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중심사상 -바울의 신학
바울의 신학 바울신학의 핵심은 나사렛 예수라는 인물에게 나타난 일을 바울이 어떻게 이해하고 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옛날 이스라엘에게 약속하신 여호와의 언약이 나사렛 예수라는 분을 중심으로 일어난 사건과 무슨 연관이 있단 말입니까? 또 연관이 있다고 단정해 버릴 수 있는 객관적 증거는 무엇이냐에 대한 설명으로 풀어나가야 된다고 여겨집니다. 사도바울에게 있어서 제일 충격적인 사건은 십자가에 저주받아 죽은 그 인물을 하나님께서 그를 주가 되게 하셨다는 데 있습니다. 이점은 바울이 누구에게 배운 것이 아니라 자신의 선입감을 일시에 허물어 버린 사건을 경험한데서 비롯 되었습니다(사도행전 9:1-9).
살기등등한 예수 믿는 자들을 체포하러 가는 바울은 그 당시만 해도 나사렛 예수는 완전한 여호와에게 이단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의 죽음이 율법대로 하나님의 저주의 표정인 십자가에 달려 죽었기 때문입니다(신명기 21:23). 저주받은 자를 저주하는 것은 하등의 죄의식을 가질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당사자를 여호와께서 주가 되게 하셨다면 바울 자신이 단순히 구원받고 안 받고가 문제가 아니라 유대교가 안고 있는 신학 자체에 큰 변혁이 일어나야 됨을 느꼈습니다. 유대교 신학의 중심은 여호와와 이스라엘간에 언약으로 표현된 이스라엘의 구원에 두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자신이 직접 말씀하신 언약 때문에 세상을 버리면 버렸지 이스라엘이 한 것이 무엇인가 하면은 결국 사흘만에 여호와께서 다시 죽음에서 일으켜 주가 되실 그 당사자를 이스라엘이 힘을 모아 그들 자기 세계 밖으로 죽음으로 몰아낸 것밖에 더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경우라면 이스라엘이 평소에 생각하고 자신있어 해 왔는 언약 해석에 치명적인 결함이 있음을 만천하에 노출된 셈이 됩니다.
어디서 잘못된 것입니까? 문자적으로 빈틈없이 지혜를 짜 모으고 했을텐데 말입니다. 또 하나님께서도 개 같은 이방민족에게 메시야를 죽이는 일을 수행하게 하시지 않고 고상하고 거룩된 생활 하기로 소문난 언약의 택한 백성 이스라엘에게 이 일을 저지르게 해서 그들에게 창피와 죄책을 한꺼번에 뒤집어 씌우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렇게 되면 여호와의 이름에 대한 명예에 손상이 갈텐데 말입니다. 가장 많이 아는 것 같지만 실상은 전혀 여호와의 속 마음을 몰랐던 게 됩니다. 그러면 옛 언약에 나타난 여호와의 像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버렸던 자의 건짐이었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보여주신 여호와의 생각은 "버림"이었습니다(마태복음 27:46). 그런데 그 분의 버림은 단순히 나사렛 예수 개인만의 버림이 아니었습니다. 요한이 주는 세례에 함께 동참함으로 말미암아(마태복음 3:13-15) 온 우주에 대한 심판 속에서 자기 백성에게 온 심판을 한 몸에 짊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분의 버림당함은 여호와 자기 백성의 버림입니다. 이로써 이 순간 모든 것이 無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예수의 죽음을 회심 전의 바울과 유대교에서는 이것을 어떻게 처리하느냐 하면은 그는 여호와의 종이 아니기 때문에 그의 죽음도 이스라엘의 운명과 하등 상관이 없다고 보고 있습니다. 결국은 유대교의 생각은 이스라엘 민족 자기네의 입장에서 언약을 이해라고 있는 반면 교회는 예수님 입장에서 그들을 보게 됩니다. 여호와의 이름의 영광도 자신을 구원할 때만 비로써 전 세상에 구현된다고 유대인들은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 유대교인들은 사도들과 같은 동시대 사람들이고 꼭 같이 예수님의 소문과 그 분을 대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평소에 말씀하신 그 주장이나 사상에 대하여 귀담아 두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그들이 제3자들 보다 예수님을 덜 연구했다기 보다는 부활의 주님을 만나지 못한데 기인 됩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들이 담대히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예수님에게 특별 교육을 받았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예수님의 부활에서 예수님을 다시 한번 확인한 결과였습니다. 마치 사도바울의 경우와 같이 사람에 의해 버려짐을 당했던 분은 하나님이 다시 살리심으로 단순히 그 버림에 참여한 자를 정죄한다는 차원을 넘어서서 하나님의 계시의 절정의 수단으로 예수님의 사건을 설정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계시의 방편이라는 점에서 가롯유다의 행위가 잘 했다거나 하나님도 예수님을 죽음에 이르도록 도우셨다는 말을 할 수가 없는 것은 언약이 우리 입장을 옹호하기 위해서나 우리의 잘못을 하나님께 전가시키는 여지를 주기 위함이 아닌 것에 그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로 새로운 차원의 하나님의 행동이 이 시대에 침투 되었을 때에 하나님은 우리의 잘 잘못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자비의 행위에 있습니다. 물론 은혜와 사랑과 자비가 우리 인간들의 무지와 죄성과 대조하고 비교함 속에서 부각되지만 초점은 역시 사랑에 의한 구원에 있습니다. 그 다음에 나타나는 현실은 하나님의 공의라는 것이 이제는 율법적인 것보다는 이 사랑과 자비와 은혜를 거부하는 자에게 사정없이 심판으로 주어지고 완성된다는 것입니다. 어쨌던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정리할 수 있는 사실 하나는 하나님은 더 이상 모든 일에 있어 인간과 상대하지 않는 것입니다. 유일한 언약 상대자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기존의 언약 상대자는 거부당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유일한 언약 상대자(그리스도)가 해야 될 일은 훼손된 언약을 재건하는데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그리스도로부터 새로운 창조사역을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 창조가 우선이 아니라 우주 창조가 우선입니다. 사도바울의 관심은 기독론을 중심으로 새로운 신관을 언약 가운데서 파악하고 그 다음 그 언약 수행자의 입장에 선 그리스도에게 우주론 근원을 맡기고 그 우주 가운데서 인간이 아닌 "형상"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결코 바로 인간학에 들어가지를 않았습니다. 그리스도가 창조에 관여하고 있다는 것은 신약성경의 폭 넓게 펴져 있는 사상입니다. 이것은 공개 되었습니다. 그 비밀이 무엇이냐 하면은 하나님이 세상을 구원하실 때나 천지를 창조하실 때 한번도 그리스도를 배제하고 일 하신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까? 그것은 언약하신 분과 언약 상대자가 분명히 밝혀진 상태에서 창조사역을 재조명하기 때문입니다. 언약 관계에서 나타낼 내용은 딴게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창조사역 같으면 창조를 통해서 하나님의 형상이 드러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창조 사역은 완성됩니다(창세기 2:1). 그러면 어떻게 하면 창조사역에서 하나님의 형상이 드러날 수 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완성된 사랑과 공의가 드러나는 창조가 될 때 비로소 창조는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사도는 하나님의 창조에 어떤 결함도 없음을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알게 되었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의 오심을 준비하고 그 소식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탄식하는 것 가운데서 말입니다(로마서 8:23). 그러니깐 사도 바울은 이는 필시 그 어느 것 하나라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인 것입니다(골로새서 1:15-17). 모든 것이 그리스도로 정향 되었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향한 만물의 통일의 속성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에베소서 1:10). 구원론은 이제 창조론의 기초가 되며 내용이 되어집니다. 창조의 완성체로서의 구속입니다. 창조에서 출발했던 구속의 역사는 창조의 숨겨진 지혜와 비밀을 밝혀지는데서 도착 지점에 와 있는 것입니다(에베소서 1:9/골로새서 1:9). 하나님은 자기 형상을 위해 충성을 다한 것입니다. 가장 영광스럽고 가장 하나님다움이 드러나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온 천하를 덮어 버릴때입니다. 사도바울은 그 형상이 구체적으로 인격화되어 역사 속에 나타난 증거로 나사렛 예수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행동을 듭니다(골로새서 1:15/고린도 후서 4:4). 이것은 단순한 창조가 아니라 창조에 담긴 하나님 형상이 됨과 동시에 옛언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건들은 신약시대에 나타난 하나님의 형상을 설명해주는 증거 관계를 지니게 됩니다. 따라서 구약의 모든 사건들은 신약에 나타난 그리스도적 입장에서 비로소 그 실질적 의미가 주어지게 되고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 설명 되어지며 신약 성도들은 구약에서 얻어진 교훈과 훈계가 역사가 존속하는 한 늘 반복된다는 점에서 그것을 적용할 기회를 갖게 되고 그리스도의 가치와 중요성에 무조건 기대를 걸게 됩니다. 이런 차원에서 바울은 아담 즉 인간에게 새로운 의미를 부여합니다.
단순한 피조성만으로 규정 지을 것이 아니라 창조 사역을 담당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아담을 생각합니다. 그의 죽음은 그의 피조성에 기인된 것이 아니라 그가 해야 될 일을 그가 그르쳤기 때문에 주어진 상황입니다. 창조론에 구약에서는 피조성에서 풀이 되지만 바울에게는 모든 것이 하나님이 하나님의 형상인 그리스도를 구속했다는데서 아담은 그리스도와 대비해 볼 때 어떤 하나님의 형상을 보이고 있으며 그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아담을 통한 자신의 형상의 다른 면을 보이는데 어떻게 성공했는가에 해석의 초점이 있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5장에서 아담의 역할을 죄로 인한 하나님의 심판과 징벌이라는 하나님의 공의를 보여주고 있으며 그리스도에게는 그 사망의 왕이 된 상황을 극복했는가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는 인물로 나와 있습니다. 또한 에베소서 5:22-23에서는 창세기 1:22-24에 나오는 한 몸 되는 사상을 그리스도와 교회의 사이에 연관시킴으로 말미암아 완성된 언약 하에서도 부부관계에서도 그 목적이 하나님의 형상의 사랑의 면을 보여 주는데 한 몸 되는 목적과 동기가 있었음을 지적합니다. 이 사실은 타락이후 아담이 하와에게 보여준 원망의 말은 (창세기 3:12) 한 몸되게 하신 하나님의 의도에 미흡한 처사입니다. 이것이 새 언약 안에서 완성을 보게 된 것입니다. 노아와 하나님간의 언약도 동일하게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을 봅니다. 창세기 6:3에서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라."라고 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노아와 상대한 것은 노아 보다는 노아라는 형상을 통해 언약을 이 지상에 세워두기 위함이었습니다(창세기 6:18).
