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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신학 20세기 21세기

by 【고동엽】 2022. 1. 12.
현대신학 20세기 21세기


생애 20세기를 대표하는 단 한명의 신학자를 꼽으라고 하면 대다수의 신학자들은 칼바르트를 꼽을 것이다. 칼 바르트는 20세기 신학의 아버지 였고 19세기의 신학을 20세기의 신학으로 물줄기를 바꾼 신학자였으며 수많은 신학적 주제에 대해 놀랄 만한 새로운 신학정신을 만든 신학자였다. 바르트의 신학을 공부하지 않은 사람은 20세기 신학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할 것이고 21세기의 신학이 어떤모습을 띠게 될지도 모를것이다. 왜냐하면 20세기 신학은 바르트의 신학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태풍과 같은 큰 영향을 미쳤고, 21세기의 신학은 20세기의 바르트의 신학이 형성한 토양 위에 새롭게 자랄 신학이기 때문이다.
바르트는 "로마서 강해" 제1판을 출간시키면서 그의 명성 드러냄. "하나님은 하나님이시다"라는 바르트 신학을 나타내는 전형적인신학정신은 로마서 강해 제1판에서 부터 본격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하는데, 이 말의 뜻은 인간과 하나님을 혼돈하고 인간의 활동을하나님의 활동과 일치시키려고 했던 자유주의 신학정신에 대한 거부를 나타내는 것이었다. 인간이 만든것은 죄악된 인간의 세계일 뿐이고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께서 스스로 건설하신다는 것이었다. 바르트는 인간의 진보를 하나님 나라의 진보와 일치시키고자 했던당시의 자유주의 신학의 낙관적 진보주의 정신을 거부했다. 어디에 진정한 진보가 있단 말인가? 과학의 발전은 대량 살상무리를 만들었고인간의 평등한 공동체를 지향했던 사회주의 정신은 세계를 제패하고자 하는 독일의 전쟁 이데올로기가 되고 말지 않았는가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께서 스스로 건설하시는 곳에 세워지는 것이지 죄인인 인간이 만들수 있는 나라가 아니다. 인간은 죽음과 죄악의 세력에 같혀 있는 자신의 실존을 똑똑히 보아야 한다. 인간은 스스로 죄와 죽음의 세력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낟. 죄와 죽음의 세력이 인간을 지배하는 한 모든 낙관적 진보주의는 허구일 뿐이다. 인간은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만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일을 감당할 수 있다.
이것이 로마서 강해 제1판에서 바르트가 말하고자 했던 메시지였다. 이 메세지가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과 깊은 영향을 미쳤다.


