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지도자라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이르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니고데모가 이르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니고데모가 대답하여 이르되 어찌 그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 예수께서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것들을 알지 못하느냐. 요한복음 3장 참 어려운 본문입니다. 이 어려운 본문에 단어 하나 하나가 구약성경의 깊은 울림을 간직하기 때문에, 구약성경에 대한 깊은 이해가 없는 사람은 니고데모와 예수님의 대화가 겉돈다는 느낌을 갖게 됩니다. 그런데 겉도는 느낌이 아니라 굉장히 중요한 대화가 이뤄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을 청소하기 위해서 거룩한 난동을 피우신 이 사건은 공생애 마지막 때에 있었다고 보입니다. 그 이유는 마태복음 26장에서 예수님을 고소하는 자들이 예수님이 한 말, 성전을 허물겠다고 한 그 말을 인용합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을 무너뜨리겠다고 한 말이 예수님을 죽음으로 내모는 고소죄목이 되는 걸 볼 때, 공생애 마지막에 그 사건이 일어났다고 볼 수 있죠.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마태 마가 누가 세 공관복음서에서는 그 사건이 예수님의 공생애 마지막 때에 일어났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추측은 합당하게 맞는 것이고, 니고데모가 찾아온 그 밤도 예수님의 공생애 마지막 때라고 볼 수 있는 것이죠. 그런데 니고데모에게 썼던 칭호를 보면, 아르콘이라는 말과 디다스칼로스이라는 말을 썼습니다. 아르콘이라고 하는 관원이라는 말을 썼고, 10절에 보면 이스라엘 선생, 디다스칼로스입니다. 교훈적인이라는 말을 할 때 영어로 didactic 이라는 말을 쓰죠? 디다스칼로스가 바로 그 어원입니다. 아르콘은 뭡니까? archangel, 아르크가 들어가면 대, 큰 천사, archenemy 하면 대 원수 이런 뜻이 되고, archangel 하면 대천사가 됩니다. arche 하면 머리입니다. 창세기를 헬라어로 말하면 엔 아르케 가 되는 거죠. 요한복음도 엔 아르케, 이 말은 In the beginning, In the head 이런 뜻입니다. 그래서 아르콘은 71명으로 구성된 이스라엘의 사법, 입법, 일종의 자치정치 기구의 한 관원입니다. 로마에 있었던 300명의 원로원과 같은 보수적인 지도자들의 모임입니다. 국회와 대법원을 겸했다고 보면 됩니다. 그 71명 중의 한 명인데, 이름이 니코데모인 걸 볼 때, 니코라는 말은 victories라는 말이고, 데모스는 백성이라는 말이니까 뜻은 victories people 승리한 백성이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그리스말이니까 이 사람은 그리스문화에 찬동한 사람이라고 볼 수 있죠? 대부분 두 개의 이름을 가졌습니다. 그리스 이름, 즉 헬라어 이름과 히브리이름을 가졌는데 이 사람이 니고데모라는 그리스 이름을 가진 걸 볼 때 대세에 순응하는 이스라엘 지도자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디다스칼로스라는 말은 이스라엘 선생인데, 이 말은 씨, you yourself, 2인칭 대명사가 쓰였습니다. 당신은 이스라엘 선생님인데, 씨 에이호 디다스칼로스 투 이스라엘, 씨라는 2인칭 남성단수대명사는 원래 쓰이지 않습니다. 쓰이지 않고, 에이호 디다스칼로스, 그냥 동사만 써도 거기에 인칭과 성수가 표현돼 있기 때문에 인칭대명사를 쓰지 않습니다. 그런데 인칭대명사를 쓸 때는 굉장히 강조할 때만 씁니다. 그래서 씨 에이호 디다스칼로스, 여기서 You are the teacher of Israel, the teacher라는 말을 쓰면 뭐에요? 중세 때, the philosopher 하면, 중세 때 그 철학자하면 아리스토텔레스를 가리키는 말이죠? the 라는 말은 대표단수 알죠? 