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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속으로 〓/영성 교회 성장 10대 지침등(가나다순)

성경신학이란 무엇인가?

by 【고동엽】 2022. 1. 12.

성경신학이란 무엇인가?

-최근 독일 성서학계의 한 중심 주제 - 김창선(장신대초빙교수/신약학) I. 들어가면서 우리 교계는 성경에 남다른 애착을 갖고 있다. 이러한 애착은 주일 아침 고급스런 가죽 장정의 성경을 손에 들고 발걸음을 교회로 재촉하는 뭇 교인들의 모습에서 엿볼 수 있으며, 또한 개 교회마다 여러 종류의 성경 공부반을 개설하고 있는 데서 잘 드러난다. 뿐만 아니라 수많은 신학교의 설립에서 마찬가지로 성경에 대해 알고자 하는 뜨거운 관심도 읽을 수 있다. 심지어 숱한 교단의 분열 역시 성경 해석과도 무관하지 않다. 또한 요즈음 교계는 성경말씀 자체를 강조하는 이른바 강해 설교에 관심이 많다. 이 모든 것을 볼 때, 한마디로 한국 교계는 성경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고 말할 수 있다. 이에 걸맞게 성서학에 대한 글들이 쏟아져 나오는 가운데 성서학의 중요성을 잘 인식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서신학 혹은 성경신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은 소홀히 다루지 않았나 생각된다. 이러한 태도의 이면에는, 성서학을 엄격한 학문성을 갖춘 전문분야로 생각하기보다는, 성경에 담겨 있는 여러 내용을 단순히 기계적으로 반복함으로써 이해했다고 안주하는 자세, 다시 말해 학문이라고 부르기에는 부족한 무비판적이며 자기도취적인 해석 정도로 이해한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를 해본다. 우리는 흔히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고백한다. 이 말을 비기독교인을 염두에 둔 단순히 자기방어적인 수사적 진술로 여기지 않고, 진정으로 우리의 심정 깊이 받아들이는 한, 우리는 성경의 가치를 그 무엇보다도 귀하게 여긴다. 그런데 성경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고백하는 것은 그야말로 우리의 신앙고백이다. 문제는 이와 같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고백하는 성경을 도대체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에 놓여 있다. 이때 중요한 것은, 나만의 사고와 아집에 찬 이해가 아니라 누구나 공감할 수 있고 학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이해를 찾는 일이다. 신앙은 미신, 맹신 혹은 광신에 빠지지 않기 위해 이성적인 이해를 필요로 한다(fides quaerens intellectum). 이는 특히 우리 교계에 절실히 요청되는 말이라고 생각된다. 그런데 과연 우리 교계는 엄격한 학문으로서의 성서학에 얼마나 관심을 갖고 있는지 우려된다. 성서학은 신학 전체의 토대가 되기 때문에 우리는 이를 진지하게 다루지 않을 수 없다. 성서학이 복음의 진리를 바로 해석하여 제시하지 못하고 무기력하게 될 때, 교계 전체의 정신적 침체가 초래되는 것은 너무도 자명하다고 생각된다. 오늘날 여기저기서 거론되고 있는 한국교계의 부패상은 우리 성서학계의 부족함과 결코 무관하다고 할 수 없을 것 같다. 성서학은 개 교단적인 구습과 옛 사고에 얽매여 이끌려갈 것이 아니라, 교단의 좁은 이해관계를 넘어서 전체 교계를 향도해 나갈 수 있는 역량을 갖추어야 할 것이다. 이로써 그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고 오직 진리의 말씀인 성경에 책임을 지는 학적인 성서학에 대한 관심이 더욱 자라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이러한 생각을 하면서 필자는 성경신학(Biblische Theologie)이란 무엇인가 하는 근본적인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이 문제는 사실상 오랜 역사를 갖고 있는 진부한 대상으로 들린다. 그런데 1990년대에 이르러 새로운 시각하에 특히 독일 신학계의 폭넓은 관심을 받으며 성서학의 한 중심중제로 급부상한 후, 이 주제는 현재 성서학자들 사이에 뜨거운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것은 새천년이 시작된 현재 신학의 모습을 규정짓는 핵심 주제 가운데 하나임에 틀림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새로운 움직임이 우리 신학계에는 별로 소개되지 않았다. 따라서 이 글에서 필자는 성경신학의 탄생과 발전을 우리의 상황에 비추어 간략히 살피고, 아울러 신구약성경의 상호 관계성 규명에 초점을 맞추는 전체성경신학(Gesamtbiblische Theologie)과 관련된 최근의 연구성과를 소개 및 검토하는 가운데 성경신학의 중요성을 새삼 강조하고자 한다. II. 성경신학의 태동과 발전 1. 성경신학 태동의 전단계 신약성경이 생긴 이래 기독교 초창기에서부터 중세 가톨릭 교회의 시대까지 진정한 의미에서의 성경신학은 발전할 수 없었다. 