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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속으로 〓/영성 교회 성장 10대 지침등(가나다순)

성경이 가르치는 결혼, 이혼 그리고 재혼

by 【고동엽】 2022. 1. 12.

성경이 가르치는 결혼, 이혼 그리고 재혼

 

총신대 황규명 교수

 

1. 결혼의 성경적 개념

 

우리는 교회 안팎에서 옛 가치들이 도전받고 있는 시기에 살고 있다. 크리스챤들은 혼돈 속에 있고 무엇을 믿어야할지 정확하게 모르고 있으며, 그들에게 필요한 도움을 어디서 찾아야 하는지도 모르고 있다. 특히 이혼과 재혼에 관한 문제들은 교회에서도 회피해왔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그러나 시대가 바뀌고 거꾸로 된 ‘새로운 도덕성(new morality)’이 나타나게 되자 교회는 더 이상 눈을 감을 수 없게 되었다. 만일 교회가 결혼과 이혼에 대한 성경적인 원리를 젊은이들에게 가르치지 않는다면, 세상이 세상의 이데올로기를 가르칠 것이다.

결혼에 관한 성경적인 원리들을 이해해야 이혼이나 재혼에 관하여 생각할 수 있는데, 많은 경우 이혼에 관련된 문제들을 다루는 사람들이 결혼에 대한 성경적 관점을 전개하는데 시간을 많이 할애하지 않음으로 인하여 성경적 자료를 바로 이해하지 못한다. 따라서 이혼과 재혼에 관한 바른 성경적 입장을 갖기 위해서는 결혼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렇다면 결혼이란 무엇인가? 첫째, 결혼은 인간의 편리한 산물이 아니다. 하나님이 결혼제도를 제정하셨고, 오직 하나님만이 그것을 폐기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 둘째, 결혼은 기본적인 제도이며, 인간 사회에 설립된 첫 번째 제도이다. 셋째, 결혼은 종족을 번식시키기 위하여 고안된 것이 아니다. 넷째, 결혼과 성적인 연합은 다르다. 결혼은 성적인 연합보다는 크고 포괄적인 것이다.

결혼을 해야 하는 이유는 고독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다. 창 2:18에 보면, 아담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결혼을 하게 하셨다.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따라서 결혼의 본질을 동반자 관계라는 용어로 묘사할 수 있는데, 동반자는 하나의 친밀한 연합 혹은 관계로 들어가는 사람이다. 즉 결혼관계에 들어가는 것은 서로에게 동반자 관계의 필요를 채워주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결혼 안에서의 사랑은 배우자의 외로움을 없애기 위해서 필요한 동반자 관계를 제공하는 데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Adams는 이러한 이유로 결혼을 ‘동반자 관계의 언약’이라고 불렀다. 잠언 2장 17절에 젊어서 결혼한 동반자를 버리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을 잊어버리는 것과 동일하다고 말씀하고 있으며, 말라기 2장 14절에서도 하나님은 그들의 동반자들에게 진실하지 않은 남편들을 책망하신다. 이러한 동반자들은 언약에 의해서 아내가 된 자들을 묘사하고 있다. 그러므로 동반자 관계가 두드러지게 나타나있는 이 두 구절은 결혼의 언약적인 측면이 강하게 나타나있다. 이 언약에서 두 사람의 언약은 자녀를 낳아서 기르고 서로의 성적인 필요를 충족시키는 것 이상의 것을 언약하는 것이다.

하지만 단순히 외로움을 없애고 독처하지 않게 되는 것 그 이상의 의미가 결혼 안에 있다. 결혼에는 하나님의 더욱 궁극적인 목적이 있는 것이다. 우리는 성경이 말하고 있는 궁극적인 결혼의 목적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에베소서 5장 25절부터 28절까지와 베드로전서 3장 1절부터 7절까지를 보면 ‘이와 같이’라는 말을 남편과 아내에게 사용하고 있다. 특히 베드로전서 3장에서 ‘이와 같이’는 그 앞부분인 2장에서 설명되고 있는데 이는 그리스도에 대한 것이다. 그 부분은 2장 21절부터 24까지를 통해서 재해석 되어져야 한다. 2장에서 성경말씀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고난 속에서도 보복하거나 죄를 짓지 않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셨고 이로 인해 결국 우리를 위한 은혜로운 결과가 이루어졌다. 이 말씀 후에 결혼에 대해서 베드로는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자, 이제 에베소서 5장과 베드로전서 2,3장을 함께 놓고 볼 때 가르침의 초점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께 초점을 맞추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의 사랑에 대해서 우리의 성화를 위해서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과 고난 가운데서도 어떻게 믿음을 지키고 하나님께 주님이 자신을 맡긴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이런 것들은 우리의 외로움과는 관계가 없는 것이다.

