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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18:5. (고린도에서)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거하니
6. 저희가 대적하여 훼방하거늘 바울이 옷을 떨어 가로되,
너희 피가 너희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나는 깨끗하니라. 이 후에는 이방인에게로 가리라 하고
유대 법에 의하면, 유대인 성인 남자가 최소한 10명 이상 있으면, 회당을 세울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많이 있는 곳에서는 복수의 회당을 세울 수 있었습니다.
고린도에는 유대인 거주자들이 많았음으로 복수의 회당이 있었습니다.
고린도를 방문한 바울이, 처음 찾아간 회당에서 복음을 전했지만
그 회당의 유대인들이 조직적으로 바울을 괴롭히고 집요하게 배척했습니다.
더 이상 그 회당에서 복음을 전하지 못하도록 한 것입니다.
7. 거기서 옮겨 하나님을 공경하는 디도 유스도라 하는 사람의 집에 들어가니, 그 집이 회당 옆이라
그 때 바로 회당 옆의 집 주인인 ‘디도 유스도’라는 사람이
자기 집을 예배당으로 내어놓았고
바울은 그 이방인의 집을 복음을 위한 새로운 거점으로 삼았습니다. ‘거기서 옮겨’ :7
그 덕분에 8절의 증언처럼 다른 회당의 회당장인 그리스보가 바울을 찾아가서
복음을 듣고 자신의 온 혈족과 더불어 주님을 영접했습니다.
8. 또 회당장 그리스보가 온 집으로 더불어 주를 믿으며 수다한 고린도 사람도 듣고 믿어 세례를 받더라.
그 뿐만 아니라 수많은 고린도 시민들도
뭔가 이질적인 유태인 회당보다는
같은 고린도 시민인 디도 유스도의 집을 마음 편하게 찾아 가서
바울로부터 복음을 듣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것은 모두 바울이 찾았던 회당의 유대인들이 조직적으로 바울을 괴롭히고
집요하게 배척했던 결과였습니다.
그것은 사람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신비스러운 주님의 구원의 역사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을 쫓아내었던 유대 회당의 유대인들 입장에서 보자면
그것은 분통이 터질 일이었습니다.
자신들이 쫓아낸 바울이, 다른 곳도 아닌 자기들의 회당 바로 옆집을
예배당을 삼아서, 복음을 전함과 동시에
자신들과 같은 유대인 혈족들은 말 할 것도 없고
수없이 많은 이방 고린도 사람들이,
그 집을 찾아가서 복음을 듣고 세례를 받는 것이 매일 이어지는 것을
그 유대인들이 어떻게 가만히 눈을 뜨고 볼 수 있었겠습니까.
오며 가며 할 수 있는 대로 바울을 해코지하려 하지 않았겠습니까.
오죽했으면 바울이 이제는 고린도를 떠나야겠다고
고린도를 떠나기까지 차라리 침묵하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했겠습니까.
9.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
10.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아무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
바로 그 날 밤에 주님께서 바울을 친히 찾아가셔서
‘두려워하거나 침묵하지 말고 계속 복음을 전하라. 이 도시에 내 백성이 많다’고 격려해주시지 않았던들
그 때 바울은 고린도를 떠나고 말았을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그와 같은 일이 고린도에서 정확하게 언제 일어났었는지
바울을 그토록 조식적으로 괴롭히고 집요하게 배척했던 유태인들의 주모자가
구체적으로 어떤 인물이었는지,
그 사람의 결국이 어떻게 되었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본문 해석
▲본문 행18:12절입니다. ‘갈리오가 아가야 총독되었을 때에
유대인이 일제히 일어나 바울을 대적하여 법정으로 데리고 가서’
때는 갈리오가 로마 제국 행정 구역상 고린도가 속해있는, 아가야 지방의 총독으로 부임했을 때였습니다.
그리스 남반부를 일컫는 행정구역인 아가야에는 아테네도 속해있었습니다.
델피 신전의 비문에 의하면, 갈리오 총독은
주후 51년부터 52년 까지 아가야의 총독으로 재임했습니다.
갈리오는 한때 네로 황제의 가정교사이자,
그 유명한 정치가이면서 철학가요, 웅변가였던 세네카의 친 형이었습니다.
