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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속으로 〓/영성 교회 성장 10대 지침등(가나다순)

신학개론(Introduction to Theology)

by 【고동엽】 2022. 1. 23.

신학개론(Introduction to Theology)

 

 

1. 신학의 분야

 

신학이에는 여러 가지 분야가 있다. 전통적 분류방법에 의하면 4 가지가 있다.① 성서신학 : 성서신학은 신구약 성서가 언제, 누구에 의하여 기록되었으며, 원본과 사본의 연구, 정경의 형성과 확정 등 성서에 관한 모든 것을 취급하는 학문이다.② 조직신학 : 성서에 가르침에 근거하여, 신앙생활에 다양한 체험과 여러 가지 학문과의 관계를 잘 체계적으로 논리적으로 입증하고 평가하는 학문이다.③ 역사신학 : 지난 2000년동안 교회가 걸어온 발주취를 더듬으면서 성서에 가르침에 교회가 충실하였는지를 고려하며, 교회 교리가 어떤 과정을 밟으면서 형성되었는지를 검토하고 역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이 어떻게 계시되었는가를 연구하는 학문이다.④ 실천신학 : 성서의 가르침과 교회가 형성한 교리가 어떻게 신자들의 실생활에 반영되었으며, 변천하는 상황 속에서 신자들이 어떻게 성서의 가르침대로 생활할 수 있을까 연구하는 학문이다.

 

2. 신학이라는 말의 뜻

 

신학이란 두 가지 말의 합성어이다. 헬라어의 신(神)/데오스(Theos) 와 학문/로고스(Logos)라는 두 단어가 결합된 말이다. 즉 신(神)에대한 학문이 신학이다. 이 말은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신이 하시는 학문이라고도 할 수 있고, 신에 관한 학문이라고도 할 수 있다. 보통 사람들은 후자의 것을 택한다. 즉 신에 관한 학문이 신학이라는 것이다.

신에 관한 사람들의 이해를 인간의 언어와 논리를 통하여 체계화시키고 표현하는 학문이다. 때때로 신학에 관하여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다. 감히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신)에 관하여 왈가왈부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두가지 면에서 잘못된점이 있다.

첫째, 신학을 영위하는 주체는 사람이지 하나님이 아니란 점이다.

둘째, 신학은 신앙인들의 신앙의 응답이기 때문에 때와 장소와 환경에 따라서 항상 그 표현이 다르게 나탈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학은 고정된 체계나 형식이 없다. 신학은 이러한 이유로서 절대화시킬 수 없다. 신학은 항상 폭 넓게 이해하여야 하고 고정관념의 틀에 가두어 놓을 수 없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토록 변치 않지만 신학은 항상 변해지고 변해왔다.

 

3. 신학의 목적

 

신학의 목적은 성서를 통해서 주시는 복음의 내용, 즉 신언(神言)의 내용을 사람들에게 알게 하여 그들이 구원에 관한 진리를 알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체험하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행복 되고 보람있는 삶을 가지도록 하는데 있다. 이것이 일반 학문과의 차이다. 신학은 공리공론(空理空論)이 아니다. 과거 중세기의 스콜라주의가 그러했던 때가 있었다. 살아 있는 신학이란 조직신학에서 취급하는 내용이 교회와 신자 개인의 생활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을 취급해야 한다. 신학이 교회에 도움이 되는 신학이어야 한다.

 

4. 신학에 대한 잘못된 이해

 

A. 신학에 대하여 잘못된 이해들이 있다. ① 신앙만 있으면 된다는 오해이다. ② 올바른 신앙을 가지려면 신학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③ 학문성과 신앙을 겸비해야 바람직하다.