20세기 후반에 유행했던 신학들을 중심
젊은 신학자들이 그 동안 무시되었던 19세기의 자유주의 신학을 새로운 방식과 표현으로 재현하고자 하는 시도들이 줄을 잇기 시작했고, 이에 1차 세계대전 이후 1960년대에 이르기까지 신학계를 지배하며 칼빈과 루터의 정통신학을 새롭게 재현해 왔던 신정통주의 신학방법에 대한 날카로운 비평과 반항이 이어졌으며, 또한 이 반항에 대한 반격이 신학적 흐름의 혼란과 무정부상태를 초래하였다. 이러한 신학적 토의의 혼란과 무정부 상태는 신 죽음(death of God)의 신학이라는 현상 속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드러났다. 토마스 알타이저와 같은 무신론 신학자들은 기독교의 하나님을 부정하기 위해 히틀러에 의한 유대인들의 대학살과 히로시마의 원자폭탄 투하사건을 그 증거로 삼았다. 이들은 하나님은 인간의 자유와 현실적인 악의 문제에 대해 아무런 해결책도 제공하지 못한다고 주장하면서 전통적인 기독교의 하나님의 죽음을 알리었다.
이러한 사신신학의 등장과 더불어 바르트, 니버, 틸리히와 같은 신학의 거장들의 죽음은 세계 신학계의 혼란을 가중시켰다. 1960년대 신학적 혼란시기에 유행한 반전통적이며 도전적인 신학들을 소위 ‘급진신학’이라고 부른다. 급진신학자들은 신정통주의의 배타적 초월주의에 대한 반작용으로서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이 주창했던 하나님의 내재성, 즉 낙관적 인간론과 진보적 세계관을 현대적으로 다시 재현하려는 시도였다. 점차 20세기 후반 신학은 세속화되고 급진적인 성향을 띠게 되었다.
그리고 본회퍼는 세속화신학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본회퍼는 그의 명저 『옥중서신』을 통해 이 세상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의 현존을 강조하였는데, 이 책이 20세기 후반의 전반적인 신학적 흐름을 바꾸어 놓을 정도로 신학계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그는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성육신 사건을 통해 기독교 신앙의 세상성을 강조하였다. 특히 그의 ‘무종교적 시대’와 ‘무종교적 기독교’와 같은 혁명적인 개념은 1960년대 급진적이며 무신론적인 신학자들의 신학적 토대와 방향을 제시해 주었다. 본회퍼로 시작된 세속화신학은 로빈슨 『신에게 솔직히』(1963)와 하비 콕스의 『세속도시』(1965)를 통해 대중적인 호응을 얻게 되었고 신 죽음의 신학을 통해 과격화되었다. 이러한 20세기 후반의 신학적 혼란기 중에 서독 튀빙겐에서 조직신학을 가르치던 39세의 젊은 교수 위르겐 몰트만이 『희망의 신학』이라는 책을 출간했다. 그의 희망의 신학은 그 시대에 절실히 필요한 새로운 신학적 모델을 제공하는 것 같았다.


몰트만과 판넨베르크를 대표로 하는 희망의 신학은 종말론에 대한 신학적 재발견으로 현재를 강조하는 실존주의 신학과는 달리, 미래를 강조하는 것이 그 특징이다. 희망의 신학은 시간적으로 저편에서부터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하나님을 주장하면서 하나님은 미래의 시점에서 우리의 현재에 참여하신다는 것이다. 이들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현대적 문제에 대해 하나님의 초월성을 재확립하려 했던 것이다. 기독교적 희망은 바로 ‘오시는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행위로서만 그 약속이 성취될 수 있다. 이러한 면에서 교회의 사명은 개인적 회심보다는 오히려 사회 구조의 변혁에 있다. 신학의 과제는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고 세계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이루어지도록 변화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교회론과 세계관을 바탕으로 한 정치신학은 남미 해방신학의 태동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으며 그 사상적 토대가 되었다.
1960년대의 급진주의자들은 무신론과의 신학적인 논쟁에서 벗어나 이제는 신학이 나서서 사회에서 억압받고 눌린 사람들을 해방시키는 투쟁에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만약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면 하나님은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을 위한 투쟁에 반드시 참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해방신학은 억압으로부터 해방이라는 공통된 주제를 실현시키기 위한 새로운 급진주의 신학들의 총괄적인 묶음이다. 흑인신학, 남미의 해방신학, 여성신학이 바로 그것이다. 흑인신학은 1960년대와 1970년대의 흑인교회를 위해 새로운 자아의식과 정체성을 심어주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것은 기독교 복음을 미국의 흑인사회의 상황에 적용시켜보려는 의도적인 노력이었다.


