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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속으로 〓/영성 교회 성장 10대 지침등(가나다순)

창조, 타락, 구속

by 【고동엽】 2022. 1. 12.
창조, 타락, 구속
저자 : 알버트 월트스, 마이클 고힌(Abert M.Wolters/Michael W. Goheen)
원제 : Creation Regained(2nd Edition : Biblical basics for a reformational worldview)


차례




1. 세계관이란 무엇인가?


2. 창조


3. 타락


4. 구속


5. 구조와 방향의 구분


6. 결론


7. 서평


1. 세계관이란 무엇인가?
1) 서론
인간은 세계관의 인도를 받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존재다.


(1) 이 책의 의미: 성경적 세계관의 내용을 설명하고 성경에 순종하고자 할 때 그 내용이 우리 생활에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2) 세계관의 전통의 대표자: 교부 이레나이우스와 아우구스티누스, 종교개혁가인 틴데일과 칼뱅 등
(3) 우리가 종교 개혁자들을 따르는 이유: 성경을 강조하고 지속적인 개혁을 추구한다는 점이며 여기서 지속적인 개혁이란 성경에 의해 늘 개혁되고 전통을 무비판적으로 따르지 않는 것이다.
(4) 20세기의 세계관에 대한 통찰: 독특한 형태를 띠었는데 특히 아브라함 카이퍼, 헤르만 바빙크, 헤르만 도예베르트, 볼렌호벤과 같은 네덜란드의 지도자들의 저술 속에 나타났다. 그들은 신학과 철학 그리고 여타 학문들을 통해서, 특별히 삶의 전 영역에서 성경에 순종하고자 하는 열망에서 나온 문화적, 사회적, 활동을 통해 성경적 세계관에 대한 이해를 더욱 심화시키고 정립하는데 기여했다.
(5) 세계관의 뜻: worldview는 독일어weltanscbaung의 번역어이다. 이것은 철학과 분명히 구별되며 대중화된 용법을 따른 네덜란드 신칼뱅주의자들이 선호했던 `세계 및 인생에 대한 관점`보다는 덜 복잡하다. 또한 더욱 포괄적으로 말해서 세계관이란 한 사람이 견지하는 전반적인 `원칙들` 또는 `이상들`이라고도 할 수 있다.
(6) 일반 사회과학에서 가장 널리 사용하고 있는 명칭은 `가치체계`다. 그러나 이러한 용어들은 결정론과 상대주의를 함축하고 있으므로 적절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
(7) `한 사람이 사물들에 대해 가지는 근본적 신념들의 포괄적인 틀`의 목적을 위한 세계관으로 구성된 요소
첫째 `사물들`이란 말은 의도적으로 선택한 애매한 단어로서 우리 신념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지칭할 수 있다. 둘째 세계관은 개인의 신념의 문제다. 셋째 세계관이 사물들에 관한 근본적 신념과 관계가 있다는 점에 주목하는 것이 중요하다. 넷째 한 사람이 사물들에 대하여 가지는 근본적 신념들은 하나의 틀이나 유형을 이루는 경향이 있다.
(8) 세계관은 늘 내적 일관성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사실 일관성이 없는 세계관이 많이 있다(비일관성은 세계관과 관련된 가장 흥미로운 사실들 중 하나).
(9) 세계관의 가장 중요한 특징: 일관성이 있는 유형을 이루고자 하는 경향이며 심지어는 비일관성 조차도 누구나 알아볼 수 있는 어떤 유형을 이루는 성향이 있다. 더욱이 대부분의 사람은 타인에게는 뻔히 보이는데도 자기 세계관의 비일관성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다.
(10) 근본적 신념은 실제적인 비상 사태나 작금의 정치 문제, 자신의 신념과 충돌하는 확신에 직면하게 될 때 드러난다.
(11) 일반적으로 모든 사람은 자기의 세계관을 명확하게 표현하지 못하더라도 하나의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


2) 세계관의 역할
(1) 삶 가운데 세계관의 역할: 세계관이 우리의 삶을 인도하는 기능을 하며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감지하게 해준다.
(2) 인간의 독특한 성격: 인간은 본질적으로 완전히 자의적인 견해를 취하거나 원칙과 무관한 결정을 할 수 없는 책임을 지닌 피조물이므로 무엇인가의 인도를 받아야 한다.
(3) 세계관은 우리의 견해나 논점뿐 아니라 우리가 내려야 할 모든 의사 결정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우리는 서로 상충하는 신념들을 소유할 뿐만 아니라 종종 우리의 신념과 일치하지 않는 행동을 하기도 한다. 만약 행동이 신념과 일치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행동이나 신념 둘 중의하나를 바꾸려 할 것이다. 만약 행동과 신념간의 갈등이 있는데도 이를 방치한다면 우리는 오랫동안 성실성을 상실할 것이다.
(4) 세계관과 행동의 관계를 파악하는 다른 견해: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우리의 행동 방향을 결정짓는 것은 신념이 아니라 계급적 이해 관계라고 주장한다. 많은 심리학자들은 세계관을 인도의 주체가 아니라 인도의 객체로 본다.
(5) 기독교적 입장에서 볼 때 비록우리가 입으로 고백하는 신념이 생활 가운데 실제로 작동하는 신념과 일치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신념이 삶의 결정적인 요인이라고 말해야 옳을 것이다.


3)세계관과 성경
(1) 세계관과 성경의 관련: 기독교적 답변은 분명하다. 세계관은 성경에 의해서 형성되고 점검되어야 한다. 세계관은 성경적일 때만 우리의 삶을 올바르게 인도할 수 있다. 이 말은 세계관 문제에서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 들이는 사람과 받아 들이지 않는 사람 사이에 중요한 차이가 있음을 뜻한다. 이 말은 또한 항상 성경에 비추어서 자신의 세계관을 점검해 보아야 함을 의미한다.
(2)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이 다른 모든 것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권위를 갖는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우리의 문화는 성경이 가지고 있는 최상의 권위를 무시하거나 공공연히 거부하고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의 권위를 교회와 신학, 개인적인 도덕의 영역 즉 문화와 사회의 전반적인 방향과는 근본적인 방향과는 근본적으로 관련이 없는 영역에만 제한하도록 상당한 압력을 받고 있다. 그러나 이런 압력은 그 자체가 세속적인 세계관의 열매이며 그리스도인은 가능한 모든 자원을 동원하여 이에 저항해야 한다. 세속적인 세계관을 대적하는 데 필요한 기본적인 자원은 바로 성경이다. 성경에 비추어 우리의 세계관을 점검하고 수정하는 일이야말로 마음을 새롭게 하는 일의 한 부분이다.
(3) 성경적 세계관에 대해 주장한 내용의 핵심: 성경과 그 가르침을 소위 `종교적인`영역으로 제한시키지 말고 바로 지금의 문화 전체와 연관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4) 세계관과 신학 및 철학의 관계
(1) 학문적인 명석함은 지혜나 상식과는 다르며 세계관은 그것이 성경적이든 비성경적이든 간에 지혜나 상식의 문제다.
(2) 철학과 신학은 하나의 학문으로서 과학적이며 이론적인 데 비하여 세계관은 그렇지 않다. 세계관은 인류가 공유하는 일상적인 경험의 문제요 모든 인간 지식에서 빠질 수 없는 요소다. 따라서 그것이 성경상 비과학적이요, 오히려 전(前) 과학적이다. 왜냐하면 과학적인 앎은 항상 일상적인 경험의 직관적인 앎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세계관은 과학이나 이론의 인식차원보다 더 기본적인 인식 차원에 속한다.
신학과 철학은 세계관을 과학적으로 다듬은 결과물이다.
(3) 신학은 범위가 포괄적이라는 점에서는 서로 비슷하지만 세계관이 전과학적인 데 비해 철학과 신학은 과학적이라는 점에서 서로 다르다.
(5) 구조와 방향의 두 가지 개념에서의 차이: 철학은 사물들의 구조에 초점을 맞추는(전체를 다룬다는 의미에서) 포괄적인 학문 즉 피조물의 통일성과 다양성에 관한 학문이라고 할 수 있다.
신학은 사물들의 방향에 초점을 맞추는(전체를 다룬다는 의미에서) 포괄적인 학문, 즉 세상을 감염시키는 악과 그 치료책에 관한 학문이라고 할 수 있다.
(6) 기독교 철학은 성경의 기본적인 범주들에 비추어서 피조물을 보고 기독교 신학은 피조물의 기본적인 범주들에 비추어서 성경을 본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세계관은 구조의 문제와 방향의 문제에 똑 같이 관심을 갖는다.


5) 개혁주의 세계관의 특징
(1) 개혁주의 세계관의 독특성은"성부 하나님은 그분이 창조했으나 타락한 세계를 그의 아들의 죽음을 통하여 화목케 하셨다. 그리고 성령을 통해 그 것을 새롭게 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신다."개혁주의 세계관은 이러한 기독교의 삼위일체적 신앙 고백의 모든 주요 용어들을 보편적이고 포괄적인 의미로 이해한다. 이원론적 세계관의 변형으로서 우주의 거룩한 영역과 세속적의 영역의 구별을 받아들이지 않는 개혁주의 세계관의 통합적 관점과 대조된다.
(2) 개혁주의 특징:"은혜가 자연을 회복한다"는 통찰을 그 중심으로 삼고 있다. 즉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구속이란 원래의 선한 창조의 회복을 의미한다.