정통종합영어에 보면 The wales is mammal, 할 때 그 고래는 포유류라는 말이 아니라 무릇 모든 고래는 포유류다, the는 대표단수다 이렇게 배우잖아요. the 디다스칼로스, 당신은 대표적인 이스라엘 선생님이다, 이 사람은 71명의 관원일뿐만 아니라 학식에 있어서 최고봉에 올랐다, 유대교, 예수님 당시에 닫힌 종교였던 유대교, 교양과 가문과 교육으로 단련된 즉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하여서 최고가 된 사람, 디다스칼로스입니다. 디다스칼로스는 닫힌 유대교 안에서 최고였기 때문에 초월 저편에서 쏟아지는 계시의 빛을 받고 깨달음을 갖기에는 매우 불리한 자기 충족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래로부터 쌓아올린 교육 교양 혈통적 우수성 등이 자기를 돋보이게 만들었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 초월 저편에서 오는 새로운 진리에 목마를 가능성이 없는 것이죠. 그러니까 디다스칼로스가 바로 한 세계에서 최고의 경지에 오른, 교육을 통해 자기수양을 통해 최고의 경지에 오른 인물입니다. 문제는 왜 이 사람이 밤에 찾아왔겠습니까? 뉙토스, 밤에 찾아왔습니다. 밤에 찾아온 이유는, 예수님이 낮에 난동을 피우셨잖아요. 예수님이 난동을 피우셨는데 또 율법을 어기고 바리새인 적대감에 먹이를 주는 행동만 했다면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뭐라고 생각하면 됩니까? 율법파괴자이고 신성모독자이고 이렇게 생각하면 되는데, 이 사람이 헷갈렸던 것은 성전을 거룩하게 도발하시고 안식일 율법도 어기지 않는 것처럼 보이시는 이 분이 performed, 이적을 너무 많이 행합니다. miracle, 표적을 너무 많이 행하니까, 2장 23절 ‘유월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니 많은 사람이 그의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의 이름을 믿었으나’ 예수가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 나사렛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믿었으나 예수는 이런 표적을 보고 믿는 대중들의 믿음에 자기 몸을 의탁하지 않았고, 표적을 보고 사람들 마음속에 있는 하나의 시대의 아젠다, 즉 자기를 임금 삼아서 정치적 지도자 삼아서 로마제국과 결승전을 치르게 만들려는 정치적 함정이 있는, 정치적 덫이 있는 열광과 지지와 추종인 걸 알았기 때문에, ‘예수는 그의 몸을 그들에게 의탁하지 아니하셨으니’ 이 말은 무엇입니까? 표적을 보고 믿는 사람들은 예수를 로마제국을 이스라엘 땅에서 몰아내는 모세적인 영도자로 예수 자신을 오해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예수님은 무얼 하러 왔습니까? 로마제국의 군대를 이스라엘 영토에서 추방하고 그 아래 토착 왕조, 다윗왕조를 세우러 오신 분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 안에 와 있는 로마제국, 이스라엘 백성 안에 와 있는 우상을 몰아내고 이스라엘 각인의 심령에 성령의 내주를 매개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각각의 심령에 성령 충만하도록 성령으로 세례를 주러 오신 분이지, 1장 33절입니다. 성령으로 세례를 주러 오신 그 분이 로마제국의 군대를 몰아낸 것으로, 로마제국의 군대를 몰아내면 대개 누가 옵니까? 토착 유력자들의 왕조가 들어서겠죠? 예수님은 로마제국의 군사력을 이스라엘 땅에서 추방하고 그 대신에 이스라엘의 토착 세습 왕조가 들어서는 게 전혀 하나님 나라 운동의 전진이 아닌 것을 아셨기 때문에, 이스라엘 사람들의 각인 속에 와 있는 노예근성, 죄, 대세순응주의, 배금주의, 물신숭배, 형제자매 차별주의, 이런 죄악들을 몰아내기 위해서 성령으로 세례를 주러 오셨죠? 성령으로 세례를 주러 오셨단 말은 이스라엘 민족의 집단적 계약 갱신, 언약갱신, 이스라엘 백성과 하나님 사이의 헐거워진 언약을 다시 한 번 갱신하여, 다시 한 번 언약적 결속감을 강하게 해주는 것, 이게 예수님의 뜻이었거든요. 여러분, 백성사이, 국민구성원 사이에 언약 공동체적 결속감이 강하다면 가난의 문제가 발생할 때 어떻게 될까요? 7남 3녀가 사는 대가족에 만약 한 형제가 못 산다면 어떻게 하던가요? 못 사는 형제를 나머지 형제가 어떻게 돌봐요? 