따라서 노아를 통해 나타난 그와의 언약을 통해서 보여진 하나님의 형상은 창세기 8:22에 나와 있는 바와 같이 창조질서를 신실해서 유지한다는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 구약의 의미로 볼 때는 말씀이 전 세계 널리 펴지게 되는 자연이 주는 배경이 됨을 말하고 있습니다(시편 19:1-3). 그 배경이란 하나님이 제시한 우주적 증거는 그 누구도 여호와의 말씀을 알지 못해서 못 받아드린다는 핑계를 허용되지 않게 만든 것입니다. 홍수로 마땅히 벌써 멸망당해야 하는 인간세계가 아직까지 버티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나는 여호와를 모른다. 여호와는 나에게 어떤 증거와 언질을 준 적도 없다."는 주장이 얼마나 노아언약에서 흘러나오는 은혜를 무시하고 나오는 말인지 드러납니다. 예수님은 악인과 선인에게도 아버지께서는 비를 내리신다는 말씀을 하시므로 말미암아 노아언약의 은혜를 강조했지만 이제는 새언약이 완성된 입장에 서서는 바울이 복음이 널리 전파되어야 될 그 언약적 근거는 노아언약에 있음을 천명함으로 노아언약이 비로소 복음전파 하는 그 자체로 완성의 모습을 갖추었습니다. 노아언약이 악인과 선인 구분 없이 자연 질서가 골고루 혜택이 돌아가는 것처럼 이 귀한 복음도 마치 햇빛이나 공기나 비가 무상으로 제공되듯이 전달되는 바로 그것이 노아언약이 지향한 완성의 모습이요 거기에서 나타난 것은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신약에 있어 노아 역할을 하는 것은 창조 언약의 완성으로서 새로운 형상을 지닌 몸을 부여받은 그리스도의 몸만이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도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을 보고 있습니다. 로마서 4:6-9 에서 일한 것도 없이 義로 여기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은자의 증거로 아브라함이 등장됩니다. 그러나 구약에 보면 아브라함이 아무 것도 안한 것이 아니라 믿으니 의로 여김을 받았다고 되어 있습니다(창세기 15:6). 그러나 그가 믿은 약속의 내용은 그가 기대한 식으로는 이루어지지는 않았습니다. 그의 방식은 바로 자신이 만국의 아비가 되기로 한 때로 부터 자식을 생산하는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자식이 하나님께 인정 받지 못함으로 인해 하나님이 주시는 자식을 바랄 수 없는 가운데 고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알므로 아브라함은 비로소 복의 근원에 예속된 자로서의 믿음의 조상이 되는 것입니다(믿음의 대상이 아님). 아브라함 시절 때 아브라함이 알 수 있는 것은 단지 이삭은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자녀이고 그 자식을 통해 나의 연약함 때문에 이루지 못한 언약의 완성을 내 자식을 이루어 주리라는 기대였습니다(창세기 22:17-18). 그러나 그 이삭조차 언약수행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그는 몰랐습니다. 다만 바울에 있어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새삼 알게 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인간의 어떤 공로가 하나님의 복과 영생에 포함될 수가 없다는 점입니다. 오직 약속의 자녀가 있다면 그것은 이삭도 아니요 야곱도 아니요 오직 한사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갈라디아서 3:16). 아브라함언약을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의 형상은 복이 주어질 권리는 타락 이후 인간에게 주어질 수 없는 것이며 아무리 순종하고 하나님을 믿었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언약상대자로 하여금 자신을 否忍하도록 하는 방편이었고 핵심은 자신을 부인하는 그 자리에 재확인 되는 약속의 가치를 인정하는 그 마음가짐이 하나님이 원했던 형상입니다. 곧 죽임과 그리고 그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아는 마음 말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그 의란 바로 경건치 않는자를 가리워줌으로 주어지는 의입니다. 그 실상을 아브라함을 통해서 하나님이 보여주신 것입니다. 모세를 통한 언약도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을 보았습니다. 모세 율법은 이스라엘 생존의 방편으로 준 것입니다(신명기 28장). 이스라엘의 모든 움직임은 율법의 저촉을 받도록 되어 있습니다. 만의 하나라도 율법에서 벗어난 행위를 보일 때는 하나님의 축복권 밖으로 밀려나는 것입니다.
여호와는 이스라엘 민족을 통해서 율법을 굳게 세우는 것입니다. 율법의 엄위성과 초월됨은 그 어느 누구로 부터로도 방해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출애굽기 19장). 그런데 이스라엘은 이 율법을 자기 민족의 구원과 연관 시키려고 한 것입니다. 자기들 행위의 정당함과 자기들 선택의 우월성을 율법 가지고 증명 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율법의 공정성과 엄위성이 이스라엘 내부에서 약화되고 무시 되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죽으심을 통해 그 율법이 지향한 바가 명확하게 드러났습니다. 바울은 십자가 사건을 통해 율법의 義됨을 확인할 수가 있었습니다. 율법이 이스라엘 민족에게 개입된 것은 죄를 심히 죄되게 하는데 있었으며 이스라엘 전부를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아래 두려함이었습니다(로마서 3:19-20/7:9/갈라디아서3:10,19,22/5:4). 저주 가운데 가장 큰 저주는 하나님의 아들조차 버림 받았다는데 있습니다. 사도는 이런 뜻에서 모세 율법은 행함이 아니라 오직 믿음과 은혜만의 진리로 이스라엘을 이끌기 위한 몽학선생이라고 판정한 것입니다(갈라디아서 3:24). 다윗언약도 그리스도안에서 완성을 보게 됩니다. 옛 언약에 의하면 이스라엘에서의 왕이란 기름부음을 받은 자로서 총체적으로 구원의 기능을 가진 지도자 위치에 있었습니다. 왕들은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 봉사를 다해야 하는 인물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통해서 보이고자 했던 형상은 인간의 구원에는 한계가 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이 점은 아브라함 언약과 맥락을 같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왕들은 한결 같이 그 왕이라는 직책에 대하여 매력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온 이스라엘의 主의 입장에 서 있는 것으로 오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여호와의 종에 불과한 것입니다. 왕은 그들이 아니라 여전히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이사야 53장에 나오는 말씀처럼 여호와의 종의 역할은 양을 목숨을 바치는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이지 왕위에 군림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 이유는 백성들의 죄책 때문에 그러합니다. 왕들이 주의 종으로서 임무를 다할 때 비로소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주의 위치에 있음이 확인되는 것입니다. 바로 다윗언약은 누가 주이며 누가 진정한 왕인가를 나타내기 위한 언약이었습니다. 현재 누가 이스라엘을 통치 하고 있느냐를 보여 주고자 하는 언약이었던 것입니다. 그 언약이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이 되었습니다. 나사렛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림으로서 온 우주의 기름부음 받은 자로 확인을 시키고 또 그 죽음이 자기 백성의 죄책을 담당한 죽음이라서 진정한 이스라엘의 왕이요 하나님의 종인 것입니다. 또 그의 주 되심은 아브라함언약과 모세 율법의 완성자로서 주이기 때문에 그 분은 안에서 새로운 선택된 자의 사역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언약상대자로서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내시는데 초점이 있는 것과 같이 모든 우주내의 피조물과 하나님의 형상 사이에도 언약관계가 원래부터 존재했음이 비로소 예수님이 주가 된 입장에 와서 밝혀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남은 (로마서8:19) 이미 피조세계내에 선택된 자들이 주와의 사전에 약속이 되어 있음을 말해 줍니다. 그것이 비록 혈통적 이스라엘 민족의 등장으로 이미 아브라함 언약으로 예고된 바는 있지만 그들은 (혈통적 이스라엘) 참 이스라엘의 그림자에 불과한 존재들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부정적으로 밖에는 하나님의 형상을 드러내는데 달리 관계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약속한 언약을 수행하였습니다. 온전한 형상을 드러낼 무리들을 선택하였습니다. 그 선택의 방법은 예레미야 31장 31절과 에스겔 36장26정-27절에 예고된 방식대로 따른 것입니다. 이것은 창세기 6:3과 모순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새언약은 육체와 상관하는 것이 아니라 영과 상관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에 있어 영이란 비실제성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이란 어떤 특수한 관계 속에 있는 세계를 의미합니다. 에스겔 36:27이나 요엘 2:28-32에 볼 것 같으면 종말이 왔다는 증거로 하나님이 특정인들에게 내려지는 게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성령을 생각하면서 마지막 때의 현상으로서 성령이 왔다고 여깁니다. 오순절의 성령 강림을 사도가 어떻게 해석 했는지는 분명치 않습니다마는 성령의 보증이라는 표현을 봐서 종말의 현상으로 간주했을 것입니다(에베소서 1:14 로마서 8:23 고린도 후서 1:22). 그렇다면 성령과 영과 무슨 상관이 있는 것일까요? 갈라디아서 3:2에 보면 성령을 시작했다가 육체로 마치겠느냐 라는 말이 나옵니다. 여기서 성령이 육체와 대조가 되는 형식이 됩니다. 종말 때 성령께서 오신 이유는 바로 육체로 율법을 이루려고 하는 그 인간의 행위를 정죄하고 그 자리에 십자가의 공로와 은혜됨을 세우려 하는데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생겨진 관계가 성령의 주도함에 의한 관계이기 때문에 영의 세계라 할 구 있고 육이란 성령과 관계없이 인간의 육체로 하는 행위 위에 일하는 모든 모습들 그런 상태를 육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이란 종말의 주도권을 쥐고 있는 세력이며 육이란 영에 의하여 고발 당하고 정죄 당하는 옛 것 전부를 두고 말합니다. 육이 이런 대접을 밖에 없는 것은 사도바울이 보기에 옛 세계가 그리스도를 죽임에 넘긴 순간 부활로 말미암아 그 죽음을 이기고 다시 도래하는 세계와는 어떤 접촉점이 없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바울은 종말이 가져다 준 역사 속에서의 갈등을 영과 육이라는 두 세계로 표현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장차 주님이 다시 오셔서 부활할 것은 육의 부활이 아니라 몸의 부활이라는 점에서 인간의 연약성과 죄악성을 인간의 피조성에 근거한 몸이라는 표현보다 여호와의 관계성에 가까운 육체라는 표현이 (창세기 2:7/6:3) 더 적절한 것 같습니다. 이미 예수님은 부활되어 영광스럽게 되셨고 그 분에 창조 언약에 의해 새로운 의미에 있어 피조성을 지닌 성도의 몸도 나중에 부활된다면 성령께서도 육을 부정해도 몸은 부정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상의 말을 정리해 보면 부활한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몸과 관계가 이어진 몸을 가지고 영이라고 하는 것이고 육이란 부활한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몸과 하나를 이루지 못한 육신을 두고 말합니다. 그 관계는 누구에 의해서 성립되는가 하면은 바로 성령입니다. 여기서 과연 성령님의 낮아지심이 요구되는가 하는 문제가 등장합니다. 오순절 성령의 강림은 낮아지심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미 그리스도의 높아지심으로 이룩된 주의 차원을 높아지심 답게 확장해 나아가는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령님의 역할은 모든 무릎으로 주 앞에 굴복시키고 그리스도가 심판 주 되심을 만 천하에 알리는 것입니다(빌립보서 2:9-11). 바울은 예수님의 人子으로서의 묵시적 활동을 성령의 오심으로 확인되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령이 오심이 바로 마지막 심판 때의 징조이기 때문입니다. 역사를 종결 짓기 위한 오심으로 보고 있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예수님의 공생애를 성령님이 그 진리됨을 가지고 이 종말을 어떻게 적용시키고 활동 근거로 삼는지를 생각합니다. 예수님에게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했고 또 예수님으로 하여금 그런 생을 살도록 충동질한 것이 성령님이라면 성령님은 예수님 통해 묵시의 나라, 즉 하나님의 나라로 역사를 마무리 지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나라의 시작이 바로 세례였습니다. 묵시적 인물이 역사적 인물에 뛰어들어 종말의 사건을 先取했다면 이제는, 그래서 이루어진 묵시적 나라의 form을 성령께서 이 마지막 때에 그대로 적용시키는 방식이 된 것입니다.