당시 교회의 교리는 성경의 내용과 일치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에 걸맞게 12세기서부터 사용되기 시작하였다는 신학(Theology)이라는 단어는 성경적(biblical)이라는 수식어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교회의 절대적인 영향 아래에 있던 당시 신학은 당연히 성경적인 것으로 통했기 때문이다. 그 때까지도 이른바 성서학은 교리학의 보조학문에 불과하다고 믿었다. 따라서 성서학은 교회가 표방하는 교리적 진술의 정당성을 뒷받침하기 위한 도구 정도로 이해되었을 뿐이다. 이러한 보편화된 생각에 변화가 오기 시작한 것은 성서의 권위만을 인정하여 성서로 되돌아갈 것을 주창한 종교개혁운동의 영향이었다. 특히 마르틴 루터의 영향하에 오직 성서로만(sola scriptura)이라는 개신교 원칙이 설정됨으로써, 성경을 교회의 전통적인 해석과 스콜라주의 신학의 구속으로부터 해방시킬 수 있었다. 이 원칙에 따라 성경은 더 이상 교회의 전통적인 해석에 종속되지 않게 되었으며, 성경의 권위가 교회의 권위를 능가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그 결과 성경의 가르침이 단지 교리를 보조하는 역할에서 벗어나게 되었으며, 역으로 교리는 성경로부터 유추되어야 하는 것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칼빈은 1536년에 나온 자신의 저서 기독교 강요(= Institutio christianae religionis)에서 성경이해가 무엇보다도 우선적이고, 교리는 인식의 원천인 성경로부터 유추되어 나온 것임을 분명히 하였다. 교리에 대한 성경의 우위는 성경은 오직 스스로 해석한다(scriptura sui ipsius interpres)는 유명한 말을 통해서도 잘 드러난다. 성경의 자기해석의 원칙은 향후 성경신학의 발전에 토대를 이룬다. 성경신학(theologia biblica)이 교의신학(theologia dogmatica)의 지배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관심의 대상이 되기 시작한 것은 합리주의와 진보적 사고의 영향을 받아 미신, 편견, 권위적인 사고에 저항하는 17-18세기 유럽의 정신 운동인 계몽주의의 영향이 컸으며, 그 후 가블러의 시대에 와서 성경신학은 드디어 독립된 학문분야로서 홀로서기를 시작한다. 2. 성경신학의 홀로서기 1) 요한 필립 가블러(Johann Philipp Gabler) 요한 필립 가블러(1753-1862)는 1787년 3월 30일 알트도르프(Altdorf) 대학에서 교수 취임 강연을 하게 되는데, 이 강연은 향후 새로운 연구 방법의 발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De iusto discrimine theologiae biblicae et dogmaticae regundisque recte utriusque finibus[= 성경신학과 교의신학의 올바른 구분과, 또한 이 양자의 목적에 관한 바른 정의에 대하여]. 가블러는 독자적이며 변치 않는 기초로 이해한 성경 신학의 역사적인 성격과 항시 변하게 마련인 교의학이 내세우는 지침적이며 교훈적인 성격을 대조시켰다: 성경신학은 성경기자들이 신적인 문제에 관하여 생각한 것을(quid scriptores sacri de rebus divinus senserint) 전해줌으로써 역사적인 성격을(e genere historico) 띠고 있다. 그와 달리 교의신학은 한 특별한 신학자가 자기의 이해능력, 시점, 시대, 장소, 종파와 학파, 또한 유사한 다른 것들에 따라 이성적으로 신적인 문제에 대하여 성찰하는 것을 가르침으로써 교훈적인 성격을 지닌다. 이와 같이 성경신학과 교의신학을 서로 구분하는 가운데, 가블러는 교리가 주석에 종속되어야 하지, 역으로 주석이 교리에 종속되어서는 안된다는 점을 분명히 하였다. 성경신학을 역사적인 연구분야로 규정한 가운데 세 가지 방법론을 중시하였다. 첫째, 신구약성경의 내용적인 통일성을 보증하는 영감을 고려의 대상에서 제외시켰다. 하나님의 영이 결코 사람들의 이해력과 사물에 대한 통찰력을 무력화시킨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신적 권위가 아니라 성경기자들이 무엇을 생각하였는가를 살필 것을 주장하는 가운데, 영감설은 성경적 표상을 교리적으로 사용할 때 비로소 다룰 수 있다는 입장이다. 둘째, 성경신학의 과제를 각 성경기자의 개념과 생각을 주의 깊게 수집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성경은 한 사람이 아니라 여러 사람의 생각을 담고 있기 때문에, 성경에 나타나는 다양한 진술을 구분해야 할 것을 주장하였다. 문서비평, 역사비평, 철학비평의 도움을 받아 그 과제를 수행할 수 있다고 보았다. 셋째, 역사적인 시대구분을 중시하는 가운데, 역사연구로서의 성경신학은 그 정의상 옛 종교와 새 종교의 여러 시대들로 구분된다고 보았다. 가블러는 훗날(1802년 이후로부터는 명백히) 성경신학을 두 가지로 구분하였다. 즉, 좁은 의미로 사용된 순수한 성경신학(reine biblische Theologie)과 넓은 의미로 사용된 진정한 성경신학(wahre biblische Theologie)으로 구분하였다. 순수한 성경신학이란 오늘날 기독교적인 종교의 가르침을 위한 토대가 될 수 있는 것만을 가리킨다. 이때 순수한이란 단어는 항시 변하기 마련인 시대적 사고와 '혼합되지 않은' 차원을 나타낸다. 철학적인 비판을 통해 순수한 성경적인 기본 사고를 세상적인 사고와 구분하여, 순수한 기독교적인 종교의 가르침(reine christliche Religionslehre)를 제공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와 달리 진정한 성경신학이란 성서기자가 제시하고자 한 진정한 의미를 역사적으로 서술한 신학을 가리킨다. 