과정신학은 미국에서 일어난 독특한 신학적 흐름이다. 과정신학은 화이트헤드(1861-1947)의 형이상학적 체계를 통하여 기독교 신앙과 현대과학 사상을 융합한 과학적 철학사상이다. 이는 진화, 상대성, 유기체, 창조성 등과 같은 자연과학적 개념들을 신학에 도입하여 기독교 신앙을 현대적 상황에 맞게 재해석한 것이다. 과정신학은 신의 본성과 신과 세계의 관계를 신학의 중심에 놓은 것이나 신의 내재성을 강조한 것은 화이트헤드의 영향이다. 화이트헤드는 철학자로서 아인쉬타인의 상대성 이론에 기초한 현대 물리학에 철학적 토대를 마련하여 현대과학을 철학에 도입한 과학 철학자로 철학사의 새로운 장을 열었던 것이다. 과정신학은 1930년 이후 시카고 대학교의 신학부를 중심으로 일어났고, 하버드 대학교에서 화이트헤드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받은 수제자 하트숀에 의해 그의 과정사상은 완벽하게 발전되었다. 이러한 과정신학은 20세기 후반에 미국에서 가장 매력 있는 신학방법론으로 성장하여 현재 존 캅과 데이비드 그리핀과 같은 과정신학자들에 의해 계속적으로 발전하고 있다. 과정신학은 전통적인 기독교 신론과 기독론에 문제를 제기하면서 전통신학을 부정하며 공격하였다. 즉 하나님의 절대성과 완전성, 영원성과 불변성을 부정하면서 오히려 변화하는 하나님의 개념을 주장했다. 과정신학의 하나님은 정적이지 않고 동적인 존재로서 우주의 역동적인 과정에 우리와 더불어 참여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이다. 하나님과 세계는 상호 의존관계에 있으며 하나님은 세계의 지배자가 아니라 협력자요 동반자가 된다.


21세기에 이르러서 가장 공감대를 형성하는 신학적 흐름은 바로 생태학적 신학이다. 환경문제는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최대의 난제이며 인류 최대의 관심사이다. 인간들의 유일한 삶의 공간인 지구의 자연환경이 점차 훼손되어 인간 생존을 위해 절대적인 요소인 공기, 물, 땅이 오염되어 가고 있기 때문이다. 생태학적 입장에서 창조론을 처음으로 발전시킨 신학자는 몰트만이다. 그는 『창조 안에 계신 하나님』(1985)에서 생태학적 위기에 처한 현대의 정황에 대한 기독교 신학의 응답으로 생태학적 창조신학을 제시했다. 이 신학은 생태학적 관점에서 창조신앙을 해석하려는 시도로서, 자연을 인간의 지배와 이용의 대상으로 간주하는 전통신학의 인간중심적인 세계관이 생태계의 위기를 초래했다고 비판한다.
생태학적 신학은 전통적인 창조신학에 대한 반성과 비판이 그 신학적인 출발점이 된다. 생태학적 신학의 가장 큰 공헌은 그 동안 무관심했던 창조론을 신학의 중심주제로 새롭게 부각시켰고 또한 인간과 자연의 관계성을 새롭게 조명했다는 점이다


우리는 20세기의 현대문화로부터 21세기의 포스트모던 문화로 옮겨가는 시대에 살고 있다.
20세기는 현대 자유주의 신학의 해체와 퇴조의 시기였다. 현재 부상하고 있는 포스트모던 정신(후기 현대정신)은 어쩌면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 지상 유토피아의 건설이 가능하다 본 20세기 현대정신의 해체로 인해 발생된 새로운 인생관과 세계관일 것이다. 우리 자신의 능력으로 지상 유토피아 건설이 불가능하다는 깨달음은 이 세상과 인간에 대한 절망감이나 불안감보다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새로운 세계를 직접 만들어 주실 것이라는 소망으로 이끌 것이다.