성령님은 이 방식을 벗어난 활동은 하시지 못합니다. 왜냐하며 그 나라만이 역사를 마무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아브라함 언약에 따라 자기 백성을 찾아 갈 때 예수님의 공생애가 그 사람에게 적용이 되되 예수님 때와는 반대로 이번에는 역사 쪽에서 묵시 쪽으로 세례가 되도록 하십니다(로마서 6:1-5). 이것은 (로마서 6:1-5) 예수님의 구속사역에 참여인 동시에 그 열매에로의 참여입니다. 이제 그들은 새로운 묵시적 존재로 신분이 전환된 것입니다(다니엘 7:22). 심판에서 구원에로서 연합입니다. 성령께서 예수님 때와 꼭 같은 활동을 시키지만 예수님 경우와는 달리 방향이 서로 반대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세례라는 것이 한 순간만을 이야기할 수 없고 예수님이 역사에 뛰어들어 자기 백성과 합류하는 것이 언약의 완성이듯이 성령께서 그 완성된 언약에 기초로 하여 예수님이 뛰어들게 했던 언약의 대상이 누군가는 역사가 끝날 때까지 밝혀 질 것입니다(에베소서 1:4). 그 역사는 예수님이 누구신가가 밝혀 질 때까지 예수님을 고난 속에서 밀어붙인 것처럼 마찬가지로 성도와 교회는 자신들이 그리스도와 연합 되었기에 역사 속에서 고난의 길을 아니 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로마서 8:17/갈라디아서 4:29). 이것이 또한 세례의 결과입니다. 이제 세례받은 자의 생활은 마치 예수님이 자기 백성과 연합한 결과로 가장 죄인된 모습(십자가 위에서 버림받으심)으로 내려가듯이 이들의 생활도 자기를 부인하고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아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는데 까지 나아가야 합니다(갈라디아서 5:24/4:19). 성령께서는 날마다 그 사람 속에서 십자가의 사건을 일으켜 어찌하든지 부활에 이르게 하십니다(고린도 후서 4:10-12/빌립보서 3:12). 그러나 성화란 우리가 이렇게 될 수밖에 없는 신분됨을 재확인 하는 것이지 결코 한걸음 두걸음 계속 완전성에 이르는 내적 성숙의 과정으로 이해 되어서는 아니됩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의 노력이 결국 온전한 참여에 있었지 결코 어떻게 하면 내가 인간들 처럼 죄를 많이 지을 수 있을까에 힘씀이 아니듯이 말입니다. 거룩이란 분리의 개념이지 아직 미완성을 향한 성장도상에 있다고 여기는 것은 거룩이 그리스도의 피에 있음을 모르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 피가 바로 하나님의 형상이요 심정을 토로한 것입니다. 옛 언약 안의 이스라엘은 이것에 실패했습니다. 이제 새 언약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위치 때문에 성도를 통해서 역사에 구현됩니다. 옛 제사와는 달리 하나님의 형상만이 드러나도록 그들로 하여금 은사를 주어 산 제사를 드리도록 하여 자신의 옛 모습을 죽이고 몸으로 하고 신체를 가지고 하는 봉사를 하게 하므로 의식이 아니라 생활로 영적 예배를 드리게 합니다(로마서 12:1-13). 바울에 있어 신체의 강조는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형상을 신체성을 가지고 보여준 것과 같이 형상의 구현에 있어 일치성을 갖기 위함입니다. 문제는 누가 그 사람을 최종적으로 이끌고 가느냐에 있습니다. 이 싸움이 성도에게 발생됩니다. 성도는 아담을 흙되게 한 세력과 우리를 그 세력에서 불러낸 분의 사랑의 부르심 사이에 끼여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갈등과 투쟁에서 벗어나고자 人子됨의 마지막 사건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대단한 인내와 소망이 요구됩니다(빌립보서 4:5). 성령께서 기어이 예수님을 부활시킨 것처럼 (로마서 8:10-11) 그리스도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근거로 하여 성령께서 우리들도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해 은사를 주시어 이기게 하실 것입니다(로마서 8:27-39). 재림의 날이 올 때에는 이런 갈등과 투쟁의 시절도 사라지고 예수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상급을 받을 것입니다. 그 상급은 기업과 상속의 의미가 있는 것으로 예수님이 언약 상대로서 자신의 공로로 하나님께 받은 상급을 우리와 더불어 누리도록 우리에게 증여하는 형식을 취하게 됩니다. 어떤 자는 물주는 자로 참여하게 되고 어떤 자는 심는 자로 참여되지만 그러나 결국 거두기까지 역사 하신 것은 하나님이십니다(고린도 전서 3:5-15).
바울의 신학을 다시 정리해 본다면 바울은 예수님의 이 땅에 오심과 고난, 십자가에서의 죽음심 그리고 부활, 승천, 오순절, 성령, 강림, 마지막 재림이라는 이 그리스도에게 일어난 사건이 바로 구약이 예언한대로 마지막 때에 묵시적인 사건을 간주해서 이 사건들을 통해 하나님은 어떻게 자기에게 한 약속을 달성 하였으며 그것이 역사 속에 어떤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느냐를 규명했습니다. 그래서 성도란 자기에게 일어난 일에 관심 둘 것이 아니라 늘 예수님에게 일어난 또 앞으로 일어날 일에 관심을 두도록 자기를 죽여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묵시적인 인물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결국 우리에게 증거하고 싶었던 것은 모든 만물이 주께로부터 와서 주로 말미암아 주께로 돌아간다는 사실입니다(로마서 11:36).
성경중심사상: 바울서신서(1)
로마서 로마서는 복음이 어떻게 해서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는 능력이 될 수 있느냐를 설명한 책입니다(1:16-17). 율법이나 양심대로 행함이 아니고 말입니다. 바울은 자기 주장의 근거를 성령에 둡니다(1:4). 즉 복음이 생겨난 것이 하나님께 그의 아들에게 행사하신 일 그 자체에 있다고 한다면 그러면 무엇이 복음이고 어떻게 해서 그 복음이 능력이 되느냐 하는 것은 그 복음이 생겨 날 때 발생된 일이 복음이 전파되는 그 일에 동일하게 작용된다는 것을 밝혀주면 문제는 풀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처음 복음이 탄생될 때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그것은 1:3에 나와 있는바와 같이 다윗언약에 속하는 인물을 이 땅에 출현시키고 그 인물에게 다가 간 분이 계시는데 그 분이 바로 성령님입니다. 성결의 영 되시는 분이 다윗언약에 속한 분을 능력으로 죽음에서 벗어나게 하셨습니다. 구원이라는 것은 죽은 자를 산 자로 만드는 것이라면 그 능력을 동일하게 받지 못한 자는 누구나 구원 얻지 못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구원이란 결국 하나님께서 자기 언약을 유효하기 위하여 언약상대자를 산 상태로 유지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시지 죽은 자는 하나님하고의 관계가 끊어지기 때문입니다(마가복음 11:27/시편 6:5/시편 13:3/시편 15:10/시편 30:3). 바울은 성령님이 오셔서 한 역할을 하나로 고정시키고 있습니다. 그것은 진실한 언약 상대자를 역사 앞에 제시하는 일입니다. 모든 언약을 완수한자로서 (다윗언약의 완수자가 기존의 모든 언약도 함께 완수자로 본다) 또한 인류의 대표자로서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는 아담의 후손들이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이미 수행하고 앞으로 수행할 자로서 나의 왕(주)으로 인정할 때 하나님은 다윗언약대로 그 밑에 복속된 자들에게 구원의 능력을 함께 주어질 수 있다는 논리를 제시합니다. 왕과 그 백성들 사이에는 성령님이 개재하여 상호연관을 지어 교재케하는 것은 마지막 날에는 정결케 하는 신이 언약에 관여한다는 선지자의 약속에 따른 주장입니다(에스겔 35:25-27/로마서 1:3-4). 따라서 선지자들이 약속한 그 약속 즉 복음을 믿는자들에게는 구원이 능력이 있는데 그 이유는 성령께서 그 약속을 최종적이면서도 또 영원한 언약을 여기고 유지 보존하기 위해 언약상대자를 죽음에서 부활 시키기 때문입니다. 믿음이란 바로 그 약속에게 나아가기 위하여 자기의 행함에서 나오는 의를 부정하는 것을 말합니다. 왜냐하면 자기의 행함은 언약이 예언한 약속이 발생 되지는 않고 부활의 영과도 상관이 없기 때문입니다. (로마서에서 말하는 약속이란 언약의 완성된 형태를 가지고 다시 옛 언약을 바라볼 때 비치는 언약의 개념입니다) 바울은 왜 오직 믿음으로냐를 설명해 나가면서 창조언약 부터 시작을 합니다. 모든 사람이 다 하나님을 알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이야기를 전개합니다. (1:18-20) 그런데 그 신성의 그 분이 만드신 것에 들어 있다고 합니다.(우리가 만든 것에 들어 있는 것이 아니고) 여기서 사도바울은 그 창조된 것을 가지고 우리의 창작물을 고발하는 형식을 취합니다(1:22). 즉 우리가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고 감사치도 아니한다는 증거는 우리가 만든 것에다 신성을 부여하는 행위로 들통이 나버린 것입니다. 소위 거룩한 것을 인간이 제조해 왔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불상이나 동물의 혼합된 모습으로 된 신상이나 또는 예배당을 화려하게 장식한다든지 부적이나 신비의 주술적 능력이 있다고 여겨지는 특수한 물건이나 제사기구, 반복하는 문장 나열과 행동 같은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그런데만 국한 된 것이 아닙니다. 또한 더 나아가서 경건치 않음이 곧 불의로 연결된다는 것입니다(1:18,28). 모든 불의와 경건치 않음에서 일어나고 있다고 지적하는 사도의 주장은 어디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입니까? 1:32에 보면 "사형에 해당한다"는 말이 나옵니다. 이것은 곧 하나님의 심판과 연장선상에서 나온 말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에 대한 책임과 순종 여하에 따라 하나님은 그들에게 삶과 죽음까지도 좌우할 수 있는 권한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러한 주권적인 관계를 창조언약이라고 부를 수 있는데 여기에는 아담의 죽음과 후대 인류의 죽음이 같은 이유에서 찾아왔음을 나타냅니다. 그렇다면 어떤 점에서 아담과 후대 인간이 동일합니까? 1:24에 보면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희의 마음의 정욕대로 내어 버려두사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으니"라고 나와 있습니다. 지금 인류는 각자 정욕에 팔렸습니다. 마치 아담이 욕심이 팔린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을 그냥 내어 버려 두신다고 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형벌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저주이고 심판이었던 것입니다. 죄와 정욕속에 헤매이도록 허용하시는 하나님은 사도가 생각하기에는 인간의 참 모습과 그의 운명을 극명하게 보여주시어 거기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에 핑계치 못하기 위한 조치라고 여기고 있습니다(1:18-20). 결국 사도는 로마서 1장부터 유대인 뿐아니라 전 인류에 걸쳐 나타나는 죄의 보편성 문제를 창조언약에 의한 하나님의 진노의 날의 정당성을 말하고 있습니다(2:5-8). 하나님의 창조언약은 유대인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닙니다(2:14-15). 모든 인간은 아담의 후손들로서 하나님께 책임추궁을 당해야합니다. 이 이론의 명백한 증거는 죽음이 이스라엘 이전의 사람들에게도 보편적으로 왕노릇 하고 왔다는데 있습니다(5:14).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과 능력에 대한 도전의 일환으로 거기에 대체하여 인간 쪽에서 만드는 형상은 인간이 욕심과 죄의 지배속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형벌을 받고 있다는 증거이며 이것이 죽음으로 결말납니다. 이 죽음은 심판입니다. 그래서 그 안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비판을 가한다는 것이 어불성설이며 (2:1-4) 중요한 일은 어떻게 하면 자신의 죄에서 벗어나 하나님으로부터 외롭다는 인정을 받을 수 있느냐 입니다. 그렇다면 옛 언약의 특수성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율법을 받은 이스라엘은 이러한 창조언약의 죄책으로 부터 면제받기 위해 인간이 행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의인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준 것이 아닐까요? 하나님의 창조언약에서 예외규정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은 율법 자체가 말해 줍니다. "도적질 말라 분포하는 네가 도적질하느냐?"(2:21) 그렇다면 이스라엘이 다른 민족과 달리 하나님께서 그들에게만 할례를 행하라고 하셨는데 이 점에 있어 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특혜의 대상임을 암시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할례는 거룩을 위한 선택의 의미가 있습니다. 할례 받았다는 것은 유대인이라는 증표입니다. 유대인 만큼은 다른 민족과 달라야 하는데 그 차이점이 단순히 할례의 유무에 국한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할례 즉 선택의 지향하는 바는 율법의 완벽한 준수에 있습니다(2:25). 이방인들의 무할례와는 달리 할례받은 이스라엘 민족만큼은 율법이 요구하는 理想的 인격이 되어 주기를 요구받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것은 이스라엘 만큼은 하나님의 정신을 구현해 줄 민족으로 역사 속에 나타나 보이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 정신인즉 하나님은 참되시다(3:4). 하나님은 의로우시다(3:5) 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여 주는 그것이 바로 유대인이요 할례를 행하되 마음까지 거룩한 신령한 자들입니다(2:28-29). 