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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넬료가 베드로를 부를 때)
부름을 사양하지 아니하고 왔노라 묻노니 무슨 일로 나를 불렀느냐 행10:29
▲자신의 행동에 모순을 느끼지 않았던 베드로
위 말씀 ‘사양하지 않다’에는... ‘모순을 느끼지 않는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유대인 문화가 엄격히 금하는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 식탁교제를 나눈 것에 대해,
베드로는, 그런 자신의 관습위배 행위에 대해 그 어떤 모순도 느끼지 않았다는 것이다.
(부름을 사양치 아니하고 왔노라...)
만약 베드로가, 그 어떤 모순을 느꼈다면,
그는 이방인 집에 들어가지도 않았을 것이다.
왜 베드로는, 보통 유대인들이 당연히 느껴야할 모순을 느끼지 않았을까?
그 이유는, 유대 풍습의 기준이 아니라,
그가 <하나님 말씀의 기준>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이 설교문의 주제
◑예수님 말씀에는 ‘모순’이 많다.
이 세상에서 높아지기 위해서는... 섬기고 낮아지는 종이 되라고 한다.
반면에 세상은 남을 짓밟고 올라가라고 한다.
조금이라도 더 가지기 위해서는... 도리어 네 소유를 나누어 주라고 하신다.
주라 그리하면 흔들어 넘치도록 받을 것이라고 하셨다.
상식적으로는, 내 손 안에 들어온 것은, 무조건 움켜쥐어야 하는데 말이다.
기를 쓰고 살아야 할 이 세상 속에서
네가 정말 살고 싶으면, 네 자신이 먼저 죽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애통하는 사람이라면, 그는 가련한 사람이다.
그러나 주님은, 그 애통하는 사람을 누구보다 복되다고 하셨다.
군자는 대로행이라, 사람은 넓은 길로 가야할 것 같지만,
주님은 반대로 정녕 주님을 따르는 자들은,
좁은문으로 들어가고, 좁은 길로 걸으라고 하신다.
십자가 위에서 못 박혀, 마치 실패자인 것처럼 돌아가신 당신 자신의 삶을
우리 신자들보고 본받고 따르라고 말씀하신다.
세상에 이보다 더 모순된 말들이 어디 있겠는가?
적어도 이성을 지닌 사람들이라면, 이런 말씀들을 믿고 수용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2천년이 지난 오늘날, 그 결과는 어떠한가?
주님의 모순된 말씀 가운데, 어느 말씀 하나 틀린 것이 없었다.
당신의 목숨을 버리시기까지 사람들을 섬기셨던 주님은
인간의 종이 아니라,
만왕의 왕이 되셨다.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십자가 위에서 절규하며 돌아가셨던 주님은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져버리신 것이 아니라
온 인류를 구원하시는 영원한 부활의 구주로 다시 등장하셨다.
마치 실패자인 것처럼 십자가 위에 못 박혀 돌아가셨던 그 분의 삶은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쫓아야 할 진리의 이정표로
우리 앞에 우뚝 서 있다.
▶관련글 : 성경은 역설적 진리다 ▶관련글 : 모순의 표적
◑내 삶에 모순을 극복하려면
▲성경 말씀이 모순인 이유
주님의 말씀 가운데, 틀린 말씀이 단 한 말씀도 없고
주님의 삶 가운데, 모순된 삶이 단 한 순간도 없었다.
그런데 왜, 그런 주님의 말씀과 삶이
오늘날 우리에게 얼핏 보기에 모순처럼 보이는가?
이유는 간단하다.
나 자신이 모순 속에 빠져있기 때문이다. ★
나 자신이 모순 속에 빠져있으면서도,
마치 정상인처럼 착각하면서 살아가기에
진리의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내 눈에는 오히려 모순인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마치 소인국과 거인국에 간 걸리버가
그곳 사람들에게는 비정상적인 인간, 모순적 존재로 보였던 것과
같은 이치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하신 일 - 모순을 바로 세우셨다.
타락한 인간들은,
자기 죄와 욕망으로
진리를 뒤집어 버렸다.
주님께서는,
인간이 뒤집어 놓은 진리를
바로 제자리로 돌려 세우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다.
