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움의 삶 (6)
막 1:6-8
그가 전파하여 이르되 나보다 능력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 나는 굽혀 그의 신발끈을 풀
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었거니와 그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리라.
제자의 삶은 주님과 같은 길을 가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주님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한복음14장6절). 그 길을 따르는 사람들이 제자들입니다. 본문은 예수님의 제자 중 가장 철두철미했던 제자 한 사람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는 세례요한입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 보다 6개월 정도 먼저 태어났습니다. 그에게 주어진 사명은 주의 길을 예비하는 사명이었습니다. 이를테면 예수님 보다 6개월 먼저 와서 길을 준비하는 선발대였고 예비자였고 준비자의 역할을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요한을 가리켜 “여인이 낳은 자 중에 이만한 자가 없다(마태복음11장11절).”고 칭송하였습니다. 세례요한은 현직 제사장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당시 제사장은 최고 지도자였고 고소득층이었습니다. 당시 제사장은 세습제였습니다. 세례요한은 저절로 제사장이 될 수 있었습니다. 요한은 미래와 장래가 보장된 사람입니다. 오늘말로 말하면 그 시대의 기득권자였습니다. 그런데 세례요한은 그 기득권을 다 거부하고 다 버리고 다 내려놓았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야인이 되어 광야로 나가 뜨거운 햇빛 아래서 세례를 베풀고 그 시대를 향하여 회개를 외쳤습니다. 그러다가 목이 마르면 요단강 물을 떠 마시고 날아다니는 메뚜기를 잡아 생식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당시 헤롯왕의 비리를 심각하게 고발하고 책망하였습니다. 그러다 마침내 목이 잘려 순교를 합니다. 이 요한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진정한 신앙인의 모습 그리고 진정한 제자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예수의 제자는 예수 믿어 복을 받고 주일을 지키는 것으로 다가 아닙니다. 제자에게는 제자의 삶이 따로 있습니다.
신앙고백
세례요한은 “그는 보름달처럼 흥하고 나는 그믐달처럼 쇠하여야 하리라(요한복음3장30절).”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의 신발 끈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요한복음1장27절).”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나는 예수만 알기로 작정하였노라(고린도전서2장2절).”고 하였습니다. 이 고백들은 모두 “나는 주님의 제자다, 주님가신 길을 따르겠다.”라는 고백들입니다. 오늘 우리도 주일마다 사도신경을 통해서 신앙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 고백은 “나는 당신을 믿습니다, 나는 당신의 길을 가겠습니다.”라는 선언입니다. 즉 “나는 당신의 제자요 당신의 종입니다.”라는 고백입니다. 우리들이 세례 받을 때에도 신앙을 고백합니다. “이제부터 나는 나의 삶이나 소속을 당신에게 속하기로 작정 합니다.”라는 선언입니다. 오늘 제자들에게는 이런 신앙고백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고백이 자꾸만 불투명해지고 신앙고백을 해도 아주 형식적이고 그마저 곧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결혼식 때에 서약을 합니다. 그때 대답은 아주 힘 있게 합니다. 어떤 젊은이는 그것도 모자라 무릎을 꿇고 당신만을 사랑한다고 고백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서약이 얼마 못가는 것이 문제입니다.