2. 창조


하나님이 모든 만물을 만드셨다. 즉 그분의 관심 밖에 있는 영역은 이 세상에 없다.


1)창조의 법
(1) 창조라는 말은 이중적인 의미를 가진다.‘창조 기사’를 이야기할 때는 세계를 만드신 하나님의 행위를 뜻하고,‘창조의 아름다움’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창조의 산물인 우주로서의 창조질서를 뜻한다. 우리는 창조 행위와 창조 질서를 서로 혼동해서는 안 된다.
(2) 하나님이 모든 만물을 각기 모양대로 만들기 위해 발휘하셨던 그 전능하신 능력은 태초의 창조 때나 창조 세계 역사의 매 순간이나 변함이 없다. 피조물의 모든 부분은 날마다 창조주가 주권적으로 명하시는 "~이 있으라"는 말씀에 존속된다. 창조 질서는 매 순간 하나님의 창조 활동을 떠나서는 생각할 수가 없다.
(3) 우리가 모든 존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에 충실 하려면 창조라는 말을 ‘창조주의 주권적인 행위와 창조 질서의 상호 관계’라고 정의해야 한다.
(4) 전체를 구성하고 보존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적 행위를 표현하기 위해 우리는 우주를 향한 하나님의 명령 행위 전체를 가리켜 법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자 한다. 법은 성경의 중심 용어일 뿐 아니라 주권자로서의 하나님, 즉 절대적인 주와 왕으로서의 하나님께 주의를 집중시키는 이점이 있다. 법이란 창조 세계에 대해 하나님이 가진 주권의 표명인 것이다. 이 법은 재창조를 통해 구원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은혜 행위와 대단히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기는 하지만, 양자는 구별되어야 한다. 달리 말하자면 우리는 이와 관련하여 법과 복음을 대립시켜서는 안되지만 반드시 양자를 구별해야 한다.
(5) 자연 법칙과 규범의 차이: 시편148:8에서‘그의 말씀을 따른 광풍’에 대해 말할 때 시편 기자는 바람에게 책임을 묻지 않았다. 바람은 순종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사람은 책임을 지는 존재다. 정의에 대한 규범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것이 우리 인간에게 맡겨진 독특한 임무다. 사람은 인격적인 책임을 행사해야 한다. 즉 우리는 규범을 확실히 구체화하라는 즉 우리 삶의 구체적인 상황에 적용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하나님은 문화적, 사회적, 개인적 관계의 광대한 영역에서 모두 규범화 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전능하신 창조주는 이 모든 영역을 자기의 것이라고 주장하신다. 우주의 주재자는 이 모든 영역에 대해 그의 법을 반포하시고 만유의 왕은 이 모든 영역에서 그의 뜻을 분별하기를 요구하신다.
현대 지성이 보기에 자연 법칙과 규범을 동일선상에서 이해하려는 노력은 사실과 가치를 혼동하는 것이요,‘존재’와‘당위’를 혼동하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다양한 세계관이 등장 했음에도 성경을 믿는 종교는 세계 질서에 종속되지 않고 오히려 창조주로서 세계 질서를 규정하신 하나님을 선포한다는 점에서 독특하다.
(6) 일반법과 특별법의 차이: 하나님의 율례와 규례를 이야기할 때 십계명과 같이 다양한 상황에 적용되는 일반 규칙들을 분명히 생각하고 있었다."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은 오로지 특정한 시간과 장소에 있는 특정한 사람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니라 모든 시간과 장소에서 모든 사람에게 일반적으로 적용되는 법이다.
자연 법칙은 대개 보편적으로 타당하다고 생각하지만 개별적인 자연 현상들은 보편적인 규칙성으로 환원될 수 없는 독특한 특징을 갖고 있다. 이 독특한 특징을 역시 하나님의 섭리적 뜻에 따른 것이다. 그리고 규범도 ‘정의를 실천하라’, ’신실 하라’,‘청지기가 되라’는 하나님의 명령과 같이 분명한 보편적 타당성을 가진다. 그러나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일반적일 뿐 아니라 전통적으로‘소명’이나‘인도’라고 부르는 것들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진다는 점에서 특별한 성격도 지닌다. 그러므로 우리가 창조의‘법’이라고 부르는 것은 강제성(자연 법칙)과 호소의 성격(규범)을 모두 가지며 그 타당성의 범위는 전체적이면서도(일반법) 개체적이다(특별법).
일반법과 특별법의 구별에 대한 두 가지 특성은 첫째 법이라는 말이‘특정한 명령’의 의미까지 내포하려면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의미보다 더 넓게 확장되어야 한다.


2) 창조에서의 하나님의 말씀
(1) 성경은 하나님의‘말씀’을 하나님의 법과 깊이 관련시키고 있다. 주권자의 말씀은 법이고, 히브리어‘다바르’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시시하는 경우 대부분‘명령’으로 번역하는 것이 적절하다.
(2) 엿새 동안의 하나님의 창조 명령의 경우는 엄격하게 말해서 무로부터의 창조라고 할 수 없다. 오히려 이 창조는 아직 형태가 주어지지 않는 지상적 실재의 정교화와 완성의 성격을 지닌다. 신학자들은 무로부터 하늘과 땅을 만든 원초적인 창조 즉 제1창조와 구별해서 이것을 제 2창조라고 부른다.
(3) 좁은 의미의 하늘과 땅과 넓은 의미의 하늘과 땅: 창세기 서두에서 하늘과 땅을 지으셨다는 말은 넓은 의미에서 제시된다. 그러나 창조 기사의 초점은 즉시 땅에 맞추어지고 땅에 대하여“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본래적인 의미로서의 하늘은 언급되지 않는다. 그러나 넓은 의미로서’땅’안에서 발생한 하나님의 명령에 따른 구분들을 기술하면서 궁창에도‘하늘’이라는 이름을 주고 뭍에도‘땅’이라는 이름을 준다. 따라서 하늘은 하늘의 하나님의 보좌와 천사들의 근거지를 의미할 수도 있고 해와 달과 별들의 영역을 의미할 수도 있다.
두 번째로 "혼돈하고 공허하며"라는 표현이 무질서의 상태 즉 질서의 반대를 표현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혼돈하다는 것은 모양이 주어지지 않았다는 뜻이지 모양이 왜곡되었다는 뜻이 아니다.
(4) 성경은‘말씀’을 창조뿐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적 보존(히1:3)과 다스리심(시147:18, 148:8)을 언급하는 데 사용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의 언어로 표현된 죄와 은혜에 관한 하나님의 메시지를 가리키는 데 사용하고 있으며 신학에서는 성경 자체를 지칭하기 위해서 이 말을 사용하므로 이러한 어법은 현명하지 못하다.
(5) 창조의 법을 뜻하는 용어로서 성경적 용어의 하나인 ‘하나님의 말씀’을 사용하지 않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요한복음의 머리말에 서술된 창조와 영원한 말씀이신 그리스도 사이의 관계 때문이다(요1:1-3). 요한은 그리스도는‘창조의 중보자’이며 창조 행위에 핵심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6) 신약은 그리스도께서 창조 세계의 보존에 깊이 관여하고 계심을 분명하게 가르친다."만물이 그에게 창조되었을"뿐만 아니라,"만물이 그(예수님) 안에 함께 선다"(골1:17).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모든 세상이 창조되었을 뿐 아니라 권능의 말씀으로 만물을 보존하신다(히1:2-3). 만물을 붙드시는 하나님의 전능한 말씀은 또한 그 아들의 말씀이기도 하다. 요컨대 그리스도는 창조의 법의 전 영역에 깊이 참여하신다. 그는 창조와 재창조 모두의 중보자이시다.


3) 창조의 범위
(1) 논의: 창조 세계 전체를 다스리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법이 성경에서 중심을 차지한다. 사실 법이라는 개념이 성경적인 창조 이해에서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창조의 법이라는 개념이 창조에 관한 나머지 논의의 출발점이 되며 부동의 준거점이 될 것이다.
(2) 창조에 대한 우리의 이해: 창조에 대해 이야기할 때 우리는 대개 자연과학에서 탐구하는 실체들을 떠올리게 된다. 창조에 관한 우리의 이해는 대개 물리적 영역에 제한되어 있다.
(3) 창조를 법과 복종하는 자의 관계에서의 이해: 인간의 문명은 전체가 규범화 되어 있으며 모든 곳에서 한계와 예법과 표준과 기준을 발견한다. 인간 삶의 어떤 부분도 창조된 질서에 속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의 존재와 행위 전체는 전적으로 창조된 것이기 때문이다.
(4) 창조 주권에 관한 비물리적인 적용 예: 바울은 결혼을 감사한 마음으로 받도록 하나님이 지으신 것들 중 하나이므로 결혼을 금하는 것은 악한 이단인데 이유는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기에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기 때문이다(딤전4:3-4)
로마 정부에 복종할 것을 명령하는 잘 알려진 구절에서 바울은"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리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름이니"(롬131-2)라고 쓰고 있다. 그러므로 제도라는 뜻을 포함하는 것으로 국가의 권력은 명백히 창조된 질서에 속하며 국가는 하나님의 규례에 근거한다고 할 수 있다.
(5) 성경의 여러 교훈들이 사회 구조 일반이 창조에 속해 있음을 증명하지는 않는다. 다만 하나님의 규례의 범위가 보편적이라는 근본적인 고백을 예증한다. 모든 구조와 제도 및 논리가 적용된다. 하나님의 세계 질서라는 실재에 근거하며 임의적으로 구성되지 않는다. 어떠한 구조들은 제도로부터 어떤 불변의 특징들을 가지며 이 불변적 특징들은 하나님이 주신 실재의 본질에 기원을 둔다. 관계들은 그 자체의 고유한 표준에 따라 평가해야지 임의적으로 평가해서는 안 된다.
(6) 모든 예술이 다 좋은 예술은 아니다. 예술가와 미학자는 각기 나름대로 좋은 예술을 규정해 주는 기준을 식별할 책임이 있다. 그 기준은 임의적이기보다 주어진 사물의 질서 속에 근거를 두며 우리는 그 기준을 존중해야만 한다.


