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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인 명설교편◑/이정익목사 명설교(385편)

비정한 탕자 (2)

by 【고동엽】 2022. 1. 12.

비정한 탕자 (2)

 

 

 

                                      15:25-32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이

 

                        왔을 때에 풍악과 춤추는 소리를 듣고 한종

 

                        을 불러 이 무슨 소리인가 물은대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건강한 그를 다시 맞아들이게 됨으로 인하

 

                        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지난 주일에는 탕자 이야기를 말씀드렸습니다. 집을 나간 작은 아들이 나가서 방탕하고 재산을 탕진하고 온갖 고난의 삶을 살다가 마침내 몸에 병까지 들어 결국 실패하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렇게 돌아온 아들을 향한 아버지는 변함없이 아들을 받아들이고 큰 잔치를 배설해 축하해 주었습니다. 아버지는 자식 앞에서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동네사람들 앞에서 체면도 자존심도 부끄러움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아들이 집에 돌아온 것만으로 만족했습니다. 그래서 살진 송아지를 잡고 동네 사람들을 불러 큰 잔치를 배설하였습니다. 이것이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철없는 탕자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오늘 읽은 본문은 큰 아들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성경말씀을 그대로 보면 큰 아들은 아버지에게 아주 착실한 아들로 보입니다. 작은 아들이 아버지 속을 썩일 때 큰 아들은 묵묵히 농사일을 했습니다. 작은 아들이 집을 나가겠다고 했을 때 큰 아들은 조금도 흔들림 없이 아버지 속도 썩히지 않고 열심히 일하고 곁에서 아버지를 돌보아 드리는 효자로 나타납니다. 아버지에게 큰 아들은 듬직한 아들이었습니다. 이런 큰 아들 때문에 작은 아들이 속을 썩일 때 아버지는 큰 위로가 되었을 것입니다. 큰 아들은 역시 아들다움이 있습니다. 큰 아들은 어딘지 모르게 책임감이 있고 의젓함이 있고 부모마음을 헤아리는 심성이 있고 책임감도 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은 “장자는 내 것”이라고 하신 것은 아마 이런 점 때문일 것입니다. 통계로 보면 큰 아들이 공부도 잘하고 생각도 깊다고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작은 아들은 어딘지 모르게 막내기질이 있습니다. 책임감이 결여되고 신중하지 못하고 이기적이고 지극히 자기본위입니다. 맏자식은 용돈을 주면 아끼고 절약하고 적금부터 하고 숨겨 놓는 기질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주머니는 언제나 넉넉하고 부자입니다. 그런데 막내는 용돈을 주면 그날로 아낌없이 다 써버립니다. 철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첫 열매와 첫 새끼와 첫 자식은 내 것이라고 강조하신 데는 이런 뜻이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작은 아들이 집을 나가 탕자로 살다가 마침내 집으로 돌아옵니다. 재산을 나누어 주자마자 가지고 멀리 떠나가 다 허비하고 병까지 들고 철저하게 실패자가 되어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를 부끄럽게 했고 망신을 주고 종들 보기에 이웃 사람들 보기에 창피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망가진 몸으로 집에 돌아왔습니다. 그래도 아버지는 마다하지 않고 그 아들을 받아들이고 잔치까지 베풀었습니다. 오늘은 그런 모습에 맏아들이 어떻게 대처하는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 큰 아들은 정말 큰 아들 노릇을 다 하였는가? 정말 큰 아들은 탕자가 아니었는가? 본문에 나오는 큰 아들은 어떤 아들이었는가? 이 큰 아들은 내게 어떤 메시지를 주고 있는가를 한번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이 큰 아들도 역시 탕자였습니다. 작은 아들이 철없는 탕자였다면 큰 아들은 비정한 탕자였습니다. 이 큰 아들이 비정한 탕자였다는 증거가 본문에 몇 가지로 나타나 있습니다.

