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목록가기 |
사도바울이,
위로는 파르테논 신전을 비롯한 아크로폴리스의 신전들이 올려다 보이고
아래로는 ‘아고라’주위의 온갖 신전들이 내려다보이는 아레오바고(언덕, 옥외 회의장) 한가운데 섰습니다.
그는 아테네에 있는 ‘알지 못하는 신’을 위한 제단을 언급하는 것으로 설교를 시작했습니다.
그동안 아테네 사람들이 알지도 못하고 경배하던 신들이 누구인지
바울 자신이 가르쳐주겠다고 밝힌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온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재이시므로,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 하신다고 선포했습니다.
천지를 창조 하셨기에 천지 만물의 주인이시고
천지 만물보다 더 크신 하나님께서
고작 인간이 만든 건축물속에 갇혀 계시지 않는다는 의미였습니다.
우리는 바울이 이렇게 선포하면서
한 손으로는 아크로폴리스의 신전들을 가리키면서,
또 한 손으로는 아레오바고 아래쪽 아테네 시내에 흩어져있는 신전들을 가리키는 모습을 연상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상의 도시 아테네 사람들에게
바울이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증언하기에
아크로폴리스 위의 신전들과, 아래쪽 시가지의 신전들이 동시에 보이는
아레오바고 (언덕)는, 더없이 좋은 강단이었습니다.
◑본론/ 우상들은 무엇이 부족합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그 강단에서, 바울의 설교는 이렇게 계속됩니다.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행17:25
아테네 사람들은, 신들의 기쁨과 행복은
인간들이 바치는 희생제물과 직결된다고 믿었습니다.
이를 태면 인간들이 신상들 앞에 풍성한 음식을 바쳐야.. 그 신들이 비로소 배부르게 되고,
신상들에 아름다운 옷을 입혀야.. 신들이 아름다운 자태를 지니게 되고,
신(상)들 앞에 돈을 바쳐야.. 신들이 경제적으로 여유로울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신들을 위해서,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것들을 신전에 바쳤습니다.
특히 옛날사람들은, 신들의 기쁨과 행복을 위해서라면,
사람들 심지어는 어린 아이들까지도 인신제사로 신상들 앞에 바쳤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신들이 기쁨과 행복을 누리게 되고
그 결과로 자신들은, 신들로부터 재앙을 면함 받고 복을 받는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인간들이 음식을 바쳐야.. 비로소 배부르게 되고
인간들이 옷을 입혀야.. 아름다운 자태를 지니게 되고
인간들이 돈을 바쳐야.. 경제적으로 여유로워 지는 신들이라면
그런 신들은, 사실은 철저하게 인간 의존적인 신들이 아닙니까.
바꾸어 말씀드리면, 그런 신들은 스스로 부족한 것들 투성이요.
자기 부족함을, 자기 능력으로는 스스로 채울 수 없음을, 입증 하고 있지 않습니까.
가짜 신들(우상)인 셈이지요.
그러한 신들의 부족함을 채워주는 인간들이 없으면
그런 신들 역시 소멸될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그런 신들이라면, 사람이 살지 않는 허허벌판에서는 아예 존재할 수도 없겠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런 신들이 지상에 존재할 수 있게 되었겠습니까.
그런 신들을 만들어 내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피조된 신들의 부족함을 채워줄 수 있는 사람이, 더 이상 없었을 때,
지난 역사 속에서 사라져버린 신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그와 같은 우상의 본질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던 바울은
아테네의 철학자들에게
‘하나님은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지 아니 하신다’고 선포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아예 사람의 경배를 받지 않으신다는 말이 아니라
우상들처럼, 인간이 손으로 바치는 제물로 자기 부족함을 채우기 위한 목적으로
인간의 경배를 받으시는 분이 아니시라는 의미였습니다.
◑하나님은 부족함이 없으십니다.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행17:25
▶본문 ‘부족하다’의 헬라어는 ‘프로스데오마이’는
‘더 원 한다. 더 요구한다’는 뜻입니다. *to want besides, need in addition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자기 충분성을 지니고 계신 하나님이시기에
하나님께는 이 세상 그 무엇에도 부족함이 없으십니다.
인간에 의해 피조 되어 부족함을 인간에게 채움 받아야하는 우상들과는 달리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필요를 채우시기 위해
인간들에게,
인간들이 가진 것들 가운데 그 무엇도 요구 하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무도 없는 허허 벌판에서도 하나님이시고
인간이 창조되기도 전에도 하나님이셨습니다.
'자기 충분성'을 지니고 계신 하나님께서는
태초이전 영원 전부터 하나님이셨고
당신의 충분성으로 천지를 창조하셨고,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인간에게 뭘 받지 않으시고, 도리어 주십니다.