추석 때마다 보면 대개 돕죠? 그게 형제간입니다. 한 형제가 못살 때, 심지어 동기생들도 장신대 신대원 84기 중 누가 못 산다 그러면 동기생들이 돈을 내 돕습니다. 목사님들도 그렇게 합니다. 어떤 목사가 정당하게 목회를 하다 가난하게 됐다? 그러면 많은 돈이 들어옵니다. 많은 돈이 아니고 죽지 않을 만큼 돈이 들어옵니다. 부자가 될 만큼 들어온다는 뜻이 아니라, 그건 언약공동체의 결속감이거든요. 저도 형제가 많지만 내가 일차적으로 느끼는 책임과 경계선 안에 누가 잘 못살면 그건 송두리째 부담을 떠안아야 한다는 게 내 안에 있는 원천적인 상식이거든요. 교회가 그런 겁니다. 우리 가운데 누가 와서 탁 쓰러졌다, 그가 교회 등록교인이다, 쓰러진 그 사람은 공동체적 사랑의 대상이 됩니다. 그래서 등록이 참 중요한 겁니다. 등록이라는 말은 세례 받은 교우공동체, 성만찬 나눈 공동체에 그가 등록을 했다, 그러면 그때부터 법적으로 교회 상식으로 볼 때, 돌봄의 대상이 됩니다. 학교도 참 웃깁니다. 출장신고를 하고 가서 다치면 엄청난 보험금이 나오는데, 몰래 가서 다치면 전혀 돈이 안 나옵니다. 언약공동체를 확인하고 가는 사람, 그게 참 희한합니다. 이번에 인하대학교 학생들이 몰래 갔기 때문에 돈을 한 푼도 지원 못 받았습니다. 인하대학교 발명동아리 아이들이 춘천에 갔는데 학생처에 신고를 안 하고 자기들끼리 몰래 갔습니다. 그러니까 학교에 보고가 안 되었기 때문에 인하대학교랑 보험회사랑 맺은 수혜혜택에서 다 제외됐습니다. 그래서 꼭 모든 동아리가 갈 때는 반드시 등록을 하라고 숭실대학교에서는 교육을 합니다. 특히 춘천 펜션에 가는 사람들은 생명보험까지 드는 게 낫습니다. 언약공동체라는 게 그런 겁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개개인이 형제우애적 언약을 회복하는 것이야말로 시내산 기슭의 감격, 광야시대의 감격, 모세시대의 감격, 엘리야 시대의 감격을 회복하는 것이고, 이것은 최강로마를 이길 수 있는 군사력이라고 본 것입니다. 형제자매끼리 우애가 튼튼한 것이야말로 로마 제10군단, 벳세다에 와 있는 로마 제10군단, 강력하고 중무장된 로마보병보다 더 센 힘은 형제자매끼리 신실한 사랑으로 결속돼 있는 것, 군대보다 더 강한 것이라고 본 예수님입니다. 이런 예수님은 이스라엘 민족의 계약 공동체의 중심이 돼야 할 성전을 깨끗하게 청소하여 성전이 function, 제 기능을 하도록 돌보아 주시고 이스라엘 백성을 돌보는, 참새와 제비 같이 연약한 지체들을 돌보는 자비심의 본산이 되도록 성전을 고치도록 한 겁니다. 만민이 기도하는 집, 이 말은 무엇이에요? 내 아버지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 가장 멀어진 자, 땅 끝에서 추방되고 버려진 그 자마저도 이곳에 와서, 아버지 내 사연은 이렇습니다, 하소연 할 수 있는 그곳이 성전이란 말이에요. 그런 성전을 정결케했다는 말은 무엇이죠? 내가 부유하게 사는데 내 이웃이 여기 성전에 와서 기도를 합니다. 내가 예루살렘 산 1번지에 펜션과 빌라 엄청 좋은 집에 사는데 저 성전에 와서, 모레셋 가드 시글랏, 이런 지방민들이 와서 하나님 못 살겠다고 소리치면 부자인 내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못 살죠. 뭐할 때까지? 그들의 아우성이 그칠 때까지 내 재산은 전부 그들을 돕는 데 가야 되겠죠? 이것이 성전의 형평기능, 사회경제적 형평작업을 하는 것이 성전입니다. 성전이 부익부 빈익빈을 영구적으로 정당화하며 빈부격차와 인간의 비참한 상황을 하나님 이름으로 정당화해주면 그 성전은 파괴되어야 할 성전이죠. 예수님이 볼 때 성전은 빈부격차를 정당화하고 이방인과 야합한 이스라엘의 귀족층과 상류층들이 갈릴리 농민들을 못 살게 구는 악질적인 착취체제라고 보았어요. 그 착취체제의 배후에 성전이 있다고 본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성전을 부순 게 아니라 이스라엘 언약공동체를 산산조각 낸 파괴적인 빈부격차와 양극화 그 체제를 부순 것이죠. 그걸 정당화하는 성직자들의 본거지를 부셨단 말, 형제자매를 못 살게 굴고 형제자매를 노예처럼 부려 먹는 이 악한 세상을 예수님은 도발하신 겁니다. 여기서 중요합니다. 우리가 만일 성전 청소하는 일만 하고 아무 것도 안하고 아무런 표적을 베풀지 못하면 우리는 바로 죽습니다. 