 

 

 

 

무관심

 

 

 

 

동생이 아버지에게 돈을 내 놓으라고 할 때 이 형은 아무 소리도 안했습니다. 여기 작은 아들은 참 당돌했습니다. 아버지에게 막무가내로 돈을 내 놓으라고 눈을 부라리며 억지를 부릴 때 그때 아버지는 쩔쩔 맸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꼼짝을 못하고 재산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동생이 아버지에게 그렇게 무례하게 행동하는데도 큰 아들은 아무 말도 안했습니다. 큰 아들이면 그때 쫒아가 동생의 따귀라도 때려야 합니다. 아버지에게 무례한 동생에게 몽둥이라고 들고 가서 혼쭐을 내야 합니다. 그런데 형은 그 모습을 보면서도 그냥 바라만 보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맏자식 노릇을 포기한 아주 무책임한 태도입니다. 그렇다면 이 큰 아들도 동생과 똑같은 탕자입니다. 성경을 보면 첫째 아들이 열심히 일하고 아버지를 도와 농사일을 도맡아 아무 말 없이 아버지를 도운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이 큰 아들은 작은 아들보다 더 큰 탕자였습니다. 왜냐하면 아버지의 아픈 마음을 전혀 모르고 이해도 못한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형의 역할도 큰 아들의 역할도 전혀 하지 못하였습니다. 이 역할을 하지 못하다는 것은 직무유기나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 그 자리에 있으면 자리 값을 해야 합니다. 자리 값을 못하면 성경을 보면 찍혀 불에 던져지게 된다고 말씀합니다. 큰 아들은 자리 값을 하지 못하는 오히려 더 큰 탕자였습니다.

 

 

 

 

은근히 즐김

 

 

 

 

 

동생이 아버지에게 막무가내로 내 재산을 나누어 달라고 협박을 할 때 그때 형은 동생을 끌고 나가서라도 타 일렀어야 합니다. 귀때기라도 때려서 정신을 차리게 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때 형은 아무 소리도 안했습니다. 그냥 바라만 보았습니다. 그냥 바라만 본 것이 아니고 사실은 속마음으로는 은근히 즐겼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버지가 동생에게 재산을 나누어 주면 내 몫도 일찍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계산해 보니까 그런 계산이 나왔습니다. 그러니까 큰 아들은 동생이 하는 짓을 그냥 바라만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아버지는 동생의 협박에 못 이겨 재산을 일찍 나누어 주었습니다. 동생에게 1/3의 재산을 그리고 자신에게는 2/3를 주셨습니다. 얼마나 큰 횡재입니까. 이 보다 더 큰 횡재가 어디 있습니까. 나는 손에 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남의 손 빌려 내 몫을 다 챙긴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은 머리만 잘 쓰면 이렇게 수고하지 않고 횡재하는 세상입니다. 그때 괜히 큰 아들인체 하고 동생 따귀나 때리고 동생이 할 말을 못하게 했으면 결국 누가 손해를 보았겠습니까. 이 세상은 적당히 눈치 있게 살아야 합니다. 이 큰 아들은 동생 덕분에 자기 재산을 일찍 챙기는 횡재를 하였습니다. 그래서 동생이 아버지에게 생떼를 쓰고 협박하고 돈 내 놓으라고 막무가내로 나올 때 큰 아들은 그냥 바라만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말은 동생이 아버지에게 재산을 달라고 이야기할 때 자기 몫도 챙기기 위해서 은근히 부채질하고 즐겼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 큰 아들은 탕자가 아닙니까. 말하자면 더 교묘한 탕자입니다. 그래서 오늘 제목을 비정한 탕자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오늘 형제들 간에 재산 싸움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재산 많은 부모들은 모두 탕자의 아버지 심정으로 협박을 당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은 아버지 보다 재산에 관심이 더 큽니다. 형들이 재산 싸움에 더 지독합니다. 더 가지려고 애를 쓰고 그래서 형제들 사이에 소송이 발생하고 불화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 재산싸움에 아버지는 엄두를 내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 아버지는 말없이 두 아들에게 재산을 상속해 주고 말았습니다. 작은 아들은 철없는 탕자였고 이 큰 아들은 아주 음흉하고 비정한 탕자였습니다.