원래 서약은 많은 사람들 앞에서 합니다. 결혼 서약도 많은 하객들 앞에서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하객들이 모두 증인이기 때문입니다. 결혼식 자체도 하나의 서약입니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이제 우리는 부부가 되었습니다.’라는 공포식입니다. 둘이 골방에서 조용히 결혼할 수도 있고 서약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 앞에서 하는 것은 결혼식은 하나의 공포식이기 때문입니다. 일본의 내촌감삼은 예수를 만나고 이제부터는 주님만을 위해서 성결하고 경건하게 말씀대로 살겠다고 각오하고 다짐하였습니다. 그는 그 약속을 더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 친구들과 스승 앞에서 맹세하며 선언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선언도 서약도 중요하지만 문제는 그 서약과 선언이 한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그리고 주님께 하는 서약도 지키지 않습니다. 공산당은 밀실에서 서약을 하여도 그들은 그 서약을 할 때 생명을 내놓고 하고 목숨을 다해 대를 이어 지켜 나갑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의 제자들은 서약은 하는데 형식적으로 하고 지키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진정한 제자들이 드문 것입니다. 세례요한은 주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 모든 기득권을 다 내려놓고 스스로 광야로 나아가 외쳤습니다. “그는 보름달처럼 흥하고 나는 그믐달처럼 쇠하여야 하리라.” “나는 그의 신발 끈 풀기도 감당을 못하겠노라.” 우리에게 이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주일마다 고백할 때 이 심정으로 고백해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같은 길
주님의 제자는 주님과 같은 길을 가는 사람입니다. 주님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길이고 목표이고 목적이십니다. 제자들은 그 목적과 그 진리 그리고 그 길을 가야하는 사람들입니다. 같은 길을 가려면 생각과 목표와 방법이 같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길을 가기 위해서 고집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 길을 가는 데는 쉽지가 않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제시한 길은 한결같이 좁은 길이고 좁은 문이기 때문입니다. 원래 진리의 길은 좁은 길입니다. 넓은 길은 평안하고 재미는 있는데 그런데 그 길의 결국은 멸망의 길입니다. 주님은 그 길을 경계하셨습니다. 오늘 사람들 대부분은 이 넓은 길을 가고 있습니다. 우선 재미가 있고 평안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좁은 길은 가기가 힘듭니다. 절제와 수고와 눈물과 투자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가지 않으려고 합니다. 좁은 길은 외면할 것이 많습니다. 끊을 것도 많고 때로 친구도 바꾸어야 하고 재미도 절제해야 합니다. 제자의 삶은 때로 다 버리고 따라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 길을 가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제자의 삶은 때로 과감히 부정도 해야 하고 고독도 감수해야 합니다. 어떤 목사는 목회를 하려고 큰 뜻을 가지고 신학을 하다가 도중에 결혼을 하게 되는데 부잣집 딸과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여인은 목회가 싫다고 고집하였습니다. 그래도 이 목사는 욕심 때문에 결혼을 하였지만 아내의 반대로 끝내 목회를 못하고 지금까지 어정쩡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때 끊었어야 합니다. 제자는 때로 무섭게 부정하고 끊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나를 따라오려거든 집이나 아내나 부모나 자식이나 형제를 버려야 한다(누가복음14장33절).”고 하였습니다. 실제로 가족을 버리라는 말이 아니라 그것에 집착해서는 이 제자의 길을 갈 수가 없다는 뜻입니다.
세례요한은 현직 제사장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자동적으로 제사장이 보장된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는 과감히 그 안주의 자리를 거부하고 버리고 끊고 광야로 나가 생식하며 그 시대를 향하여 메시지를 선포하였습니다. 장차 오실 예수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 광야의 소리로 외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기적을 행하고 능력을 행하며 권위 있게 가르치는 분이 나타났습니다. 그분이 기다리고 있는 메시야가 아닌가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을 보내 “당신이 오시리라고 예언된 그 분입니까”하고 물었던 것입니다. 요한은 비로소 자기의 역할이 끝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고백하기를 “그는 보름달처럼 흥해야 하겠고 나는 그믐달처럼 쇠하여야 하리라.” “나는 그분의 신발 끈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고 고백하고 제자들에게 말씀하기를 “장차 세상 죄를 지고 갈 저 어린양을 보라(요한복음1장29절).”하고 손가락으로 그를 가르쳤습니다. 그 모습을 마티아스 그뤼네발트 라는 미술가가 “손가락을 중심으로” 그림을 그렸는데 그것이 후에 명화가 되었습니다. 제자는 같은 길을 가야 합니다.