또한, 에베소서에는 그리스도를 묵상하고 닮으라고 한다. 에베소서 5장에서 바울은 창세기 2장을 직접 인용해서 부모를 떠나서 둘이 한 몸을 이룰지니라고 말하고 있다. 바울은 창2장의 말씀이 예수님에 관한 말씀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에베소서 5장 32절에서 결혼을 가리켜 ‘신비’라고 했던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바울이 창세기 2장에서 결혼을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로 보았다면 우리도 그렇게 보아야 한다. 누가복음 24장에서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리스도에 관한 관점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예를 들면,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과 만나는 장면이 그 한 실례이다. 두 제자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지 못한 가운데 엠마오로 가고 있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주님을 밝히지 않고 그들에게 다가가서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질문하셨다. 그들은 예수님에 관한 모든 이야기를 하고 있고 메시야라는 그분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심으로 실망하고 좌절했다고 하자 예수님은 구약을 인용하시면서 제자들이 성경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꾸짖으셨다. 그런 다음 모세와 선지자를 통해서 성경을 가르치셨다. 이렇게 예수님이 그들에게 나타나셔서 가르치셨을 때 그들의 반응은 ‘놀라움’이었다. 하나님의 말씀이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왔다. 바울이나 다른 신약의 저자들이 여러 곳에서 예수님의 모습을 발견한 것이다. 그러므로 결혼의 목적을 알기 위한 출발점은 외로움이나 배우자 각각의 필요가 아니라 예수님이시다.

그리고 우리도 바울이나 베드로처럼 다시 창세기 2장으로 돌아가야 한다. 어떻게 결혼이 그리스도를 이해하는데 증진시켜 줄 것인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아까 보았던 창세기 2장 18절에서 사람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않다는 말씀에서 무엇이 문제가 되는가?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은 사람에게 독처하는 것이 무엇이 문제인가? 이를 알기 위해 창세기 1장 27절을 살펴보자. 이 구절에서는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형상대로 창조하셨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사람이 창조되었는데 남자와 여자의 모습을 창조하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는 것은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진다. 우선은 하나님과 관계를 맺기 위해서이며, 하나님과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필요한 것이 있는데 그것들은 이성적 존재, 의사소통의 능력, 다른 피조물을 다스릴 수 있는 능력과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신 것과 같은 창조적인 능력이 있다. 또한 하나님의 도덕적인 성품, 품성을 생각 해 보라. 그분의 선하심, 의로움, 정직성, 겸손, 자비, 희생, 인내, 동정심, 긍휼히 여기심이 있고 우리도 이러한 성품을 본받았다.

 

대부분의 미혼남녀들이 결혼하기 전에는 자신이 인내를 잘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희생도 잘하고 동정심도 교통체증 속에서 다른 차들을 끼어들게 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결혼을 하고 나면 자신이 이 중에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다시 말하면, 혼자 있을 때는 이런 하나님의 속성을 잘 알지 못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관계성 속에서 우리에게 나타나셨다. 우리가 자비와 인애를 알 수 있는 것은 자비와 인애의 하나님이 우리와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고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우리 자신을 잘 알게 된다. 내게 뭔가가 부족하다는 것을 다른 사람과 매일 관계를 맺으면서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결혼생활 속에서 정말 내게 구주가 간절히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사실 하나님 자신이 삼위일체라는 관계성 속에 거하신다. 삼위일체는 신비다.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 우리가 이해하는 것은 세분이 한 분으로 나타나는 관계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시기 전부터 관계성 속에 계셨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으로 창조하신 것은 모두 관계성 있는 것으로 창조하셨고 그중의 인간은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다.