결국 유대인의 나음이라는 그것은 자동적으로 거룩한 의인이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다만 하나님의 원하시는 바를 보다 분명히 파악했다는데 있는데 그 사실은 곧 하나님은 불의와 죄에 대하여 진노하신다는 것입니다(3:5). 여기에서 바울은 왜 예수님을 하나님이 보내셨는가에 대한 이유를 나타냅니다. 만약 율법으로 인간이 외롭다 인정을 받을 수 있다면 율법 외에 다른 의가 나타날 이유가 없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3:21) 율법 외에 한 의가 나타난 것을 보아서 율법이 주어진 것은 모든 인간, 유대인이건 헬라인이건 상관없이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음을 확증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3:9-19). 율법의 행위로는 외롭다 할 육체가 없는 것입니다. (3:20) 이 이야기를 왜 해야 되는가 하면은 하나님께 선택된 유대인의 입장에서 볼 때 율법이 우선이 아니라 선택이 우선인 것입니다(아브라함 언약 따라). 선택된 자에게만 구원이 주어진다는 것이 아브라함언약의 주제라고 볼 때에 구원받기 위해서 선택된 유대인조차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다고 한다면 그러면 선택 받은 자는 어떤 구원의 모습을 갖추어야 하느냐 하는 문제가 제기되는 것입니다. 모든 믿는 자에게 나타나시는 하나님의 의는 차별이 없다고 한다면 (3:22) 믿는다는 것이 또 하나의 구원의 조건으로 등장해서 차별이 없다는 말과 상치되는 것이 아닐까? 결국 여기서 차별이 없다는 말은 하나님의 선택을 특정 종족으로 제한하지 않았다는 말이지 결코 아브라함 언약이 철폐 되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참 유대인은 즉 선택된 자들은 존재하는 것입니다. 다만 구원을 행위에 둘 경우에 그 사람은 아브라함 언약의 의의를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인간이 행위에 거부감을 나타내는 것은 예수님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행위가 인간의 非行을 골자로 하여 행동에 나섰기 때문입니다. 인간 행위의 결과로 주어진 그 피해가 하나님이 인간을 향한 새로운 의가 될 때 인간들은 자기 행위에 대하여 어떤 정당함을 주장할 수가 있겠습니까(3:25)? 바울은 아브라함 언약을 거론하면서 행함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것을 보여 주는 대표적인 예로 사용합니다(4:4-9). 아브라함이 선택받을 때는 분명 무할례시입니다(4:10). 그가 나중에 할례를 받게 된 것은 바로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고난 후 부터입니다(4:11/창세기 15:5/창세기 17:10). 이로서 일단 할례 유무하고 의롭다 받는 것하고는 관계없음이 드러났습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에게 있어 행함이 아닌 믿음이란 무엇을 뜻하는 것입니까? 축복을 더 이상 연장될 수 없는 죽은 몸을 지닌 자기들 몸에 축복(아기 가짐)이 지속될 줄을 이삭을 통해 확인했다는 그것이 믿음입니다. 이 아브라함은 그 순간 하나님이 자기에 대한 의로움을 부여함의 의미를 안 것입니다(창세기 15:6). 이 의로움은 하나님의 공로이지 자기 공로가 개입되지 않은 것이 이스라엘의 거부로 확실한 것입니다. 오늘날에 있어 이 이삭에 자리에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이 차지하고 있습니다(4:25). 바울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단순히 예수님 자신만을 위한 하나님의 행위가 아님을 밝히는데 그것은 그 사건 이전에 이미 아브라함 언약이 존재하고 있으니 그에 대한 완성으로서의 하나님의 행위인 것입니다(4:16). 어떻게 해서 믿음이 구원에 이르는 능력이 되느냐 하는 것은 (1:16)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화목제물이 된다는 데서 (3:25) 해결을 본 셈입니다. 믿는 자들은 그 사랑의 화목을 즐거워 하게 되는데 (5:11) 이제 남은 것은 영광입니다(5:2-5). 5장에서 부터 7장까지 바울은 믿음을 주님과의 연합이라는 측면에서 그 가치와 귀함과 능력을 재조명하고 있습니다. 율법의 존재가 결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떳떳함을 제공해 주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죄아래 철저히 팔렸나를 공개하는 기능이 있는데 그 거룩한 율법조차 우리는 죄를 짓는 통로로 밖에는 표현될 수 없을 정도로 죄에 매여 있었던 것입니다(5:20/6:17-18/7:8-10,22-24). 그러면 그 연합(세례)을 온전케 하여 마지막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게 하는 (5:2,8:23-25) 성령님이 성도들에 대한 구체적 활동은 실제적으로 어떤 모습으로 이루어집니까? 우선 성령님은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 마음 속에 부어 주십니다(5:5). 그 사랑 안에서 우리들에 대한 "살림"이 달성됩니다(8:10).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로 불러 양자의 자격으로서의 아버지에 대한 사랑을 표현케 하고 (8:15-16) 또한 그 사랑으로 주님과 함께 고난에도 참여케 합니다(8:17). 하나님의 마음을 속속들이 아시는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아들의 형상으로 몰아 넣습니다. 물론 나중에 영광된 형상까지 참여됩니다(8:30). 누가 이런 성령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겠습니까? 이 작업을 위해 자기 아들까지 아끼지 아니하신 분이 하나님 그 당사자이신데 말입니다(8:32,38-39). 이게 바로 언약에 의한 선택의 진수라는 것입니다(9:8-14,20). 주 예수님은 참된 언약 백성을 가리기 위해 세상의 거침돌로서 나타나셔서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주장하려는 자들을 제거하고 구약에서 말한 참된 남은 자를 구체화 시키는 작업 때문에 보내진 분이십니다(9:24,33/10:3).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그들만이 남은 자요 언약의 백성입니다(11:36). 예수님 오시기까지 이 사실을 누가 알았겠습니까(11:34)? 그러므로 이제 새 언약 백성은 구약 때의 죽은 제사로가 아니라 몸으로 드리는 산 제사 즉 영적 제사로서 율법의 정신을 구현해야 하는데 그것이 이웃 사랑입니다(12:1-21/13:8-10). 또 그것이 믿음의 실제적 열매이기도 합니다(14:23). 로마교회는 그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 사도는 성도들의 이름을 거론하면서 증명하고 있습니다(16:1-24). 이상의 모든 이야기는 사실 옛날에는 감추어진 것인데 주 예수님이 오시고 난 이후 만인을 위한 기쁜소식(복음)으로 제공된 것입니다(16:2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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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 전서 예수님 승천 하시고 난 뒤 역사에 남겨진 교회가 현실 속에서 어떤 갈등과 고민거리를 안고 있으며 그것과 교회 본질사이의 상관관계를 알아 볼 수 있는 것이 고린도 전 후서 입니다. "예수 안에서" 비로소 거룩하여지고 성도로 부르심을 입을 수 있다고 한다면 (1:2) 예수 안에서가 교회의 실체를 규명하는 관권을 지니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왜 아담 계통인 "우리 안에서"가 성립이 안되는 것입니까? 왜 은혜가 계속해서 요구되며 왜 하나님의 평강이 지속적으로 공급되어야하는 것입니까? (1:3,7) 그것은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과 소위 거룩한 자들이 "예수 안에서"만 비로소 그것이 가능할 수 있었음 알 때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 세상에 드러나기 때문입니다(고린도 후서 4:4-6). 교회의 존재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세상의 영광이 아닌 세상을 초월한 주의 주되심의 영광으로 덮어버리는 동원되기 위함이 아니겠습니까! 그것은 성도의 것이 아니라 주님이 성도에게 남긴 것으로 추진됩니다. 고린도 교회에게 보낸 편지는 성도를 보고 교회를 잘 세워라든지 어디를 개척하라든지 그 방법은 이러하다든지 조직력을 강화하여 질서 안에서 교회가 자체적 세상에 대항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라든지 하는 그런 얘기가 아니라 예수 안에 있는 단체로서의 교회가 예수 안에서 발견할 수 있는 하늘의 것을 제대로 세상에 보이라는데 있습니다. 이것이 교회다움입니다. 그 교회다움은 오직 하나님의 예수 안에서의 은혜와 평강입니다. 사도가 고린도 교회에 대하여 책망하고 훈계하는데 그 기준은 바로 이 은혜됨과 평강의 훼손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은혜란 비소유를 의미하며 뭔가 이미 우리 쪽으로 확보한 것을 인정치 않고 몰수하고 들어갑니다. 그것이 고매한 품성을 지닌 사도라 할지라도 말입니다(1:12-16/3:4-6,21-22). 바로 이 은혜의 출발이 십자가이며 (1:17-2:2) 그 뒤의 진행되는 모든 성령의 사역도 이 십자가의 은혜가 얼마나 풍성하며 능력이 있으며 구원과 영광까지 좌우하고 있음을 소개하는데 전력을 다합니다(2:3-3:1). 그러면 이 은혜 됨이 무엇과 대조가 되어 교회 내에서 부각이 될까요? 그것은 성도의 육신됨입니다(3:3). 그래서 사도는 십자가의 은혜와 능력에 대한 선언 이후 (1:25) 그것이 왜 위대한가를 고린도 교회의 부정적인 면들을 통해 보여 줍니다. 첫째는 파당의 싸움이었습니다(3:4-6).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은 그 누구도 구원의 기초에 개입될 수 없음을 선언하는 것입니다(3:7,11-15). 성령께서 그 성도를 성전으로 삼아 일하는 것이지 인간이 노력으로 하나님의 일을 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3:16-20).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세계를 건설 하기 위해 일하는 자가 아니라 만물을 제공하신 하나님의 것으로 종사하기 때문입니다(3:21-23). 그래서 맡은 자에게 구할 것은 계속적인 신뢰(faithful)입니다(4:2). 자신의 것에 관심 두는 것이 아니기에 외부에서 볼 때는 만물의 찌끼 같이 보이고 미련하게도 보이겠지만 그러나 판단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4:4,9-13). 사도의 이러한 세상관은 누구나 본받아야 합니다(4:16). 그러나 사도의 이러한 철저한 신앙이 그들 눈에 띄지 않으니깐 마구 방탕의 길로 간 것입니다(5:4-5). 그것을 사도는 교만이라고 합니다(4:1/9). 그 방탕 중의 하나가 음행의 문제입니다. 교회가 이런 자를 용납 하는 것 자체를 사도는 책망하고 있는데 그것은 유월절 양 되시는 그리스도의 정신에 위배됩니다(5:7). 교회가 오히려 세상을 판단해야 될 정도인데 세상한테 판단거리를 만든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씻음을 의식하지 않고 있다는 증거입니다(6:11). 성도의 몸으로 하는 모든 것은 성전으로서 움직이는 것입니다(6:19-20). 이 몸이 내 것이라면 내 마음대로 할 수 있겠지만 값으로 산 팔린 것이 되었기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합니다(6:20/7:23). 인간이 자신의 욕정을 이길 수는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혼인은 하는데 그러나 그 혼인 자체가 성도에게 궁극적인 인생의 가치를 결정 하는 게 아닙니다. 그 이유는 세상 행적은 곧 사라지기 때문입니다(7:29-32). 두번째 문제는 우상의 제물에 관한 문제입니다. 우상제물이 악하다는 것이 아니라 이것 때문에 교회내에 신앙 약한 자들이 볼 때 교회가 마치 하나님의 우상을 겸하여 섬기는 듯한 인상을 받고 낙심해 있다는 것이 문제였습니다(8:12). 그래서 기존 교인들에게 처음 교회에 발을 들여놓는 자들을 생각해서 절제 있는 행동을 취할 것을 당부합니다. 사도 자신 같으면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합니다(8:13). 그러면서 그런 양보가 바로 사도가 가지는 특권을 결코 포기하는 것이 아님은 자신이 아내나 경제적인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권리가 있지만 자비량 하고 결혼하지 않는 상태에서 복음 전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라고 합니다. 이처럼 우리가 자유하지만 그 자유를 가지고 약한자들을 망하게 하는 분별 없는 자유로 사용 되어서는 안된다고 합니다. 오히려 그들마저 참된 자유입니다. 이 모든 절제가 생명으로 향하는 다른 목표가 있기에 생기는 것입니다(9:25). 이 모든 이야기가 신앙인이 넘어 또 넘어서야 될 시험들입니다. 하지만 감당할 시험은 우리에게 주시지 않고 시험을 당할 때면 다시 반석 되시는 그리스도를 생각케 하는 것입니다. 즉 원망할 권리조차 우리에게 없다는 것은 다시 확인시킵니다(10:13). 옛 습관으로 기독교를 이해한 자들에게 우상 제물 먹는 것이 하나의 큰 도전 일 수도 있지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영광이라는데 가치 기준이 있는 것입니다(10:31). 세번째 문제는 교회 내에서 남녀간의 구별 문제와 무절제한 은사로 화평과 조화가 깨어진 것입니다. 사도는 남녀의 문제를 창조 때의 원래 자기 자리에서 볼 것을 요구하면서 해결하고, 은사는 모든 것을 원래 제공하신 분 즉 같은 주님에게서 나왔다는데서, 소유개념 때문에 야기된 분쟁을 해결합니다. 무엇을 받았느냐가 아니라 주신 분이 무슨 목적으로 무엇을 드러내라고 주셨나 하면은 그리스도의 몸이 된 교회에 봉사하고 또 그 봉사는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은사를 위한 것입니다(12장-14장). 이상과 같이 사도가 전달하는 복은 진실된 것일수 밖에 없는 것이 부활이라고 하는 하나님도 인정한 그 분에게 일어난 사건 안에서 제공된 내용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15:8). 