예수님은 안 죽은 이유가 그렇게도 하시면서 표적을 베풀었기 때문에, 강력한 개인기라는 히든카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표적을 행하니까 사람들을 헷갈리게 한 겁니다. 그래서 밤에 3장 1절에 많이 헷갈려하는 이런 뜻이 들어가 있습니다. 많이 헷갈려하는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헬라적 교양이 많은 사람이 밤에, 괄호하고, 낮에는 부끄러워서 못 찾아옴, 밤에 찾아와서 성전을 청소하는 난동사건과 이 표적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라고 질문을 한 겁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 당신께서는 성전을 훼방하시고 성전을 도발하신 이 사건은 꼭 불량배 폭도 같은 점이 있습니다, 신성 모독적 언동까지 보입니다, 성전을 허물어뜨리겠다는 게 말이 됩니까? 그런데 당신에게 그런 면모도 보이지만 진짜 저를 곤혹스럽게 만드는 것은 이것입니다, 당신이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모세급 엘리야급 예언자적 표적을 행합니다. 이 간극을 어떻게 메워야 할까요? 당신은 정녕 누구십니까? 이렇게 물어봅니다. 당신은 정녕 누구십니까? 성전을 훼방하고 율법을 어기고 안식일을 범하는 당신은 신성모독자입니까?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으면 행할 수 없는 표적을 행하는 당신은 진정 예언자입니까? 누구입니까? 3장 2절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이르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이때 선생, 똑같은 말이 디다스칼로스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을 예언자라 보지도 않고 하늘에서 온, 하나님으로부터 온 선생, 신적 권위를 가진 선생, 랍비 또는 디다스칼로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니고데모에게 한 말이 디다스칼로스입니다. 예수님과 바리새인 니고데모는 동급입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를 향해서 디다스칼로스라는 말을 썼고, 바리새인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하늘에서 내려온 디다스칼로스, 그런데 하늘에서 내려온 디다스칼로스를 믿음으로 영접하면 될 텐데 왜 영접하지 못하죠? 바리새인 니고데모가 속한 체제는 성전을 정점으로 하는 자기수양과 율법적 수련의 종교 그리고 인간적 교육적인 배경을 튼튼히 가지고 아래로부터 제공된 교육의 혜택을 듬뿍 받은 자들의 종교죠? 그렇게 혈통좋고 가문 좋은 집안에서 좋은 교육을 받아서 71명에 든 닫힌 유대교 종교 안에서 최고봉에 오른 그 자는 예수님을 하늘로부터 온 선생님이라고 만일에 믿었다면 그렇게 해피엔딩으로 끝나야 합니다. 그가 속했던 체제를 떠나면 됩니다. 그런데 그가 떠나지 못했던 이유는 그는 이스라엘의 최고봉으로써 아르콘으로써 디다스칼로스로써 자기가 누리는 존경과 신망과 리더십을 송두리째 잃어버릴 수 있기 때문에 떠나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는 밤에 옵니다. 만일 낮에 왔다면 스캔들이 되겠죠? 예루살렘 신문 일면에 나오겠죠. 니고데모 예수께 무릎을 꿇다, 그래서 니고데모와 예수님의 연합정권 탄생하는가? 이렇게 나옵니다. 니고데모는 밤에 와서 예수님께 이런 딜레마를 물었더니, 3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예수님은 지금 자기가 하나님 나라라고 주장하는 거죠. 예수님이 지금 하는 것은 무엇이죠?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통치하기 시작하는 증거라고 보는 거죠. 예수님의 모든 사역은 무엇이죠? 예수님의 모든 표적사역, 예수님이 성전을 청소하는 건 모두 뭐죠? 이스라엘 언약 백성들 사이에 오셔서 당신의 주권적인 통치와 다스림을 실현하고 있는 중이라는 거죠. ‘거듭나지 아니하면’ 이것이 중요합니다. 기노마이 동사, 거듭난다는 말은 위로부터 나지 않음이라는 뜻입니다. 