 

 

2. 이혼에 대한 성경적 이해

 

이제 이혼에 대해서 살펴보자. 어떤 의견들과는 반대로 이혼의 개념은 오히려 성경적이다. 성경은 이혼을 인정하고 있으면서도 무분별한 이혼은 통제하고 있다. 먼저 성경이 이혼에 대해서 침묵하거나 혹은 언제든지 이혼한 모든 사람에게 책망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하나님이 이혼을 미워하시는 것은 사실이다.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이혼하는 것을 미워하노라”(말 2:16).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이혼을 똑같은 방법으로 미워하시지는 않으며 또한 이혼의 모든 국면을 미워하시지도 않는다. “내게 배역한 이스라엘이 간음을 행하였음으로 내가 그를 내어 쫓고 이혼서까지 주었으되”(렘 3:8). 즉, 하나님은 그 자신이 부정한 이스라엘에게 행하신 것처럼 성경에 씌어진 규칙을 따라서 행해진 이혼은 미워하지 않으신다.

따라서 우리는 이혼에 대한 균형 잡힌 성경적인 태도를 갖는 것이 중요하다. 하나님이 이혼에 대하여 싫어하시는 모든 것을 싫어하는 한편, 이 죄악 된 세상에서는(하나님 자신이 보이셨던 것처럼) 이혼을 꼭 해야 할 경우가 있다는 것을 시인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물론 잘못되게 이혼을 한 사람들은 그들의 행동에 대해서 변명의 여지가 없는 것이며 그러한 이혼은 죄라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한다. 그러나 그럴 때 오히려 소망이 있다. 엄밀하게 말해서 그것이 죄이기 때문에 용서받을 수 있는 것이다. 이혼은 용서될 수 없는 죄가 아니기 때문에 이혼은 용서받을 수 있다.

 

이러한 법률적인 이혼은 언제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여기에 대해서는 아는 사람이 없다. 이혼의 기원은 인간 역사의 희미한 과거의 어느 한 부분에 위치해 있다. 그렇지만 분명 이혼은 결혼과는 달리 하나의 인간적인 제도이다. 성경적인 증거로는 이혼이 인정되었고 허용되었으며 통제되었지만, 이혼은 결혼과는 달리 하나님에 의해 제도화되지는 않았다. 이혼은 이혼을 하나의 기정사실로 인정하는 구절들에서 처음으로 성경적인 개념으로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규제하는 일을 행하셨다(신 22:19, 29; 24:1-4). 또한 예수님은 오히려 이혼을 인식하시고 그것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것을 하셨다.

 

⑴ 하나님은 이혼이 특별한 경우에만 허용이 되었고 다른 경우에는 허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하신다.

⑵ 이혼을 할 때에는 질서 있게 해야 한다.

⑶ 이혼을 하는 사람들은 이혼이 가져올 수 있는 결과를 깊이 인식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입장은 하나님과 같아야만 한다. 우리는 이혼을 그냥 좋게 넘겨서도, 쉽게 비난해서도 안 되며 그리스도의 교회의 지도자와 직분 맡은 자들로서 성경의 원리에 따라서 성도간의 이혼을 규제해야 한다.

과거 성경의 시대에는 이혼이 어떻게 행해져 왔는가? 첫째, 서면으로 된 이혼증서가 있었다(신 24:1하; 렘 3:8). 이 이혼증서는 반드시 서면으로 행해야 하며, 분명하게 이혼사실을 기록해야만 했다. 이 증서는 이것을 받는 사람으로 하여금 거짓고소, 오해 등으로부터 보호했으며 여자의 위치를 결혼하지 않은 것으로 분명히 밝혔다. 서면으로 하는 것은 법적으로 뿐 아니라 신중하고 심사숙고하도록 만들었다. 둘째, 증서는 반드시 전달되어야 한다(신 24:1). 이혼을 하는 사람은 본인이 직접 증서를 상대방의 손에 쥐어주어야 한다. 셋째, 이혼당한 사람은 반드시 집에서 내어보내야 했다(신 24:1). 가정이 실제로 더 이상 존속할 수 없다는 행동을 정식으로 행해야 한다.

