세계복음화 라는 말로 포장을 하지만
속에는 전부 자기 야심이 들어 있어요.
그러니까 교회가 조금만 커지면 배 내밀고 목에 힘주고 돌아다니면서
해서는 안 될 짓도록 함부로 하지요.
교회를 잘못 보는 거예요.
▲이렇게 내가 섬기는 작은 지역공동체가
'하나님의 교회, 완전한 교회' 라는 것을 확신하는 사람은
평신도의 중요성에 눈을 뜨게 됩니다.
만약 50명이 모이는 교회라고 합시다.
담임목사는 하나뿐이고, 나머지 평신도는 50명 이에요.
그러면 그 교회 지체의 숫자로 놓고 봐도
하나가 중요합니까, 50명이 중요합니까? 50명이 중요하지요.
그렇다면 여러분은 속으로 '목사가 똑같은 지체라고 똑같나?
목사는 심장 정도인데.. 심장 멎으면 다 끝나는 거지'
그러면 심장만 중요합니까? 몸의 지체 중에 덜 중요한 지체가 있나요? (없죠)
그러니까 하나님의 교회를 볼 때, 한 영혼, 한 영혼이 모여가지고
생명의 공동체를 이루는데
'그 한 영혼, 한 영혼이 교회구나'
'주님이 이 한 영혼, 한 영혼을 위해서 죽으셨구나..
주님께서 이 영혼을 위해서 나를 목사로 세워서 이 교회를 맡기셨구나..'
이런 생각을 하게 되면, 평신도의 가치가 달라지는 거죠.
▲'평신도' 라는 말은 원래 헬라어 '라오스' 라는 말에서 나왔죠.
나중에는 '라이코스' 라는 말도 있습니다만
따지고보면 '라오스'는 하나님의 백성 전부를 뜻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나중에 교회가 4~5세기 때 국교가 되고,
시간이 지날수록 교회가 커지게 되니까
교회 안에서 세상 직업 버리고 전문적으로 일을 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게 됐죠.
그러니까 라오스(무리)에서 '평신도, 레이티 laity' 라는 이름을 만들었어요.
그리고 교회에서 전문적으로 일하는 사람은 클러지 clergy 성직자라고
그때 구분된 것이, 1500년이 넘어오면서 그 이름이 고정되어버린 것이에요.
그러니까 원래 교회는 그런 구분이 없었어요.
원래 평신도(라오스) 라는 말은 '하나님의 백성'이란 말이죠. *무리들
거기에는 목사도 다 포함이 되어 있던 말이었죠.
그렇게 놓고 볼 때, 우리가 이 평신도 한 사람 한 사람을 보는 눈이 달라져야 됩니다.
그럴 때에 교회의 본질을 발견할 수가 있어요.
제가 이리저리 검토하면서, 평신도가 이렇게 교회에 중요한 존재라고 한다면,
다시 말하면 평신도 자체가 교회인 거죠.
▲'평신도들이 어떤 면에서 좀 다른 것이 있는가?' 하는 것을
제가 좀 검토를 해 봤는데요. 제가 발견한 것은
1) 첫째로 평신도는 교역자와 신분 차이가 전혀 없다..는 것을 제가 확인했어요.
신분의 차이가 전혀 없어요.
그것을 어떻게 제가 확인 했느냐면
여러분 교회의 기본 개념 이라는 게 있습니다.
일반적으로는 교회의 기본 개념으로 3가지를 말합니다.
'기본 개념'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교회' 라는 말 대신에 사용할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3가지에요.
'택자의 모임' '성령의 전' '그리스도의 몸' 이 세 가지에요.
이게 교회의 기본 컨셉이에요.
그러니까 '교회' 라는 말을 쓰지 말고
'인천 주님의 몸' '대구 택자의 모임' '광주 그리스도의 몸'도 말이 되는 거예요.
교회는 뭐냐? 세상으로부터 부름받은 택자의 모임이다.
그래서 하나님 중심으로 그들은 모이는 특별한 회중이 되었습니다.
일정한 장소와 시간에 모여서, 주어진 목적을 위해서
신앙의 교제를 나누는 특별한 공동체입니다.
그리고 그 공동체 소속된 사람은
모두가 다 '택자의 모임' 안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게 기본 개념인데
여러분, 이렇게 이렇게 놓고 볼 때,
여기에서 교역자와 평신도의 차이가 있습니까?
'택자의 모임' 이든지 '택함을 받았다'는 데서
교역자와 평신도 차이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특별한 소명이 물론 있을 수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성도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은 똑같다는 얘기죠.
세상으로부터 하나님이 한 발 앞으로 나오도록 구별 하셨을 때
목사나 성도를 구별하지 않으셨어요.
