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2장의 마지막 사건이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셔서 신성 모독적이라 할만큼 도발사태를 일으키십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의 성전은 그 당시에 종교적 호황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요세푸스 <유대 전쟁사>에 보면 예루살렘 성전은 해외교포, 알렉산드리아 교포 40만 명 로마교포 2만 명 시리아 다마스쿠스에 흩어진 수십만 명의 유대인, 각 지방민들을 해서 예루살렘 성전은 해외에 흩어져 있는 2백만 명 이상의 유대인들과 본토에 6,70만 명의 유대인에게 정신적 구심점이 되었고 메시아를 앙망하는 모든 열심의 집합점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1백만 마리의 양이 도살되었다, 이런 말이 들릴 정도로 성전은 제 기능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2장 마지막 단락을 보면,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말씀도 하셨습니다. 판토마임을 하신 게 아니라 여기서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성전이 장사하는 집이 돼버린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종교가 기업적 흥행집단으로 바뀔 수 있는 요소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왜 장사하는 집이 되었을까? 이 세상에 제일 비싼 게 무엇입니까? 제일 비싼 건 생명입니다. 정주영 씨가 1987년에 대통령 선거에 나왔다가 나이가 87세에 대통령 선거에 나왔다가 요실금을 한다는 비난을 받았습니다. 그가 그의 측근들에게 40조를 주고 40년을 살 수 있다면 돈을 쓸 수 있다고 했습니다. 87세가 40조를 써서 47세가 된다, 지금 40조라고 하면 50조가 넘습니다. 정주영의 입장으로 볼 때 여러분 자산으로는 50조, 아라 자매님은 한 70조 됩니다. 생명이 가장 비싼 겁니다. 그 생명이 죽어서까지 연장된다고 믿는 after life, 영생, 이건 진짜 비싼 겁니다. 영생이 얼마나 비싸냐면 매달마다 십일조를 내고 또 불안해서 더 내고, 그것이 영생입니다. 한국 교인들 특히 강남에 헌금이 모여드는 이유는 강남사람들은 이 세상의 삶을 연장시킬 만한 삶을 사는 겁니다. 금천구와 가리봉동 사람들은 이 세상 삶을 연장시키고 싶은 마음이 없기 때문에 헌금도 안 합니다. 기분 나빠서, after life, 내세를 별로 믿지 않습니다. 그런데 강남에 있는 사람들은 인생이 지금 너무 좋기 때문에 이런 정도의 삶이 죽어서까지 연장된다면 얼마든지 돈을 낼 마음이 있는 겁니다. 그래서 내세 지향적 종교는 항상 부유층의 종교입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의 공의를 보고 싶다고 소리치는 사람들은 저기 가리봉동 시흥 금천구 이번에 투표도 20%도 안 한 이런 사람들, 뭔가 불만이 가득 찬 사람들입니다. 장사하는 집은 내세로 가는 하나님 나라 영생에 들어가려고 하는, 유대인 교포들이 성전에 돈을 다 헌금하고, 마지막 스가랴 14장, 예루살렘 동편 문을 향해서 메시아가 들어간다고 약속된, 예루살렘 동편은 지금 닫혀 있습니다. 예루살렘 가서 보면 닫혀 있어요. 전방산에 가서 보면 예루살렘 동편 성문 황금문이 닫혀 있어요. 메시아가 올 때만 열립니다. 그런데 스가랴서 예언에 보면 동편 문 맞은편에 있는 쪽이 메시아가 지나가는 길인데 그 메시아가 지나가는 그쪽에 매장돼야만 부활하기 때문에 모든 유대인 부호들은 거기에 무덤을 썼는데 그래서 거대한 공동묘지가 형성돼 있습니다. 국가수상급 인물들만 거기에 묻힐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몰래 갖다 놓으면 안 됩니다. 스가랴 말씀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메시아가 지나갈 때 부활한다고요. 유대인 교포들이 지원하는 재정지원이 너무 켰기 때문에 환전상인들, 즉 데나리온과 금화 은화를 성전에서만 유통하는 세겔로 바꿔주며 환차 이익을 엄청 남겼습니다. 그 환차 이익을 관장하는 사람이 대제사장입니다. 지방민들이 가져온 예물을 하나님의 성전에 바치기 힘들다고 말라기 3장을 인용하면서 불합격 판정하고, 대제사장의 하도급 목장에서 온 싱싱한 양들을 바꿔치기 하면서 엄청난 이익을 남깁니다. 종교단체가 거대한 상행위가 이뤄지는 곳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는 그걸 보신 겁니다. 