 

 

 

 

불평

 

 

 

 

마침내 동생이 방탕하고 돈을 다 탕진하고 집에 돌아왔습니다. 큰 아들이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보니 잔치가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무슨 잔치냐고 물어보니 동생이 돌아왔다고 아버지가 잔치를 배설하였다고 합니다. 동생이 나가 재산을 탕진하고 병까지 들어 거지꼴로 돌아왔습니다. 돌아온 동생을 보니까 완전히 폐인이 되어 있었습니다. 형이 그 동생의 모습을 보았을 때 말할 수 없는 측은한 마음이 솟아올랐어야 합니다. 그래서 달려가 동생을 안고 “왜 이제 돌아왔느냐, 지금이라도 왔으니 잘됐다, 그동안 아버지가 얼마나 속이 썩으셨는지 아느냐, 잘 돌아왔다”고 해야 합니다. 그래야 형입니다. 그것이 동생을 사랑하고 아버지를 생각하는 큰 아들입니다. 럼브란트라는 화가가 돌아온 탕자의 모습을 그린 그림이 있습니다. 그 그림을 보면 돌아온 동생 탕자의 모습이 형보다 훨씬 더 늙은 모습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그동안 동생이 고생을 많이 해서 단기간 내에 폭삭 늙어버렸습니다. 머리는 거의 다 빠져 있고 겉모습은 완전히 폐인이 되어 있었습니다. 형이 동생의 그런 모습을 보면 측은한 마음이 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형이 뛰어가 동생을 얼싸안고 눈물을 흘려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 그림을 보면 돌아온 동생을 형은 아주 무표정하게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에게 불평을 했습니다. “재산을 탕진하고 돌아온 아들을 위해서 송아지를 잡고 잔치를 베풀고 죽도록 일만 한 나에게는 무엇을 해 주셨나요.” 이 아들은 집에 들어오지도 않고 밖에서 시위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큰 아들은 아버지의 심정 따위에는 관심도 없습니다. 지금 아버지 심정이 어떠할 것이라고 이해는커녕 짐작도 하지 못하고 동생이 재산을 탕진한 것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또 탕진하고 돌아온 동생에게 내 몫에서 떼어 주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잇습니다. 이 큰 아들은 아버지나 동생에 대한 개념은 조금도 없이 오직 재산입니다. 내 재산이 또 축날까 봐서 그것이 걱정일 뿐입니다. 이 큰 아들은 탕자보다 더 교묘한 노골적인 탕자요 음흉한 탕자요 비정한 탕자입니다.

 

 

 오늘은 형제들이 재산 앞에서 모두 원수가 되는 것은 그 마음속에 모두 이런 비정한 탕자적 요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하는데 오늘은 피보다 재산이 훨씬 더 진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재산 앞에서 모두 원수 되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재산 때문에 부모를 버리고 죽이기까지 하는 세상입니다. 그러니 재산 앞에서 형제들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재산 때문에 아버지도 버리고 죽이고 형제들끼리 원수가 되고 있습니다. 여기 동생도 탕자이지만 형은 더 교묘한 탕자입니다. 아버지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한 것은 물론이고 동생에 대한 연민 따위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오늘은 물질이 우상인 시대입니다. 물질이 모든 것 보다 우위에 있습니다. 부모도 형제도 부부도 자식도 신앙도 모두 물질 아래에 놓여있습니다. 그래서 물질 때문에 이 중요한 관계와 도리가 유감없이 버려지고 부정되는 시대입니다. 그런 큰 아들을 바라보시는 아버지는 마음이 슬펐을 것입니다. 아마도 동생이 돌아왔는데 밖에서 들어오지도 않고 시위하는 큰 아들이 아버지는 더 미웠을 것입니다.    

 

 

 

 

큰 아들

 

 

 

 