그런 면에서 우리는 '택함 받았다'는 사실 앞에서는 모두가 평등합니다.
무슨 신분의 차이가 있습니까?
▲그런데 왜 많은 목회자들이, 이 사실을 겉으로는 인정하는체 하면서
속으로는 인정을 안 하느냐 그 말이에요.
왜 평신도들에게 은근히 열등감을 심어주면서
자기 자신의 영적 권위를 내세우려고 자꾸 애를 쓰느냐.. 그 말이에요.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것도 보세요.
주님은 머리입니다.
그 다음에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성도들은
주님의 몸을 이루는 공동체입니다.
머리와 몸, 그래서 유기적인 관계를 갖고 있잖아요.
머리의 명령에 따라서 온 몸이 움직입니다. 이게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50명이 모인 교회입니까?
머리는 주님입니다. 50명은 주님의 몸을 이루는 지체입니다.
그거와 대형교회 처럼 머리는 그리스도입니다.
그 몸을 이루는 지체가 몇만 명입니다.
그러면 몇만 명이 지체를 이루는 교회나
50명이 지체를 이루는 교회나,
주님의 몸을 이루는 것은 똑같지 않습니까? 맞아요. 똑같습니다.
그래서 주님과 몸의 수직적인 아름다운 영적 교제가 이루어지고
그다음에 성도들과 성도들 즉 사이에 아름다운 영적 교제, 생명의 교제가
이어지는 유기적인 공동체.. 이게 교회입니다.
그럼 봅시다. 머리는 주님이니까, 손을 대면 안 되고요.
몸을 놓고 이야기하자고요.
제가 10년 전에 감리교 목사님들 한 600명 모인 자리에서 강의를 했는데,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문제를 가지고 이야기를 하는 중이었어요.
제가 이런 질문을 했어요. '여러분,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의 지체입니다.
그러면 목사는 그 지체 중에 어느 지체에 해당한다고 생각합니까?'
그 때 한 분이 이렇게 대답을 했는데 '목사는 지체 중에서 <목>입니다!'
'머리' 바로 바로 밑에 있고, 머리와 몸을 연결해준다고,
그 분은 목사를 '목'과 같다고 말했습니다.
50% 는 맞고 50% 틀렸다고 해야죠.
목도 물론 지체의 한 부분이니까요.
그러나 목이 아닐 수도 있어요.
모든 지체는 기능 면에서 모두 다 평등합니다.
네가 없으면 내가 없고, 내가 없으면 너도 없는 관계입니다.
네가 병들면 내가 병들고,
네가 영광을 받으면 내가 같이 영광을 받고
네가 수치를 당하면 내가 같이 수치를 당하는 거죠.
이런 관계에서 교역자 평신도 사이에 차이가 없지요.
▲나는 몸 안에 있는 지극히 작은, 별 볼일 없는 지체가
정말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을 체험한 일이 있어요.
미국에서 공부를 하고 있을 때, 정말 신실한 부인이 제가 섬기는 교회 나왔어요.
저는 공부를 하고 있었지만, 예수 믿는 사람들이 몰려와 가지고
교회를 시작하자고 법썩을 떨어 가지고 주말에만 교회를 섬겼어요.
그 부인만 교회에 나왔고, 남편은 나오지 않았어요.
부인은 의사부인 이고요. 자기 아버지는 한국에 대법관 이었어요.
나중에 들으니까, 그 남편은 지독한 반기독교적 사람이었어요.
부인이 교회 가는 것은 핍박은 안 했어요.
부인은 '목사님, 우리 남편 전도 좀 해 주세요'
자기 남편이 완전히 신장이 둘 다 망가져 가지고
일주일에 세 번씩 투석을 한답니다. 그게 1970년대 중반인데
그 당시에 미국은 발전을 해 가지고
투석을 해야 되는 경우는, 식구가 누군가가 가서 훈련 조금 받고
라이센스 받으면은, 투석 기계를 집에다 사다 놓고
투석을 시킬 수 있도록 했어요.
'우리 남편이 투석할 때는 네 시간이 걸려요.
그때는 꼼짝 못 하고 앉아 있어야 되는데, 그때 목사님이 오셔서 전도 좀 해주세요!'
그래가지고 제가 찾아갔지요.
미국 땅집은, 지하실도 아주 넓습니다.
잘 꾸며진 지하실 옆에 투석기를 놓고 주사기를 꽂아 가지고 앉아있는데,
보니까 참 마음이 아프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앉아서 복음의 대해서 이제 진지하게 이야기를 시작했읍니다.
그랬는데 결국 실패했어요. 마지막에 가서 이런 이야기를 하더라구요.