단순히 성도가 이 복음 받고 자기가 알아서 부활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부활된 분이 제공한 복음이기에 부활이 오히려 성도의 운명을 이기는 것입니다(15:14,55-58). 이미 영광 중에 계신 분이 준 내용이기에 영광이 우리의 흙에 속한 몸도 영광스럽게 합니다(15:4,9). 복음자체가 이미 부활의 내용을 지녔기에 동시에 죽음의 내용도 지녔는데 그 죽음의 능력은 아담 안에 있는 자 누구든지 적용되고 부활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교회에게 적용이 됩니다(15:22-24). 이와 같은 하나님의 사랑이 교회 안에 충만하여 연보도 하고 돕기도 해야 됩니다(16:1-2,14). 이런 사랑의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주가 가지는 또 다른 면 즉 저주가 임하게 될 것입니다. 교회가 교회됨, 성도가 성도됨은 모두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가능합니다(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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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 후서 고린도 후서는 교회가 세상에서는 환난을 당하고 있지만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영광에 이르게 되는데 이는 위로의 하나님, 자비의 하나님이 주 예수님을 인도하셨던 그 방식대로 주의 환난에 동참되어 있는 교회도 그렇게 인도 하신다는 것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1:3-7). 이 일을 증거하고 알려 주기 위하여 사도가 있으며 또 그 사도의 고생도 그것을 겨냥한 일입니다(1:8,15-19). 하나님이 한번 작정하시고 한 일이 어떻게 중도에 포기될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를 어지간 하거든 용납하는 것이 옳은 것은 그리스도의 용서가 진가를 발휘하기 위함입니다(2:1-17). 교회는 바로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하는 것이 주 목적이지 세상 일로 만족을 갖는 것이 아닙니다(3:5-11). 그 예로 모세 때의 경우를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주의 말씀을 들고 온 모세를 그 얼굴에 나타난 영광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감히 주목하지 못했을 정도여서 모세가 수건으로 자기 얼굴을 가려야만 대화가 된 것을 볼 때에 그 영광은 이제는 그리스도를 통한 영광 때문에 빛을 잃고 사라질 정도라면 주의 영이 갖다 주는 영광은 얼마나 놀라운 것이겠습니까! 더욱 놀라운 사실은 그 찬란한 영광이 이제는 주의 영의 자유함 때문에 그러합니다(3:12-4:6). 따라서 그 영광의 모습이 이제 사도에게 어떻게 나타나는가 하면은 그야말로 세상도 감당 못하는 사역으로 나타납니다.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해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한다." (4:8-9) 사도는 자신이 사역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는 날마다 죽고 그 자리에 예수님의 생명과 능력이 나타나도록 하는데 결국에는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영광보다 하나님의 영광에다 관심을 쏟게 하고 (4:15) 보이는 영광보다 보이지 않는 영광에다 후패한 몸의 소망으로 삼게 합니다(4:16-5:7). 이러한 영광에로의 귀의는 우선 자기로부터의 해방에서 시작됩니다. 그것은 마치 예수님이 자신만을 위하여 죽지 않고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신 것과 맥락을 같이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으로부터 해방을 자신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그 그리스도를 바탕으로 하여 성취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사랑만이 우리의 해방의 유일한 동기이기 때문입니다(5:14-17). 그리스도의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피조물로 탄생 시키는데 이 모든 것은 다 하나님에게 나온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런 결과는 하나님과의 화목이 선행되지 아니하면 있을 수 없다고 사도는 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죄를 용납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화목의 의지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면은 그들의 죄를 저희들에게 돌리지 않고 (5:19) 다른데로 이동시키는 한이 있더라도 기어이 그들과는 화평하겠다는 결심이 담겨 있어야합니다(5:21). 이것을 가지고 사도는 義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5:21). 즉 화목 당한 우리가 하나님의 義로운 사역의 결실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화목의 의지가 사도의 생활과 일생 가운데 드러나는데 세상이 보는 안목과 실제와 상당한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곧 죽은 것 같으면서도 살아나는 능력의 義의 병기가 사용되기 때문입니다(6:7). 따라서 화목의 결과로 나타난 義와 세상의 비화목된 상태에서의 불의가 어찌 조화를 이룰 수 있을까? 하나님이 우리를 자신의 집으로 삼았으니 빼앗길 수가 있겠습니까? 사도가 위로할 수 있는 내용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다시금 하나님의 은혜에 관심을 쏟는 것입니다. 이러한 목표에 이를 때까지 있었던 근심은 오히려 자신을 구원하는 복된 근심인 것입니다(7:10). 이제 하나님의 은혜를 알았으면 그것이 실제의 생활에서 번져 나와야 할 것입니다. 헌금이나 연보나 모든 것이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에 기반을 두고 나타나야 합니다(8:7/9:8).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자신의 사도됨을 통해서도 외모에 집착해 있는 교회에게 (10:7) 외견상 보잘것없는 것으로 진리의 파수꾼을 평가하지 말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사단의 일군들도 자기를 의의 일군으로 가장하기 때문입니다(11:15). 예를 들면 몸이 약하다든지 (10:10) 말하는 것이 신통치 않다든지 (11:6) 대가 없이 진리를 전하는 이것이 (11:7) 사실은 오히려 진리는 외모와 상관없다는 증거와 교회로 하여금 바른 안목을 갖는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도 자신이 받은 고생과 그리고 신비 이런 것이 자기의 사도됨을 증명하는데 사용하지 않더라도 말입니다. 오히려 약한 그것이 나에게 능력입니다(12:10). 이 약함은 곧 그리스도가 그리스도 되심을 보여 주는데도 나타납니다(13:4-5). 그리스도가 약함으로 십자가에 달렸으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그 분을 어떻게 했느냐 하는데 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그런 자세와 믿음이 여기에 있지 아니하면 우리도 하나님께 버리운 자입니다(13:5). 믿음의 세계에서의 온전이란 곧 우리가 약할 때입니다(13:9/12:9). 사도는 고린도 교회에 하나님이 자신을 파견하신 것은 교회에 대한 위로가 어떤 차원에서 이루어지며 그 과정 하나 하나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오로지 은혜와 진리의 본질을 알려 주자는 데 있었음을 발견합니다. 이는 이 역사 속에서의 교회는 주님이 역사 속을 가셨던 그 길을 가는 여정에서 비로소 참된 위로의 하나님을 만날 수 있고 그것이 곧 영광이 가지는 역사속에서의 진면목임을 알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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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편지가 시작되는 문구로 봐서 갈라디아서는 두 이론의 대립을 통해 복음의 진수를 소개하는 형식이 되어 있습니다. 한가지는 사람으로부터 나온 것이고 다른 한가지는 죽은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입니다(1:1). 뿐만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은 어떤 기준이 이미 성립되어 있는데 그것은 사도된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과 내용이 일치되어야 하는 것입니다(1:8). 여기에 자연 일반 사람들의 반발이 있게 됩니다. 거기에 대하여 사도는 말하기를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하랴"라는 어조로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이 결코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님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도의 주장은 자기가 알고 있는 것도 역시 자기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합니다(1:12). 그 이야기는 또 다른 사도들에게 배운 것도 아니라고 합니다. 다만 자기가 다른 사도들을 찾아간 것은 자기가 받은 계시가 결코 다른 사도들에게 배운것이 아님을 밝히고 오히려 베드로의 잘못된 생각을 면책까지 한 것을 보아서 알 수 있는 일이 아니냐라는 것입니다. 사도가 이미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나를 또 사도로 삼으신 것은 베드로의 같은 경우에는 할례인에게 복음을 전하기 의해서라면 나 바울은 이방인들에게 사도가 되기 위해서랍니다. (2:8) 그러면 이 둘 사이의 복음의 내용이 다르냐 하는 문제가 생기겠지만 대상에 따라 내용이 달라 질 수는 없고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입니다(2:16). 그렇다면 만일 예수 믿고 난 뒤에 죄가 또 다시 나타난다면 예수 믿는 것이 소용 없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예수 안에 있다는 말은 죄를 정죄하는 율법에 대하여 이미 죽은 자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의 한 다른 면입니다. 죄로 인해 이미 사형 선고 되어 집행이 된 자신을 어디서 고백하느냐 하면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 죽음으로 주장하고 있습니다(2:20). 이제 내가 살고자 하는 탈출구는 이미 경험한 율법의 세계가 아니라 앞으로 개방된 하나님을 향하여 가는 수밖에 없습니다(2:19). 이것이 또한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신 은혜에 대한 믿음의 다른 면입니다(2:20). 죄라는 것은 율법과 관계 없으면 나타나지도 존재하지도 않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율법으로부터의 죽음으로 이해함으로 인간에게 정죄를 가할 근거를 제거하게 되니 의와 죄의 기준이 그만 달라졌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죽음을 무색케 하는 시도가 곧 사단의 시도로 보입니다(3:1). 성령님은 항상 십자가를 새 창조의 근거로 내세우기 때문에 십자가 의식을 무력케 하는 율법에 따른 육체의 시도는 성령의 거스리게 됩니다. 십자가에 동참하려는 의식이 믿음으로서 이는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그 복의 진단형식과 동일합니다(3:9). 만일 율법을 그대로 고수한다면 이는 항상 저주 아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율법으로 의롭게 되지 못하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3:10). 또 한가지 만약 율법으로 의롭다함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면 이방인들은 의롭다함을 얻을 기회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행한 약속대로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복이 이방인들에게 미치게 하기 위해 그 율법으로 인해 주어질 저주를 예수님 자신이 받아 자기를 믿는 자는 다시는 율법의 저주가 해당되지 않게 하였습니다(3:13-14). 그러면 율법의 저주 대신 믿는 자에게 주어진 것은 무엇입니까? 사도는 아브라함의 약속에서 자손의 자리에 예수 그리스도를 성취로 채우듯이 땅의 약속 자리에 성령을 놓습니다. 성령이 곧 유일한 그 자손이 가져다 줄 복이었습니다. 이로서 사도는 의의 문제에서 성령의 세계로 성도를 인도합니다. 율법으로는 이 아브라함의 언약을 달성할 수 없었던 것은 그 약속이 은혜로 주어진 것이기에 아브라함 자손에게도 같은 원리 즉 은혜가 작용되어야 하는 것입니다(3:18). 성령께서 성도들을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함으로서 동시에 그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었습니다(3:27-29). 이 사실은 예수님이 아브라함의 약속된 바를 전부 지녔다면 그 약속된 기업에 자손들이 참여 되기 위해서 하나님은 그들에게 아들의 영을 보내어 함께 아들되게 하셨습니다(4:6). 이러므로 그들은 이제 아들의 형상을 본받아 살아야 될 운명이 되었습니다(4:19). 위에 진행된 사실은 마치 아브라함에게 있어 약속으로 난 자녀 이삭과 하갈의 몸에서 난 지식 이스마엘의 관계와 같습니다. 율법이란 인간의 육체의 연약함을 지적하고 정죄하기 위해서 존재한 것입니다. 하갈의 자식이 약속의 자녀가 되지못함을 들추어내기 위해 율법이 주어진 것입니다(4:24). 어쨌던 성령으로 난 사람은 율법과 상관없이 약속을 따라 났기 때문에 저주와 정죄로 부터 풀려났습니다(5:1). 