예수님께서는 채찍을 드시고 쫓아냈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을 향해서 부수신 게 아니라 예루살렘 성전이 중심이 되어 유지된 유대사회의 거짓된 천국관, 거짓된 하나님관, 거짓된 종교관, 거짓된 구원관, 그 모든 것을 부수시기 위해서 그렇게 행동하신 겁니다. 아마 지금도 살아계신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다면 다 부수실 가능성이 많습니다. 돈을 내고 항존직 선거에 나가는 것 다 부수시고, 돈을 내고 총회장 선거에 임하는 것 다 부수시고,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측 총회장에 예수님이 들어가시면 먼저 기도합시다, 하지 않고 기도하지 마라, 회개부터 하여라, 이렇게 아마 말씀하실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성전을 향한 거룩한 도발은 예수님 사역의 마지막 돌아가시기 직전, 아마도 돌아가시기 직전 한 주 또는 매우 근접한 시간에 일어났다고 봐야 합니다. 유월절에 일어났습니다. 그럼 이것은 아마도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그 주에 이 일을 행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걸 어떻게 알 수 있느냐면 마태복음 26장에서 예수님이 고소당할 때 성전을 훼방한 자 성전을 허물어뜨리겠다고 말한 자라고 고소되는 걸 볼 때, 예수님의 이 행동은 예수님을 치명적 위험으로 몰아넣었고 결국 죽음으로 몰아넣은 행동입니다. 그런데 이런 예수님의 행동이 거룩한 도발을 일삼으시고, 유대인 입장에서 볼 때 행패를 부리는 행동만 했다면 우리 예수님은 바로 유대인들이 체포해서 바로 죽여 버릴 수 있습니다. 스데반을 죽이듯이 죽여 버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개인기가 너무 좋으셨습니다. ‘유월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니 많은 사람이 그의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의 이름을 믿었으나’ 예수님께서 어떤 표적을 행했느냐면 마태복음 11장 2-6절에 나옵니다. 첫째, 앉은뱅이를 일으키는 기적, 그건 요한복음 9장에 나옵니다. 그다음 가난한 사람에게 복음을 전한 것, 가난한 사람들의 빚 탕감 선언을 많이 하셨습니다. 예수님에게 감동받은 사람들은 예수님에게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전부 다 채무자에게 채권 무효를 선언했기 때문에, 예수님 따라 다닌 많은 제자들은 채권을 다 포기했기 때문에 빚 탕감이 일어나서 가난한 사람들이 빚의 노예에서 벗어나는 겁니다. 누가복음 17장에 보면 문둥병자가 깨끗해졌습니다. 요한복음 5장에 보면 앉은뱅이가 일어났습니다. 앉은뱅이가 일어나며 눈 먼 자가 다시 보게 되며 문둥병자가 깨끗하게 되며 가난한 사람이 복음을 받으며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며, 요한복음 11장의 나사로입니다. 이런 일련의 대여섯 가지 표적들은 유대인들이 전혀 흉내 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건 귀신을 쫓아내는 건 포함 안 됐죠? 그건 유대인 구마사, 유대인 엑소시스트들도 귀신을 쫓아냈기 때문에 포함이 안 된 겁니다. 유대인들이 전혀 따라하지 못했던 건 앉은뱅이를 일으키고 눈 먼 자를 회복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이건 총체적으로 메시아가 와서 이 땅에 하실 일들을 망라한 그 이사야 35장의 성취입니다. 예수님이 성전을 도발하시고 성전에서 난동을 부리시고 체포가 되는 분이 아니라 예수님을 쉽게 체포하기에는 너무나 대단한 누적된 카리스마, 엄청난 표적들이 예수님을 에워싸면서 그의 방벽이 되어줬습니다. 바로 이런 딜레마에서 니고데모가 등장합니다. 니고데모는 두 가지 딜레마가 있었습니다. 신성모독적인 행동을 일삼는 예수가 죽어 마땅한 신성모독자인지, 아니면 모세와 엘리야급 표적을 행한 모세와 엘리야급 예언자인지가 그에게 큰 의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밤에 예수께 나아왔습니다. 그런데 유대인 관원이라는 말을 볼 때, 그가 유대인 관원을 대표해서 왔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왜? 왜 알 수 있느냐면 이 관원이라는 말은 아르콘이라는 말인데요. 71명으로 구성된 유대인 자치정부입니다. 유대인 자치정부의 국회의원과 대법원을 합해 놓은 것을 산헤드린이라고 합니다. 산헤드린은 71명으로 구성돼 있는데, 그 한 명을 우리는 아르콘이라고 말합니다. 