현대신학의 최근 동향
인간악, 세속성, 상호의존성, 희망과 해방의 실천 등 인간 사회의 현실적인 문제들을 외면하는 신학이 아니라, 그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고 치료하는 신학이어야 한다는 자각은 비단 현대 신학만의 독특한 특징은 아니다. 복음서를 비롯한 성서 전체의 일관된 내용은 바로 이러한 인간의 개인적, 사회적, 문화적인 문제들을 해결하는데 있어서 하나님의 인간되심과 구체적인 참여를 증언하고 있으며, 바로 이점에서 현대신학은 과거의 신학의 변증적 과제를 계승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현대신학의 비판적 과제는 신학의 고유한 학문성 자체의 존립을 위태롭게 할 정도로 역사 비판학, 합리주의, 과학주의, 세속주의 등의 비판적 방법론을 맹목적으로 수용하는 경향성을 보여 왔다. 즉 학문으로서의 신학의 자율성에 대한 심각한 도전에 현대신학은 직면하고 있다.
교부시대 이후 중세를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신학자들은 희랍의 철학적인 방법론을 차용하여 신론, 인간론, 그리스도론 등 신학적인 주제들을 해석하여 왔다. 따라서 타학문의 방법론을 차용하여 신학의 주제들을 설명하는 작업은 현대에 나타난 독특한 현상만은 아니다. 어거스틴과 안셀름을 거쳐 아퀴나스에 이르는 중세의 가톨릭 교회 뿐만 아니라루터, 칼빈을 거쳐 현대에 이르는 프로테스탄트 교회도 "신앙은 이해를 추구한다"는 전제를 받아들이고 있으며, 신앙이 반이성적이거나 반윤리적인 것으로 이해되어서는 안된다는 입장을 공유하고 있다.
이러한 타학문의 방법론과 주제의 차용이 문제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을 환원주의(reductionism)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종교현상이나 신앙의 본질을 경제학, 정치학, 언어학, 사회학과 같은 다른 학문의 척도를 가지고 파악하려는 것은 결국 종교현상과 신앙만이갖는 독특하고 환원 불가능한 요소-성이라는요소-를 놓쳐버리게 될 것이라고 알리아데(M. Eliade)는 경고하고 있다. 종교학자로서 종교현상의 환원 불가능성을 주장하고 있는 엘리아데의 통찰력은 신학의 환원주의에 대한 경고로서 전환될 수 있다.
성서,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교회의 선포를통해서 전달되는 신의 계시를 규범으로 하여신과 자연, 그리고 인간의 역사와 운명에 대한 궁극적 의미를 해석하는 신학의 학문적 자율성을 확보하는 일이야 말로 이러찬 환원주의를 피하기 위해서 요청된다. 그러나 계시의 형태가 현대인에게 주로 성서라는 언어적 형태로 전승되어 왔기 때문에 성서라는 신학의 규범올 해석하는 해석학적인 과제가 현대신학의 최근의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즉 종교 언어의 의미성의 문제와 그 언어의 해석의 과제는 신학의 학문적 고유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필수 불가결한 반성의 대상이 되고 있다. "언어적 형태로서의 계시를 신학적 논의의 중심적 과제로 삼는 이유는 언어는 단지 표현으로서의 수단에 머물지 않고 경험의 새로운 의미를 창조해 가기 때문이다. 가다머(Han-Georg Gadamer)는 해석학적 이해의 목표는 고전과 독자의 떨어져 있던 두세계를 융합시켜 주는 것이며, 결국 독자로 하여금 고전의 세계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리죄르(Paul Ricoeur)는 한걸음 더 나아가 언어 가운데 은유(metaphor)는 유사한 두개의 세계를 결합시켜 주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전혀 다른 두개의 세계를 새로운 의미의 세계로 결합시켜준다. 유대인 남자인 예수와 사마리아 여인의 은유에 의해 새로운 의미의 세계로 통합된 것을 성서에서 볼 수 있다. 이에서 보듯이 은유는 어의적 충격(semantic shock)를 불러 일으킨다. 리꾀르는 상징과 시적-신화적 이야기 형태에 대한 연구를 통해 인간의 종교적인 체험을 가정 적절하게 전달할 수 있는 언어적 형태는 은유와 더불어 상징적 표현, 시적-신화적 언어 형태라고 보았다. 이에 대한 좀더 깊은 논술은 구조주의와 탈현대주의자들의 논구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레비스토로스의 구조주의적 인류학에서 종교적 언어의 환원 불가능성과 구조적 자율성을 깊게 파헤치고 있다.
현대신학이 이성과 역사적 비판학을 통해서 신학의 고유한 방법론적 영역을 확보하지 못하고 신학의 위기까지 초래했던 상황은 종교적 언어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해석학적 진보로 말미암아 급변하게 되었다. 현대신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의 역설이 아닐수 없다. 타학문에 의해 자신의 고유한 영역의 확보를 보장받게 되었다는 것은 역설이 아닐수 없다. 그러나 이것은 신학에 이러한 고유한 학문성을 타학문이 부여한 것이 아니라 본래의 자율성을 인정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Ⅱ. 현대신학의 범위와 학맥