그래서 바울의 설교는 25절 하반 절에서 이렇게 이어집니다.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
본문의 ‘주신다’는 동사는,
25절 상반절의 ‘받는다’ (받지 아니하신다)는 동사와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 의해 피조되어
인간의 의존적인 우상들과는 달리
당신의 필요을 위해, 인간으로부터 무엇을 받지 아니하십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생명 없는 우상들이 전혀 흉내도 낼 수 없는 생명과 호흡을
인간들에게 주실 뿐만 아니라
그 인간들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자기 충분성’으로 인함입니다.
하나님의 ‘자기 충분성’은,
당신 홀로 부족함이 없이 자기 자신만 건사(돌봄)하는 정도의 충분성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기 충분성은, 무에서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고
인간을 창조하실 정도의 충분성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에서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의존적이 아니라
인간이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존적인 존재로 살아가게 됩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우상들처럼 <받기만 하는 하나님>이시라면
인간은 아예 지상에 존재할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인간에 의해 피조 되어, 인간에 의해 부족함이 채워져야 하는 '우상의 흥망성쇠'는
철저하게 인간에 의해 결정되지만
그러나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어,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들로 살아가는
'인간의 흥망성쇠'는, 전적으로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이처럼 아테네 사람들이 지니고 있던 종교심의 본질적 문제를
정확하게 꿰뚫어 보고
그 문제를 아테네 사람들에게 그들의 언어와 용어로 설명해줄 수 있을 정도로
바울은 영적 통찰력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우상은 제물을 요구하지만, 하나님은 인간의 제물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질문을 제기하게 됩니다.
구약시대에 우리가 믿는 하나님께서도, 인간에게 온갖 제물을 요구하지 않았습니까.
오늘날 하나님을 믿는 우리도 매주일 예배 때 마다 하나님께 헌금을 바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과 우상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는가? .. 하는 질문입니다.
제사의 책이라고 불리어지는 레위기에는
어떤 경우에 어떤 제사를 드려야하고
각 제사 때마다 어떤 제물들을 드려야 하는지가.. 소상하게 기록 되어있습니다.
그러므로 ‘제물을 받는다’는 관점에서
하나님과 우상들과의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는 것처럼 여겨집니다.
하지만 그 양자 사이에는 결코 매워질 수 없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이미 앞에서 말씀 드린 것처럼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우상들이
인간의 손으로부터 제물을 받는 것은.. 자기 부족함을 채우기 위함입니다.
제물을 바치는 인간을 위함이 아니라,
인간을 이용해서, 자기 기쁨과 자기행복을 충족시키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제사와 제물을 요구하신 것은,
하나님 당신을 위함이 아니라,
당신이 사랑하시는 인간들을 위함이셨습니다.
하나님의 법은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못 받고 있습니다.
죄인은 그 누구든, 거룩한 하나님 앞에서 반드시 죽어야만 합니다.
그래서 인간을 창조하시고 생명과 호흡을 주신 하나님께서
인간을 죄와 사망의 덧에서 구원해 주시기 위해서
인간들에게 제시해주신 방도가 .. 바로 제사와 제물이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제사와 제물을 요구하신 것은
결코 하나님 당신의 유익을 위함이 아니라
인간을 범죄로부터 용서해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우상에게 제물을 바치는 것과
하나님께서 제사와 제물을 요구하신 것은, 근본적으로 같을 수가 없었습니다.
신자가 하나님께 헌금을 바치는 것 역시
하나님께 무언가 부족함이 있기에, 하나님의 부족함을 채워주기 위함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헌금을 먼저 바쳐야, 하나님께서 우리의 헌금을 확인하시고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구원해 주시는 것도 아니요,
단지 더 많은 헌금을 한다는 것만으로 하나님께서 더 기뻐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교인들 가운데, 만약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을 자신의 부족함을 채워주워야 할 우상으로.. 간주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은 태초 전부터
스스로 계실정도로 자기 충분 성을 가지고 계셨고
하나님의 사랑역시 보잘것없는 우리를 살려주기 위해
당신의 독생자를 십자가의 제물 삼으시기까지 충분하셨는데
‘자기 충분성’을 그렇게 충분하게 가지고 계신 하나님께서
무엇이 또 부족하셔서, 우리 주머니속의 돈을 노리시겠습니까.
그럼에도 우리가 자발적으로 헌금을 바치는 것은
하나님께서 먼저 베풀어 주신 구원의 은혜에 감사드림과 아울러
내가 지니고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 것을 고백하면서
만민을 구원하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생명이
이 세상 사람들에게 널리 전하는데, 쓰여지는 도구로 사용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이 성도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제물이 아니라, 순종입니다.
신명기 10장 12~13절입니다.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의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13 내가 오늘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 하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인생 사용설명서인 하나님의 말씀에 의거해서
우리가 참된 행복의 삶을 지향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당신의 말씀대로 살라고 명령하시는 것은
절대로 하나님 당신의 유익을 위함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위함입니다.