불이익 감수
세례요한은 기다렸던 예수가 오심으로 이제는 소명이 끝나가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이제는 자기를 내 놓고 비워야 할 때가 옴을 알게 되었습니다. 당시 왕 헤롯은 동생의 아내를 빼앗아 살고 있었는데 누구도 말을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세례요한은 통렬하게 헤롯왕을 비판했습니다. 그랬더니 헤롯보다 더 교활했던 사람은 그 아내 헤로디아였습니다. 각고 끝에 무능한 남편을 버리고 이제 권력자와 살고 있는데 요한이 방해를 하고 있습니다. 빨리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백성의 원성이 커지게 생겼습니다. 그래서 연회를 베풀고 딸 살로매에게 춤을 추게 한 후 헤롯으로 하여금 의붓딸의 춤을 보고 흐뭇하도록 만들었습니다. 헤롯이 의붓딸에게 무엇을 원하든지 다 주겠다고 맹세하자 그 의붓딸은 세례요한의 머리를 달라고 요구합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이 목이 달아나 죽은 것입니다. 역사상 한 여인의 춤의 대가로 목이 잘린 사람은 세례요한뿐입니다. 요한은 자신의 목을 내 놓았습니다. 때가 되자 그는 자신의 목을 내 놓았습니다. 그것이 제자의 삶입니다.
예수의 제자는 때로 영광도 박수도 칭찬도 공로도 인정받습니다. 그런데 진정한 예수의 제자의 삶은 세상으로부터 환영받지 못합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한결같이 수난을 받은 것입니다. 바울이 얼마나 수난을 받았습니까. 이것은 오늘도 여전히 그렇습니다. 직장에서 예수 믿는 사람임을 공포하면 그때부터 환대를 받지 못합니다. 사람들이 늘 주시합니다. 주시의 대상이 되는 것이 부담입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비난의 대상이 됩니다. 제자는 그것을 감수해야 합니다. 그 보다 더한 것도 감수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예수의 제자임을 밝히지 않으면 그런 수모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일신상에는 편한데 대신 나는 예수의 제자는 되지 못합니다. 제자는 때로 예수 때문에 불이익도 감수해야 하는 사람입니다. 그것을 두려워하면 제자가 아닙니다.
비움
예수의 제자가 되려면 나 자신을 비워야 할 때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래야 내안에 예수로 가득 채울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나를 비워야 내게 오십니다. 나를 가득 채우면 성령이 내게 오실 이유도 오실 틈도 없어집니다. 내 마음에 내 생각으로 내 욕망으로 가득 채우면 주님이 내게 오실 여백이 없어집니다. 그러면 나는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제자는 자기를 비우고 부정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야 좁은 길 좁은 문을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앙드레 지드의 “좁은 문”을 보면 문이 아주 좁습니다. 그래서 그 문에 들어가려면 한 짐 지고 이고는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둘이 함께 들어 갈 수도 없습니다. 그 문을 들어가려면 다 버려야 합니다. 그래서 좁은 길이고 좁은 문입니다. 제자의 삶은 세상적인 욕망이나 욕심을 다 가지고는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그 모습으로 영성이 유지가 안 됩니다. 다락방에서 제자들이 성령받기 위해 10일 동안 기도하였습니다. 그 시간이 마음을 비우는 시간입니다. 성령은 내 마음, 내 생각, 내 욕망의 창고를 비워야 오십니다. 회개는 내 마음을 비우는 시간입니다. 그런데 이 비우기가 참 힘듭니다. 밤에 잠자리에 들어갈 때는 비우고 들어가야 합니다. 온갖 생각으로 채운채로 한 짐을 지고 잠자리에 들게 되면 잠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잠자는 모습을 보면 대부분 몸을 오그리고 잠을 잡니다. 그것은 마음이 비워지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마음을 비우면 반듯하게 누워서 코를 골며 잠을 자게 됩니다. 비우고 포기하기가 이렇게 힘듭니다. 포기하고 놓으면 쉬운데 놓지 못하니까 힘든 것입니다. 빌라도는 예수를 앞에 세우고 재판을 하였습니다. 그때 빌라도도 욕심을 놓았더라면 그날 판결은 아주 쉬웠을 것입니다. 역사의 오판자가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도 놓지를 못하였습니다. 군중소리를 들어야 하였고 내일의 입지를 먼저 생각해야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릇 판결임을 알면서도 판결하여 결국 예수를 군중의 손에 넘겨주었습니다.