4) 창조를 통한 계시
(1) 창조의 법은 창조된 우주를 향한 하나님의 주권적 행위의 총체라고 규정한다. 이 주권적 행위는 창조 세계를 통한 하나님의 계시가 포함되어 있는데 전통적으로 이것을 일반 계시라고 부른다. 창조의 법은 계시적이다. 창조의 법은 지식을 나누어 준다.
(2) 정의와 신실성, 청지기직과 경외에 대한 창조 규범을 하나님이 분명한 언어로 주신 적이 없더라도 사람들은 규범적인 행동 기준에 대한 직관적인 감각을 갖고 있다. 창조 규범을 직관적으로 알고 있음을 표현하는 한 단어가 양심이다.
피조물은 체질상 창도의 표준을 따르게 된다. 하나님은 증거를 남겨 놓지 않는 분이 아니다. 그는 무시되기를 원하지 않으신다. 그는 자신의 영원한 능력과 신성을 틀림없이 보여 주셔서 우리에게 순종을 요구한다는 사실을 알게 하신다.
(3) 지혜의 개념: 구약학자 제임스 플레밍은"지혜는 우주의 구조 속에 내재해 있다. 사람의 지혜란 이 하나님의 지혜를 알고 자기의 길을 거기에 맞추는 것이다. 따라서 지혜란 신적인 구조에 동조하는 것을 뜻한다. 사람은 그것이 무엇인지를 밝혀 내고 거기에 자신을 맞추어야 한다. 요컨대 지혜는 하나님의 창조에 윤리적으로 순응하는 것이다."
(4) 창조의 법과 종속자에 상응하는 두 가지의미의 지혜: 법의 측면에서
‘우주의 구조 속에 새겨져 있는’ 하나님의 지혜 즉 하나님의 계획과 질서가 있고, 종속자의 측면에서는 인간의 지혜 즉 창조 질서에 걸맞는 조율 혹은 동조가 있다.
(5) 우리는 잠언의 처음 몇 장에나오는 지혜를 법의 측면에서의 지혜로 이해해야 한다. 하나님이 세계를 조성하실 때 지혜는 작업시 사용하는 표준자이다.
규범적 창조 질서로서의 지혜 개념: 잠언에만 국한되지 않으며(특히 38장-41장의 유명한 구절들) 전도서도 그렇다. 그러나 창조 세계에 나타난 하나님의 지혜의 계시에 대한 가장 교훈적인 대목은 지혜서들 보다는 오히려 이사야28장의 마지막 부분에서 발견된다.
(6) 창조 세계를 통한 하나님의 계시가 함축하는 한가지: 인간은 창조 질서를 알 수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모든 사람들을 향한 지혜의 초청이 갖는 의미다.
(7) 그리스도인들도 창조의 법의 인식 가능성에 대해 서로 다른 입장을 갖는다. 많은 사람들이 사물의 창조적 구조가 타락으로 인해 변화되었거나 예술, 경제, 정치와 같은 영역에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것이 불가능해질 정도로 인간의 인식 능력이 부패되었다고 주장한다. 이런 견해는 창조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뜻의 불변성을 무시하거나 우리의 분별 능력을 회복시키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회복 능력을 과소 평가한다.
(8) 하나님의 뜻을 알려면 영적 분별력이 필요하다. 성경에는 별로 언급이 없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알아내려고 노력해야 할 많은 사안들이 있다.
성경에서 명시적으로 인도하는 것 이외의 문제에 대해서도 우리에게는 ‘영적 지혜와 총명’이 필요하다.
(9) 우리는 믿을 만한 기독교 지도자의 조언을 통해서 기도와 성경 연구를 통해서 관련된 요인들을 잘 고려함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찾는다.‘영적 지혜와 총명’의 은사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때로는 하나님의 길을 완전히 확신하면서 결정을 내리지만 그보다는 약간 주저하면서 수정의 가능성을 열어 둔 채 결정하는 경우가 더 많다. 그리고 상당한 지혜와 분별력을 지닌 동료 그리스도인의 조언을 거스르면서 결정을 내릴 수도 있다. 그러나 요점은 확신이 없거나 의견 일치가 안 되었다고 해서 나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있고 그것을 알 수 있으며 내가 그것을 찾고 그것에 맞추어 행동해야만 한다는 기본적인 신앙 고백이 무효화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인간사의 모든 영역에 적용되는 일반적인 창조 규범을 분별하는 경험과 당면한 실재에 대한 연구, 동일 분야의 형제 자매들과의 공동 사역과 의견 교환, 인도와 통찰력을 위한 간절한 기도, 계속적인 성경 읽기, 전반적인 주제들에 대한 숙지 등이 요구된다.
(10) 창조와 계시라는 주제를 매듭짓기 전에 다루어야 할 마지막 한가지 문제: 창조에서의 하나님의 말씀은 성경에 내포된 그의 말씀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일반 계시를 그렇게 강조했으니 특별 계시를 약화시키는 위험이 있지는 않는가. 그렇게 함으로써‘오직 성경’이라는 종교개혁의 위대한 원칙을 손상시키지는 않는가 하는 문제들이다.
(11) 인도: 일상 생활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찾는 문제에서‘성령의 인도’에만 사로잡혀 있다면 성경이 평가될 수도 있다. 그러나 매일의 생활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아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 자체가 필연적으로 그런 결과를 낳지 않는다. 성경 자체는 우리의 삶 전반에 걸친 하나님의 주 되심을 뚜렷하게 가르침으로써 계속하여 우리로 하여금 인도의 문제를 생각하도록 촉구한다.
우리의 결정에 있어서 구체적인 역사적 필요 등을 고려하지 않은 채 그 문제를 우발적인 성경 구절에 결정한다면 그는 미련하고 무책임한 사람이다.
(12) 말씀을 통한 하나님의 계시와 그의 작품을 통한 계시 사이의 관계를 이해를 돕는 두 가지 이미지 첫 번째는 성경을 자연의 책을 읽을 수 있게 해 주는 안경으로 보는 칼뱅의 이미지다 달리 표현하면 성경의 빛 속에서만 창조 세계의 규범성을 가장 잘 분별할 수 있다. 성경은 무엇인가를 보려고 고개를 돌릴 때마다 그것을 비춰 주는 광부의 전등과 같다. 성경의 빛은 하나님의 법이 무엇인지를 인간의 언어로 분명하게 표현해 주기 때문에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하다.
창조 세계에 살고 있다면 타락한 인간도 어느 정도는 그것을 이해한다. 그러나 성경의 메시지만이 이 기본적인 명령의 중심성과 급진성을 아담의 후손들에게 명확하게 해줄 수 있다. 창조 세계에서의 하나님의 계시는 언어의 형태가 아니다. 성경은 희미하게 지각되는 창조 세계의 상징 언어에 대한 언어 주석과 같은 것이다.
구약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을 위해 그 작업을 실행해 주셨다. 신약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스스로가 그것을 시행할 수 있는 자유를 얻었다. 우리는 아직도 설계자의 명시적인 지시의 구속을 받았지만 새로운 상황이 일어 날 때마다 필요한 것을 실행할 수 있는 상당한 자유가 있다.