오직 이 길만이, 우리가 이 땅에 살아있는 동안에
후회 없이 참되고 진정한 삶의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그래서 선지자 미가는 이렇게 선포하기도 했습니다. 미가서 6장 6~8절입니다.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로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7 여호와께서 천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로 말미암아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8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바른 삶인 것이
바로 그 삶속에만, 참되고도 진정한 행복이 있기 때문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가장 멀리 떨어진 사람이
자기가 지니고 있는 물질로, 하나님을 달래고 얼러서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고
언제든지 자기 마음먹었을 때, 하나님을 자기편으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이 세상 것들에 걸신들린 걸인으로 모독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이 바치는 제물들을 기뻐 받으시기는커녕
오히려 이사야서 1장 11~13절을 통해서 이렇게 질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12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13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당신의 유익을 위해서
우리의 것들 가운데에 그 무엇도 요구하지 아니하시고
수준도 맞지 않는 우리에게, 당신의 말씀을 주시고
그 말씀을 힘입어 참된 행복의 삶을 살기를 요구하시고
죄와 사망에서 우리를 구원하시어, 하나님의 정의를 구현하고
하나님의 자비를 실천하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바른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그 무엇도 부족함이 없으신
엘 샤다이 (전능자)이신 동시에, ‘자기 충분자’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충분하신데, 우리는 부족한 이유 - 하나님을 더 찾으라고!
▶여기에서 또 하나의 질문이 제기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여 주시고
참된 삶을 향한 바른 삶의 길로 우리를 인도 해내주시고
우리의 백그라운드가 되셔서, 우리의 삶을 온전히 세워주시기에 충분할 정도로
‘엘 샤다이’ 전능자요, ‘충분자 하나님’이시라면
그 ‘충분자 하나님’을 믿는 우리의 삶속에는
왜 이다지도 부족한 것들이 많으냐..는 질문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충분자’이신 만큼
우리의 삶이 모든 면에 걸쳐 풍성하기만 해야 하고
모든 것이 충분하고도, 넉넉하게 남아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은 지극히 간단합니다.
우리에게 부족함이 없으면, 만약 우리에게 결핍이 없으면,
우리는 절대로 일평생토록 ‘충분자 하나님’을 겸손히 뒤따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를 테면 우리 일생에 부족한 것들은
‘부족함이 없으신 하나님’과 더 깊은 교감을 갔게 해주는 접촉점이 됩니다.
그래서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고백했습니다.
다윗은 젊은 시절에는 사울왕의 칼날을 피해 10년 동안 도피생활을 해야 했고
나이 들어서는 친아들 압살롬의 쿠데타로 황급히 도망해야 하는 등
그의 인생에는 너무나도 부족한 것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자기 인생의 그 부족한 것들 때문에
‘부족함이 없는 하나님’을 일평생토록 자기 백그라운드로 모시고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일생에서 부족한 것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무엇이 부족한 현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정의를 구현하고, 하나님의 자비를 실천하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바른 삶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때에 우리의 백그라운드 되시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충분하신 은총으로 우리를 책임져주시기 때문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요구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속에서 참된 행복의 삶을 사는 것인데
나는 그동안 하나님께서 내 주머니의 돈에 걸신들린 분으로 오해해 왔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정의를 구현하고 자비를 실천하며
겸손하게 하나님과 동행하는 나의 바른 삶인데
나는 나의 재능이나 나의 물질로 하나님을 달래고, 어를 수 있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신 분인데, 하나님을 믿는다는 나는
하나님께서 마치 무능하신 분인 것처럼 행동해 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무엇에도 부족함이 없는 충분자이신데,
그동안 나의 부족한 믿음으로는, 부족함 없는 하나님의 충분한 은혜를 누릴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인 나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 당신의 독생자를 제물 삼으시기까지 하셨는데
나는 여전히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살 것처럼, 허망한 삶을 질주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다는 나의 삶은 무의미하고 무기력하기만 했습니다.
참회의 절기인 사순절 넷째주일을 맞이하여, 이 모든 잘못을 회개하오니 용서해 주십시오.
우리 인생의 부족함이 부족함 없는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닫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 인생의 부족함으로 인해.. '충분자이신 하나님'과 늘 바른 관계를 맺게 해주십시오.
우리 인생을 부족함으로 인해 엘 샤다이신 하나님만을.. 내 인생의 백그라운드로 모시게 해 주십시오.
우리 인생의 부족함으로 인해.. 부족함 없는 하나님의 은혜를, 날마다 더욱 깊이 누리게 해주십시오.
그리하여 우리 인생의 부족함속에서도 참된 행복을 향한 바른 삶을 살게 해주시고
여호와가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하는 다윗의 고백이
우리 모두의 고백이 되게 해주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δεδομένα 18,185편 ◑ > उपदेश सामग्री 16,731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바울이 강론한 의, 절제, 심판 행24:25 (0) | 2022.01.16 |
---|---|
믿음은 용기다 행7:35~38 (0) | 2022.01.16 |
모순의 표적 눅2:34 (0) | 2022.01.16 |
모임을 흩어지게 하니라 행19:33~41 (0) | 2022.01.16 |
모순 극복 행10:29 (0) | 2022.01.16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