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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2:12-22(예배설교) 왜 예수의 육체는 성전인가)

by 【고동엽】 2022. 1. 12.

그 후에 예수께서 그 어머니와 형제들과 제자들과 함께 가버나움으로 내려가셨으나 거기에 여러 날 계시지는 아니하시니라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더니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 이에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예수께 말하기를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유대인들이 이르되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 하더라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

 

 

지난주에 이어서 어려운 본문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발목이 채 차지 않는 개울물 같은 본문이기도 하지만 코끼리도 헤엄을 쳐서 건너야 할 만큼 깊은 은혜의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은 은혜를 엄청 받는 사람과 아무런 감동을 느끼지 못한 사람으로 편을 가릅니다. 우리가 깊은 해석을 요한복음에 시도하지 않으면 요한복음은 권태롭고 단조로운 대화들이 계속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오늘 본문은 비교적 익숙한 본문입니다. 본문에 나온 대화 한 마디 한마디는 결코 쉬운 본문이 아닙니다. ‘예수께서 그 어머니와 형제들과 제자들과 함께 가버나움으로 내려가셨으나 거기에 여러 날 계시지는 아니하시니라’ 요한복음의 특징은 예루살렘이 예수님 사역의 주무대라는 겁니다. 공관복음은 갈릴리가 예수님 사역의 주무대라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은 예루살렘이 예수님의 활동 주무대라고 봅니다. ‘가버나움으로 내려가셨으나 거기에 여러 날 계시지는 아니하시니라’ 이 말은 이 본문에만 나옵니다. 예수님은 어디에 가 있느냐? 예수님의 영혼의 나침반은 어디를 향하였느냐? 예루살렘 성전을 지향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요한복음 1장 28절 ‘이 일은 요한이 세례 베풀던 곳 요단 강 건너편 베다니에서 일어난 일이니라’ 이것도 벌써 예루살렘보다도 더 밑입니다. 사해 근처, 예루살렘보다 더 남쪽인 유대지방입니다. 베다니 지방이니까 처음부터 예수님은 유대에 와 있던 겁니다. 그다음 예수님께서 첫 제자들을 만난 곳이 베다니 세례 주던 곳입니다. 그런데 마태복음을 보면 예수님이 갈릴리에서 첫 제자들을 모으는 것으로 나오죠? 아닙니다. 요한복음은 세례요한이 세례 주던 그곳에서 제자들을 5명 확보합니다. 여섯 번째 제자인 나다나엘을 이제 갈릴리에 와서 만나는 거죠. 예수님이 가버나움에 오래 계시지 않았단 말은 상당히 공관복음의 인상을 수정하려는 의도가 보입니다. 예수님은 갈릴리에 오래 계시지 않고, 예루살렘 성전에서 바로 유대인들과 부딪혔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런 느낌이 드는 본문입니다. 예수님은 어디에 중심이 있었는가? 예루살렘 성전이었습니다.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더니’ ‘제자들과 함께 가버나움으로 내려가셨으나’ 이때 카타 바이노라는 동사로 쓰였는데, 내려가셨다는 동사가 3인칭 남성 단수가 쓰입니다. 영어 성경을 보면 Jesus and disciples니까 3인칭 복수가 와야겠죠? 그런데 헬라어 동사는 3인칭 단수가 왔습니다. 이 말은 간 사람은 예수님이고 제자들은 따라갔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3인칭 남성단수가 쓰이는데, 13절 ‘유대인의 유월절이’ 유월절이 무엇인가 설명할 필요 없죠? 유월에 있는 Memorial day, 현충일, 국경일, 이런 뜻이 아닙니다. 유월이라는 말은 넘을 유, 넘을 유, pass over, 묵과한 절이다, 용서한 절이다, 이집트의 모든 장자가 하나님의 죽음의 천사에 의해서 쓰러뜨림을 당해 죽었을 때 유대인의 유월절 어린 양 피가 문설주와 인방에 발라져 있는 집만 pass over, 묵과하고 넘어가다, 즉 유월절입니다. 유월절이라는 말은 넘을 유, 넘을 월, June이 아닙니다.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더니’ 아나바이오, 올라갔습니다. 3인칭 단수, 제자들은 따라간 겁니다.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예수님께 쓴 지각동사, 보시고는 심각한 행동을 유발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의 38년된 병자가 그 누운 것을 보시고 그 병이 오랜 줄 아시고, 뚜벅뚜벅 걸어가셨습니다. 예수님에게 보신다는 동사는 통찰하신다는 뜻입니다. 의도적으로 응시한다는 뜻입니다. 우리 눈에 지나가다 만방에 잡히는 acception, 지각현상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보신다는 것은 어떤 행동을 예기케하는 봄입니다.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 성전이 얼마나 넓었느냐면 가로 400미터 세로 280미터, 가로 세로 400곱하기 300이니까 엄청 넓은 거죠. 1만 2천 평방킬로미터가 되나요? 거기 가면 어마어마하게 넓습니다. 