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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로마서 1:16-17 /제목: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

by 【고동엽】 2022. 1. 12.

본문: 로마서 1:16-17

제목: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

 

갈라디아서를 읽은 사람에게만 로마서가 이해가 돼요. 논리가 그렇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을 읽어야 로마서 1장부터 5장이 이해가 되거든요. 갈라디아서 3장은 창세기부터 구약성경 전체를 하나의 원리로 설명합니다. 구약성경 1500년의 역사는 단 한 가지 하나님의 목적에 의해서 지탱되고 유지되었다, 그 목적은 바로 창세기 12장 1절과 3절인데 아브라함 너로 말미암아 천하만민이 복을 얻을 것이다, 그 약속 하나로 1500년 동안 구약역사가 유지됐다는 거죠. 로마서를 바로 읽으면 이해가 안 되는데 가장 먼저 쓰여진 서신 중의 하나인 갈라디아서를 읽어야 이해가 됩니다. 갈라디아서 2장 7절부터 8절 9절은 바울이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 즉 무할례자의 사도로 임명을 받았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무할례자의 사도가 된 사도 바울은 이방인이 들을 수 있도록 이방인에게 매우 친화적인 이방인 친화적인 복음을 제시했습니다. 이점이 야고보랑 다릅니다. 여러분 야고보서 한 번 보세요. 야고보하고 바울 두 사람이 신약성경을 양대 산맥으로 가릅니다. 근데 야보고와 베드로는 할례자에게 복음을 전합니다. 특히 게바 즉 베드로는 할례자에게 복음을 전하고 바울은 무할례자에게 복음을 전한다고 했는데 문제는 이 한복판에 이렇게 구역을 나눠준 사람이 야고보거든요. 야고보... 근데 야고보를 한 번 읽어보시면, 이 야고보서는 야고보가 쓴거죠. 야고보서는 산상수훈을 풀어 놓은 책이거든요. 야고보서는 산상수훈을 풀어 놓은 책이에요. 야고보서의 특징은 뭐냐면은 신약성경의 아모스서이다, 이렇게 말하거든요. 야고보서를 읽어 보면은 완전히 하나님의 말씀에 정통한 엘리트들을 위한 복음이란 느낌이 확 들어옵니다. 한 마디로 산상수훈의 복음이에요. 야고보서는... 그렇다면 야고보는 왜 이렇게 엄격하고도 높은 수준의 복음을 전했냐면은 하나님의 친백성 아브라함의 직계후손들은 훨씬 더 압도적으로 높은 윤리와 도덕과 사회생활을 유지해야만 이방인들을 끌어갈 수 있기 때문이었어요. 그러니까 이방인들을 영적으로 향도하고 높은 신령한 봉우리까지 데려가려면은 아브라함의 직계후손들은 훨씬 더 높은 수준의 기독교인들이 되어야 된다고 실제로 본거예요. 그래서 산상수훈을 그대로 읊어 놓은 책이 야고보서예요. 그러니까 할례자에게 전한 복음은 산상수훈의 복음이다 할 수 있습니다. 율법을 철두철미하게 지키는 걸 전제한 복음이에요. 그러면 할례자에게 받쳐진 복음은 율법이 구원을 준다고 믿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했다라는 말은 율법을 지킬 능력을 줬다는 말이다 라고 해석을 한 거예요. 그래서 산상수훈과 야고보서는 할례자들에게 간 복음이다. 그러면 무할례자에게 간 복음은 뭐냐? 바로 바울이 무할례자에게 간 복음입니다. 그런데 고린도전서나 고린도후서나 빌립보서 그리고 갈라디아서 이 4개의 서신을 보세요. 야고보에게서 온 사람들이 바울을 견제했다고 되어있습니다. 야고보에게서 온 이 형제들이 왜 바울을 견제했냐 하면은 혹시 바울이 이방인 개종자들을 얻기 위하여 율법 준수의 중요성을 덜 강조하지 않는가를 엿보러 온 거예요. 조사하러 온 거예요. 조사하러... 그래서 사도 바울의 편지에는 야보고에게서 온 사람들이 라는 말이 가끔 나오고, 유대인 형제들이란 말도 나오죠. 그래서 사도 바울이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할 때 이 복음은 바울만이 쓴 말이거든요. 복음이라는 단어는 바울이 썼지 베드로나 야고보가 쓴 말이 아니에요. 자 복음이란 말은 사도 바울이 썼는데 사도 바울의 마지막 제자였던 마가가 쓴 마가복음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고 해서 복음이라는 단어가 나오죠. 그래서 마가복음과 로마서가 한 편이에요. 그러니까 마가복음은 사도 바울의 복음을 이해하고 쓰여진 복음서입니다. 그래서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라는 말은 뭐냐면은 내가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어제까지 우상숭배를 일삼는 이방인들에게 가서 복음을 전할 때 내가 이방인들에게 좀 사영리식으로 약간 축약된 식으로 복음을 전하는 이 축약된 복음, 그러니까 야고보나 정통 유대인들이 볼 때는 아브라함부터 시작된 1500년의 구속사를 과감하게 생략해버린 이런 방식의 복음 전하는 방식을 거리끼게 여겼다고, 좀 약간 이상하다 느꼈는데 바울은 내가 이방인에게 가서 전하는 이 복음을 나는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이렇게 말함으로써 자기가 이방인들 가운데 전했던 복음 사역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고 자기에 대해서 갖는 시비에 대해서 원천봉쇄를 하는 거죠. 사도 바울은 로마에 있는 사람들이 자신이 야고보적 사람들에 의해서 약간 논쟁거리가 되고 있다는 걸 염두해 두면서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라고 말을 하는 거거든요. 그런데 사도 바울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사도 바울은 할례를 강조하지도 않고 모세오경에 있는 613가지의 계명도 강조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뭘 말했냐면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모두의 죄를 뒤집어쓰고 율법의 저주를 받으사 죽은 자 가운데 삼일 동안 매장되었다가 삼일 만에 부활했음을 강조했습니다. 구약 성경을 모르지만 우리가 죄와 사망에게 감금당했다고 믿는 모든 사람들, 죄와 사망이 내 인생을 망쳤다고 믿는 모든 사람들은 간단한 사영리 만큼이나 간단한 하나님의 아들 나사렛 예수가 죄와 사망에 권세에 사로잡힌 모든 사람들을 대신해서 저주를 받고 그 저주를 받은 대가로 죽음을 경험하고 죽은 자 가운데 부활했습니다, 예수의 부활은 죄와 사망의 권세에 사로잡힌 사람들을 용서해 주시겠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죄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믿는 사람들에게는 성령의 약속을 부어주셨습니다, 또는 약속하신 성령을 부어주심으로 우리의 죄가 용서받았다는 확신을 주셨습니다, 이렇게만 말했는데도 성령이 임했다는 거죠. 우리 우인숙집사님 갈라디아서 3장 13절부터 22절을 읽어주세요. 그 다음에 이성영 형제님 이사야 46장 12절로 13절 읽어주십시오. 그 다음에 우리 하수진자매님이 신명기 6장 25절 읽어주십시오. 이 구절들을 읽으면 오늘 본문의 핵심에 도달합니다.