B. 신학을 하려면 다음과 같은 것이 필요하다. ① 성서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 한다.(희브리어, 헬라어) ② 성서해석의 역사를 알아야 한다.(말씀의 의미를 적용할줄 알아야) ③ 성령의 역사(役事)에 순종해야 한다.(성령체험이 있어야) ④ 신앙고백이 있어야 한다.(신앙고백이 없는 신학은 이론에 끝임)

 

5. 신학 하는 방법

 

A. 신학 하는 주체가 인간임으로 이성(理性)중심이 될 수 있다. ① 극단적인 보수주의자나 신비주의자들은 이성을 죄악시한다. - 터툴리안(초대교회의 신학자)...철학은 타락한 천사가 준 선물이라고. - 버나드(중세기의 신비주의자)...이성을 존중하는 자는 신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사람이라고함. - 루터(종교개혁자)...이성을 <악한동물>이자 쓴맛과 악취를 내는 신의 적이기 때문에 그것을 죽여 신에게 제물로 바쳐야 한다고 함. - 칼 발트(현대신학자)...이성에 유효성에 대하여 회의적이었다. ② 이성을 중요시한 사람들도 있었다. - 마터(초대교회 순교자)...기독교인은 철학자들이 발견한 진리를 계승한 람들이라고함 - 어거스틴(교부철학자)...철학을 중요히 함(이교도들이 한 말이라도 그것이 바른 의견일 때는 기독교인들이 그것을 받아 들여야 한다고 함) 철학은 복음의 예비자라고 함. - 스코라주의자(중세신학자들)...17-18세기 후부터 재강조됨 19세기부터는 자유주의 신학자들에 의해 계승됨.

▶ 종합평가 : 이성은 하나님의 주신 선물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지을 때 특별한 존재로 지었다. 하나님은 인격적이고, 지적이고, 거룩한 분이기 때문에 인간에게도 그러한 속성을 주었다. 고로 인간은 인격적인 동시에 지적이다. 이 이성으로서 하나님의 말씀과 섭리와 우주의 이치를 알도록 하였다.

B. 신학은 인간의 대한 학문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것이기에 <계시>를 중요시한다. 1) 하나님은 초월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이성만으로는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다. 2) 이성은 피조물의 하나이기 때문에 피조물의 한계를 넘어설 수 없다. 3) 이성만으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회의주의자나 신비주의자나 부정주의자가 되기 쉽다(하나님에 관하여 '이것도 아니다. 저것도 아니다'라는 식이다). - 오리게네스...하나님을 절대자라고 생각하는 동시에 단일자라고...그러기에 신이 인간에게 나타날 수 있다고 하지 아니했다. 하나님을 존재 자체로 보았기 때문에 지식의 대상이 될 수없다고 함. 다만 하나님에 대하여 말할 때 부정(否定)적으로만 말해야 한다. - 토마스 아퀴나스...이성으로 하나님을 말할 수 없다고 함. 피조물을 통하여 그의 존재를 말할 수 있지만 하나님의 구체적인 것은 말할 수 없다고 함(루터는 '하나님은 숨어있는 존재'라고/ 하나님은 본질과 실존을 넘어서 존재한다고 함).

 

6. 신앙과 이성과 계시

 

a. 이성과 계시중 어느것이 더 중요하냐? 에대 하여 오랫동안 논쟁하였다. 이성과 계시는 모두 중요하다. 하지만.....어느것이 앞서는가? 하는데 대하여 ① 오리게네스/ 안셀무스/ 토마스 아퀴나스.....이성을 앞세웠고. ② 어거스틴/ 처음에는 이성을 앞세웠으나, 그것 가지고는 도저히 안되겠다고 하여 후에 계시를 앞세움./ 죤 칼빈. 칼 바르트가 모두 이 입장임.

b. 많은 학자들이 이성과 계시의 문제를 가지고 고민하다가 발견한 것이 있다. "우리가 알기 위하여 신을 믿는다" 는 말이다. '물론 믿기 위하여 알아야 한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우리는 믿기 위하여 성경을 읽거나 신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믿고 있기 때문에 믿음을 더욱 굳게 하고 확실케 하기 위하여 성경을 읽고 교리를 배우고 신학을 하게 된다. 먼저 신앙을 가지고, 그 신앙으로써 알게 되는 계시의 도움을 기초로 하여 여러 가지 교리를 알아보려고 하는 것이 신학이다. 이성에서 출발하여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가지려면 그것은 불가능하다.