그 당시 기록을 보면 헤롯 대왕이 건설한 이 성전이 로마제국 내에서 가장 큰 성전입니다. 로마제국과 안디옥과 베데스와 페르가몬 같은 터키 로마 그리스 다 해도 이렇게 넓지 않습니다. 그리스 판테온 로마의 주피터 신전, 아주 좁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성전은 400 곱하기 300이니까 너무 넓은데 성전의 대부분 뜰은 이방인의 뜰이라고 하는 것인데, 일종의 벼룩시장 같은 넓은 마켓이 있습니다. 그 마켓보다 좀 더 가면 이스라엘 여자의 뜰이 있고, 좀 더 가면 이스라엘 남자의 뜰이 있고, 좀 더 가면 제사장이 뜰이 있고, 좀 더 가면 지성소, Holy of Holy, 대제사장만 가는 뜰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장소는 이방인의 뜰입니다. 이방인도 갈 수 있는 장소는 이 장소입니다. 거기가 터가 제일 넓었습니다. 거기서 무슨 일을 했나요? 예를 들어 순천 진주 안동지방에 있는 사람들이 서울로 왔습니다. 순천 진주 안동에서 양과 소를 데리고 오겠죠? 비둘기는 비교적 문제가 없습니다. 새집에 넣어서 오면 되니까요. 천릿길 순천 진주 안동에서 출발하면 한 일주일 걸리겠죠? 천천히 오니까요. 하루에 40km 정도 걸으면 열흘 걸리는 겁니다. 소와 양이 오다가 예루살렘 성전, 서울 남대문쯤 오면 지쳐서 눈동자가 풀어집니다. 다우너 소처럼 됩니다. 그때 대제사장이 독과점으로 공급하는 성안 평택 안성 등에 경기평야 목장에서 딱 와서 하루 전날 대기하고 있던 눈동자가 반짝반짝 한 아이들이 와서 바꿔치기를 하는데, 100만 원짜리 소 한 마리가 20만원에 팔리고, 150만원의 제사장이 공급하는 소로 바뀝니다. 그러니까 엄청난 이익이 남는 겁니다. 문제는 제사장이 직영하거나 민간업자에게 불하하여 일종의 제물공급 독과점 업체를 공급했기 때문에 진주에서 오는 오서방 박서방 최서방들은 항상 100만 원짜리 소를 경건한 마음으로 바치기를 원했지만 소들이 협조를 해주지 않기 때문에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당한 겁니다. 양도 그렇게 했습니다. 비둘기도 아마 오래 끌고 갔기 때문에 힘들었을 겁니다. 이런 사람들과 거래를 했기 때문에 성전 바깥뜰은 완전히 우시장이 된 겁니다. 돈 바꾸는 사람은 전 세계 흩어진 디아스포라들이 데나리온을 들고 와서 제물을 삽니다. 예를 들어서 그리스 아테네 로마 에티오피아 이런 먼 데서 제물을 끌고 올 수 없으니까 돈을 들고 오는데 로마 황제의 초상화가 찍혀 있는 데나리온을 가지고서 성전에서 유통되는 세겔로 바꿉니다. 이때 환차이익이 남겠죠? 보통 민간금융업자에게는 1데나리온에 50세겔이다, 성전 안에서는 1 데나리온에 60세겔을 주고 사야 합니다. 그러니까 이때 환차이익이 컸었는데, 돈 바꾸는 사람들은 테이블을 내고 일종의 branch를 내고, 일종의 은행출장소를 내려고 하는데 그 모든 이권이 대제사장에게서 옵니다. 대제사장은 종교인이 아니라 큰 구원독과점 업체의 사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걸 알았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160km 먼 갈릴리에 살았기 때문에, 갈릴리에서 온 소들과 양들의 눈이 어떻게 바뀌는가를 알았고, 갈릴리 많은 사람들이 제물을 비싼 값으로 사는 걸 알았기 때문에 불평하는 걸 알았습니다. 공관복음서에 보면 예수님은 혁대를 풀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혁대를 풀었다는 말이 안 나옵니다. 그냥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자기 혁대를 풀어서 노끈을 만들었기 때문에 매우 남자의 옷이 위험해 있습니다. 그 말은 예수님이 단도직입적으로 한 건 하려고 마음먹은 겁니다. 그런데 그 노끈을 풀었을 때 베드로도 같이 풀었을 가능성이 높아요. 예수님이 혼자 뭐하는가 개인기하나보다 지켜보는 게 아니라 베드로도 풀고 요한도 풀었기 때문에 아마 같이 휘둘렀겠죠? 양이나 소를 막 쫓아냅니다. 돈 바꾸는 사람의 돈을 엎으시고, 이건 예수님 평소 모습과 너무 다릅니다. 이건 완전히 서울시 용역업자들이 하는 짓입니다. 상을 엎으시고, 보통 사람들의 폭력성에서는 안 나옵니다. 예수님이 갑자기 폭력배, 두 얼굴을 가진 사나이가 돼버린 겁니다. 이걸 엎은 겁니다. 돈도 쏟아버리고 노끈으로 때리니까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그런데 대제사장의 사무실은 저 바깥에 몇 백 미터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이 소동이 전달되려면 굉장히 많은 소가 울고 난리가 나야 합니다. 그러니 금방 청원경찰이 달려왔습니다. 청원경찰이 달려와 보니 예수라는 갈릴리 사람이 키도 별로 크지 않고 비무장인데 채찍을 휘두르니까 너무 놀란 겁니다. 그런데 이 장면을 보고 제자들이 성경말씀 시편 69편을 생각했습니다.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 이때 바로 기억했는지 예수님 돌아가시고 부활하시고 나서 한참 만에 기억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아마 이 사건이 일어날 때 즉시 기억한 것 같습니다. 제자들이 보통이 아닙니다. 제자들이 보통이 아니란 걸 어떻게 알 수 있나? 시편 69편을 기억한다는 건 대단히 어려운 겁니다. 왜? 지금 우리구약 시편 어디 있어요? 찾으면 나오죠. 아라비아숫자 68 다음에 나와요. 그런데 고대 이스라엘 성경은 이렇게 된 게 아니라 두루마리로 됐기 때문에 두루마리로 찾다가 하루 종일 걸립니다. 이렇게 적힌 글자를 찾는데, 시편이란 말이 없습니다. 그다음 페이지도 없습니다. 아라비아 숫자도 전혀 없어요. 시편 69편을 기억하지 않는 한 이 말을 기억할 수 없는 겁니다. 그러니까 제자들도 예수님과 어쨌든 오래 다니면서 말이 통하려면 최소한 구약성경에 대해서 기본교양이 상당해야 합니다. 