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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의 주된 신학 주제들

by 【고동엽】 2022. 1. 11.

창세기의 주된 신학 주제들

 

창세기는 시작의 책이다. 하지만 단순히 시작만을 보여주지 않는다. 창세기는 성경 전반에 걸쳐 나오는 모든 교리의 개념을 담고 있다. 특별히 천지 창조로부터 노아 홍수 사건까지는 하나님의 창조로부터 백 보좌 심판 때까지를 보여주는 축소판과 같다. 이 축소판은 창세기 초반의 몇 장 범위만 차지하고 있지만 그 적은 범위 안에서 기독교의 주요한 신학적인 제반 주제들을 다루고 있다. 본 에세이에서는 그 많은 주제들 가운데서 세 가지 주제를 선정하여 각각의 주제들에 대한 기본 개념을 설명하고 아울러 창세기에 등장하는 몇몇의 주요한 인물들에 대해서도 주요한 신학적 이슈들과 관련하여 설명할 것이다. A. 주요한 신학적인 주제들 a. 인간 하나님은 사람을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대로 창조하셨다. 이는 그 지으신 만물을 하나님과 함께 다스리게 하려는 목적에서였다(창1:26~28)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사람이 하나님과 하나 되게 하시길 원하셨다. 하나님은 사람을 지으실 때에 먼저 남자를 지으셨고 사람이 독처하는 것을 좋지 않게 여기셔서 그를 위해 돕는 배필을 만들어주셨다. 그것은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에 이르도록 도우라는 이유에서였다. 하나님은 돕는 배필을 지어 남자에게로 데려오셨고 그 둘이 한 몸을 이루라고 명하셨다. 이는 남자와 여자가 하나가 되는 것이 주목적이 아니다. 그 둘은 하나가 되는 일을 위한 훈련 대상이다. 진정한 하나됨은 하나님과의 하나됨이다. 그리스도는 요17:3에서 영생을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정의하셨다. 여기에서의 앎은 경험을 통한 앎을 가리킨다. 영생이란 곧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하여 앎이며 하나님과의 사귐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를 불러 그 아들과 더불어 교제케 하셨다(고전1:9) 이 교제를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를 닮아간다. 본래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정하신 것은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려함이었다(롬8:29) 하나님은 우리가 신의 성품에 참여하기를 원하신다고 사도 베드로는 그의 두 번째 서신에서 말했다(벧후1:4) 이 성화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과 하나가 될 수 있는 성품의 사람으로 변화되어간다. 타락하기 이전 본래의 인간은 살아있는 혼(KJV) 혹은 살아있는 존재(NIV)였다. 그러나 범죄함으로서 육(Flesh)으로 전락해버렸다(창6:3) 육이라는 말은 범죄한 인간을 가리키거나 범죄한 인간 속에 있는 죄의 본성을 가리키는 말이다. 육에 속한 인간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롬8:7,8) 그래서 사람은 거듭남이 필요했다. 거듭나는 것은 육에 속한 사람이 영에 속한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이다. 영에 속한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태어나야 한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기 때문이다. b. 죄 롬5:12은 한 사람(아담)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그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다고 말씀한다. 아담으로 말미암아 들어온 죄는 어떤 죄인가? 대개의 사람들이 그것을 불순종으로 본다. 하지만 불순종 자체가 죄가 아니다. 불순종은 인간이 죄를 갖게 한 행위이었을 뿐 죄 자체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따먹지 말라고 하신 나무의 이름을 통해 하나님은 죄가 무엇인지 이미 알려주셨다. 그 이름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이다. 그 나무의 실과는 그것을 따먹는 사람에게 선악을 알게 해준다. 선악을 안다는 것은 자기 기준에 따라 선악을 판단한다는 의미이다. 