그러나 크리스챤의 모습으로서 이혼은 결코 바람직한 것이 아니며, 크리스챤 가운데서의 이혼은 결코 필연적인 것이 아니다. 성적인 죄의 경우에는 크리스챤들에게 이혼이 허용되지만 이혼이 결코 필수적인 것은 아니다. 즉 화해는 교회의 보살핌과 훈련 아래에서 믿는 자들 사이에 언제나 가능하다. 이혼은 사라지지 않을 일이지만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인간의 마음의 완악함으로 인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혼을 하려는 사람들에게 대안을 다시 생각하도록 하고, 이혼한 사람들이 재혼하기 전에 그리고 너무 늦기 전에 화해하도록 하는 모든 적당한 노력과 도움이 있어야만 한다.

 

이제 이혼에 대해서 좀더 세밀하게 살펴보려고 한다. 이혼이란 두 사람이 서로를 위해서 동반자 관계를 제공하기로 한 언약을 거절하고 깨뜨리는 것이다. 그래서 이혼의 개념은 전에 존재했던 언약적인 관계를 절단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또 별거에 대해서는 신약에서 항상 이혼에 의한 별거라고 언급된다. 즉 별거가 성경에는 현대의 이혼보다는 좀 덜한, 이혼의 대안으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7장에서 신약성경에서 고찰하는 두 가지 가능한 이혼 사례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을 해석하여 그것을 적당한 문맥으로 사용하고 있다. 바울은 10절에서 “혼인한 자들에게 내가 명하노니(명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주시라)...”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12절에서는 “그 남은 사람들에게 내가 말하노니(이는 주의 명령이 아니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두 가지 서론적인 구절들은 무리를 두 가지 다른 사람들의 그룹으로, ⑴ 첫 번째 그룹과 ⑵ “그 남은 사람들”이라고 불린 두 번째 그룹으로 소개시킨다. 이 두 서론적인 구절들은 많은 크리스챤들에게 불필요한 고민을 하게 하는데, 어떤 사람들은 첫 번째 그룹은 신적으로 명령을 받는 것이고 두 번째 그룹은 단지 바울의 독실한 충고를 받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는 바울의 말에 대한 일반적인 잘못된 해석에서 나온 것이다. 영감을 받지 않은 성경말씀, 잘못된 성경말씀, 권위가 없는 성경말씀은 하나도 없다.

그렇다면 바울은 서론적인 구절을 통하여 다음과 같은 것을 말하려고 한 것이다. 첫째, 10절과 11절에서 바울은 사실상 “나는 주님이 제자들과 함께 계시면서 성도간의 이혼에 대하여 말씀하셨을 때 그 가르침대로 그가 말씀하신 이혼에 대한 원리를 정확하게 되풀이 한다.”고 말하고 있다. 둘째, 그러나 12-16절에서 그는 사실상 “지금 나는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실 때는 생기지 않아서 말씀하지 않으셨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이 문제는 복음이 이방인들 가운데로 전파된 지금 일어났고, 나는 이것에 대하여 말을 하겠다(내가 이 편지에서 이와 비슷한 많은 다른 문제들에 대하여 말한 것처럼 영감을 받은 동일한 방법으로).”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바울은 하나님의 사도로서 부가적인 문제들을 다룸으로써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이혼에 대한 가르침에 교훈을 덧붙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여기 나온 두 그룹을 분리하는 목적이다. 그렇다면 두 그룹은 누구인가? 고린도전서 7장 10절과 11절, 12-16절을 얼른 보면 예수님은 믿는 자들 간의 이혼에 대하여 말씀하고 계셨다. 10절과 11절에서는 바울이 이혼을 심사숙고하는 두 사람에게 말한다. 그러나 12-16절에서 바울은 결혼한 후 불신자들과의 이혼을 심사숙고하는 크리스챤들에게 말하기 시작한다. 이 문제는 신약성경에서 처음으로 다루어지는 문제였다. 바울은 두 그룹에 대한 하나님의 방법이 같지 않다는 것을 제시한다. 성경 전체를 통하여 이러한 동일한 그룹을 포함하는 상황들은 이들이 서로 다르게 다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다른 삶의 범주에서도 믿는 자들과 믿지 않는 자들의 관계는 두 믿는 자들 간의 관계보다는 다르게 취급해왔다. 고린도전서에서도 바울은 이 점을 일관되게 주장해왔다.

그렇다면, 첫 번째 그룹인 ‘믿는 자들과 결혼한 믿는 자들’에게 바울은 무엇을 말하는가?