이사야 32장 15-16절 읽어보세요. ‘마침내 위에서부터 영을 우리에게 부어 주시리니 광야가 아름다운 밭이 되며 아름다운 밭을 숲으로 여기게 되리라 그 때에 정의가 광야에 거하며 공의가 아름다운 밭에 거하리니’ 위로부터 오는 성령으로 이스라엘 각각의 사람들 마음이 바뀌고, 이스라엘이 집단적 갱신을 경험할 것이라는 대표적인 성경구절이 다섯 가지 정도 있습니다. 이런 것이 성경 안에 있다는 것을 왜 니고데모는 못 봤을까요? 지금 우리는 다 보는데 왜 니고데모는 이스라엘 선생님이라는 그가, 구약성경에 달통한 그가 왜 위로부터 초월적인 하나님이 보내신 성령으로 이스라엘 개개인과 집단이 갱샌되어 하나님께 언약적 재결속감을 느끼는 그런 사태가 올 것을 왜 몰랐을까요? 이스라엘 선생인 그가 왜? 거듭난다는 말은 위로부터 태어난다는 말입니다. 괄호하고 위로부터 태어난다는 말은 6절에 보면 물과 성령으로 태어난다는 말과 똑같습니다. 물과 성령으로 태어난다는 말과 위로부터 태어난다는 말은 똑같습니다. 물은 곧 성령을 가리킵니다. 물 곧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말은 위로부터 태어난다, Born again은 born from above, 위로부터 태어난다, 위로부터 태어난다는 말은 이사야 32장 15절, 앞으로 인용하게 될 성경구절에 의하면, 성령으로 그 심령이 갱신되는 걸 의미합니다. 적어 놓으십시오. 이사야 32장 15절, 에스겔 36장 25절 26절, 예레미야 31장 31-34절, 요엘서 2장 28-32절, 에스겔서 37장 전체, 이 다섯 구절이 성령으로 각각의 개인과 집단 이스라엘이 완전히 갱신될 것, 위로부터 거듭난다는 이야기가 이 다섯 구절입니다. 이 다섯군데 성경구절은 많은 성경구절 중에서도 거듭난다, 즉 성령으로 이스라엘 민족이 각각 거듭나서 언약 재갱신을 하게 된다는 말이 다 나옵니다. 이 외에도 너무 많습니다. 많은데 우선 다섯군데만 말씀드린 겁니다. 중간 요약하면, 거듭난다는 말은 6절에 의하면, 물과 성령으로 난다, 물과 성령할 때, 카이란 말, 히드로스 카이 프뉴마토스 할 때, 카이는 that is to say, 이런 뜻입니다. and 등위접속사, conjunctive 아닙니다. 카이는 and, 물과 성령으로 할 때, 물 곧 성령으로, 이런 뜻이에요. 위로 거듭난다는 말의 어원은 위로부터 난다, born from above 라는 뜻입니다. born from above할 때 above는 무엇을 가리킵니까? 초월적인 하나님의 강권적인 성령으로, 이런 뜻입니다. 성령의 바람을 맞고 성령의 바람을 쐬고, 그래서 우리 예수님께서 3장 8절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이것은 정확하게 에스겔서 37장을 암시합니다.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죽음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아나게 하라 하셨다’ 사방에서 불어온 바람의 이야기 에스겔 37장이죠. 이 내용을 왜 몰랐을까? 그 말은 한 번 닫힌 종교의 체제에 갇혀 버리면 나머지 성경구절이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강력한 군사적 메시야에 관한 성경구절은 시편 2편과 솔로몬의 시편 18편, 외경 솔로몬시편 18편과 시편 2편만이 강력한 군사적 메시야, 정복군주, 알렉산더 대왕급 메시아에 관한 예언입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를 강력하게 잡고 나니까 이사야 53장 같은 이런 본문이 오실 메시아에 관한 본문으로 보이질 않는 겁니다. 도살장에 끌려가 죽는 어린 양과 같은 이 연약한 자는 메시아에 관한 성경구절로 안 보인 겁니다. 무엇때문에요? 우리가 캘비니즘에 빠지면 큰일 납니다. 웨슬리즘에 빠지면 큰일 나요. 지금 우리 한국에 너무 어리석은 사람이 캘빈을 신격화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캘빈을 성경수준으로 올리는 사람이 있어요. 너무 어리석은 짓입니다. 캘빈의 글은 성경이 아닙니다. 많은 오류가 있습니다. 웨슬리도 마찬가지고, 오류와 한계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오류와 불충분이 있습니다. 부족함이 있습니다. 그런 캘빈과 웨슬리 등을 신격화시키고 정경화시켜서 캘빈파들은 다 모여라, 이렇게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을 분열시킬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여러분에게는 이런 가능성이 없기 때문에 넘어가고요. 