'목사님, 저를 설득시키려고 하지 마세요.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면, 저 같은 사람에게 이런 병을 주실 리가 없어요.
저는 양심적으로 살았어요.
세상에 나보다 더 악한 사람들도 펄펄 뛰고 사는데
내가 왜 이런 병에 걸려야 되는가요? 나는 이런 하나님이 있다고 믿지 않습니다'
제가 거기서 크게 깨달은 게 있어요.
나는 콩팥이 그렇게 중요한 줄 몰랐어요.
소변 걸러내는 지체가 그렇게 중요한지 몰랐어요.
투석 안 하면, 금방 얼굴이 그냥 흙색이 돼 버리고요. 퉁퉁 부어 버려요.
투석을 해서 피를 말끔하게 하면, 제 살결이 돌아와요.
우리는 신장이 어디에 붙어 있는지도 잘 모르잖아요.
나는 옛날에 닭 잡을 때 콩팥을 구경했지만
사람 속에 콩팥이 어디에 붙어 있는지도 잘 몰라요.
그런데 그게 그렇게 중요하더라고요.
그런데 그 당시만해도, 투석기가 얼마나 큰가 하면
그랜드 피아노 절반 정도의 크기가 되더라고요.
그런데 하나님이 만드신 콩팥은, 아주 조그만하죠.
제가 그걸 보면서 지체의 중요성을 절실히 깨달았죠.
'아무리 우리 눈에 시시하게 보이고 하찮아 보여도
지체 하나하나가 생명을 좌우하는구나'
목사의 지체가 몸의 어느 지체에 해당됩니까?
심장 일 수도 있겠죠. 허파 일 수도 있겠죠. 아니면 신장일 수도 있죠.
간단한 대답은 '지체 중에 하나' 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모든 지체가 평등한 거죠.
교회를 성령의 전이라고 그럽니다. 우리가 성령의 전입니다.
성령을 모시고 삽니다. 여기에 무슨 차이가 있어요?
평신도는 성령을 3분의 1만 모시고 있고
하나님의 성령을 두 배로 모시고 있나요?
▲사역을 위해서 특별히 능력을 주시는 경우는 있어도
인격적인 성령을 모시고 사는 데는 우리가 모두 동일 하잖아요.
이렇게 교회 기본 개념 세 가지를 보아도
목회자와 평신도 사이에 아무런 신분의 차이가 없는 거에요.
안수는 다른 차원의 이야기에요.
안수가 그렇게 대단하게 보이면, 안수에 대한 공부를 따로 하세요.
안수가 원래 신분 차이를 가르치는 게 아니에요.
칼빈이 말한 것처럼 그것은 '불편한 권위' 이에요.
공동체를 밑에서 섬기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특별히 주신 직분이지, 그게 신분이 아니란 말이에요.
이렇게 평신도의 존재가 얼마나 소중한 가를 분명하게 확신하고
그 평신도 하나 하나를 보는 눈이 달라지는 사람만이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고 하신 주님의 명령을
생명처럼 받들고 목회할 수 있는 거예요.
교회 사이즈를 가지고 비교하지 않습니다.
똑똑한 사람이 모이는 교회인지, 실패한 사람들이 모이는 교회인지를 놓고
'우리 교회가 좋다. 우리 교회가 나쁘다'는 정신 나간 소리 안 하는 거예요.
영혼 하나 하나를 놓고 생명을 걸려고 하는
선한 목자의 양심을 가지고 목회하는 거예요.
목사님은 주의 일을 위해서 일생을 헌신하는 분,
나는 세상 일을 위해서 평생 이렇게 살다가 끝날 인생,
이런 보이지 않는 심리적인 변화가 평신도 마음속에 자리를 잡는 거에요.
이게 여러분이 따르는 칼빈주의 입니까?
이렇게 교인을 만드는 것이 여러분 성경입니까, 장로교 신학입니까?
한 번 똑똑하게 여러분 좀 양심적으로 판단해 보십시오.
▲저는 교회 개척하는 첫 시간부터 지금까지 가운을 입지 않았어요.
평신도로 제가 있을 때, 교회를 다니면서 보면
가운 입은 목사님, 또 어떤 목사님은 가운 에다가 굉장히 데코레이션을 많이 하잖아요.
제가 평신도석에 앉아 가지고
가운을 입고 강단에 서는 목사님을 보면
완전히 별천지의 존재 같아요.
그래서 내가 접근할 수 없는 거룩한 곳에 서 있는 분 같아요.
어려서부터 제가 받은 개인적 인상이에요.
이것은 잘못된 거예요.
가운이 잘못됐다는 거 아니에요.