로마 같으면 집정관입니다. 아마도 이 아르콘, 관원이 71명의 산헤드린 회원 중에 온건파를 대표해서 아마도 왔을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왜? 그렇게 이해할 수 있는 이유는 그가 유대인 관원이라고 소개되는 걸 볼 때, 그가 순전히 개인자격으로 오지 않았다는 겁니다. 이 말은 예수와 바리새인 사이의 타협, 물밑 거래가 가능한 지점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의 딜레마는 이겁니다. 이 사람이 행한 기적, 엄청난 모세와 엘리야급의 표적, 이런 표적은 분명히 예수님이 하나님과 함께 하시는 분이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예언자입니다. 어떤 랍비에게도 최근 400년 동안 엘리야 이래로 한 600년 이상 이런 표적이 전혀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은 모세와 엘리야급 표적의 실행자입니다. 예수님은 최소한 모세와 엘리야의 동급이거나 그 이상입니다. 문제는 모세 또는 엘리야급 하늘 표적의 실행자인 예수가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을 도발하고, 하나님이 거하신다고 믿어지는 성전을 훼방하고 성전을 뒤집고 다니니까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겁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는 분이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성전을 훼방하고 다니는 게 이해가 안 되니까 이 두 가지 모순 상황을 조화시키려고 하는 겁니다. 하나님에게로부터 온 선생, 예수님을 이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선생이라는 말, 랍비는 큰 자라는 말입니다. 랍비는 the elevated one highly one입니다. 아주 높으신 분, 여러분 7만 원짜리 바닷가재가 뭐에요? lobster, 그 lob은 아닙니다. lobster는 7만원하는데 높은 사람이 먹는 음식 맞습니다. 이 rab입니다. 이건 high 이런 뜻입니다. rabbi, 두 개 붙으면 더 높은 사람, doubly high, 그래서 rabbi는 doubly high, 매우 높으신 지엄하신 스승님, 이런 뜻입니다. 그런데 이런 랍비는 그냥 랍비가 아니라 스승은 분명히 일군의 제자를 데리고 다녀야 합니다. 그러고 나서 돈을 받고 밥을 얻어먹어야 합니다. 스승은 절대로 credit card를 가지고 다니지 않습니다. 랍비는 지정한 곳에 가서 밥을 먹으면 계산을 누군가 다 해줍니다. 그게 랍비입니다. 선생이라는 디다스칼로스라는 말은 그게 아닙니다. 이건 전문가 technical 한 teacher입니다. 이건 굉장히 한 분야의 일가를 이룬 분입니다. 예수님을 한 분야의 일가를 이룬 선생이라고 지금 말합니다. 예수님이 분명히 하나님으로부터 온 선생님이 맞는데, 하나님과 함께 하는 걸 증거하는 표적이 맞는데 왜 이렇게 성전을 훼방하십니까? 하는 질문을 한 겁니다. 한 번 보십시오. 니고데모가 예수님께 질문한 게 있습니까? 없습니까? 3장 3절에, 질문한 게 없는데 대답한다는 말을 했죠. 2절에는 질문한다는 말이 없는데 3절에는 대답한다는 말이 나오잖아요. 3장 2절에 보니까 랍비여, 선생 또는 디다스칼로스라는 말을 썼고, 3장 3절에 보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것 보세요. 질문도 안 했는데 무슨 대답을 하는 거예요? 질문이 들어 있다는 말이었다 이거에요. 당신은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사람이 맞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당신이 성전을 훼방하시고 난동을 피우십니까? 이렇게 질문한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내가 하고 있는 이것,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이 행동, 성전을 청소하는 이 행동, 내가 사람을 고치는 이 행동, 이 모든 것은 둘 다 같은 현상입니다. 성전을 깨끗하게 하는 이 행동과 내가 죽은 자를 일으키고 병든 자를 고치고 문둥병을 깨끗케 하는 이 일은 똑같은 겁니다. 문둥병 같은 이스라엘을 회복하는 것이고 죽은 자처럼 살아있는 이스라엘을 회복하는 것이고, 성전이 하나님과 이스라엘 민족의 끊어져버리고 죽어버린 언약관계를 회복하는 것이다, 성전을 청소하는 사건과 문둥병을 고치는 사건과 앉은뱅이를 걸어 다니게 만드는 사건은 똑같은 것입니다. 