그러면 여기 큰 아들은 오늘 누구입니까. 여기 큰 아들은 하나님 안에 살고는 있으나 아마도 거듭나지 못한 유형의 먼저 된 신자들일 것입니다. 그리고 먼저 된 선민인 이스라엘 백성을 의미할 것입니다. 신앙인이 영적으로 거듭나지 못하면 이런 이해관계 앞에서 맥을 추지 못하게 됩니다. 신앙인이 전적으로 거듭나지 못하면 심각한 이해관계에 부딪치게 될 때 신앙적인 사고도 판단도 역할도 작용하지 못합니다. 사람이 살아가다가 결정적인 순간을 만나게 되면 더 중요한 것을 찾게 되어 있습니다. 그때 사람이 거듭난 신앙인은 당연히 그 순간에 하나님을 찾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뜻을 존중하고 버릴 것은 버리고 포기할 것은 포기하는 결단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사람이 신앙적으로 거듭나지 못하면 그때 가치관에 혼돈이 발생하게 됩니다. 그래서 아주 중요한 시간에 신앙적인 판단이 흐려지게 됩니다. 그 결과 더 중요한 것을 버리고 내 이익에 집착하게 됩니다. 이 형의 모습을 보십시오. 지금이 얼마나 중요한 순간입니까. 죽었던 동생이 살아 돌아왔습니다. 아버지가 그토록 밤마다 잠을 자지 못하며 염려하고 근심하고 작은 아들 걱정에 먹지도 못하셨습니다. 큰 아들은 아버지의 그런 모습을 매일같이 보아왔습니다. 그런데 그 염려하던 동생이 살아서 돌아왔습니다. 그러면 형으로서 얼마나 다행한 일입니까. 그때 큰 아들은 “이제 아버지가 안심하셔서 좋겠구나” 이것이 큰 아들로서 당연한 생각 아닙니까. 얼마나 다행입니까. 그까짓 재산이 무슨 필요가 있습니까. 재산보다 내 소중한 동생이 살아서 돌아왔습니다. 아버지가 그토록 염려하시던 내 동생이 살아서 돌아왔습니다. 빨리 뛰어 들어가 동생을 얼싸안고 함께 눈물을 흘렸어야 했습니다. 그것이 큰아들이고 형이고 아버지를 염려하는 아들의 행동입니다. 그런데 밖에서 빙빙 돌며 들어오지도 않고 탕진한 동생이 돌아왔다고 송아지를 잡고 잔치를 배설한다고 아버지에게 불평을 하고 동생은 처다 보지도 않고 노골적으로 비난하고 있습니다. 이 형은 동생보다 더 노골적인 탕자였고 비정한 탕자였습니다. 이 큰 아들은 아버지의 마음을 전혀 헤아리지 못하는 더 큰 탕자입니다. 그러니까 아버지는 지금 아픈 마음을 겨우 진정하고 있는데 이 큰 아들이 불평을 하니까 그 큰 아들을 달래느라고 쩔쩔매는 이 아버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이 큰 아들은 정신 빠진 아들입니다. 그래서 이 큰 아들은 더 큰 탕자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3년 동안 이방인들 땅에서 복음을 전하고 고치고 가르치셨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은 예수께서 세리의 집에서 먹고 마시고 간음한 여인을 놓아주시고 두둔하시고 이방 땅을 넘나들며 가르치는 것을 못 마땅해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여기 큰 아들이 누구냐 하면 먼저 믿은 이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이방인들을 구원의 타깃으로 삼고 구원하시려 복음전파에 애를 쓰셨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섭리는 예루살렘을 넘어 이방인들에게 향하고 구원의 문을 활짝 여셨습니다. 그런데 먼저 믿은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은 큰 아들이었습니다. 이제 하나님이 이방인 선교에 뜻을 두셨습니다. 이방인 구원에 관심을 가지셨습니다. 그런데 먼저 믿은 백성들이 그것을 아주 못 마땅하게 여기고 있는 모습을 탕자의 비유를 통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먼저 믿은 바리새인들에게 “너희들이 바로 큰 아들이요 노골적인 탕자들이다”라고 고발하시는 것입니다. 먼저 믿은 사람들이 진정 주안에서 거듭났다면 늦게 믿는 이방인들을 기쁨으로 받아들여야 하고 따뜻하게 받아들여야 하는데 밖에서 시위하는 큰 아들처럼 바리새인들은 한사코 이방인들을 짐승 보듯이 처다 보지 않았습니다. 오늘 우리는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과 경륜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모르면 큰 아들처럼 아버지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노골적인 탕자들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가장 큰 소망은 잃은 자를 찾는 일입니다. 잃은 자를 찾는 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소망적인 일입니다. 건강을 잃은 분의 가장 큰 소망은 건강을 회복하는 일입니다. 시력을 잃은 분은 시력을 회복하는 일이 가장 큰 소망입니다. 물건을 잃어버린 분은 그 물건을 되찾는 일이 가장 기쁜 일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 가장 큰 소망스런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잃은 자를 찾는 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잃은 자를 찾기 위해서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잃은 자를 찾으러 오셨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잃은 자 비유가 많이 나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무엇을 가장 기뻐하시는가를 알아야 그 뜻을 이루며 살게 됩니다. 오늘 우리는 나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내가 철없는 탕자가 아닌가를. 내가 비정한 탕자가 아닌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잃어버린 나의 자아상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때 나는 하나님의 자녀의 역할을 비로소 이룰 수가 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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