이때 진정한이란 단어는 성서기자의 생각을 왜곡시킴이 없이 있는 그대로 제시하는 것을 뜻한다. 가블러는 진정한 성경신학을 역사적인 종교영역(historisches Religionsgebiet)에 속하는 것으로서 본래적인 성경신학(eigentliche biblische Theologie)으로 이해하였고, 순수한 성경신학은 철학적인 종교영역(philosophisches Religionsgebiet)에 속하는 것으로 보았다. 가블러의 긍극적인 관심은 역사적 관심에 따라 수행되는 진정한 성경신학을 넘어서 교의학을 지향하는 순수한 성경신학의 확립에 있었다. 그것은 곧 자신이 처한 시대를 위한 기독교적인 가르침의 토대를 구축하는 일이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가블러가 단순히 역사적 사실을 재구성하는 것보다는 성경을 시대적 언어로 설명해야 하는 해석학적 과제를 강조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성경본문을 문헌학적이며 역사적으로 풀이하는 주석(Auslegen)과 특별한 추론 배후에 숨겨있는 진정한 이유를 밝히는 설명(Erkl ren)을 구분한 사실에서도 드러난다. 또한 가블러는 성경신학을 실천신학의 토대로 이해하여, 기독교적인 설교는 성경의 가르침을 토대로 삼아야지, 그렇지 않을진대 기독교적인 설교이기를 포기하는 것이다라고 역설하였다. 이러한 시각에서 가블러는 성경신학을 독자적인 연구분야로 부각시키는 선구자적인 역할을 했다. 이와 같은 가블러의 입장은 향후 성경신학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였던 것이다. 성경신학의 역사와 문제점에 관해 중요한 연구사를 쓴 한스 요아힘 크라우스(Hans-Joachim Kraus)는 가블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신학사를 서술할 때, 요한 필립 가블러를 '성경 신학'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학자로 규정하는 데 모두가 동의하고 있다. 이로써 가블러가 성경신학의 역사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을 높이 평가하였다. 그런데 향후 성경신학의 발전과 관련하여 가블러 이외에 바우어의 역할도 무시할 수 없다. 2) 게오르크 로렌츠 바우어(Georg Lorenz Bauer) 바우어(1755-1806)는 앞서 언급한 가블러가 몸담고 있던 알트도르프 대학의 근동어학 교수로 1789년에 부름을 받는다. 이런 이유로 대체로 동료 가블러의 영향을 입어 성경신학과 관련된 다양한 작품을 바우어가 쓴 것으로 간주하나, 가블러와 만나기에 앞서 성경신학에 관한 자신의 주요 생각을 이미 정립한 것으로 보인다. 성경 전체를 늘 염두에 둔 바우어는 구약신학(1796)에 이어서 1800-1802년에 신약신학(Biblische Theologie des Neuen Testaments)을 집필하였다. 이 작품은 신약신학의 분야가 구약신학에서 분리되는 최초의 작품으로 간주된다. 바우어는 신약의 빛을 구약에 투영시키려는 옛 방법론을 거부하는 가운데, 구약과 신약을 구분하여 다루는 것이 불가피함을 역설하였다. 사고의 발전을 중시하면서 역사비평적이고 비교종교학적인 접근을 선호한 바우어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신약성경의 사고는 구약성경의 사고에 연결되어 있다. 후자는 맹아이고, 여기에서 전자가 자라 나온다. 신약적 사고가 무엇을 근거로 하였는지를 모른다면, 그것을 결코 올바로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기독교는 유대교에서 유래하였다. 구약성경신학에 이어서 비로소 신약성경신학이 나올 수 있다. 신약성경의 어떤 사고가 새로우며, 어떤 것이 이미 알려진 것이며, 또한 계속 발전된 것인지 또한 응용된 것인지 ... 에 대하여 이러한 발전이 가르쳐준다. 이처럼 신구약성경과 관련된 발전의 시각을 강조함으로써, 바우어는 구약과 신약 사이에 놓인 연속성과 동시에 불연속성의 문제점을 성경신학의 역사상 최초로 명백히 드러낸 학자라고 말할 수 있다. 바우어의 공헌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구약과 신약을 포괄하는 성경신학적 해석학을 나름대로 정립한 점에 있으며, 신구약 안에 담긴 내적 구조의 연결을 밝히고자 애썼다는 데 놓여있다. 이를 실현시키기 위해 바우어는 오직 문법적이고 역사적인 방법론(grammatisch-historische Methode)을 통해서 연구할 때, 비로소 연구목적에 합당한 순수한(=역사비평적인) 성경신학의 연구가 가능하다고 보았으며, 또한 순수한 성경신학 위에서야 비로소 교리사가 구축될 수 있음을 강조하였다. 바우어가 이성주의에 근거한 역사비평적인 방법론을 철저히 적용한 것은 그의 위대성과 아울러 그의 한계를 보여준다. 성경신학의 구축과 관련하여 가블러가 성서의 증거를 단순히 역사적으로 재건하는 것보다는 성경의 '해석'(Interpretation)에 더 큰 관심을 둔 것과 달리, 바우어는 해석보다는 성경 가운데 담긴 다양한 증거를 역사적으로 '재구축'하는 일(Rekonstruktion)에 전념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3. 