예수님 성품이 지루한 걸 잘 견디시는 분 같지는 않습니다. 대화가 돼야 합니다. 예수님과 베드로가 하룻밤 지나고 나서 의기투합하고 베드로와 예수님이 거의 같은 급의 언어를 구사하고, 같은 문제의식과 같은 시국의식을 가졌기 때문에 친구가 된 겁니다. 여러분, 누군가와 친구가 된다는 것, 그게 쉽지 않습니다. 우리나라에 구약학자가 200명이 넘습니다. 신약학자는 300명이 넘습니다. 그 중에서 제가 대화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양진일 외에는 거의 없다고 보면 됩니다. 대화가 안 되는 가장 큰 이유, 일단 이 시국과 시대에 대한 문제의식이 없다는 겁니다. 너무나 안정된 교수생활을 다 누리고 있기 때문에, 그런데 저와 양진일 목사님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온 세계 문제를 다 기도하고 자기 문제인 것처럼 허풍을 떨면서 기도하기 때문에, 우리 일산두레교회 교인들이 저를 감당을 못했습니다. 특히 자매 교인들이 감당을 못했습니다. 남자 교인들은 드디어 졸음에서 깨고 눈을 뜨기 시작하는데 자매님 교인들은 졸기 시작합니다. 그 이유는 목사님 설교는 지구 끝 온 이슈가 다 나오기 때문에 신앙생활의 범위가 너무 넓어져서 힘들다, 부동산 투기 잡놈 잡아내고 토벌하고 또 미국 한 번 간섭하고, 온 세계 문제를 다 간섭하니까 목사님 설교가 감당이 안 된다, 그래서 자매님들이 많이 졸았습니다. 대개 6개월 지나고 나서 설교가 들린다, 그런 말을 했습니다. 그래서 대개 여성 교인들은 6개월 만에 제 설교를 들었기 때문에 크게 저는 실망하지 않았습니다. 동지가 되거나 하룻밤 지루하지 않게 밤을 보낼 수 있는 사이는 너무 힘듭니다. 지금 저에게 가장 힘든 사람은 불쌍한 사람이 아닙니다. 아무 것도 모르고 머리가 텅 빈 사람과 대화하는 것은 제가 안기부에서 고문당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성경을 모르는 사람과 시국에 대해서 아무런 고민이 없는 신학자와 한 호텔방에서 자라, 그러면 나에게 곤장 100대 맞는 것보다 더 고통스러운 겁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3년 간 같이 다녔다는 건 그 사이에 깊은 교감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결국 일방이 타방에게 계속 영향을 주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계속 영향을 주고, 제자들은 필기만 계속한 게 아닙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거의 대등하게 언어를 구하하고 깊은 동지적 연대를 나누었다는 뜻입니다. 그걸 어디서 알 수 있느냐? 베드로가 성경을 아는 정도를 보고 저는 짐작했습니다. 베드로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베드로에 대한 한국교회가 가장 잘못된 것, 목사님들의 반 지성주의 무식함을 정당화할 때 쓰이는 말이 사도행전 4장 13절입니다.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그걸 딱 줄을 세 번 치면서, 학문이 없다, 베드로가 학문이 없다는 말은 정규 랍비스쿨을 다니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성경을 거의 통달한 평신도 청년이었습니다. 성경에 통달하지 않은 사람은 시편 69편을 찾아낼 수 없습니다. 시편 69편을 찾아내는 것은 안면도 앞바다에서 바늘 찾는 것과 똑같습니다. 그 말은 정확하게 예수님의 승천과 부활을 시편 16편, 오순절 성령강림을 요엘서 2장 28절, 요엘서는 지금 권사님도 못 찾습니다. 요엘서가 없다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요엘서를 못 찾아요. 요엘서 찾아보라고 하면 두 시간 걸려요. 내 성경에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얇기 때문에 못 찾아요. 어떤 사람은 오바댜도 없다고 하죠. 그런 것 처음 들었습니다, 지금도 요엘서를 찾기 어려운데, 구텐베르크가 만든 색인표가 없는 이걸 가지고도 요엘서를 못 찾는데 성경 전체를 가지고 요엘서를 찾는다는 말은 베드로가 완전히 성경을 꿰뚫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이런 건 모르고 베드로가 낫 놓고 기억자도 몰랐다? 너무 우스운 이야기입니다. 저는 여기서 충격을 받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개인적 도발행위를, 이렇게 무섭게 두 얼굴을 가진 사나이로 돌변하는 예수님을 보고 베드로가 제자들이 시편 69편 9절을 가지고 스승의 행동을 이해하고 납득하려고 했다는 것, 너무 저는 감동받았습니다.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 여러분, 하나님의 성전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입니다. 내 아버지지 집입니다. 너무 중요합니다. 내 아버지 집, 1부 예배에 오면 신학강의를 듣는데 2부 예배는 어른들이 많아서 신학강의를 차마하지 못하고 설교를 합니다. 1부 때는 젊은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신학대학원 강의처럼 강의하고, 2부 때는 차마 여러분이 감당하기 어려울 것 같아 설교하기 때문에 1부 2부 내용이 완전히 다릅니다. 그렇죠? 제가 성경강의를 하면 처음 15분 동안 너무 많이 잠이 쏟아지는가 봐요. 본문을 자근자근 풀면, 2부 예배는 제가 그렇게 하면 안 될 것 같아서 설교를 합니다.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 이 말은 하나님의 성전, 내 아버지 집에 대한 맏아들 의식, 책임의식입니다. 