그 자유는 예수님 안에서 발견되고 체험되는 하나님의 사랑에 근원을 두고 있습니다. (5:14) 성령의 인도를 받게 됨으로 성령의 열매가 맺히는데 이는 육체의 소욕을 거부한 투쟁의 결과라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5:17,24). 그래서 성도의 자랑거리는 이제 하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십자가입니다(6:14). 그 십자가는 바로 성도가 세상에게 나타내는 유일한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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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사도는 예수님이 주시는 복을 구약의 복에 대비하여 신령한 복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1:3). 따라서 자연히 에베소서를 대하는 자들은 이 신령한 복에 관심을 쏟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복이 구약에서 이야기한 복과의 차이점을 염두에 두면서 말입니다. 우선 그 복은 하늘에 속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하늘에 속했다는 것은 창세기 3:22의 생명나무를 연상시키기에 충분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누구에게 주느냐 하면은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된 자에게만 준다고 되어있습니다(1:4). 그럴만한 이유가 특별히 있는 것도 분명합니다. 왜 모든 자의 것이 될 수 없는 것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들은 오직 선택한 자만이라는 언약에 규제를 받기 때문입니다(1:5). 그러면 왜 예수 안에서의 선택이냐 하는 것은 예수님만이 하신 일이 선택의 유일한 근거를 이루어 예수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무조건의 혜택을 누릴 수 있게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풍성한 은혜입니다(1:7). 예수님이 이루어 놓으시고 얻으신 그 신령한 복 즉 죄 용서의 복은 모든 구약의 복이 정향하고 지향한 바로 그 자체였습니다(1:7). 땅에 있는 것이나 하늘에 있는 것이나 예수 안에서 뭉쳐지고 통합되어 있어 상속자인 우리들에게는 그저 그 영광을 찬미할 따름입니다(1:12,14,3,6). 모든 만물이 죽은 자나 산 자나 온 우주와 하늘의 존재들이 그리스도 안으로 몰려드는 그 위엄과 능력에 대하여 이제 성도는 알아야 하고 느껴야 하고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1:17-22). 교회는 그 분의 활동과 사역의 중심지라는 의미에서 몸인 것입니다(1:23). 이제 그 사역이 구체적으로 역사 안에서 어떻게 이루어져 갑니까? 우선 교회로부터 시작됩니다. 교회라는 것이 어떻게 이루어집니까? 허물과 죄로 죽었던 자로서만 교회가 이루어집니다(2:1). 꼭 그렇게 해야 될 이유는 예수 안에서 라는 사실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 그 자체이기도 그 본질을 확산시키는 몸의 구실을 톡톡히 할 수가 있습니다(2:7). 여기서 예수 안이란 말은 예수님에게 발생된 은혜의 사건 전부를 말합니다. 함께 살리고 (2:5) 함께 하늘에 앉히는 (2:6) 그리스도의 신비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신비한 감정으로 처리되는 것이 아니라 역사의 모습으로 등장된 땅에 속하지 않는 사건들을 말합니다. 그 사건이 이제는 교회안에서 교회의 모습으로 지속됩니다. 여기서 교회의 모습이란 은혜가 가지는 능력이 얼마나 위대한가를 보여 주는데 있습니다. 그 은혜의 능력으로 언약밖에 있던 자들까지 하나님의 동일한 식구가 되는 기적이 일어납니다(2:11-22). 이것은 율법에 의한 기준을 철폐하고 예수님이 하신 일을 새로운 기준으로 하여 새 사람됨의 자격을 부여한 결과입니다(2:15). 그리고 하나님이 친히 거주하실 곳도 여기가 됩니다(2:22). 성령은 그곳을 이루는 일을 하십니다. 사도의 이러한 성전 개념은 에스겔에서 성신의 역할이 성전 재건에 있음을 염두에 두고서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 언약의 완성을 역사 안에서 실현됨을 나타냅니다(에스겔 37:25-28/48:35). 이 성전이 되어 가는 구체적인 형태는 성령이 계속적인 사역으로 오고 오는 여러 세대에 그리스도의 지체가 될 자에게 예수님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하는데 있습니다. 이 일에 관여한 자가 바로 사도입니다(3:6-8). 사도 자신이 환난 받고 고난받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도가 다만 기도하고 고대하는 것은 부디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사랑의 깊이와 넓이와 높이의 풍성함을 더욱 알게 되기를 원하는 것뿐입니다(3:14-19). 바로 그 사랑이 교회를 교회 되게 하는 본질입니다(4:2). 교회란 우리가 모두 하나에서 나왔다는 것을 인식할 때 그 목적을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나입니다. 교회가 이미 세상에 대하여 승리했음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우리들에게 예수님의 은사가 주어졌다는데 있습니다. 이 은사는 이미 승리한 자만이 제공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4:8-11). 이 은사는 이미 주어진 구원의 능력을 지체들에게 제공하여 그 승리의 모습으로 예수님의 몸으로서의 자기이기 때문에 썩어져 가는 옛 습관을 포기하고 구별된 자로서의 자세를 지녀야 합니다. (4:22-23) 그것은 오직 사랑으로 행하는 삶입니다. (4:32-5:2) 사랑은 우선 무엇을 포기하는 것부터 시작됩니다. 버릴 것은 탐욕과 어리석음과 희롱, 방탕과 음행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적극적으로 해야 될 것은 범사에 감사하고 찬양하는 것인데 예를 들면 가정생활에 있어 아내는 남편을 대할 때 예수님을 의식하며 대하고 남편도 마찬가지 부모도 자식에게 마찬가지 자식도 마찬가지 또 종과 고용자 사이에도 동일합니다. 이 모든 것이 구별됨을 증표입니다. 결국 우리의 투쟁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그리스도에 대항하는 세력들인데 우리는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나타내는 하나님의 갑옷을 착용해야 합니다. 그리고 늘 정신을 차려 자신의 동역자인 사도와 다른 성도들을 위해 간구해야 합니다(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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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서 빌립보서에서 드러나는 사실은 사도가 어떤 지역에 있는 교회들에게 편지할 때는 뭔가 기대하는 바가 있다는 것입니다(1:11). 그 기대는 사도가 생각하고 있는 기준에 기초하게 됩니다.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와 감독과 집사들은 이런 사도의 기분을 이해하고 편지를 대해야 합니다(1:1). 사도의 기도와 간구의 주된 목표가 무엇인지를 말입니다. 그것은 교회가 복음을 알고 (2:5-11) 그 내용으로 말미암아 교회가 변모해 가고 일정한 목표를 향해 오늘도 달려가고 있다는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3:11-14). 그런 의미에서 서신 중간 중간에 나오는 사도 자신의 이야기는 결코 무의미한 것이 아닙니다. 사도의 옥에 갇힘과 사도의 자신의 인생목표 설정과 사도가 당한 오해같은 것은 사도 개인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만약 개인만의 문제라면 사도는 그 어느 누구에게도 편지할 자격을 상실합니다. 사도 주변에서 일어나고 주어진 상황은 그 가운데서 사도가 어떻게 처신하며 그 처신한 것이 복음의 의미와 얼마나 일치점을 갖고 있나를 보여 줄 수 있기에 헛된 것이 아닙니다. 사도가 환경에 구애를 받고 자유를 상실한 듯한 인상을 주지만 그러나 복음이 주는 기쁨이란 바로 그 가운데서 비로소 발생되도록 되어 있는 것이 복음이 갖는 본질입니다(1:18/2:17,29/3:1/4:4). 복음의 주체는 어떤 환경에 처해 있든지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는데 있습니다(2:5). 모든 일체의 비결도 여기에 있습니다(4:13). 따라서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교회가 이루어야 될 일은 바로 이것 뿐입니다. 그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착한 일입니다(1:6,10). 이미 그 점을 익히 알고 있는 사도의 입장에서 자기가 살든지 죽든지 그저 내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기를 원하는 마음 그것 뿐입니다(2:20). 사실 빨리 죽어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소원이지만 아직 지상에서 고난받는 것은 자신의 모습에서 그리스도의 복음과 모습이 어떤 고난을 수행하고 있느냐를 보여 줄 대목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3:17). 즉 그리스도를 믿는 다는 것은 그분으로 인하여 고난도 수용한다는 결단까지 포함되는 것입니다(1:29).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내에 분쟁이 있다는 것은 복음의 진수를 모르는데서 비롯된 것으로 곧 예수님의 낮아지심에 대한 몰이해 때문입니다(2:3). 예수님이 주 이시다 는 것이 사도가 전한 복음의 핵심이지만 그러나 그 이전에 그 분의 역사 안에서 행하신 낮아지심이 없었던들 결코 주 자리에 이르지 못했을 것입니다(2:6-11). 바로 이 방식을 따라 교회는 구원의 진로를 삼아야하는 것입니다(2:12). 이 일로 인해 사도 바울도 디모데도 에바브로디도도 함께 고생 한다고 합니다(2:22,25). 그러면 그 고난은 어디서 온 것입니까? 왜 사도와 그 일행들이 부지런히 교회에 대하여 걱정을 하며 끊임없는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거짓 복음 때문입니다. 거짓 복음이란 한마디로 말해서 비그리스도적인 사고 방식이 담겨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첫째 율법주의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할례가 구원의 필수적 요소라고 내세우는 무리를 조심하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것을 복음보다 더 자랑하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사도 자신은 모든것을 배설물로 여겼다고 합니다(3:8). 복음의 진수는 자신에게 관심 쏟는 것이 아니라 어찌하든지 나는 죽고 그리스도에게 발생된 그 사건 속에 참여 하려고 하는데서 나타납니다. 그 사건이란 십자가 순교와 부활입니다(3:10-11). 또 어떤 자들은 땅의 것만 생각하는 자들도 있었습니다(3:19). 그러나 우리는 이미 호적이 하늘에 있지 땅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3:20). 그러므로 이제 이 복음의 능력을 알고 있는 이상 항상 기뻐하고 어떤 경우를 당해도 정결하게 성도의 지조를 지켜줄 것을 당부하고 또 자족하기를 요구합니다(4:4-13). 끝으로 사도는 자기에게 베풀어준 교회의 사랑에 감사하면서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립니다(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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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로새서 이미 복음이 들어간 (1:5) 골로새 교회로부터 기쁜소식이 사도에게 들려왔습니다. 그것은 은혜에 합당한 열매를 지니고 있다는 내용입니다(1:6). 이제 사도가 교회에게 당부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아는데 있어 필요한 지혜와 총명이 계속 공급하여 지금보다 더욱 더 하나님께 감사하도록 하는데 있습니다(1:9-11). 그 뜻은 어떤 사건에 기반을 두고 있는가 하면은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를 흑암에서 건져내신 분이 가지는 역사 속에서의 위치는 神性으로 말할 것 같으면 하나님의 형상이요 즉 하나님 그 자체요 창조에 관해서는 모든 것이 그 분을 통해서 또 그 분을 위하여 창조 되었으므로 그 분으로 정향된 속성이 있으며 피조된 세상 속에서의 그 분은 전 우주보다 먼저 나셔서 우주를 선도해 나가시는 분이시고 구원에 관해서는 죽은 자들 가운데 최초로 살아나시어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분입니다(1:15-17). 이와 같이 그 분의 개념 정립은 골로새 교회가 고통받고 있는 이단의 공략에서 어떤 확실한 해결점을 던져 줄려고 한 시도입니다. 사도는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이 보다 정확히 정리되기를 교회에게 원했던 것입니다. 그 분이 이 역사 속에 오셔서 하신 그 일로 인해 교회는 그 분을 우두머리로 여길 뿐 아니라 만물에 있어서도 그 분이 구심점이 되는데 그것은 하나님이 그 분 안에서 만물과 화해를 선언하셨기 때문에 만물이 그 분 안에서 비로소 제 위치를 정립할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모든 것이 그 분 안에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정상으로 돌아섭니다.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 지니는 풍성한 지혜를 이제 교회는 전파할 책임을 갖고 있습니다(1:24-29). 그리스도가 주가 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이제 성도에게는 다른 학문조차 판단할 능력을 소지케합니다(2:6-8). 