c. ① <계시>가 <신앙>을 선행한다는 것을 인정한 후에 <이성>의 중요성을 말해야 한다. ② 이성은 강한 힘을 가지고 있으나 계시의 도움이 없으면 하나님을 아는 일에는 무관하다. ③ 계시의 조명을 받았을 때 이성은 유효하다. 시편36:9 절에 "주의 광명 중에 우리가 광명을 보리이다"

 

7. 구원역사(Salvation-History)

 

a. 역사의 의미-크리스천들에게 있어서 역사는 단순한 무의미한 사건의 연속이 아니다. 역사는 엄밀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구원역사}이다. b. 역사는 시작과 끝이 있다. 역사는 하나님의 행위로 시작하여 하나님의 종말섭리로 끝난다(창세기-타락-구원). c. 역사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이다.(구약: 예언/ 신약: 완성) d. 구속사는 선민 이스라엘의 역사(구약)를 통하여 이루어졌고, 기독교회의 역사로 이어져오고 있다. 고로 교회의 역사를 구원사로 볼 수 있다. e. 한 걸음 더 넓게는 지상에 모든 종교를 포함하여 그것들의 흥왕성쇠의 전 과정들 속에서 구원사는 진행되어 간다.

 

8. 성경 해석학(Hermeneutics)

 

1) 정경(Canon)으로서의 성경 A. 우리의 신앙의 표준은 성경이다. 종교개혁자들이 쓰던 구호 세 가지가 있다. 믿음으로만-sola fide/ 은혜로서만-sola gratia/ 성경으로만-sola scripture. 로마 천주교에서 믿음+행위, 은혜+자력, 성경+전승을 강조하였는데 대한 반대이다. 이렇게 강조한 성경에 관하여 개혁교회에서는 성경해석에 관하여 각각이다. 이것을 바로 하기 위하여 우리는 성경이 정경으로 형성되기까지의 과정을 잘 알아야 하겠다. 그리고 거기에 따른 해석의 객관적인 기준을 살펴야 하겠다. B.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신약 27권과 구약 39권 모두 66권이 정경으로 받기까지는 신약은 4세기말경이고, 구약은 주후 90년에 확정되었다. 이것은 모든 성경이 단번에, 그리고 한 사람에 의하여 기록된 것이 아니란 말이다. 그러기에 그것이 완성될 때까지는 상당한 시일이 걸렸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66권에 포함된 것을 정전(正典) 또는 정경(正經)이라고 하고 그 밖에 것을 외경(外經)이라고 한다. C. 신약 성경 중 야고보서, 베드로후서, 유다서, 요한2서, 요한3서, 계시록에 대하여는 오랫동안 논쟁이 계속되었다. 367년 아타나슈스 편지에 27권이 기록된 후부터 정경으로 받아 드리기 시작하였고, 그러나 382년 로마대회에서, 그리고 393년에 힘포대회, 397년에 카르타고 대회, 419년에 어거스틴이 이에 찬동하였고, 드디어 692년에 트룰란(Trullan) 회에서 정경 형성사가 종결되었다.

2) 성경의 가치와 권위 a. 로마 교회에서는 성경의 권위를 교회 밑에 둔다. 왜냐하면 정경 형성과정에서 그것을 교회 회의에서 결정하였다는 데서 그렇게 말한다. 그러나 개혁자들은(루터/칼빈) 교회가 성경에 권위를 부여한 것이 아니라, 교회가 성경자체의 권위를 인정 할 수밖에 없었다고 그렇게 주장한다. 성경은 성경 안에 이미 권위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성경은 성경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일점 일획도 가감할 수 없는 권위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b. 그러나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그 말씀이 사람의 언어로 사람에 의하여 기록되었기에 여기에 두 가지 사실에 부딪친다. 하나는 그 시대의 사용한 인간의 언어를 가지고 기록하였다는 점과, 또 하나는 그러기에 그 언어가 담고 있는 의미를 정확하게 전달되어야 한다는 해석의 문제가 제기된다.