위로부터 거듭난다는 말은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겁니다. 그러면 누가 이 성령을 받습니까? 하나님의 신적 임의성에 달려 있습니다. 여기가 참 중요합니다. 이것이 제가 풀지 못하는 미스테리입니다. 성령 충만을 받고 예수를 믿는 것은 신적임의성에 달려 있습니다. 한 번 보십시오. 어떤 사람은 성령의 바람을 맞고 가지와 뿌리가 흔들리고 줄기가 흔들리고 세차게 갱신을 경험하지만 어떤 사람은 성령을 받지도 못하고 이해도 못하고 감도 잡지 못합니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방향을 알 수 없는 바람에게 맞은 것처럼 내가 인간적으로 추적 가능한 교육의 결과가 아니라 성령의 역사는 신적임의성과 초월성 때문에 내가 누구의 설교를 통해 성령을 받았다, 이렇게 말할 수 없고 내가 어느 시점에 성령을 받았다, 내가 장신대 가서 성령 받았다, 아차산 느티나무 밑에서 성령 받았다, 이게 안 된다는 말이에요. 왜? 신적임의성과 불가의성, 실제로 성령이 언제부터 내게 불었는지 몰라요. 제가 감을 잡기로 저한테는 79년 5월부터 많이 분 것 같습니다. 그때는 영감의 바람이 청년 20대 때 계속 불었습니다. 그때는 제 생각과 세계관이 막 바뀌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고등학교 2학년 때 강한 전도를 받았습니다. 그때는 제가 신앙을 가질까 말까하고 교회를 다녔습니다. 그때는 믿으려고 다닌 게 아니라 무얼 믿는가를 알기 위해서 다녔기 때문에 제가 아니었습니다. 가만히 보면 그전에도 어렸을 때 크리스마스 때 따라 다닌 것도 이리저리 다녔습니다. 성령의 임의성, 신적 임의성입니다. 제가 여러분을 모아 놓고 설교를 해도 제가 여러분에게 다 구원을 약속할 수 있는 상태가 못 됩니다. 절대로 인간 목사나 교사가 구원해줄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습니다. 너무 놀랍고, 왜 둘 중의 한 사람만 거듭날까요? 저는 풀 수 없는 신비입니다. 왜 소수만이 거듭나고 나머지 절대다수는 왜 전부 다 바람에 나는 겨처럼 가버렸을까요? 지금 제가 돌이켜보면 12년 동안 캠퍼스 ministry 하면서 만난 사람 너무 많습니다. 너무 많은 사람이 제 강의를 듣고 1년 2년 3년 한 달 그렇게 만났지만 그 사람이 다 낳고 결실을 맺은 것이 아니라 실제로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습니다. 요한복음 1장 12-13절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예수님 당시의 니고데모는 혈통을 우선시했거든요. 혈통과 가문과 교육적 배경이 이스라엘 지도층을 구성했거든요. 혈통과 가문이 성전 제사장을 다 채웠거든요. 혈통과 가문과 인간의 유적으로 모든 이스라엘 리더십이 다 채워졌거든요. 예수님은 성령의 임의성을 강조함으로써 혈통기득권, 가문기득권, 학벌기득권, 교육기득권, 특별히 예루살렘 지역기득권을 송두리째 부정한 것입니다. 너무 신비한 겁니다. 위로부터 거듭난다는 약속은 성경에 너무 많이 있습니다. 성령으로만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이 거듭난다는 건 분명히 있고 새 언약백성이 된다는 게 나오고 성령 받고 하나님께 순종할 능력이 생긴다는 게 분명히 있습니다. 에스겔 36장 25-26절 이것만 읽으면 다섯 개 대표 본문 구절 다 읽은 거예요. 평소에 에스겔을 못 찾으니까 양진일 목사밖에 못 찾잖아요. 실제로 여러분이 에스겔을 평소에 안 읽어보죠? 우리 가향형제자매들 성경지식이 거의 다른 교회랑 비슷한지 상당히 영적으로 총기가 많은지, 여러분이 영적 총기가 많은 것처럼 보였어요. 순수해 보이기는 하는데 똑똑해보이지는 않아요. 성경 말씀을 깊이 읽고 지적으로 파고들고 굉장히 영적으로 예민한 사무엘 같은 영적 총기는 안 보여요. 무교병 같은 순결은 보이는데, 그 말은 뭡니까? 간신히 1인분 신앙생활은 할 수 있지만 이 세상에 대해서 공세적 신앙생활을 하려면 지성과 영성이 둘 다 비슷하게 자라야 합니다. 여러분이 하나님 말씀을 사랑하여 하나님 진짜 사랑하는 건 말씀을 사랑하는 건데, 이 말씀 사랑이 여러분에게 그렇게 많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제가 대부분 청년대학부에 가면 하나도 안 느껴집니다. 