가블러와 바우어가 남긴 공헌과 오늘 우리의 상황 가블러와 바우어로부터 비롯된 역사비평적이며 해석학적인 인식은 향후 오늘날까지도 유효한 당시로서는 놀라운 통찰이었다. 그들이 남긴 통찰은 크게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성경을 역사비평적으로 연구하는 일을 포기해서는 안된다는 사실이다. 이 인식은 특히 오늘날 우리 신학계 분위기에 유용하다고 생각된다. 마치 역사비평학의 시대는 지나갔고, 이제는 문학비평의 시대가 왔다고 보는 시각은 너무 편협한 시각이 아닐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경솔한 생각으로 보인다. 성서연구에 이 역사비평적 방법론의 적용을 거부하는 자는, 하나님의 계시의 역사성을 거부하는 것이며, 이스라엘의 역사와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가운데 자신을 계시한 분이신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과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학비평은 역사적 질문을 제기하지 않고, 문학적 구조에 관심을 모으면서 성경을 마치 고전문학처럼 다루는 경향이 강하다. 따라서 많은 문학 비평가들이 성경의 실제 문제를 회피하고, 본문과 그 주제의 실재 사이를 구별하기를 거부하려 하는 것은 성서신학의 신학적 기회를 심하게 손상시킨다고 본 B. S. 차일즈의 평가는 정당하다. 독일 성서학계는 역사비평적 방법론은 공격받을 수 없으며, 철저히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을 여전히 천명하고 있다는 사실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둘째, 첫 번째 인식과 관련하여 성경신학은 교리의 지배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점이다. 오늘 우리 나라에서 신학을 전문적인 학문 과제로 삼고 연구하는 이들은 예외 없이 신앙 노선과 관련한 이른바 보수-자유 논쟁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물론 본질적으로 볼 때,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신학자는 이미 자신의 사고 깊이 자리잡은 신앙적 전제로부터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은 너무도 자명하다. 이런 의미에서 성경신학은 개개의 학자가 갖고있는 전통 교리적 혹은 신앙적 확신과 관련을 맺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지극히 정당하다. 그러나 문제는 자신의 확신에서가 아니라, 외압으로부터 영향을 받는 일이 생긴다면, 이것은 신학의 학문적인 발전을 가로막는 일과 다름없다. 성경신학(혹은 성서학)이 오직 그 자체의 학문성에 기초하여 바로 설 때, 궁극적으로 교회(Ekklesia)에 봉사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셋째, 성경적 진술에 대한 '재구축'과 '해석' 사이의 관계설정이 중요한 문제라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이것은 현재까지 계속 논의되고 있는 문제이다. 재구축과 해석 사이의 문제는 앞의 두 가지 사항과 밀접히 관련된 것으로서, 성경을 이해한다는 것이 생각처럼 간단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암시한다. 성경은 수천년전에 기록된 문헌이기에 시간적이며 문화적으로 오늘 우리의 삶과 상당히 괴리되어 있으며, 이로 인한 당시 사람들의 사고와 현대인의 사고를 연결짓기 위해서는 엄청난 해석의 과정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교계의 사고는 이러한 문제를 직시하기보다는 도외시하는 가운데, 과거에 주어진 해석에 매달리려는 경향이 강하다고 생각된다. 이같은 우리의 상황을 고려할 때, 가블러와 바우어가 남긴 성경신학적 노력과 고민은 오늘 우리 신학계를 위해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고 생각한다. 4. 성경신학을 향한 현대적 노력 1) 성경신학의 필요성 우리는 앞에서 성경신학이란 개념을 성경자체의 신학, 즉 거의 1500년 동안 존속해온 교의신학과 구분하여 성경 자체에 담겨 있는 신학과 관련하여 언급하였다. 교의신학이 성경을 따른다고는 하나 성경 자체가 증언하는 진술에 귀를 기울이기보다는, 교회의 오랜 전통적인 표상과 교단적 입장의 지배를 지나치게 받는 경향과 달리, 성경신학은 정경으로서의 성경 자체에 귀를 기울인다. 그런데 앞서 언급했듯이 근대에 들어와 가블러와 G. L. 바우어 이래로 구약신학과 신약신학은 따로 분리되어 독자적인 연구 영역으로 분화되었다. 이와 함께 성서학의 전문화 현상이 점차 두드러지면서 신구약간의 양극화 현상은 더욱 심해졌다. 20세기 후반기에 접어들면서 이를 문제로 여기기 시작한 학자들은 구약신학과 신약신학을 단순히 나열하는 데 만족하지 않고, 신구약성경신학을 함께 아우르는 성경전체적인 신학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예컨대 플뢰거는 구약신학과 신약신학의 독자적인 진술들 위에 기초한 전체 성경 신학을 구축하는 것을 시대적 사명으로 보았으며, 또한 빌트베르거는 성경신학을 향한 도상에서라는 긍정적인 프로그람을 담은 글을 집필하였다. 