그의 본명은 노바투스였는데, 원로원 의원 유니언스 갈리오의 양아들로 입적되면서
이름이 갈리오로 바뀌었습니다.
갈리오는 동생 세네카와 함께 로마 제국 내에서 탄탄한 권력 기반을 지니고 있었지만
주후 65년에 로마 황제 네로를 축출하려는 모의에 가담했다는 혐의를 받은
동생 세네카와 함께, 네로 황제의 명령에 따라서,
자살로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한 인물입니다.
본문의 시기는 갈리오의 일생 가운데에, 그가 권력의 정점에 있을 때의 일입니다.
그 갈리오가 아가야 지방의 신임 총독으로 부임해서 고린도에 있게 되자
유대인들이 일제히 일어나서, 바울을 대적하여 법정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일제히 일어나 대적하여’
유대인들이 일치단결해서 기습적으로 바울을 붙잡아서, 법정으로 끌고 간 것이었습니다.
그 유대인들의 주동자는 17절에 이름이 밝혀져 있는 소스데네 였습니다.
소스데네는 바울이 고린도에서 처음으로 찾아가서 복음을 전했던 회당의 회당장으로서
바울을 조직적으로 괴롭히고 집요하게 배척해온 유대인들의 주모자였습니다.
(소스데네가, 회당장 그리스보의 후임이었다는 설도 있습니다.)
그 소스데네가 갈리오 총독이 새로 부임하자
고린도의 유대인들을 선동해서, 바울을 기습적으로 붙잡아서 법정으로 끌고 간 것이었습니다.
이유인즉 대부분의 경우에 갓 부임한 총독은,
현지 사정에 눈이 어두워서, 쉽게 여론에 휘둘리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날 옛 고린도의 유적지를 찾아가보면
이때 바울이 유대인들에게 끌려갔던 법정의 흔적이 생생하게 남아 있습니다.
▲18:13절
‘말하되 이 사람이 율법을 어기면서, 하나님을 경외하라고 사람들을 권한다 하거늘’
회당장 소스데네와 유대인들은 갈리오 총독에게
바울이 율법을 어기면서 여호와를 경외하라고 선동한다고 고발했습니다.
우리 말 ‘말하되’ 라고 번역된 헬라어 동사 ‘레고’가 헬라어 원문에는
분사 현재형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동일한 고발내용을, 반복해서 계속 소리쳐 외친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헬라어 원문의 ‘노모스’를 우리 성경이 본문에서 율법이라고 번역한 것은
적합한 번역이 아닙니다.
헬라어 노모스는 유태인의 율법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일반법, 즉 로마법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새 번역 성경은 본문을 이렇게 정확하게 옮겼습니다.
이 사람은 ‘(로마)법’을 어기면서 하나님을 공경하라고 사람들을 선동하고 있습니다.
회당장 소스데네는, 유대인들을 동원해서, 바울이 유대인의 율법을 어겼다고 고발한 것이 아니라
바울이 로마 제국의 국법을 어겼다고 고발한 것이었습니다.
당시 로마 제국 내에서는, 로마제국으로부터 공인된 종교만 포교 활동이 가능했습니다.
그러므로 회당장 소스데네는, 바울이 허락 받지도 않은 불법 사이비 종교 포교로
선량한 시민들을 선동해서, 사회를 문란케 한다는 식으로 고발한 것이었습니다.
이를테면 하나님의 대한 신앙문제를,
로마법과 관련된 사회 정치문제로, 바울을 로마 총독에게 고발한 것이었습니다.
정치는 사람을 살리기 위한 활동을 일컫습니다.
그러나 어떤 문제든지 정치가 개입하면
아무리 사소한 문제라도 일단 정치 문제로 비화하면
오히려 정치가 사람을 죽이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기독교든지, 불교든지 각 종교의 교단 정치도 마찬가지입니다.
교권을 장악한 사람들이,
자신들에게 장애가 되는 사람(대적)들에게, 터무니없이 불의한 짓을 자행해도
‘이건 정치야’ 그러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입을 다물어버립니다. 힘이 크니까요.
유대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일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을 정치범으로 몰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회당장 소스데네는 대단히 교활한 인간이었습니다.