이 비움을 잘한 사람이 바울입니다. 예수를 만나기 전에 바울은 욕망에 사로잡혀 살았습니다. 출세욕에 집착해서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을 무작위로 핍박했습니다. 그는 속에서 욕망이 불타고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을 핍박하는 것을 100% 옳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거기에 학벌, 출신성분, 환경, 지성 등 모두를 갖추었습니다. 무엇 하나 조건이 빠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그 시대 두드러지게 날 뛰었던 것입니다. 그러다 어느 날 예수를 만납니다. 만나고 보니 예수는 진정 하나님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충격을 컸겠습니까. 그래서 아라비아 사막으로 들어가 3년을 칩거했던 것입니다. 두 가지 고민 때문입니다. 하나는 모두가 진실이라는 충격 때문입니다. 알고 보니 모두가 진실이었습니다.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었고 부활도 가르침도 진실이었습니다. 제자들이 다 옳았습니다. 자기만 오해를 한 것입니다. 그래서 충격을 받은 것입니다. 두 번째는 자신을 비우기 위해서 입니다. 타 오르던 욕망도 야망도 출세욕도 다 버려야 하고 다 포기해야 하였습니다. 그렇게 비우는데 시간이 많이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다 비우자 성령이 그에게 충만하게 임하셨던 것입니다. 비우니까 하나님의 영으로 채워진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충실한 제자로 살아간 것입니다. 세례요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장차 출세가 예약된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는 그것을 다 포기하고 광야로 나갔습니다. 그때 요한에게 고민이 없었겠습니까. 그런데 다 비우고 예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고백하기를 “그는 보름달처럼 흥해야 하겠고 나는 그믐달처럼 쇠해야 하리라.” “나는 그분의 신발 끈 풀기도 감당하지 못할 사람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리고 요한은 그때부터 매사에 예수를 앞세웠습니다. “그는 본체이고 나는 그림자다.” “나는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그는 불로 세례를 베풀 것(마 태복음3장11절).”이라고 하였습니다.
제자의 삶은 내 생각의 창고 속에 온통 예수로 채워야 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언제나 하나님을 앞세웠습니다. 그래서 고백하기를 “하나님은 나의 반석이시오 나의 요새시오 나를 건지시는 이시오 내가 피할 바위시오 나의 방패시오 나의 구원을 뿔이시오 나의 산성(시편18편1-2절)”이라고 했습니다. 바울도 언제나 주님을 앞세웠습니다. 그래서 고백하기를 “나는 예수만 알기로 작정하노라.”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베드로도 누군가가 “주님이다”하니까 그 순간 바다로 뛰어 들어갔습니다(요한복음21장7절). 이것은 그의 생각, 마음, 관심에 나는 없고 오직 예수만 가득 차 있기에 가능합니다. 그것이 제자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참 제자입니까. 오늘 우리는 고백도 불분명합니다. 내안에 너무 내 것이 많이 쌓여서 그렇습니다. 내 안에 주님이 임하실 공간이 너무 좁아서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고백이 희미한 것입니다. 내 속에 무엇이 가득 차 있는가가 참 중요합니다. 내 생각 속에 음란으로 가득 차 있으면 매일같이 음란을 찾아다닐 것입니다. 오늘 성희롱이 많고 성폭력이 자꾸 나타나는 것은 그 마음속에 음란이 가득해서 그렇습니다. 내속에 물욕으로 가득 차 있으면 매사 물질을 찾아다닐 것입니다. 그래서 안 되면 사기라도 치고 도둑질이라도 할 것입니다. 오늘은 배고파 도둑질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탐욕 때문에 집요하게 추구하고 안 되면 뺏기라도 하는 것입니다. 만일 내 마음에 영성이 가득하다면 기도하고 말씀을 사모하고 제자의 삶을 살려고 애를 쓸 것입니다. 오늘 제자는 신앙고백이 분명해야 합니다. 주님과 같은 길을 가야 합니다. 가다가 불이익이 주어진다 해도 그것을 감수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자신을 비워야 합니다. 내 내면을 비우면 새 영으로 채워지게 됩니다. 이 비움은 복이고 은혜입니다. 비움 그 후에 영이 충만하게 임하십니다. 그때 나는 진정한 예수의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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