3) 성경의 해석 성경은 인언(人言)으로 기록 된 것이지만 그것이 신언(神言)이기 때문에 신언에 대한 바른 해석이 필요하게 된다. 이것은 전문가들에 의하여 행해질 문제이다. a) 구약에서는 ① 랍비적 해석 방법이있어 율법서를 매절마다 조직적으로 해석하거나(Midrash 방법), ② 유대인의 규례를 위주로한 해석이었다(Mishnah 방법). b) 신약 초대교회에서는 보편적으로 알레고리 방법이 있었다. 즉 성경의 내용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숨겨져 있는 내용을 발견하려는 방법이었다. c) 중세 교회는 성경 해석을 중요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성경 연구가 발달하지 못하였다. d) 종교개혁자들은 성경자체가 성경을 해석하도록 하는 방법을 택하였다. e) 현대 교회는 사본연구의 발달로 성경을 언어학적으로, 역사학적으로, 문화사적 견지에서, 성경을 종합적으로 또는 비판적으로 해석하려고 한다. 예: 불트만은 성경 안에 신화적 요소가 많아 그 신화적 요소를 비신화화 하는 것을 방법으로 택하였다.

4) 성경 영감설 성경에 대한 많은 논쟁 중에 하나가 영감 설이다. 영감 설이란 딤후3:16, 벧후1:21, 행 1:16에 근거하여 성경 기자들이 성경을 기록할 때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하였기 때문에 일점일획도 틀림이 없다고 하는 설이다. a) 축자 영감설:Theory of Verba Inspiration(한마디 한마디를 직접적으로) or 기계영감 b) 단계 영감설:Theory of Degree of Inspiration(암시,지시,진작,주재등) or 부분영감 c) 유기 영감설:Theory of Dynamical Inspiration(기자의 모든 인간전체를 사용) 평가 : 축자 영감설에는 몇가지 어려운 점이 있다. 오늘의 성서는 모두 4-5세기의 것임으로 필경사들에 의하여 탈자, 오자가 있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또 단계영감설은 어느것이 인언이고 어느것이 신언인지 구별모호하다는 점이다.

5) 성경 무오설 성경에 오류가 없다는 것은 본래 하나님의 말씀에는 오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본이나 번역판이 오류가 없다는 뜻이 아니다. 그러므로 성경 무오설이란 본래 원 저자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에는(The Original Text) 오류가 없다는 뜻이다. 그런데 왕왕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한국어 성경를 가지고 정확 무오하다는 말이 아니다. 그렇다면 번역이란 말을 하지 않아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번역은 항상 그 시대적인 살아있는 말로 재 수정되고 재 번역되어야 하기때문이다.

 

9. 계시론(Revelation)

 

1) 계시란 무엇인가? 계시에 대하여 여러 가지 설명들이 있다. 계시는 하나님이 당신을 들어내는 통로이다. 계시는 우리가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계시가 아니면 우리는 숨겨진 하나님을 깨달아 알 수 없다. 계시에는 일반계시와 특별계시가 있다. 일반 계시-자연만물을 통하여, 역사적 사건을 통하여 우리에게 나타내 보이는 계시 특별 계시-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타내 보이신 계시(성경)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은 당신을 계시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신앙으로만 가능하다. 신앙으로 수용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누구인가를 깨닫게 하였다. 그리고 인간의 구원의 진리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지금은 부분적으로 보고 깨달은 것뿐이다. 부활후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볼 수 있는 날이 있을 것이다.

2) 계시의 올바른 이해 계시는 여러 형태를 취한다. 영계는 환상으로, 몽시로, 입신으로, 신유의 역사로 나타난다. 그러나 그것이 객관적인 성경의 권위 위에 올 수는 없다. 사적이고 독단적인 계시를 성경 위에 놓을 수 없다. 왕왕 여기에서 이단의 대두를 보게된다. 지금도 이것은 계속된다. 벧후3:16 절에도 억지로 계시를 풀다가 실족하지 말라고 하였다. 항상 꾸준히 기도하면서 말씀에 기초한 신앙의 공동체 안에서 우리의 진보를 나타내야 하겠다(딤전 4:14-15).