내 아버지 집이 유린당할 때, 내 아버지 집이 분탕질 당할 때, 내 아버지 집이 장사의 소굴로 바뀔 때 아들은 운명공동체이기 때문에 반드시 자동개입이 일어납니다. 이게 바로 맏아들 의식입니다. 독생자 의식입니다. 내 아버지 집, 이 말은 요한복음 5장 18-19절에 의하면, 예수님의 독특한 배타적 독생자 의식입니다. 예수님 말고는 아무도 아버지 집을 1인칭 남성단수, My Father 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전부 다 Our Father입니다. 모든 구약공동체 및 신구약 중간기 모든 문헌은 하나님을 내 아버지라고 단수로 쓴 것은 한 군데도 나오지 않습니다. 내 아버지라는 말은 예수님이 처음 한 말입니다. 이 말은 아버지와 예수님 사이가 완벽하게 하나였음을 말합니다. 요한복음 5장 19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나는 아버지가 하는 것의 도제적인 모방자이지 아버지가 하지 않는 걸 하지 않는다, 내가 아버지 집에서 저질러지는 엄청난 만행을, 이 장사치들의 엄청난 분탕질을 아버지 이름으로 내가 분노하는 것이다, 내 아버지가 터트릴 분노를 아들인 내가 터트린 것이다, 이런 뜻으로 지금 말하는 겁니다.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 여러분, 여기서 중요합니다. 아버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없는 사람들은 분노도 없는 겁니다. 소크라테스가 한 말입니다. 조국에 대한 분노가 없는 사람은 조국에 대한 사랑도 없는 사람이다. 유시민이 많이 떠들었던 말입니다. 운동권 아이들이 많이 떠들었던 이야기가, 조국에 대한 분노도 없으면 조국에 대한 사랑도 없는 것이다, 그런 말이에요. 교회가 이렇게 잘 못됐습니다. 이렇게 대제사장들과 모리배같은 정상배들이 하나님의 우주적 소통, 땅끝에서 유배당한 것처럼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무신론적인 슬픔을 강요당하며 살아가는 이 땅의 억조창생들이 성전에 와서, 하나님 아버지 이 땅은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 땅의 역사에 개입하셔서 악인들을 징벌하시고 활을 꺾으시고 수레를 불사르시며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보여주십시오, 주님의 집에는 참새와 제비들이 깃드는 곳이 아니었습니까? 주님의 집에 가면 제비도 새끼를 보금자리에 넣고 참새도 돌봄을 받지 않았습니까? 제비와 참새 같이 연약한 작고 보잘 것 없는 영혼들이 깃들이는 곳이 아버지 집인데, 지금은 강도떼들의 본거지가 되었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분노를 터트린 것이 열심, 열심 때문에 순한 사람이 투사가 되는 것입니다. 에릭 메텍시스라는 사람이 쓴 책 중에서 <본회퍼 순교자 스파이 목사> 이런 책이 최근에 나와 있습니다. 제가 800여 페이지가 넘는 그 책에 추천사를 길게 썼습니다만, 읽어보십시오. 그 책에 보면 본회퍼와 히틀러의 갈등은 불가피했으며 필연적이다, 그 이유는 본회퍼와 히틀러가 각각 다른 행로를 걷습니다. 본회퍼는 독일 신경과학자로 유명한 베를린 대학의 교수 아들입니다. 히틀러는 우울증이 있었고 미술학도가 되기를 원했던 오스트리아의 건달입니다. 오스트리아 사람입니다. 오스트리아 건달로 1차 세계대전에 나갔다가 사고를 당한 사람, 그다음 뮌헨에서 1923년에 데모를 해서 쿠데타를 일으켜서 감옥에 갇혀서 <나의 투쟁>을 썼던, 정신병적인 애국자입니다. 거기에 비해서 본회퍼는 너무나 유복하고 8남매, 1개 분대병력을 이루는 가족 속에서 너무나 많은 사랑을 받으면서 자비네라고 하는 쌍둥이 여동생과 같이 지냈습니다. 그다음 5살 위의 칼 본회퍼, 둘 다 튀빙겐 대학 다니면서 둘 다 갔습니다. 우애가 너무 깊었고 밤마다 가족음악회가 열립니다. 본회퍼는 피아노를 치고 너무 행복한 가정이었는데, 이 행복한 가정에 천재적인 본회퍼, 누구도 종교적 감수성이 본회퍼만큼 없었습니다. 본회퍼는 본회퍼대로 컸고, 히틀러는 히틀러대로 컸는데, 64강 32강 16강 8강 4강 결승전, 이렇게 갈등하면서 옵니다. 가장 거룩함을 추구하는 순결의 상징인 본회퍼, 가장 악랄한 지저분함의 상징인 히틀러가 결국 결승전에서 조우할 수밖에 없는 거죠. 에릭 메텍시스라는 그 사람이 그런 방식으로 글을 썼어요. 그래서 그 책이 800페이지가 넘지만 순식간에 읽을 수가 있어요. 제가 이번 방학 때 가장 감동받은 그 책입니다. 그 책 여운이 지금도, 본회퍼 책은 여러 권 읽었는데 그 책이 가장 강렬했습니다. 이렇게 행복한 사람이, 이렇게 의로운 사람이 결국은 악과 조우할 수밖에 없구나, 갈릴리의 유로와 같고 샤론의 백합화 같았던 그 순결한 예수님이 결국은 악마의 본거지, 악마들의 센터였던 성전에 나타날 수밖에 없구나, 그걸 제가 깨달은 겁니다. 여기가 가장 위험한 겁니다. 우리가 순결하면 순결한 그만큼 악한 자들과 대결하고 조우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이게 가장 위험한 겁니다. 지금 너무 웃긴 건 우리나라 사회에요. 우리나라 사회에는 목사님 자녀도 많고 종교적으로 뼈대 있는 집안 자녀가 참 많습니다. 저랑 우리 양진일 목사는 종교적으로 전혀, 너무나 too humble한 origin입니다. 아무런 인물을 배출하지 못한 평범한 농민의 아들이고 평범한 서울 시민의 아들입니다. 우리에게는 거룩한 기품이 나올 만큼 훌륭한 인물을 아무도 배출하지 못했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불교를 믿었던 사람이고, 유교 믿었던 사람입니다. 무당이 오면 점쳤던 사람입니다. 양목사님은 조금 낫습니다. 