앉은뱅이를 걸어 다니게 만든다는 말은 구약성경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걷는다는 말은 할라크 동사입니다. 걷는다는 말은 이스라엘 민족에겐 순종한다는 말과 똑같습니다. 여러분 혹시 그 말을 기억하세요? 에녹이 하나님과 300년간 동행했다, 이건 걷는다고 합니다. 에녹이 하나님과 300년간 걸었다는 뜻입니다. 주와 같이 길 가는 것, 그게 할라크 동사입니다. 창세기 17장 1절에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아브라함에게 하는 말 행하다, 할라크 동사입니다. 그 말은 행하다, 걷는다는 동사는 순종한다는 말인데, 38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불순종을 했죠? 그 이스라엘 민족의 38년 불순종을 다시 리마인드 시키고 기억나게 하는 한 환자가 38년 동안 솔로몬 다섯 행각 밑에 누워 있다는 말이에요. 보건소에 와서 38년을 누워 있는 거예요. 공동보건소에서 누워 있는 38년 된 병자를 예수님이 일으키셔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게 만들었단 말이에요. 이 말은 38년, 즉 불순종한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이 인물이 일어났다는 말은 이스라엘 민족의 언약관계를 회복해서 다시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 사역이다, 지금 내가 하는 이 일련의 사역은 성전을 깨끗하게 하는 사역, 앉은뱅이를 일으키는 사역, 눈 먼 자를 다시 보게 하는 사역, 이 모든 것은 언약관계를 회복하여 하나님의 참 백성을 회복하려는 사역, 즉 하나님 나라의 활동인데 이 하나님 나라의 활동을 알지 못하고 너는 어떻게 내가 성전에서 난동피우는 모습을 보고 너무 센세이셔널 하다고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고개를 갸우뚱 거리면서 내가 하는 표적을 보고 놀라기만 하느냐, 내가 하는 표적을 보고 놀란 너는 내가 성전을 청소한 거룩한 도발행위가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회복시키고 치료하고자 하는 나의 행동인 걸 모르느냐? 이렇게 예수님이 대답해준 겁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예수님의 가장 독특한 표현은 ‘진실로’를 두 번 쓰는 것과 앞에 쓰는 것입니다. 그 당시 모든 랍비의 문장에는 아람어 문장에는 아멘이 뒤에 있습니다. 어떤 말을 하고 나서 아멘을 뒤에 합니다. 옛날 아람 히브리인들은 어떤 말을 하고 나서 진짜 자기의 진심이 담길 때 아멘을 합니다. 내가 오늘 당신에게 밥을 사겠습니다, 아멘, 이렇게 하면 진짜 사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렇게 합니다. 아멘 아멘 내가 사겠습니다, 이렇게 하니까 아멘을 두 번 쓰시고 아멘을 앞에 쓰신 건 독특한 예수님의 어법입니다. 어떤 문서에도 이런 어법이 나오지 않기 때문에 이건 신학에서 the criterion of dissimilarity, 비유사성의원칙이라고 해서 예수님의 말투가 전혀 다르던가 하나도 안 닮았는데 그걸 예수님의 original voice라고 합니다. 신약신학에서 그렇게 말합니다. 이런 걸 the criterion of dissimilarity 라고 말합니다. 신학대학원 2학년에 가면 배웁니다. 예수님의 말투 중에서 아멘 아멘 이렇게 앞에 두 번 쓰는 건 예수님이 얼마나 격정적인 말씀 사용자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을 많이 하시진 않았지만 한 번 하시면 강력한 임팩트 있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 끝에 언어생활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말을 하려거든 빙빙 돌리지 말고 Yes Yes No No 이렇게 분명하게 끊어놓으라고 말했습니다. 제가 교수님을 사랑하고 존경하는데요, 그런데 이제 퇴학하겠습니다, 이러면 안 된다는 거죠. 사랑하고 존경하면 계속 공부를 해야지, 제가 자매님을 정말 사랑하는데요, 사랑하기 때문에 761일 만에 이별을 통보하는 바입니다, 이러면 안 되죠. 예수님 언어생활은 간결하고 단호하고 직설적이어서 예수님은 거리낌 없는 화자였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지금 닫힌 종교체계, 바리새인 종교체계, 성전제사를 통하여 율법준수를 통하여 하나님을 알 수 있다고 믿는 바리새인적인, 아래로부터 인간의 혈통과 교육과 가문의 배경, 가문의 종교적 전통, 약간 성경 공부한 내용, 랍비스쿨에서 공부한 내용, 닫힌 체계 안에서 공부한 내용을 가지고는 도저히 내가 벌이는 하나님 나라 운동의 전모를 파악할 수 없다, 라고 한 겁니다. 