 

자 먼저 사도 바울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는 말뜻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갈라디아서 2장과 사도행전 15장을 잠깐 언급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야고보로 상징되고 대표되는 정통 산상수훈 복음파들, 아주 엄격한 복음파들, 높은 수준의 기독교를 전하는 사람들한테는 약간 의심어린 시선을 받으면서 견제를 당했습니다. 그런데 그 견제를 의식하면서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은 내가 이렇게 이방인에게 제자가 된 복음을 전파했을 때도 구원이 임했습니다, 내가 전하는 복음은 구원을 일으키는 능력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었습니다, 나는 이 능력을 선교현장에서 보았습니다 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이게 참 놀랍습니다. 여러분... 구약성경을 몰랐다고 제가 구원을 못 받았습니까? 제가 79년 11월 달에 구원을 받았다고 기억하는 그 달에 제가 구약성경을 거의 몰랐거든요. 거의 몰랐어요. 저는요. 79년 11월 달에... 구약성경을 읽었다 하더라도 기억이 나지 않았거든요. 그런데 뭘 그럼 기억했냐면은 79년 11월 달에는 내 인생이 죄와 사망의 법에 감금되었다는 것을 저는 뼈저리게 느꼈거든요. 죄와 사망이 내 인생을 옥죄고 있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에 구약성경을 다 읽어야만 도달할 수 있는 깨달음이 뭐냐면은 죄와 사망이 아담인류의 죄성이 내 인생을 칭칭 감고 있구나,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못하고 내가 원하지 않는 악을 행하는구나, 이렇게 깨닫는 것이 바로 뭐냐면은 아담 인류의 죄성이 내 인생을 칭칭 감아서 어찌할 바를 모르게 만들었다 라고 느끼는 그 자각이 구약성경을 읽은 사람이 도달할 수 있는 자각이라는 말이죠. 그러니까 저는 사영리 수준의 간단한 복음을 들었거든요. 박득훈, 김만석 같은 20대 후반 30대 초반에 젊은 평신도 교사가 설교할 때 제가 은혜를 받은 거거든요. 박득훈, 김만석, 이승장 이분들이 전부다 그때는 목사님들이 아니였어요. 지금의 이승장목사는 당시 30대 중후반이었고, 박득훈목사는 20대 후반이었어요. 그런 분들이 강단에서 복음을 전파할 때 제가 뒷자리에서 엄청 감동받고 성령을 받고 울었단 말이에요. 저는 그때 구약을 안 것이 아니였어요. 사도 바울처럼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저주를 받고 죽었다는 그 선언을 듣고 제가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었단 말이죠. 그러니까 이것은 뭘 가리키냐면은 사도 바울이 진짜 선교 현장에 가서 복음을 전할 때에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 이 복음에는 무엇이 나타났습니까?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의 의는 뭡니까? 쌍방속박적인 언약 관계에 들어가면 그 언약을 유지하기 위해서 하나님도 자신의 역할을 다해야 되고 이스라엘도 자신의 역할을 다 해야하거든요. 그러니까 쌍방속박적 언약에 들어간 언약의 당사자가, 계약 당사자가 서로에게 약속한 계약에 충실하게 행동을 다 할 때 그것을 의리를 다한다, 즉 의라고 말합니다. 의... 그런데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과 계약을 유지할 때 항상 하나님 앞에 계약적 의무를 다하지 못하여 의가 모자랐습니다. 항상... 그래서 그 모자란 의를 하나님이 대신 늘 채우셨습니다. 하나님의 남아있는 의로 이스라엘의 결손된 의를 메꾸어 가면서 언약관계를 유지해왔거든요. 그게 구약역사입니다. 자, 이제 신명기 6장 25절을 읽어주십시오.