어머니가 사무엘처럼 키워서 식칼 놓고 기도해서, 양목사님은 사무엘적인 경험이 있지만 나는 아무런 사무엘적인 경험이 없는, 그야말로 나는 책만 읽었던 사람, 그런데 3대째 순교자 집안 자녀, 그런 많은 사람이 있는데 그런 사람들이 한국교회를 걱정하지 않고 순전히 처음 예수 믿은 저와 우리 양목사 같은 사람이 가장 급진파가 돼버렸습니다. 우리가 항상 급진파가 됐습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너무 웃깁니다. 한국교회 급진파가 됐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를 가만히 봤습니다. 저는 성경을 너무 진진하게 믿다가 이렇게 돼버렸습니다. 성경을 너무 진지하게 연구하다가 성경을 너무 진지하게 믿어버리다가 계속 쓰면 급진적인 글이 돼버립니다. 아무리 급진적인 설교를 하지 않으려고 해도 급진적인 설교가 나와 버립니다. 제가 미국에서 목회할 때 프린스턴에서 미국에서 오랫동안 25년 이상 산 박사들이 모인 교회가 있었습니다. 70명교인 중에 50명이 박사고, 대부분이 의사입니다. 미국에서 공부하고 성공한 사람들이 뉴욕에 직장이 있는데 프린스턴에 와서, 25만 불에서 50만 불의 집을 사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분들의 집은 국무총리 공관보다 더 좋습니다. 1, 2층 너무 아름다우 집, 보통 50만 불짜리 집에서 삽니다. 이런 분들의 교회에서 1년 5개월 동안 목회를 했는데, 그 중의 한 교인이 저의 이런 설교를 감당하지 못합니다. 너무나 설교가 좋다고 6개월 내내 너무 좋다고, 목사님 한국 돌아가시지 말고 우리랑 목회하자고 바짓가랑이를 잡고 하소연 하던 분들입니다. 그런데 6개월 동안 제가 설교하고 나서 드디어 예언자적 설교를 하기 시작하니까 이분들이 감당을 못하면서 돈을 계속 가져옵니다. 3천불 가져오고 꽃다발 밑에 가져오고, 저희 어머니가 저를 방문했습니다. 공부 잘 하는가 감시하려고 오셨는데, 우리 어머니 편에 꽃다발을 보냈는데 거기 현금 3천불이 들어있습니다. 세 번이나 이러니까 제가 물어봤습니다. 왜 이런 일을 합니까? 목사님이 살림이 찌들어서 이렇게 짜증을 내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그때 한 달에 3천불을 받았기 때문에 유학생으로서는 3천불을 받았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너무나 큰 돈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300불을 제가 헌금을 하고 나머지를 유학생들을 위해서 많이 썼습니다. 돈이 그때 넘쳤습니다. 3천불은 엄청난 돈입니다. 유학생 설교 목사에게 돈 전혀 모자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사장 사모님이 저를 붙들어놓고 싶어 신학교를 지어 줄테니 가지 말라고 했던 그 분이, 제발 미국에 대해서 나쁘게 말하지 마시고 미국이 쓰러질 것이라는 둥 뉴욕 140층 빌딩이 무너지는 날이 온다고 이런 말 하지 말라고, 미국에 대한 저주를 퍼붓는 순간 우리 인생이 다 무너지는 것 같고 우리가 그동안 쌓았던 모든 삶의 기초가 허물어지니까, 그렇게 울면서 하소연해요. 집사님 미국이 쌓아올린 모든 번영의 탑은 반드시 무너집니다, 미국은 음녀 바벨론과 같습니다, 여러분이 미국교포가 됐지만 미국과 거리를 둬야 구원 받습니다, 미국은 999당이 절대로 아닙니다, 그리고 제가 미국 뉴욕 탑이 무너진다는 걸 예언했습니다. 제가 귀국하자마자 무너지지 않았습니까? 2001년 9월 11일, 제가 2001년 7월에 귀국했습니다. 우리가 급진파가 되면 비난을 받거나 회유의 대상이 됩니다. 실제로 주님의 전이 이렇게 도탄에 빠지고 이렇게 엉망진창 종교적 이권 다툼의 장이 됐을 때는 그걸 보고 참으면 안 됩니다. 문제는 내가 그걸 보고 이렇게 분노를 터트릴 만큼 순결한가? 그것 때문에 저는 분노를 터트리지 못합니다. 저는 혁대까지 풀었다가 다시 했는데 그 이유는 내가 과연, 그런데 아무도 그렇게 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이제 혁대 풀어서 한 바퀴 돌린 사람이 양진일 목사입니다. 저는 혁대 풀었다가 다시 입고 그럽니다. 이제 박규준과 명영일 이런 사람들이 액션에 도달할지 모릅니다. 양목사 설교 한 10년만 들으면요. 예수님의 이런 거룩한 도발과 예언자적 액션이 파장이 너무 큽니다. 예수님을 치명적 위기에 빠뜨립니다. 츠빙글리, 마틴 부쳐, 마틴 루터, 에라스무스, 멜랑히톤 이런 종교개혁자들 6명은 마틴 루터와 멜랑히톤 빼고는 아무도 주고받지 않았습니다. 편지도 주고받지 않았고 서로 아무도 모릅니다. 스위스의 츠빙글리 마틴 부처, 독일의 마틴루터, 멜랑히톤, 프랑스의 쟝 칼뱅, 이런 사람들은 전혀 주고받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한결 같이 순결한 말씀으로 복음에 뜨거워져서 달구어졌기 때문에, 그들은 로마 가톨릭과 1대 1로 결승전에서 맞설 마음이 없었는데 결국은 가장 순결한 저항을 하다 보니까 로마 가톨릭과 결승전에서 다 만납니다. 이 말은 우리가 충분히 순결하고 충분히 의롭고 충분히 경건하면 우리 시대 중심죄악세력들과 결승전에서 만날 수밖에 없다는 거죠. 저는 이게 두려운 겁니다. 제가 어디까지 순결을 추구하며 어디까지 정결을 추구하며 어디까지 순결한 교회를 고집해야만 될까? 이런 두려움이 우리한테 있는 겁니다. 예수님은 채찍을 휘두르면서 도발을 터트렸습니다. 여러분, 분노를 평소에 터트리는 사람이 이렇게 하면 안 되겠죠. 예수님은 평소에 사랑의 화신이었고 자비의 화신이었고 너무나 오래 참음의 화신이었습니다. 그분이 터트린 분노는 계시적인 빛을 발하는 분노입니다. 우리가 분노를 일상적으로 터트린 사람의 분노는 성질이 나쁜 분노죠. 그러나 거룩하고 자비로우면서 온유하면서 사랑이 가득차면서 여린 감수성의 소유자가 분노를 터트릴 때는 하나님의 뜻을 계시하는 분노입니다. 