여러분 이집트 오벨리스크에 가보면 이집트 상형문자가 있죠? BC 20세기 투탕카멘, 이런 사람들 피라미드에 가면 상형문자가 있죠? 상형문자는 다 알파벳입니다. 도끼 두 자리는 B, 새 한 마리는 A, 이런 겁니다. 그걸 표현했는데 우리가 그런 이집트 파피루스나 이집트의 상형문자체계를 다 알지 못하면 한자도 읽을 수 없는 겁니다. 마치 이 예수님의 성전 난동사건과 문둥병자 치료사건을 볼 때, 율법을 어기는 것처럼 보이는 안식일 치료사건, 손을 안 씻고 밥을 먹음으로써 율법을 어기는 것처럼 보이는 과감한 불결자와의 접촉들, 예수님이 문둥병자를 만져버리거든요. 이건 큰일 나는 겁니다. 정결예법으로 보면요. 문둥병자를 만지는 것 자체는 그가 오염된다는 걸 의미하거든요. 예수님은 만져버렸어요. 혈우병 걸린 여인이 옷을 만지도록 내버려 두었어요. 정결예법을 과감하게 어기는 행위, 한 번 어길 때마다 안식일을 어겨서 병을 고칠 때마다 안식일을 어기는 것처럼 보이는 그 행위 속에서, 안식일에 38년 된 병자가 벌떡 일어난단 말이에요. 예수님은 안식일에 일어나게 하는 게 메시지거든요. 안식일은 원래 죄로 물든 무거운 몸을 일으켜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날이거든요. 안식일의 메시지를 강력하게 하려면 안식일에 일으켜야 해요.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이왕이면 하루 더 누워 있다가 다음날 일어나라고 부탁하는 거거든요. 바리새인들의 마음은 안식일의 신성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안식일에 무거운 침상을 들고 가면 안 되니까 38년된 병자더러 하는 말이, 하루 더 누워 있으세요 제발, 이렇게 부탁하는 거거든요. 하나님의 생명력의 원시적 충만함을 전혀 모르고 안식일에 무거운 물건 들고 1.2km 가면 큰일 나니까 가지 말고 누워 있어달라고 하는 것이 상상력이 닫힌 종교, 죽음의 종교, 상식 이하의 종교, 인간을 하나님과 멀어지게 만드는 종교거든요. 예수님은 그게 아닙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을 어기는 행위를 통하여 안식일에 마땅히 무슨 일이 일어나야 할 것인가를 가르치는 것이고, 예수님은 손을 씻지 않고 밥을 먹는 그 행위를 통해서 불결한 것들을 배제하려고 하고 불결한 것들을 끊어냄으로써 거룩함을 유지하려고 하는 거짓된 종교의 위선을 폭로하기 위해서 불결한 것에 접촉하여 불결한 것을 거룩함으로 삼켜버리는 생명력을 과시하려고 한 것이거든요. 그런 모든 율법을 어기는 것처럼 보이는 행동 안에는 하나님 나라의 폭발적인 생명력이 과시되고 있거든요. 그런데 이런 하나님 나라의 폭발적인 생명력 과시를 그 전제를 알아보지 못하고, 왜 율법을 어기는 자가 이렇게 하나님과 함께 하는 표적을 행할까? 라는 질문을 하고 있느냐는 거예요.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질문에 빠져 있으니까 예수님께서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통치현장을 파악할 수 없다, 이해할 수 없다, 이렇게 한 겁니다. ‘니고데모가 이르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 너무나 초보적인 질문을 했습니다. 이 초보적인 질문에는 진실이 들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엄마 뱃속에서 다시 태어난 것과 똑같은 것이 거듭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듭난다는 말의 원래 원어는 위로부터 남입니다. 디노마이 안노테, 위로부터 태어나는 거예요. Born again에서 again이라는 말은 틀렸습니다. Born from above입니다. 위로부터 거듭난다는 말은 3장 5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겁니다. ‘물과’ 할 때 이 ‘과’가 conjuctive 등위접속사가 아닙니다. 그리스말에서 ‘과’라는 건 카이를 번역한 거예요. 카이는 that is to say, 이런 뜻입니다. 즉 이런 뜻입니다. 물 즉 성령, 이런 뜻입니다. 물하고 성령이 같은 뜻으로 쓰인 말이 대표적으로 에스겔 36장 25-26절입니다. 이거 하고 마치겠습니다. 이걸 많이 하니까 1부 때 사람들이 죽으려고 했습니다. 저는 성경을 많이 암송했기 때문에 하자고 하지만 여기에 있는 사람들은 이걸 듣기 위해서 애를 쓰다보면 찾는 게 귀찮습니다. 배째라, 이런 식이 됩니다. 