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목록가기 |
본문 설명 ; 영문도 모르고 모인 군중들
▶데메드리오의 충동질에 선동당하여 폭도로 돌변한 은세공장이들은
인파로 붐비는 에베소의 중심부 아카디안 대로에서
바울의 동역자인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를 붙잡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아데미 여신의 이름을 '연호'하면서 *연달아 부르면서
아카디안 대로의 인파를 헤치고, 두 사람을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를 야외 연극장으로 끌고 갔습니다.
에베소의 중심대로에서, 대 소란이 일어난 것이었습니다.
아카디안 대로를 가득 메우고 있던 인파는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이,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를 끌고 가는, 은세공장이 무리를 뒤쫓아서
야외 연극장 안으로 몰려 들어갔습니다.
거대한 군중을 이룬 그들은, 야외 연극장에서 저마다 소리를 질러댔지만
자신들이 왜 그곳에서 그렇게 소리를 지르고 있는지, 대부분은 영문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경과하자, 묘한 양상이 벌어졌습니다.
▶본문 행19:33~34절을 보시겠습니다.
33 유대인들이 무리 가운데서 알렉산더를 권하여 앞으로 밀어내니
알렉산더가 손짓하며 백성에게 변명하려 하나
34 그들은 그가 유대인인 줄 알고 다 한 소리로 외쳐 이르되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 하기를 두 시간이나 하더니
바울의 2차전도여행 중 빌립보 사역에 대한 증언인 행16:20절을 참조하면
당시 로마시민들은, 유대인들을 꺼려했습니다. *행16:20 이 사람들이 유대인인데 우리 성을 심히 요란하게 하여
주후50년경에, 제국의 수도 로마에서 대규모의 폭동을 일으켰다가
황제 클라우디스에 의해서 수도에서 추방당했던 수치스러운 전력은 차치하고서라도
유대인들은 평소에 이방인들을 짐승처럼 간주했을 뿐만 아니라
특히 어느 민족보다도, 재물을 밝혔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의 시민들도, 유대인들을 꺼려하기는 매 한가지였습니다.
그런데 그 시민들 가운데, 본문 속에서 야외 연극장으로 몰려간 유대인들도 끼여있었습니다.
그들은 은세공업자들이거나, 혹은 은세공업자들에게 은과 구리를 판매하는 상인들로서
데메드리오가 불러 모은 동업자들 속에 포함되어있던 유대인들이었습니다.
또 바울의 동역자인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를 붙잡아
야외 연극장으로 끌어가는데 합세했던 유대인이기도 했습니다.
이를테면 그 유대인들은, 에베소의 야외 연극장에 거대한 군중에 몰려들게 한
그 대소요의 원인제공자들이었던 셈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유대인들(은세공업자)은, 야외연극장에 모인 군중(시민)들 가운데,
왜 자신들이 그곳에 모여, 그렇게 소리 지르고 있는지, 영문을 알지 못한다는 사실에 대해서,
위기감을 느꼈습니다.
그 유대인들이, 합세하여 붙잡아 야외연극장으로 끌고 온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도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들이(유대인 은세공업자들), 바울의 동역자인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를 끌어오는데 합세했던 것은,
그 두 사람이 유대인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들의 풍족한 생활, 부와 번영을 위협하는, 크리스천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영문도 알지 못하고 야외 연극장에 운집한 군중의 입장에서는
은세공장이에게 끌려온 가이오와 아리스다고의 의복과 외모는
한 눈에 보기에도, 자신들이 꺼려하는 유대인이었습니다.
따라서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를 끌어가는 데에 합세했던 유대인들은
크리스천과 유대인을 구별하지 못하는 에베소의 군중에 의해
자칫 유대인인 자신들에게도 화가 미칠 수 있다는 위기감을 감지했던 것입니다.
목전의 이득을 위해서, 떳떳하게 살지 않으면
늘 이렇게 불안의 덫에 갇혀서 살게 됩니다.