5) 창조의 발전
(1) 지상적 영역이 우리가 경험하는 다채로운 세계의 모습으로 단계적으로 형성되는 발전 과정이었다. 이 과정은 여섯째 날에 사람의 창조와 함께 완결되고 하나님은 일곱째 날에 안식하신다. 그러나 이것으로 창조의 발전 과정이 끝난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창조 사역에서 물러나셨지만 자신의 형상을 세우시고 그에게 그 일을 계속할 것을 명령하셨다. 이제는 사람들이 발전의 사역을 계속 수행해야 한다. 이것은 인간적인 땅의 발전이어야 한다. 땅의 발전이 본질상 사회적이고 문화적이어야 한다. 앞으로 해야 할 임무는 문명의 발전이다.
(2) 자연법칙은 제2창조에서 하나님이 직접 발전시킨 땅을 지배하고 규범은 제3창조라고 부를 수 있는곳에서 하나님이 사람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발전시키시는 땅을 지배한다.
(3) 넓은 의미에서 땅을 정복하는 일은 바다와 하늘과 좁은 의미에서의 땅에 서식하는 것들을 다스리는 일을 포함한다. 사람이 정복해야 할 땅은 채워지고 모양이 주어질 필요가 있는 지상적 영역의 전체다. 오직 사람만이 온 땅을 채우고 모양을 부여하도록 부름 받았으며 오직 사람에게만 "주의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두셨다"(시8:6)는 것이다.
(4) 창조 세계란 한 번 만들어진 다음에 고스란히 그냥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창조는 성장하고 개발되며 이 성장과 개발은 하나님이 만드신 것들 속에 함축된 발전 가능성들을 실현하는 인간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창조의 법은 새롭고 놀라운 방식으로 구현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 창조에 나타난 하나님의 경이로운 지혜와 세상에서 우리가 맡은 중요한 임무가 서로 합해져서 드러난 결과다. 우리는 하나님의 지속적인 창조 사역에 참여하며 하나님의 걸작품을 위한 청사진에 따라 끝까지 임무를 수행하는 그 분의 조력자가 되도록 부름 받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사람이 경영한다는 사실을 배경으로 역사의 의미를 찾아야 한다. 창조의 발전 단계는 인간의 문명화 단계에 부합한다. 이와 관련된 것이 역사적 과정을 통한 창조 세계의 개발이다. 발전하는 것이 근본적으로 창조의 실재와 인류의 책임 있는 경영 밖에 있다고 이행한다면 우리는 이런 것들을 세상에서의 하나님의 목적과는 상관없다고 생각할 것이며 이것들을 본질적으로‘세속적’이라고 분류하게 될 것이다.
(5) 사람의 역사 즉 문화와 사회의 개발 과정이 창조와 창조의 발전의 필수적인 부분임을 안다면 범죄로 인한 탈선에도 불구하고 태초부터 그것들이 하나님의 우주를 향한 계획안에 있었고 우리가 전에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던 청사진의 일부라는 것을 안다면 다른 영역에서도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6) 죄의 파괴성은 문명이라는 창조의 규범적 발전을 없애지 않고 오히려 거기에 기생한다는 점이다. 성숙의 과정과 악화의 과정은 실제적으로 대단히 밀접하게 교착되어 있으므로 성경적으로 잘 훈련되어 창조 규범을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그 차이를 감지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차이점은 절대적이고 근본적이어서 그것을 무시하는 사람은 반드시 문화적 비관주의나 문화적 낙관주의 둘 중의 하나에 빠지게 된다.
(7) 땅을 정복하고 개발하는 사람의 임무와 관련하여 우리가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에 비추어 볼 때 정화된 땅에 있는 것들은 사람의 문화적 소산들을 포함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부활한 우리의 육체가 영화롭게 되더라도 여전히 육체인 것과 마찬가지다.


6) 선한 창조
(1) 범죄 이전의 창조 세계는 전적으로 명백히 선하다는 성경의 중요한 가르침이다. 창세기 1장의 창조 기사에서 하나님은 무려 일곱 군데에서 그의 창조의 작품들이 선하다고 선포하셨으며 이런 선포는 마지막 절의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라는 말에서 절정에 이른다.
(2) 초대교회에는 창조 세계의 선함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영지주의라고 불리는 이단이 있었다. 그들은 창세기 1장의 창조자를 선한 주권자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지만 그분을 반역한 사악한 존재로 보았으며 그가 만든 세상은 악한 감옥이라서 사람이 거기에서 구원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영지주의자들은 구원을 이런 악한 세계에서 탈출하여 초연한 상태로 들어가 주권자 하나님과의 일종의 신비적 연합을 이루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영지주의자들은 초대교회에 심각한 위협이 되었다.
(3) 창조 세계가 하나님의 지혜의 의해 만들어진 모든 것을 포괄한다는 점을 인정할 때 근본적인 고백은 큰 함의를 갖는다. 창조 세계가 선하다는 사실은 법의 지배가 하나님의 피조물, 특히 남자와 여자들에 대한 어떤 구속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을 자유롭고 건강한 직무 수행을 가능케 해준다는 사실을 뒷받침해 준다.
인본주의는 법을 자유의 부정이라고 생각하지만 성경은 법을 자유의 조건으로 생각한다.


3. 타락
이 세상은 선하다. 그러나 무엇인가가 확실히 잘못되었다.


1) 타락의 범위
(1) 아담과 하와의 범죄는 단순히 독립된 불순종의 행위가 아니라 창조 세계 전체의 대재난을 의미하는 사건임을 성경이 명백히 가르치고 있다. 인류 전체뿐 아니라 인간 이외의 모든 피조물도 하나님의 분명한 명령과 경고를 무시한 아담의 실패에 연루되어 있다. 죄의 영향은 창조 세계 전체에 미친다(롬8:22).
(2) 롬8:22의 바울이 말한 피조물이란 단어를 천상적 창조 세계가 아니라 지상적 창조 세계를 가리키기 위해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죄에 의해 완전히 오염된 것은 바로 지상적 영역의 창조 세계다.
(3) 타락의 결과의 현상 상태는 세상에 광범위하게 가득 차 있다. 결혼이란 창조 제도는 일부일처 속에서 이혼과 연속적인 결혼으로 피조물을 위한 하나님의 선한 계획이 왜곡 되고 물질주의 파괴력 앞에서 자신의 경력을 위해서 아이에 관심이 소홀히 하여 가정 무너지고 다양한 종류의 전체주의로 진정한 정의의 요구를 따르기 보다 이익 집단의 압력에 눌려서 국가의 정책을 결정하는 정치 체제에서도 왜곡상이 분명하게 나타난다.
문화 생활의 영역에서도 천박한 예술 작품들과 그림, 음악, 시등 학문의 영역에서는 과학주의와 조잡한 방법론 그릇된 추론 선한 기능들이 오용되고 왜곡되었다. 개인의 삶에서 가장 명백하게 드러난다. 감정상의 혼란이나 정신질환 같은 위반은 다소 덜 분명하겠지만 이것들도 역시 창조된 인간 기능의 변질이며 피조물의 탄식의 일부다.
(4)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악과 타락이 궁극적으로 인간의 타락 증 하나님의 창조의 선한 법에 따라 살기를 거부한 행위의 결과라는 사실이 바로 인간의 상황에 대한 성경의 독특한 가르침이다. 지상의 모든 문제를 분석해 보면 그것은 결국 인간의 불순종과 범죄에서 파생했음을 알게 된다. 타락이 악의 근원이라는 사실은 인격적, 문화적, 사회적으로 왜곡 표현되는 인간의 죄악에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다. 모든 사람이 아담 안에서 타락하였으므로 악이 인간의 삶 전반에 걸쳐 하나님께 대적한다. 죄는 인간사의 영역을 넘어 비인간적인 세계에까지 폭넓게 영향을 미친다. (창3:17,롬8:19-22)


(2) 죄와 창조의 관계
(1) 죄가 창조를 파괴한 것도 창조와 동일시되는 것도 아니라는 점이다. 비록 그것들이 우리의 경험 속에서 아무리 단단하게 뒤얽혀 있다 하더라도 여전히 구별된다. 죄악은 하나님의 손으로 지으신 작품에 대한 그분의 한결 같은 신실함을 무효로 돌릴 만한 힘이 없다.
(2) 죄는 창조 질서에 완전히 새로운 차원을 도입한다. 죄는 하나님의 선한 창조물에 결코 어울리지 않는다. 악은 비록 선의 왜곡으로서만 존재하지만 선으로 환원될 수는 없다.
(3) 장 칼뱅의 환원될 수 없는두 질서: 창조의 질서와 죄와 구속의 질서를 구별해야 하며 이 두 개의 질서는 결코 조화되지 않는다. 창조도 타락과 구속의 한 기능으로 설명해서는 안 된다. 이것들은 모든 실재의 근본 질서로 서로 공존하며 그 중 하나는 본래적이고 다른 하나는 우발적이다. 그리고 전자는 선을 대표하고 후자는 왜곡상을 내포한다.
타락한 창조 속에 어떤 것이 여전히 있다는 것은 창조의 영구적인 선함, 즉 죄와 파괴성에도 불구하고 창조된 질서를 유지하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가리킨다. 창조는 어떤 결정적인 의미에서도 말살되지 않는다.
(4) 하나님의 선한 창조 속에 죄의 존재를 허용하는 이론이 있다면 그것은 죄가 근본적으로 언어 도단적이고 신성 모독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공정하게 다루지 못한 채 교활하고 교묘하게 죄의 책임을 아담 안에 있는 우리 자신이 아닌 창조주께 돌리는 행위다.