에스겔 36장 25-26절 ‘맑은 물을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하게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 숭배에서 너희를 정결하게 할 것이며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이게 바로 물과 성령으로 다시 한 번 하나님과 언약관계로 들어가는 겁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감격적으로 지킬 수 있는 상태가 되는 것, 거듭난다는 말은 물과 성령으로 감화 감동되어서 하나님의 논리를 이해하고 하나님의 비전에 동참하여 하나님 뜻대로 살고 싶은 총체적인 준비성, 총체적인 동감, 총체적인 공감이 일어나는 상태, 이게 거듭나는 거예요. 물과 성령으로만 이런 일이 가능해요. 그런데 닫힌 유대인 종교 안에서는 성령의 역사에 관한 많은 예언들이 있었지만 무시했습니다. 이건 아주 중요합니다. 우리가 한 번 잘못 닫혀버리면 한 번 고정관념에 사로잡히면 하나님의 약속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구약성경에 이사야 53장에 메시아에 관한 예언으로 한 번도 인용되지 않았습니다. 구약성경에서 메시아에 관한 가장 대표적인 예언은 시편 2편입니다. 철창으로 만국을 다스리는 것, 알렉산더 대왕과 나폴레옹같은 메시아가 기대됐습니다. 그리고 외경이었던 song of solomon age, 솔로몬의 시편 18장에 보면 철창으로 만민을 다스리는 유대인의 구세주 메시아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두 구절에 대한 너무나 큰 믿음 때문에 이사야 53장,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 많은 사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주는 그렇게 약한 어린양과 같은 메시아에 관한 본문은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눈이 가려진 겁니다. 닫힌 체계 속에 사는 바리새인 유대 종교, 그 세계 속에 살았기 때문에 성전에서 예배를 드려야, 이방인과 접촉을 삼가야, 십일조를 하여야, 일주일에 두 번 금식을 하여야 하나님이 빨리 오신다고 믿었던 바리새인 종교로 볼 때는 위로부터 오는 성령으로는, 즉 이 세상의 모든 종교적 공적과 교육과 가문과 혈통은 어떤 것도 필요 없고 위로부터 하나님이 결정한 사람에게 불어 젖히는 성령만이 모든 새로운 하나님 백성을 재구성하고 재조정한다고 믿는 이런 구약성경 말씀이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이게 들어오겠습니까? 지금 제가 만일 우리 대한민국에서 기득권을 튼튼히 누리고 완강한 기득권 요새를 구축했다면 이런 기득권 체제를 허물어뜨리는 성경말씀이 제 눈에 들어오겠습니까? 안 들어옵니다. 제가 만일에 집 10채를 부동산 재테크를 하고, 양진일 목사에게 집을 2채씩 줄 정도로 집이 많다면 제가 레위기 25장을 읽겠으며 이사야 58장을 읽겠습니까? 아마 찢어내고 싶을 겁니다. ‘유리하는 빈민을 집에 들이며’ 이사야 5장 8절 ‘가옥에 가옥을 이으며 전토에 전토를 더하여 빈틈이 없도록 하고 이 땅 가운데에서 홀로 거주하려 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이런 말을 다 오려내고 싶을 겁니다. 제가 만일 집이 많다면요. 그런데 저는 집이 없기 때문에 계속 그런데 눈이 반짝 반짝 거리고, 레위기 25장 보면 가슴이 뛰면서 집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 말씀 모두가 저한테는 공감을 일으키고 불꽃처럼 다가옵니다만, 제가 만일에 성공한 대교회 목사가 됐다면 성경구절 중 들어올 말은 거의 없는 겁니다. 제가 성공한 사람이 되고 잘못된 사회시스템, 불의한 세속의 구조에서 권력과 성공과 영화의 정점에 서버리면 다시는 성경을 깨달을 수 있는 마음을 완전히 상실해 버리는 겁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아셔야 합니다. 내가 거짓된 체제 위에서 성공을 구가할 때는 성경말씀을 들을 수 있는 영적 가청권에서 영원히 멀어져버립니다. 제가 다시는 그렇게 안 되려고 하는 목적은 저의 영악한 결단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듣는 이 일이 내 생애에서 가장 큰 행복이기 때문에 저는 그런 것에 대한 마음을 버려버린 겁니다. 왜? 계산을 한 겁니다. 어떤 계산을 했느냐면 제가 만일 그런 방식으로 살아버리기 시작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나에게 어떤 감흥도 호소도 일으키지 못한 채 나는 이 말씀과 영원히 등지는 사람이 됩니다. 지금 여러분 이 땅에서 가문과 혈통으로 구축된 완성의 세계가 있습니다. 