▶유대인들은 동료인 유대인 알렉산더로 하여금 연설하게 하여, 19:33
군중에게 자초지종을 밝혀
군중의 소요가,
유대인 자신들에 대한 적개심으로 이어지지 않게 하려고 했습니다.
본문의 알렉산더는, 바울이 딤후4:14절에서 자신을 괴롭히는 인물로 지목했던
구리 세공업자 알렉산더와 동일인으로 추정됩니다.
*딤후4:14 구리 세공업자 알렉산더가 내게 해를 많이 입혔으매 주께서 그 행한 대로 그에게 갚으시리니
유대인들이 알렉산더를 억지로, 떠밀면서까지 군중 앞에서 해명하게 했던 것은
거대한 군중이 모인 야외연극장에서
유대인들 스스로, 느낀 위기감이 그만큼 컸고,
또 알렉산더가 꽤 잘 알려진 달변가였음을 짐작케 해 줍니다.
그러나 야외연극장의 군중들은, 알렉산더의 의복과 외모를 통해,
그가 유대인임을 알아보고서는, 아무도 그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때부터, 군중은, 한 마음이 되어서
아데미 여신을 한 목소리로 소리쳐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그와 같은 상태가, 무려 2시간이나 지속되었습니다.
그 상황이 어떻게 전개될지 아무도 알 수 없었습니다.
◑모임을 흩어지게 하니라
▶바로 그때, 에베소의 서기장이 야외연극장에 나타났습니다.
행19:35~36절의 증언입니다.
35 서기장이 무리를 진정시키고 이르되 에베소 사람들아 에베소 시가
큰 아데미와 제우스에게서 내려온 우상의 신전지기가 된 줄을 누가 알지 못하겠느냐
36.이 일이 그렇지 않다 할 수 없으니
너희가 가만히 있어서 무엇이든지 경솔히 아니하여야 하리라
우리 말 '서기장'은 헬라어 '그람마튜스'는 총독을 보좌해서 법령을 입안하고
각종 기금을 관리하며 대소 집회를 관장하는 행정관을 의미합니다.
그 행정관이 소요사태가 일어난 야외연극장에 단신으로 찾아갔을 리가 없습니다.
많은 무장군인들이 그를 호위하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행정관은 본문 40절에서 자신을 '우리'라고 표현했던 것입니다.
행정관과 호위병의 출현을 목격한 야외 연극장의 군중은
일단 잠잠해 졌습니다.
▶에베소 사람들은, 어느 날 하늘에서 떨어져 내린 운석을
제우스 신이 하늘에서 내려준 '신'이라면서
아데미 신전에 모셔두고, 아데미 여신과 함께 섬겨왔습니다.
그래서 에베소 사람들은, 에베소가
고대세계의 불가사의인 아데미 신전의 신전지기라는 사실에 대해서
크나큰 자부심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노련한 행정관은, 먼저 에베소 사람들의 그 자부심을 추켜세워 주었습니다.
그리고 야외연극장에서 무려 2시간 동안이나 아데미 여신을 소리 친 군중에게
경거망동 하지 말고, 신전지기의 자부심에 걸맞는 행동을 할 것을, 주문했습니다.
행19:39~40절을 보시겠습니다.
39 신전의 물건을 도둑질하지도 아니하였고 우리 여신을 비방하지도 아니한 이 사람들을 너희가 붙잡아 왔으니
38 만일 데메드리오와 그와 함께 있는 직공들이 누구에게 고발할 것이 있으면
재판 날도 있고 총독들도 있으니 피차 고소할 것이요
39 만일 그 외에 무엇을 원하면 정식으로 민회에서 결정할지라.