같은 관심을 나타내면서, 벡은 구약과 신약 신학을 서로 연결시키지 않고 단순히 나열하는 것보다는, 성경신학이 먼 안목에서 볼 때 기독교 공동체에게 보다 만족스러울 것으로 전망했다. 에벨링은 신구약의 상호 관련성을 연구할 것을 강조하면서 성경을 전체로 이해하는 것, 즉 무엇보다도 성경의 다양한 증언들의 내적인 통일성을 묻는 신학적인 문제들을 기술해야 한다고 역설하는 가운데, 성경신학으로 말미암아 서로 다른 신학의 전문분야가 밀접히 협동작업을 하게 될 것으로 내다보았다. 또한 슈툴막허도 근본적인 신학적 사고를 함으로써, 신약성경신학이 신약의 전승을 형성하는 결정적인 기반이 되는 구약을 향해 개방될 수 있으며 개방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2) 성경신학의 과제 성경신학의 과제는 한마디로 신구약 성경의 통일성에 대하여 묻는 것이다. 신구약 성경의 통일성에 대한 질문은 성경의 두 부분을 이루고 있는 구약성경과 신약성경 사이의 관계에 대하여 묻는 것이다. 신구약 성경의 통일성에 대한 질문은 2세기 중엽 마르키온 이래로 기독교 신학의 첨예한 문제로 오늘날까지 제기되곤 하였다. 예컨대, 하르낙(Adolf von Harnack, 1851-1930)은, 신구약성경의 통일성은 단지 외형적인 것일 뿐이고, 구약성경과 신약성경 사이에는 오히려 긴장이 큰 것으로 간주하였다. 그러면서 마르키온의 영향을 입어 구약을 과소평가하면서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남겼다: 2세기에 구약을 폐기시키는 것은 하나의 실수였다. 이를 교회가 거부한 것은 정당한 것이었다. 16세기에 구약을 그대로 보유한 것은 종교개혁이 아직 피할 수 없었던 하나의 운명이었다. 그러나 19세기 이후 개신교가 구약을 정경으로 보유하고 있는 것은 종교적이며 교회적인 마비상태의 결과이다. 또한 독일의 저명한 조직신학자로 통하는 히르쉬(Emanuel Hirsch)는 구약과 신약의 근본적인 분리를 강조하면서 구약과 신약이 영원한 '대립적인 긴장' 가운데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구약성서를 기독교의 경전으로부터 제거하려는 시도는 정당하지 못하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구약성서를 신약성서와 무관한 독립된 두 가지 책으로 보는 시각도 기독교적인 시각에서 볼 때 타당하지 않다. 나사렛 예수와 바울을 포함한 사도들 모두 유대인으로서 그리스도교의 시작서부터 이스라엘의 성경을 공유하였다는 역사적 사실뿐만 아니라, 최초의 그리스도교인들은 예수 사건, 즉 예수의 사역과 죽음 및 부활을 (구약)성경에 따라(고전 15:3-5) 이루어졌다는 신앙고백만 고려하더라도 신구약성서 사이에는 내적인 연관성이 놓여 있음을 쉽게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구약성경이 없이는 신약성경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신구약 상호간의 관계성을 묻는 성경신학적 과제는 회피할 수 없는 중요한 신학적 과제임을 알 수 있다. 5. 다양한 성경신학적 모델 신구약성서의 관계성과 관련된 질문은 어제오늘의 질문이 아니라 기독교 신학의 역사와 함께 자랐다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고대교회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여러 종류의 해석모델이 존재한다. 여기서는 주로 중요한 모델에 국한하여 간략히 설명하고자 한다. 1) 약속과 성취(Verhei ung-Erf llug) 모델 신구약의 연속성을 나타내는 가장 중요한 모델로서, 고대 교회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오늘날까지도 가장 커다란 영향력이 있는 모델이다. 한마디로 구약 가운데 나타나는 하나님의 약속이 신약에 와서 성취된 것으로 여기는 해석을 가리킨다. 다시 말하면, 구약성서에 담긴 모든 약속이 그리스도 가운데에서 전적으로 충만해진 것으로 보는 해석이다. 이와 같은 해석은 신약성경 가운데 나타나는 구약의 직간접 인용을 통해 자연스럽게 주어진 해석이다. 종말론적인 차원을 강조하는 가운데, 신약에서 출발하여 구약으로 향하는 시각을 취한다. 이 모델이 안고 있는 약점은, 신약의 성취가 구약의 약속에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이다(예컨대, 예수는 구약적인 메시아와는 전적으로 다르다). 이 모델을 표방하는 주요 학자들로서 아이히로트, 베스터만, 침멀리 등을 들 수 있다. 2) 유형론(Typologie) 모델 이 모델은 앞서 언급한 약속과 성취의 모델을 근거로 한 가운데 이를 한층 구체화시킨 모델이라고 말할 수 있다. 구약과 신약을 유형론적인 관계 속에서 연구하는 것으로, 구약의 인물, 관례, 사건, 장소, 신앙적 진술 등을 신약에 나오는 것들을 위한 모형과 예시로 파악한다. 이로써 구약성서의 역사는 신약성서를 위한 전 단계의 역사로 파악된다. 구약이 Typos를 이루다면, 신약은 Antitypos를 이룬다. 신구약성서는 한 분 하나님을 증거하며 또한 그리스도는 구약성서를 넘어서는 분임을 전제한다. 폰 라트와 고펠트가 대표적이다. 구약성경 내에서 유사한 유형의 구조를 찾을 수 있으나(예컨대, 출애굽 사건/ 바빌론 탈출 사건), 전체적으로 볼 때 이 모델은 신약에서 출발한 사고를 구약에서 찾으려는 경향이 짓다(아담-그리스도-유형론이 좋은 예다). 이 모델이 안고 있는 약점은, 신구약 사이에 상응하는 개별적인 면을 찾을 수 있으나, 이를 전체 성경에 적용시키기는 어렵다는 데 놓여있다. 3) 구속사(Heilsgeschichte) 모델 구약과 신약의 관계를 단순한 역사적 차원에서가 아니라 구속사적인 차원에서 이해하고자 한다. 