 

25 우리가 그 명령하신 대로 이 모든 명령을 우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삼가 지키면 그것이 곧 우리의 의로움이니라 할지니라

 

예, 하나님의 언약을 다 지키는 걸 의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언약을 다 지키는 의를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의를 다 못지켰습니다. 이사야 46장 12-13절 읽어주십시오.

 

12 마음이 완악하여 공의에서 멀리 떠난 너희여 내게 들으라

13 내가 나의 공의를 가깝게 할 것인즉 그것이 멀지 아니하나니 나의 구원이 지체하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나의 영광인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원을 시온에 베풀리라

 

아~ 맞습니다. 옛날에 개역한글 성경에는 거리가 멀지 않다, 내가 나의 의를 가깝게 한다, 돌아온 탕자에 나오는 단어랑 거의 같은 단어가 2개가 쓰여 있었어요. 아버지가 돌아온 탕자에게 뛰어나가잖아요. 상거가 아직 먼데 여러분 기억납니까? 돌아온 탕자가 싸리문을 열고 돌아올 때 아직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달려 나가는 장면 나오죠? 아버지와 아들 중에서 의를 다 망친 사람 누굽니까? 아들이잖아요. 그렇죠? 아들은 의를 망쳤는데 아버지가 그 아들의 의를 대신 메꿔주면서 그 아들에게로 달려가서 의로운 관계를 회복하죠? 그게 바로 아들에게 나타난 아버지의 의거든요. 돌아온 탕자에 나오는 그 아버지가 하나님이라는 거예요. 탕자가 바로 창녀와 세리같은 이방인들이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방인들을 따뜻하게 환영하는 것이 옳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이 이야기가 바로 바울의 복음인거예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는 말은 뭡니까? 너덜너덜해서 자신의 도덕적 자원으로 살아갈 능력이 완전히 바닥난 탕자 같이 결핍된 영혼이 너털너털 걸음으로 집으로 돌아올 때 무조건 두 팔 벌려 환영하는 이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이 바로 복음에 나타난 의라는 거죠. 예수님은 복음에 나타난 의를 100% 성육신 하신 분이거든요. 예수님은 마음이 완악하여 멀리 떠난 우리가 집으로 돌아올 때 무조건적으로 영접해 주는 복음의 화신이라는 거죠. 그래서 복음에 나타난 의가 바로 그런 뜻입니다.