40 오늘 아무 까닭도 없는 이 일에 우리가 소요 사건으로 책망 받을 위험이 있고
우리는 이 불법 집회에 관하여 보고할 자료가 없다 하고
야외연극장에 몰려든 군중 대부분은, 자신들이 왜 그곳에서 그렇게 소리지르는지
영문을 알지 못했지만,
행정관은 그 소요사태의 전말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는, 아데미 신전의 기물을 훔친 절도범이 아니었습니다.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들은, 신이 아니라고 공개적으로 선포했던 사람도
바울이었지, 가이오와 아리스다고가 아니었습니다.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는 바울의 동역자일 뿐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를, 마치 중죄인인 것처럼 붙잡아
야외연극장으로 끌고 온 은세공장이들(유대인)의 잘못을
행정관은 정확하게 지적했습니다.
▶행정관은, 데메드리오와 그 동업자들에게
만약 누군가를 고소할 일이 있다면
정해진 재판 날에, 총독에게 고소하고
더 이상의 것을 원한다면, 정식으로 민회에 요청하라고 했습니다.
'민회'는 로마제국의 도시내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에 대해
행정적이거나 사법적으로 논의하는 시 의회를 일컫습니다.
그리고 행정관은, 아무 까닭없는 소요사건을 내버려 둘 경우에
많은 사람들이 다칠 수 있음을 경고하면서,
이 불법 집회에 관하여, 총독에게 보고할 자료가 없다고
최종적으로 선언했습니다.
은세공장이들로 인해 촉발된 야외연극장의 소요사태가
불법집회라고 판정을 내린 것입니다.
▶41절입니다.
이에 그 모임을 흩어지게 하니라
마침내 행정관은, 야외연극장에 모인 군중을 해산시켰습니다.
영문도 알지 못한채, 야외연극장으로 몰려가서, 소리지르던 군중은
행정관의 설명을 듣고,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자신들이 참여한 그 모임이, 불법집회라는 사실을 안 이상,
더 이상 그 자리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습니다.
조금 전까지 소리 소리 지르던 그들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모두 제 갈 길로 되돌아갔습니다.
모두 자신들의 일상생활로 되돌아간 것이었습니다.
◑세 종류의 에클레시아
오늘 본문 속에는, 우리가 주목해야할 단어가 있습니다.
1) 민회 '에클레시아'
우리 말 성경으로는 구별되지 않지만, 본문 39절의 헬라어 원문을 보면,
'만일 그 외에 무엇을 원하면, 정식으로 민회에서 결정할지라'는 행정관의 말 가운데,
민회가 '에클레시아'입니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당시의 민회는 매달 정기적으로 열리던 시의회로서
도시 내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에 대해서, 행정적이거나 사법적으로 논의하는 '에클레시아'였습니다.
다시 말해 제반 문제에 대한 행정적, 혹은 사법적 시시비비를 가리던 '에클레시아'였습니다.
2) 군중들의 모임 '에클레시아'
또 본문 41절의 헬라어 원문에도 '에클레시아'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에 그 모임을 흩어지게 하니라.
여기서 '모임' 역시, 헬라어 원문에 '에클레시아'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그 '에클레시아'는,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를 야외 연극장으로 끌고 간 은세공장이들과,
그들을 좇아서 야외 연극장에서 소리를 질러대면서도
자신들이 왜 그곳에서 그렇게 하고 있는지, 영문을 알지 못했던
에베소의 미련한 군중을 모두 포함한 '에클레시아'였습니다.
3) 진정한 교회로서의 에클레시아
그리고 오늘 본문 속에는, 비록 문자적으로는 드러나 있지 않지만,
또 숫자도 단 두 명에 불과하지만,
방금 위에서 언급한 두 '에클레시아'와는 구별된
또 하나의 '에클레시아'가 있었습니다.
그 '에클레시아'는, 야외연극장으로 끌려가서 수모를 당했던
바울의 동역자인 가이오와 아리스다고의 '에클레시아'이었습니다.