예수가 메시아라는 신약의 증언은 하나로 통일된 하나님의 구원계획의 시각에서 볼 때 역사의 통일성을 나타낸다는 입장이다. 이 모델은 구약에 나오는 신앙의 역사를 지속적으로 발전하며 증대하는 대망의 역사로 파악한다. 보스는 계시의 역사를 성서에 보도되는 객관적 사건들과 단순히 일치시켰으나, 쿨만은 구속사를 특별한 형태의 역사로 보는 가운데, 일반 역사와 종종 서로 얽혀있기도 하나 대체로 이와 명확히 구분되는 것으로 이해한다. 역사의 특수성과 역동적인 움직임을 부가시키는 강점을 안고 있는 이 모델은 신약성경 가운데 부분적으로 나타나나(특히, 누가의 작품), 구속사적인 사고 구조를 신구약 전체로 확대시키기는 어렵다는 난점을 안고 있다. 4) 계시로서의 역사(Geschichte als Offenbarung) 모델 구속사 모델을 근거로 발전된 것으로, 전체 역사를 하나님의 계시로 이해하는 해석이다. 이 모델은 보편사를 성경신학적인 해석학 범주로 이해한다. 모든 신학적 진술은 역사의 틀 내에서만 의미를 지닌다고 보는 가운데, 역사는 인간 및 온 피조물과 더불어 하나님의 계시로서 세상 가운데 감추어진 미래를 향해 있으며, 그 미래는 예수 그리스도 가운에 이미 계시되었다고 본다. 역사의 의미는 하나님에 대한 사고로 특징 지어진 이스라엘의 역사의식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며, 신구약을 포괄하는 역사는 하나로 연결된 하나님의 활동하심 가운데 기초한다는 입장이다. 예수의 부활을 선취된 역사의 종말로 보는 시각을 중시한다. 대표적인 학자로 판넨베르크(Pannenberg)를 들 수 있다. 이 모델의 약점은 역사를 계시와 동일시하는 시각은 성서적인 계시 이해와 거리가 있다는 데 놓여 있다. 5) 기독론적인 해석(Christologische Deutung) 모델 구약의 본문이 담고 있는 독자적인 케리그마에 대해 묻지 않고, 마치 그 본문 가운데 숨겨져 있다고 생각되는 선포를 기독론적인 해석을 통하여 밝혀내고자 한다. 간단히 말해 구약과 신약이 모두 그리스도에 대해 증거하고 있다고 보는 입장이다. 구약은 그리스도가 무엇인가에 대하여 말하고, 신약은 그리스도가 누구인가에 대해 말하고 있다고 봄으로써 신구약을 서로 연결시킨다. 이와 같은 해석은 이미 신약성서 기자들 가운데 찾을 수 있다. 예컨대, 17:1-7에 언급된 반석을 그리스도로 해석하였는가 하면, 또는 히브리서 1장에 인용되고 있는 여러 시편 구절( 2:7; 45:6; 97:7; 110:1)을 그리스도와 관련시켜 이해하고 있다. 이러한 해석의 대표자로 피셔(Wilhelm Vischer)를 들 수 있는데, 구약 성서 가운데 나타난 여러 가지 사고와 이야기들은 예수의 십자가를 향하고 있다고 보았다. 또한 그럴로(P. Grelot)는 구약성서 가운데 그리스도 자신이 말하며 사역하며 고난을 받고 있는 것으로 해석하였다. 그러나 구약성서를 천편일률적으로 알레고리의 시각을 통해 오로지 그리스도를 목표로 한 진술로 해석하려는 데에는 무리가 있다. 6) 전승사적인 해석(Traditionsgeschichte) 모델 이 모델은 구약성경에서 출발한 전승과정(Traditionsproze )이 신약에서 완성된 것으로 여긴다. 즉 구약성경과 신약성경 사이의 연결을 전승과정의 연속성(Kontinuum) 혹은 통일성(Einheit) 가운데 파악한다. 전승과정이란 여러 변화에도 불구하고 변치 않는 방향을 제시하며 종국의 목적을 지향하는 것을 나타낸다. 이 모델을 대표하는 학자는 튀빙엔 대학의 구약학 교수로 은퇴한 게제(Hartmut Gese)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성경적인 전승은 전체적인 것으로, 구약이 신약 가운데 또한 신약과 더불어 전체가 된다보아, 단지 하나의, 성경적인 전승형성(=eine, die biblische Traditionsbildung)만이 있으며, 또한 구약성경은 신약성경을 통해 탄생되며, 신약은 본질적으로 하나의 통일체, 하나의 연속체로 된 전승과정의 마감을 이룬다. 6. 성경신학을 지향하는 최근의 시도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성경신학의 필요성이 한층 구체화되면서 구약과 신약을 서로 긴밀히 연관시키고자 하는 노력이 드디어 결실을 보기 시작한다. 여기에 소개하는 성경신학적인 시도들은 모두 각 저자가 오랜 신학적 숙고 끝에 원숙한 단계에서, 다시 말해 자신들의 거의 평생에 걸친 신학작업에서 비롯된 역작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1) Brevard S. Childs 본래 구약학자인 차일즈는 Biblical Theology of the Old and New Testaments(1992)라는 저서를 출판함으로써, 성경전체적인 신학을 만들어내는 작업을 처음으로 실천에 옮긴 사람이다. 그의 관심은 정경적인 접근방식(cannonical approach)을 통한 성경신학을 새롭게 정립하는 것이다. 정경적 접근은 그의 해석학을 이해하는 핵심개념이다. 정경이란 범주를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영역을 나타내는 준칙으로 이해하며, 성경신학을 수행하기 위한 가장 적합한 문맥으로 간주한다. 정경의 문맥 안에서 성경신학을 수행하는 것은 성경전승이 지니고 있는 규범성을 인정하는 것을 뜻한다. 정경이 된 성경의 최종형태와 정경 안에 정해진 각 성서문헌의 순서에서 차일즈는 신학적인 성경 해석의 토대를 마련하고자 한다. 