 

혼인한 자들에게 내가 명하노니 (명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주시라) 여자는 남편에게서 갈리지 말고 (만일 갈릴지라도 그냥 지내든지 다시 그 남편과 화합하든지 하라) 남편도 아내를 버리지 말라(고전 7:10-11)

 

이 구절에서 기본적인 이중의 명령은 크리스챤 아내나 크리스챤 남편은 이혼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리스도가 가르치신 결혼한 크리스챤들에 대한 동일한 기본적인 진리를 가르친다. 그리고 바울이 ‘만일 갈릴지라도’라는 말을 한 것은 갈리는 것에 대하여 허락하지 않지만, 죄악된 불순종으로 인하여 이혼이 행해지는 것을 인식하므로 그는 더욱 첨가된 죄로부터 오는 더욱 크고 복잡한 문제들에 대하여 경고하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또 이혼한 아내가 결혼하지 않은 상태로 지내는 것은 화해의 가능성을 허용하게 함이다. 다른 사람과 결혼하는 것은 화해를 배제하는 것이다. 바울이 좇는 것은 화해이다. 바울은 두 믿는 자들이 보다 새롭고 성경적인 방법으로 결혼으로 돌이키기를 원한다. 모든 믿는 자들은 말씀과 성령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들은 화해뿐만 아니라 미래에 아름다운 결혼을 가져올 수 있는 필요한 모든 것을 소유하고 있다.

두 번째 그룹인 ‘불평등하게 멍에를 진자들‘에게 바울은 무엇을 말하는가? 바울은 믿는 자에게 그의 구원받지 못한 배우자와 이혼하지 말라는 명령을 하는 대신에 다른 것을 명령한다. 그(혹은 그녀)는 결혼을 계속 유지하기를 원하는 배우자와 이혼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만일 믿는 자가 막을 수 있는 모든 일을 한 후에도 믿지 않는 자가 결혼을 유지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면, 이혼은 용납할 수 있는 하나의 대안이라고 할 수 있다. 믿지 않는 자가 결혼에서 떠나기를 원하는 경우에 바울은 “갈리게 하라”(15절)고 말한다. 믿지 않는 자가 결혼을 지속하려는 동의가 없으며(12, 13절), 그 반대로 결혼을 끝내려는 요구가 있을 때는 크리스챤이 갈리는 것을 방해하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크리스챤의 결혼이 결론이 없는 채로 있는 것을 원하시지 않는다. 하나님은 결혼의 문제들이 해결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화평을 원하신다. 결혼이 존재하거나 않거나 해야 한다. 하나님은 중간 상태의 것으로 만족하지 않으실 것이다. 이 문제는 화평을 얻기 위해서 어느 쪽으로든지 결말을 지어야 한다. 따라서 오늘날의 별거라는 견해는 이 원리를 범하는 것이기 때문에 비성경적이다. 별거는 아무것도 해결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확실성이 없게 만들고 또한 진정한 평화에 대한 역효과를 나타낸다. 크리스챤들조차 종종 그래도 이혼보다 낫다고 생각하고 별거를 한다. 그러나 별거는 성경에 대한 인간적인 대용품이기 때문에, ‘이혼보다는 별거’라는 생각에서 이루어진 별거는 이익보다는 더 많은 해를 끼치게 된다.

모든 이혼들은 어떤 형태의 죄로부터 기인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모든 이혼이 죄악된 것은 아니다. 성경은 믿는 자가 믿지 않는 배우자와의 결혼을 지속시키려고 모든 노력을 했을 때에만 이혼을 합법화한다. 그러나 만일 믿지 않는 배우자가 견고하게 결혼생활을 반대한다면 믿는 자는 이혼하는 것을 반대하지 않아도 된다(고전 7:15). 이 이혼은 모든 노력이 실패했을 때 마지못해서 승낙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혼의 결과는 믿는 자를 모든 결혼의 의무에서 벗어나게 하며, 믿지 않는 전배우자와 다시 재혼해야 하는 모든 의무에서도 벗어나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예수께서 믿는 자들 간의 단 한가지의 이혼의 이유로 음행을 승인하셨다는 점이다.