어떤 것이든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에 비추어서 해명되어야 하고 그 분의 주 되심이 포함되지 않는 학문에 정신이 팔릴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할례 같은 것도 이미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그리스도로 인해 할례를 받은 것이 됩니다(2:11). 비거룩한 존재로 살던 우리를 거룩한 분으로 말미암아 함께 죽고 다시 살게 되므로 거룩한 참된 할례인이 되는 것입니다(2:12-13). 이것 뿐 아니라 그 밖의 먹고 마시는 문제나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이나 천사숭배하는 의식이나 환상이나 계시나 그런것들로 인하여 마음이 흔들릴 수도 없는 것이 우리가 믿는 것은 이미 승리의 증거인 십자가와 그리고 거기에서 다시 사신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붙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더 이상 그런 것들이 우리를 죄인으로 몰 수 있는 근거가 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십자가는 그것들을 철폐하기 위한 십자가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2:16-19). 십자가의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스스로 거룩해 질려고 하고 자기를 학대하고 스스로 겸손하려고 하는 종교적 행위에 자기가 속박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2:23). 그렇다고 하면 이미 십자가를 제대로 알고 있는 성도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지상에서 십자가에 이미 주님과 함께 죽으심을 나타내는 삶을 살아야하는 것입니다. 또한 현재 내가 살고 있는 실존이 주님과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은 후의 실존이기 때문에 이 두 가지 면을 보여주는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땅의 그것을 생각하지 않고 위에 것을 염두에 두는 생활입니다(3:2). 인간은 누구나 생명에 관심이 있습니다. 성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의 생명이 있는 바로 거기에 관심을 두고 살아야합니다. 그것이 하나님 안입니다(3:3). 하나님을 생각할 때에 그것이 외형으로 나타날 때는 탐심과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정욕을 부정하는 모습입니다. 그 사람이 헬라인이냐 유대인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새 사람이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3:10) 새 사람은 항상 그리스도의 말씀에 풍성해야 하며 피차 가르치고 권면하면서 서로가 교제해야 합니다(3:16). 무엇을 하든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동해야 하는데 그것이 가정에서나 사회에서나 마찬가지로 적용이 됩니다(3:18-20).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아내됨과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남편됨은 그리스도인의 주체성을 서로의 관계에 확인되어야 합니다. 복종의 주체와 사랑의 주체는 예수님이 가지는 의의를 행동으로 보여주는 요소입니다. 종과 주인의 사이에도 마찬가지입니다(4:1). 하늘이 가지는 image를 서로의 관계에서 고백의 형식으로 등장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 빗대어 대인관계를 진행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사도는 전도할 문을 열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4:3). 왜냐하면 그것이 사도의 의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자기와 관계한 성도들을 열거하면서 그들도 열심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애쓰고 있음을 알립니다(4:11). 성도끼리의 안부는 바로 동일한 목적 아래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성경중심사상: 바울서신서(2)
데살로니가 전서 사도 편에서 데살로니가 교회를 보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이유는 자기들이 남긴 복음으로 인해 하나님의 능력이 그들에게 나타났기 때문입니다(1:5). 또 이와 같은 결실은 데살로니가 교회뿐 아니라 복음이 전달된 전지역에 대하여 신앙에 모범이 될만한 것이었습니다(1:8). 여기서 사도는 잠시 과거를 회상합니다. 사도는 데살로니가에서 천막 짜는 일을 하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2:9/사도행전 18:3). 여러번 빌립보 교인들의 도움을 받았습니다(빌립보서 4:16). 사실 사도가 데살로니가에 오게 된 것도 빌립보에서 박해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추방되어 이리로 오게 된 것입니다(2:2/사도행전 16:11-40). 어쨌든 사도가 데살로니가에서 복음을 전했는데 복음의 내용은 예수님에게 일어난 사건이었습니다.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 나셔서 그 아들이 다시 하늘로부터 강림한다는 것입니다(1:9). 사도는 이 내용에 대하여 사람들과 타협하거나 아부할 생각은 없습니다(2:5). 주님이 다시 오실 때 모두들 그 분의 나라와 영광에 합당한 생활이 되기를 염두에 두면서 열심히 그들을 사랑했습니다(2:12).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바로 주님의 능력이 그들 속에 살아 役事하신 것입니다(2:13). 뿐만 아니라 사도가 유대인들에게 고난받는 것 같은 고난을 그들도 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2:14). 여기서 왜 주님이 다시 오셔야 하는 가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주의 택한 백성들을 (1:4) 핍박하는 무리에게 진노를 내리시기 위해서입니다(2:16). 사도에게 주어진 유대인의 박해의 내력은 이러합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를 떠나온 후에 베뢰아, 아테네, 고린도에서 전도했습니다. 사도행전에 의하면 데살로니가 유대인들이 베뢰아까지 따라와서 바울을 박해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홀로 아덴으로 갔습니다(사도행전 17:14/18:5). 거기서 그는 동료인 디모데를 만났습니다(3:1-2). 바울이 직접 데살로니가로 가려했으나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사단이 여러번 막았다고 했습니다(2:18). 그래서 디모데를 그 곳에 보내었습니다. 디모데가 그 후 고린도로 간 바울에게 데살로니가 교회에 관한 기쁜 소식을 전하자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게 첫번째 편지를 보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불의로 추방된 바울은 자기와 같은 유대인들에게 박해받은 새 교우들의 신상을 염려했고 그 박해 운동을 일으키는 유대인들에게 몹시 분노했습니다(2:15-16). 복음을 전할 때 사도는 하나님의 일꾼이 됩니다(3:2). 예수님을 부활시키신 하나님의 능력은 지금도 사도의 선포기능 속에서 작용하고 있습니다. 사도는 자기들의 수고가 헛될까 하여 디모데를 보내었는데 (3:5) 알게 된 것은 믿음의 役事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을 행한 인내였습니다(1:3). 하나님은 사도 자신들의 입을 사용해 옛날 선민 이스라엘을 출애굽시킨 그 사랑과 같은 사랑으로 (1:4) 그들을 변화시키고 있음을 새삼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복음의 위력이었습니다. 성령께서 그 모든 일을 하신 것입니다(1:6/3:8/5:19). 복음이란 아직 한가지 사건을 남기고 있습니다. 그것은 주께서 다시 오시는 것입니다. 바로 그때를 위하여 성도는 계속 정진해야 하는데 거룩한 생활, 구별된 자세를 갖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음란을 버리고 자기 아내만 사랑하고 단정하게 행하고 자기가 손수 일해서 벌어 생활하여 궁핍함이 없게 하고 소망이 없는 자들 같이 장래에 대한 비관적 태도를 버리는 것입니다(2 : 19 / 3 : 13 / 4 : 3, 11 / 5 : 6 - 9, 22 - 23). 구원이란 바로 그때에 가서 다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신앙인의 생활은 이와 같이 주의 강림의 입장에서 봐야 분명해지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그 목표점을 향해 성도로 하여금 고난 속에서 그 날을 바라보면서 활동적인 신앙, 헌신적인 사랑,지칠 줄 모르는 희망을 갖도록 그들의 마음을 움직이기를 기대합니다. 따라서 성령을 소멸치 말기 위하여 항상 기뻐하며 쉬지말고 기뻐하며 범사에 감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 안에서 하나님의 뜻입니다(5:16-22). 이와 같이 바울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신비가 얼마나 깊은 현실성과 효력을 지니고 있는지를 그의 전도여행에서 다시 한 번 확인하는 셈이 됩니다. 재림을 대비 하면서 사는 생활이 성도의 생활을 규정하는 것입니다. 언제 오시더라도 기쁘게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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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살로니가 후서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내는 사도의 두 번째 편지는 좀더 강경한 어조로 예수님의 강림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환난이 예상보다 세차게 밀려들었기 때문입니다(1:4-8). 그리고 강림하게 된 동기보다 분명하게 교회에 대하여 공격하는 세력에 대한 가차없는 징벌이 있음을 알립니다(1:9). 이와 같은 일로 인해 주님은 더욱더 성도들에게 영광을 얻게 될 것입니다(1:10). 따라서 격한 시련 속에서도 성도는 그 영광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선을 행사해야 하는데 (1:11) 여기서 보다 복음이 이 악한 시대에서 지닌 가치성이 돋보이는 것입니다. 혼탁한 말세의 분위기와 시련 속에서도 복음의 능력은 위력을 발휘하는 것입니다(1:11). 그래서 사도는 그 마지막 때의 풍조를 자세히 성도들에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복음의 위력도 부각될 것입니다.1.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주님이 되시고 아버지와 함께 계십니다. 그 분은 오셔서 악인들을 멸하시고 (1:9/2:10-12) 믿는 자들을 구원하여 당신의 영광에 참여케 하십니다(2:14).2. 그런데 그리스도의 재림의 임박성을 성급히 해석한 나머지 일부 선지자들은 주님의 날이 이미 왔다고 잘못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러한 해석을 사도의 가르침으로 뒷받침 하려고 했습니다(2:1-2). 그리고 그들은 현세의 모든 일에 관심이 없고 무질서한 생활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일하지 않고 구걸하며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쳤습니다(3:6,10-12). 그래서 사도는 그들에게 인간의 본연의 의무를 환기시킵니다. 그리고 그는 상식에 벗어난 열광주의들의 주장을 반박하고 말세의 징조와 전조를 설명합니다. 그의 의도는 그들로 하여금 말세가 이미 도래했다는 착각을 버리고 현실 생활에 충실히 해 나가게 하는데 있습니다. 사도가 밝히는 그 전조적 사건과 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사탄은 이미 이 세상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 활동으로 성도는 박해를 당합니다. 이 세상에서 믿는 사람들과 악한 사람들이 서로 대립하게 되고 죄악은 점점 강력해져 거짓과 불의가 널리 만연하게 됩니다. 특히 위험한 것은 거짓을 참으로 불의를 정의로 오인케하는 속임 수로 말미암아 빚어지는 인간 사상계의 혼란입니다(2:9-12).★ 다음으로 배교하는 사태가 발생하고 '불법의 사람' 혹은 '무법자'라는 인물이 등장할 것입니다(2:3-12). 배교의 개념은 묵시 문학 뿐 아니라 (다니엘 11:32) 복음서에도 나타납니다(누가복음 18:8/마태복음 24:10-12). 바울은 배교를 무법자의 활동과 동일시 한것 같습니다. 그 무법자의 유혹에 빠져 진리와 선을 멀리하는 사람들은 하나님 보시기에는 배교자들입니다. 적그리스도란 말은 요한 서한에 나오는 표현입니다(요한 일서 2:18,22/4:3/요한 이서 7). 모든 악의 화신인 이 자는 놀라운 이적을 보이고 '진리와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는' (2:10) 사람들을 속이고 오만으로 가득차 하나님으로 자처하며 성전에 자리잡을 것입니다. 적그리스도가 아직 나타나지 못한 이유는 누가 혹은 무엇이 그를 붙잡고 있기 때문입니다(2:6-7). 적 그리스도가 나타난 다음에야 주님이 발현하셔서 그들을 멸하실 것입니다(2:8). 주님의 날이 이미 왔기 때문에 아무런 걱정 없이 살 수 있다는 그릇된 생각은 사도의 가르침을 외면하는 것입니다(2:3). 그들의 안일한 생각과는 달리 말세는 혼란과 환난과 투쟁의 시대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재림하실 그리스도가 승리하시기 전에 그것도 직전에는 싸움이 한창 더 격렬해 질 것입니다. 이 환난을 이기려면 사랑과 믿음과 인내가 있어야 합니다. 즐기면서 보낼 처지가 되지못합니다(3:2,5/2:16/1:3). 이런 사도의 당부에도 불구하고 변화가 없다면 그 사람들 하고는 관계를 끊어야 타당합니다(3:6,14). 그러나 원수 같이 여기지는 말라고 합니다(3:15). 이런 걱정과 염려 속에서도 사도가 확신하는 것이 하나 있다면 주님이 사랑하시는 형제들은 하나님의 선택과 성령의 거룩하심으로 분명히 건짐을 받게 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2:13). 