사람이 이 실과를 따 먹었을 때에 창3:22에서 하나님은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다’고 말씀했다. 마귀는 사람을 유혹할 때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으면 사람이 하나님처럼 되어 선악을 알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창3:5) 선악의 판단은 오직 하나님만 하실 수 있다. 헌데 사람이 스스로 선악을 판단하게 된 것이다. 참된 선이 뭔지 혹은 악이 뭔지 모르는 사람이 선과 악을 판단하려한다면 그 기준을 누구에게 두겠는가? 바로 자기 자신이다. 이런 경우에 자기에게 이로우면 선이고 해로우면 악이라고 판단을 한다. 이것이 바로 죄이다. 결국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자기라는 나무이다. 자기 기준에 따라 자기 좋을 대로 사는 것이 원죄이다. 자기에게 이로우면 선이기 때문에 죄인들이 선하게 산다는 것은 결국 자기 이익을 위해 산다는 것이다. 아무리 하나님께서 이것이 선하다 해도 그것이 자기에게 이로우면 선이지만 해롭거나 불리하면 선으로 여기지 않는 것이 죄이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런 죄에 대해 사53:6에서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각기 제 길로 갔다’라고 표현했다. 여기에서 제 길이 바로 죄인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자나 믿지 않는 자나 여전히 자기 기준에 따라 자기 좋을 대로 사는 자들이 바로 죄인들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삶들에 대해 심판하신다. 산 자나 죽은 자를 막론하고 사람은 자신의 행위에 따라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된다. 물론 구원을 받은 자는 그 받을 심판이 따로 있고 구원 받지 못한 자는 그 받을 심판이 따로 있지만 말이다. c. 대속(무화과 나뭇잎 옷, 가죽 옷, 여자의 후손) 선악을 아는 죄를 가진 사람은 하나님의 심판이 두려웠다. 그들은 자신들의 수치를 나름대로 가리기 위해서 무화과 나뭇잎으로 옷을 만들어 입었다(창3:7) 사람의 벌거벗은 수치를 가려주는 이러한 옷은 의를 상징한다. 무화과 나뭇잎 옷은 ‘자기 의’이다. 자기 의란 인간 스스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함을 얻기 위해서 가지는 행위 따위를 말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율법적인 요소를 발견한다. 사람이 하나님 앞에 서려면 죄가 없거나 그 죄의 가림을 받아야만 한다. 이런 상태를 의라고 한다. 무화과 나뭇잎 옷은 인간 스스로 만들어 입은 옷으로서 자기 의를 상징한다. 하지만 아담과 하와가 만들어 입은 옷은 서로의 눈에는 부끄러움을 가려주었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가려주지 못했다. 그들은 분명 자기들 스스로 만든 옷을 입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서는 ‘벗었으므로 두려워 숨었다’고 진술했다(3:10) 이는 사람이 자기 의로는 그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함을 얻을 수 없음을 보여준다. 비록 무화과 나뭇잎 옷을 입고 있었지만 그것으로 자신들의 수치를 가릴 수 없었던 사람들을 위해 가죽옷을 만들어 입혀주셨다(창3:21) 이 가죽옷은 ‘하나님의 의’이다. 우리는 이 가죽옷을 통해서 대속의 비밀을 보게 된다. 가죽옷이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짐승이 죽어야 한다. 아무 죄도 없는 짐승이 죽는 이유는 범죄한 사람을 대신하기 때문이다. 이 가죽옷 사건으로 인해 사람들은 짐승을 하나님께 제물로 바쳐 자신들의 죄를 속죄하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사람을 심판하셔야만 하셨다. 정녕 죽으리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을 사랑하신 하나님은 그들을 멸망시킬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들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죽어줌으로서 그들의 죄의 값을 대신 갚아줄 짐승을 준비하시고 그 짐승에게로 사람의 죄를 옮기시고 그 짐승을 사람 대신 죽게 하심으로서 사람들을 대속하게 하셨다. 하나님은 그 짐승 곧 사람의 죄를 대신 담당한 짐승의 가죽을 벗겨 옷을 만들어 사람에게 입혀주신 것이다. 