(3) 구조와 방향
(1) 구조: 창조의 질서 즉 어떤사물의 불변적 창조 구조 혹은 그것으로 하여금 그 실체가 되게 하는 것을 가리킨다고 말할 수 있다. 구조는 창조의 법, 달리 말하자면 다양한 창조물의 본질을 구성하는 하나님의 창조 명령에 그 근거를 둔다. 이는 서양 철학의 전통이 자주 본체나 본질, 본성이란 말로 가리켜 왔던 실체를 지칭한다.
(2) 방향: 죄와 구속의 질서, 즉 한편으로는 타락으로 인한 창조의 왜곡 혹은 변질을, 다른 한편으로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창조의 구속과 회복을 지칭한다. 창조 세계의 어떤 것이든 하나님을 향할 수도 있고 하나님께 등을 돌릴 수도 있다. 즉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거나 불순종하는 방향으로 나갈 수 있다. 방향은 언제나 하나님께 향하는 쪽으로 움직이거나 거스르는 쪽으로 움직이게 되어 있다.
* 구조는 결코 방향에 의해 말살되지 않는다.
(3) 하나님의 선한 창조의 어떤 양상을 뽑아내어 그것을 인간의 배교하는 낯선 침입자가 아닌 인간 드라마의 악역으로 지목하는 것을 대단히 위험한 일이다. 그와 같은 오류는 방향을 구조로 환원하고 선과 악의 이분법이 창조 자체에 내재한 것으로 간주하는 태도다. 그 결과는 선한 창조 내의 어떤 것이 악하다고 보는 것이다.
(4) 인간의 사고에는 영지주의적 성향, 즉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의 질병과 우환에 대한 모든 책임을 하나님의 작품의 어떤 측면으로 돌리려는 경향이 뿌리 깊게 박혀 있는 것 같다.
(5) 창세기 1장과 2장은 선한 창조와 그 속에서의 인간의 임무를 말하고 3장은 타락과 그 결과에 말해 준다. 이 순서는 타락 이전에는 지상에 부패가 없었다는 사실을 보여 주므로 매우 중요하다. 선한 창조 세계가 타락과 그 결과들에 선행하며 따라서 전자는 후자와 구별된다. 악은 선한 창조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오직 타락에서부터 나온 것이다. 악은 인간 조건에 내재하는 실체가 아니다. 한때 완전히 선한 창조가 존재했던 적이 있었고 장차 그런 날이 다시 올 것이다. 그래서 창조 세계의 회복은 불가능하지 않다. 우리는 세상에 존재하는 그 무엇도 포기해서는 안 된다. 선한 창조의 회복 가능성이 늘 열려있고 그 끈질긴 현존으로 인해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
(6) 창조의 법: 죄와 그것이 낳은 악을 억제함으로써 우리의 보금자리인 지구의 완전한 파멸을 방지한다. 그 법은 그 아래 종속된 피조물에게 깊이 침투한다. 그 법은 그것이 계속 유효하게 시행되며 효력을 발휘한다는 의미에서 ’살아 있다’. 창조의 법을 무시하기란 불가능하다. 그 법은 마치 혼신의 힘을 다해 눌러 한동안 없는 것 같아도 계속해서 그 존재를 느끼게 하는 스프링과 같다. 한 사물의‘구조’는 그 사물에 효력을 미치는 법으로서 어떠한 압력이나 왜곡도 그 존재와 영향력을 제거할 수 없다는 말이다. 정의의 요구는 전체정치의 한복판에 엄연히 존재한다.


4) 왜곡된 창조 세계로서의 ‘세상’
(1) 세상: 오염된 물이 깨끗한 연못을 오염시키듯이 타락의 유해한 영양은 창조의 모든 영역을 더럽혔다. 성경에 나오는 세상이라는 용어는 바로 이러한 죄의 광범위한 영역을 가리킨다.
(2) 성경에서 말하는 다양한 방식의 세상:‘창세기부터’라는 표현처럼 단지 ‘창조 세계’를 의미한다. 때로는 바울이"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이로다"(롬1:8)라고 쓴 것 같이‘사람이 사는 지구’를 의미한다. 그러나 다른 경우에는 오염시키는 것, 그래서 그리스도인이 반드시 회피해야 하는 그 무엇을 의미하는데, 이 때는 세상이 부정적인 의미를 갖는다. 부정정인 의미에서의 세상은 정확하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헤르만 리델보스에 따르면 바울의 용법에서 이 단어는‘그리스도 밖에서 죄의 지배를 받는, 구속 받지 못한 삶의 총체를 가리킨다고 한다. 다른 말로 하면 세상은 죄로 오염된 세계의 총체를 지칭한다. 인간의 죄성이 하나님의 선한 창조를 굽게 하나거나 비틀거나 왜곡하는곳이면 어디든지 ‘세상’이라는 뜻이다. 같은 의미로 야고보는직설적으로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약4:4)
(3) 세상을‘세상적’,‘세속적’이라고 이해하는 경향에서 이 구분은 세속적인 것을 그 종교적 방향성에 의해서가아니라 그것이 차지하고 있는 창조 세계에서의 위치에 의해 규정한다. 이런 구분 역시 창조의 한 영역을 다른 영역에 비교하여 평가절하하고 전자를 후자에 비해 본래 열등한 것으로 치부해 버리는 뿌리 깊은 영지주의적 성향의 희생물이다.
야고보는어디서든지 발견되는 세속성에 대해 경고하고 있으며 그는 오히려 사회적 문제들에대한 그리스도인의 참여의 중요성을 강조하고있다.
(4) 성경에 의하면 죄를 짓는 것은 사탄을 섬기는 것, 더 나아가 사탄의 노예가 되는 것이다. 여호와를 섬기지 않을 때에는 속박만 있을 뿐이다. 즉 사탄에게의도적, 비의도적인 노예가 될 뿐이다.
(5) 성경은 마귀가 하나님의 피조물 위에 군림하고 있다는 사실과 하나님의 백성이 그 사탄의 세력에 대항하여 싸워야 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말한다.
(6) 사탄은 창조주의 선한 선물을 비틀고 망치려는 악한 영들의 위계 조직의 우두머리다. 이러한 영들이 성공을 거두는 만큼 창조 세계는 광택을 잃어 추하게 되고 만다.‘악마화’되어 버리는 이것을 성경이 사탄을 "이 세상의 임금"(요12:31)이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의미이다.
(7) 문제의 책임: 성경은 인간의 불순종을어둠의 권세에 대한 충성과 계속 연결하면서도 인간의 책임을 축소하지 않는다.
(8) 지상계의 상태는 인간의 책임 아래 있으며 지금도 인간의 책임 영역을 남아 있다. 그러므로 창조 세계의 모든 악과 부패는 인간의 죄와 피조물이 마귀의 노예로 전락한 사건, 이 두 가지의 결과다.


4. 구속
하나님 나라는 본래 존재하는 것에 새로운 생동감을 불어넣은 ‘회복’이다.


그리스도의 우주적 구속: 그리스도가 성취하신 구속이 창조 세계의 모든 영역을 회복한다는 의미에서우주적이다. 이 근본적인 신앙 고백의 두 가지는 첫째 회복 즉 창조에다 어떤 것을 첨가하는 것이 아니라 손상되지 않은 창조 세계의 선한 상태로 돌아가는 것. 둘째 창조 세계의 어떤 영역에 국한되기보다 창조 세계의 삶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 이 두 가지 주장은 온전한 성경적 세계관을 정립하는데 필수적인 요소이며 그리스도인의 제자도에대해서도 중요한 함축적 의미를 지닌다.


1) 회복으로서의 구원
(1) 성경에서 구원을 묘사하는 기본적인 단어들이 모두 본래의 선한 상태
또는 선한 상황으로의 회복을 함축한다. 관련한 단어로
구속: 구속한다는 것은‘공짜로 사다, 문자적으로는‘다시 사오다’라는 뜻
화해: 관계에서 본래 상태로의 회복을 가리킨다.
새롭게 함: 한때 신상품이었으나 지금은 낡아 못 쓰게 된 것이 이제 새롭게 변화되어 처음의 새로운 상태로 회복되었다는 뜻이다.
거듭남: 성경의 핵심적인 개념으로서 죽음에 떨어진 후 다시 생명으로 회복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상의 모든 용어는 못쓰게 되거나 상실했던 어떤 좋은 것의 회복을 의미한다.
(2)‘재창조’라는 개념의 구원: 처음 창조 세계를 폐기하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다른 새로운 것을 지으셨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보다는 하나님이타락한 원래의 창조 세계를 계속 붙들고 계시다가 다시 건져내신다는 의미다. 자신의 손으로 지으신 작품들을 포기하지않으셨고 자신의 본래 계획을 이루기 위하여 자기 아들을 희생시켰다.
(3) 회복 곧 구원이 새로운 무엇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구속이란 창조 세계의 삶에 이전에 없었던 영적인 혹은 초자연적인 차원을 덧붙이는 것이 아니다. 구속의 유일무이한 초점은 회복이다. 결국 창조 세계에 포함되지 않던 것을 구속이 덧붙인 유일한 것은 죄에 대한 치유인데 그것도 단지 죄 없는 창조 세계를 회복시킬 목적으로 도입한 것이다. 이를 신학적으로 은혜라 하는데 은혜는 자연에 덧붙여진은사 즉 창조 세계의 꼭대기에 얹힌 선물을 가져온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은혜는 자연을 회복한다. 즉 자연을 다시 한 번 온전하게 만든다.
(4) 구원이 창조 이상의 그 무엇을 가져오지 않는다 할지라도 창조보다 덜 가져오는 것도 아니다. 모든 사물이 인류의 반란과 하나님에 대한 적대적 태도에 연루되었는데 그들이 하나님과 긴장 관계는 해소되어야 하며 다시금 그분과 화목하게되어야 하는 것이다.
구속의 범위: 타락의 범위만큼 넓고 모든 창조 세계를 포괄한다. 지상의 모든 악의 근본 원인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보활 안에서 치유되고극복되며 원칙적으로 그의 구속은 죄의 모든 영향도 제거한다. 창조의 왜곡이 있는 곳이면 어디서나 그리스도께서 회복이 가능성을 제공한다.
(5) 개혁주의 세계관: 죄와 구속 모두 보편적이고 근본적인 성격을 가진다고 주장하는데 있다. 사탄과 그리스도의 요구에는일종의 전체주의적 성격이 있다. 창조 세계에 속한 것 가운데 이 두 대적 간의 전쟁에 영향을 받지 않는 중립적인요소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6) 모든 곳에서 창조는 하나님의 표준이 존귀하게 여겨지기를 요구한다. 모든 곳에서 인간의 죄성은 타락시키고 왜곡시킨다. 그러나 모든 곳에서 그리스도의 승리는 죄악의 패배와 창조의 회복을 함축하고 있다.