마음을 편안히 가지십시오! (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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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 전서 목회에 대한 성경상의 관심은 사도가 직접 관여하지 않는 상태에서도 과연 교회가 주님이 오실 때까지 이 지상에서 그리스도의 이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나는 것이 가능할 수 있느냐에 대한 해결책으로 주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초대 교회에 있어 사도의 영향력은 절대적인 것입니다. 디모데나 디도가 장로나 또는 감독의 입장이 아니라 바울이 없는 동안 바울을 대신하여 그리스도의 공동체에 파견되어 관여하고 있음에 대해 사도가 마치 자기가 직접 관여하고 있다는 것과 같은 차원에서 교회를 돌볼 수 있고 진리를 고수할 수 있도록 목회에 관한 이야기를 적어 보낸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을 사도 제 2 세대라 호칭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어쨌든 목회자란 바른 진리 즉 사도 바울이 전한 그 진리만을 고수하기 위해 파수꾼 역할을 하는 사람이 요구된 사람입니다(사도행전 20:28/갈라디아서 1:8/디모데 전서 1:1,18/3:15/4:5/디모데 후서 3:14-17). 목회서신에서 사도가 가장 관심을 가지고 부탁하는 것이 바로 바른 진리에 대한 사수입니다. 이미 주가 되신 그리스도와 사도 후 시대를 살게 될 교인들 간에 연결점을 만들어주어야 되는 것입니다. 거짓 가르침의 교회 침투는 확실히 예상되는 바이기 때문입니다(사도행전 20:29-30). 사도의 입장에서 자기의 친 아들 같은 (1:2) 디모데에게 진리 이외에 무엇을 더 당부하겠습니까? 이단들은 같은 성경(율법)을 두고도 부질없는 족보에만 관심이 있습니다(1:4). 율법의 의미는 본래 그런 것이 아니라 죄의 확산에 대한 경계와 경고용으로 잘만 사용하면 교회가 교회답게 되는데 큰 효과가 있는 것입니다(1:9). 도대체 진리라는 것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사실 사도 바울 자신은 옛날 주님을 만나기 전에는 몰랐던 것입니다. 전에는 도리어 훼방자요 핍박자요 폭행자였지만 (1:13) 그러나 그러한 죄인을 구원하시러 오신 주님의 그 은혜를 생각할 때 사도 자신이 죄인 중에서도 괴수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1:15). 그러한 주님께 보다 더 큰 영광을 위하여 디모데는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1:18). 여기서 말하는 선한 싸움이란 결코 세상 정권과는 상관없는 것이고 (2:1-2) 주님의 주되심은 어쨌든 그들 (권력자) 까지 사용하시면서 유지되고 있다는 이 진리 선포에 관한 것입니다(2:4,7). 그러므로 교회는 남자들은 기도하기를 힘쓰고 여성들은 이러한 남성들의 고상한 도와주는 자로서 역할을 다 해야하는데 이것이 창조의 원리이고 이 창조의 원리에 따라 자녀 생산 같은 정상적인 도움이 곧 여자로서의 구원에 참여하는 것이 됩니다(2:15). 말씀을 전파할 책임이 있는 당사자나 교회나 모두가 신경써서 행한 기준은 세상 사람들이 봐서도 욕 들어먹을 자 때문에 진리가 훼손되지 않는 것입니다. 일꾼을 뽑는 일에 특히 그러합니다(3:1-14). 왜냐하면 교회는 진리의 터 위에 세워지기 때문이며 교회의 주인은 우리가 아니고 따로 하늘에 계시기 때문입니다(3:15-16). 그러나 성령에 의한 계시에 의하면 교회가 늘 진리의 상태로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후일에 비진리에 의해 변질될 수도 있다고 합니다. 예를 들면 세상에 있는 자연체계를 그 자체로서 악한 것이라고 여기고 거룩을 자체적으로 생산하기 위해 다른 지식과 정신 세계로 도피를 시도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생각은 결국 현실의 자기 생활에 대한 모든 책임을 회피하는 처사로 번지게 됩니다. 주님의 가르침은 이 세상 자체로부터의 도피가 아니라 자기 죄로부터 건짐 받아 義을 향한 구원입니다. 그래서 자기 훈련이 요구되는 것입니다(4:8). 이 가르침과 모범으로 인해 진리에 대한 권위가 손상되지 않게 하라고 사도는 당부합니다(4:12).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에 모습을 갖춘다는 것이 조직을 의하는 것이 아니라 교인과 교인의 관계에서 그리스도의 정신이 살아나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사도는 디모데에게 마치 가정에서 가족 대하듯이 그들을 상대하라고 합니다. 목회자가 이러한 정신은 교회 구성원 개개인에게도 전수되어져 어떤 열매로 나타나야 하는데 나이가 60세가 넘고 홀로 있는 여자는 교회가 무턱대고 도와 줄 것이 아니라 직계친족에게 봉양의 기회를 부여하는 식으로 신자들의 일상 생활로 까지 이어져야 합니다. 특히 진리의 파수에 책임을 진 장로들에게는 존경하되 (주로 그들은 교회로부터 보수를 받고 있었습니다.) 돈 때문에 경멸해서는 아니됩니다(5:18). 사도는 디모데의 건강에도 관심을 보이면서 그 건강이 죄악을 저질은 자 때문에 생긴거라면 마지막 심판주 되시는 주님에게 맡기고 자신을 돌보라고 염려합니다(5:20-25). 교회가 기타 여러가지 말썽이 있을 수 있는 것은 밖에서의 자신의 위치와 교회 내에서 형제라는 관계 사이에 불균형의 소지가 있다든지 아직 말씀이 의미하는 주님의 본 뜻에 미숙한 자들이 있음을 감안하고 나온 생각입니다. 그럴 때는 모두들 함께 여기기를 본래의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가 하나님 앞에 세워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이란 태어날 때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기 때문에 아무것도 가지고 갈 권리가 없음을 발견케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연적으로 입는 것과 먹는 것으로 만족하게 될 것입니다(6:1-8). 만약 이 본질에서 더 부요하러 한다든지 돈을 추구하는 것은 결국 악이 파 놓은 함정 가까이 접근하는 셈이 됩니다(6:9-10). 사람이 추구해야 할 것은 富가 아니고 영생입니다(6:12). 바로 이 일을 위해 예수님께서 세상 앞에 증거했고 또 다시 이 일을 기준으로 한 심판을 위해 오실 것입니다(6:13-15). 그래서 가진 자들은 쓸데없는데 욕심 내지 말고 나누어주기를 힘써야 합니다. 그의 바른 인생의 목적이 그를 영생으로 데려 갈 것입니다(6:17-19). 이 내용 이외의 진리는 디모데도 거절해야 합니다(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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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 후서 디모데 전서와 달리 후서에서는 디모데에게 보다더 친밀감을 퍼붓습니다. 이는 사도가 지금까지 달려온 생을 마무리해야 될 단계에 들어섰기 때문입니다(디모데 후서 4:6-8). 어떤 헤어짐을 염두에 두고 마지막 정성을 쏟아 자기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1:4 여기서 눈물이란 디모데와 마지막 헤어질 그 때, 그 모습을 연상시킵니다.). 그래서 먼저번 편지에서 참아들로 표현한 것이 여기에서는 사랑의 아들로 묘사하고 있습니다(1:2). 마치 최후의 유언장같이 한 문장 한 단어에 모든 것을 쏟아 부어 쓰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편지는 사도의 개인의 신상과 느낌과 자기와 관계된 자에 대한 것이 주류를 이룹니다. 이러한 사실로 인해 사도 자신의 일생이 곧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계시의 한 방편으로 제공됨을 강하게 의식합니다. 자신의 모습을 훌륭한 귀감으로 부각시켰다고 하겠습니다. 이 자신의 모습 그대로를 디모데에게 전수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한 인간의 일생과 그 후에 태어난 또 다른 한 인간의 일생이 어디서 하나로 만날 수 있을까요? 그것은 변함없는 믿음인 것입니다. 디모데도 이미 그런 환경에 놓여 온 사람입니다. 외조모로부터 어머니로 이어지는 믿음의 전통이 (1:3-5) 사도와 만나는 계기가 된 것이라고 봅니다. 이제 사도를 만나고 부터 본격적으로 사도의 뒤를 이어 주 예수 그리스도가 전해준 복음의 세계를 펼칠 수 있는 것입니다(1:9-14). 이 복음 전파는 바로 사도 자신이 당한 고난에 함께 동참함으로 가능한데 여기에 대한 비유를 사도는 세 가지를 듭니다. 하나는 군사의 비유이고 하나는 운동 선수에 대한 것이고 하나는 농부에 대한 비유입니다(2:3-6). 이 세가지 다 디모데가 본 받아야될 사도의 일생에서 비롯된 진리입니다(2:9-13). 사도의 이러한 고난은 전부 진리사수와 연관된 고난이었습니다. 이것 때문에 당하는 고난이라면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2:15/1:8). 진리에 도전하는 이단은 바로 모두 불의를 향한 욕심에서 비롯된 것으로서 디모데는 마치 큰 집의 그릇 같이 욕심 없는 젊은 이들과 함께 그들을 단호하게 대적할 필요가 있다고 합니다(2:18-26). 마지막 때의 특징은 모든 쾌락과 충동이 절제되지 않는 상태에서 터져 나오는 모습으로 변할 것이고 그로 인해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자가 오히려 핍박만 받게 될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 성경만이 의를 위해 도움이 될 것입니다(3:1-17). 그러나 사람들은 성경의 바른 교훈보다 자기에게 좋은 말만 하는 자를 찾게 될 것인데 그렇다고 할지라도 디모데는 그런데 굴하지 말고 꿋꿋하게 바른 가르침으로 훈계하고 권면해야 합니다. (4:1-5) 바로 사도 자신이 살아온 길이기도 합니다. 사도는 마지막까지 진리를 위하여 최후의 제물이 될 것도 각오하고 있습니다(4:6-8,18). 사도 자신과 관계한 여러 이방인들 가운데는 좋은 사람도 있었고 해를 주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러나 그 어느 순간이라도 나는 진리의 전달자라는 사실을 있지 않았습니다(4:9-17). 나를 그렇게 온전케 하신 주님께서 이 편지를 받고 읽고 있을 너에게도 함께 하기를 기원하며 그의 편지를 마무리합니다(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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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도서 그레데 섬에 파견되어 있는 사도의 제자 디도에게 보내는 편지입니다. 그 지역의 상태를 도덕적인 면에 있어 부정적으로 보고 있습니다(1:12,15). 따라서 그 교회에 세울 장로는 자연적으로 저들과 다른 면을 지니고 있는 인물이어야 하는 것입니다(1:5,6-9/2:11-10). 소위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이 생활에서 안 믿는 자와 어떤 차이점을 지녔는지 분명히 밝혀 줄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1:15-16). 그리스도인의 선이라든지 윤리가 결코 자기의 행함에서 나온 것은 아닙니다(3:5). 만약 그것이 우리의 행함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면 어디서 그런 거룩한 행실이 나왔겠느냐로 복음을 소개할 기회로 삼는 것입니다. 오직 그의 긍휼하심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함으로 이루어진 결과입니다(2:14/3:5). 따라서 유대인의 따분한 족보 이야기와 비교가 안되는 것입니다(1:10/3:9-11). 오직 선을 향한 소망을 가지고 나아가면서 행해지는 선행이야말로 복음의 도착점인 그 영광에 이르게 됩니다(2:12-13/3:7). 이러한 열매만이 교회가 가지는 전도의 가치를 높일 것입니다(3:1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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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레몬서 빌레몬서는 오네시모라는 노예를 가운데 두고 사도가 기대하는 믿음과 사랑이 어떠한 모습을 구체화 되는지를 보여 주는 서신입니다(5). 믿음이란 교회라는 성도의 모임에서 사랑의 형태로 등장되어야 합니다. 믿음의 대상이 주 예수가 될 때 주 예수 안에 있는 다른 성도들에 대한 개방성도 동시에 포함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교제를 통해 실제화 시킬 때 비로소 善이 생산되는 것입니다(6). 그리고 그 善이 예수님께 도달되도록 하는데도 교제가 더욱 요구됩니다. 주 예수님께 믿음의 뿌리를 내리는 순간 우리는 이기주의의 사멸을 선언한 셈이 되고 이는 사랑의 나눔을 가능케 합니다. 문제의 초점은 자기의 행동에 관심이 모아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주 안에 있다는 것이 무엇으로 확인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사도가 독단으로 처리할 수 있는 일을 교회 앞에 제기하는 것은 (14) 선한 일을 가지고 내가 주안에 있다는 그 가치를 교회 내에 심어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사도는 먼저 자기 쪽에서 성의를 보입니다(18). 즉 주님께서 궁극적으로 교회에게 기대하는 바가 바로 성도와 성도간의 사랑인 것입니다(9). 그것이 또한 사도의 기쁨입니다(16). 주안에서의 선이란 일정한 rule로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은혜성과 화목성이 담겨져 있을 때 가능합니다(3). 결국 성도가 누릴 기쁨이란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가 드러나는 한가지 경우에 국한됩니다(20,25). 교회가 해야할 일은 성도의 교제를 통해 주 예수 그리스도께 자신들이 받은 은혜와 사랑을 얼마나 실제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를 나타내는데 주력해야 되지 어떤 사업의 성취나 실적만으로 평가되어질 수는 없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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