그러므로 자신이 뒤집어져 있는 모순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바로 서 계신 주님이
오히려 언제나 모순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중요한 사실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신 로고스 앞에서만
뒤집어져 있는 인간은, 자신의 모순된 모습을 직시할 수 있고
그 로고스에 의해서만 자신의 모순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베드로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자기 모순을
아무 모순도 느끼지 않고 극복할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유대 문화적 가치관보다, <하나님 말씀을 기준>으로 삼았기 때문이었다.
▲타락한 인간의 모순
인간이 이렇게 모순 속에 살아가게 된 이유는
에덴동산에서 타락한 결과, 하나님의 말씀을 버린 것 때문이다.
마치 비행사가 계기판을 뜯어내고 이륙시킨 비행기와 같다고 하겠다.
하나님의 말씀의 절대적 기준을 버렸기 때문이다.
가장 심각한 모순은
자기 자신이 모순에 빠져 있으면서도
자신이 모순에 빠져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지조차 못하는 모순이다.
▲모순의 자가진단법
내가 지금 모순에 빠져 있는지 아닌지
스스로 확인할 수 있는 간단한 자가진단법이 있다.
<내게 하나님의 말씀은 어떻게 투영되고 있는가?>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때,
자꾸 성경이 모순처럼 내게 여겨지는 것은,
사실은 성경이 모순이 아니라,
내가 모순 속에 깊이 빠져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내가 모순 속에 빠져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내가 진리의 기준인 것처럼 착각하고 살고 있다.
반대로, 모순처럼 보이는 하나님의 모든 말씀이
내게 진리로 믿어지고, 내 삶에 전적으로 수용되어 진다면
그는 ‘자기가 모순’인 사실을 이미 깨달은 사람이다.
▲마치는 말
우리 앞에는 두 가지 인생길이 있다.
모순에 빠져 있으면서도
자기가 마치 정상인처럼 자각(착각)하며 살아가는 <모순의 길>과
언뜻 모순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진리의 길>이다.
어떤 길을 선택할지는 내 자유이지만,
모순에 빠져 있으면서도, 정상인처럼 착각해서 한 평생 살아간다면
인간의 인생이 단 한번 뿐임을 감안할 때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절대 진리이신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모순 덩어리인 나의 실상’을 직시할 수 있어야 하겠다.
유대인 베드로가 이방인의 초청을 받고 기꺼이 수용한 것은
모순을 모순으로 여기지 않았던 것은,
절대적 말씀의 기준이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오늘 내가 똑같이 붙들어야할 기준이다.
그래야 모순으로 가득 찬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사명자로 살아갈 수 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들의 것임이라
<08.08.31. 인터넷설교에서 발췌, 축약. *원제목 : 사양하지 아니하고 II
▲함께 생각해 볼 문제 <말씀은 비밀>입니다.
위에서 '모순'이란 단어가 등장하기에,
비슷한 맥락의 '비밀'을, 잠시 같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바울은 복음의 진리를 ‘비밀’, 즉 ‘미스터리’로 설명합니다. 골1:27, 엡5:32, 고전4:1
쉽게 말하면, 상식적으로 깨달아지는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십자가의 도’는 비밀입니다.
‘하나님 나라’(천국 복음)은 비밀입니다. 막4:11
‘천국 복음의 비밀’은 제자들에게는 깨달아졌지만,
세상 사람들에게는 아니었습니다. 마13:11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복음이 자꾸 현세주의, 기복주의, 성공주의, 세속주의로 흐르는 것은
<비밀로 깨달아야 할 천국복음>을
<인간의 상식>으로 깨달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상식 무시가 아니라, 상식 초월)
‘세상에서 부자되라’는 소리는... 지극히 상식적입니다.
그러나 복음과 십자가의 도에는... 그것을 초월하는 비밀이 있습니다.
(*초월 : 더 수준 높은, 더 고차원적인)
인간의 이성과 상식으로 보면... 성경은 모순 덩어리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것을 <비밀>이라고 말하며, <비밀을 깨달으라>고 합니다.
그렇다고 돈키호테 (상식 무시)가 될 필요는 없지만
현세, 기복, 성공주의적 메시지를 들을 때면
‘복음을 너무 상식적으로만 접근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성령을 받으면, 상식을 초월하는, 복음의 비밀이 잘 깨달아 집니다. <이 단락 편집자 씀
'◑δεδομένα 18,185편 ◑ > उपदेश सामग्री 16,731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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