이와 같은 정경적인 접근이 나오게 된 배경은, 성경을 역사적 과거의 문맥에만 가두어둠으로써 점차 신앙공동체의 관심을 잃고 있는 기존의 성서접근에 대한 반성과 아울러, 특정 주제를 통해 성경 전체의 내용을 관통하는 개념을 찾으려는 시도가 문제가 있다는 것에 대한 인식에 놓여 있다. 정경적 접근을 통해서 차일즈는, 주관에 빠진 편향된 성경 해석에 대항하여 정경의 객관성을 지키려는 의도를 보여준다. 이로써 구약성경 속에 나타나는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내용을 찾는 가운데, 구약성경이 기독교 신앙 공동체의 문서로서 갖고 있는 고유의 권리를 밝히고자 한다. 2) Hans H bner 괴팅엔 대학의 신약교수 휘프너는 모두 세 권으로 이루어진 역작 신약정경신학을 저술하였다: Biblische Theologie des Neuen Testaments (제1권: Prolegomena, G ttingen 1990; 제2권: Die Theologie des Paulus und ihre neutestamentliche Wirkungsgeschichte, 1993; 제3권: Hebr erbrief, Evangelien u. Offenbarung, Epilegomena, 1995). 휘프너는 성경신학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성경신학이란 결국 오늘날 새로운 요청, 즉 전체 성서를 대상으로 하는 신학의 요청이다. 따라서 구약성서와 신약성서를 신학적인 통일체로 이해하고자 하는 신학의 요청이다. 신구약성서의 신학적인 연관성은, 거의 모든 신약의 전승자들이 구약의 전승을 자기들의 신학적인 논증에 관련시켰다는 사실에서 결정적으로 드러난다고 본다. 따라서 그는 신구약성서가 맺고 있는 신학적인 관계를 규명하는 작업을 위해 신약에 나타나는 구약성서의 직간접 인용문에 특히 관심을 기울이는 가운데, 이 구약의 인용문들이 신약의 본문 가운데에서 새롭게 해석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그리하여 휘프너는 구약성경 자체(Vetus Testamentum per se)와 신약에 수용된 구약(Vetus Testamentum in Novo receptum)을 구분한다. 이와 같은 시각을 갖고 휘프너는 신구약성서가 맺고 있는 신학적 관련을 하나의 신학적 전체로 모으고자(zu einem theologischen Ganzen zusammenzuf hren) 한다. 3) Peter Stuhlmacher 튀빙인 대학의 신약학 교수 슈툴막허는 이제까지의 자기의 신학연구를 종합한 두 권으로 이루어진 신약성경신학(Biblische Theologie des Neuen Testaments)을 출판하였다(제1권: Grundlegung. Von Jesus zu Paulus, G ttingen 1992; 제2권: Von der Paulusschule bis zur Johannesoffenbarung. Der Kanon und seine Auslegung, G ttingen 1999). 슈툴막허는 신구약성서를 따로 서로 분리하여 연구하는 현대적인 경향에 강한 이의를 제기하면서, 구약과 신약성서는 정경의 첫 번째와 두 번째 부분으로서 서로 구분되지만, 그렇다고 분리시켜서는 안된다. 이들을 분리시킨다면, 신약성서를 역사적으로 뿐만 아니라 또한 신학적으로도 왜곡하여 이해하게 된다고 경고한다. 신약성서는 구약성서와 무관하게 정경이 된 것이 아니며, 구약성서는 최초의 그리스도인들의 성서로서 교회의 기독론과 구원론 및 윤리를 이루고 있는 성경신학적 토대가 된다는 입장이다. 따라서 신약신학은 성경신학의 두 번째 부분을 이루고 있는 반면, 구약신학은 첫 번째 부분을 형성한다고 이해한다. 이러한 이해 위에서 (구약과) 신약성서의 성경신학은 세상을 창조하시고, 이스라엘을 당신 소유의 백성으로 선택하시고,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로서의 예수를 보냄 가운데 역사하신 한 분이신 하나님을 선포하는 증거에 의해 구축된다고 말한다. 튀빙엔의 동료교수 H. 게제의 전승사적 접근을 수용한 슈툴막허는 전승에 대한 방법론적인 회의에 반대하는 가운데 성경 전승에 대한 신뢰를 강조한다. 신구약성경의 관계는 두 가지 전제의 영향하에 있음을 지적한다. 우선, 예수를 비롯해 그가 택한 사도들과 바울은 유대인으로서 구약성경에 참여한다는 사실이고, 둘째는 히브리 구약성경과 칠십인역본(LXX)과 신약성경이 성장하는 정경화 과정의 지배를 받고있다는 사실이다. 성경신학의 과제란, 신약 본문으로부터, 그리스도 가운데 또한 그를 통해 나타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길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한다. 4) Wilhelm Th sing 이미 은퇴한 가톨릭 신약학자 튀징은 모두 네 권으로 구성된 신약성서신학을 구상하고 있다. 현재까지 두 권이 출판되었다. 신약성서신학의 토대가 되는 규범을 다룬 제1권은 이미 1981년에 나왔고(Kriterien aufgrund der R ckfrage nach Jesus und des Glaubens an seine Auferstehung), 오랜 시간이 지나서 드디어 1998년에 제2권이 모습을 드러냈다(Die neutestamentlichen Theologie und Jesus Christus. Grundlegung einer Theologie des Neuen Testaments II: Programm einer Theologie des Neuen Testaments mit Perspektiven f r eine Biblische Theologie, M nster: Aschendorff, 1998). 