2) 하나님의 나라
(1) 구원이 창조의 회복이라는 사실은 하나님 나라에 대해 살펴봄으로써 더욱 구체적으로 알 수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창조의 회복과 하나님 나라의 도래는 서로 동일하기 때문이다.
‘나라’의 단어의 의미: 보통 나라로 번역되는 헬라어 바실레이아의 일차적 의미는 왕권, 즉 주권, 통치, 지배를 의미한다. 이 단어는 영역 혹은 지역을 지칭한다기보다 왕이 자기 직무를 역동적으로 행사하는 것을 가리킨다. 강조점으로서 주권적으로 다스리고 계신 하나님께 있다. 하나님 나라는 자기 영토인 창조 세계를 다스리는 왕을 상기시킨다.
(2) 구약의 하나님의 나라는 종종 하늘과 땅의 왕으로 묘사한다. 하나님의 나라의 저자 헤르만 리델보스는 하나님의 나라가 "하나님의 계시인 신약 성경 전체의 핵심 주제"라고 말했다.
하나님의 왕권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실제로 예시되고 입증된다. 그리스도의 오심은 성경에 기록된 대로 구속사의 정점이다.


3) 예수님의 사역
(1) 예수님의 사역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가 창조 세계의 회복을 의미함을 분명하게 입증한다.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은 오랫동안 고대했던 나라의 도래를 전파하는 것뿐 아니라 그 나라가 도래했음을 실증하는 것이었다. 예수님은 말씀과 특히 행위로 그 나라의 도래가 증거했다.
(2) 예수님의 기적: 예수님이 베푸신 기적은 왕국의 도래에 관한 자신의 가르침이 진실임을 증거할 뿐 아니라 실제로 그 나라의 도래에 대한 실증이었다.
그리스도의 치유: 병과 사탄의 권세를 제어하는 자신의 왕권을 실제로 증명하는 행위였다.
재창조라는 주제와 관련시켜 보면 예수님의 모든 기적은 회복의 기적이었다.
(3) 거라사의 귀신 들린 사람의 이야기는 예수님의 치유가 그 나라의 도래에 대한 확실한 증거임을 드러내는 또 하나의 예로 그 분의 뛰어난 권세가 두려움의 대상이며 그 나라가 현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보여 준다. 그리스도의 병 고침의 사역 즉 회복의 사역은 타락한 창조 세계에 그 나라가 침투했음을 나타낸다.
(4)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 하나님 나라는 이미 현존해 있다. 초림은 창조 세계 안에 그분의 발판을 세운 사건인 반면에 재림은 그 주권의 완전한 승리를 실현한다.
(5) 성경이 회복을 강조한다고 해서 그리스인이 에덴 동산으로 복귀하도록 힘써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우리는 창조 세계가 문화와 사회를 통해 발전하며 이 발전은 선하고 건전하다. 땅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의 일부는 땅이 인간들로 채워지고 정복되며 그 잠재력이 개발되어 인간의 역사와 문명을 통해 실현되는 것이다. 비록 인간의 범죄로 왜곡되긴 했지만 그런 발전은 이미 많이 이루어졌다.
(6) 우리는 복귀보다는 회복이란 말을 사용해야 한다. 땅의 발전에 있어서 최초의 상태, 에덴 동산으로 예표될 수 있는 그런 종류의 세계로 복귀하려는 것은 심각한 잘못이다. 복귀는 문화적으로 에덴 동산으로 돌아가는 것 즉 역사의 시계를 거꾸로 돌리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움직임은 역사적으로 반동적이거나 퇴보적이다.
(7)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회복: 발전의 현 단계에서 문화와 사회를 회복하는 것을 의미한다.
(8) 성경적 신앙은 역사적으로 진보적이며 결코 반동적이지 않다. 하나님 나라는 창조 세계의 모든 것에 대해 권리 주장을 하는데 그 모든 영역에 대해 그럴 뿐 아니라 그 발전의 모든 단계에 대해서도 그러하다.


4) 다른 견해들과의 비교
(1) 하나님의 나라의 개념은 구속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리도인들에게는 하나님의 나라의 범위를 제한하려는 뿌리 깊은 경향이 있는데 이것을 세상을 성스러운 영역과 속된 영역으로 나누려는 끈질긴 속성과 비슷하다. 이러한 제한적 속성을 보여 주는 가장 일반적인 예는 경건주의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경건주의 자들은 하나님 나라를 개인적 경건의 영역, 즉 영혼의 내면 생활로 국한한다.
(2) 어떤 전통들은 그 나라를 제도적 교회와 동일시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왕권 범위를 제한한다. 이런 제한은 모든 인간사가 두 영역으로 나뉘어 있음을 암시하는‘교회와 세상’이라는 잘못된 관용구를 만들어 냈다.
(3) 세대주의자들은 그 나라를 종말론적 미래로 국한한다. 이 견해는 하나님의 나라와 천년 왕국을 일치시키고 둘 중 어느 것도‘이미 현존’하는 것 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4) 고전적인 자유주의적 개신교는 인본주의적 관점에서 인도적이고 진보적으로 보이는 것이면 무엇이든 하나님의 나라라는 명칭을 붙이다. 이런 견해를 수용하는 자들은 자유 민주주의 혹은 미국적 삶의 방식이 그리스도의 왕권과 동일한 영역에 속한 것으로 이해하고 이것을 거스른 모든 움직임은 당연히 세속적인 것으로 파악한다.
(5) 하나님과 사탄 모두 어떤 중립적인 지대나 분쟁 초월 영역을 남겨 두지 않고 창조 세계 전체에 대해 자기 주장을 한다. 죄가 영향을 미칠 수 없다거나 구속이 해방의 약속을 성취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 중립적인 것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6) 구속은 죄를 무효화하고 모든 곳에 미친 죄의 영향력을 점진적으로 제거하려는 노력을 통해 창조 세계의 선함을 회복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십자가를 통하여 창조로 돌아가는데 이는 오직 속죄만이 죄와 악을 그 뿌리에서부터 효과적으로 다룰 수 있기 때문이다.


5) 하나의 예화
(1)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다(골1:13)는 뜻이다.
(2) 진정한 성경적 세계관은 창조 세계에 대한 통제권을 두고 하나님과 그 대적 사이에 심각한 전쟁이 실재로 진행되고 있음을 인정한다. 이것을 확실히 영적 전쟁이다 그러나 영적이라는 이유로 이것을 심각하지 않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3) 성령의 검으로 무장된 총체적인 성경적 세계관을 소유하지 못한다면 첫째 견디기 힘든 지적 분열증에 빠진 삶을 영위하는 것이고 둘째는 세속적 인본주의의 소용돌이 속에 함께 휩쓸려 가는 것이다.
(4) 개혁주의 세계관에 대한 우리의 논의
첫째 창조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광범위하고 포괄적이다. 둘째 타락은 창조 세계에 한 구석도 빠짐 없이 철저히 영향을 끼친다. 셋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속은 타락만큼이나 그 범위가 넓다.
* 창조의 지평은 동시에 죄의 지평이며 또한 구원의 지평이다.


5. 구조와 방향의 구분


이 세상의 모든 영역이 우리의 예리한 분별과 실천을 통한 갱신을 간절히 기다린다.


(1) 구조와 방향을 구별해 내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과업이다.
구조: 창조된 사물의 본질 즉 하나님의 창조의 법에 의해 창조된 사물을 말한다.
방향: 범죄로 인해 그 구조적 규례로부터 일탈하는 것과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되어 그 구조적 규례에 다시 순응하는 것을 말한다. 삶의 모든 분야를 분석할 때 개혁주의는 성경적 구별을 일관성 있게 적용한다.
(2) 구조와 방향의 구별을 적용할 때에 우리는 언제나"은혜가 자연을 회복한다"는 주제로 이것들을 종합해야 한다. 우리의 삶을 이루는 모든 일상적인 요소들이 죄와 은혜에 연루되어 있으며 죄와 은혜가 그 운명을 결정하는 것이다. 방향을 둘러싼 전쟁은 피조물 위에 있는 영적인 공간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지상적 창조 세계의 구체적인 실재 안에서 그리고 모든 실재에 대해서 일어난다. 우리 삶의 모든 것과 일상적으로 경험되는 모든 실재들이 구조와 방향에 의해 형성된다. 구조와 방향을 모두 강조할 때 그리스도인이 실재에 접근하는 방식이 근본적으로 바뀌게 된다.