본문을, 겉으로 드러난 내용으로만 따지자면,
가이오와 아리스다고의 '에클레시아'는,
야외연극장에 모인 군중 전체를 가리키는 41절의 '에클레시아'속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가이오와 아리스다고의 '에클레시아'는
본질적으로 41절의 '에클레시아'와는 전혀 달랐습니다.
▶'에클레시아'는, 어디 어디 밖으로를 뜻하는 전치사 에크와
부르다는 동사 칼레오에서 유래된 단어로, '부름 받은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그 본 뜻의 관점으로, 앞에서 언급한 세 '에클레시아'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1) 첫 번째는, 39절에 민회로 번역된 '에클레시아'입니다.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를 본받아, 로마제국 도시에서도 정기적으로 열린 '에클레시아'는,
'시시비비를 가리기 위해서 부름 받은 사람들의 모임'이었습니다.
그들이 부름 받은 사람들이기는 했지만,
그들을 불러낸 주체도, 사람들이었습니다.
어떤 문제나 사건의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은, 퍽 귀한 일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요청으로, 다른 사람들의 시시비비를 가려준다고
당사자의 삶이 거듭나는 것은 아닙니다.
게다가 다른 사람들의 시시비비를 가려주는 것과
자기 자신의 시시비비를 바르게 따지는 것은, 완전히 별개의 사안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시시비비를 가려주는 행위가
자기 자신의 삶을 바르게 구축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와 로마제국의 도시에서
매달마다 수차례에 걸쳐, '에클레시아'가 정기적으로 열려서, 시시비비를 가렸지만,
'에클레시아'를 구성하고 있던 사람들도, '에클레시아'가 열렸던 도시들도
그 '에클레시아'를 통해서, 거룩해지지는 않았습니다.
2) 두 번째는, 41절에, '그 모임'으로 번역되어있는 '에클레시아'입니다.
그 '에클레시아'는, 데메드리오의 선동에 부름 받은 에베소의 은세공장이들과
폭도로 돌변한 은세공장이들의 소동에 영문도 알지 못하고 부름 받은 미련한 군중의 집합체였습니다.
그들은 야외연극장에 나타난 행정관의 출동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뿔뿔이 흩어져
자신들의 일상생활로 되돌아갔습니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그들의 삶은 여전했을 것입니다.
조그마한 선동에도 흥분하고, 대수롭지 않은 소란에도 영문도 모르고 부름받는 에클레시아로
이리저리 까닭 없이 몰려다니느라,
그들은 자신들의 귀한 생을 허망하게 의미 없이 흩날려 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런 '에클레시아'는 아무리 규모가 커도, 세상의 어둠과 혼란을 가중시킬 뿐
세상의 맑히고 밝히는 소금과 빛이 될 수는 없습니다.
3) 마지막 '에클레시아'는, 41절의 '에클레시아'속에 감추어져 있는
가이오와 아리스다고의 '에클레시아'입니다. *실제로 본문에 '에클레시아'로 나오지 않음, 가상의 '에클레시아'
비록 그들은 단 두 명에 불과했지만,
그들이 단수가 아니라, 복수라는 의미에서
그들도 '부름 받은 사람들의 모임'이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을 불러낸 주체가 사람이 아니라, 주님이셨다는 사실입니다.
즉, 바로 그들이 '교회'였습니다.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우리 말 '교회'로 번역된 헬라어가
오늘 본문에서 각각 '민회'와 '그 모임'으로 번역된 '에클레시아'입니다.
교회는, 주님으로부터 부름 받은 사람들의 모임, 즉 주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가이오와 아리스다고의 그 작은 '에클레시아'도,
야외연극장에서 흩어지는 미련한 군중과 함께
자신들의 일상생활로 되돌아 갔습니다.
그러나 그들 일상의 주인은, 그들 자신이 아니라
그들을 불러내신 주님이셨습니다.