아직 출판되지 아니한 제3권에서는 하나님의 독특성과 예수 그리스도 사건을 중심주제로 다룰 예정이며, 제4권에서는 신약을 전체로 향하는 한 부분으로 보며 동시에 전체로부터 부분을 향하는 가운데 내적 구조를 규명하며 비교하는 내용을 다룰 생각임을 밝혔다(제2권, p. 15). 튀징은 제2권에서 성경신학의 문제를 자세히 다루고 있다(특히 pp. 194ff). 여기에서 그는 신구약성경의 관계에 관한 세 가지 명제를 제시한다. 첫째, 성경신학의 범주 안에서 구약의 특징이 전적으로 드러나도록 하기 위해, 우선적으로 구약을 신약과 구분하여 조망해야 한다. 그런 다음 구약과 신약을 아우르는 전체적인 조망을 밝혀야 한다. 이는 오로지 신-학, 즉 하나님 이해의 관점을 통하여 가능하다. 둘째, 성경신학은 구약의 특징과 그 이상의 것을 포함하여야 하며, 또한 신약의 특징과 고유한 그 이상의 것을 포함시켜야 한다. 성경신학은 신구약 성경을 단순히 연결시키고 비교하는데 머무르지 않고, 이스라엘의 하나님 활동을 통하여 구약과 신약에 나타난 구원현실의 연속성(Kontinuit t)과 독특성(Andersartigkeit)의 양면을 고려해야 한다. 셋째, 성경신학의 목적은 구약과 신약을 신학적으로 연결짓는 것으로, 이는 곧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적 현실 가운데 놓여 있다. 따라서 성경신학은 구약과 신약을 연결짓기에 앞서, 양자를 받치는 축(Angelpunkt)을 밝혀야 하는데, 그것은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사역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부활절 이후의 하나님의 사역 가운데 놓여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예수의 선포, 사역, 죽음, 부활 가운데 나타난 하나님의 활동하심을 가리킨다. 유대인 나사렛 예수 안에서 구약성서의 유산과 신약성서적인 구원현실의 맹아가 서로 연결되었다고 보는 가운데, 튀징은 나사렛 예수에 대한 질문이 구약과 신약을 아우르는 핵심 질문으로서 성경신학을 구축하는 데 유용할 뿐만 아니라 불가피하다는 입장이다. III. 결론 성경의 신학적 차원을 회복하자는 도전으로 이해할 수 있는 성경신학과 관련하여 최근 독일학계를 중심으로 자주 거론되고 있는 신구약성경의 통일성에 대한 질문은 중요한 신학적 질문으로서, 회피할 수 없고 회피해서도 안된다. 신구약성경의 통일성, 즉 양자간에 놓인 신학적 상호 연관성에 대한 질문은 이미 신약성경의 증언 가운데 내포되어 있으며, 이스라엘의 역사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한 분 하나님의 활동하심이 전체성경의 중심 맥을 이룬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스라엘 사람들의 삶과 신앙고백을 담고 있으며 최초의 그리스도 신앙공동체가 유일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인 구약성경을 배제하고서는, 신약성경을 온전히 이해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기독교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신구약의 관계를 묻는 성경신학의 필요성이 절실함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교 신앙공동체는 구약과 신약으로 구성된 성경을 서로 무관하게 생성된 전적으로 상이한 두 책의 조합으로 보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두 책 가운데 놓인 내적인, 신학적인 연결성을 밝히는 일에 마땅히 관심을 기울어야 할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성경신학을 향한 접근은 지극히 정당하다고 말할 수 있다. 신구약성서의 통일성에 대한 질문은 오늘날 역사비평적인 성경해석과 (조직)신학적인 해석 사이에 벌어진 간격을 좁히는 데 공헌할 것이 분명하다. 신구약성경의 내적인 연결을 나타내는 통일성을 강조한다고 해서 성경에 속하는 각각의 문서가 지니고 있는 독특성을 부인할 필요는 없다. 각 문헌의 독특성에 관심을 갖는 일은 성경의 통일성을 밝히는 작업과 배치된 것으로 이해할 필요가 없고, 오히려 히브리서 기자가 언급했듯이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1:1) 한 분 하나님의 활동하심을 각 문서를 진지하게 살펴 옳게 드러냄으로써, 전체 성경에 흐르는 내적인 통일성과 각 문헌의 독특성이 서로 조화를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와 관련하여 단일한 주제 및 특정 시각을 통해 구약성서와 신약성서 전체를 조망하려는 성경신학적 시도가 안고있는 위험성을 경시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러한 시도로 말미암아, 예수의 삶·선포·그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 사건에 담긴 옛 전통을 넘어서는 전적인 새로움의 차원이 흐려진다면, 기독교 정체성의 혼란을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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