1) 개혁의 의미
(1) 개혁의 다른 두 의미
첫째 개혁은 성별이 아니라 성화를 의미한다. 두 단어는 모두 거룩하게 한다는 의미이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동의는 아니다. 성화시킨다는 말은 죄로부터 해방시킴, 도덕적 부패로부터 깨끗케 함, 정화 시킴을 의미한다. 반면에 성별 한다는 말은 일반적으로 하나님을 섬기거나 예배하기 위해 따로 구별함, 헌납함, 헌신함을 의미한다. 성별은 외적인 갱신을 의미하고 성화는 내적인 갱신을 의미한다. 개혁이라는 말은 내적인 재생으로서의 성화를 가리키는 단어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한 창조의 회복을 말할 때 우리가 의미하는 것은 분명히 성화다. 성화는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속죄와 승리를 근거로 하나님의 백성 속에서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을 통해 창조를 죄로부터 정화하시는 과정이다. 이 정화의 행위, 거룩케 하는 행위는 하나님의 피조물을 내적으로 갱신하고 재생하는 과정이지 제도적인 교회와 교회의 예배 의식을 외적으로 바꾸는 것이 아니다. 인간 삶의 모든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점진적인 내적 갱신 과정으로서의 성화 혹은 거룩케 함이라는 개념은 성경적 신앙의 고유의 특징이다. 성령의 거룩케 하시는 사역의 범위는 결코 한계가 없다.
둘째의 개혁의 특징은 성화의 방법이 폭력적 전복이 아니라 점진적인 갱신이라는 점이다. 이 원칙은 특히 사회적, 문화적 차원에서 중요하다. 우리의 세계관에 비추어 볼 때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요구하시는 바는 이 모든 분야에서 역사적, 개혁, 즉 창조된 실재들을 죄와 죄의 모든 영향으로부터 성화시키는 것임이 분명하다. 창조 때에 형성된 것이 역사적으로 죄에 의해 왜곡 되었기에 그리스도 안에서 개혁되어야 하는 것이다.
(2) 혁명의 특징
-필연적인 폭력
- 기존 체제의 전면적인 제거
- 이론적인 이념에 따라 전적으로 다른 사회적 질서의 구축
‘성경적인 개혁’원리들은 위의 세 항목을 모두 반대한다. 첫째로 개혁은 폭력을 피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둘째로 개혁은 주어진 어떤 사회 질서도 전적으로 부패했다고 보지 않는다. 셋째로 개혁은 어떤 과학적인 혹은 유사 과학적인 사색에 의해 도달한 이상적 사회의 청사진이나 개념을 신뢰하지 않는다. 구조와 방향을 동등하게 강조하는 우리의 견해가 개혁의 입장으로 귀결될 수 밖에 없음을 분명히 해 두고 싶다.
구조의 개념: 모든 상황이나 조건이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이 법을 통해 자기 피조물에 제공한 개발 가능성에 참여하고 있음을 함축한다. 무엇이든 하나님의 창조 명령에 대한 응답으로서만 존재하고 발전할 수 있으며 인간의 가장 지독한 왜곡상 속에서도 하나님의 규례는 드러나게 되어 있다. 모든 사물은 종교적 방향성을 갖고 있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죄의 왜곡에 감염되어 있으며 종교적 갱신이 필요하다. 창조된 질서와 인간의 왜곡 혹은 갱신이 모든 역사적 상황에 내재하므로 악을 거부하는 기독교적 입장은 언제나 역사적 상황 전체의 무차별적인 철폐가 아니라 창조된 구조의 정화와 개혁을 지향해야 한다.
(3) 개혁은 모든 왜곡된 상황 속에 내재하는 규범적인 요소들을 접촉점으로 삼아 갱신의 출발점으로 활용해야 한다. 개혁한다는 것은 기존 질서 가운데 규범적인 요소와 창조의 법에 순응하는 요소들을 확고하게 붙드는 것을 의미한다. 창조 세계를 붙드는 하나님의 법의 힘은 인간의 어떤 상황도 완전히 절망적인 상태에 빠지지 않도록 보장한다.
(4) 갱신의 방향이 특별히 중요한 이유: 가혹한 사회적 압제와 불의한 현실이 쉽게 사회적 질서 전체를 종교적으로 부정적인 의미의‘세상’과 동일시하고 싶은 유혹에 빠뜨리기 때문이다. 이런 동일시가 이루어지면 그리스도인들은 사회적 갱신을 위한 모든 참여에서 물러난다. 세상으로부터 자기를 보호하겠다는 미명하에 그리스도의 몸은 오히려 세속화와 왜곡의 세력에 삶의 더 큰 부분을 내어 맡기게 된다.
(5) 우리는 병든 교회를 전적으로 거부하거나 그 교회 생활에 참여하기를 거부해서는 안 된다. 대신 그 속에 아직도 남아 있는 좋은 것을 붙들고 그것을 기반으로 새롭게 세워 나가야 한다. 언제나 개혁적 전략을 따라야 하며 역사적 유산을 존중하면서 타협 없이 개혁을 요구해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삶의 모든 부분을 깨끗케 하고 개혁하는 것이다.


2) 사회적 갱신
(1) 인간 사회는 구조적 질서가 여러 문화와 역사적 시기에 속한 다양한 사회적 제도들을 뒷받침한다는 증거를 보여준다. 창조주의 보존과 섭리의 손길은 인간이 공동체를 조직하는 방식에도 미친다. 사회가 어떤 식으로 조정되어도 그것은 언제나 창조 질서의 테두리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가정이 구성된다는 사실은 우발적인 현상이 아니며 더 이상 쓸모가 없을 때는 무시해도 좋은 관습이 아니다. 오히려 창조주가 인간의 본성을 만든 방식에 뿌리를 박고 있다. 가정은 창조주이신 하나님이 설립하신 사회적 제도인 것이다.
(2) 사회적 제도들이 창조의 영역에 속한다는 원리는 두루 적용된다. 성경은 학교나 사업과 같은 제도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규정하신 구조를 명시적으로 말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제도들이 자의적이고 하나님이 주신 표준과 상관이 없다는 말이 아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규례가 삶 전체에 적용된다는 가르침이다.
(3) 하나님의 다른 피조물과 마찬가지로 사회적 제도들도 각기 종류대로 창조되었다. 각 제도는 자체의 독특한 본성과 창조적 구조를 갖고 있다. 우리는 그 본성과 구조에 대한 직관적인 인식을 갖고 있으며 그 인식 내용은 경험과 연구에 의해 예리하게 심화되어 실천적인 지혜가 된다.
(4) 각각의 사회 제도는 그것에 고유하게 적용되는 창조 구조가 실증적으로 구현된 것이다. 실증적 구현이란 창조 규범을 실행하는 작업이다.
(5) 어떤 사회 제도도 다른 제도에 종속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사회적 권위를 가진 이들은 하나님의 규범을 그 영역에 직접적으로 구현하기 위해 부름을 받는다. 그들의 권위는 어떤 인간의 권위가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위임된 것이다. 만일 한 제도가 다른 제도들 위에 군림하거나 하나님과 다른 제도들 사이에 자신의 권위를 개입시킬 때는 일종의 전체주의가 나타나서 각 사회 영역의 제한된 본질을 위반하게 된다. 전체주의 국가가 그런 예이다. 정치적 권위가 다른 모든 권위를 지배하는 경우다.
(6) 전체주의는 사회의 장조 구조들을 방향 면에서 왜곡하는 현상이다.
전체주의: 언제나 하나님이 지정한 한계를 넘어서 다른 영역에 침범했음을 뜻한다.
하나님의 창조적 설계를 왜곡하는 일은 두 가지 방식으로 일어난다. 하나는 주어진 영역에서 규범을 왜곡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한 영역의 권위를 다른 영역에까지 확장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작품을 왜곡하는 이런 두 경우 모두를 반대해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정당하고 올바른 책임을 언제나 행사해야 한다. 정치적 전체주의를 반대할 때 국가 자체를 거부하기보다 국가 하나님의 뜻대로 공공 정의를 실천하도록 요구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각 사회 제도가 다른 사회 제도로부터의 간섭을 막아내고 스스로 자신의 고유한 책임을 감당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노력해야 할 것이다. 이 또한 창조의 회복과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참여하는 것이다.


3) 개인의 갱신
공격성
(1)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공격적인 행위들을 나쁘게 보거나 좋게 본다. 이러한 경향은 특히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어떤 신자들은 공격성이 모든 징후들을 유순함과 온유함이라는 성경의 개념이나 사랑이라는 중심적 계명과 충돌하는 것이라고 정죄한다. 이런 식으로 공격성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화를 내거나 공격적으로 행동할 때마다 일종의 죄책감을 느낀다. 공격성을 나쁘게 생각하는 이들은 일반적인 감정에 대해서도 비슷한 반응을 보이기에 감정을 자유롭고 공개적으로 표현하기보다 억압하고 통제하려고 애쓴다. 공격성을 선한 창조 질서의 일부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죄의 현상이며 타락의 결과라고 생각한다. 다른 한편으로 공격성을 건강을 위해 필수적인 인간의 자연스런 기능이라고 보는 그리스도인들도 있다. 콘라드 로렌츠와 같은 동물행동학자는 동물세계에서 공격적인 행동이 매우 긍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이들은 인간에게도 공격이라는 자연적 본능이 있으며 이 공격 본능은 억제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공격성이 억제될 때 온갖 종류의 노이로제와 정서적 부작용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들은 심지어 공격적인 행동을 장려하기도 한다.
심리치료사들은 치료 대상자에게 다른 사람을 대할 때 화를 표현하고 자신을 옹호하라고 권유한다. 자신의 공격성을 조절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 자기 주장의 훈련이 권장되기도 한다. 이런 상이한 접근들은 분명히 서로 모순된다. 한 쪽이 질병의 증세로 보는 것을 다른 쪽에서는 치료술로 권장하고 있는 셈이다. 진지하면서도 경건한 그리스도인들이 양쪽 진영에 다 속해 있으며 성경적 세계관은 이런 잘못된 딜레마에서 빠져 나오게 할 수 있다. 성경적 세계관은 문제를 다른 방식으로 접근하게 하며 실제로 감정을 다룰 때 진정 효과적으로 대처하는 방법을 제시한다.
(2) 증오에서 나온 공격성은 창조 시에 주어진 아름다운 선물의 왜곡이다. 그것을 반대하는 것은 선물에 대한 반대가 아니라 왜곡에 대한 반대다. 온유와 공격성이 반드시 모순되지는 않는다. 공격성은 거부할 것이 아니라"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게"(딤전4:5)되어야 할,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된 사물의 한 예인 것이다.