목사님이 고모님 같은 분이나 큰 누님 같은 기도 많이 하는 권사님 도움 받는 수밖에 없습니다. 목사님 이번 설교가 너무 급진파인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해주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실제로 우리를 깨우쳐 줘야 할 기도의 어머니들이 필요한 것입니다. 거룩한 분노, 여러분이 지극히 온유하고 지극히 목사님과 우애로운 사람인데 여러분이 목사님을 찾아가서, 목사님 정신이 좀 나간 것 같습니다, 이렇게 말해줘야만 도움을 받습니다. 그런데 평소에 댓글 나쁘게 달고 트위터에 욕하고, 김회권 내려와라, 이런 사람이 말하면 안 듣습니다. 우애가 족한 사람이 해야만 진실이 전달되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혁대를 풀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제가 충분히 의롭고 충분히 온유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저는 하나님께서 주의 전을 향하는 열심 때문에 나를 이런 도발적 사태로 밀어 넣는다면 순종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이런 주의 전을 향한 열심, 내 아버지 집이 분탕질 당하고 내 아버지 집이 도탄에 빠진 상태에 대한 일종의 맏아들 의식이 너무 필요합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께 말했습니다. 네가 예언자적 신임장을 가지고 있느냐? 네게 이런 일을 하도록 누가 임명장을 주었느냐? 그게 바로 표적입니다. 표적은 credential입니다. 내가 표적을 말해줄게. 마태복음 12장 39절입니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내가 너무 거룩한 도발을 일삼으니까 이 악한 세대, 바리새인 세대, 성전 대제사장 이 악한 세대가 나에게 표적을 요구한다, 이 말은 예수님이 모세와 엘리야 같은 예언자가 아니면 도저히 할 수 없는 행동을 너무나 거침없이 하니까 표적을 요구하는데, 이 악하고 음란한 세대에게 내가 답한다, 표적을 말한다,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그렇게 말한 본문과 이 본문이 연결돼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요나의 표적이라는 그 말과 이 본문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아마도 요나의 표적이라는 말이 이 맥락에서 사용될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그래야만 19절이 이해가 됩니다. 네가 무슨 표적? 네가 엘리야와 모세 같은 표적을 보여줄 수 있느냐? 네가 모세와 엘리야 같은 자리에서 이런 일을 한다면 우리가 수긍하겠다, 예수님의 답변은 두 가지입니다. 이 답변은 여기에 나오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21장과 마가복음 11장 30절 앞 단락에 나옵니다.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냐 사람으로부터냐 내게 대답하라’ 그런데 그들은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세례요한의 세례운동이 하늘로부터 온 세례, 하나님이 보증하고 함께하시는 세례운동이었다면 세례요한의 세례 때문에 이스라엘에 데뷔한 예수님의 신적기원을 인정해야 합니다. 왜? 세례요한이 세례줄 때 예수님을 이스라엘을 공식으로 소개합니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공적으로 소개시켰습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의 세례가 하나님으로부터 온 세례라면 예수님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들은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또 세례요한의 세례가 인간의 세례라고 말을 한 순간 민중들의 거친 항의를 받습니다. 예언자로 알고 있는 민중들의 기대를 배반하기 때문입니다.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여기서 네가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우리에게 하느냐고 묻는다면 내 대답은 이것이다, 하나님 아들의 권세로 말한다, 내 아버지 집, 즉 독생자의 권세로 이렇게 한다, 독특한 아버지와의 관계 속에 있는 고도의 책임감과 주인의식으로 가득 차 있는 아들의 이름으로 이런 일을 한다, 나는 모세와 엘리야의 수준을 뛰어넘는 내 아버지 독생자의 권위로 이런 일을 한다고 대답합니다. 두 번째 대답은 마태복음 21장 포도원 소작인 쟁의 비유입니다. 포도원 소작쟁의 비유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포도원 소작인들에게 주인이 소작료를 받으려고 종을 보냈습니다. 종 세 사람을 다 죽이고 마지막 내 상속자 내 아들을 보낸다면 이들이 공경하리라고 했는데, 소작인들은 아들까지 죽여버립니다. 이 말은 내가 포도원 소작인들에게 소작료를 받으러 온 아들이다, 즉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이다, 이런 뜻입니다. 이 비유를 알려면 이사야 5 1-7절을 이해해야 합니다. 이사야 5장 1-7절은 이스라엘을 포도원에 비유하고 열매를 거두러가는 하나님을 소개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어떤 소작료를 원합니까? 