 

그런데 이 복음에 나타난 의는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 원어에는 이르게 한다는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이 말씀은 이런 뜻입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습니다, 믿음으로부터 믿음에 이르기까지” 이런 식인데 앞에 나오는 믿음은 하나님의 신실성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의 신실함이 사람들의 신실함을 견인하고 향도하여 파생시켰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신실하신 하나님을 보고 우리가 신실해집니다. 그러면 우리가 신실해지는 것은 우리의 공로입니까? 아니면 우리에게 신실함을 생기게 만들어준 하나님의 압도적이고 영원한 신실성 때문입니까? 하나님의 압도적이고 영원한 신실성이 우리 안에 신실함을 자라게 만들어 주니까 우리의 믿음은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압도적 신실함이 우리 마음에 불러일으킨 효과인 것이고 하나의 열매인 것이죠. 그래서 우리의 믿음은 공로가 아닌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 안에 나타난 이 하나님의 달려오심, 거리를 좁혀오심, 우리를 무조건적으로 영접하기 위해서 포용해주시고 잔치를 벌여주시는 이 하나님의 압도적인 친절하심, 이 신실하심, 이걸 보고 하나님께 마음을 열고 믿는 거거든요. 그래서 진짜 의로운 사람이라 함은 도적적으로 윤리적으로 완성된 사람이 아니라 17절 마지막 절입니다. 디카이오시네 의로운 사람이라 함은 하나님의 신실함에 붙들려 사는 사람이다, 이것은 하박국서 2장 4절을 바울이 잘 풀이했습니다. 진짜 의로운 사람은 윤리 도덕적으로 완전체를 구현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눈부신 의로우심에 이 압도적인 의로우심에 감화감동하여 붙들린 자라는 것입니다. 진짜 의인은 하나님의 압도적인 신실하심에 추동되어 붙들려서 지탱되어 사는 자입니다. 이점이 참 중요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애를 써도 우리는 우리의 윤리적인 도덕적인 완성된 행동으로 의에 도달하기는 힘듭니다. 우리는 실패합니다. 실패할 때 남는 것은 자조와 탄식입니다. 바울은 자조하지 말고 경멸하지 말고 하나님의 압도적인 저 복음에 나타난 의, 세리와 창녀들을 식탁에 불러들이는 저 깊이를 다 알 수 없는 저 신비로운 하나님의 압도적인 신실함에 붙들려서 거기에 지탱되어 살아가는 것, 이것이 우리에게 남은 희망임을 강조합니다. 그러면 이렇게 살다보면 어떻게 될까요? 점점점점 우리는 신실한 자가 되어갑니다. 지금 제 앞에 있는 여러분들은 다 신실한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여러분이 바깥에 나가서 이렇게 사오십명, 삼사십명의 신실한 사람들을 어디서 만날 수 있습니까? 교회 외에서는 만나지 못합니다. 제가 교회에 대해서 굉장히 보수적으로 교회를 희망이라고 보는 이유는 교회 외에서는 이렇게 무리지어 있는 신실한 사람을 만날 수가 없어요. 예수님의 보혈에 피뿌림을 당하지 않으면 이렇게 신실해지지 않아요. 10년 20년 계속 신실한 사람,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단 한 푼의 돈도 받지 않고 교회 가서 봉사를 계속하는 사람, 이것은 신적 신실함에 붙들린 사람이 아니면 불가능한 거거든요. 여러분에게 지금 신실함이 나타나 있거든요. 하나님의 신실함이 여러분을 지탱하는 거예요. 오직 의인은 하나님의 압도적인 신실함, 예수님 안에 나타나서 세리와 창녀들을 다 식탁에 거둬들이는 이 깊이를 다 알 수 없는 이 놀라운 신실함이 여러분의 인생을 지탱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하나님 나라에 100% 갈 겁니다. 왜냐하면 지상에서 이렇게 신실하게 붙들린 사람이 많지가 않습니다. 우리가 완전한 사람이 아니라도 죄가 주홍같이 붉을지라도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지탱되고 살아가는 사람이 하나님을 배척하는 완전한 사람보다 더 나은 거거든요. 여러분 모두가 로마서를 잘 논리적으로 이해하셔야 됩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를 먼저 읽고 오세요. 갈라디아서 1장부터 3장을 읽으면 로마서가 잘 이해가 됩니다. 그리고 갈라디아서와 로마서는 창세기의 문법에 지배를 당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분명히 깨달아집니다. 제가 요약본을 다시 올려놓을 거거든요. 제 설교가 힘들고 어려우면 요약본을 읽어보시길 바라고 또 다른 책도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여러분 이번에 로마서 하나를 읽으면은 구약 전체를 다 통째로 압축적으로 공부하는 거거든요.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의 압도적 신실함에 붙들려서 지탱되어 사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로마서의 말씀 속에서 죄와 사망의 법에 감금된 저희 인생을 풀어주시는 해방의 하나님을 만납니다. 오늘도 저희들을 해방시켜 주시고, 저희들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압도적 신실함이 우리를 신실하게 만들 것을 믿는 믿음의 하루를 살게 도와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 들어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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