여러분이 그걸 어떻게 개별적으로, 경건계획 보니까 성경 많이 읽겠단 사람은 거의 없던데, 대부분 그냥 단편적으로 소유하려고 하지 총체적으로 성경을 읽고 구원의 불길에 자기를 새롭게 태워서 정화하겠다는 야심찬 비전이 좀 모자란 것 같아요. 에스겔서를 이렇게 못 찾는 걸 보면, 오늘 느꼈습니다. 양진일 목사처럼 바로 찾아야죠. 찾지 말고 암송을 해야죠. 에스겔 36장 25절 26절은 바로 암송해야지 찾아 읽을 구절은 아니죠. 같이 읽겠습니다. ‘맑은 물을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하게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 숭배에서 너희를 정결하게 할 것이며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이 영이 바로 바람입니다. 영이란 말은 바람과 똑같은 말입니다. 바람도 되고 루하흐는 바람이면서 동시에 영입니다. 그래서 바람이 어디서 부는지 모르듯이 영이 어디서 부는지 모릅니다. 에스겔 37장이 바람과 영이 interchangeble 서로 상호이용되는 것, 영으로 되고 바람으로 된다는 것이 에스겔 37장이죠. 거듭났다는 말은 에스겔서 36장과 37장 undeniable, 부인할 수 없을 정도로 분명히 나타납니다. 그런데 이 부인할 수 없을 정도로 분명히 나타난 위로부터 거듭나는 것,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 물과 성령으로 정확하게 거듭났죠? 거듭나는 걸 모른다, 누가? 니고데모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의 특징은 비약적인 능력에 사로잡힙니다. 하나님의 능력에 사로잡혀서 인생관이 바뀌고 재능은 바뀌지 않지만 인생관이 바뀌어요. 바둑을 정말 좋아했던 제가 성령 받고 나서 바둑을 두지 않습니다. 지금도 바둑을 두고 싶은 마음이 가끔 듭니다. 바둑 한 판 두었으면, 그런데 제가 하나님 말씀에 창영돼서 바둑을 끊었습니다. 서예가 제 특기입니다. 1필 2지, 큰 묵과 벼루가 우리 집에 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많이 들기 때문에 저는 그것도 버렸습니다. 그걸 버리고 저는 하나님 말씀에 창영했습니다. 저는 20대 때 임해당의 바둑, 그걸 버렸습니다. 조선일보 신문만 보면 항상 바둑 기보를 보면서 내 머릿속에는 항상 누워잘 때마다 화투장이 들어온 게 아니라 바둑판이 들어옵니다. 그게 제 상태입니다. 바둑과 서예 등 제가 좋아하는 많은 것을 버렸습니다. 낭만적인 연애를 해보고 싶다, 그걸 예수 믿고 나서 버렸습니다. 그건 나한테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부자가 되어서 떵떵 거리고 살겠다, 가나난 사람들을 잊어버리면서 내가 홀로 안전하게 살겠다, 저는 그 꿈을 버렸습니다. 나는 안전하게 살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습니다. 이 세상 모두가 불안전하게 살고 있기 때문에 내게 일정정도 불안전한 요소가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야 중보자가 되기 때문에, 너무 오래 살고 싶지 않습니다. 대부분이 7,80대 죽는데 그때 죽어야지, 대부분이 일찍 죽는데 후배들보다 30년 오래 살면서 돌아다니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제가 부지런함은 하나도 안 바뀌었습니다. 부지런함 성실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내가 많이 공부했던 것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성령 충만하고 위로부터 거듭나면 혈통과 육정의 비즈니스에는 더 이상, 대학교 동창 고등학교 동창, 혈통과 육정과 본토 친척 아비집은 제게 아무 상관 없습니다. 오직 보편적인 이웃 사랑, 하나님 사랑, 전 세계 만민이 어떻게 고루 우애롭게 살 것인가? 사자와 어린 양이 어떻게 살 것인가? 이런 것이 저의 모든 지향점이 되고 모든 관심사가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저의 전공이 돼버렸습니다. 영문학이 제 전공이 아니고 신학도 제 전공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가 제 메인 비즈니스가 되었습니다. 