이 짐승은 인류의 모든 죄를 담당하신 하나님의 어린 양이신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의를 이루시기 위해서 율법의 마침이 되셨다(롬10:4) 그리스도를 믿고 연합하여 세례를 받는 자는 그리스도로 옷을 입게 된다(갈3:27)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하여 우리는 이미 심판을 받았고(요5:24) 그의 부활을 통하여 우리는 거듭나게 되었다(벧전1:3) 사람을 유혹하여 범죄케 한 마귀를 향해 하나님께서는 여자의 후손에 대해 말씀하셨다. 여자의 후손은 마귀의 머리를 깨뜨리고 마귀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하는데 이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그 발이 못 박히심으로 마귀의 모든 권세를 깨뜨린다는 예언의 말씀이다. 이를 소위 원시복음(Primitive Gospel)이라고 말한다. 여자의 후손으로 오시는 그리스도는 마귀에게는 심판의 주가 되시나 사람에게는 구원의 주가 되셨다. 신학적 이슈를 주는 주요 인물들 a. 가인과 아벨 가인과 아벨은 사람이 타락한 이후에 하나님 앞에 있게 될 두 부류의 사람을 대표하는 사람들이다. 가인은 선악을 아는 죄의 지배를 받아 전적으로 자기를 사는 사람들을 대표하고 아벨은 자기를 위해 죽었다가 다시 사신 주님을 위해 사는 사람들을 대표한다. 이런 사실을 우리는 성경이 그들의 직업에 관해 말해주는 것을 통해서 짐작할 수 있다(창4;2) 아벨은 양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다. 창4:2이 말하는 양치는 자는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직업으로 가지고 있는 목축업과 판이하게 다르다. 지금은 양의 털이나 가죽 또는 고기를 얻기 위해서 목축한다. 하지만 당시는 고기를 먹던 시대도 아니요 털을 이용하던 시대도 아니었다. 당시에 양이 사용되었던 용도는 오직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것뿐이었고 그 결과로 얻게 된 가죽을 옷으로 입었을 뿐이었다. 결국 양치는 자란 하나님을 섬긴 자를 의미한다. 아벨도 자기나 혹은 자신의 가족을 위해(가인과 아벨이 하나님께 직접 제사를 드렸다는 것은 그들이 부모로부터 독립해서 가장이 되었음을 암시한다) 농사를 지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그의 본업이 아니었다. 그것은 부업이었을 뿐 아벨의 본업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었다. 아벨은 자기 기준을 따라 자기 좋을 대로 사는 죄의 삶을 회개하고 하나님의 뜻을 기꺼이 따르는 사람들의 대표가 된다. 가인은 다만 농사하는 자였다. 이 말은 그가 자기를 위해 산 자라는 의미이다. 타락한 인간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나 자기나 가족을 위해 농사를 지어야 했다. 하지만 농사짓는 것이 사람의 본업이 아니었다. 그것은 죄로 인해 더해진 저주의 부산물이었다. 비록 타락했을지라도 사람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본업으로 가져야 했다. 가인은 아벨을 죽인 죄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쫓겨나 에덴의 동쪽에 가서 살게 되었다. 이때에 가인은 자신이 하나님에게서 끊어지는 것보다 사람들에게 받을 징벌을 더 두려워했다. 가인은 하나님 앞을 떠나고도 하나님 없이 자신의 성을 쌓고 잘 먹고 잘 살았다. 의로운 아벨을 죽이고 하나님 앞을 떠나 살게 된 가인은 그리스도를 십자가 못 박아 죽이고 하나님께 멸망을 받아 전 세계를 유리하는 유대인들을 상징한다. 생명나무보다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선택한 인간의 죄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사람이 바로 가인이다. 가인은 죄의 지배를 받아 여전히 자기 좋을 대로 사는 사람들을 대표한다. b. 에녹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데려감을 받은 사람으로서 마지막 날에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휴거하게 될 교회를 예표하는 사람이다. 에녹이 므두셀라를 낳은 후에 300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하나님의 데려가심으로 죽음을 보지 않고 산 채로 하늘로 올라갔다. 유1:14에 의하면 에녹은 주의 강림과 심판에 대해 주로 예언했던 선지자였던 것을 알 수 있다. 