현대를 어느 기점에서 시작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학자들마다 차이가 있다. 트레이시는 현대신학의 5가지 모델들 가운데 하나인 정통주의의 대표적인 예로서 1869년에 열렸던 제1차 바티칸회의를 기점으로 삼는다. 또한 틸리히(Paul Tillich)는 16, 17세기의 개신교 정통주의를 출발점으로 잡고 19, 20세기의 신학을 설명한다." 반면에 바르트 이후의 신학적 전개에 초점을 맞추어 현대신학을 논의하는 경향도 있으며, 1960, 70년대를 중심으로 미국의 현대신학을 논의하는 신학자도 있다."
그러나 현대신학에서 정통주의의 영향력은 쇠퇴하지 않았다. 따라서 현대신학의 범위에 16, 17세기의 정통주의와 연관시켜 20세기에 전개된 다양한 정통주의를 포함시켜야 한다. 정통주의의 특성을 틸리히는 두가지로 들고있다. 하나는 내용적인 원리로서 은총으로 말미암은 믿음을 통한 칭의이며, 다른 하나는 형식 원리로서 성서의 권위에 근거한 신학적 원리이다." 정통주의는 하나님의 초월성, 역사의 심판자로서의 거룩청, 창조주로서의 주권을 강조하며, 신자들로 하여금 기도와 찬양, 헌신의 뜨거움을 갖도록 하는데 있어서 공헌을 하였다. 개인의 영적 구원을 위한 전도를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정통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제기된 죄의 사회성에 대한 침묵이 묵시적 동의로 오해되는 측면과, 급변하는 현실과 역사에 대하여 무관한 신앙관을 가르친다는 비판을 현대의 정통주의는 심각하게 고려하고 있다.
이른바 신보수주의자로 불리는 브로밀레이(G.W. Bromiley), 버쿠어(G.C. Be.kouwer), 빌리 그래함(Billy Graham), 칼 헨리(CarlHenry), 그리고 카넬(F.J, Camell) 등은 현대세계가 던지는 질문들을 외면하는 대신 복음의 메시지를 그 질문들과 연결시키되 복음의 영원성을 포기하지 않는 신학적 노력을 계속해왔다.
한편 이들과 다른 복음주의 자들은 국제적선교대회에서 복음주의자들의 사회적 책임을강조하였다. 1974년 스위스 로잔에서 열린 '세계 복음화 국제대회'에서 발표된 '로잔언약(the Lausanne Covenant)'과 1989년 같은 목적으로 필리핀 마닐라에서 열린 '제2차 로잔 세계복음화 국제대회'에서 발표된 '마닐라 선언문', 그리고 1977년 시카고 근처에서 복음주의의 소명을 논의하기 위해 모였던 45명의 복음주의자들의 모임에 발표된 '시카고 성명'은 복음주의자들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고 있다.
경건주의, 계몽주의, 낭만주의를 종합한 슬라이에르마허(Friedrich Schleiermacher) 이후의 자유주의는 변증적인 과제와 비판적인 과제를 현대신학에 도입하였다. 변증적인 과제는 변화하는 인간 사회와 문화가 제기하는 중요한 문제들에 대하여 신학적으로 답변하는 과제를 뜻하며, 비판적 과제는 성서, 교리, 신앙고백과 같은 교회의 전통적인 권위를 무조건 수용하는 대신 역사 비판적인 방법과 이성의 합리성에 맞추어 재해석하려는 태도를 말한다. 변증적인 과제와 비판적인 과제는 19세기 자유주의가 쇠퇴한 이후에도 현대신학의 가장 영향력 있는 시대정신을 이루고 있다.
슬라이에르마허는 종교적 직관 즉 절대의존감정이 신에 대해 인식할 수 있는 근거라고 보았다. 절대의존감정 안에서 신은 유한 속에 현존한다. 그 뒤를 이어 리출(A. Ritchl)과 하르낙(A. von Hatrack) 등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기독교와 문화, 하나님과 인간의 연속성을 강조하였다. 이들은 기독교적 구원을 역사와 사회 안에서 윤리적 진보와 밀접하게 연결시키려고 하였다. 그리스도와 문화의 연속성, 윤리적 진보에 대한 낙관주의, 그리고 역사비판적 성서연구 등이 19세기 자유주의의 특성이 되고 있다.
20세기에 들어와 19세기의 자유주의를 극복하고 성서에 대한 새로운 연구를 통하여 기독교 사신(使信)의 본래적 의미를 탐구하여 인간의 역사와 인간 존재의 참된 의미를 밝히려는신학 작업인 신정통주의 운동이 일어났다. 바르트(Karl Barth), 브룬너(Emil Burnner), 불트만(Rudolf Bultmann), 고가르텐(F. Gogarten), 틸리히, 니이버 형제 (Reinhold Niebuhr & H.R. Niebuhr) 등이 그들 사이의 많은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신정통주의 학맥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바르트(Karl Barth)는 자유주의의 교육을 받았으며 자유주의 추종자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자펜 빌의 목회현장의 경험과 1차 세계대전을 전후해서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전쟁을 옹호하는 것에 대해 실망하여 인간 이성과 도덕심에 의존하는 자유주의의 한계를 느꼈다. 그는 바울의 로마서 연구를 통하여 인간의 자만심의 위기와 하나님의 심판, 그리고 이 위기속에서 하나님의 말씀만이 인간 삶의 근원이된다는 것을 선언했다. 바르트의 성서연구에 힘입어 성서의 본래적 사신을 탐구하는 운동이 불트만(Rudolf Bultmann)에 이르러 더욱 촉진되었다. 그런 그 방향은 바르트와 달랐으며, 불트만의 경우 성서의 표현양식과 전승양식 등에 관심을 가지면서 탈신화화라는 방법을 통하여 현대인이 이해할 수 없는 신화적인 형식을 벗겨내고 성서 본래의 사신인 케리그마를 인간의 본래적인 자아 발견의 준거로 보았다. 성서의 케리그마는 하이데거의 실존주의적 언어와 세계관으로 번역되거나 재 해석될수 있다고 불트만은 믿었다.