야러분, 진짜 거듭나면 세 가지가 나타납니다. 성령의 열매, 성령의 은사, 성령 충만, 성령의 은사는 성령의 충만한 상태를 6개월-1년이상 계속 경험하면 내가 어떤 일에 적합한지 개성이 뚜렷이 드러나고 나의 잠재적 은사가 뚜렷이 드러납니다. 성령의 역사를 2,3년 이상 경험하면 충성과 온유와 양선과 절제, 성령의 열매가 인격으로 나타납니다. 저 사람은 이런 사람이라는 네임이 정해집니다. 충성스런 사람, 온유한 사람, 성령 충만한 율법의 요구를 이룰 수 있는, 순종할 수 있는 능력이 항상 가득 차 있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하고 싶은 마음 상태가 계속 유지돼 있는 것이 성령 충만입니다. 이것 외에는 없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살면 재미 없을까? 엄청 재미있습니다. 나름 재미있습니다. 너무 긴박하기 때문에, 내 인생 자체가 드라마고 살아 있는 성공스토리고, 하나님의 감동스토리고 구원 이야기이기 때문에 내 인생 주변에 있는 사람까지도 이 감동에 영향을 받게 됩니다. 여러 사람을 구원하게 됩니다. 이런 구원의 감동 속에 들어온 사람들은 만지자마자 구원이 번지고 그렇게 됩니다. 제가 제 주변 사람에게 구원을 전합니다. 이게 바로 성령 충만한 사람의 특징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밤과 결별하셔야 합니다. 특히 여러분은 새벽기도에 나와야 하고, 밤과 결별하고, 20대 30대를 새벽에 제단을 쌓지 않으면 안 됩니다. 특정 체질상, 사상의학으로 볼 때 새벽에 일어날 때 당신은 일찍 죽는다, 이런 말을 듣는 사람은 새벽기도 안 해도 되지만, 그렇지 않은 청년은 여호수아처럼 새벽에 일어나서 밤의 문화와 결별해야 합니다. 이 시대와 결별해야 합니다. 잡다한 수다와 결별하고 말씀에 깊이가 있어야, 그래야 여러분이 2,30대 때 어떤 일에 적합한지를 아는 성령의 은사가 나타나고 성령 충만함의 결과 열매가 나타나는데, 내가 무슨 일을 해야 할지 아직도 지향하지 못한다는 말은 성령이 여러분을 충분히 individualization, 개성화를 시켜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성령충만하면 개성이 뚜렷하게 드러나면서 일치가 잘 됩니다. 이것이 성령 충만입니다. 그런데 성령 충만하지 않은 공동체생활이나 성령충만하지 않은 교회생활은 개성이 다 없어지고 획일화됩니다. 참된 공동체는 개성화와 일치감이 동시에 증가합니다. 성령의 은사가 발현되면 가향교회에 소속된 소속감이 독특하게 발휘됩니다. 내가 이 교회에서 해야 할 일이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성령 충만의 결과, 내가 가향공동체의 속한 소속감이 내가 개별적으로 기여할 느낌이 확 드러나면서 내가 이 일에 적합한 사람이구나, 이걸 깨닫게 됩니다. 성령 충만함은 뭡니까? 저 자매님은 저렇게 안정된 사람이었어? 형제자매가 서로에 대해서 허물을 벗은 것처럼 새롭게 보이면서, 아이고 저분이 나의 배필이구나, 이런 느낌이 듭니다. 물론 상호 느낌이 듭니다. 지금은 여러분이 성령 충만한 아름다움으로 옛 허물을 벗지 못했기 때문에 제가 보기엔 너무나 아름다운 남녀들이 서로의 장점을 발견하지 못하고, 계속 내 님은 어디야, 하면서 엉뚱한 데를 쳐다봅니다. 성령충만하여 아름다워 지는 방법, 열매를 맺는 방법, 그건 인간의 값어치를 우주적 보배로 만들어버립니다. 성령충만은 우주적 보배의 값어치입니다. 여기에 한 번 도전해 봐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성령의 역사가 신적 임의성을 따라 불기 때문에 제가 여러분에게 성령 훅 불어준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다만 기도할 뿐입니다. 다만 한 가지 확신은 사도행전 2장에서 오순절 성령이 충만하게 역사했을 때 모든 사람위에 각각 성령이 그 위에 머물러 있는 역사가 불가능은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또한 기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거듭나는 인생 최대의 신비에 이르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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