바울을 로마법과 관련된, 사회 정치 문제로 고발한 것은
바울을 아예 로마법으로 생매장 시키는 것은 물론이고
바울이 전하는 복음과 그리스도교를 내보내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대 로마 제국, 중앙 정치 무대 출신이자
그 유명한 세네카의 친 형이었던 갈리오 총독은
회당장 소스데네가 사람들을 동원해서
자기 마음대로 좌지우지할 수 있는 대상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18:14절.
‘바울이 입을 열고자 할 때에 갈리오가 유대인들에게 이르되 너희 유대인들아.
만일 이것이 무슨 부정한 일이나 불량한 행동이었으면
내가 너희 말을 들어주는 것이 옳거니와’
바울이, 소스데네와 유대인들의 고발에 대해서, 자신을 변호하려고 하자
갈리오 총독은, 바울의 자기 변호를 들어볼 필요도 없다는 듯이 바울을 제지하고
유태인들에게 이야기 했습니다.
즉 바울이 무슨 부정한 일이나 불량한 행동을 저질렀다면
너희들의 고발을 받아줌이 마땅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바꾸어 말씀드리면 바울의 행동은 로마법과는 전혀 무관함으로
너희들의 고발을 받아줄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갈리오 총독은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15절입니다.
▲18:15.
‘만일 문제가 언어와 명칭과 너희 법에 관한 것이면 너희가 스스로 처리하라.
나는 이러한 일의 재판장 되기를 원치 아니하노라’
갈리오 총독은 바울에 대한 유대인들의 고발을
언어와, 명칭과, 유대인의 율법에 관한 문제로 파악했습니다.
우리 말 ‘언어’로 번역된 헬라어가 원문에는 ‘로고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킨다고 봐도 됩니다.
즉 갈리오 총독은 예수님께서 구약 성경이 예언해온 구원자,
즉 그리스도시라는 바울의 전도 행위를
구약 해석의 문제,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부를 수 있느냐는 ‘명칭’의 문제,
‘율법’ 적용의 문제로 파악한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바울의 문제가 로마 법과 관련된 사회 정치 문제가 아니라
유대인들 내부의 종교적인 문제임을 정확히 판단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갈리오 총독은 이런 문제는 자신이 관여하지 않겠다며
유대인들의 고발을 그 자리에서 각하해버렸습니다.
※‘너희가 스스로 처리하라’
종교 문제는, 교회 안에서 처리하라는.. 중요원칙이 나와 있습니다.
▲18:16절.
‘그들을 법정에서 쫓아내니’
갈리오 총독이 유대인들을 법정에서 쫓아내었다는 게, 대체 무슨 의미겠습니까?
소스데네는 로마법으로 바울을 옭아매려 했지만
갈리오 총독은 그것은 율법의 문제일 뿐이라며 일축하며 각하해버렸습니다.
그러자 소스데네를 비롯한 유대인들은, 총독의 판결에 승복하지 않고
마치 시위를 버리듯 법정에서 계속 소란을 피웠던 것입니다.
이에 갈리오 총독은 즉각 경비병들을 시켜서, 유대인들을 법정 밖으로 쫓아버렸습니다.
그런데, 그와 동시에 상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17절입니다.
▲18:17절
‘모든 사람이 회당장 소스데네를 잡아 법정 앞에서 때리되
갈리오가 이 일을 상관하지 아니하니라’
본문의 모든 사람은 법정에 참관했던 고린도 시민들을 의미합니다.
당시 법정은 누구든지 참관할 수 있는 공개 장소 이었습니다.
소스데네와 그가 동원한 유대인들이, 패거리를 이루어서
바울을 끌고 법정으로 가서, 소리소리 지르면서 바울을 총독에게 고발하자
지나가던 고린도 시민들이 대체 무슨 일인가 법정으로 몰려들었습니다.
고린도 시민들은 패거리를 이룬 유대인들에게
죄수로 끌려온, 전혀 죄수처럼 보이지 않는 연약한 몰골의 바울을
자신들의 눈으로 보았습니다.
그 연약한 바울을 악랄하게 고발하는 유대인들의 고발 내용을
자신들의 귀로 들었습니다.
유대인들의 고발을, 즉각 각하 하는 총독이 각하해버리는 장면을
그들은 직접 목격했습니다.
그런데도 유대인들은 총독의 판결에 불복해서,
마치 시위를 버리듯이 법정에서 계속해서 소란을 피웠습니다.