경건치 않은 죄인들을 향해 끊임없이 주의 강림과 심판을 예언했던 에녹은 사람들에게 경건의 삶을 요구했을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이 경건한 삶으로 하나님과 동행함으로서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에 갈 수 있었다. 고전15:51,52에서 사도 바울은 모든 사람이 죽은 뒤에 주님께 가는 것이 아니라 주의 강림 시에 죽은 자들이 부활하고 살아있던 자들은 홀연히 변화할 것을 말했다. 살전4:17에서 그는 살아있는 자들이 주의 재림의 날에 공중에 끌어올려질 것을 말했다. 에녹은 이런 일에 예표가 된 사람이다. c. 노아 하나님께서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셨을 때에 가인의 후손들만 아니라 아벨 대신 주셨던 셋(창4:25)의 후손들까지도 멸망을 당하였다. 셋의 계보를 이어오던 경건한 자손들이었지만 세월이 지남에 따라 타락해 갔고 겨우 믿음의 명맥을 이어오다가 홍수 심판 때에 가인의 후손과 더불어 멸망을 당했다. 하지만 이런 가운데서도 노아는 자신만 아니라 자기 아들 며느리까지 모든 가족들이 함께 구원을 받게 하였다. 여기에서 우리는 노아의 믿음과 삶을 엿볼 수 있다. 그는 자신만 홀로 열심히 하나님을 섬긴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식들에게까지 하나님을 섬기도록 잘 가르쳤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노아는 당대의 의인이었고 사람들 가운데서 흠이 없는 자였으며 하나님과 동행하였다고 성경은 평가한다(창6:9) 이런 평가는 노아 이전의 사람들에게는 한 번도 주어지지 않은 평가였다. 히11:7은 노아가 볼 수 없는 일에 대한 경고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경외했기 때문에 방주(Ark)를 예비하였다고 말씀한다. 노아 방주는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크기의 배였다. 방주를 짓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또한 사람들의 많은 비웃음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심판의 경고를 받은 노아는 하나님을 믿었고 심판에서 구원을 받기 위한 준비를 했던 사람이다. 노아는 하나님의 심판의 날에 심판을 이긴 사람들의 예표가 된다. 우리 주님은 요5:34에서 주님을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한다고 말씀하셨다. 주님을 믿는 자들이 심판을 받지 않는 것은 주님이 그들을 위해 이미 대신 심판을 받아주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심판을 이긴다. 노아 방주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방주에 들어간 노아와 그 가족은 부활하신 그리스도께 연합된 자들을 상징한다.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와 사망에 매여 있던 우리가 구원을 얻게 되었다. 홍수로 인해 물이 온 세계를 덮었을 때에 모든 사람들이 물에 잠겨 죽었다. 물에 잠겼다는 것은 죽음에 잠겼다는 것이다. 하지만 노아와 그 가족은 물속에 잠기지 않고 물 위에 있었다. 그 이유는 물 위에 떠있는 방주 속에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심판하실 때에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은 믿는 자들이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받는 물 침례는 이것을 위한 상징이다. 물속에 들어갈 때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연합된 죽은 자로서 장사되고, 물 밖으로 나올 때에는 그리스도의 부활에 연합된 새사람이란 믿음의 고백으로서 물 침례를 받기 때문이다. Conclusion 서론에서도 언급했지만 창세기에는 성경 전체에 영향을 주는 주요한 핵심적인 교리들이 등장한다. 이런 교리들의 개념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면 성경을 해석하는데 있어서 많은 오류를 범할 수 있다. 사람이 지어진 목적을 제대로 모르고서 우리는 사람을 바른 목적으로 인도할 수 없고, 죄에 대한 바른 이해 없이 우리는 사람들에게 바른 회개를 외칠 수 없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창세기가 얼마나 중요한 책인지 모른다. 창세기에 대한 바른 연구는 성경 전체에 대한 바른 연구로 이어질 것이다. 창세기는 시작의 책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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