 

10. 하나님의 존재 증명

 

A.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부모들로부터, 선생님으로부터, 그렇게 배워서 얻은 지식이다. 신 존재에 대한 증명에서 세 가지가 있다. ① 우주론적 증명 ...Platon, Aristoteles (창조와 보존의 능력이 필요함으로) ② 목적론적 증명...A.E.Taylor(스콧트랜드 철학자) (창조는 목적을 수반한다고) 예컨데 곤충들은 애벌레에게 적당한 영양을 공급해주는 특정한 나뭇잎에 알을 낳는다. 산란한 그 곤충은 알이 부화하기 전에 죽는다. 그들의 산란습관은 무의식적이고 전혀 본능적이며 그 곤충 자체에는 아무런 혜택도 없다. 하지만 이것은 자연에는 하나의 목적이 있기 때문이라고 함. 미래를 전망한 적응성(Perspective Adaptation) 이라고....이것은 바로 하나님의 전반적인 목적의 한 부분이라는 것이다. ③ 존재론적 증명...그러나 우리의 이성으로 납득할만한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한 사람은 안셀무스(11세기 캔터베리 대주교)였다. 그의 저서 <프로스로기움>(Proslogium)에서 존재론적으로 증명하고 있다.(Ontoligical Argument). 즉 '더 위대한 어떤 존재도 생각할 수 없는 분'으로 하나님을 정의하였다. 반드시 있어야 할 존재는 어쩌다 우연히 있어야 할 존재보다 우월하다. 그러므로 <더 위대한 어떤 존재도 생가 해 낼 수 없는 하나의 존재>는 반드시 존재하지 않으면 안되므로 하나님은 필연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 ④ 도덕론적 증명...E.Kant...선을 행하는 사람들에게 언제나 보상이 있는 것이 아니고, 악을 행하는 자들에게 언제나 벌이 가해지는 것이 아니다. 고로 도덕율의 실시를 보장받기 위하여 하나님은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B. 하나님의 본성에 대한 정의 ① 하나님은 인격적 계시의 하나님이다. 철학적 사고의 하나님은 초월자요, 영원불변자, 절대자, 부동의 동자, 제일원인자, 순수한 존재, 존재의 근거, 이지만 성경의 나타난 하나님은 인간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인간에게 말씀하시고, 인간의 소원과 간구를 들으시는 하나님이다. ② 하나님은 행동하는 하나님이다. 철학적 사고의 하나님은 의지(will)보다 예지(intellectual)를 강조한다. 그러나 성경의 하나님은 인간의 히노애락에 동참하는 행동하는 하나님이다. ③ 하나님은 존재로서의 하나님이기 보다 <존재하여 가는> 하나님이다. 철학적 사고의 하나님은 이미 완전무결한 존재, 완성된 존재로서의 하나님이지만 성경의 하나님은 지금도 <존재하는 분>으로 나타난다. 역사를 지배하고 흥망성쇄에 가담하여 자신을 들어내는 존재하는 하나님이다. 고로 하나님은 <되어가고 있는 존재>로서 나타난다. C. 하나님의 속성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하여 설명한다. 즉 ①하나님 존재의 속성과 ②하나님 행위의 속성으로 구분한다. 하나님은 어떤분인가? 하나님은 어떻게 행동하시는가? 로 구분하여 설명한다. 1) 하나님은 모든 속성을 무한으로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신이다. 2) 하나님은 완전한 존재이다. 하나님에게는 불완전함이 전혀 없다. 3) 하나님은 절대자, 존재자체, 존재의 근거이다.(He who is 이다) 4) 하나님은 무엇을 필요로 하는 존재가 아니다. 자족적인 존재이다. ⊙ 전통적인 하나님 속성에 대한 이론 1) 사랑으로서의 하나님. (헷세드를 의미함/이스라엘 민족과의 언약불변에서) 2) 영으로서의 하나님.(물질은 시종이 있다 그러나... 영은 모든생명의 근원이라는뜻) 3) 전지(全知=omniscientia), 전능(全能=omnipotentia), 전재(全在=omniprasentia)로서의 하나님. 4) 영원 자로서의 하나님. (영원에 대한 이해) a) 시간 안에 있으면서 무한히 연속되는 것.(일반인의 영원관임) b) 시간과 관계를 가지면서도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 것 (진리.수학공식등) c) 초시간적인 것을 영원이라고 하는 것. 위에 것에서 제일 바른 이해는 b 번이다. 왜냐하면 영원이란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아니하면서 시간과 구체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5) 삼위로 계시는 하나님. a) 신관에는 다신론, 유일신론, 삼위일체 신론이 있다. b) 유일신론은 구약의 신관이라고 한다면 삼위일체신관은 기독교 신학에 의하여 형성된 교리이다. c) 그렇다고 이 둘 사이에 상반된 요소가 있는 것이 아니라 양자가 조화된 신관으로 이해하고 있다. d) 기독교 신학이 믿고 가르치는 신인 야훼신은 한 위(位)(persona)로서 존재한다. 성부, 성자, 성령, 세분이 합하여 삼위일체 신이 형성되는데 그 중 한분인 성부는 한 위로 계신다. 이 위(persona)란 말은 타자와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관계를 가지는 존재라는 뜻이다. e) 기독교의 신은 추상적이고 막연한 신이 아니라 인류 역사와 관계를 갖이고 구체적으로 희비애락에 동참하여 자신의 창조의 목적을 성취하시는 신이다. f) 현대 신학에서는 신의 완전성만 강조한 나머지 위 격을 가지고 우리의 일상생활과 직결되어 있는 신이란 면을 간과하고 말았다. 그 결과 이러한 것을 시정하기 위하여 두 가지 움직임이 있었으니, 하나는 <신의 죽음의 신학>, 다른 하나는 신의 아픔의 신학이었다. 전자가 그런 무 성격적인 신은 현세에 더 필요 없다는 점을 강조한 반면, 후자는 신이 현실 세계와 함께 아픔을 느끼시는 자비와 사랑이 많으신 신이라는 것을 강조하였다.