공평과 정의의 소작료를 원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포악과 부르짖음의 소작, 가난한 사람을 학대하고 빈부를 양극화하여 이스라엘 언약백성을 따라지신세를 면하지 못하게 하는 악한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공평과 정의의 열매를 거두러갔던 하나님 아들 예수를 이스라엘 백성이 죽여 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 아들의 이름으로 내가 성전을 청소한다고 답변하신 겁니다. 예수님은 이때 이 맥락에서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 예수님이 성전에 대해서 가장 도발적인 말을 한 겁니다. 예루살렘 제사장과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일시에 정신이 나가게 만들고, 일시에 거품을 물게 만드는 건 성전훼방입니다. 예수님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라는 말을 함으로써 물고기 뱃속에 삼일동안 갇혀 있었던 요나가 삼일 만에 부활하듯이 죽음의 스올에 갇혀 있던 당신이 삼일 만에 부활할 것이라는 암시, 그런 깊은 말씀을 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가리킴과 동시에 예루살렘의 성전,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이 말을 한 겁니다. 이것은 너무나 위험한 말입니다. 이런 깊은 신학적 의미를 대제사장이 알 까닭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일종의 자살지향적인 말들을 하신 겁니다. 즉 스스로 죽음을 초래하는 위험한 말들을 쏟아내신 겁니다.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신 까닭,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 성전은 하나님의 죄사함을 선포하는 매개물입니다. 하나님과 세상 땅 끝에 있는 만민들이 화해하고 교제하는 매개물이 성전입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의 돌로 된 성전이 하나님과 이스라엘 예언자들과 이 세상 만민을 연결하는 데 실패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예수님의 육체와 손과 발은 예수님의 말씀은 하나님과 소통이 단절됐던 죄인들을 강력하게 결속시키는 회복의 매개물이 되었고, 치료의 매개물이 되었고 죄사함의 매개물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 이름 자체가 벌써 성전입니다. 사람들은 성전에 가서 하나님을 불렀는데 지금 우리는 예수 이름으로 하나님을 부릅니다. 예수님이 성전인가 아닌가를 알려면 예수님 이름으로 하나님을 불렀을 때 하나님이 응답하면 예수님은 성전인 것입니다. 기도가 바로 예수님의 육체가 성전됨을 확신하는 증거가 됩니다. 결론 맺습니다. 예수님의 분노처럼 장사치의 소굴처럼 바뀌어버린 오늘날의 교회, High risk High return, 고수익을 보장하는 일종의 강남의 땅 한 평 가져서 노후보장을 원하는, 오산과 동탄에 아파트 하나를 분양받고 싶어 하는 정도의 마음으로 천국 가기를 원하는 사람이 너무 많은데 그런 사람들이 내는 돈이 강남의 부유한 교회의 돈입니다. 여러분, 이 교회의 돈은 하나님께 가지 않습니다. 옥한흠 목사의 아들 옥성호가 <아버지 옥한흠>이라는 얇은 책을 썼습니다. 그 책 안에 아버지 목회를 조롱하고 비판하는 쓰라린 이야기가 계속 나옵니다. 아버지의 강남 목회, 부자들의 목회, 강남 사람들을 잘못 인도하는 아버지에 대해 아들의 쓰라린 마음이 계속 나오다가 마지막에 화해가 나오는데, 옥한흠 목사가 아들 옥성호, 자기가 볼 때 철이 전혀 들지 않고 천국도 믿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아들이 아버지 목회를 너무 조롱하는 장면에서 아버지가 마음을 엽니다. 아버지가 했던 가장 큰 실수의 하나, 펄시 콜레가 쓴 <내가 본 천국>이라는 책을 사랑의 교회에서 너무 극찬해서 잘못된 천국관을 심어준 큰 실수를 에누리 없이 그대로 말합니다. 펄시콜레라는 사람은 정신이 나간 사람인데, 그 책에 보면 천국이 강남거리하고 똑같습니다. 미국의 최고 부유층 비버리 힐즈 사람들의 이상향이 천국입니다. 그런데 그 책이 여의도순복음교회와 사랑의교회에서 수십만부가 팔렸습니다. 저는 그 책이 팔리는 현장을 83년도 여의도 순복음교회에 예배드리러 갔다가 봤습니다. 얼마나 책이 많이 팔렸는지, 그 책의 이단성이 너무 농후해서 이 책이 한국교회에서 수 만부 팔리는 모습을 보고 너무 안타까웠습니다. 정말 천국에 간 것처럼 기뻐하면서 책을 파는데, 제가 그 책을 보니까 너무나 조잡하고 내용이 형편없어서 있을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런데 그 책을 옥한흠 목사님이 설교중에 극찬을 한 겁니다. 여러분 중에 천국에 대한 확신이 없거든 이 책을 가지고 확신을 가지라고, 그런데 그 아버지 목회를 조롱합니다. 아버지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그런 황당무계한 책을 아버지가 그렇게 극찬했다니 말이 됩니까? 저는 그런 천국 가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이 땅에서 길고 가늘게 살렵니다, 그런 내용이 나옵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이 맏아들 자기를 조롱하고 강남교회를 조롱하는 아들을 품고 화해하는 과정, 마지막에 눈물 나는 과정이 나옵니다. 여러분 금천구 가리봉동에는 기독교인이 없는데 서초구 강남구에는 이렇게 많습니까? 그 이유가 우리 한국기독교가 크게 잘못됐기 때문입니다. 