서울대 연대 고대를 나오고 강남에 살고 조선일보를 보고 25억 원 이상 재산을 가지고, 아파트 세 채 정도를 가지고, 집안에 의사와 판사가 사촌 이내에 한 명씩 있고, 휴가는 프랑스나 동남아권을 훨씬 초월하는 그런 곳으로 가고, 골프는 적어도 마이너스 핸디 5는 치고, 그다음 가난한 사람에게는 명함을 절대로 안 주고, 룸살롱 같은 데는 마음대로 가고, 이런 모든 것이 우리 대한민국에서 은밀하게 거래되고 있는 겁니다. 장자연리스트라는 그 신문기사를 보면 조선일보 사장이 나옵니다. 장자연 리스트는 성상납을 하고 자괴감에 빠져 자살해버린 여배우 이야기입니다. 거기에 이미숙이라는 영화배우가 가서 증언을 했는데, 그게 문제인 겁니다. 대한민국의 최고 언론재벌들과 판사와 검사와 사장님들의 세계입니다. 그들에게는 연예인은 성적으로 농락하는 자입니다. 조선일보에서 이건 조선일보가 아니라 일간 조선스포츠라는 걸 온갖 짓을 다하지만 명백한 조선일보라는 걸 분리하지 못합니다. 이것은 너무 큰 부조리입니다. 나봇의 포도원 사건 만큼 큰 부조리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것이 언론사 사장이 관련되기 때문에 대부분 이게 무슨 일인지 모릅니다. 너무나 천인공노할 죄악들이 실제로 벌어지고 있어요. 여러분과 제가 알아야 할 것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서 하나님의 정의로운 음성을 듣는 하나님 말씀이 들려오는 가청권 내에 살 것인지, 이 멸망할 닫힌 체제 안에 완성자가 되고 그 닫힌 체제의 권력과 쾌락의 정점에 서서 살 것인지, 그걸 판단해야 합니다. 여러분 지금 보니까 대부분이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상태인 것 같습니다만, 무슨 말인지 도저히 모르겠다, 그렇게 생각하게 될 나이입니다. 여러분은 젊기 때문에 출세와 이런 것과 아무 상관이 없을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 신문도 전부 남 이야기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특히 요즘처럼 비정규직과 알바와 이런 게 많은 사람들은 주인의식을 상실해버린 사람들이 너무 많기 때문에 신문을 골똘히 보면서, 나라가 정말 큰일 났다, 그런 사람은 거의 없어지고 대부분이 개인적인 관심사, 내가 이번에 사귀었는데 이놈과 700일을 돌파할 것인가, 500일을 돌파할 것인가, 그래서 요새 아이들은 500일 돌파했다고 케이크 사고 그럽니다. 그런데 그 다음날 헤어졌다고 문자옵니다. 이런 별인간이 다 있습니다. 요새 진짜 웃긴 것이 700일째 연애 계속 했다고 자축하면서 수업 빠진 놈이 있습니다. 바로 그는 C학점이 나갑니다. 어떻게 100년을 해로해야 할 놈들이 700일 간신히 지났다고, 이렇게 20대가 썩어 문드러져버렸습니다. 썩어 문드러졌기 때문에 투표율도 없고, 마비장군이 스물한 살 때 국경을 지나갔습니다. 캘빈이 스물여섯 살 때, 바이런은 20대 때 전부 다 주목했습니다. 이병주의 <지리산>을 보면 열 네 살짜리 아이들이 마르크스를 읽고, 진주 농민전군학교 아이들이 바로 운동권이 됩니다. 김일성도 자기가 열일곱 살 때 20도가 넘는 백두산 밀령을 쏟아냈다고 합니다. 이렇게 중요한 20대인데, 우리나라 20대를 이 땅의 기존사회가 너무나 병들게 만들었습니다. 그런데도 20대는 일어나지 못합니다. 20대가 일어나서 여의도와 세종로와 충무로와 테헤란로를 완전히 바꿀 수 있는데, 이건 사실 요한복음 주제가 아니에요. 미가서 주제입니다. 미안합니다. 그런데 제가 말한 것은 거듭나면 대한민국에서 소위 인생의 완성이라는 게 얼마나 우스운가를 알게 되는데 거듭나지 못하면 그런 기개가 없기 때문에 부러워하고 그런 진영에 속하지 못하는 데에 대한 피해의식이 있다는 거예요. 우리 가향공동체는 아무도 부러워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만, 이 세상 사람들은 꽤 부러워합니다. 마무리합니다. 거듭난다는 말은 물과 즉 성령으로 거듭남, 성령으로 거듭나면 하나님께 강력한 소속감을 가진 결속감이 일어나고 형제자매끼리 결속이 일어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상태가 일어납니다. 자기의 은사와 재능이 꽃핍니다. 성령 충만하면 은사와 재능이 꽃핍니다. 성령 충만하면 성령의 열매가 나타나 인격자가 됩니다. 20대가 인격자가 됩니다. 20대가 인격자가 된다는 말은 저 사람은 이제 인생이 확고한 반석위에 섰다고 느끼는 겁니다. 그런데 20대 인격자가 어떤 결단을 어떻게 할지 모르고 전후좌우를 분간할 수 없는, 끊임없이 기회주의적인 생각만 굴리는 사람들은 아직까지 인격이 없는 겁니다. 인격이 없으면 성공할 지라도 성공을 담보할만한 인격이 없으면 성공이 다 절정 때 날아가 버립니다. 여러분 20대 때 신실한 인격의 소유자, 책임감이 넘치는 소유자, 사랑이 넘치는 사람, 공감과 동정심이 많은 사람, 이런 말을 듣는 게 참 중요합니다. 