그들은, 사도바울, 그리고 에베소의 크리스천들과 함께
에베소의 '에클레시아’, 에베소의 교회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 '에클레시아'에 의해서, 칠흑 같던 에베소에 진리와 생명의 빛이 비추어졌습니다.
▶마치는 말
우리는 이 시대의 역사속에서, OO교회로 부름받은 사람들의 모임을 지금 구성하고 있습니다.
우리 자신이, OO교회요, '에클레시아'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의 참된 '에클레시아'됨의 여부는,
이 예배당 안이 아니라, 이 예배당에서 흩어진 이후에
우리 일상의 삶을 통해서, 드러나게 됩니다.
우리가 이 예배당에서 예배를 드리고, 일상의 삶으로 흩어진 다음에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다른 사람들의 시시비비를 가리는 일에만 부름받는다면,
우리의 '에클레시아'는, 39절의 '민회'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경우,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시시비비를 가리면 가릴수록, 우리로 인해 우리 사회의 대립과 갈등의 골은,
더 깊게 패일 것이요,
결과적으로 우리 자신도, 우리를 통해, 우리 사회도, 새로워질 수는 없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 예배당에서 예배를 드린 이후에
우리 일상의 삶으로 돌아가서, 일주일 내내 세상의 온갖 충동질들과 선동에 끌려 다닌다면,
우리의 에클레시아는, 41절의 미련한 '군중의 모임'에 불과할 것입니다.
하루 종일 쉴틈 없이 뛰어다니면서도, 인생의 의미도, 가치도 목적도 알지 못한 채
단지 세상의 온갖 충동질과 선동에 끌려다닌다면,
그런 '에클레시아'가 과연 자신과 타인의 삶을 동시에 갉아먹는
미련한 군중의 모임에서, 어떻게 탈피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오늘 이 예배당에서 예배를 드리고
우리 일상의 삶으로 흩어져서,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우리를 '불러내신' 주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간다면,
우리는 사도바울과 함께 에베소의 교회를 이루었던 가이오와 아리스다고처럼
이 시대를 새롭게 하는 진정한 '에클레시아'(교회)가 될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주인으로 모신 참된 '에클레시아'로 살 수 있는 것은,
절대로 우리 자신의 의나, 자격으로 인함이 아닙니다.
우리는 자신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흉측한 죄악으로 온통 물들어 있는 우리의 복장은
의롭기는커녕, 석탄보다 더 검고
작은 유혹에도 쉽게 망가지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은 우리의 주인으로 모실 자격조차 없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삼위일체 하나님을 감히 우리의 주인으로 모시고
그분의 몸된 에클레시아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씻어주시고,
우리를 먼저 하나님의 자녀로 불러내어 주셨기(에클레시아)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주님의 그 부르심의 은혜를 힘입어서
다른 사람들의 시시비비를 가리는 일에만 골몰하던 민회의 삶과
영문도 알지 못하고, 세상의 온갖 선동에 좌지우지 당하던
미련한 군중의 모임에 마침표를 찍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가는,
참된 '에클레시아'가 되십시다!
주일마다 예배당에 나와서, 우리를 불러주신 주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채움받고
이 세상으로 흩어져나가, 우리의 일상의 삶속에서 OO교회로 살아가십시다.
비록 우리가 보잘 것 없는 존재라 할지라도, 우리를 불러내 주신 주님께서
당신의 '에클레시아'인 우리를 통해서,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신비로운 당신의 섭리를
이 시대의 역사 속에 펼쳐 가실 것입니다.
'◑δεδομένα 18,185편 ◑ > उपदेश सामग्री 16,731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행17:22~25 (0) | 2022.01.16 |
---|---|
모순의 표적 눅2:34 (0) | 2022.01.16 |
모순 극복 행10:29 (0) | 2022.01.16 |
모든 사람이 소스데네를 잡아 행18:12~17 (0) | 2022.01.16 |
말씀의 유산 물려주기 요17:8 (0) | 2022.01.16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