영적 은사들
(1) 바울은 은사를‘카리스마타’즉‘선물들’이라고 불렀다(고전12장).
(2) 은사의 능력들에 대한 두 가지극단적인 입장
한 입장은 인내나 온유와 같이 다소 일반적인 은사들보다 본래 뛰어난 초자연적 은사이며 이것들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이 더 높은영적인 위치에 있다는 것이다. 다른 입장은 모든 카리스마적 은사는 이상한 현상이고 심지어 가짜라고 주장한다.
앞의 서로 상충하는 이런 견해들을 분석하기 전에 초자연적이란 단어에 이해를 해야 한다. 초자연적이라는 말은 지상적 창조 세계를 넘어선다는 뜻이 아닌 하나님의 선한 땅에 속하는 것들이다. 이러한 카리스마적 은사들은 기독교 밖에도 얼마든지 있다. 카리스마적 은사들은 창조 세계의 가능성으로서 구조의 특성을 보여주며 하나님의 왕국을 섬기거나 그 세상을 섬김으로써 방향성을 보여준다. 이사실의 중요성은 영적인 은사들도 다른 은사들과 근본적으로 동등하다는 점에 있다. 교회의 성숙과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위해 하나님의 성령이 주신 인간의 모든 은사들은 이런 면에서 영적인 은사들이다. 방언과 다스림의 은사도 똑같이 말할 수 있다. 바울은 고전 12:28에서 다스림을 카리스마적 은사로 분명하게 언급하며 베드로전서 4:9-11에서도 손대접과‘섬김’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같은 단어를 사용한다. 중요도나 화려함에서는 차이가 있을지라도 그리스도의 구속과 성화와 화해를 지향하고 있다면 모두 똑같이‘카리스마적’이며‘영적인’성격을 지닌다.
(3) 누구에게나 방언과 신유를 포함해서 모든 카리스마적 은사들을 소유할 수 있는 잠재력이 있다는 말이 아니다. 우리 모두는 전부를 같은 정도로 소유할 수는 없다. 구별하는 성경적 입장에서 우리 모두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사들을 개발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러면서도 그 중 가장 위대한 것은 사랑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성(性)
(1) 성에 대한 입장으로 성은 인류 존속을 위해서 필요할지 모르나 필요악이며 우리는 성에서 쾌락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는 부정적인 입장과 다른 한편으로 성을 참된 의미 발견과 자아 실현의 통로로 찬양한다. 이런 유의 양극화로 심각한 오류에 빠질 수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주 중용 즉 양극단을 피할 수 있는 윤리의 황금률을 찾으려는 잘못을 범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양 극단으로 몰아가는 잘못된 딜레마를 깨뜨릴 필요가 있다. 여기서 성은 기본적으로 좋은 것인가, 나쁜 것인가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 인간의 성에서 무엇이 구조이며 무엇이 방향인가라고 물어야 한다. 우리의 준거틀이 구조와 방향일 때 우리는 인간의 성을 전적으로 긍정하는 동시에 그 왜곡상에 대해 동일한 확신을 갖고 반대할 수 있게 된다.
(2) 우리는 어떤 주어진 현상에 구조와 방향의 구별을 적용할 때 두 가지 사항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첫째는 창조의 규범적인 유형을 식별하려고 할 때 성경이 우리에게 필수 불가결하고 최우선적인 안내자라는 점이다. 두 번째 사항은 성경이 분명하고 구체적인 지침을 전혀 제시하지 않는 경우 창조 구조에 대한 해석이 다소 불확실하고 애매하다는 사실과 관련한다.
그러므로 애매모호한 성 윤리의 영역에서도 우리는 주님이 원하시는 길을 찾기를 포기하거나 관련 이슈가 윤리적으로 아무래도 좋은 것 또는 중립적인 것이라고 선언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따라야 할 지침들은 성경의 일반적인 가르침과 성의 영역에 대한 성경의 구체적인 교훈들, 그리고 주님의 경외에 바탕을 둔 지혜에 의해서 얻은 경험적 증거들이다. 기독교 공동체의 맥락 속에서 영적인 분별력을 발휘하여 주님의 길을 찾아내야 한다.
(3) 성적인 공상의 문제로 적용으로 마음으로 간음을 범하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에 상상력도 쉽게 죄에 의해 왜곡될 수 있기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될 필요가 있다. 성적인 공상도 성화되어야 한다. 지금은 기독교 공동체가 상상력의 윤리성에 대해 깊이 성찰해야 할 시점이다. 이 성찰은 선한 창조와 상상력의 구조에 근거해야 하며 죄와 은혜가 그 상상력에 각각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의식하면서 진행해야 한다.



신체 운동을 리듬, 음악, 사회적인 교제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선한 창조의 일부분이다. 창조주는 이런 요소들을 함께 묶어 서로 기뻐하고 즐기도록 좋은 선물로 주셨다. 이 사실은 춤에 관한 성경의 여러 언급들을 통해 확인된다. 그러나 인간이 부패시키지 않는 것이 거의 없는 만큼 춤 역시인간의 죄의 영향권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현대의 사교춤에서 왜곡상은 성적인 흥분이나 도발, 난잡함이 계기 혹은 의도적인 수단이 되었을 때 가장분명하게 드러난다. 이 말은 춤이 지닌 성적인 요소가 악하다는 것이 아니다. 그 요소에 초점이 집중될 때 성적 전희가 될 것이다.
춤은 하나님의 선한 창조의 일부이기 때문에 선하며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회복된다. 인간이 기뻐하고 즐기는 영역이 구속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도 완전히 임할 수 없을 것이다.
6. 결론


중요한 것은 쉬운 해답이 아니라 세계를 바라보는 신선한 눈이다.
성경적 세계관은 질문을 제기하는 방식을 제공하는데 독일 사상가들은 흔히 이것을 문제 제기라고 부른다. 이 방식은 매우 독특하고도 성경적이다. 세계의 현상들을 구조와 방향의 관점에서 접근한다는 것을 곧 성경의 교정 렌즈를 통해서 실재를 본다는 것인데 이 교정렌즈는 어는 곳에서나 선한 창조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창조주가 그것을 회복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과학자들이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 이런 문제 대해 제공하는 대답들은 가장 깊은 곳에 자리잡은 세계관에 의해 결정적으로 형성된 철학적 범주들에 의존한다. 그러므로 세계관은 철학적 범주들을 매개로 하여 학문에 영향을 끼친다.
생각이 깊은 그리스도인들은 어느 영역에서 자신의 책임을 수행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든 간에 성경적 세계관의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하며 자기의 생각과 행동을 거기에 맞추어야 한다. 이 문제를 무시하는 사람은 성경이 우리의 일상사의 더욱 넓은 부분에 실제로 절실하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셈이다.


7. 서평
창조된 사람은 누구나 문제를 가지고 살아가게 되어있다. 그 해답을 찾는 사람은 각양각색 다르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면 답을 성경에서 찾아야 한다."성경은 연구와 분석을 피해 갈 수 있는 지름길이 아니라, 연구와 분석이 유익을 산출하는데 필요한 신뢰할 만한 기초 변수들을 제공한다"것이며 또한"생각이 깊은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어느 영역에서 자신의 책임을 수행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든 간에 성경적 세계관의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하며 자기의 생각과 행동을 거기에 맞추어야 한다"라고 말하는 저자의 뜻과 같다.
모든 죄가 관계 안에서 존재감과 가치의 파괴와 부패 등으로 나온 실재임에 회복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피조된 사람 누구 예외 없이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어떠한 현상, 어떠한 병증으로 분명하게 표출 되므로 치료를 받아야 한다. 나와 우리 모두는 대속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의 용서하심과 위로를 받아야 할 것이다.
양 승훈 교수의 저서 기독교적 세계관의 한 내용을 덧붙여 살펴보면"온전한 기독교적 세계관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사는 것은 육체 가운데 사는 동안에는 이상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기독교적 조망을 가지고 살기 위하여 날마다 성령님의 도움을 구하고 우리의 의지를 동원하며 결단하는 것이 필요하다"라고 말한 바와 같이 하나님 말씀에서 답을 찾되 현재의 모든 일들을 문자적으로 보여주고, 알도록 하여 주시는 것은 아니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믿음 가운데 선한 목적을 두시고 구조와 방향성을 바르고 영적으로 분별력 있게 인도하실 것을 믿는 것이다.


* 세계관을 창조, 타락, 구속의 관점에서 이해하려고 정리를 최소화하지 않고 책의 내용 전체를 나타내려고 적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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