그런데 그건 성령이 지속적으로 감화 감동해야만 일어날 수 있기 때문에 함부로 할 수 없어요. 바리새인은 집안이 좋아서 좋은 교육을 받았습니다. 좋은 학군에 태어났습니다. 닫힌 체계는 변동이 거의 불가능한 수구적 질서에서 귀족층과 빈민이 나눠지는 세상입니다. 이런 바리새인은 닫히 체제에서 좋은 교육을 받았고 좋은 집안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이름도 니고데모, 그리스 이름을 썼습니다. 이런 닫힌 체제의 니고데모는 도달할 수 없는 하나님 은총, 신적임의성이라 불리는 바람의 임의성입니다. 그러면 누가 거듭납니까? 거듭나는 사람들은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하나님의 임의적이고 일방적인 성령의 바람을 맞아서 거듭나기 때문에 네가 동원할 수 있는 인간의 공로가 전혀 없다, 이런 뜻입니다. 전혀 인간의 공로가 없다, 79년 5월에 성령의 바람에 휩쓸려서 완전히 새 사람 되는 그런 과정처럼 인간이 대응할 수 있는 교육적 자원이 없습니다. 학벌이나 인연 없습니다. 좋은 아비 밑에 태어나지 않아도 됩니다. 좋은 랍비 가문에서 태어나지 않아도 됩니다. 성령의 거룩한 일이 있어야 합니다. 성령은 인간의 학군 학벌 등 지역구분 또는 좋은 선생 이런 얽매이는 모든 것들을 순식간에 뒤집어버리는 임의성, 임의로 선택하여 거듭나게 하는 놀라운 은혜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 은혜는 목사님이 줄 수가 없습니다. 절대로 목사님과 교회가 특정인을 구원할 수 없는 겁니다. 너무 불행하게도 너무 다행인 진실입니다. 목사님이 구원받기를 기대한 그 사람이 구원 받는 게 아니더라고요. 제가 오랫동안 경험해봤는데, 제가 원하는 사람이 구원받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는 사람이 구원받더라고요. 저는 애를 써서 사람을 모아서 말씀을 듣게 하지만 구원받는 사람은 하나님의 신적 임의성에 맡겨져 있더란 말이에요.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근원과 출처를 알 수 없는, 초월 저편에서 하나님께로부터 온 그 바람만이 거듭나게 하여 예수님을 알아차리고, 예수님이 하는 이 운동이 하나님 나라 운동임을 알아차리게 만든다 이 말이죠. 저와 여러분이 간절히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제 인생의 20대, 제 인생의 위기 때에 하나님께로부터 불어오는 바람, 성령의 바람이 불어서 사망을 당한 이 자에게 불어서 마른 뼈와 같은 내 인생이 하나님의 군대로 열납되어 일어나는 재활과 소생과 복구를 경험하게 해달라고 기도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이스라엘 선생들이 이런 놀라운 성령의 역사로 이스라엘 민족과 개인이 갱신되는 것을 왜 몰랐습니까? 성경구절 다섯 구절이 적어도 바람 같은 성령의 역사로 이스라엘의 집단갱신과 거듭남에 대해서 이야기 합니다. 요엘 2장 28장입니다. 이사야 32장 15절입니다. 에스겔 36장 25절입니다. 예레미야 31장 31절입니다. 에스겔 37장까지, 이런 성경구절은 적어도 바람 같은 성령이 임의로 불어서 이스라엘 민족의 각각을 이스라엘 민족의 특정한 집단을 거듭나게 하여 하나님의 군대로 살게 만드는, 하나님의 뜻을 집행하는 순종의 화신으로 살게 만드는 성령의 역사를 분명히 증언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명백한 다섯 구절도 모르는 니고데모가 이제 예수님께 책망을 받는 겁니다. 저와 여러분이 닫힌 체제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길이 없지만 성령이 우리에게 성령의 지시를 들을 수 있을 만큼 거듭나게 하여 예수님의 동선과 족적을 따라 우리가 우리 인생을 디자인 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간절히 간절히 기도합니다. 성령의 바람이 사망을 당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불어와서 생기가 불어와서 이스라엘 죽은 자들을 군대로 일으켰던 것처럼 인생의 어려운 한 때를 보내는 저희에게 성령의 바람을 보내셔서 거듭나게 하시고, 하나님과 강력한 계약적 결속감에 있게 하여 주시고, 하나님 뜻을 성취하는데 위대한 전진과 진보를 경험하게 하여 주소서. 목사도 교황도 주교도 성령을 부릴 수 없고 성령이 저희를 부릴 수 있사오니 바람 같은 성령님이여, 저희를 부려주시고, 저희를 써 주소서. 예수님 이름 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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