음행은 어떠한 형태이든지 간에 모든 성적인 죄를 포함한다. 그러나 음행이라는 단어에 혼돈이 있다는 것은 숙고할만하다. 미국 법에서 음행은 미혼자들이 저지르는 성적인 죄를 뜻하지만 간음은 기혼자들의 성적 죄를 뜻한다. 그렇지만 이 구별이 성경으로까지 연결되면 안 된다. 이것은 성경적 구별이 아니다. 간음은 항상 성적인 죄보다는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고, 여기에는 결혼의 언약이 언제든지 고려되는 개념이다. 성적으로 부당하다는 개념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을 결혼생활 안에 끌어들임으로 해서 결혼언약을 깨뜨리는 것으로 이해된다. 주님은 음행을 이혼서류를 전달할 수 있는 근거로 보시는데, 그것은 간음뿐만 아니라 근친상간, 짐승과 성교하는 것, 남성의 동성연애 그리고 여성의 동성연애도 포함하기 때문이다. 단지 간음만을 말한다면 그 초점을 너무 협소하게 만드는 것이 된다.

 

성경이 이혼을 허용하는 이유로 음행을 말하고는 있지만, 남편이나 아내가 범죄한 배우자의 회개를 근거로 해서 용서를 하는 것도 분명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성경적인 상담자는 이러한 대부분의 사례들을 취급할 때 죄를 범한 배우자에게 회개를 요청하고, 마지막으로는 부부가 화해를 하도록 격려할 것이다. 만일 죄를 지은 배우자가 회개를 한다면 그 배우자는 반드시 용서해야만 한다.

여기서의 ‘용서’는 이 문제를 다시는 문제 삼지 않는 것을 포함하고 있다. 믿는 자는 용서한 후에 이혼을 요청하면 안 된다. 그리고 용서는 용서받은 사람과의 새로운 관계로 이끌어 간다. 그러므로 믿는 자가 음행을 범했을 때의 이혼은 음행하고도 회개하지 않는 사람에게 만으로 제한해야만 한다. 그러나 죄짓지 않은 배우자가 용서하기를 원하고 결혼생활을 계속하기를 원하지만, 죄를 범한 자가 회개를 하지 않거나 죄를 계속 범하기 때문에 용서를 하지 못하는 경우는 어떠한가? 이러한 경우의 사례들에서는 화해와 권징의 역동성이 필요하다. 대부분의 경우에는 화해가 이루어질 것이며 끝까지 회개하지 않고 화해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부득이하게 권징이 실시되어야만 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어느 쪽을 선택하든지 부부간의 갈등이 미해결의 문제로 남지 않게 된다.

마지막으로 남은 문제를 생각해보자. 창세기, 신명기, 그리고 그리스도에게서 나타난 이혼의 가르침은 적극적으로 이혼을 알리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창세기 2장, 신명기 24장 1-4절, 마태복음 5장 31-32절, 19장 3-9절, 마가복음 10장 2-12절과 누가복음 16장 18절에서 우리는 이혼에 관한 가르침을 찾아 볼 수 있다. 신명기의 구절은 바리새인들에 인하여 소개되었고 예수님께서 그 구절들을 인용하셨다. 예수님이 듣는 사람들에게 결혼의 근본원리, 목적과 목표를 생각하게 하기 위하여 창세기 2장을 통해 토론하셨다. 그리고 이혼은 하나님의 율법과 인간들의 배우자들에게 무정하고 완강한 태도를 보인 결과에 대해 언급하면서 소개되었다. 즉 하나님이나 모세조차도 오직 허용하고 규제했을 뿐이며, 하나님이나 모세에 의해서 소개된 것이 아니다. 예수께서도 문제를 적절한 상황에 맞추어 전개하시기 위해서 창세기의 그 구절을 인용하신 것뿐이었다.

 

 

3. 재혼에 대한 성경적 이해

 

신명기 24장 1-4절에 나오는 이혼의 모습은 첫째, 이혼을 이미 존재하는 것으로, 그리고 합법적인 절차로 인정하고 그 절차를 규정하고 있다. 둘째, 음행 이외의 이유의 경우에는 이혼을 제정하거나 허용조차도 하지 않는다. 셋째, 쉽게 이혼하는 것을 격려하지 않는다. 가장 중요한 요점은 이혼이나 재혼이 한번 행해지고 나면 그것을 수정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성급한 행동을 막으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신명기 24장 1-4절은 비성경적 혹은 불법적인 근거에서 주어진 이혼을 말하는데, 그러한 이혼은 합법적이지만 죄악된 것이다.