20세기에 들어와 가속화된 산업화와 개발 경쟁에 힘입어 세속적인 가치관이 확산되고, 경제적인 수준의 간격이 나라에 따라 계층에 따라 심화되어 갔다. 그 결과 급진적인 신학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는데, 그 대표적인 실례로서 세속신학과 해방신학의 확산을 들 수 있다.세속신학은 성과 속의 이원론을 극복하고 이세상에서 종교인으로서의 냄새를 풍기지 않으면서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책임적인 존재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역설한 본훼퍼(D. Bonhoeffer)로부터 시작되었다. 사람들은 종교성과 경건성을 핑계삼아 이 세상에서 타인을 위한 존재로서 우리를 부르시는 그리스도의 부름에 순종치 않고 있다고 본좨퍼는 말한다.
본훼퍼의 '종교성 없는 기독교' 또는 '하나님 없이 하나님 앞에'라는 표어는 많은 오해를 받았다. 본훼퍼가 종교성 또는 하나님이라는 핑계거리를 만들어 하나님의 진정한 부름에 순종하지 않는 것을 경계했다면, 반 뷰렌(P. M. van Buren) 등 신 죽음의 신학자들은 '하나님 없이'도 인간 스스로의 운명을 만들어간다고 믿고 있는 현대인들의 세속성을 급진적으로 해석하여 초월적인 절대자로서 하나님 없는 자유로운 존재로 살아가는 것이 기독교적인 삶이라고 강조했다. 이제 기독교는 자유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되었다.