금천구 가리봉동 사람들은 삶이 팍팍해서 내세를 꿈꾸지 못합니다. 지금 사는 것이 비정규직 알바생 정도로 살면 인생에 대해서 after life, 내세를 꿈꾸는 힘이 약해집니다. 육체노동자 중에서 내세에 가고 싶다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프레스에 손이 잘리고 등이 굽고 곱사등이처럼 되는 고단한 육체노동자들은 내세를 거의 믿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누가 내세를 믿느냐면, 우리 같이 세상에서 제대로 된 살 수 있는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이 삶이 좋기 때문에 내세에서도 이 삶이 연장되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강력한 내세를 믿게 됩니다. 강남교회에 몰려드는 헌금들은 High risk high return 단기성 수익 채권과 같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천국도 펄시 콜레가 말한 땅 분배, 먼저 선투매하면 분배받는 아파트 분양권과 같은 그런 걸로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게 강남교인들이 돈을 많이 쓰는 겁니다. 우리 한국교회에 이렇게 많은 돈이 쏟아지는 것은 그릇된 구원관 잘못된 천국관이 있습니다. 여러분 펄시콜레, 이경순, 김영문, 요즘 천국에 대해 쓴 책들은 똑같습니다. 이 세상이, 자본주의적이고 쾌락주의적인 세상이 천국관에 그대로 투사돼 있습니다. 저는 그게 이단보다 더 해로운 이단이라고 믿습니다. 펄시콜레의 책을 우리 옥한흠 목사님이 전성기 때 추천해서 수십만부를 팔게 했습니다. 그런 회개의 이야기 슬픔의 이야기가 책에 자세히 나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고단한 육체 노동자들은 오늘날 교회에 나오지 못합니다. 왜? 헌금하는 것으로 알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는 장사치 소굴로 바뀐 교회에 대한 분노를 가져야 하는데 거룩한 분노를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도발을 해야 하는데 거룩한 도발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 수준으로 해야 하기 때문에 우리가 함부로 하지 못합니다. 다만 기억하셔야 합니다. 예수님 이름이 성전입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치유받은 것이고 예수님 이름으로 죄사함이 선포되고 예수님 이름으로 갱생이 일어날 때 예수님의 육체가 성전이 되었다는 성경의 진리가 확정할 수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어려운 도전 앞에 있습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하나님 아버지를 불렀을 때 하나님 아버지가 영광으로 나타나시면 예수님 육체가 성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예수님이 지상에 살았던 일처럼 가난한 사람들의 병든 곱사등이 등을 만나주고 가난한 과부의 눈물을 닦아주고, 하루에 한 데나리온 벌지 못하는 빈민들을 오십 명 백 명씩 짝 지어 앉아 먹여주면,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있는 곳이 교회입니다. 바로 성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하는 그 일, 예수님이 갈릴리 유다에서 하셨던 그 일을 지금 계승하는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그 일을 하는 영광이 머무는 곳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꿈을 꿔야 하지 않겠습니까? 너무 멀었습니다. 우리나 너무 먼 세상, 너무 혼탁한 하류에 살기 때문에 상상력 마저도 고갈됩니다. 저는 깨닫습니다. 우리가 아직 그 이상에 도달하지 못했지만 밤낮으로 신약성경과 구약성경을 읽어서 우리가 얼마나 오리지널한 교회로부터 멀어졌으며, 예수님의 영과 얼이 충만히 거하는, 치료의 능력이 강물처럼 터져나오는, 회복의 손길과 터치가 살아 있는, 이런 교회로부터 얼마나 떨어져 있는가를 아는 것도 필요한 일입니다. 그런데 텍스트, 성경말씀을 골똘하고 자세히 읽어보십시오. 우리 교회가 진짜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이 거하시는 성전이 되려면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그리스도가 했던 일을 해야 합니다. 그게 바로 그리스도의 영이 거하시는 교회입니다. 가향교회 아직 너무 멀었습니다. 우리는 정말로 멀었습니다. 우리는 많이 성숙해야 합니다. 우리가 아직 멀었지만 우리는 분투해야 하고, 하나님이 우리 가향교회 안에 마음대로 거하시면서 우리를 무차별 감동시키셔서 우리로 하여금 장사치 소굴로 바뀐 교회당들을 만민의 기도하는 집으로, 하나님 아버지와 소통하는 집으로 만드는 일에 우리를 써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너무나 멀어지고 너무나 부패해버린 한국교회에서 신앙생활하는 것이 너무 힘듭니다. 하나님 아버지 말씀을 볼수록 급진적으로 바뀌어가서 숨을 쉴 수 없는 가운데 있사오니, 하나님 아버지 저희를 불쌍히 여겨주시고 저희를 극한 온유로 단련시켜 주소서. 아버지 하나님 주님의 몸이 했던 그 일을 계승하는 교회되게 하여 주소서. 예수님 이름들어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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