이 구절들을 더 자세히 살펴보면, 신명기 24장 4절에서 아내는 두 번째 결혼 때문에 “더럽혀”졌기 때문에 첫 남편과 재혼을 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다. 그녀의 첫 남편으로부터의 이혼은 법적으로는 합법적일지 몰라도 성경적으로는 용납될 수 없었던 것이다. 이혼이 적절하고 죄 없는 것이었다면 그 이혼으로써 그녀는 두 번째 남편과 죄 없이 재혼하도록 자유롭게 되었다. 그녀는 첫 남편과 계속해서 결혼생활을 하거나 화해를 해야 하는 의무가 없었다. 그러나 두 번째 결혼이 그녀를 “더럽혔다”. 우리는 만일 그녀가 두 번째 남편과 이혼으로 헤어진 것이 아니라 그 남편의 죽음으로 헤어졌을 경우에도(3절), 그녀가 더러워졌기 때문에 다시 재혼을 못한 것으로 보아서 그녀는 두 번째 이혼으로 더러워진 것이 아니라 두 번째 결혼으로 더러워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녀가 오직 두 번째 남자와 성적 관계를 맺었기 때문에 더러워졌다기 보다는 오히려 결혼서약을 깨뜨린 것 때문에 더러워졌다. 여기에는 간음이 포함되어 있었다. 따라서 신명기 24장에서 잘못된 일은 두 남자가 한 아내를 차례로 가졌다는 태도가 아니라 어떻게 그리고 어떤 방법으로 그 일이 일어났는가 하는 점이다. 여호와께서 신명기 24장에서 혐오스럽고 더렵혀짐으로 이어진다고 부른 것은 결혼의 연속보다 더 깊은 것이다. 신명기 24장의 아내는 두 번째 남편과의 성적 관계 때문에 더럽혀진 것이 아니라 죄악된 이혼(합법적이지만)으로 인해서 일어난 두 번째 결혼과 성적 관계로 인해서 더렵혀진 것이다. 첫 번째 이혼은 천박한 이유였기 때문에 죄악된 것이었다. 그래서 두 번째 결혼도 죄악된 것이었다.

여기에서 재결합의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죄악 된 이혼은 첫 결혼의 언약을 정말로 깨뜨렸다. 간음은 항상 결혼 언약을 깨뜨려서 제 3자를 상황 속으로 개입시키므로, 둘만이 서로를 위해서 하기로 한 언약에서 제 3자에게 권리나 특권을 주게 되는 것이다. 정상적으로 간음은 결혼 언약이 아직 영향이 있을 때 일어난다. 그러므로 언약은 깨어졌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 그들은 이혼한 상태로 그대로 있을 권한이 없다. 그들에겐 재결합을 통한 재혼으로 다시 화해할 수 있는 소망이 있다. 그것이 핵심이다. 바울이 말한 것처럼 그들은 화해할 수 있도록 다른 사람과 재혼을 하지 않아야 하며 또 다른 간음을 하지 않기 위해서도 재혼을 하지 않아야만 한다.

 

마지막으로 만일 이혼한 사람들이 재혼할 수 있다면, 그들 중 어떤 사람들이 어떤 경우에 할 수 있는지를 질문해 보아야 한다. 재혼이란 무엇인가? 성경은 재혼을 허락하시는가, 반대하시는가? 격려하시는가, 묵인하시는가? 성경에는 배우자가 죽은 후에 재혼하는 것에 대해서는 특별히 반대하는 것이 없다. 다음 성경구절들을 살펴보자.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자유케 되나니 다른 남자에게 갈찌라도 음부가 되지 아니하느니라(롬 7:3하)

 

아내가 그 남편이 살 동안에 매여 있다가 남편이 죽으면 자유하여 자기 뜻대로 시집갈 것이나 주 안에서만 할 것이니라(고전 7:39)

 

그러므로 젊은이는 시집가서 아이를 낳고 집을 다스리고 대적에게 훼방할 기회를 조금도 주지 말기를 원하노라(딤전 5:14)

 

바울은 과부들이 재혼하지 않을 때 생길 수 있는 유혹, 불명예, 참견 그리고 교회가 과부들을 돕기 위해서 불필요한 짐을 지는 것의 가능성을 볼 수 있었다. 그래서 현실적인 이유들과 하나님의 이름의 증거를 위해서, 바울은 이러한 가르침을 교회에게 주었다. 즉 재혼 그 자체에 대해서 잘못된 점을 찾는다거나 문제점을 찾기보다는 오히려 재혼이 권고된 것을 볼 수 있다. 더욱이, 바울은 성욕을 억제하지 못하는 어려움을 가진 과부들에게 이 문제를 해결하는 한 가지 방법으로 재혼을 명령했다.