6) 도덕적 존재로서의 하나님 기독교의 신관은 다른 종교의 신관과는 달리 매우 강한 도덕적 속성을 갖는다. 이것은 신구약 성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본성과 속성에 따라 신학이 그렇게 이해한 것이다. 하나님의 도덕적 속성에는 애(愛) 성(聖) 의(義) 선(善)등이 있다. 철학의 신은 관념적 신이지만 성서에 나타난 하나님은 도덕적 하나님이시다. ① 사랑- 대부분의 종교는 신을 사랑의 신으로 보다 위엄과 권능으로 사람을 지배하고 통치하고 이용하는 신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다. a) 하나님의 사랑은 무한한 사랑이다. b) 하나님의 사랑은 선행적(先行的) 사랑이다. c) 하나님의 사랑은 창조, 선택, 성육신, 십자가를 통하여 나타났다. ② 성(聖)-거룩하다는 말의 희브리어 '카도슈'는 분리를 의미한다. 거룩하다는 것은 다른 존재들과 질적으로 다르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절대 타자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19세기 말부터-20세기초까지 자유주의 신학에서는 하나님의 친근성과 내재성을 주장하였다. 하나님은 인간의 역사 안에 내재하면서 무서운 신이 아니라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강조하였다. ③ 의(義)-의라는 희브리어 '체다카'라는 말로서 헬라어로는 '디카오수네'이다. 의에는 종교적 의(마5:10,롬3:24)와 도덕적 의가 있는데(마6:1), 이 두가지는 인간적 차원에서는 구별할 수 있으나, 하나님은 이 둘을 동시적으로 주관한다. 즉 하나님 앞에서는 이 둘이 하나로 취급된다. ④ 선(善)-사람의 생각에는 두 가지 윤리적 개념이 있다. 선과 악이란 개념이다. 자기 개인과 타인에게 유익이 되고 도움이 되는 것이라면 선이라고 하고, 그 반대일 경우에는 악이라고 한다. 선악은 종교적 대상으로 결부시켜 신에게도 선신이 있고, 악신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은 특이하다. 유일한 신이다. 기독교의 신은 어떤 가치 판단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그와 비교할만한 상대가 없다는 뜻이다. 그는 모든 가치판단을 초월하는 동시에 모든 가치 판단의 원천이 된다.