해방신학은 남미의 가난한 민중들의 억압당하는 현실을 바로잡기 위한 가톨릭 교회의 목회적 관심으로부터 태동했다. 대표적 해방신학자인 구티에레즈(G. Gutierrez)는 정치적, 역사적, 영적인 삼중 해방을 강조한다. 정치적 해방이란 부유한 국가들과 억압하는 계급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한 피압박민들 사회집단의 갈망과 노력을 의미한다. 역사적 해방은 정치적 해방의 과제인 "새로운 인간과 전적으로 다른사회의 실현"을 인간생활의 모든차원으로 확신시켜가는 것을 말한다. 마지막으로 더 깊은 차원에서 볼 때 해방은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불의와 억압의 토대를 근절하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필요로 한다. 해방신학은 이러한 해방을 가능하게 해주는 참된실천(ortho-praxis)으로 나타나야 한다고 해방신학자들은 주장한다.


현대신학의 마지막 학맥으로서 인간경험의 긍정적인 요소를 신정통주의보다 더 적극적으로 수용하며 동시에 급진 신학운동들보다는 성서와 기독교의 전통의 긍정적인 요소를 더욱 강조하는 수정주의 신학운동을 들 수 있다. 수정주의란 넓은 의미에서 성서와 전통에 나타난 최선의 가치관이 현대의 세속적 가치관보다 현대의 인간 경험의 해석을 위해서 더욱 유용할 수 있다는 신념에 근거해 있다. 수정주의 신학운동의 관심은 광범위하며, 다원주의적 세계관의 입장에 서서 타종교와의 대화를 추구하며, 기술적 이성의 제한을 넘어서는 탈현대주의의 입장에 서서 인간의 근원적인 초월 가능성과 종교적 상상력과 상징적의 긍정적 요소를 적극 수용한다. 과정신학, 탈현대주의신학, 종교다원주의신학, 종교언어의 상징성과 고유성을 강조하는 신해석학적 신학 등이 여기에 속한다.
과정신학은불변의 실체로서의 세계를 부인하고 모든 만물이 상호교섭의 영향을 주고 받으며 역동적으로 성장해가는 세계를 강조한다. 신도 홀로 존재하는 그런 분이 아니다. 오히려 모든 만물들의 자아실현 과정에 동참하는 신이며, 새로운 가능성으로 초대된 신이다. 그러나 과정신학의 신은 모든 만물의 자아실현 과정에서 강제적인 힘을 행사하는 분이 아니라 자유롭게 자아를 실현해가도록 설득하는 신이다. 인간의 자유와 그로 말미암은 악의 결과는 인간이 져야한다. 그러나 신은 이러한 인간의 악의 고통을 수용하여 새로운 희망과 대안으로 바꾸어 제시한다. 역할 분담이 이상적이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서 이 세상에서의 악에 대한 궁극적 승리를 믿는 기독교적 신앙이 약화되고 있다.


종교적 다원주의 시대에 살고 있는 현대인은 기독교의 배타적 구원관에 대하여 적대적이다. 그렇다고 현대의 기독교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외에 또 다른 구원의 길을 인정하는 것은 상대주의의 함정에 빠지는 일이 된다고 정통주의는 믿고 있다. 자신의 신앙의 궁극성을 포기하고 진리의 상대성을 인정해야만 참 다운 대화가 가능하다는 논리는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자신의 신앙의 궁극성을 고백하면서 타종교의 신앙고백과의 창조적 대화가 가능한 것인지를 진지하게 묻고 싶은 것이 보다 정직한 신학적 태도가 아닐까. 타종교에 대한 궁극적 관심의 표현 없이 참된 대화가 불가능하다는 견해에 비추어 보면 타종교와의 대화의 문제는 쉽게 결론 지을 수 없으리라 생각된다. 다만 현대사회에서 타종교와 공존하는 종교적 관용주의의 입장을 취하고 있는데, 이 경우 궁극적 관심을 공유하지 못하는 파편화된 사회의 문제가 있으며, 강제적으로 파편화된 사회를 통합시키려는 종교전쟁의 경우를 세계 곳곳에서 보게된다. 전도는 미련한 것이지만 폭력적인 통합에 대한 설득적 대안이며, 결과적으로 회심이라는 사건을 통해서 참된 대화가 가능하게 되는 유일한 길이라고 믿을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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