 

내가 혼인하지 아니한 자들과 및 과부들에게 이르노니 나와 같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 만일 절제할 수 없거든 혼인하라 정욕이 불같이 타는 것보다 혼인하는 것이 나으니라 (고전 7:8,9)

 

분명하게 재혼의 개념은 신약의 교회에서 매우 좋게 받아들여졌다. 그것에 대해서는 합리적인 의혹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에 비추어서 볼 때 바울이 교회가 재혼한 사람을 장로나 집사로 임명하는 것을 금지했다는 것이 이상하게 보인다. 바울은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라는 보기 드문 구문을 지속적으로 사용했는데, 그는 한 사람이 몇 번 결혼했는지에 관심을 가진 것이 아니라 그가 몇 명의 아내를 가졌는지에 대해서 염려했다.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라는 구절은 엄격히 말해서 오직 하나의 해석만을 허용한다. 장래의 장로나 집사는 결혼생활을 비롯한 모든 일에 모범이 되어야 하기 때문에 일부다처주의자이어서는 안된다. 즉 이 구절은 어떤 한 주어진 시간에 “한 아내의 남편이 되어야”한다는 뜻이다.

구약성경은 일부다처제를 허용했으나 그것이 절대로 이상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일부다처주의자인 개종자가 그의 아내들을 버리기 전에 그리스도의 지체로 들어오게 허락되었지만 직분자가 될 수는 없었다. 직분자의 생활은 반드시 모범이 되어야 하고 하나님은 일부일처제로서의 결혼의 모범을 교회에서 지키기를 원하셨다. 일부다처제는 그 당시 유대인뿐만 아니라 헬라인과 로마인들 사이에서도 계속되어 왔다. 따라서 바울은 이러한 맥락에서 재혼한 사람들을 직분자로 임명하는 것을 금지한 것이다.

그러므로 재혼에 관하여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은 첫째, 일반적으로 재혼은 허락되었으며 어떤 경우에는 격려되었고 명령되기도 했다. 신약시대에서 재혼은 좋게 보아졌다. 둘째, 이혼 후의 재혼은 허락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한 사람이 정확히 그의 배우자로부터 놓인 경우에는 죄가 없다고 분명히 선언되었다. 그렇다면 누가 어떤 경우에 이혼 후에 재혼 할 수 있는가? 먼저 간단한 원리는 적절하게(성경적인 규정에 따라서) 이혼한 모든 사람들은 재혼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다음으로 복잡한 원리는 바르지 않게 이혼한 사람들, 그리고 그 결과로 그들의 배우자에게 아직도 화해해야 할 의무가 있는 사람들, 또는 적절하게 이혼했으나 다른 의무들이 있는 사람들은 그 의무들을 이행해야 하며 그때야 비로소 결혼할 수 있도록 자유롭게 된다는 것이다.

 

개종자들과 회개한 기독교인들의 과거의 문제가 이혼과 재혼에 관한 토론에서 자주 거론된다. 교회는 이러한 문제에 대해 결코 피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이 살인, 아주 속된 음란 등을 용서하시는 것이 분명하므로, 교회도 반드시 그렇게 해야만 한다. 그리고 용서는 개종 후에 범죄한 회개한 믿는 자의 경우일지라도 정결하게 되는 것뿐만 아니라, 위로와 그리스도의 교회의 교인들과의 완전한 친교에 대한 회복까지도 포함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주목하는 것이 중요하다(고후 2:7,8).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깨끗하게 하신 것을 사람이 더럽다고 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보다 더욱 크신 분이시다. 또한 우리의 간음과 이혼의 죄보다도 더욱 크신 분이시다. 즉 죄는 가증스럽지만, 은혜는 가장 가증스러운 죄보다 훨씬 더 위대하다(롬 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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