 

11.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Image of God)

 

A. 일반적인 개념 이해 1) 하나님의 형상이란 개념은 보다 광범위한 뜻을 갖고 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졌기 때문에 양도할 수 없는 권리와 의무를 부여받았다. 고대 세계에서는 오직 통치자만이 신성(神性)을 닮아 지어졌다고 생각하였다. 모든 독재자 군주들이 자기를 우상화 시켜 신의 아들, 내지 신이라고 까지 하였다.(애굽의 바로=Pharoah) 2) 후대에 하나님의 형상의 개념은 서서히 개인 권리의 민주화로 발전하였다.특히 영국의 청교도 운동과 미국의 독립에서 이것은 개인의 권리를 보장하고, 또 억압 정부와 절대 군주에 항거하는 근거를 삼았다. 3) 더 나아가 하나님의 형상의 개념은 경제적, 생태학적 의미도 갖게 되었다. 즉 이것은 인간에게 만물 지배권을 부여한다. 우리 인간에게 자연과 세계를 보호하고 보살핌에 책임과 의무를 주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B. 하나님의 형상이란 말의 의미 1) 형상(Image)과 닮음(Likeness)을 구별하였다.(175년 이레네우스) 2) <형상> 이란 이성(理性)와 자유(自由)를 말한다고...(이레네우스) 3) <닮음> 이란 특별한 은사로서 그것을 통하여 타락이전에 하나님과 초자연적 교제(communion)를 가능케 하였다. 하지만 아담,이브의 타락으로 이 유사성(닮음)은 잃어 버렸으나 지금도 형상만은 간직하고 있다.(타락한 인간이라도 이성과 자유의지는 갖고 있기때문임). 인간에게 결여되어 있고 인간이 갈망하는 것은 이 초자연적 교제하는 은사이다. 4) <형상>과 <닮음>에 있어서 <이레네우스>와 <어거스틴>은 차이가 있었다. 이레네우스=타락시 아직 성숙하지 못한 상태에 있었다고..완전한 인간이 되어가는 과정이 있었다고... 어거스틴=타락 당시에 이미 완전한 상태였다고...그들은 하나님의 형상과 닮음을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육체적,심리적,도덕적,영적인 면에서 완전했다고...고로 그들의 타락은 말할 수 없는 참화(慘禍)였다고... 5) 아퀴나스=이 둘을 종합한 것이 아퀴나스였다.(고전적 카토릭의 견해를 정립한 인물임) 타락이전에 인간은 자연적이며, 동시에 초자연적이었다고... 자연적인 면에서 그들은 이성적 존재였고, 초자연적인 면에서 그들은 은총의 선물(유사점, 닮음)을 지니고 있었다고...마치 이층으로된 집을 비교할수 있는데, <형상>은 1층이요, <닮음>은 2층이었다고...타락으로 2층은 파괴되었으나,1층은 약간 훼손되었을 뿐이라고... 6) 종교 개혁자들의 견해는 아퀴나스와 반대이었다. ① 루터는 형상(Image)과 닮음(Likeness)의 구별을 부인하였다. 창세기 기자는 두말을 동의어(同義語)로 사용하였을 뿐이라고 하였다.(parallelism) ② 인간은 하나의 통합체라고 보았다. 타락시 하나님의 형상을 완전히 잃어 버렸다고. 고로 인간의 이성도 타락하였다고. 전 인간은 하나님 중심이 아니고 자기중심이 되었다고. 7) 현대 신학자들은 중에서 <부르너>가 이레네우스의 이론을 부활시켰다. 인간은 마땅히 하나님께 응답해야 하고,또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느끼면서도 사실상 그렇게 할 수 없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을 잃어 버렸기 때문이라고. <바르트>는 이것에 반대하였다. 형상과 유사성을 분리해야할 아무런 성서적 교의적 이유가 없다고. 루터와 동일시하였다. 하지만 바르트는 창세기의 나머지 부분들을 강조함으로 루터를 훨씬 넘어섰다. 하나님의 형상이란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였다는 것으로서 이것은 각인(各人)이 지닌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과의 관계(사랑)성을 의미한다고. 인간은 사랑에 대한 필요성을 충족시킬 수 있도록 남자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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