그 자리에 참관하고 있던 고린도 시민들은
그처럼 무례하고도 악랄한 유대인들을 보면서
다 같이 마음 속에 분노를 느꼈던 것입니다.
그래서 갈리오 총독이 경비병들을 시켜서, 유대인들을 법정에서 쫓아내자
곧 따라 나가서 그 악랄한 유대인들을 총 지휘했던
가장 악랄했던 우두머리 소스데네를 법정 앞에서 때렸습니다.
우리 말 ‘때리다’ 라고 번역된 헬라어 동사 틱토는
‘몽둥이로 때리거나 주먹으로 친다’는 의미까지 내포하고 있습니다.
고린도 시민들이 지나가면서 소스데네를 한 번씩 툭툭 치거나 건드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분노한 고린도 시민들이 소스데네에게 집단 폭행을 가한 것이었습니다.
이미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본문보다 2년 앞서 제국의 수도에서 일대 폭동을 일으켰던 유대인들에 대한
고린도 시민들의 반감도 작용 했겠지만
무엇보다도 유대인 가운데에서 소스데네가, 그 연약한 바울에게 가장 악랄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바울을 로마 법과 관련해서 사회 정치적인 죄인으로 몰아서
아예 매장시켜버리려고 했던 회당장 소스데네의 계책은
뜻밖에도 그 자신이 분노한 고린도 시민들에게,
집단 폭행당하는 것으로 끝나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그 사건을 통해서 바울은
그 이후 고린도에서 체류하는 동안, 남은 기간에
그 누구로부터도 제지를 받거나 방해받지 않고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상관하지 아니하니라’
놀라운 사실은 분명히 총독 갈리오가 보는 앞에서 소스데네가
고린도 시민들에게 집단 폭행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치안 질서를 지켜야할 갈리오 총독이
집단 폭행당하는 소스데네를 구해주려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더욱 충격적인 사실은, 소스데네의 사주를 받고 패거리를 이루고
바울을 기습적으로 붙잡아서 법정으로 끌고가서 소리 지르며 고발했던 유대인들조차도
분노한 고린도 시민들에게 집단 폭행 당하는 소스데네를 방관했습니다.
조금 전 까지만 해도 그토록 기세등등했던 소스데네는
그 누구도 도와주지 않는 가운데
분노한 고린도 시민으로부터 단신으로 집단 폭행을 당했습니다.
그것은 그동안 집요하고도 악랄하게 바울을 괴롭혀왔던 소스데네에 대한
하나님의 이 지상에서의 심판이었습니다.
만약 소스데네가 이 때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지 않았다면
그는 이 세상을 떠나서도 하나님의 영원한 심판도 절대로 모면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적용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해서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한 가지는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바울 처럼 선한 일을 하다가
선한 일을 하는 것 때문에 누군가로부터 악랄하게 괴롭힘을 당해도
선한 일 하기를 포기하려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때가 되면, 그 악랄한 사람을 지상에서든 하나님의 나라에서든
반드시 당신의 방법으로 손 보실 것이요,
그 과정을 거치면서, 우리는 더 강인한 자유인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한 가지는 만약 우리가 지금 누군가를 불의하게 괴롭히고 있다면
지체 없이 중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 세상에서든 이 세상을 떠나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든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자초하는 어리석은 짓입니다.
주님의 뜻을 따라 선하게 살다가
누군가로부터 악랄하게 괴롭힘을 당함으로 인해
주님 좇기를 포기하려하고 있다면 (참회의 절기인 사순절 두 번째 주일을 맞이해서)
우리의 연약한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십시다.
우리가 주님의 길을 좇다가, 이 세상에서 바울처럼 설령 참수형을 당해 죽는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실은 주님 안에서 영원한 자유인으로 영원히 사는 길입니다.
만약 우리가 지금 누군가를 불의하게 괴롭히는 만용과 무지를 범하고 있다면
더욱 당장 하나님 앞에 회개하십시다.
그것은 바울을 집요하고도 악랄하게 괴롭혔던 소스데네가
그 누구도 도와주지 않는 가운데 분노한 고린도 시민들로부터 집단 폭행을 당하듯이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 앞에 자신을 무모하게 내던지는 자살행위입니다.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펴보시는 하나님의 심판보다 더 무서운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을 등지고 불의하게 사람을 괴롭히고서도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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