하나님 앞에 특별히 소명 받았다는 가운을 입는다는 게 잘못은 아니에요.
입어도 되고, 안 입어도 돼요. 주1) 목사가 가운을 입는 이유
그러나 저는 '평신도와 내가 똑같은 하나님의 자녀다.
신분상의 전혀 차이가 없는..
당신과 나는 똑같이, 은혜 받아야 구원 받을 수 있는 존재다..' 하는 것을
평신도들이 좀 더 느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그것에 방해되는 가운은 안 입는다.. 하는 방침을 세웠고,
저는 지금까지도 한 번도 안 입었어요.
그래서 눈높이를 할 수 있는 대로 평신도의 눈높이를 낮추고,
그만큼 평신도를 높여 주는 거에요.
'당신이 교회의 주인입니다. 당신이 교회의 주체입니다.
당신들이 살아야 주님의 몸된 교회가 건강해집니다.
당신들이 깨어야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될 수 있습니다!'
이것을 깨우쳐 주려고, 저 자신 나름대로의 조그만한 몸부림을 치는 것이죠.
▲지금 제가 <교회론>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어요.
내가 교회를 보는 눈이 조금 이상해지면, 엄청난 일이 일어날 수 있어요.
양떼들은 모르잖아요.
이렇게 가르치면 이게 진리인 줄 알고
저렇게 가르치면 저게 진리인 줄 알아요.
양들이 분별력이 있나요?
오늘날 한국 교회가 이처럼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정말 21세기에 한국교회를 살리고 싶으면
이 병든 체질을 건강한 체질로 바꾸고 싶으면
여러분, 지금부터 교회를 보는 패러다임을 바꾸세요.
교회를 보는 패러다임을 바꾸세요.
교회가 뭔지를 가지고 씨름을 좀 하세요.
'나는 어떤 교회를 위해서 내 짧은 한 생을 바쳐야 되겠나?'
하는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여러분이 몸부림을 좀 치세요.
아까 찬양 인도하는 어느 분이
빌 하이벨스 목사가 누구에게 감동을 받아서
윌로우크릭 교회를 세웠다는 이야기를 간단히 했지요. 너무 유명한 이야기죠.
이상적인 교회, 빌 하이벨스가 말하는 그 교회,
그런 교회를 세우겠다는 꿈이 있으니까, 그만한 교회를 섬기는 종이 됐잖아요.
여러분이 마음에 두고 있는 교회는 어떤 교회입니까?
여러분이 앞으로 생명을 바치고 싶은 교회는 어떤 교회입니까?
여러분은 평신도를 교회의 주인으로 봅니까?
평신도의 잠재력을 봅니까?
평신도와 목사는 신분이 똑같고, 주님 앞에 가면 똑같은 입장에서 선다는 것을
여러분은 아세요?
달란트 비유를 보세요.
목사 달란트 받은 사람 따로 줄세우라는 성경 있으면 가지고 오세요.
1달란트는 평신도이고, 5달란트는 교역자라고 명시된 성경 있으면 보여 주세요.
하나님이 주신 은혜,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 가지고
세상을 어떻게 살았느냐를 가지고 사람을 분별하고 판단하세요.
그렇다면 평신도를 이렇게 병신도처럼 만들어놔 가지고,
나중에 주님 앞에 가서 우리가 나중에 어떻게 심판을 받겠습니까?
로이드존스와 같은 그렇게 위대한 사람도
임종 하면서 자기 후배에게 이런 말을 했다죠.
'내가 평생 마음에 두고 깊이 생각한 문제가 하나 있는데
그게 뭐냐면, 내가 주님의 심판대에서 선다는 사실이다.
내가 주님의 심판대 앞에 섰을 때
주님이 나에게 뭐라고 하실지
그것이 항상 목회하는 중에 나의 마음에서 떠나지 않는 생각이었다'라고 했어요.
그렇게 위대한 목회를 한 분도
주님의 심판대를 의식하고 살았어요.
성령께서 제 마음을 열어 주셔서
교회를 다시보기 하신 것처럼
사랑하는 후배 여러분들의 마음을 열어 주셔서 *아마 총신대원
교회를 다시 볼 수 있는 은혜를 주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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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목사가 가운을 입는 이유
목사가 가운을 입는 전통 중에, 이런 이유가 있다고 합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박사가 되라는 것이죠. 그러니 박사 가운을 입는 것입니다.
설교시간에, 마치 박사처럼
성경을 아주 깊이 있게 연구해서, 성경을 아주 잘 강해하고 가르치라고
그렇게 '성경을 연구하는 박사'라는 의미에서, 박사 가운을 입는 전통이 생겼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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